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성지(聖地)
상대는 트롤과 회색 오크, 놀, 고블린 등으로 이루어진 진영이었다.
숲속에서 딱 마주친 두 무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돌했다. 한쪽은 태생적으로 호전적이었고, 한쪽은 객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호전적인 몬스터라지만 호전성만으로 승리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고골리나 숲속에 숨어든 클라흐가 나설 것도 없었다.
고골리는 뒷짐을 지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난 좀 쉬고 있어도 되겠지?”
엄청난 덩치의 기형 마물들을 상대하던 일행들에게도 이들은 손쉬운 상대였고,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예니에프가 상대하고 있는 트롤이나 오우거 정도는 되어야 마물들과 비슷한 덩치였고, 놀이나 고블린은 오히려 인간들보다 크기가 작았다.
팔뚝이 통째로 잘려 나간 트롤이 울부짖으면서 반대편 팔을 크게 휘둘러 예니에프의 오른쪽을 노렸다.
예니에프는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트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로서 트롤의 타격점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버렸다.
트롤의 품 안으로 파고든 예니에프가 글라디우스로 연거푸 트롤의 복부를 난자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트롤의 왼쪽 뒤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고블린은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예니에프의 옆구리를 노렸다. 덩치도 작고 방어력도 형편없는 놈들이지만 칼날보다 날카로운 네 가닥의 손톱과 독침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무기였다.
난전이란 것이 그렇다. 전면의 적보다는 측면과 배후의 적이 더 무서운 법.
막 오크 한 마리를 베어 넘긴 조노량은 그 모습을 보며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이 튀어나온 것이 워낙 급작스러웠고, 트롤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예니에프로서는 고블린의 위치 자체가 사각이었다.
조노량은 지체 없이 고블린을 향해 단검을 집어 던졌다.
예니에프를 향해 손톱을 뻗어 가던 고블린의 어깨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고블린은 뒤로 한 바퀴 재주를 넘더니 단검을 어깨에 꽂은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예니에프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찡긋 윙크를 보내 왔다. 하긴 아무리 급작스러웠다고는 하나, 예니에프가 고블린 따위에게 당할 사내는 아니다.
조노량은 어깨에 단검을 매달고 달아나는 고블린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까운 단검 하나만 잃은 것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무기였다. 대부분 오오라를 다룰 줄 아는 전사들이기에 무기들이 남아나질 않았다. 질 나쁜 쇠로 만든 무기들이 그들의 오오라를 버텨 내지 못하는 것이다.
본진과 합류할 때까지 보유했던 네 개의 단검 중 두 개는 다른 자들에게 나눠 준 상태였기에 이제 조노량의 수중에는 붉은 빛이 도는 단검 하나만 남았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무기는 아니지만, 고기를 다듬거나 뭔가 수리해야 할 때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가끔 위급한 상태에서는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으니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참 놀라운 일이다. 마계의 문에서 마물들을 힘으로 쫓다니?
하지만 전멸을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마물들이 몰려든다면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오크나 고블린에게선 적당히 맛있는 부위를 베어 내고, 연한 육질에 맛도 좋은 놀 몇 마리는 통째로 들쳐 메었다. 서두른 덕분에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니 일행 모두 도살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속보(速步)로 반나절쯤 더 전진하고서야 일행은 빽빽한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모두들 넋을 잃고 말았다.
“아!”
조노량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엄청난 크기로 펼쳐진 우윳빛 돔. 반투명한 우윳빛 막이 회색 대기를 당당히 가로막고 있었다. 막이 얼마나 넓은지 눈이 닿는 곳은 모두 뽀얀 빛이다. 저렇게 거대한 것을 그동안 어째서 볼 수 없었을까?
“껄껄, 다 왔다.”
얼이 빠진 일행들 앞에 선 고골리가 웃는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리 알아 둬야 할 사실이 있다.”
잠시 뜸을 들이며 기대원들을 바라보던 고골리가 다시 입을 열였다.
“이곳은 마문의 유일한 성지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대들은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무척 고통스러울 테고, 어쩌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대들 자신의 운명이다.”
뭔가 알쏭달쏭한 말이다.
조노량은 물론 말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커트리안조차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알아듣게 설명해 줄 순 없겠소?”
