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마계 원정대
트라쿠스와 피오레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제3목민관저 중앙첨탑 지붕 위.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에 동화되어 있었다.
“인간들이란…….”
퓨콤뜨아리트는 혀를 차며 빙하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친구,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들의 속성은 우리랑 더 닮은 것 같지 않은가?”
“흥, 인간들 역시 이 세계의 조화로운 존재. 조화를 깨는 존재인 네놈들과는 다르다.”
“네에, 어련하시겠어요! 그나저나 진짜 결행할 생각인가? 그러려면 지금 움직여야 할 텐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영 내키지가 않거든! 자네랑 내가 힘을 합하면 대놓고 움직이는 것도 가능할 거 같은데 말이지. 그냥 톡 까놓고 드러내면 안 될까? 그 기형아 놈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니까. 우리가 각성하기 전에 자칫 그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응?”
퓨콤뜨리아리트의 수다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회색로브의 사내가 로브를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네놈 말대로 시간이 별로 없군. 이제 움직여야겠지.”
“아니, 내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봉인은 그렇게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네놈까지 봉인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퓨콤뜨리아리트의 입이 반쯤 벌어진 것은 회색로브 사내의 말이 끝난 후 바로였지만 그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 건 한참 만이었다.
“내 말은……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거냐……?”
시민궁은 새벽부터 부산했다. 오늘이 바로 마계 검투가 벌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명분이야 마계 원정이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포로들로 이루어진 마계 원정군이라는 전제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종일 이루어지는 마계 검투에 이어 내일은 연합회의가 준비되어 있었고, 또 모래는 북부 통일을 축원하는 대규모 축제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늘이 그 첫째 날인 것이다.
시민궁 지하에 마련된 거울의 방에는 거대한 현황판과 정갈한 의자들이 준비되었고, 초대받은 자들을 위한 신선한 식재료들이 연신 시민궁 내부로 반입되고 있었다. 시민궁 광장 한편에서는 마계 검투에 참여하는 자들의 무기가 창고에서 꺼내져 정비되는 모습도 보였다. 경비를 서는 인원들도 평소의 두 배를 넘긴 상태였기 때문에 북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도니아 시민궁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조노량과 일행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지급된 식사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그들의 손과 발은 마나 팔찌는 물론이고, 엄지손가락 굵기의 쇠사슬로 철저히 단속되어 있었다.
마계 검투에 초대받은 자들도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속속 시민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법 널찍한 거울의 방이었지만 각 도시의 대표들과 아도니아 유력 인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벅찼기 때문에 초대장을 손에 쥔 인원은 총 삼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중 절반 이상은 거울의 방까지 입장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그들은 거울의 방 밖에 마련된 홀에서 검투의 결과를 중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계 검투의 시작은 오전 8시 정각. 요란한 나팔 소리가 멎고 거대한 징소리가 울리자 로크리안을 비롯한 세 명의 목민관이 제일 먼저 거울의 방으로 입장했다. 뒤를 이어 초대자들이 속속 거울의 방으로 입장을 시작했다. 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민궁 지하 2층, 거울의 방 바로 좌측이 바로 마계 광장으로 향해 있는 워프 게이트가 준비된 곳이다. 시민궁 임시 감옥에서 대기 중이던 포로들은 시간에 맞춰 워프 게이트로 이동을 시작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인지 이동하는 포로의 수는 한 번에 열 명씩으로 한정되었다. 또한 이 숫자는 한 번에 워프를 하는 인원수와도 일치했다. 포로들을 이송하는 경비병들도 일반 경비병이 아닌 전원 기사급으로 구성된 실력자들이었다.
“정말 철저하군. 이렇게 꽁꽁 묶어 놓은 것도 모자란단 말이냐?”
호송을 담당한 자들이 기사급임을 확인한 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일 먼저 끌려 나간 자들은 C클래스의 인원들이었다. 안된 얘기지만 그들은 밑밥이었다.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마물들에게 사냥당할 동안 워프 후유증을 극복한 B클래스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되는 형태였다. 마지막으로 A클래스와 S클래스가 투입되면 마계 검투의 본시합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번에 워프를 하면 좋겠지만 상당한 마법사를 붙인다고 하더라도 열 명이 고작이었다.
“우리가 갈 때까지만 버텨라!”
“레미, 이 새끼! 멋대로 죽지 마.”
“그래, 무조건 버텨라. 안 그럼 죽여 버릴 테다! 고이스! 알았지?”
먼저 가는 자들에 대한 격려가 이어졌다. 각기 출신 도시는 달랐지만 오랜 세월 함께했던 동료들이다. 하지만 격려하는 자들도, 끌려가는 자들도 결과를 모를 리는 없었다.
시합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워프 게이트를 타 본 검투반원들이다. 마물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에서 워프 후유증까지 극복하고 버틸 만큼 C클래스원들은 강하지 못했다. 아니, 실력의 고하를 떠나 워프 후유증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어쨌든 그들 중 본진이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C클래스원들이 나간 후 곧바로 B클래스가 끌려갔다. 그 후 여러 수용소에서 끌려온 기사급 인물들이 끌려 나갔다. 그들이 끌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삼십 분도 경과되지 않았다. 3개 호송조가 번갈아가며 포로들을 호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바닥을 울리는 급박한 발자국 소리.
징을 댄 가죽 신발 특유의 쇳소리가 조노량의 감방 쪽으로 밀려들었다.
부리오티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엉덩이를 털었다.
“헤헤, 갈 시간이 된 모양이야.”
아직까지 몸을 일으키지 않은 동료들을 돌아보며 샤마노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자, 파티를 준비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잠시 명상에 잠겨 있던 조노량이 몸을 일으켰다.
덜컥!
감방의 문이 열렸다.
재수 없이 불과 한 달 전 크로아지크 검투반에 편입되었던 아지크 출신의 기사 미야키의 어깨가 잠시 움찔했으나 곧 이빨을 앙다물었다. 그 어깨 위로 같은 아지크 출신 커리우스의 손이 얹혀졌다.
“나와!”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 기사다. 이십 대에 벌써 기사가 된 자라면 상당한 실력이리라. 하지만 아직 애송이일 뿐. 그의 고압적인 목소리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검투사들에게 그다지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샤마노프가 문을 나서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느껴졌는지 젊은 기사는 칭칭 감긴 샤마노프의 쇠사슬을 잡아 앞으로 밀쳐 버렸다. 쇠사슬의 무게 때문에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노련한 검투사답게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빨리빨리 못 움직이나? 더러운 켈커티스 놈들 같으니라고.”
