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본진을 찾아서(2)
오첩도에 어린 검기(劍氣)가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약간의 곡선을 그린 도첨(刀尖)을 따라 이글거리는 검기가 발산되며 마물의 가슴을 가른다. 이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저항감이 약해졌다고 해야 할까? 마치 일반 가죽을 잘라 내듯 간단히 베어져 버린다. 저항이 약한 만큼 도의 진행 속도도 월등하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동안 어렴풋하던 느낌이 확연하게 다가온다.
한 달? 대충 그 정도는 흐른 듯하다. 어찌 보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 순간 순간이 극한 상황이었다. 결코 짧다고만 치부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 격한 시간 속에서 이뤄 낸 깨달음이었다. 그만큼 값진 깨달음이었고, 더불어 만족할 만한 성취감을 안겨 줬다.
이제는 검기의 강도를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회수되던 오첩도가 그대로 되돌아 새로운 원을 그린다. 이번 공격은 확실하게 목숨을 취하기 위함이다.
오첩도가 그리는 두 번째 원의 범위가 좁아진다.
대신 속도 면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하다.
동심원!
직선에 비해 범위가 좁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만큼 빠르고, 힘이 실린다. 자르는 것이 아니라 베기 때문이다. 노관장이 버릇처럼 하던 말,
‘직선이 아니고 사선이다! 결을 따라 쳐라.’
‘결을 따르면 뼈를 벨 수 있을 것이요, 결을 거스르면 검이 상할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도 기억한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명제였고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아마 노관장도 배웠던 것을 읊었을 뿐 알고 말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정답은 원이었다. 결을 타기 위해서도 원이 필요했고, 제대로 된 사선을 그리기 위해서도 원이 필요했다.
각도상의 사선만이 아니라 거리상의 사선까지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방향뿐만 아니라 동시에 밀거나 당기는 입체적인 사선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원의 이치를 알아야 했다.
그로 인해 짧아진 거리는 좁히면 그만이다.
장삼봉 진인(眞人)이 말했다는 ‘일 촌이 모자라면 일 촌을 다가서고, 일 척이 모자라면 일 척을 다가서라. 한 걸음 더 수고하는 것이 무에 어려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알겠다.
오첩도에서 발산된 검기가 첫 발도로 벌려 놓은 마물의 가슴을 다시 갈랐다. 방향만 다를 뿐 각도까지 동일하다. 두 번의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지, 마물은 첫 타격 후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고 두 번째 도를 허용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타격의 깊이 뿐이었다.
오첩도로부터, 정확히는 발산된 검기로부터 마물의 골격이 베이는 느낌을 전달받았다.
깊다! 확실히 장기까지 닿았다.
치명타임이 느껴지자 검의 방향을 결정하던 오른손을 놓았다.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마물의 머리 부분을 향해 활짝 펼쳤다.
퍼석!
마물의 이마가 살짝 들썩이며 크지 않은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뒤편에 위치한 샤마노프나 차츠라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현재 그들의 상태로는 어차피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가벼운 소음이었다. 아니, 소리라기보다는 느낌이었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아직 연습 중인 기술이라 드러내기 부끄러울 뿐이다.
쿵 소리와 함께 마물이 무너졌다. 작은 꿈틀거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첩도로 인해 치명타를 입었다지만 즉사는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베는 것만으로는 즉사에 이르게 하기 어렵다. 설사 목이 끊어져도 잠시간의 꿈틀거림은 남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마물들임에야? 그럼에도 마물은 일절 꿈틀거림도 없이 절명해 버렸다.
무릎을 꿇고 마물의 두부를 살폈다.
거죽은 멀쩡하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러 보자 두부의 골격이 갈라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뇌수는 엉망으로 진탕되었으리라.
조노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만족스러운 것이다.
‘가능했구나.’
발경(發經)이라고 했던가? 권장법(拳掌法)에 뜻을 둔 이라면 꿈에서도 그리는 경지. 일류의 반열에 들지 못하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다던 발경이었다.
검사들의 검기와 같은 등급으로 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발경을 이뤘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마물들을 상대로 벌써 수십 차례나 실패했던 것, 그것은 발경이 아니었다. 발경은 이미 검기를 다루기 시작했을 때부터 구현이 가능했었다.
누군가 유심히 보았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장심(掌心)은 마물의 이마에 닿지 않았다.
즉 흔히 말하는 장풍이라는 기술이었다.
풍(風)이라고는 하지만 손바닥에서 바람이 나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손발이 닿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고꾸라지거나 나무나 바위가 터져 나가는 현상을 보며 손바닥에서 바람이 나갔다고밖에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풍’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뿐이다.
허공을 격하고 기의 파동을 쏘아 내는 기술, 다시 말해 특정 지점으로 충격을 전달하는 기술이 장풍인 것이다. 신체가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검기나 발경은 같은 이치다.
이론만 조금 알고 있을 뿐, 구체적인 초식 따위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힘겹게 일궈 낸 성과였다.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기술의 위력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검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상처조차 낼 수 없는 단단한 거죽을 뚫고 뇌수는 물론 뼈까지 상하게 했다는 것은 충분한 살상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무림에서는 실제로 바람을 쏘아 내거나 빙골장, 열화장이라 하여 한기나 열기를 함께 발생시키는 기술도 있지만, 삼류 무사가 그런 절정무공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성과였다.