“훗, 더글라스 가문의 애송이로군.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빠를 것 같네만, 굳이 원한다면 조금 설명해 주기로 할까?”
“그래 주면 고맙겠소.”
한 세대 전에도 최고라 불리던 고골리였다. 광전사도 그 앞에 서면 쭈뼛거리기 일쑤였건만, 커트리안은 당당했다.
“간단히 말하겠다. 이곳은 성지(聖地)다. 마계의 문에서 마기가 미치지 못하는 유일한 해방구지. 그런 만큼 마기에 물든 자들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갈 경우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움직이기는커녕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기와 성력은 친하지 않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고골리가 말을 이었다.
“그대들 중 일부는 죽을 것이다.”
그 말에 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그럼……?”
“아는 얼굴이군. 자네 이름이 뭐였지?”
“세스카의 롤이오.”
“용케 살아 있었군. 그래 롤, 제군들은 이미 마기에 물들어 있다.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죽거나 혹은 마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마계의 문에 묶인 영혼이 될 테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곳, 이곳이 마지막 선택이다.”
커트리안을 비롯한 모두가 침음성을 흘렸다.
마물화, 낙오되어 있던 조노량 일행을 제외하고 본진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미 상당수 인원들이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껏 달려라. 견디지 못해 다시 뛰어나오지 못할 만큼! 최대한 깊숙이 들어가라. 진입하지 못하거나 되돌아 나오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견디지 못한다면, 결국 마물로 살아가야 할 테니까!”
쭈뼛거리던 롤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얼마나…… 견뎌야 하는 거요?”
“그건 모르지. 사람마다 다르거든.”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커트리안이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로군. 진형을 정비한다.”
커트리안의 나지막한 말 한마디에 스마르를 비롯한 간부급들이 모두 나서서 소란스럽게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진형을 정비하라! 뭣들 하는 건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나?”
“죽고 싶나?”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커트리안이 고골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낙오하거나 진입을 거부하는 자들을 부탁하오.”
고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열은 3열 종대.
전투를 위한 대형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행군 대형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간부급들이 뒤쪽에 배치되었다는 점이었다.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전력으로 달린다.”
이제 저곳에만 들어간다면 마기로부터 안전하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마물화가 상당히 진행된 자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일부는 겁을 먹었고, 일부는 과도하게 흥분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장했다.
다른 간부들과는 달리 스마르는 대열의 맨 앞에 섰다.
언제는 앞에 서는 자! 커트리안이 뒤에서 지휘를 한다면 그의 명을 선두에서 이행하는 자가 스마르다.
커트리안이 고갯짓을 하자 스마르는 쥐고 있던 글라디우스를 허리춤의 걸쇠에 장착했다.
그가 사용했던 클레이모어는 보이지 않았다. 오오라를 견디지 못하고 망가졌든, 전투 중에 잃었든 지금 그의 손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글라디우스만이 남았다.
하긴 정찰을 맡았던 자신들과는 달리 석 달 가까이 격렬한 전투를 벌여 온 본대가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있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스마르가 글라디우스 대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꿀꺽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스마르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들 전사의 긍지를 잃지 말기 바란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
모두들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 함성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스마르의 오른손이 힘차게 내려졌다.
마치 처절한 전투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처럼 눈을 뒤집고, 주먹을 부여 쥐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와아!”
조노량도 머뭇거리는 앞사람의 등을 밀며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떠밀린 앞사람도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제우스를 들쳐 업은 쥬시아누스가 달렸고, 롤이 광분하여 앞사람을 후려치며 재촉했다. 맨 뒤에서 대열을 관조하던 커트리안도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부터 차례대로 경계를 관통했다.
쾅!
샤마노프는 움찔 놀라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경계를 넘는 순간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고막을 때렸고, 몸의 모든 세포가 동시에 비명 소리를 토해 놓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들리지 않았다. 인지 가능한 모든 기관이 마비되었다.
그 순간 조노량이 샤마노프의 하나 남은 오른팔을 쥐었다. 샤마노프는 입을 한껏 벌리고 고함을 질러댔지만 귀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노량의 손에 이끌릴 뿐이었다.
달린다는 행위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으니 중심이 잡힐 리 없다. 샤마노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팽개쳐지듯 바닥을 뒹굴었다. 이미 이성은 간 곳이 없었고, 사고는 마비되었다.