나름 욕이라고 했겠지만 전장에서 단련된 입담은 분명 아니다. 곱게 자란 티가 역력하다. 그런 애송이에게 밀릴 샤마노프가 아니지만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마계 원정을 떠나야 할 운명의 검투사가 한낱 애송이 기사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지만, 먼저 출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역시 서둘러 가야 했다.
호송자들의 재촉에 따라 조노량 일행은 지하 감옥 지구를 지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일반적인 층 높이보다 서너 배는 긴 계단을 내려간 후에야 아래층에 도착했다.
계단 아래는 위층과는 다르게 인공적인 구조물이 아니었다. 자연 동굴을 적당히 다듬어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넓이는 소형 광장을 연상케 할 만큼 넓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동혈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그 끝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광장의 거친 벽면에 잘팍하게 흐르는 습기가 촘촘히 박힌 횃불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광장을 둘러싸고 일정한 간격으로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행정관으로 보이는 자들과 음식물을 든 쟁반을 나르는 자들이 보였다.
일행은 좌측 두 번째 동굴로 이동했다. 지하 광장의 위용에 퇴색되긴 했지만 동굴의 규모도 결코 작지 않았다. 너비가 오 미터에 이를 정도여서 마치 가도를 연상케 했다. 높이도 낮지 않아서 이 정도라면 네 바퀴 수레를 끌고 다녀도 넉넉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부아칸산의 광산과는 달리 바위로 이루어진 동굴인 탓에 무너질 걱정은 아예 없어 보였다. 당연히 버팀목 같은 것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애초에 암석으로 이루어진 벽면이라 우둘투둘 거친 질감을 주긴 했지만, 과하게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부분도 없이 깔끔하게 가공되어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마물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 실감을 못하고 있는 탓인지 조노량은 한가한 감탄까지 하며 돌문 앞에 이르렀다.
그 앞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중 지휘자로 보이는 자를 향해 애송이 기사가 나섰다.
“17차, 총 인원 10명.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거의 끝났다. 잠시만 대기하라.”
“옙!”
대답과 함께 호송하던 기사들이 일행의 뒤로 빠졌다. 앞에는 이십여 명의 기사들이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고, 뒤쪽으로는 지금까지 호송을 담당했던 십여 명의 기사가 배치되었다. 쇠사슬로 완전히 구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만한 인원이 아니었다.
그때 석문 안쪽에서 망치로 석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칠월의 광녀.”
“월하의 망치.”
“품격의 방패.”
미리 정해진 암호를 통해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다. 아도니아의 일반적인 암호는 상호 대응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쪽에서 암호로 질문을 던지면 그에 대응되는 암호가 돌아와야 하며, 돌아온 암호는 다시 한 번 이쪽의 대답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서로 간의 암호를 확인해야 행동이 이루어지는 형태인 것이다. 이번은 석문을 여는 행동이었다.
암호의 교환이 끝나자마자 다섯 명의 기사가 달라붙어서 석문을 밀기 시작했다. 석문에는 애초에 손잡이가 없다. 따라서 여닫기 위해서는 반대편에서 미는 것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것도 건장한 성인 다섯 명이 붙어야 밀릴 만큼 무거운 문이다. 잡을 것이 없는 안쪽에서는 다섯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문을 당겨 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석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밀려 나갔다.
“진입!”
지휘자로 보이는 자가 지시를 하자 호송했던 기사들이 일행을 석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석문 안쪽은 일종의 큰 석실이었다. 안쪽 경비를 담당하는 이십여 명의 기사들과 포로들을 이끌고 온 열 명의 호송기사들이 진입했는데도 절반이 채 차지 않을 만큼 여유 있는 공간이었다.
진입한 석문의 반대편 끝에 또 하나의 석문이 보였고, 석벽 양쪽 벽면으로 무기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눈에 익은 무기들이다. 자신이 애도인 오첩도와 단검, 샤마노프의 쇠그물과 단창도 눈에 띄었다.
양피지를 들썩거리던 사십 대 기사가 포로들을 향해 말했다.
“각자의 무기를 돌려준다. 추가로 원하는 무기가 있을 경우 우측에서 마음껏 선택해라.”
그의 손이 가리키는 벽면으로 수십 점의 각종 무기들이 도열되어 있었다. 벽면이 절반쯤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먼저 출발한 자들이 선택해 간 모양이다.
각자의 이름이 호명되고 자신들의 무기를 지급받았다. 그리고선 우측 벽면으로 가서 단도나 글라디우스 등을 추가로 챙겼다. 조노량 역시 단검 두어 개를 추가로 갈무리하고 정렬했다. 포로들의 모양새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온몸에 쇠사슬을 칭칭 동여맨 채 양팔을 나란히 앞으로 뻗어 팔뚝 위에 무기와 방패를 얹어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샤마노프는 쇠그물을 어깨에 걸치고 단창과 단검 그리고 글라디우스 두 개를 양 팔뚝에 나란히 걸고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 방패를 빼니 상당히 단출한 느낌이다. 조노량 역시 방패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오첩도와 단검 몇 개가 무장의 다였다. 하지만 나머지는 크고 작은 방패 때문에 마치 기합 받는 신참 같은 모습으로 대기해야 했다.
거추장스럽고 무겁기는 했지만 지금 향할 곳이 어디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행이 무장을 챙기자 사십 대 기사는 반대편 석문으로 가 글라디우스로 문을 두드렸다. 아까와 유사한 방식으로 암호를 주고받은 후에야 석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석실에 갇히면 꼼짝 못할 구조였다.
석문을 벗어나 다시 삼십여 미터의 동굴을 지나서야 널따란 홀에 도달했다. 홀에는 익숙한 모양의 게이트가 있었고, 다시 삼십여 명의 경비병들과 사제로 보이는 사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상당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사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두려움에 떨던 그 곳, 마계의 문으로 간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사제들이 나서서 포로들에게 축복을 내렸고, 쇠사슬이 풀렸다.
☆ ☆ ☆
멀리서 다가오는 그를 본 순간 제우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착각은 아닐까 후회도 했었지만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실루엣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어떻게 착각일 수 있겠는가? 얼굴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는 거리임에도 제우스는 그가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다가왔다.
쇠사슬을 칭칭 동여맨, 볼품없이 작고 마른 사내.
더럽고 헤진 가죽옷.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지저분한 손과 얼굴.
