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해부
헤트르 폰티나. 크로아지크의 영광을 이끌던 삼인방 중 수장 격인 인물이다. 전쟁 중에도 또 포로의 신분으로 나선 검투 중에도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불패의 전사! 그에게는 별명이 없었다. 그에 대한 호칭은 오직 ‘헤트르 폰티나’. 아도니아 시민들조차 존중의 의미를 담아 풀 네임으로만 불렀던 유일한 검투사.
그가 오두막 앞에 앉아 하얀색 검을 다듬고 있었다.
회색 털가죽으로 만든 조끼와 반바지만을 걸친 단출한 모습이다. 일견 오지의 사냥꾼 같은 모습. 드러난 팔뚝과 종아리에는 굵지 않은 근육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폰티나는 고개를 들어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폰티나가 본 노리앙의 인상은 그저 평범할 뿐이었다. 조금 특이하게 생겼고, 제법 강한 전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폰티나는 끌어오르는 살심(殺心)을 애써 눌러야 했다. 알 수 없는 적의! 아니 적의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맞을 것 같다. 뒤집힌 책상을 보는 느낌? 엎질러진 물 잔을 보는 느낌? 딱히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바로잡아야 할 것 같은 강한 욕구가 느껴졌다.
그는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렇다면 당연히 멸해야 할진대…….
폰티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검을 다듬기 시작했다.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 늙은 마법사의 가디언일 뿐이다. 주인의 의지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영혼의 종속자인 것이다.
조노량 역시 헤트르 폰티나의 적대감을 읽었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생전 처음 본 사람일 뿐인데?
조노량은 폰티나를 가늠했다. 일대종사(一代宗師)의 풍모를 풍긴다. 곁눈으로도 본 적이 없으나 구대문파의 장문인이라면 저 정도 기운을 품고 있지 않을까?
격이 다른 존재,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강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조노량은 뒤가 당기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오두막 문을 밀고 들어갔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옜다.”
오두막 안의 유일한 등받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노인이 혀를 몇 번 차고는 오첩도와 단검을 탁자 건너편으로 던져 주었다. 나흘 전에 가져갔던 물건이다. 사흘을 기약했으나 노인은 나흘이 지나서야 돌려주었다.
조노량이 탁자에 떨어진 무기를 갈무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그 검들에 대해서 정녕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냐?”
조노량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하나는 내가 직접 두드려 만든 것이고, 하나는 그냥 얻은 것이오.”
끄응
노인은 신음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뭐, 모른다면 알려 주지. 네 물건들이니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게다. 우선 그 이상하게 생긴 검! 그 검에는 성력(聖力)이 담겨 있느니. 그것도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막강한 것이지.”
이야기의 시작은 부드러웠다.
“음, 단지 성력이 담긴 성물(聖物)이라기보다는 그 뭐랄까? 에잇, 그냥 쉽게 가자. 그 검에는 성력을 지닌 그 어떤 존재가 봉인되어 있다. 즉 그냥 물건이 아니고 에고 소드라고나 할까? 아니, 아니지. 아직 각성한 존재가 아니니 에고가 있다고는 할 수 없고, 아니, 그렇다고 애초에 에고가 있었으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잠을 잔다고 영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그렇잖아? 그런데, 스스로 사고하지 못한다면 그게 어디 에고가……? 그렇지만…… 빌어먹을! 빌어먹을!”
말이 정리가 되지 않는 듯 혼자 벅벅대던 노인은 결국 욕설을 내뱉으며 조노량을 노려봤다.
“한마디로 네놈 검에는 천사 같은 놈이 봉인되어 있다는 말이다. 봉인 자체도 약할뿐더러 이곳의 기운에 반응해 금방 깨어날 것 같아서 내가 이중 삼중으로 다시 봉인해 버렸고!”
잘라 내듯 말하는 말미에 ‘이제 그놈은 꼼짝 마라지. 내가 누군데? 암!’이라고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리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 단검에는 마계의 존재가 봉인되어 있다. 그것도 최소 군단장급, 최대 마왕급에 해당되는 묵직한 놈이다. 역시 철저히 봉인해 놨으니 행여 풀 생각은 말고!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조노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노인네가 제정신인가? 이게 다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아니지, 이런 곳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상적인 노인네는 아니다.
평소에도 호불호(好不好)에 대한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조노량이었기에 노인은 조노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왜 그놈들이 네놈 검에 봉인되어 있는 것이냐?”
