소설리스트

후생기-43화 (43/142)

43. 마계 전쟁

“따라서 네놈들의 마물화는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몰라도. 아니, 안 먹고 살 수 있다고 쳐도 숨을 안 쉬고는 살 수 없겠지?”

고골리가 잠시 말을 끊고 일행들을 쭉 둘러보았다.

“성지에서야 괜찮겠지만……, 그만 처먹고!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나?”

“그럼 결국엔 마물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브리오티스가 물었다.

“성지에서라면 한 십 년 걸릴걸?”

“이런 니기미! 어쨌거나 십 년 후에는 마물이 된다는 말이잖소?”

롤이 목소리를 높였다.

고골리의 시선이 롤을 향했다.

“그 전에 떠나든지, 아니면 우리처럼 되는 방법이 있지.”

고골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크로아지크의 전설들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가디언이라고 했던가? 저 정체불명의 노인에게 종속된 자들인 것이다.

누구도 이런 곳에서 가디언으로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그때 커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 뜻대로 떠날 수 있는 것이오?”

웅성거리던 공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만큼 관심 있는 주제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고골리의 입에 집중되었다.

“누가 잡기라도 한다던가?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록.”

“그 말은 그대들처럼 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오?”

“껄껄, 당연하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부탁드릴 생각이 없다. 그보다 지금 나간다면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으려나?”

그러면서 고골리의 손가락이 성지 밖을 가리켰다. 즉 나간다면 한 달이나 버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도 짐작했던 바이지만 마계의 문은 분쟁 상태였다. 두 개의 세력이 치열한 공방을 펼치는 중이라 했다. 마계의 문에서 생겨난 토착 마물들과 진짜 마계에서 넘어온 마물들 간의 전쟁이었다. 일행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후 두 세력 간의 전쟁은 더욱 격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다시 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란 말이오?”

고골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롤을 바라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묻나? 그대들 몫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때 커트리안이 발끈하려던 롤을 제지하며 대신 말했다.

“강해지면 되겠군. 충분히 버틸 만큼?”

그 말에 고골리는 입을 모아 ‘오호’ 하는 표정을 지으며 부언했다.

“반년을 버틸 만큼!”

순간 커트리안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반년을 버티면?”

고골리가 흉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더글라스 가문의 애송이로군. 그렇다. 반년을 버틸 수 있다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지.”

순간 모두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모두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조노량도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반년이면 충분하오?”

“대략 반년이면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마물의 땅에서 과연 반년을 버틸 수 있을까?”

맞는 말이었다. 마인들의 부대나 혹은 그 검은 연기들을 만나게 된다면 반년은커녕 하루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그 이상의 존재들이 있다고 했다.

들떴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좌중이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이자 고골리가 밝은 목소리를 내며 위로했다.

“자자, 너무 기죽지는 말도록. 켈커티스의 전사들이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고무적인 소식을 하나 알려 주마.”

잠시 좌중을 둘러본 고골리가 말을 이었다.

“우선 마물화가 진행되면 지금보다 월등히 강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진행되면 곤란하겠지. 정작 경계에 도달하더라도 태양 아래로 나갈 수 없을 테니까. 아주 오염되기 전, 그리고 충분히 강해졌을 때 출발하는 거다. 그때는 마인 나부랭이들이나 하급 흄 정도라면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제대로 된 놈을 만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고골리가 자신의 목을 쓰윽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일행이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마물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무엇이 고무적이란 건지? 결국 강해지더라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말 아닌가?’

조노량의 상념과는 관계없이 대화는 이어져 갔다.

“그들은 어떤 존재들이오?”

커트리안이 묻자 고골리답지 않게 침중한 어조를 말을 꺼냈다.

“많은데? 좋아, 말해 주지.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우선 상황을 먼저 설명해야겠군.”

잠시 생각을 고르던 고골리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던 침략자는 마계 제3군주 워리놈의 군대다. 마왕 아스르부테와 우코르바흐가 이끄는 군단! 지옥궁의 가장 강대한 마왕들 중 둘이 강림했다. 그것도 현신(現身)으로! 이곳의 환경은 마계의 땅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 말에 일행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조노량은 예외라 하더라도 다른 자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마계대전을 거친 지 불과 오백 년, 마왕들에 대한 지식은 아직까지 후세로 전해지고 있었다. 아스르부테와 우코르바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스르부테, 인간과 숫양의 머리를 각기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몸체는 도마뱀을 닮았다고 했다. 다리는 새와 같아서 길고 얇았으나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 내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존재. 마계대전 당시 강림한 기간은 불과 한 달, 그 짧은 시간에 수만의 인간을 살육했다고 전해진다. 이제야 일행이 겪은 기형 마물들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형’과 ‘괴수’는 아스르부테의 상징이었다.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했던 기억들이 새삼 떠오른 탓이다.

