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오염
워낙에 터무니없는 요구였기에 조노량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제우스 곁에 자리를 잡고 간단히 운기를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전에처럼 몸이나 따뜻하게 해 주자는 의도였다.
조노량은 커트리안을 잠시 응시하다가, 오른손으로는 제우스의 이마를 짚고 왼손은 가슴에 대었다. 운기 덕에 조금 회복된 기력이 양 손바닥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 순간이었다. 제우스의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펄떡 뛰더니 경련하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반응에 깜짝 놀란 조노량은 고개를 뒤로 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인가? 내가 저를 뭐 어쨌다고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이냐?’
제우스의 과도한 반응에 당황한 조노량은 얼른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제우스의 몸은 여전히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난감한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았다.
미라 같은 모습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숨어 있었는지, 제우스는 한동안 격렬하게 몸을 떨어대었다.
그 모습을 커트리안은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크리들이 급하게 다가앉아 경련하는 제우스의 상체를 붙잡고 안정시키려 애쓰고 있었지만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채 경련하고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저런 경련은 극도로 쇠약한 육체가 감당한 만한 것이 아니다.
조노량은 팔을 뒤로 짚고 엉거주춤 물러나 앉았다. 그러고는 제우스의 경련이 천천히 잦아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마치 꺼져 가는 촛불을 바라보듯이 편하게 앉지도 못한 채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한없이 길어질 것 같은 제우스의 경련이 서서히 멈추고, 고통에 얼룩져 있던 얼굴에 평온이 찾아 들었다.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로 음울한 분위기가 번져 갔다. 커트리안이 괜찮다는 듯 조노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잠시 후,
“툭, 툭.”
누군가 느린 박자로 무릎을 치기 시작했다. ‘설원의 여행자’의 시작을 알리는 박자다.
서너 군데서 투박한 응대가 시작되고, 이제 막 전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려는 찰나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음성이 울려 나왔다.
너무 작고, 너무 여려 자칫 놓칠 뻔한 소리였지만, 제우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던 모두에게는 천둥소리보다 큰 목소리였다.
“돌아…… 오셨군요.”
이미 경직된 것처럼 보였던 제우스의 머리가 조노량을 향해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투박한 박자가 멎고 정적이 찾아 들었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와아!”하는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려 열흘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던 제우스의 입이 떨어진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하는 주제에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떼고 있었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한 커트리안이 멍청히 주저앉아 있는 조노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조노량은 그것도 모른 채 기괴한 표정으로 제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겨우 두어 마디를 마친 제우스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리고 조노량이 물러나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조노량을 둘러싸고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제우스의 회복을 축하하는 한편, 조노량의 생환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조노량이지만 동료들이 둘러싸고 부산을 떨어대자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리던 본진이었던가? 이렇게 합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동안 격정적인 재회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노량도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치료라고 해 봐야 죽은 자들의 것임이 확실한 천 조각으로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감싼 것이 다였다. 하긴 더 이상의 치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약 따위가 있을 턱도 없었고, 게다가 유일한 신관이 누워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대충 치료를 끝내고 마물의 육편으로 요기를 마친 조노량은 차분히 본진을 둘러보았다.
대략 오십 명가량 되는 인원이다. 일부가 주변 경계를 위해 나가 있다고는 했으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많았다.
백 명이 넘었었는데, 열댓 명의 낯선 얼굴들을 제외한다면 겨우 서른 몇 명이 살아남은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지.’
이런 미친 땅에서 이 개월을 넘게 버텼다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옆에 바짝 붙어 간살을 떨어대고 있는 하이오지의 어깨 너머로 고골리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철탑을 연상시키는 덩치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은 크기다.
그 옆에 낯선 인물 하나가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선 보기 드문 검은색 머리카락을 검은색 털 가죽옷 너머로 치렁하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온통 시커먼 색 일색이었다.
조노량의 시선을 의식한 크리들이 말했다.
“어둠의 클라흐.”
조노량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크리들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도 들어 봤겠지? 크로아지크의 전설 중 하나니까.”
그제야 조노량의 눈이 커졌다. 거신 고골리에 이어 어둠의 클라흐라니?
“오십은 넘겼을 노인네들일 텐데, 외모만으로는 도저히…… 하하, 사람이 맞기나 한지 모르겠네. 어쩌면 마물?”
크리들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자네 피부는 여전하군?”
뜬금없는 소리에 조노량이 의아심을 담아 크리들을 바라보았다.
피식!
자조적이랄까? 마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다.
“아직 모르고 있군. 자 내 얼굴을 보게! 이 친구의 얼굴도 보고.”
크리들은 그러면서 하이오지의 뺨을 손가락으로 짚자 하이오지가 귀찮다는 듯이 크리들의 손을 툭 쳐 냈다.
둘의 행동이 격이 없어졌다는 것 외엔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모르겠나? 자, 보게! 내 피부는 원래 이 정도로 검지 않았네.”
‘아!’
그제야 조노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햇볕에 그을리기라도 한 듯 모두의 얼굴이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햇볕은커녕 해의 그림자조차 선명하게 볼 수 없는 이 땅에서? 그렇다. 절대 피부가 타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샤마노프와 차츠라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걸 몰랐을까?