깎지 못해 덥수룩한 수염과 잔뜩 엉킨 머리카락.
그러나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그 얼굴.
제우스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 그것을 알기 위한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제우스는 그가 도착해서 게이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주시했다. 온몸의 성력이 그를 향해 요동치고 있었다. 끊임없이 성력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마치 성력이 곧이라도 눈앞에 솟구쳐 형태를 갖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체 못할 감동이 밀려들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솟아났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본능처럼, 자신의 영혼이 끌려가고 있었다.
제우스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꼭 당신을 확인하고야 말겠습니다.’
☆ ☆ ☆
주위를 인식하기는커녕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십여 초쯤? 조노량은 차라리 주저앉았다. 살갗이 얼얼할 정도의 냉기가 밀려들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짚은 손이 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몸을 굴렸다. 뭉개진 고깃덩어리가 되기 싫으면 어쨌든 게이트에서는 벗어나야 했다. 왼쪽으로 굴렀다.
두어 바퀴 정도 굴렀을 때 왼손에 뭔가 뭉클한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거친 돌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닥을 짚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들 사이로 희고 붉은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겹쳐 보인다.
조노량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희고 긴 물체가 손가락에 걸려 딸려 온다. 급히 손을 휘저어 흰 물체를 털어 내었다. 희고 긴 물체가 철푸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사람의 내장이다.
내장의 끝에 한 사내가 멍한 시선으로 조노량이 팽개친 자신의 내장을 한 손으로 힘겹게 끌어당겼다. 느리지만 꾸준한 동작으로 내장을 회수한 사내는 길게 갈라진 배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행동을 마친 사내의 멍한 시선이 잠시 조노량에게 머물다가 하늘로 돌려졌다. 살짝 미소를 지은 사내는 안심했다는 듯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죽는 순간에도 욕심을 부린 것일까? 아니면 온전한 모습으로 죽고 싶었던 것일까?
조노량은 주저앉은 채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배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다. 이미 생명이 끊겼을 터였건만, 사내의 피에서는 아직까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주변의 소음이 조금씩 증폭되기 시작했다.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고함소리, 쇠가 부닥치는 소리, 서걱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 비명소리……. 그리고 온몸이 마비될 듯한 한기.
등으로부터 게이트에서 지급받은 리넨 가방의 무게가 느껴졌다. 조노량은 붉게 물든 왼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사내에게서 받은 온기가 벌써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아직 어지럼증이 남아 있는 탓에 조금 비틀거렸다. 무장 상태를 확인했다. 출발 전 품에 갈무리한 단검들, 그리고 오른손에 굳건히 잡혀 있는 오첩도의 감촉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덩치의 괴물들과 검투사들이 게이트를 중심으로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본 기괴한 모습의 괴물들! 형태조차도 일정하지 않은 비정형의 흉측한 모습이었다. 이곳이 바로 불교신자들이 말하던 연옥이란 말인가?
괴물들의 숫자는 불과 열댓 마리, 그에 반해 괴물들을 상대하는 인원은 백여 명이 넘었다. 멍한 와중에도 마치 개미 떼에게 공격받는 풍뎅이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풍뎅이는 개미떼에게 둘러싸여 쩔쩔매는 그런 풍뎅이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집게이빨로 개미의 허리를 끊어냈고, 뾰쪽한 발끝으로 개미의 머리를 쪼개고 있었다. 반면 개미들의 이빨은 풍뎅이의 단단한 갑주를 뚫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이런 씨발! 브레우스, 뭐하는 거야!”
검투사들은 필사적으로 게이트로부터 괴물들을 밀쳐내고 있었다. 게이트를 확보해야 안전하게 다음 조가 도착할 수 있었고, 그들이 도착해야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벌써 수십 명이 희생된 상태였다. 대부분 먼저 도착했을 C클래스의 인원들이었고, 다른 수용소에서 차출된 기사들의 얼굴도 보였다. 대부분 처참하게 찢겨지거나 납작하게 이겨진 상태였다. 게이트 주위는 그들의 핏물로 질펀하게 번들거렸다. 그 핏물을 밟으며 새로 충원된 A클래스의 인원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조노량도 싸움이라면 이골이 나게 해 봤고, 끔찍한 주검도 제법 보았다. 하지만 이런 지옥도는 처음이었다.
거한인 브레우스의 투핸드소드가 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파충류 괴물의 머리를 강타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바위 정도는 단숨에 부숴 버릴 것 같은 위력이다. 하지만 괴물은 머리를 흔들며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정수리의 비늘 몇 개가 깨진 것 말고는 멀쩡했다. 그 뒤를 이어 크리들의 글라디우스가 덩치에 비해 왜소한 괴물의 팔을 거칠게 내려쳤고, 푸니킨의 글라디우스는 괴물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러 갔다. 괴물은 잠시 움찔했을 뿐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듯 기다란 꼬리를 휘둘렀다.
괴물 하나당 7~8명의 인원이 붙어 상대하고 있었지만 전세는 그리 밝지 못했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괴물들의 두꺼운 비늘과 가죽을 뚫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중병에 의한 무거운 공격만이 괴물들을 괴롭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로 인해 꾸준히 새로운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괴물은 거세게 저항하며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들을 당장 씹어 먹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듯 괴성을 지르며 포효하고 있었다.
괴물을 동료들에게 맡기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브레우스가 회색빛 대기 속으로 거친 숨을 토해 놓는다. 통곡의 계절에 버금갈 정도로 찬 공기지만 왠지 끈적거리는 느낌이다.
지쳐 보인다.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조노량은 자신의 뺨을 때리고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제야 얼어붙은 대기의 냉기가 느껴졌다. 두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주위의 경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떨리던 손이 천천히 진정되고 냉정을 되찾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조노량이 외쳤다.
“브레우스, 손!”
거친 호흡을 가다듬던 브레우스가 미친놈 쳐다보듯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 손은 왜?
조노량의 오첩도가 뽑혀져 나왔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소. 팔을 내미시오!”
답답하다는 듯 오첩도를 치켜드는 조노량의 모습을 보고서야 브레우스는 조노량이 뭘 하려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팔찌는 마법 아이템으로, 일반 검보다 제련도가 좋을뿐더러 손목에 밀착되어 있는 상태다. 팔이 끊어지면 끊어졌지 팔찌를 끊을 수는 없었다. 오오라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검이 극도로 정교해야 가능한 일이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오오라가 실리지 않은 검으로 팔찌를 끊는 건 무리다!”
