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42화 (42/142)

42. 회복

조노량은 코끝을 간질이는 생나무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하달까? 풋풋함과는 거리가 먼 냄새다.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매캐한 냄새와 거무튀튀한 색깔, 어쩐지 불결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생나무의 촉촉한 감촉은 싫지 않다.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미라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사제(司祭)가 가볍게 코를 골고 있다.

미라 같았던 이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이 호전되긴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저 모양이지.

그 불쾌한 경험으로부터 어느새 이틀이 흘렀다.

‘피를 너무 흘렸나?’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몸을 움직일 만한 형편도 아니다.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추슬러야 했다.

억지로 가부좌를 틀었다. 새삼 현기증이 올라온다. 억지로 참고 단전에 집중해 본다. 잔뜩 웅크린 기운이 격하게 꿈틀거린다. 다행히 진기가 상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집중하자 꿈틀거리던 진기가 혈로를 타고 움직이지 못해 안달이다. 독맥(督脈)을 따라 천천히 운기를 시도했다. 가도를 달리듯 거침없이 진행한다. 가로로 한 자, 세로로 다섯 자 반,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육체지만 그 안을 달리는 진기는 메마른 대지를 휩쓰는 황하처럼 거대한 줄기를 형성하고 치닫는다. 독맥을 휘돌고 임맥(任脈)을 휘돌아 전신 세맥(細脈)을 거침없이 두드린다. 그 와중에 막혀 있던 세맥 중 일부에 새로운 길을 연다.

세맥 하나가 타동될 때마다 천둥이 울리는 느낌이다. 지난 몇 개월간 얻은 경지가 공고해진다. 나른한 기분이 가시고 혈맥에 힘이 차오른다. 손상된 근육이 꿈틀거리며 이어지고 제자리를 찾아 간다. 한 시진(時辰) 가까이 꼬박 운기에 집중했다. 개운한 느낌이다.

기혈에는 이상이 없었고, 육체적인 손상을 회복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당분간 잘 먹고 쉬어 주면 큰 문제없이 회복될 것 같았다.

거의 죽을 뻔했던 언덕에서의 사투에 이어 쉬지도 못한 채 강행군을 한 데다 미친 늙은이에게 해부까지 당했으니, 이 정도만 해도 큰 다행이다.

어찌 사람을 물건 다루듯 할 수 있단 말인가? 새삼 소름이 돋고 치가 떨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번에 진 빚을 톡톡히 되갚아 주리라고 다짐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두꺼운 가죽옷-옷이라기보다는 포대가 맞겠다- 속에 손을 넣어 복부와 옆구리를 더듬었다. 매끄러운 살결이 만져졌다.

‘신기하군.’

떨어진 체력까지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전에 얻었던 부상들까지 말끔히 나았다. 노인의 힐링 마법 덕에 겉모습만은 멀쩡해진 것이다.

‘병 주고 약 주고인가? 흥! 이 은혜 잊지 않겠다, 늙은이!’

조노량은 허리를 세우고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각 기관이 유연하게 돌아갔다. 힘이 없다 뿐이지 육체적 이상은 없었다.

어느새 점심이 가까워졌는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아침을 먹자마자 내쳐 자다가 끼니때에 맞춰 일어나다니, 진정 밥벌레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막사 문이 열리며 하이오지가 들어섰다.

“일어나 있었네? 때는 기막히게 안다니까?”

하이오지가 너스레를 떨며 제우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투박한 나무 그릇이 들려 있었다.

“사제님, 식사를 하셔야죠?”

“내 거는?”

“죽 먹으려고?”

“아니, 그건 아니고.”

하이오지는 흥, 하고 콧바람을 불더니 제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제님?”

조노량에게와는 달리 하이오지의 목소리는 무척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호흡이 좋지 않은 듯 가르릉거리며 자고 있던 제우스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었는지 제우스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다.

“아, 하이오지 형제님이시군요. 매번 이렇게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조금이라도 드셔야 기운을 차리죠. 제가 특별히 고기를 다져서 먹기 좋게 끓여 왔습니다요.”

‘고기?’

하지만 제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조금 더 쉬고 싶군요. 제 몫은 노리앙 님께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헤헤, 노리앙은 나가서 함께 먹으면 되거든요. 이건 그냥 두고 가려니까 시장해지면 드시지요.”

그 모습을 보고 조노량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준다 해도 사양할 생각이다. 고기죽 한 그릇으로는 잃어버린 체력을 찾을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체력을 회복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날의 치욕을 되갚아 주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했다.

조노량이 막사 밖으로 나오자 제일 먼저 뭔가를 말하고 있는 고골리의 모습이 보였고, 그 뒤쪽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샤마노프와 차츠라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표정이다. 조노량은 하이오지와 함께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굽쇠형 막사 중앙 공터에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꼬챙이에 끼워진 정체불명의 고기들이 지글거리며 기름을 떨구고 있었다.

이미 익숙해진 모습이지만, 숨어 다닐 때에는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일이다.

마물의 고기라지만 불에 구워 먹는 것이 어딘가? 역한 냄새를 참아 가며 생으로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호강이다. 지금 정도의 노린내는 시장기를 자극하는 향기에 가깝다.