인간과 짐승이 녹아 붙고, 짐승과 마물을 이어 붙인 저주받은 노예들을 거느렸다는 아스르부테의 전설을.

반면 우코르바흐는 더욱 무서운 형상으로 그려진다.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여 있는 거인이었는데, 반신 거인족의 수장이었다. 어떤 사물이든 닿기만 해도 불덩이로 변했고, 불붙은 모든 것이 우코르바흐의 몸이 되었다고 했던가? 역시 짧은 시간 강림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존재다.

그보다 고골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그들이 ‘현신’했다는 점이다.

마계의 존재가 이 세계에 현신하기 위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들이 존재했다.

때문에 대부분 소환자를 매개로 강림했다. 이때 문제는 소환 의식을 행할 만큼의 강력한 흑법사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과 소환이 되더라도 본래의 힘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힘은 소환자의 상태에 따라 달랐지만 보통 본신의 힘 중 삼십 퍼센트 내외를 발현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큰 힘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강림이었다.

반면 현신을 한다는 이야기는 본체 자체가 넘어온다는 말이었다. 즉, 본체의 힘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상에 강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주가 직접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군주 자신도 당분간 힘을 잃기 때문에 투쟁과 암투로 점철된 마계에서는 아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 부담에 더하여 현신한 마물 자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마기를 공급받지 못함은 물론 대기 중에 포함된 성력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기로만 충만한 이곳이라면?

소환도 아니고 현신!

“그들이 현신했다면 전쟁이 되겠소?”

평소 잘 끼어들지 않던 쥬시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신기한 일이지. 이곳 마문-고골리는 마계의 문을 늘 마문이라고 칭했다- 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마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에 탄생한 지역이기 때문에 불과 오백 년 안팎이지. 그 어린 마물들이 강대한 존재들을 맞아서 나름 선전하고 있다는 거지.”

“어떻게?”

“마계의 문, 이곳의 지배자는 흄이다. 검은 연기의 형상을 하고 있지.”

조노량 등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목격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마인들도 협공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압할 수 없었던 존재들!

고골리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현존하는 개체 수는 대략 백오십 정도? 한번 줄어들면 절대 늘지 않지. 다른 흄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흄은 마기가 깃든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잡아먹는다. 설사 같은 흄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지. 잡아먹힌 자의 힘은 잡아먹은 흄에게 온전히 흡수된다. 그렇게 강해지는 거지. 나도 들어서 아는 바이지만, 처음의 개체 수는 수만에 이르렀다고 하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힌 후 남은 개체수가 백오십이다.”

모닥불 주위를 제외하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이곳, 회색 대기로는 달빛도 별빛도 스며들지 못했기에 여름 밤 마계의 문은 외부 세계의 그 어떤 밤보다 더욱 짙다.

일행은 불가에 올려놓은 고기가 타들어 가도록 고골리의 말에 집중했다.

“수만의 흄이 백오십에 이르기까지 불과 삼십 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광활한 땅에 단 백오십 마리! 엄청난 혈투였다고 하지. 그런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줄지 않았지. 왜인 줄 아는가?”

누구도 대답할 리 없는 질문. 고골리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마왕급 흄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 마왕은 스스로 ‘하기’라 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리안의 종, 대천사 하기의 이름과 같지. 어쨌든 하기는 수만의 마물들을 잡아먹고 홀로 우뚝 섰다. 마문의 지배자가 된 거지. 그리고 살아남은 흄들을 지배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다른 흄을 먹지 못하도록 금했지. 단 죽은 흄의 마기는 흡수해도 상관없었지.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허용한 거지. 최근에 와서 하기와 그의 4대 호위의 힘은 현신한 두 마왕도 쉽게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그렇다면 이곳도 혹시?”

“아니, 주인의 힘은 더욱 강대하다! 하기는 물론 두 현신 마왕조차 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고골리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렁이는 모닥불에 비친 고골리의 모습은 그 어떤 마물보다 섬뜩했다.

죽음조차 굴복시킬 수 없을 것 같은 전사 고골리가 ‘가디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영혼의 주인!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은 가디언의 특징이었다.

잠시 흥분한 듯 보였던 고골리가 음성을 가다듬고 말을 마쳤다.

“운이 좋아야 할 것이다. 상급의 흄이나 강대한 마족을 만난다면 그대들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반신 우코르바흐의 권속들은 나로서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은 종자들이지. 그대들에게 여신 드로이아나의 행운이 함께하길 바란다!”

침묵이 이어졌다.

왜 하필 지금 전쟁이 벌어졌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구나 할 것 없이 저주의 말들을 터트렸다. 또 누구는 가슴이 내려앉는 한숨과 한탄을 토해 놓았다.

이보다 어떻게 더 운이 나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전쟁 통을 뚫고 여기까지 왔으니 운이 좋았던 것인가? 하지만 살아남았다고 해서 마냥 기뻐만 할 상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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