“그냥 팔 내밀어!”
조노량의 입에서 거친 반말이 튀어 나왔다.
“이런 미친…….”
평소와 달리 강경한 조노량의 모습에 브레우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마계의 문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이런 저항 자체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팔찌가 끊어지든 팔이 끊어지든 무슨 상관이랴?
이미 수많은 검투사들이 마물들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주위를 둘러봐도 제정신으로 보이는 자가 없었다. 모두들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브레우스 역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서겅!
단 두 번의 칼질이었다.
팔찌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깨끗이 잘려 나갔다. 오른 손목에서 피가 조금 흘러내렸지만 별것 아니다.
브레우스는 멍한 표정으로 조노량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노량의 팔에 채워져 있는 마나 팔찌로 옮겨져 갔다.
“어, 어…… 노리앙?”
“뒷!”
조노량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브레우스가 급히 선회하며 투핸드소드를 휘둘렀다. 반쯤 돌아갔을 때쯤부터 투핸드소드에서 푸른 오오라가 급격히 팽창되어 나왔다.
빡!
브레우스의 뒤편으로 달려들던 괴수의 마빡에 투핸드소드가 반날쯤 박혀 들어갔다. 어찌나 단단하던지 오오라가 실린 투핸드소드에도 잘려나가지 않는 것이다. 극도의 고통과 흥분으로 괴물이 포효했다.
브레우스는 반쯤 박힌 투핸드소드를 뽑아내며 재차 같은 자리를 가격했다.
쩍!
투핸드소드의 검첨이 괴물의 두개골을 가르고 깊숙이 틀어박혔다.
그 순간 괴물의 오른쪽 뾰쪽한 갈고리손이 브레우스를 향해 휘둘려왔다. 브레우스가 다급성을 내뱉으며 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두개골에 너무 깊이 박힌 탓인지 투핸드소드가 뽑히지 않았다. 그 잠깐의 멈칫거림으로 인해 이미 갈고리를 피할 시간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오첩도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썽둥!
괴물의 오른손이 단숨에 잘려 나갔다.
잘린 오른손이 허공을 부유했다. 어찌나 예리하게 잘려 나갔는지 허공을 휘도는 단면이 희게 반짝거렸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잘린 양쪽 단면에서 동시에 피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최후의 일격을 날렸던 괴물의 육중한 몸이 오른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파괴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은 아닌가 보다.
쿵!
무거운 땅울림과 함께 첫 번째 괴물이 쓰러졌다.
“워! 노리앙? 으하하! 좋아, 좋아!”
이유를 따질 틈도, 따질 이유도 없었다. 브레우스는 광소를 터트리더니 쏘아지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 개똥불에 석 달간 구워질 마물들아! 브레우스 님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마!”
조노량은 급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 워프 후유증에서 벗어난 샤마노프가 멍청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레우스와 같은 의문을 담은 눈빛이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조노량이 말했다.
“팔을 내미시오.”
팔찌가 제거된 샤마노프 등이 전투에 가세하자 조금씩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단단했던 괴물들의 비늘도 오오라가 실린 검에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게이트를 중심으로 한 원진이 조금씩 넓어져 갔다.
아직 전투 중인 자들도 있어서 모든 사람의 팔찌를 제거한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 있는 자들의 팔찌는 대충 제거한 것 같았다. 그러고서야 조노량은 주위를 둘러 볼 수 있었다.
검투장을 열 개쯤 합쳐 놓은 것 같은 크기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반투명한 회색빛 대기가 시야를 가로막았지만 눈에 기를 집중하자 제법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게이트를 둘러싸고 다시 수십의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계 광장 밖에 위치해 있었던 괴물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지, 광장으로 새로 진입하는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둘인 놈, 다리가 여섯인 놈, 풍뎅이를 닮은 놈, 파충류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도마뱀 등 괴물들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직립형 덩어리들과는 또 다른 괴물들이었다.
이렇게 끔찍한 모습이라니? 조노량은 진저리를 쳤지만 검투반원들과 켈커티스 출신의 기사들은 거침없이 괴물들을 상대해 가고 있었다.
☆ ☆ ☆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어림잡아 백여 명쯤으로 파악되었고, 오육십 명이 이미 육편이 된 상태였다. 그 짧은 시간에 삼분의 일이 쓰러진 것이다. 그만큼 전황은 만만치 않았다.
팔찌를 제거한 자들 중 검이 정교한 자들이 앞으로 나아가며 동료들의 팔찌를 제거했다. 그 사이 다음 조가 포탈에 나타났고, 조노량은 상황을 주시하며 그들의 팔찌도 순서대로 제거해 나갔다.
팔찌가 제거되자 일방적으로 몰리던 전투의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 마나를 회복하자 중병뿐만 아니라 모든 무기들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시 서너 마리의 괴물들이 바닥에 누웠다. 한결 여유가 생겼다.
일행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말로만 듣던 마물들이군. 끔찍하게도 생겼군.’
조노량은 중얼거리며 샤마노프의 옆으로 쇄도하는 껍데기가 번지르르한 괴물의 목을 절단했다. 새로 전투에 가세한 놈이다. 비교적 작은 크기에 빠른 속도와 날카로운 손날을 가졌지만 조노량으로서는 오히려 상대하기가 편했다.
샤마노프가 벙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쇠그물을 던져 잡아챔과 동시에 단창이 마물의 목에 쑤셔 박혔다. 꿈틀거리는 놈의 머리를 밟고 단창을 뽑아내더니 심장 어림을 향해 다시 한 번 단창을 박아 넣었다. 움직임이 멈춘 것을 확인한 샤마노프가 다시 전방을 향해 그물을 들었다.
또 한 번 게이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조노량은 게이트 쪽으로 물러났다. 일행 중 가장 정교한 검을 가진 자를 뽑으라면 단연 조노량이었기 때문이다.
웅웅
작은 진동이 일더니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빛의 그림자 뒤로 사람의 형상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워프가 완료되었지만 후유증 탓에 아직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여덟 명인가? 마지막이 틀림없군.’
몇 초는 더 지나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게이트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그 뒤를 이어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움직인 자는 롤이었다. 저런 회복력이라니? 그는 역시 괴물이었다.
조노량은 오첩도에 검기를 불어 넣고…….
조노량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롤은 다른 자들과 달리 팔찌를 차고 있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게이트를 벗어난 롤이 조노량을 발견하고 말했다.