샤마노프는 소금밭에 뛰어든 지렁이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활처럼 휘어졌던 등이 새우처럼 웅크려 들었다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조노량 역시 한껏 긴장하고 달리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찾아오지 않았다.
언제일까? 지금? 조금 더 있다가?
곧이라도 고통이 시작될 것 같아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가 밟아지고 정신이 상쾌해졌다. 회색빛 안개가 걷힌 듯 모든 사물이 명징하게 다가왔다.
조노량은 던지듯 바닥에 몸을 뉘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바짝 웅크리고 인상을 쓰면서 실눈을 떴다.
4년에 가까운 수용소 생활로 굳어진 본능이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튀지 말아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통 속에 버둥거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샤마노프는 손톱이 빠져라 바닥을 긁어대며 경계 쪽으로 기었다. 손톱이 빠져 붉은 피로 얼룩지고 있었지만 그 정도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결사적으로 기었다. 세포가 올올이 터져 나가 종국엔 육체마저 붕괴되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기었지만 풀어진 근육은 육신을 견인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가 결사적으로 전진한 거리는 불과 일 미터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순간 쥬시아누스가 벌떡 일어났다.
평소 수련의 결과인지, 유독 정신력이 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쥬시아누스는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넝쿨로 칭칭 동여맨 그의 등에는 여전히 제우스가 묶여 있었다.
쥬시아누스의 얼굴은 끔찍했다. 굵은 지렁이처럼 돋아난 힘줄과 흰자위만 드러난 눈가엔 눈물처럼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노량은 그가 되돌아 뛰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위험하다! 저 정도 정신력이라면 경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조노량의 시선이 경계 밖을 향했다. 고골리의 주변으로 몇 구의 시신이 뒹굴고 있었다. 진입을 거부했거나 깊숙이 진입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간 자들일 것이다. 만약 쥬시아누스가 이대로 경계 밖으로 나간다면, 그 역시 저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안 돼. 어떻게든 막아야 돼!’
☆ ☆ ☆
다급해진 조노량은 과장되게 몸부림을 치며 쥬시아누스의 발목을 걷어찼다.
쿵!
쥬시아누스의 거구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성을 상실한 쥬시아누스로서는 아무런 방어 동작도 취할 수 없었다. 아니 무언가 장애물이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쥬시아누스는 놀랍게도 세 번을 일어났고, 세 번을 쓰러졌다. 다른 자들에 비한다면 정말 놀라운 정신력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를 마지막으로 그 역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던 쥬시아누스도 몸부림을 치며 온몸을 할퀴어댔다. 단단한 가죽 갑옷이 헝겊 조각처럼 갈라져 나갔다. 손톱이 뒤집혀 피를 뿜어냈다.
“크허헝!”
끔찍한 괴성을 토해 놓으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지만 더 이상 일어설 힘은 없었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자 쥬시아누스는 미친 듯이 울부짖다가 웅크린 채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노량의 눈이 제우스의 눈과 마주쳤다.
쥬시아누스의 몸부림 탓인지 흙과 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으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또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온전한 눈빛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마치 당신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그 눈빛에 조노량이 움찔 놀라자 제우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느낌이다.
그때 제우스의 뒤쪽에서 몇몇 강자들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낙오자들을 처리하고 들어선 고골리의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에 다시 고꾸라져 버렸다.
그때 커트리안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모습을 본 고골리가 다른 자들에게처럼 발길질을 날리려 하자 커트리안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들어 제지했다.
그 모습에 고골리는 의외라는 듯 얌전히 발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도 더글라스의 종자라 이 말이군. 하여간 대단하다고 말해 주지. 껄껄.”
고통 받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긴 것 같은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시간가량 흐르자 일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는 쓰러진 채로 기절해 버렸고, 일부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헉헉,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뭐야?”
롤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긴 숨을 토해 냈다.
늘 괄괄했던 그의 음성에는 한 줌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니기미.”
예니에프도 피가 섞인 침과 함께 욕설을 뱉어 냈다.
쥬시아누스 역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입도 벌리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번 고통은 참아 내기 힘들었나 보다. 그 고통의 여운만으로도 일그러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껄껄, 그래 봐야 두어 달 남짓 헤맨 놈들이 엄살은?”
“…….”