“…….”
“몰라? 제길, 단검은 그렇다 치고 그 괴상한 검은 네놈이 직접 만들었다는 말이렷다?”
“그렇소.”
“언제?”
“이 년 전쯤?”
“그렇다면 그 이후에 봉인되었단 말인데. 그 후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느냐?”
“…….”
“검이 특이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느냐?”
“…….”
“대단한 건 아니지만 검에 드래곤 하트의 기운까지 담겨 있던데, 역시 아는 바가 없겠지?”
“…….”
“네놈 정체가 도대체 뭐냐?”
“…….”
“아, 대답 좀 하라니까!”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물었다.
“너 사람이 맞긴 맞는 거냐?”
“물론이오.”
“끄응, 그래 맞다. 내가 봐도 분명 사람이 맞긴 맞는데, 뭐가 석연치가 않아. 무슨 드래곤도 아닌 것이 품고 있는 에너지가……? 에효, 게다가 거물급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봉인해 가지고 다니질 않나.”
“…….”
대답을 하려 해도 본인도 모르는 일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내가 좋은 놈을 줄 테니 그 검들 나에게 넘길 테냐?”
“좋은 검을 준다면야…….”
“넘기겠다고? 그렇게 쉽게? 허! 너, 도대체 뭐냐?”
“…….”
“에잉, 관둬라. 이것도 운명인 것을.”
조노량은 노인의 말에 속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기는’이라며 투덜거렸다. 하긴 이런 오두막에 좋은 검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일단 그 문제는 넘어가고. 두 번째, 네놈 머리를 좀 검색해 봐야겠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라도 잡아 주겠다는 말인가?
“뭐, 별건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느니,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 물론 정신계 마법이라는 것이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은 말고. 내가 이래봬도…… 아니, 아니. 어쨌든 그냥 믿어!”
정신계? 마법?
“그럼 조금 어지럽더라도 움직이지 말고, 거부하는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되고! 말한 대로 행여 위험해질 수 있느니.”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으나 노인의 요구를 거부할 처지는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죽이기야 하겠는가?
조노량은 노인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탁자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머리를 밀쳐 버리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감지도 않은 머리를 디밀어? 거기 의자 끌어다가 앉아!”
노인은 그냥 편안히 앉아서 탁자 위로 조노량의 손을 감싸 쥐었다.
머리를 살펴본다더니?
한동안 기다려도 아무 일도 없자 조노량은 눈을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준비 운동이라도 하는 걸까? 노인은 눈을 꾹 감고 뭔가에 깊이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반면 노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노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노인의 얼굴을 살피던 조노량이 찔끔하여 시선을 돌렸다.
노인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하고는 조노량을 노려보았다.
“네놈, 도대체 뭐냐?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너 뭐하는 놈이야?”
도대체 또 무슨 트집인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지 않은가?
“어째서? 어떻게? 내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거지? 네 이놈, 무슨 수를 쓰는 것이냐?”
여전히 영문을 몰라 하는 조노량을 바라보며 노인은 화난 표정을 하다가 곧 슬며시 웃었다.
“네깐 놈이 그래 봐야, 어디 한번 살펴볼까? 홀드!”
그 순간 조노량은 뭔가 간지러운 기운이 전신을 자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조노량은 급히 몸의 진기를 돌리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거골혈(巨骨穴), 천주혈(天柱穴), 곡지혈(曲池穴)을 시작으로 전신 혈도에 이질적인 경력(經力)이 스며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점혈(點血)의 수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혈도에 대한 지식은 있었다. 흔히 마혈(麻血)이라고 알려진 81개 혈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조노량은 노인을 날카롭게 쏘아본 후, 이 이질적인 기운에 맞서 급히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 저릿하게 마비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반면 노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조노량을 관찰하고 있었다.
“클클, 반항하지 말아라. 네놈이 반항할 정도로 허약한 마법이 아니니.”
진기가 회음(會陰), 장강(長强)을 휘돌아 명문(命門)을 거쳐 대주천(大周天)을 지나기 시작했다.
기사(奇事)가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점혈이라고 하면, 몸의 부분 부분을 마비시키는 혈도 몇 군데를 순서대로 짚어 전체적인 움직임을 막는 것이 상식이다.
아무리 반선(半仙)에 이른 고수라 하더라도 전체 마혈을 한 번에 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럴 필요성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지금 마혈이란 마혈은 모두 헤집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이다.