비록 이곳이 성지라고는 하지만 정상적인 먹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샘이 하나 있기는 했으나 먹을 것은 밖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 목재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이곳에도 병든 것처럼 하얗게 바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지만-처음에는 하얗게 말라 죽은 나무인 줄 알았다- 절대 훼손하지 말라는 고골리의 엄포가 있었다. 만약 훼손할 경우 그 대가가 목숨이라니 누가 감히 건드리겠는가? 먹을거리든 목재든 어쩔 수 없이 외부에서 조달해야 했다.

사냥을 가거나 목재를 구하기 위해 최소 열 명 단위로 나갔는데, 다시 진입할 때는 처음 진입할 때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했다.

조금 저린 정도라나?

애초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조노량은 그 차이를 알 수 없었다. 고골리의 말로는 몸이 정화된 탓이라고 했다. 자신의 몸은 정화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오염되지 않은 것일까? 다른 기대원들의 모습을 보면 애초에 오염되지 않았던 것이 맞을 듯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육체적 변이도 없었고, 피부색도 정상이다. 하지만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 봐야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노량은 새삼스런 눈으로 막사를 둘러보았다. 정말 경이적인 속도다. 막사는 볼 때마다 쑥쑥 자라서 어느새 그럴듯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작업에 익숙한 포로들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무슨 늘 집만 짓던 목공들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제대로 된 도구도 하나 없는 형편에서 말이다. 벽은 물론 천정까지 씌워졌으니 일부 마감만 지으면 이제는 거의 완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런 조노량을 향해 샤마노프가 꼬챙이 한 개를 건넸다. 맛을 보니 놀의 넓적다리 부위였다. 다른 마물들에 비해 냄새가 약하고 기름기가 많아 먹기 좋은 고기다. 누린내가 심한 개고기와 비슷한 맛이다.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제법 맛이 괜찮은 놈입니다.”

샤마노프가 씩 웃으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다. 우걱우걱 고기를 씹던 크리들이 피식 웃는다.

조노량은 조심스럽게 익은 부위만 골라서 뜯었다. 안쪽으로는 아직까지 살이 붉었다. 적당히 뜯어먹고는 다시 불가에 세워 놓았다.

☆ ☆ ☆

유월, 마계의 문에도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성지에 들어선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안정된 환경에서 충분히 쉬어 준 덕분인지 몸도 충분히 회복되었다. 아니, 무공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한 느낌이다.

조노량은 쩍쩍 달라붙는 통가죽 옷을 들썩이며 땀을 배출했다.

워낙 북쪽에 치우친 땅이라서 그럴까? 타는 듯한 더위는 없었지만, 대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해졌다. 마기가 아니라 습도의 문제니 성지라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여름이라고 해도 특별히 좋은 환경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어둠이 내린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늘 회색빛 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이 찾아오니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밤낮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둥한 게 영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기분 문제인지 몰라도 충분한 운기와 휴식을 해도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닌 느낌이다.

백야(白夜)라 했던가? 일 년에 오 개월을 제외하고는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기에 그저 ‘마계의 문’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뿐이다.

여느 때와 같이 전 기대원이 모닥불 가에 둘러앉았다. 그날 사냥해 온 싱싱한 마물을 함께 나눠 먹는 것이다.

조노량의 앞에도 꼬치에 꽂힌 커다란 넓적다리 하나가 노릿하게 익어 간다. 브리오티스가 슬그머니 손을 뻗자 샤마노프가 눈을 부릅뜬다.

“췻! 노리앙 몫입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샤마노프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브리오티스의 손이 쑥 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겉만 적당히 그슬리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뜯어 먹는다.

중원에서는 무엇이든 푹 익혀 먹는다. 심지어는 물도 끓이지 않으면 마시지 않는다. 물론 조노량은 생으로도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지만, 오랜 습관 탓인지 기왕이면 잘 익은 것이 좋다.

특히 놀의 넓적다리는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 중 최고다. 냄새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마물의 고기답지 않게 연하고 맛있다.

‘전에는 고기를 못 먹어서 안달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기 외에는 먹을 것이 없구나.’

차츠라가 잘 익은 넓적다리를 불에서 꺼내 후후 불어서 조노량에게 건넸다.

차츠라, 크리들, 하이오지 그리고 샤마노프.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조노량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사냥이나 벌목을 나갈 때도 조노량과 같은 조에 편성되기를 희망했고, 평소에도 늘 주변을 맴돈다. 특별히 거북한 일도 아니었기에 늘 함께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식사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몫까지 알아서 챙긴다.

크리들이나 하이오지야 원래 동기 비슷한 관계였기에 그렇다 치고, 또 크리들은 애초에 크로아지크 출신이 아니었기에 친한 사람이 없다고 치더라도 샤마노프는 조노량에게 붙어 있을 이유가 없는 자였다. 물론 두 달이 넘도록 생사를 함께했다고는 하지만 이제 본진에 합류했지 않은가? 그런데도 샤마노프는 늘 조노량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늘 웃고 친절하던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 시비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반응이 까칠했기에 동료들도 이전처럼 편하게 농담을 하지 못했다. 반면에 조노량에게는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었다.

조노량은 한 입 가득 고기를 물어뜯으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뭔가 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비단 샤마노프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비슷했다. 정신적으로 피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지만, 성격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흉포하달까? 그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을 정도다.

그때 고골리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니, 커졌다기보다는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기에 그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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