“누군가? 노리앙이군. 팔찌를 제거해 주겠다. 팔을…….”
아이러니하게도 조노량의 손목에는 아직 마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마나 팔찌의 영향을 받지 않는 탓에 애초에 제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워프 후유증도 채 회복하지 못한 광전사 롤에게 팔을 맡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더구나 조노량은 팔찌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굳이 제거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쥬시아누스가 비틀거리며 게이트에서 걸어 나왔다.
“쥬시아누스, 팔을 드시오!”
“쥬시, 팔을 올리게!”
조노량과 롤이 동시에 외쳤다.
“?”
조노량과 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둘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쥬시아누스가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그때 샤마노프가 뒤로 빠지며 롤을 만류했다.
“노리앙에게 맡겨 두십시오.”
롤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소리쳤다.
“무슨 미친 소리냐?”
샤마노프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샤마노프의 팔에는 이미 팔찌가 제거되어 있었다.
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조노량을 살펴보았다.
그제야 조노량의 오첩도에 어린 아지랑이같이 투명한 오오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순간 들어 올린 쥬시아누스의 팔을 향해 두 줄기 빛이 쏘아져 나갔다.
슈겅! 슈겅!
미세한 파열음과 함께 쥬시아누스의 팔찌가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정교하게 절단되었는지 쥬시아누스의 팔에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자신이 했다면 제법 부상을 각오했어야 할 것이다.
조노량의 오첩도에 의해 연이어 예니에프와 커트리안 등의 팔찌가 제거되었다.
어느 정도 후유증에서 벗어난 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팔찌를 차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걸어 나오는 자는 조노량이 알지 못하는 자였다.
사제복을 입은 젊은 사내였는데, 걸어 나오다 말고 조노량을 보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까 보았던 사제군. 그런데 그가 왜?’
조노량은 사제들 틈에 끼어 축복을 내리던 젊은 사제를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때 롤이 멍청한 표정을 한 채 조노량을 불렀다.
“노…… 리앙?”
그의 시선은 여전히 조노량의 팔찌에 고정되어 있었다. 롤의 의문을 알고 있는 조노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말입니까?”
조노량은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를 툭툭 건드리며 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짜인 모양입니다. 고장이 났던지…….”
“엥? 말도 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는 마나를 모른다, 대신 기를 다룰 뿐이다, 그래서인지 마나 팔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등등 시시콜콜 이유를 설명하기도 그랬고, 기실 본인조차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내용이라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무심한 눈빛으로 조노량을 일견한 커트리안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마나 팔찌가 풀린 덕에 상황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커트리안이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아직까지 커트리안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투단뿐만 아니라 다른 수용소에서 온 자들도 커트리안의 지휘에 거부감 없이 따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도착하자 눈에 띄게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전 인원이 그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어 나갔다. 목적의식을 갖고 조직적인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파악된 전체 인원은 157명. 그중 중상자가 14명이었고, 전투력은 잃었으나 이동하는 데 지장이 없는 경상자가 23명이었다. 사망자는 50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이미 사망한 자의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자 120명은 크게 두 개 기대로 나뉘었고, 각 기대는 10명씩 6개 조로 나뉘었다. 두 기대가 각자 반원을 그리며 포진하자 적당한 크기의 원진이 완성되었다. 부상자들은 중앙으로 모았다. 그러자 함께 온 사제가 나서서 치료를 시작했다.
기대의 지휘는 쥬시아누스와 예니에프가 맡았다. 롤은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정신을 놓기 때문에 지휘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물들을 상대로 광분하고 있었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핵심 전력인 S클래스와 A클래스가 모두 가세하자 전황은 조금씩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 시간 아도니아 시민궁 지하에 위치한 거울의 방에서는 2차 베팅이 조금씩 무르익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1차 때와는 완전히 분리된 현장 베팅으로, 원정대가 버티는 시간을 10분 단위로 끊은 후 1시간 앞서 예측하여 돈을 거는 것이다. 자신이 베팅한 시간이 경과하면 베팅한 돈을 모두 날리는 구조였다. 그럼 다시 다음 시간을 예측해 베팅을 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베팅을 해 나가다가 원정대가 전멸하는 시간을 맞힌 사람들끼리 그동안 쌓인 베팅금을 비율대로 분배해 가는 방식이었다.
미리 베팅을 하지 않고 버틸 수도 있으나, 베팅 타이밍을 못 잡을 경우 주최 측에서 건 1천 골드의 상금과 함께 그동안 건 골드를 모두 날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매번 시간이 경과할 때마다 베팅을 하는 편이 안전했다. 물론 베팅액의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거울의 방 우측에 걸린 거대한 목재 현황판에는 1차 베팅의 각 시간별 베팅금과 배당률이 정리되어 게시되어 있었다. 각 베팅 구간은 2차와 달리 30분 단위로 끊겨 있었고, 베팅 금액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구간이 3시간, 3시간 30분, 4시간의 3개 구좌였다. 전체 베팅금의 80%가 이 시간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궁 시합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개별 전투에 대한 승패를 맞히는 형태의 즉석 베팅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재 경과시간 1시간 10분가량, 거울을 통해 본 현장의 상황은 상당히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초반 급격히 무너지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상보다 마물들의 수가 적었다. 이대로라면 마계 검투가 상당히 길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거대한 수정거울을 통해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트라쿠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마물들의 개체수가 너무 적었다.
마계 광장의 지배자들, 저주 받은 마물 흄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평소라면 발에 채일 정도로 득시글거렸을 하급 마물인 슬라임이나 앤트자이언트, 밴더스내치, 다크오크 등도 보이지 않는다. 싸움에서 패한 마물들이 자기 자리를 내준 것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이름도 알 수 없는 마물들이다. 기존 마물들을 몰아내고 마계 광장을 접수한 만큼 강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숫자가 문제였다. 어제만 해도 이백여 마리는 눈에 띄었는데, 지금 보이는 숫자는 고작 백여 마리가 다였다. 기존 마물들을 추격해 숲속으로 진출한 탓일 것이다.
저 넓은 광장에 고작 백여 마리라니? 수천, 수만 마리의 하급 마물들이 날뛰던 것이 바로 보름전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게다가 저놈은 뭐란 말인가? 트라쿠스의 눈에는 검은 머리의 왜소한 사내가 검투사들의 마나 팔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모습이 잡혔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다. 만약 마계 검투가 기획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포섭하려던 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의 손목에는 아직까지 마나 팔찌가 번쩍이고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마나 팔찌를 차고서도 오오라를 끌어 올릴 수 있단 말이냐?