‘언젠가, 언젠가는…….’
조노량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오첩도를 굳게 움켜쥐었다.
구체적인 이론이나 초식을 몰라도 열심히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말로만 듣던 기술들도 얼마든지 구현 가능하리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마치 초기 무림을 개척했다는 이청이나 발타선사의 심정도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으리라. 조노량은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개파조사(開派祖師)들과 동격이라도 된 듯 한껏 고양되었다.
조노량은 뿌듯한 마음에 이 기술을 ‘파마장(破魔掌)’이라 이름 지었다. 삼류 무사 주제에 너무 건방진 것 같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름까지 지어 가며 너무 격앙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조노량은 내심 부끄러웠으나, 입가에 얹힌 뿌듯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다.
수십 번 시도 끝에 이룬 단 한 번의 성공이었다. 개죽음하기 딱 좋은 성공률이다. 게다가 반 척도 안 되는 거리라면, 직접 대고 타격하는 것에 더한 득이 없었다. 적어도 삼 장은 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장법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극심한 내공의 소모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검기가 기의 회전이라면 장풍은 기의 발출이었다. 즉, 기의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오랜 세월 다듬어진 일류 장법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한 번 사용하기 위해 이 정도까지 내공을 소모해야 한다면 몇 번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탈진해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한계였다.
시전은 가능하지만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으려면 여전히 연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조노량은 마물의 시체를 살피기 위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일행을 돌아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사를 자처하던 자들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흔들리는 시선과 주눅 든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물들의 전쟁을 목격한 그날 이후부터였다. 자신 역시 그날 받은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검은 연기나 마인들이 보여 줬던 절대적인 강함, 엄청난 수의 마물들과 끔찍한 장면들. 그날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일행 모두 공포심에 절어 밤새 숨죽이며 떨어야 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하찮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무언가 노력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버리고(自棄), 스스로를 해치는 것(自暴) 이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그렇다. 괜한 허세를 부리거나 위험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결행한다. 때로는 정도 이상으로 몸을 빼고, 위축된다.
이미 이들은 자포자기(自暴自棄)했고, 두려움에 잠식당해 버렸다. 두려움에 찌들다 못해 시커멓게 죽어 있는 안면, 아무런 의지도 힘도 느낄 수 없는 표정들. 시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허세를 부리고, 허세를 감추기 위해 더욱 거칠고 조심성 없이 행동한다.
저런 상태로는 절대 이 미친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조노량의 시선이 샤마노프의 왼쪽 팔뚝에 꽂혔다. 팔꿈치 아래로 살점들이 너덜거린다. 흘러나온 피가 얼어붙어 거칠게 잘린 단면을 덮고 있다.
그의 화려한 그물질을 보는 것은 글러먹었다. 뭐 어차피 그물도 잃어버린 마당에 별 의미는 없겠지만.
나흘 전이었다. 두 마리의 마물과 전투 중 다른 한 마리가 추가로 나타났다.
자신이 한 마리, 그리고 샤마노프와 차츠라가 한 마리를 맡아서 처리하는 중에 새롭게 나타난 마물이 샤마노프에게 달려들었다.
충분히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허무하게 왼 팔뚝을 희생시키고 만 것이다. 사실 별로 강하지도 않은 마물이었다. 촌각(寸刻)만이라도 버텼다면 팔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평소의 기량만 다했더라도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마물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만든 두려움에 매몰돼, 무모하게 달려들다가 팔뚝째 씹혀 버린 것이다.
자신이 상대하던 마물을 눕히고 몸을 돌렸을 때, 이미 마물의 아가리에 팔뚝을 처넣고 연신 엉덩이걸음을 하고 있는 샤마노프의 공포에 질린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혈도를 눌러 간신히 지혈은 했지만 이미 잃어버린 팔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팔보다 중요한 것이 정신 상태였다. 팔 하나 정도 없더라도 의지만 강하다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중원에도 팔다리 하나쯤 없는 무사들이 부지기수다. 제약이 될지언정 한계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저런 정신 상태로는, 전사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다. 아니 전사로서의 생명을 논하기 전에 본진과 합류할 때까지 버텨 낼지도 의문이다.
“클클, 노리앙은 역시 강하다니까.”
샤마노프가 하나 남은 손으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비굴한 목소리와 흔들리는 눈빛, 제현에서 자주 보던 눈빛이다. 잔뜩 주눅들은 목소리로 횡포를 부리는 건달들에게 아부를 토해 놓던 난전 상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말투도 달라졌다. 언제나 당당하면서도 예의바른 말투의 샤마노프가 아니었다.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며 불안해하는 목소리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음침해진 분위기까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차츠라, 방향은 틀림이 없소?”
“맞는 거 같네……. 저쪽.”
차츠라 역시 샤마노프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단호하게 방향을 제시하며 앞장서던 모습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길을 가리킬 뿐이다.
방향을 제시하나, 앞장서지는 않는다.
조노량은 한숨을 내쉬며 차츠라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차츠라가 바짝 조노량의 뒤로 따라붙자 샤마노프가 하나 남은 팔로 차츠라를 밀치며 중간에 선다. 마치 어미 오리를 놓칠세라 자리를 다투는 새끼 오리들 같다. 이러다가도 어느 순간 거침없이 앞장서 나간다. 마물을 만나도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든다. 마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이들의 심리 상태는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다.
차츠라가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한다.
