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32화 (32/142)

32. 신관 제우스Ⅲ

신을 섬기는 자들은 어디를 가나 두 부류로 나뉜다. 신을 도구로 이용하는 자와 신의 도구가 되는 자.

제우스라는 신관은 최소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을 이용하는 부류는 아닌 듯했다. 조노량이 막 제우스라는 신관에게서 시선을 거두려 할 때, 제우스가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자들을 피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조노량은 크리들을 살피러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기라도 해서 몸을 데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노량은 운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

“노리앙 님이시죠?”

여리고 몹시 흔들리는 목소리가 조노량의 운기를 방해했다. 목소리가 왠지 절박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조노량은 천천히 눈을 떴다. 비교적 호의를 담고 있는 눈빛이다.

“무슨 일이오? 사제.”

아직 어린 신관이지만 절로 존대가 흘러나왔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

조노량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기도 따위는 할 줄 모르오. 무언가 착각하신 모양이오만?”

“대단한 전사라고 들었습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그저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잠시 마음을 평화로이만 해 주십시오.”

뜬금없는 제우스의 부탁에 조노량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뭔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설마 운기를 도와 달리는 말은 아닐 텐데?

사실 조노량은 진기를 도인하는 방법 자체를 알지 못했다. 풍문에 내공의 고수들은 타인의 기를 인도하여 기진한 상대를 회복시키거나 운기를 도와 내공을 증진시킨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심지어는 벌모세수라 하여 어린아이의 혈도를 뚫어 내공을 쌓기에 최적의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봤다.

하지만 그건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제현의 뒷골목이나 관리하던 삼류 건달에게는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당연히 아는 바도 없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소만, 난 그런 능력이 없소.”

그러자 제우스라는 신관의 눈빛이 더욱 간절하게 변했다.

마치 어린 강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조노량은 제우스의 애처로운 눈빛에, 그에게 뭔가 해 주고 싶다는 느낌이 절로 일었다. 하지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뭔가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싶긴 하오만, 진정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노리앙 님, 제가 노리앙 님께 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잠시만 제 머리에 손을 얹어 달라는 것뿐입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우스는 절박한 심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사실 제우스의 이성은 그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과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존재인가도 확실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의심을 털어 버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무조건 믿고, 의지하고, 기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을 심어 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가? 영혼의 눈을 떠라! 느껴지지 않는가? 터럭 하나까지 집중하여 느껴 보아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마치 로리안의 신탁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제우스는 사제였다. 믿음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자다.

그래서 그는 믿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이 감정을, 이 거짓 없는 느낌을 맹목적으로 믿어 버렸다.

‘이성이란 한낱 인간의 인지 범위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것일지니, 오직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부탁드립니다.”

제우스의 목소리에는 진심과 간절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놀리거나 장난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조노량은 잠시 갈등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요구가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진기도인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요, 내공을 불어 넣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달라는 부탁 정도야 능히 들어줄 수 있다. 실망하는 것이야 그의 문제일 뿐이다.

“돌아앉으시오.”

조노량의 말에 제우스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체 없이 조노량의 명에 따랐다.

안수기도를 할 때는 대부분 무릎을 꿇은 대상의 정면에서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보통이었다. 제우스는 잠시 망설인 것은 그 때문이었지만 그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마음속의 울림 탓에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았다.

제우스가 돌아서 무릎을 꿇자 노리앙이 고개를 저었다.

“내 비록 방법은 알지 못하나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을 거요. 편하게 주저앉으시오.”

그 말에 제우스는 내심 ‘감히’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길게 망설일 수 없었다. 제우스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까이 있는 자들은 조노량과 제우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우스의 행동에 일부 검투사들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어린 사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하루였다. 신을 믿는 자가 마물들의 세계에 떨어졌으니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는가?

그의 헌신과 노력을 지켜봐 왔던 검투사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제우스가 자세를 잡자 조노량은 그의 머리와 등에 각기 손을 얹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진기도인을 할 줄 몰랐으나 피륙을 따뜻하게 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제우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이 장이나 앞으로 튕겨져 동굴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쾅!

나뒹구는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른 동굴 벽에서 흙먼지가 번져 나왔다.

“크억!”

“뭐냐?”

“무슨 일이야?”

“마물인가?”

둘의 행동을 지켜보지 못했거나 자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 일어나 앉았다.

제우스가 좁아터진 동굴 속에서 겹겹이 끼어 누웠거나 앉아 있던 자들 위로 굴러 버린 탓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제우스라는 것을 알자 가벼운 투덜거림 소리만 잠시 일었다가 잠잠해졌다. 평소라면 이유를 따졌겠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그럴 기운도 없는 듯했다.