고장이냐? 가짜냐? 누군가 바꿔치기를 한 것인가? 그렇다면 왜 하필 저놈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마나 팔찌를 극복한 것일까?
그 사이 마지막 전송자들이 마계 광장에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광전사로 알려진 검투사 롤은 아예 마나 팔찌를 차고 있지도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내부자 중 누군가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음모가 진행 중인 것인가?
트라쿠스의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다.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간 것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꺼림칙했다.
그때 제우니푸스가 트라쿠스의 등 뒤로 다가왔다.
☆ ☆ ☆
트라쿠스가가 주도하는 보수파의 든든한 버팀목 중 하나가 제우니푸스다. 하지만 제우니푸스에게 머무는 트라쿠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같은 파벌이라고는 하지만 성격이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탓에 사사건건 부닥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을 것 같군. 제우니푸스 장군.”
“롤의 일이라면 미안하게 됐소.”
그럼에도 제우니푸스의 표정은 덤덤했다.
“역시 자네의 작품인가?”
“제우스 군을 맡기는 입장에서 작은 배려를 한 것뿐이오.”
성력 충만까지 받은 사제인 제우스 앞에서라면 응당 존대를 해야겠지만 트라쿠스 앞에서는 제우스군이라고 칭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트라쿠스와 마찬가지로 제우니푸스에게 있어서도 제우스는 어려서부터 지켜봐 왔던 조카뻘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불복종의 책임을 묻는다면?”
“감수하겠소.”
트라쿠스는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저 노리앙이라는 자의 팔찌를 바꿔치기한 것도 그댄가?”
그제야 제우니푸스의 시선이 거울로 향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울이 제우니푸스의 눈에 들어왔다. 미세하게 일렁이는 푸른색 표면으로 마계 광장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말이 거울이지, 거울이라기보다는 수면에 가깝다. 수직으로 서 있으면서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뿐이지 표면의 질감은 영락없는 수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거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작동을 중지했을 경우 거대한 수정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우니푸스는 트라쿠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작은 사내가 막 도마뱀 형태를 한 마물의 허리를 절단하고 있었다. 탄성이 지어질 만큼 깔끔한 솜씨다.
“멋지군.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저 마물이 뭔 줄 아는가? 지촉이라는 마물이지. 몸집은 작아도 가죽이 철보다 질기다는 놈이네. 오오라가 없이는 절대 절단할 수 없는 가죽이지.”
그제야 사내의 손목에서 희게 반짝이는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놀란 제우니푸스의 의문에 트라쿠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 ☆ ☆
마계 광장에 진입한 지 어느덧 2시간 가까이 흘렀다.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마물들의 숫자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새로 마계 광장으로 진입하는 놈들도 제법 되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적어진 상태였다. 더구나 마물들의 특징이 파악되자 상대하기가 월등히 편해졌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기력의 소모가 극심한 오오라를 남발한 탓에 대부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헉, 커트리안 님!”
샤마노프였다. 커트리안은 샤마노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점인 것이다.
꼿꼿이 서서 광장을 노려보던 커트리안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제니…… 윙.”
부상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벌어진 가슴을 억지로 오므리며 헐떡이고 있는 자도 있었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사람, 절단된 사지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이 하나 눈에 띄었다. 제우스라는 이름의 아도니아 사제였다.
말끔했던 흰색 사제복은 이미 피범벅이었다. 다행히 얼치기 사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옷이 피로 물든 만큼 부상자들의 출혈도 멎어 갔다. 시기적으로는 봄, 하지만 통곡의 계절에 버금갈 정도의 추위 속에서도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느라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 얼핏 보았을 때는 가장 부상자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였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향했을 때 제우스는 작은 단도를 이용해 한 사내의 다리를 절단하고 있었다. 아니, 절단이라기보다는 생가죽 한쪽을 잘라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뼈와 근육이 모두 너덜너덜하게 뭉개지고 끊어져 오직 허벅지 안쪽 가죽만이 아슬아슬하게 둔부에 붙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내의 다리를 끊어낸 후 제우스는 심장 박동에 맞춰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두 손으로 감아쥐고 눈을 감았다. 사내의 절단된 부위를 감싸 쥔 손에서 육안으로도 구분이 될 만큼 확연히 밝은 빛이 솟아올랐다. 뿌연 우윳빛 발광 현상이 2분여간 진행되자 감싸 쥔 손가락 틈으로 뭉클뭉클 뿜어 나오던 핏줄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시 1분가량이 지나자 출혈이 완전히 멎었다.
제우스는 그제야 사내의 다리에서 손을 떼고 소매로 눈을 비볐다. 부상자들의 피와 함께 흘러내린 땀방울이 자꾸 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가운 것은 괜찮으나 같이 흘러들어간 피가 눈을 깜박이기 힘들 정도로 뻑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매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피로 흠씬 젖었다가 다시 버석하게 얼어붙은 소매는 제우스의 눈을 닦아 줄 수 없었다.
다리가 절단된 상태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있던 사내가 일어나 앉았다. 왼쪽 어깨가 움푹 팬 모습이었다. 이미 왼팔도 절단된 상태였던 것이다. 사내는 남은 한 손으로 품에서 천 조각을 꺼내 제우스의 눈을 닦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고맙소. 로리안의 축복이 있기를!”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누워 계십시오. 로리안의 가호가 있기를!”
제우스는 서둘러 다른 부상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한 부상자들이 많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커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니윙…….”
막 치료를 마친 사내의 눈이 커트리안을 향했다.
“커트리안 님…….”
커트리안의 눈이 감겼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커트리안의 눈꺼풀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떠나야 할 때다.”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20년을 넘게 모셔온 분이다. 그가 포로로 생포될 때도 함께였고, 크로아지크 검투단에 배속될 때도 함께였다. 하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가셔야 할 땝니다.”
커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무거워 보인다. 커트리안의 고개가 다시 앞쪽으로 돌려졌다. 그 뒤를 향해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주 잠시간 비통함이 스쳤던 커트리안의 눈빛이 다시 무심한 눈으로 돌아갔다.
“스마르.”
커트리안의 뒤를 지키던 스마르가 부상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커트리안을 모셔온 사내다. 여전히 냉정한 스마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말에 부상이 심한 자들은 절망적인 한숨을 지었다. 언제까지 광장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니, 움직이긴 해야 했다. 부상자들을 포기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인 것이다.