이건 경계라기보다는 두려움의 표현일 뿐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경계는 두 번째고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첫째다. 허술하기 짝이 없다.
더 이상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내면에만 침잠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도 본진의 흔적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본진은 마지막 남은 목표며 신앙이었다.
더 이상의 깨달음을 뒤로하고 전진 속도와 일행의 안위만 신경을 쓴 덕에 추격의 속도는 배가 되었다. 차츠라의 의견에 따르면 이제 하루 거리 이상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잔뜩 뭉개진 후 미처 줄기를 펼치지 못한 이끼에서 이틀이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마물의 시체를 살펴보고, 얼어붙은 상흔의 두께와 강도에서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대로 좁혀 간다면 나흘이면 따라잡을 수 있다. 본진이 반나절이라도 휴식을 취해 준다면 더할 나위없다.
조노량은 진한 회색빛으로 흐려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불길한 잎사귀를 흔드는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 ☆ ☆
샤마노프는 마물의 육편(肉片)을 질겅거리며 치렁하게 늘어진 넝쿨을 걷어 냈다.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몇 가닥이 부산하게 떨어져 내렸다.
“차츠라, 이 길이 맞기는 맞는 겁니까? 지나간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확히는 이 길이 아니지. 이 길은 지름길이거든.”
“클, 아니 언제 와 봤다고 지름길이라는 겁니까?”
“본진은 돌아갔고, 우리는 질러가는 거야. 어제 지나온 고지대에서 루트를 살펴봤네. 틀림없는 길이니까 모르면 잠자코 있게.”
“클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아.”
샤마노프는 다시 한 번 붉은 빛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뜯어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조노량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샤마노프는 변해 가고 있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이었으나 뭔가 괴리감이 느껴졌다. 차츠라와는 달리 샤마노프는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조노량으로서는 그 변화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런 환경 속에서 팔까지 잃어버렸으니, 성격이 조금 변한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오히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샤마노프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왜 이렇게 가려워! 긁을 수도 없는데.”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일이 바로 저것이다. 조노량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샤마노프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샤마노프의 팔꿈치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옷 조각으로 대충 감아 둔 절단면 아래로 허연 살집 몇 개가 자라나고 있었다.
잘려진 팔이 돋아나는 것도 아닐 테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마치 마물들의 촉수와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생각을 털어 버렸다.
하루 정도로 좁혀진 본진과의 거리는 벌써 며칠째 더 이상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버티기 힘들 만큼 지쳐 있었다. 하긴 이런 흉포한 땅에서 두 달을 넘게 버텼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차츠라가 질러가는 선택을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자칫 흔적을 놓치거나 다시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어붙은 대지와 어울리지 않게 넝쿨식물들이 한가득이다.
만일 이곳에서 일행이 감당하기 힘든 마물과 마주한다면? 치명적이다.
거추장스러운 넝쿨들은 상대적으로 체중이 가벼운 인간의 발걸음만 방해할 뿐 마물들의 발걸음은 전혀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도주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도 날씨는 많이 풀린 것 같소.”
차츠라가 넝쿨을 잘라 내며 말했다.
벌써 사월에 접어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숨결까지 얼려 버리던 냉기도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었다. 이런 땅에도 봄이 오는 건가?
넝쿨을 잘라 내기 위해 오첩도를 들던 조노량이 갑작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쉿!”
샤마노프와 차츠라도 일순간에 동작을 멈춰 세웠다. 일사불란한 호흡이었다.
인위적인 소리들이 잦아들자 넝쿨 사이를 가르는 흉흉한 바람 소리가 기세를 더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어 묻거나 하지 않았다. 조노량의 감각을 철저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앞쪽에서 바람 소리와는 구분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스럭
넝쿨이 뜯어지고 마른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다.
부스럭
손이나 검 따위로 한 번에 흩어 내는 소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밀어내는 소리다.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물이 내는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소소하다. 조노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일행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소리의 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넝쿨 사이로 힐끗 보이는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샤마노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움츠렸던 고개를 들었다.
“니타?”
차츠라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뒤로하고 샤마노프가 몸을 일으켰다. 조노량 역시 오첩도에서 손을 떼며 허리를 세웠다.
스크래치로 분류되는 자였음에도 A클래스까지 올랐던 니타가 틀림없었다.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니타가 허겁지겁 다가오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넝마가 된 의복이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반쯤 뜯겨져 덜렁거리는 오른쪽 어깨와 움푹 팬 가슴팍, 촘촘하게 긁히고 찢겨진 살갗들까지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였다.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조노량은 그런 그를 부축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대신 유심히 살폈다.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라디우스는 물론 단 한순간도 허리춤에서 떼어 놓지 않았던 단검집도 어딘가에 흘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삶은 포기하는 것과 같다. 죽어 넘어지더라도 무기를 움켜쥐고 넘어져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거의 무방비한 자세로 이런 곳을 헤맨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샤마노프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조노량이 샤마노프의 어깨를 짚어 말렸다.
“조금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살아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오.”
차츠라가 침중한 안색으로 니타의 움직임을 살폈다.
“좀비군.”
그제야 샤마노프도 니타를 자세히 살폈다. 니타의 걸음걸이는 확실히 자연스럽지 못했다. 무척이나 조급한 걸음걸이였으나 뛰지도 못했다. 더구나 관절이 굳어 버린 듯 뻣뻣한 자세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망할!”