“우린 반년이 지나서야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고골리의 말에 모두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마기에 노출된 지 두어 달. 그 상태에서도 이런 고통을 받았는데, 그 두 배를 넘게 노출되었던 자들이라면? 허! 그 고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이곳이 성지인지 알겠지? 마물들은 절대 이곳에 들어설 수 없다. 왜? 죽을 테니까.”
고골리는 은밀한 미소를 지은 후 말을 이었다.
“이제 제군들은 받아들여졌고, 안전하다.”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노량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원채 찢어지고 헤진 옷에다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 꾸밀 필요도 없었다.
‘나는 왜?’
의문이 일었으나 상황도 모른 채 의문을 풀자고 나설 수도 없다.
일행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후에야 주변을 돌보기 시작했다.
밖에서 고골리에게 토막 나 뒹구는 머리가 세 개, 결국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숨이 멎은 자가 넷. 다시 일곱 명의 동료가 희생된 것이다. 전체 인원의 이 할에 해당하는 숫자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한 자가 다섯이다.
그런 형편을 이해했는지 고골리가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잠시 쉬었다가 그분을 뵈러 갈 것이다.”
털썩!
그의 말에 롤이 뒤로 넘어가며 입을 열었다.
“쪽팔리게……, 이게 무슨 꼴인가? 그나저나 염병 맞게 깨끗한 공기군.”
“그러게요, 니기미!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여기에 새소리라도 좀 들린다면 여느 들판에 누워 있다고 해도 믿겠네요. 저 빌어먹을 시궁쥐 같은 하늘만 아니라면…….”
예니에프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때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 사내가 몸을 드러냈다.
“워프?”
가까이 있던 차츠라가 나지막이 외쳤다. 퍼졌던 자들이 날카로운 예기(銳氣)를 발하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고골리가 무기를 내리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타난 자는 회색 로브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용모를 파악하기 힘들었으나, 로브 아래로 늘어진 하얀 수염으로 보아 적지 않은 나이로 짐작되었다. 또한 펑퍼짐한 로브 탓에 몸매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다지 큰 키는 아니었다.
로브를 입은 사내가 나타나자 고골리가 깊숙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클라흐 역시 몸을 드러내며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사내는 고골리와 클라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노량을 향해 다가왔다.
“네놈은 누구냐?”
다짜고짜 내뱉는 질문에 조노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인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뜸 자신에게만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 설마 이름을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고골리! 애들 데리고 천천히 오거라. 난 잠시 이놈과 할 말이 있다.”
고골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머리를 숙여 보임으로써 복종의 의사를 대신했다.
고골리와 클라흐라는 전설을 들으며 커 왔던 전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롤은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 턱이 빠져라 놀라고 있었다. 아니 황당하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롤이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일행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조노량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노량 역시 무슨 영문인지 몰랐기에 멍청한 표정으로 답을 못하고 있자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조노량에게 한 걸음 다가들며 말했다.
“일단 가자.”
그러고는 조노량의 어깨를 짚자 둘은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노인이 등장하고 사라지기까지 그야말로 창졸간(倉卒間)이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동료 하나가 납치되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낡은 가구 몇 가지만 대충 놓여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조노량은 워프 울렁증 때문에 미식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 노인은 또 뭔가?
“누구…….”
다시 질문을 하려는 노인의 말을 끊으며 조노량이 대답했다.
“난 조노량이오.”
그 말에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두건을 벗어 내며 조노량을 노려봤다.
대략 예순 전후? 강퍅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특히 거의 없다시피 한 눈썹이 노인을 무척 고집스럽게 보이게 했다.
노인의 좁아진 눈매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조노량을 뚫어 버릴 듯했다.
“네놈의 이름 따위는 관심 없느니! 정체를 물었다.”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끌려왔다. 거기에 더해 마치 죄인을 다루듯 추궁하고 있지 않은가? 조노량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글쎄, 내가 나지 누구겠소? 평범한 인간일 뿐이오.”
하지만 노인은 조노량의 이름뿐만 아니라 기분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의 생각에만 골몰했다.
“인간이라고? 하긴 드래곤은 확실히 아니지. 그 정도도 못 알아볼 내가 아니니까. 그런데 어째서 몸에 그런 기운을 담아 둘 수 있는 거지? 누군가의 가디언인가? 아니, 아니 일단 그 검들은 뭐지?”