노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조노량은 전력을 다해 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막강한 잠력(潛力)이 빠르게 혈도를 돌아 오른쪽 비유(脾兪), 곡지(曲池), 호구혈(虎口穴)을 관통했다. 혈도를 막고 진기의 흐름을 방해하던 기운이 장강(長江)처럼 몰려드는 격류에 휘말려 오래된 둑처럼 터져 나갔다. 강제로 한 군데씩 혈도를 타동(打動)할 때마다 내부로 극심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오른팔을 거친 진기의 물결이 다시 왼팔을 휘돌아 하반신으로 몰려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조노량의 얼굴도 점차 일그러져 갔다.
아무리 무림인이라지만 하급 무사였던 조노량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다. 진기를 이용해 막힌 혈도를 뚫어 낸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으나 실제로 해 보긴 처음이다. 혈도를 뚫을 때마다 천둥소리가 고막을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나 조노량은 남은 혈도를 뚫어 낼 때까지 움직임을 자제했다. 혈도가 뚫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근육들을 억지로 붙잡아 묶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일 것이다.
“무슨 땀을 그렇게 흘리나? 너무 애쓰지 말라는데두. 쯧쯧.”
온몸의 근육이 푸들거리는 와중에도 조노량은 해답 없는 의문을 몇 가지 떠올리고 있었다.
첫 번째 의문은 상대의 점혈 수법이 그다지 고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혈도를 막은 상태로 뭉클거리는 이 이질적인 경력은 의외로 허약했고, 또 그 침투가 깊지도 않았다.
두 번째 의문은 손을 안 대도 전신 81개 마혈을 한 번에 제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였다. 지공(指功)으로 일가를 이룬 초절정의 고수가 온다면? 아니, 그래도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이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다. 81개 혈도를 손도 안 대고 점혈할 수 있는 초절정 고수임에도 그 점혈 수법은 상식 이하라니?
그 외에도 노인이 어떻게 점혈의 수법을 알고 있는가와 상대가 막힌 혈도를 뚫기 위해 노골적으로 운기를 하는데도 웃고만 있다는 점 등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몇 군데만 갈라 본 후에 원상태로 복구해 줄 터이니.”
식은땀 한 방울이 턱 끝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이제 왼다리의 공손혈(公孫穴)과 축빈혈(築賓穴)만 남은 상태다.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의 점혈 수법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정상적인 운기보다 속도가 조금 늦긴 했지만 일주천(一周天)을 끝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혈도를 풀 수 있었다.
그 순간 복부 쪽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상당량의 출혈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눈알을 굴려 노인을 바라보니 노인은 여전히 탁자 맞은편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칼이나 다른 도구를 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가슴 쪽으로 뻐근한 격통이 밀려들었다. 노인은 여전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호오, 잘 참는군? 어디, 안을 들여다볼까.”
노인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의자와 탁자를 치웠다.
쿵!
마지막 공손혈이 충격과 함께 뚫렸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좀 풀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혹시라도 움직임에 지장이 있다면 그건 운명일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이제는 모험을 할 시점이었다.
조노량은 거리를 가늠했다. 두 걸음.
탁자가 치워진 터라 장애물도 없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오첩도보다는 단검이 유리했지만 단검은 발목 춤에 갈무리했기에 역시 오첩도를 택했다.
노인은 무언가 흥미로운 물건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그 순간 오첩도의 은빛 섬광이 둘 사이의 공간을 메웠다.
마치 조금씩 차이가 나는 두 개의 그림이 겹쳐진 것처럼 한 호흡 만에 모든 움직임이 끝나 있었다.
조노량의 얼굴이 노인의 왼쪽 얼굴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그 사이로 오첩도의 손잡이 쪽 검신(劍身)이 노인의 왼쪽 목덜미에 위치해 있었다.
검인(劍刃)과 달리 날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쪽 검신이었지만, 노인의 늘어진 목 가죽을 베어 내기엔 충분했다.
노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도, 도,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노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만 굴려 조노량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해치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허, 이럴 수가? 내 마법이 깨져?”
“닥치시오! 난 당장이라도 당신 목을 끊어 버릴 수 있소.”
“네놈이나 조용히 해라.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검을 겨눈 조노량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노인네가 지금 제정신이란 말인가? 누가 누구를 위협한단 말인가?
☆ ☆ ☆
무사라면, 최소한 관이라도 보고 나서 눈물을 흘려도 흘리는 법!