샤마노프는 이를 악물고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서 단창을 들어 올렸다.
“대답하십시오. 니타! 제발!”
그러나 니타는 성한 팔을 앞으로 뻗으며 이빨을 드러낼 뿐이었다.
“크릉!”
허약한 언데드의 전형적인 울부짖음.
니타는 한 마디의 의성어로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확인시켜 주었다.
샤마노프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내가 하지.”
차츠라가 나섰다. 친분이 없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이다.
샤마노프는 니타를 한 번 돌아보고 치잇 하는 잇소리를 내며 물러섰다.
차츠라의 글라디우스가 코앞까지 다가온 니타의 목을 갈랐다.
차츠라는 레인저며 사냥꾼인 자다. 실제로 무력 면에서는 셋 중에 가장 떨어졌다. 하지만 셋 중에서 그렇다는 말이지, 다른 수용소에 있다가 마계 원정대에 차출될 정도의 실력자였다.
차츠라의 글라디우스는 깔끔하게 니타의 목을 떨어뜨렸다.
시커멓게 죽은피가 고체인 양 몇 조각 튕겨 나왔다.
차츠라의 글라디우스가 다시 한 번 니타의 허리를 갈랐다. 검고 걸쭉한 액체가 조금 흘렀다.
니타는 몸은 세 등분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좀비는 언데드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약한 놈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인 몬스터로 취급되었다. 좀처럼 죽지 않을뿐더러 목을 잘라 내도 한동안 계속 움직이며 살아 있는 육체를 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좀비의 이빨이나 손톱에 상처를 입으면 그 역시 생명을 잃고 좀비화가 돼 버리니, 일반인들에게는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언데드였다.
바닥에 흩어져 조금씩 움직임을 멈춰 가는 니타를 보며 샤마노프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개체수가 많았다면 본진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수도 있다.
지난번 마물들 간의 전투 시에 보았던 규모의 좀비 군단이라면 단검을 주 무기로 사용할 만큼 몸이 빠른 니타가 당한 것도 이해가 갔다. 아니면 먼저 변화해 버린 일행에게 기습적으로 당했거나 말이다.
그때 또 다른 기척을 느낀 조노량이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하나, 둘, 셋? 넝쿨이 흩어지는 소리로 봐서 적어도 셋은 넘었다. 움직임이 느린 데다 소리의 크기나 간격이 작고 밭았다.
그 외에도 소리가 전달해 주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종합해 봤을 때 덩치가 큰 마물은 아니었고, 역시 좀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뭔가 또 오고 있소.”
샤마노프의 어깨를 짚은 조노량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샤마노프 역시 그 뭔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셋은 최대한 기척을 죽여 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 시간가량 움직이자 더 이상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애초에 빠르지도 않았고 일행을 목표로 잡고 추격해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의 드러난 피부는 온통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기척을 숨기기 위해 넝쿨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몸으로 밀어내며 전진했기 때문이다.
차츠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얼굴에 들러붙은 넝쿨들을 훑어 내리며 방향을 잡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쌓인 답답함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거칠게 글라디우스를 휘둘렀다.
다시 한 시간쯤 지나 넝쿨 숲이 끝나고 제법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 언덕이 일행을 맞이하였다.
“지겨운 넝쿨 숲이 끝났군.”
옷가지에 엉겨 붙은 넝쿨들을 털어 내며 차츠라가 입을 열었다. 짙어지기 시작한 회색빛 어둠 탓에 언덕 아래 경물들을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아래보다는 위가 낫지 않겠소?”
차츠라가 조노량을 향해 의견을 물었다.
“이끼 구덩이가 보이지 않는군.”
조노량이 대답하자 차츠라가 장갑을 벗어 기온을 살피며 말했다.
“이 정도 날씨면 얼어 죽지는 않겠군.”
“하! 얼어 죽지 않는다고요? 최소한 잠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샤마노프의 이의 제기를 간단히 무시한 차츠라가 다시 조노량을 향했다.
“저쯤이면 적당할 것 같네.”
아래쪽으로 십 미터 떨어진 바위틈을 가리키며 차츠라가 말을 이었다.
“밤새 웅크리고 떨어야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은 차츠라가 모두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따랐지만, 언제부터인가 차츠라는 의견만 제시하고 결정은 조노량이 내리고 있었다.
조노량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아래로 내려가서 잠자리를 찾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루 종일 넝쿨 숲을 헤쳐 오며 지친 것도 있었지만, 바위틈의 위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날이 밝으면 아래쪽을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위치였고, 게다가 바위틈이 제법 깊어 보이는 것이 안쪽으로 들어가 웅크리면 위쪽이라도 쉽게 일행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츠라가 날렵하게 바위틈으로 날아 내렸다. 마치 평지를 걷는 듯 자연스럽다.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차츠라의 움직임은 그림자가 녹아내리듯 유연하다. 특히 경사지나 절벽 등에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경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공간도 충분하고, 마른 넝쿨만 조금 깔아 놓으면 제법 안락한 침실이 되겠소.”
바위틈을 둘러 본 차츠라가 밝은 표정으로 날듯이 언덕을 올라와 말했다.
약간의 수고만으로도 말라비틀어진 넝쿨을 넘칠 만큼 모은 일행이 침실을 꾸미기 시작했다. 차츠라의 말대로 바위틈은 동굴을 연상시킬 만큼 충분히 넓었다.