연이어 질문이 쏟아져 나왔으나 알아들을 소리를 해야 답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몸에 기운을 담아 두고 있다는 말에는 잠시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기로 했다.
“무슨 소리요? 이건 내 검이오만?”
하지만 대답이 초점이 맞았는지 노인이 반응했다.
“흥, 내가 네놈 때문에 일부러 마중까지 갔을 거라 생각하느냐? 곧 있으면 제 발로 걸어올 것인데? 네놈이 간직한 기운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한 일이지만……. 어흠, 어쨌거나 내가 서둘러 간 이유는 바로 이것들 때문이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노량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오첩도와, 이제는 유일해진 단검이 노인의 손으로 옮겨져 버렸다.
멀쩡히 눈을 뜬 채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조노량은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육갑하네. 덤비기라도 할 셈이냐?”
전혀 경계를 하지 않는 시큰둥한 목소리다. 이에 머쓱해진 조노량이 자세를 풀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어디에서 난 물건들이냐?”
특별히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획득한 물건들이었다.
‘도무지 원.’
“도는 내가 만든 것이고, 단검은 누가 선물해 준 거요.”
“뭐? 이 검을 네가 만들었다고? 그리고 선물받아? 허허!”
한참 동안 눈동자를 굴리던 노인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냐?”
“뭘 말이요?”
노인은 혼자서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진심인 게로구나. 이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다시 한동안 고심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 무기들은 한 사흘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주겠다. 불만은 없겠지? 있어도 어쩔 수 없고.”
무척 불쾌한 일이었으나 조노량은 본능적으로 이 노인이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강대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노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세는 중원은 물론 이곳에서 만났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의 실력으로서는 노인의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하릴없이 끄덕이는 수밖에. 그나마 돌려준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빌어먹을! 이곳에서도 마물의 살을 씹어야 할 줄은 몰랐네.”
임시 막사를 짓다가 잠시 짬을 낸 롤이 육편을 우물거리며 투덜거렸다.
절뚝이고, 업히고, 부축하며 느릿느릿 걸어왔다. 패잔병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다. 하얗게 말라 죽은 나무가 드문드문 위치한 나지막한 언덕. 그 마지막 자락에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고, 그 앞으로 너른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 하루를 죽은 듯이 자고 나서 며칠째 막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어디요?”
예니에프가 경계 밖에서 잘라 온 통나무를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롤이 옆구리에 찬 가죽 물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꺼억, 그건 그렇지. 하, 달고도 시원허다. 조옷타!”
예니에프도 롤의 물통을 건네받아 시원하게 마셨다.
“쥬시아누스 님?”
함께 막사 모퉁이의 아귀를 맞추고 있던 쥬시아누스와 조노량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거 어쩌죠?”
예니에프는 반 토막이 난 글라디우스를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마도 나무를 베다가 부러트려 먹은 것 같았다. 예니에프 같은 고수가 겨우 나무를 베다가 검을 부러트려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원래 예니에프가 사용하던 무기는 부서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 후 손에 든 것이 바로 이 글라디우스였다. 양산형으로 대충 만든 글라디우스가 그의 오오라를 지금껏 버텨 준 것만도 기특할 지경이다.
“이걸 쓰도록.”
쥬시아누스가 건넨 것은 크고 투박한 단검이었다. 비록 다른 단검에 비해 크다고는 하나 단검이 도끼나 글라디우스를 대신할 수 없는 법.
“에? 이걸로 뭘 하라고요?”
“그거밖에 없어.”
“끄응.”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조노량이 급하게 몸을 돌리며 우측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언제 나타났는지 클라흐가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만 빼 놓고는 온통 검은색 털가죽으로 둘러싼 모습이다. 그의 세모난 얼굴과 세모꼴 눈이 조노량을 향하고 있었다.
고골리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모다.
“그분께서 부르신다.”
마물들보다 더 음침한 목소리. 자연스럽지 못한 울림을 내포한 목소리에 절로 소름이 돋는다. 절대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음성이다.
조노량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클라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서 가 버렸다. 주변 경물에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이다.
말없이 클라흐의 등을 바라보던 조노량이 언덕을 바라보았다.
초라한 오두막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휴.’
조노량은 나지막이 한숨을 쉰 후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