아무리 노인이 대단한 존재라 하더라도 지레 겁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현재의 상황은 자신에게 월등히 유리했다. 더구나 시간을 끌면 부상당한 자신이 불리해질 터. 복부와 가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이미 마루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자칫 내장이라도 흘린다면 치명적이었다.
뒷일을 생각할 여가가 없었다. 오첩도에 어린 검기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노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목덜미에 느껴지는 살기가 폭증하자 노인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진정 사람을 귀찮게 하는구나. 저리 가거라.”
쩡!
조노량은 생각할 틈도 없이 오첩도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고 생각했다.
‘뭐지?’
조노량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찡 하는 소리가 난 것도 같고 충격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져 초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무사로서의 본능이 오첩도를 휘두르게 만들고 있었지만 휘두른다기보다는 흐느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끝에야 조노량은 현재의 상황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었다.
아직도 사물이 두셋으로 분리되어 보였지만 자신의 시야에 잡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파악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오두막의 천장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천장을 향해 오첩도를 흔들고 있었다.
철그렁, 오첩도가 손아귀에서 빠져 나갔다.
조노량은 힘겹게 몸을 뒤집어 바닥을 짚었다. 몸을 뒤집는 것만도 천 근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힘들다.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켜들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후들거리는 무릎 탓에 상체만 반쯤 들었다 놨다 하며 건들거릴 뿐이었다.
결국 바닥에 코를 찌며 엎어지고 말았다.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오두막의 입구가 보였다. 팔꿈치로 버티며 목을 꼬아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우두커니 서서 꿈틀거리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첩도를 목덜미에 대고 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노인이 입을 열렸다.
“홀드.”
전신으로 파고드는 이질감. 낯설지 않다.
그리고 노인의 손이 귀찮다는 듯이 슬쩍 휘둘러졌다.
천근만근이나 된 듯 헐떡이던 몸이 너무도 수월히 뒤집어졌다.
흩어진 내공을 추스를 여력도 없었다. 빳빳하게 굳어진 몸은 작은 손짓 하나 허락하지 않았다.
노인이 뚜벅뚜벅 걸어오는 모습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짜증 섞인 노인의 시선이 조노량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 갈라진 복부와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두둑, 갈비뼈가 벌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가슴이 거침없이 헤집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어붙은 칼 면이 피부에 달라붙었다가 피부를 찢으며 떨어져 나가는 느낌, 불덩이가 쑥 들어와 배 속에서 요동치는 느낌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 고통보다는 불쾌함이 앞섰다.
추하고 더러운 손이?
그 불쾌한 느낌 탓에 멍해졌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자 조노량은 통증보다 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산 채로 해부되고 있는 것인가? 가슴이 열린 것은 알겠으나 과연 그 아래가 붙어 있기는 한 것일까? 장기를 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려 해도 목 아래는 이미 철저히 마비되어 있었다.
조노량은 다른 의미에서 정신을 놓아 가고 있었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그랬을까? 한참을 집중하던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 터무니없는? 인간이 맞는 주제에!!!”
주제에? 무어라 하는가? 내가 언제 인간이 아니라고 했던가? 제멋대로 판단하고 남의 몸을 성의 없이 헤집은 주.제.에?
“그만 됐다. 힐링! 어, 어?”
노인이 다시 뭐라고 외치다 말고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당황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무어야? 무에 이리 빨라? 내 힐링 마법이 이토록 훌륭했는가? 너 혹시 트롤이냐?”
노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친 늙은이가?’
“어이쿠 골이야. 이놈이 끝까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구나? 이 정체불명…… 괴물 놈아! 너 인간이 맞는 게냐? 아니, 맞기는 맞는데? 도대체가…….”
조노량은 정신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마당에 노인의 행동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있겠는가.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스스로 생각해도 치료가 불가능한 부상이었다.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던 이유가 이런 미치광이 노인의 해부 재료로 죽어 가기 위함이었다니?
“빌어먹을! 그만 나가 보거라.”
혼미해지던 귓가로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누구한테? 나한테 하는 말인가? 이 꼴로?
“사지 멀쩡한 놈이 언제까지 누워 있을 참이냐? 어서 나가 보래도.”
조노량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들렸다? 어느새 점혈이 풀려 있다. 뿐만 아니라 처참하게 찢겨졌으리라 생각했던 몸에 힘과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조노량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산산이 찢겨져 양 옆으로 흩어져 있는 옷들과는 달리 손에 짚이는 것은 끈적한 액체와 굴곡 없는 맨살이었다.