모아 온 넝쿨을 푹신할 정도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낙엽을 덮었다.
마무리로 얼기설기 엮인 넝쿨을 이용해 좁은 입구를 막고 나니, 착각이겠지만 훈훈한 온기가 발생하는 느낌이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오늘 밤은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이런 우라질!”
샤마노프가 단창을 내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는 샤마노프의 욕설이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오랜만에 따뜻한 밤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그 호사는 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언덕 아래에 있던 마물들의 무리가 바위 틈새로 숨어드는 일행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회색 어둠 속에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물의 숫자를 보며 조노량은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언덕을 새까맣게 덮으며 밀려들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반백은 넘는 숫자였다.
간혹 숨어서 보아 왔던 광경을 떠올렸다. 종종 마물들은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이루어 남으로 이동해 갔다. 지난번 전쟁을 목격한 후로 이들의 목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무리들 중 하나에게 발견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구가 매우 좁다는 점이었다.
바위틈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펑퍼짐한 바위 하나를 디뎌야 하는데, 그게 마물 두 마리가 함께 설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이래서는 도망갈 수도 없잖아!”
샤마노프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은 점이 있다면 나쁜 점도 있는 법.
입구가 좁았기 때문에 수십 마리의 마물을 한꺼번에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반대로 뚫고 나갈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조노량은 샤마노프를 힐끗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나 남은 팔로 광분하여 단창을 휘두르는 모습이 롤을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서는 더 이상 차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래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단창에 어린 오오라의 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짙기에 더욱 우려스러운 것이다. 전혀 조절하지 않고 있다. 저렇게 남발하다가는 얼마 안 가서 나가떨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샤마노프!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그 말에 움찔하던 샤마노프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마물의 갈고리 손을 거칠게 쳐 내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그게 잘 안 된단 말입니다.”
잠시 가라앉았던 샤마노프의 오오라가 불끈하고 터져 올랐다.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차츠라, 샤마노프와 교대를 해 주시오.”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두면 얼마 가지 못해 샤마노프가 기진해 버릴 것 같았다.
“난 아직 더 싸울 수 있단 말입니다.”
“아주 긴 싸움이 될 거요. 잠시 쉬었다 싸우시오.”
조노량의 냉정한 대답에 샤마노프는 투덜거리며 차츠라에게 자리를 내줬다.
막 교대를 끝낸 순간 조노량에게 갈고리를 날리던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바위 언덕에서 떨어져 나갔다. 조노량의 공격에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다른 마물이 갈고리 마물을 밀어젖히고 언덕을 차지한 것이다.
동료로부터 기습을 받은 갈고리 마물이 가파른 언덕을 굴러 내려가며 매달려 있던 다른 마물들과 연달아 충돌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서너 마리의 마물이 동시에 언덕 밑으로 굴렀다.
언덕이라고는 하지만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고 높다. 워낙 질긴 놈들이라 죽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의 타격은 예상되었다.
카아악!
길게 살펴볼 틈도 없었다. 새로 자리를 차지한 마물은 다른 마물들을 향해 포효를 내지른 후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왔다.
깡!
차츠라의 글라디우스가 오오라를 발하며 마물의 손톱을 막아 냈다.
차츠라가 인상을 구기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마물의 손톱에 담긴 역도(力道)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역시 마물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것은 무리다.
그 틈에 조노량의 오첩도가 마물의 허리를 두드렸다. 파충류를 닮은 마물의 외피가 한 자가량 거칠게 잘려 나갔다.
얕다. 이 정도는 긁힌 상처밖에 되지 않는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고쳐 쥐었다.
별것 아니었지만 타격을 받은 마물이 분노를 뿜어냈다. 포효하며 두 팔을 연이어 뻗어 왔다. 격식은 없었으나 흉험(凶險)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공격이다. 그렇지만 일행들도 이미 마물들에게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길게 휘둘러진 마물의 오른팔이 되돌려지는 시점에서 조노량의 신형이 마물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검기를 한껏 머금은 오첩도가 마물의 겨드랑이 아래를 날카롭게 갈라냈다. 일반적이라면 팔을 당기는 근육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충분히 깊지 못했는지, 아니면 일반적인 근육의 구조와 달랐는지 잠깐 주춤대던 마물의 오른팔이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아주 잠깐의 주춤거림이었으나 조노량이 몸을 빼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때 마물의 거구가 기우뚱거렸다. 다른 마물이 놈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했지만 바로 이 점이 일행을 버티게 하고 있었다.
조노량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근육을 이완시켰다. 차츠라 역시 글라디우스를 왼손으로 옮긴 후 오른 손목을 털어 조금 전에 받았던 충격을 해소했다.
마물은 일행을 무시한 채 자신의 발목을 감아쥐고 있는 서너 가닥의 촉수를 향해 손톱을 그어댔다. 날카로운 놈의 손톱에도 촉수는 쉽사리 잘리지 않고 질기게 버텼다. 그러나 스스로의 체중까지 실린 상태인지라 서너 번 더 그어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 가닥씩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 촉수가 떨어져 나가자 매달려 있던 마물이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언덕을 굴러 떨어졌다. 마물이 추락하는 궤적에 매달려 있던 다른 마물들이 함께 굴렀다. 그중 일부는 떨어지는 동료를 신경질적으로 쳐 내기도 했지만 가속도가 붙은 추락물을 감당하지 못해 쳐 내고도 함께 구르기 일쑤였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덕에 조금 여유를 찾은 조노량이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웃어야 하나?