처음부터 둘의 대화를 들었던 이들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조노량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덕에 이유를 찾고 있던 많은 눈빛들이 조노량에게 쏠렸다.

당황한 조노량은 엎어져 있는 제우스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지친 탓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제우스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무릎을 모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그는 그 자세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일견 보기에도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의 시선이 다시 조노량을 향했다. 똑같이 지친 표정들이었지만 일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일부는 힐책의 눈빛을 조노량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를 괴롭힐 이유가 있는 건가?”

“힘이 남아도는가 보군.”

“당신이 저분보다 강한 건 누구나 알고 있소. 굳이 증명할 필요까지 있겠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조노량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평소 표정이 없는 조노량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노량이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었다. 비겁하게 발뺌을 한다고 느껴진 것이다.

“흥, 상황이 어려워 봐야 본성을 알게 된다더니…….”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것은 전사로서의 자세가 아니오.”

그때 롤이 몸을 일으켰다.

“북국의 전사로서 부끄러움도 모른다는 건가?”

롤은 앉은 자세로 자신의 글라디우스를 세워 턱을 받치고는 말을 이었다.

“그가 아도니아인이라는 것이 문젠가?”

은은히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롤의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손마디를 꺾어 젖히는 폼이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응징이라도 하겠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기는 조노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억울함을 당하고 가만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당황으로 붉게 물들었던 조노량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눈빛은 잠시 롤을 향하다가 엎드려 울고 있는 제우스에게 넘어갔다.

“난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내게 이러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다, 사제!”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조노량의 목소리에 오열하던 제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제우스의 표정은 일행의 예상과는 다르게 환희에 차 있었다. 그의 표정에 롤을 비롯한 일행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는 때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양손을 치켜들며 여러 차례 대지의 여신 로리안을 찬양했다.

찬양을 마친 제우스가 무릎걸음으로 조노량에게 다가와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우스의 목소리에는 희열이 묻어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제우스의 행동에 조노량은 또 한 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다른 자들도 멍하니 둘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저에게 놀라운 축복을 내리실 수 있는 것입니까?”

“무, 무슨 말인가?”

“당신은 천사이십니까? 신의 대리인이십니까?”

“무슨 가당찮은 소, 소리냐?”

“그대의 성력은 이 미천한 자의 몸을 채우고도 모자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의 말에 일부는 동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좀 덜 찐득거리는 것도 같고…….”

“무슨 헛소리냐? 끈적거리는구만.”

“좀 따뜻해진 것 같지 않아?”

“미친놈!”

제각각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제우스는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조심스럽게 조노량의 가죽 신발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께 느껴지는 기운은 이 미천한 자를 들뜨게 하오나 이제 저들을 돌보게 허락하소서.”

조노량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아니, 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이거야, 쯧!”

조노량은 내심 이 사제가 오늘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미친 것이라 생각했다. 미친 자와 시비를 가릴 만큼 속이 좁은 자신도 아니었고, 더 이상 주변의 시선을 끄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조노량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우스는 가까이 있는 크리들에게 돌아앉았다.

“그대의 병이 깊음은 한낱 껍질의 조화가 깨졌을 뿐일지니, 로리안의 무한한 축복과 죄 사함이 그대에게 임했도다. 이제 떨치고 일어날 지어다. 성신과 성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이며 충만한 제우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목소리에 담긴 알 수 없는 기운에 고개를 돌렸던 조노량마저 다시 제우스를 바라보았다.

비록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냘픈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그 순간 크리들의 이마에 대어졌던 제우스의 손이 환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끄응.”

언제까지나 깨어날 것 같지 않던 크리들의 입에서 의식적인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조노량에게 향하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부산을 떨고 있는 제우스에게로 돌려졌다.

“에게? 뭐가 어떻게 되는 스토리야?”

몸을 반쯤 일으켰던 롤 역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조노량을 계속 핍박하기에는 상황이 뭔가 묘했다.

“경배할지니, 로리안의 크신 성력이 이 땅에 임하사 만백성을 낫게 하시고 만물을 살찌우시는 도다. 형제여, 이분을 돌보실 수 있겠습니까?”

흥분으로 가득한 제우스의 목소리가 하이오지를 향하고 있었다.

하이오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제우스는 날듯이 몸을 일으켜 다른 부상자에게로 달려갔다. 조금 전의 지친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아침 해를 맞은 종달새처럼 생기가 흘러넘쳤다.

“목이 마르군…….”

갈라진 목소리에 하이오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커멓게 죽어가던 크리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물? 물 말입니까? 이봐! 물 가진 것 좀 있나?”

하이오지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물을 내놓지 못했다. 아직까지 물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하이오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지만, 조노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우스의 뒷모습만 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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