다시 위아래로 더듬거리며 살펴봐도 흘러내린 내장은커녕 벌어진 상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숙여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질펀한 피가 가슴뿐만 아니라 마룻바닥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조금 전에 느낀 통증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씩 활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찢겨진 옷가지를 걷어 내 가슴과 복부의 피를 닦아 냈다. 손이 떨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강하게 문댈 수는 없었지만 몇 번이나 애를 쓴 끝에 멍울져 뭉친 핏덩이를 밀어낼 수 있었다.
난자되어 있으리라 여겼었는데, 심하게 긁혀서 속살이 반쯤 뒤집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처뿐이었다.
조노량의 시선이 노인을 향했다. 고통이나 분노가 아닌 의문을 담은 시선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듯 흐리고 멍한 눈빛이었다.
“넋 빠진 놈!”
조노량의 시선을 느끼자 노인은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명백한 축객령(逐客令)이다.
축객령이 반가워 본 적은 처음이었다. 조노량의 눈빛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진정, 살려 주는 것인가?
조노량은 몇 번 허청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지러웠다. 무릎이 흔들거렸다. 허벅지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사물의 색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흐렸다. 중심을 잡기 힘들다.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 왔지만 억지로 참아 냈다. 지금 토해 내면 내장이 함께 토해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문을 향해 걸었다. 나가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석이라도 붙은 듯 발이 바닥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아가기 위해서 억지로 힘을 줄 때마다 발바닥이 조금씩 끌리며 따라왔다. 한 번에 한 뼘? 아니, 반 뼘씩 풍 맞은 노인처럼 아주 천천히 발을 끌었다.
그나마 나아가기 위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던 문고리가 손에 닿았다. 조노량은 끊임없이 떨어대는 턱을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심통이라도 난 표정으로 아까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문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다.
밭게 터져 나오는 호흡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숨을 참았다. 그리고 문에 머리를 기대고 떨림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문고리를 잡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떻게 된 것일까? 분명히 상황은 자신에게 월등히 유리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모든 세포가 한꺼번에 망치에라도 맞은 듯 극심한 통증과 저릿하게 마비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전혀 인지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조노량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문을 밀었다. 열리지 않았다. 노인을 바라보았다.
“덜떨어진 놈! 당겨.”
‘아, 맞다.’
부끄럽거나 머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삐거덕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피로 젖은 맨살을 자극해 왔다. 이명(耳鳴)으로 웅웅거리던 머리가 조금쯤 맑아지는 느낌이다.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왔다. 발을 끌며 문을 나섰다.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나선 조노량의 눈에 여전히 하얀 검을 손보고 있는 헤트르 폰티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노량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잘 갈무리된 기운과 함께 느껴지는 적의,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상대를 한껏 긴장시키는 기운이다.
그러나 긴장할 필요 없다.
노인이나 저자나 조노량에게 있어선 까마득한 존재들. 대비한다고 해서 대비가 되는 존재들이 아니다.
폰티나는 손질하던 검에서 눈을 떼고 조노량을 힐끔 바라보았다. 조노량의 시선과 사내의 시선이 허공중에서 얽혔다. 뽑아서 휘두를 힘도 없었지만 손이 절로 오첩도로 향했다.
피식
폰티나는 조노량의 행동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비웃음을 날리며 다시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당랑거철(螳螂拒轍).’
멀쩡하다 해도 상대가 안 될 판에 처참하게 망가진 몰골로 검을 들어 어쩌겠다고? 하지만 이대로 장난감 취급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제현의 비열한 삼류 건달 조노량은, 약하다고 그냥 당하고만 있는 자가 아니다. 더구나 이제는 자신 스스로도 얼마나 강해질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연(奇緣)을 만났다. 이 세계! 자신의 선천지기와도 흡사한 기운이 천지 사방에 가득 찬 이 세계! 이 세계 자체가 기연이었다. 장부의 치욕은 십 년을 기다려서라도 갚아야 할 빚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지금은 참아야 했다.
대신 조노량은 폰티나가 다듬고 있는 검으로 눈을 돌렸다.
사내가 검을 손질하는 방법이 특이했다. 작은 단검으로 마치 나무칼을 깎듯 검 면을 스치고 있었다. 한동안 바라보던 조노량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발을 끌며 돌아서는 조노량의 귀에 사내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