어떻게 되었건 버틸 수만 있다면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휘두르다가 몸을 풀고 다시 휘두르고를 반복해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회색빛 어둠이 물러가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 울렁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마음을 비우자 두려움도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나름 안정된 조건이지 않은가?
한 마리의 마물만 상대하면 된다. 전투 중간중간 경직된 근육을 풀어 줄 여유도 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 아주 좋은 기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조노량은 차분히 각 마물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한편, 그동안 깨달았던 묘리(妙理)들을 하나씩 시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노량은 점차 상황을 잊은 채 전투에 몰입해 갔다.
오첩도에 어린 검기가 이글거리다가 잦아들고 다시 불꽃처럼 터져 나왔다.
무아지경(無我之境)에라도 빠진 듯, 검무(劍舞)라도 추는 듯, 아름다운 곡선들이 오첩도를 휘감아 돌았다.
오첩도는 마치 신체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처럼 조노량의 의지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달렸고, 유장하게 흘렀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게 휘도는 곡선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휘돌았다. 스스로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알아서 마물들의 신체를 유린해 나갔다.
언제부터인가 마물들 간에 서로를 상하게 하는 빈도보다 조노량에 의해 치명타를 입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마물들의 숫자는 그다지 줄지 않았다. 워낙 눈에 띄는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였기에 주변의 마물들이 추가로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어 전투를 즐기고 있는 조노량과 달리 차츠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감에 매몰되어 갔다.
가늘고 날카로운 촉수 하나가 날아왔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촉수는 차츠라의 발등을 뚫고 바위 바닥에까지 깊이 박혔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지만 이 정도 고통에 검로(劍路)를 흩트려 버릴 차츠라가 아니었다. 발등이 아니라 발목이 끊어져도 그의 글라디우스는 끝까지 뻗어 나가야 했다. 그렇게 훈련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레인저다.
애초에 레인저라는 직업은 늘 극한의 고통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에게는 단 한 번도 쉬운 임무가 없었고, 실패해 본 임무도 없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켈커티스 최고의 레인저 부대, 크랄산맥의 제3레인저 부대가 바로 그의 부대였다.
제3레인저 부대는 다른 레인저 부대와는 조금 다른 임무도 함께 수행했다.
전사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임무,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임무인 어둠의 임무를 전담했다. 어둠 속에서 일을 하지만 자긍심 하나만큼은 그 어떤 기사보다도 드높은 제3레인저 부대의 두 번째 손가락이 바로 그였다.
지옥의 추적자, 숲의 유령, 산맥의 그림자가 그와 그의 부대를 칭하던 명칭이었다.
차츠라는 켈커티스 지휘부 중 극히 일부만이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로 철저히 숨겨진 자였다.
포로가 되었을 때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면 아도니아에서는 두말 않고 그를 처형해 버렸을 것이다. 포로가 된 과정을 절대 수긍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랄산맥 제3레인저 부대의 두 번째 손가락은 그렇게 쉽게 생포될 자가 아닌 것이다. 포로가 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임무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물론 전사로서의 실력은 노리앙이나 샤마노프에게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어두운 곳에서만 힘을 발휘하게끔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은 은신과 기습이었고, 그의 덕목은 인내와 냉정함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광기에 차 있었다. 두려워하고, 조급해하고, 흥분하고 있었다. 뻔히 보면서 발등을 허용했지만 그 탓은 아니었다.
퍽!
끝까지 뻗어 나간 차츠라의 글라디우스가 마물의 목에 박혀 들었다.
마물의 목이 거칠게 저항했다. 상처를 줬지만 충분치 않다. 숨이 차다.
차츠라는 자신이 노리앙의 검로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빠져 줘야 했다. 그러면 노리앙이 놈에게 치명타를 안길 것이다. 하지만 발등을 뚫고 바위 속까지 박혀 버린 촉수가 차츠라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래, 볼썽사납지만 뒤로 넘어져 버려도 된다.
그래도 된다.
하지만 차츠라는 넘어지는 대신 한껏 힘을 주어 반대 방향으로 글라디우스를 휘돌렸다.
검을 뻗어 내던 노리앙의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숨이 가쁘다.
글라디우스가 마물의 반대편 목을 두드렸다.
퍽!
검이 아니라 몽둥이로 가죽 부대를 두드렸을 때와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름을 다한 등잔불이 껌벅이듯 차츠라의 글라디우스에 어린 오오라가 빛을 다했다.
마물의 두 번째 촉수가 차츠라의 옆구리를 뚫었다. 깨끗하게 관통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촉수가 자신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죽음이 임박한 그 짧은 시간, 한동안 잊었던 냉정함이 돌아왔다.
☆ ☆ ☆
냉정함이 돌아오자 자기 자신을 관조(觀照)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터였던가? 한 달 전? 두 달 전? 흥분과 두려움과 성급함이 자신을 지배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끔찍했던 유년기의 훈련과 처음 혼자서 경계를 넘던 열아홉 이후 단 한 번도 감정에 휘둘려 본 경험이 없다. 그런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동요했을까?
촤악!
오랜만에 명징(明澄)해진 정신 덕에 마물의 촉수를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촉수와 함께 간단히 끊어지는 마물의 목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지. 노리앙이 있었지?’