일부 울먹이는 자들은 있었으나 매달리는 자들은 없었다.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지만 다리가 멀쩡한 자들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에 부상을 입은 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스마르, 커트리안 님을 부탁하네. 그리고 젝이…… 오지 않았네. 처음부터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제 부탁하네. 내 안식을 자네 손으로…….”
스마르 역시 알고 있었다. 스마르 자신의 조카인 젝의 모습이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야 의문이 풀리고 있었다. 검투반 내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었던 탈출 계획을 어떻게 수용소장인 아드리안이 눈치채고 있었는지.
스마르는 말없이 클레이모어를 뽑아 들었다. 브레드소드가 망가진 이후 다시 만든 것이기에 질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다른 무기들과 달리 날만큼은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이걸로 오랜 동료며 친구에게 안식을 줄 것이다.
스마르는 앞섶을 들어 얇고 넓은 검면에 묻은 마물들의 진액을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동료를 보내는 검이다. 동료에게 더러운 마물들의 흔적을 남길 수는 없었다.
스마르가 제니윙 앞에 서자 제니윙은 뿌연 하늘을 잠시 응시하고는 외쳤다.
“헤르모스여, 전사의 혼을 받아주소서. 켈커티스! 만세!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는 전사로서 부끄럼 없는 생을 살았고, 용맹하게 싸우다 갈 것임을 헤르모스에게 알리는 의식어였다. 전투를 앞두고도, 죽음을 앞두고도, 북부의 전사들은 이 구호를 외쳤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수많은 함축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 헤르모스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 부끄러움 없는 전사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제니윙이 목이 터져라 외치자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부상자들이 모두 따라 외쳤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외침이 끝나자 앉을 수 있는 자는 앉아서 고개를 숙였고, 앉을 수조차 없는 자들은 누운 채로 심장 어림의 흉갑을 헤쳤다. 동료를 위한 그들의 마지막 배려였다.
스마르의 클레이모어가 대기를 갈랐다.
제니윙의 목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목은 또르르 굴러 커트리안의 발치께에서 멎었다.
커트리안이 무릎을 굽혀 제니윙의 뒷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고는 허리를 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무심했던 눈빛에 애잔함이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마르의 입에서 나지막이 아고투스 아르고스라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악!”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쪽을 바라보던 로리안의 사제가 비명을 토해 놓았다.
샤마노프가 발광하려는 로리안의 사제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부상자들은 한 사람씩 차례대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리안의 사제 제우스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신을 모시는 사제로서, 의술을 행하는 사제로서 동료의 생명을 거두고 있는 장면은 참아내기 힘든 장면이었다.
검투장에 배속된 사제로서 끔찍한 모습도 수없이 보았고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사제의 임무는 그들을 살리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죽음을 바라본 경험은 없었다. 그것도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는 동료의 목숨을 망설임 없이 거두는 모습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반발광 상태를 보이며 스마르에게 달려가려는 제우스를 샤마노프가 억지로 붙잡아 놓고 있었다. 제우스는 스마르를 말리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노련한 전사인 샤마노프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제발! 안 돼! 으아아.”
샤마노프가 제우스를 달랬다.
“사제님 진정하십시오. 그들에게 안식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완치될 때까지 여기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설마 저들을 마물들에게 던져줄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들은 전사로서 죽게 되는 겁니다. 깨끗하게 끝내주는 것이 그들을 위하는 길입니다!”
제우스의 머리는 샤마노프의 말을 이해했지만 그의 가슴은 이해하지 못했다. 부릅떠진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벌어진 입에서는 마구 침이 튀었다.
“시끄럽다. 아도니아 놈!”
검투사 한 명이 제우스를 윽박질렀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그러는 사이에 몇 차례의 외침과 몇 차례의 비명소리가 이어졌고, 부상자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 ☆ ☆
부상자들이 정리되자 잠시간 침묵하고 있던 커트리안이 짧게 외쳤다.
“‘전진하는 창’으로 남서쪽을 뚫는다. 선두는 쥬시아누스! 좌측 선은 예니에프, 후는 롤! 우측 선은 스마르, 후는 노리앙! 셋을 세겠다. 위치로!”
노리앙으로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커트리안의 외침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마계의 문. 이곳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터져 나온 외침임에도 모두의 가슴에 묘한 투지를 일깨우고 있었다.
왠지 목표가 생겼다는 안도감에 조노량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원진에 변화가 왔다. 호명 받은 자들은 좌우 동료에게 위치를 넘기고 남서쪽 방향으로 이동했다.
‘전진하는 창’이 무엇인지 모르는 조노량이었지만 다른 자들의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그 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쥬시아누스가 커트리안의 앞으로 가 섰다. 그 좌측으로 예니에프가 섰고, 예니에프에게 기절할 정도의 강도로 뒤통수를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롤이 투덜거리며 예니에프의 뒤로 비스듬히 자리를 잡았다. 스마르가 커트리안의 우측에 자리를 잡자 조노량은 롤을 흉내 내듯 스마르의 뒤편에 비스듬히 위치를 잡았다.
“전원, 개진!”
스마르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원진이 꿈틀거리며 삼각형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완벽한 삼각형은 아니었지만 대충 모양이 갖춰지자 커트리안이 글라디우스를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켈커티스 동맹의 전사들이여! 전진이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커트리안의 입에서 전투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마계 광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 둘! 셋! 진격!”
샤마노프는 노리앙의 우측 뒤를 받치고 있었다. 덕분에 노리앙의 움직임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샤마노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관계로 진을 펼칠 때 알아서 이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두를 차지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최강 클래스라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스스럼없이 4선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전진하는 창이라는 진은 앞쪽으로 갈수록 강한 무력을 필요로 한다.
애초에 전투의 형태가 그렇다.
진의 맨 선두를 담당한 자가 강한 힘으로 적의 방어막을 뚫는다. 이때 선두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필요는 없다. 단지 밀쳐 내거나 물러서게 하는 역할만으로 족하다. 이를 퍼스트맨이라고 한다.
2선에 선 자를 세컨이라고 하는데, 그의 역할이 바로 퍼스트맨에 의해 밀려난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다. 상대는 미처 자세를 추스르기도 전에 세컨의 공세를 받아내야 했다. 상대는 마치 혼자서 여러 명을 상대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세컨 역시 마찬가지다. 창날이 전진함에 따라 상대해야 할 적진도 두꺼워지기에 보통 한두 명의 적을 더 상대해야 한다. 이들은 적당히 타격을 가한 상태에서 3선에게 넘기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진의 형태가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진하는 창이라는 진의 요체였다. 일견 단순하지만 적진을 돌파할 때 이만큼 위력적인 진도 없다.