그들의 피부는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검게 물들고 있었다. 워낙 천천히 진행되다 보니 미처 인식할 틈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이 본래의 얼굴색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봐야 한여름 뙤약볕에 그을린 정도였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지 씻지 못했기에? 워낙 처참한 나날들이라 몸이 견디지 못했기에?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리들이 말없이 자신의 옆구리를 들춰 보였다.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오첩도를 뽑아 들 뻔했다가 겨우 진정했다.
크리들의 옆구리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크리들의 옆구리, 아문 상처 위로 손가락 길이만 한 흰색 촉수 이십여 가닥이 돋아나 꿈틀대고 있었다. 마물의 촉수를 볼 때와는 격이 다른 징그러움이었다. 마치 흰색 지렁이 수십 마리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있다고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샤마노프의 팔뚝에 너덜거리며 매달려 있는 그것들도?
“이제 알겠는가? 우리는 모두 마물이 되어 가고 있네.”
크리들은 다시 한 번 피식 웃고는 조노량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물의 피를 마시고, 마물의 고기를 먹고, 독임에 분명한 이끼로 수분을 대신하는데,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나?”
하이오지가 별거 아니라는 듯 딴전을 피웠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럽니까? 힘도 좋아지고, 지치지도 않고 뭐, 나쁘지 않구만.”
크리들은 하이오지의 말을 무시하듯 코웃음을 치며 조노량을 향했다.
“자네 상처도 만만치 않군. 죽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아닌가? 샤마노프도 팔을 잃었더군. 출혈은 어떻게 막았나? 엄청나게 열이 났을 텐데. 염증은? 썩지는 않던가? 글쎄,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했을 텐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조노량은 충격에 휩싸여 뭐라고 대꾸도 못 다.
“뭐, 꼭 이런 모습만은 아니네.”
크리들은 옷으로 가려진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마다 다 조금씩 달라. 우리도 언젠간 저들처럼 될 거야. 킬킬.”
재미있다는 듯 잠시 키득거리던 크리들이 고개를 들어 조노량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원래 자네 얼굴은 이렇게 하얗지 않았지? 훗, 그게 아니지. 빌어먹을 시궁쥐색 세상만 보다 보니 자네 얼굴이 다 희게 보이는군. 킬킬. 아, 미안하군. 마물화 되다 보니 말투가 좀 경박해졌어. 클클.”
‘마물화? 이런 것도 농담이라고 하나? 크리들!’
혼란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본진에 합류하면 다 좋아질 거라 믿었는데, 두 달이 넘게 이 빌어먹을 땅을 헤매면서 유일한 위안이 본진과의 합류였는데, 결국 똑같은 상황인 것인가?
하긴 셋이 되었건 그 백 배, 아니 천 배가 되었건 이 빌어먹을 땅에선 의미 없는 숫자놀음일 뿐일지도 모른다.
마물보다 더 마물스러운 고골리의 뒷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외관만으로도 절대 인간일 수 없는 모습. 과연 그랬던 것인가?
육체적으로는 벌써 한계 상황에 도달해 있었지만 그에 더해 정신적인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제우스의 일로 혼란스러웠던 머리에 마물이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조노량은 여전히 반가움을 표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도대체 이놈의 세계는 어떻게 돼 처먹은 곳이냐?’
아직까지 충격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눈앞에 닥친 일은 해결해야 했다.
막 회색 오크 한 마리를 양단해 버린 조노량의 눈에 깔깔거리며 트롤의 팔뚝을 베어 내는 예니에프의 모습이 보였다. 크로아지크 최고의 천재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깔끔한 동작이다.
만 하루를 쉬고 나서 클라흐는 본진과 떨어져 회색 숲 사이로 사라져 버렸고, 일행은 고골리의 인도하에 어딘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앞을 중규모의 몬스터 군단이 가로막은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가로막았다기보다 조우했다고 해야 하나? 무시했다고 해야 하나? 멀리서부터 그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전진했으니까.
주변은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빼꼭히 자라나 있는 숲이었다. 분명 낮이건만 안 그래도 어두운 대기가 나무그늘로 인해 더욱 음침해 보였다. 나무 아래, 습하게 젖은 대지에는 검은 이끼가 끝없이 펼쳐져 음침함을 더해 주었다.
본진의 행군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발소리를 죽인 채, 회색 대기의 어두운 그늘로만 숨어들던 지금까지의 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십이 넘는 인원들이 내는 발자국 소리가 거리낌 없이 숲속을 메아리쳐 울렸다. 비록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은 이런 강력한 무력 집단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고 안정되었다. 매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불안의 연속이었던 그동안과는 사뭇 비교가 되는 행군이었다.
척후를 통해 마주 오고 있던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고골리는 그대로 진격을 명했다. 적의 규모가 백 마리 이상의 몬스터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긴장을 느끼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먹을 만한 식량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환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질기고 희한한 냄새가 나는 기형 마물보다는 지금 전투를 치르고 있는 이 몬스터들이 더 먹을 만한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