“괜찮소?”
노리앙의 목소리에 차츠라의 영혼이 아득한 여행에서라도 돌아온 듯 깨어났다.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선 채 오첩도를 회수하는 노리앙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비켜 주지 않는 바람에 무리하게 움직인 것이다.
언제 광분했냐는 듯 차츠라의 정신은 곧바로 위축되고 시들어 버렸다. 가슴이 울렁거렸고, 두려움에 사지가 굳었다.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막 바위 위로 새로이 올라서는 마물의 턱을 날려 버린 조노량이 외쳤다.
“물러나 쉬시오.”
차츠라의 입꼬리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역시 방해만 되고 있는 것인가?
자신과 비교해도 턱없이 작은 체구의 노리앙이 자신의 두 배는 됨직한 마물과 일대일로 맞선 모습을 바라보며 물러섰다.
참았던 숨이 차올랐다.
바위틈 안쪽에는 방금 교대하고 들어온 샤마노프가 널브러져 있었다. 차츠라가 들어오자 샤마노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격하게 차오르는 숨 때문에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잠시간 성대로 돌릴 호흡조차 버거웠다.
샤마노프 역시 비슷한 상태였는지 혹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묻기를 포기하고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차츠라는 샤마노프 옆에 무너지듯 쓰러져 버렸다.
관통당한 발과 옆구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들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다. 치료는커녕 지혈조차 하지 못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경직되어 버린 근육에서, 뭉텅이로 잘려 나간 살집에서 격통(激痛)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보다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더 아팠고, 턱까지 차오른 숨이 더 고통스러웠다.
두려움에 매몰되어 가는 자신의 마음이 두려웠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뛰어내릴까? 단숨에 죽어 버릴 수 있을까?’
난 레인저다…….
레인저? 흥!
그런 것은 인간들의 세상에서나 통하는 말이 아닌가? 이런 지옥에서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직도 모자란단 말인가? 아직도 허세를 부리려 하는가?
조금씩 시간이 흐르고 턱까지 차오르던 숨이 진정되자 차츠라는 멍한 시선으로 노리앙을 응시했다.
마치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풍경처럼 맥없이 노리앙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처절하다는 느낌이었다. 많이 지쳐 보인다. 어차피 죽을 텐데, 무엇을 위해 저러고 있을까? 구차하지 않은가?
그 다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저렇게도 쓰는구나.
차츠라는 노리앙의 검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불씨를 담은 나무통에 끈을 매달아 돌리던 광경을 떠올렸다.
참 아름다웠는데…….
무대 위에서는 노리앙이 홀로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야기 속의 용사가 나쁜 괴물을 무찌르는 시나리오일까?
용사는 멋지게 괴물을 물리쳤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무대에 오르기 위해 안달이 난 괴물은 차고도 넘쳤다.
……용사가 괴물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 냈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의 아내가 복수에 나서고, 그 자식이 복수에 나서고, 그 자식의 아내와 자식의 자식과 사돈의 팔촌이 복수에 나섰기에 안타깝게도 용사는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어처구니없는 스토리에 차라리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어지럽다.
피를 너무 흘렸나 보다. 눈이 침침하다.
샤마노프가 몸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무대가 가려졌다. 비키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벌어지질 않는다.
샤마노프가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거리고 있다. 지혈을 하는 것일까? 이 친구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가?
피식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기침이 몇 번 터져 나오더니 호흡이 조금 편해졌다.
차츠라는 천천히 정신을 놓았다.
회색빛 어둠이 밀려나고, 회색빛 날이 밝았다.
전투는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더 치열하고 더 처절했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당장 끝을 본다 해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말이다.
아무리 대단한 체력을 보유했더라도 밤을 새워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내공을 사용하는 무림인들은 장시간의 전투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내공 자체가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소모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라 간의 전쟁에서 무림인들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조노량 역시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지난 두 달간 누적된 피로와 온 밤을 꼬박 새운 전투는 조노량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공은 오래전에 바닥이 났고, 체력도 한계에 부딪혔다. 움직임은 현저하게 느려졌고, 오첩도는 한없이 무거웠다.
밤새 샤마노프와 서너 번가량 교대를 하며 운기를 했지만, 소모된 내공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로서는 단 삼십 분도 버티기 힘든 전투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차츠라는 말할 것도 없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날이 밝자 시야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선명해진 시야로 바라본 마물들의 모습은 더욱 끔찍했다. 어떻게 저런 생명체들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온갖 생명체들을 제멋대로 찢어다 붙여 놓은 것 같다.
밤사이 지난 두 달간 죽인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의 마물을 죽였다. 그런데도 몰려 있는 마물들의 숫자는 전투를 시작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도대체 몇 마리나 상대했을까?
언덕 아래에서는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죽거나 부상당한 마물들은 새로 몰려든 마물들의 배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갔다.
질기고 단단한 마물의 거죽을 씹던 놈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먹던 것을 뱉어 내며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 밤, 조노량의 성취는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안개가 낀 듯 잡히지 않던 묘리들도 부지불식간에 체화(體化)되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육체가 스스로 깨우쳤다. 그 덕에 체력과 내공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일이 돼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육체를 움직일 수 없으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제 그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오첩도가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어깨를 짓눌렀다.
절망이 깊으면 분노로 바뀐다던가? 아니, 절망은 분노의 다른 이름이다.
차츠라가 그랬던 것처럼, 샤마노프가 그랬던 것처럼, 조노량 역시 광기에 물들어 갔다. 진원지기(眞元之氣)가 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검을 뿌려댔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거칠게 마물을 몰아붙였다.
검을 잡은 오른팔의 근육이 파열되어 격통이 밀려왔다.
왼팔은 인대가 상했는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마물의 손톱에 찢긴 어깨와 허벅지에서는 선혈이 꾸역꾸역 밀려 나온다. 흘러내린 피가 가죽 신발에 고여 질척이고 있다. 발이 신발 속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촉수에 당한 골반이 뒤틀렸다.
눈가로 흘러내리는 이 귀찮은 액체가 땀인지 피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것이 머리카락인지 반쯤 뒤집혀진 살 껍데기인지 구별할 생각도 없었다.
차라리 발과 따로 노는 신발이 더 거추장스럽다.
암담하다. 막막하다.
샤마노프가 했고, 차츠라가 했던 생각을 조노량도 했다.
이대로 마물의 배를 불려 줘야 할까?
오첩도를 놓으면 편해질까? 단숨에 죽을 수 있을까?
억울했다! 도대체 이놈의 인생은 어떻게 돼 처먹은 인생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란 말이냐? 왜 이런 곳에 떨어져 이토록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이냐?
이왕 죽을 것이면 제갈가와의 전투에서 죽었어야 했다.
아니, 아니지. 죽었지 않은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꿈일까? 아니면 이미 죽어 지옥에 온 것인가?
그렇다면 왜,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내공을 쌓고, 꿈꿔 보지도 못한 무공 성취를 이루게 했단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죽기는 싫다.
이곳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인지도 모르겠지만, 또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끔찍하게 싫다.
죽음의 기억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한없는 공포와 끝도 없는 절망감, 텅 빈 공허감, 끔찍한 좌절감.
원혼이라 했던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감정,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이렇게 죽기는 싫단 말이다!”
조노량의 메마른 목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고함과 함께 한 움큼의 피가 튀어 상대하던 마물의 가슴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마물은 이 작고 까다로운 먹잇감의 상태를 직감했는지 뱀처럼 기다란 머리를 세우며 포효를 내질렀다.
마물은 영악하게도 발악하는 조노량보다 다른 마물들에 대한 견제에 더욱 신경을 쓰는 여유를 부렸다. 먹잇감이 스스로 지쳐 쓰러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매의 갈퀴 발톱을 닮은 여덟 개의 발과 징그러운 겹 이빨을 가진 두 개의 뱀 대가리가 너른 바위로 오르려는 다른 마물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러는 한편 조노량이 쉴 수 없도록 가끔 기습 공격을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노량은 단지 버틸 뿐이었다.
마물들이 이렇게 영리했던가? 아니면 이놈이 유독 영리한 놈일까?
어쨌거나 여유를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거칠게 일도를 뿌린 조노량의 탁한 눈동자가 오첩도에 머물렀다.
참 신기하다.
불그스름하게 오첩도를 둘러싼 오오라. 조노량이 이제껏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오오라는 더 이상 검기를 발할 수 없을 때,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자체적으로 발광하듯 은은한 빛무리를 뿌려대며 마물의 거죽을 갈라놓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마물을 상대할 수 있었다. 애초에 조노량 스스로 만들었던 도였기 때문에 신병이기일 턱이 없었다.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놈의 세상은 도무지 상식적이지가 않다.’
그때 또 하나의 이상한 현상이 목격되었다.
갑자기 회색빛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언덕 아래로 일 킬로쯤 떨어졌을까? 그쯤에서 시작된 먼지구름이 빠르게 언덕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뭉클 피어올랐다가 한쪽 방향으로 치솟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무척 격렬한 느낌이다.
제길, 또 뭔가?
먼지구름이 가까워지자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핏줄기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심상치가 않다.
언덕 아래에 있던 마물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하나둘 뜯어 먹던 시체를 남겨 두고 먼지구름을 향해 성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먼지구름을 노려보던 일부 마물들이 뒤를 이어 달렸다.
먼지구름 속에서 백색 섬광이 산란되었다. 초록빛 액체가 비산했다. 온통 회색의 공간을 수놓는 원색의 핏줄기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언덕에 붙어 있던 마물들 중 일부가 뛰어내렸다. 일부는 언덕 위와 먼지구름을 번갈아 보며 망설이는 눈치다.
먼지구름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선명하지 못한 회색 대기를 가르며 먼지구름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노량의 눈에 들어 온 장면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새로운 마물인가?’
먼지구름에 달려들던 마물들의 육체가 산산이 찢겨서 비산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서너 마리의 마물이 한꺼번에 육편 조각으로 분해되어 튀었다.
거죽은 그렇다 치고 검기를 한껏 돋아도 벨 수 없었던 특정 마물들의 골격까지 그대로 잘려 나갔다. 아니, 터져 나갔다.
귀부 낫이 밀짚 숲을 헤친다면 저런 모습일까?
조노량은 암담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마물을 도륙하고 먼지구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의 정체는 검신의 길이만도 이 미터가 넘음직한 거대한 투핸드소드였다. 특이하게도 우윳빛을 띠는 투핸드소드는 거침없이 마물의 숲을 헤치며 언덕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휘두르며 달려오는 존재는, 사람이었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