더구나 상대의 강약에 따라 진의 변화도 유연한 편이다. 적진을 돌파하는 행위라는 목표는 진의 변화를 일부러 지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달성될 수 있다.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진형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뒤로 갈수록 저항이 강해진다. 그 저항 탓에 후위는 더 이상 넓어지지 못하고 자동으로 직선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즉 오각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유연한 진의 변화로 인해, 선두만 충분히 강하다면 매끄럽게 적진을 돌파해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저항이 약하다면 삼각형이 더욱 넓어지면서 상대 진영에 더 많은 타격을 가하고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을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마물들을 상대로 더 많은 타격을 가하고 빠질 필요는 없다. 목표는 타격이 아니라 돌파였다. 때문에 7선 정도에서 벌써 오각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8선 정도까지 유지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7선 정도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오각형을 이루는 시작점이 빠르면 빠를수록 후위가 길어지기 때문에 후위의 위험도가 커진다. 돌파당한 적들이 진형을 수습하고 반격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정도가 되면 길어진 꼬리가 절단 당할 걱정을 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정도면 돌파라는 목적으로는 적당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샤마노프가 탄성을 발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스마르는 A클래스다. 노리앙 역시 A클래스다. 반면 예니에프와 롤은 자타가 인정하는 S클래스였다. 더구나 예니에프는 아도니아 검투사들 중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맡고 있는 좌측은 6선까지 벌어진 채 좀처럼 넓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우측보다 1선이 부족한 것이다.
샤마노프는 그 이유를 노리앙에게서 찾았다.
그의 활약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다.
스마르라는 사내의 무위가 실질적으로는 예니에프에게도 그다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노리앙이 맡고 있는 우측 3선에서의 처리량은 롤의 처리량에 비해 월등했다. 롤이 글라디우스를 한 번 휘두를 때 노리앙의 오첩도는 두 번, 세 번 나가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공격 패턴은 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두세 번의 칼질 중간에 틈틈이 끼어드는, 신체를 이용한 공격 빈도도 만만치 않았다. 신체를 이용한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공격이 단순히 주먹이나 발을 이용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팔꿈치나 무릎은 물론, 어깨나 심지어는 머리도 공격 무기였다. 마물들에게 오오라가 어리지 않은 신체로 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공격을 받고도 마물들이 어느 정도는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공격 빈도수가 많은 만큼 상대할 수 있는 마물의 숫자도 많았고, 타격량도 많았기 때문에 샤마노프 자신이 처리해야 할 부담이 월등이 경감되었다. 그에 따라 자신도, 자신의 후위도 롤의 후위보다 편하게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비교적 크기가 작은 마물들은 스마르의 타격을 받고 노리앙에게 왔을 때는 거의 처리가 끝나 버렸다. 4선을 맡고 있는 자신이 마무리할 필요성이 거의 없었다.
크기가 크고 강한 놈들이어야 자신에게 넘어오는데, 그나마 상당한 타격을 받아서 돌파를 하는 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물론 자신 역시 후위를 위해 최대한 타격을 가하고 5선의 브리오티스에게 넘겼다.
그때 샤마노프의 상념을 뚫고 노리앙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샤마노프!”
노리앙의 외침에 샤마노프의 단창이 날았다. 노리앙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아도 안다.
신장이 샤마노프보다 반 배는 큰 염소머리 마물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낮아진 마물의 턱으로 오오라가 어린 샤마노프의 단창이 빠르게 뻗어 나갔다. 강렬한 저항감이 밀려들었지만 샤마노프의 단창은 비교적 여린 턱살을 찢으며 파고들었다. 오오라까지 끌어올린 단창으로 가장 연약한 부위를 타격했음에도 이 정도 저항감이라면, 역시 단단한 놈이다.
샤마노프는 뻗어진 속도만큼 빠르게 단창을 회수했다. 마물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런 샤마노프의 눈에 마물의 다리가 들어왔다. 그제야 마물이 중심을 잃은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쪽 다리가 완전히 절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이 마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샤마노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새로운 마물을 향해 그물을 뿌렸다. 그물을 펼쳐 상대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모아서 원하는 방향으로 밀어내 버리는 동작이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마물들에게나 통할 만한 공격이다. 상대가 조금만 더 힘이 강하거나 무거웠다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몇 번인가 상대해 본 마물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그물을 날렸다.
급한 상황을 처리하자마자 샤마노프의 시선이 노리앙에게 향했다. 앞선 자가 토스한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항시 그를 주시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노리앙의 움직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욱 컸다.
노리앙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대열을 이탈했다. 아니 이탈하지 않았다. 눈을 깜박였을 때는 이미 자신의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샤마노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엄청난 덩치의 마물을 향했다. 노리앙이 자리를 이탈한 원인이 된 마물이었다. 역시 몇 번 마주친 마물이다. 엄청난 힘과 단단한 가죽을 가진 파충류과 생물이다.
마물의 들려졌던 턱이 아직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노리앙의 장기 중 하나인 발길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샤마노프가 놓친 과정이 있었다. 들려진 마물의 턱이 천천히 제자리로 내려지는 와중에 그 아래 목 부분이 순간적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 순간적인 시간에 발길질뿐만 아니라 검까지 날렸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빨랐는지 마치 목이 저 혼자 갈라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갈라진 목에 하얀 속살이 비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피분수를 뿜어냈다.
마물이 쓰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게 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물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호흡 정도는 충분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만약에 호흡이 필요한 생명체라면 말이다.
샤마노프가 놀란 것은 단지 노리앙이 빠르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또한 워프 초반에 동료들을 열 명 이상 살해한 놈이 바로 저 종류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 마물의 가죽이 어설픈 오오라로는 절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아니었다.
샤마노프가 놀란 진짜 이유는 노리앙의 성장 속도였다.
샤마노프는 빠르기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만약 커트리안의 지시가 있고 자신이 원했다면 충분히 시민궁 검투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 원천이 빠르기였다.
빠르기라는 것은 몸놀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을 뒷받침해 줄 만한 눈이 담보되어야 한다. 샤마노프는 몸뿐만 아니라 눈도 충분히 빨랐다.
그런데 노리앙의 움직임은 그런 샤마노프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아도니아로 끌려오기 직전까지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트라쿠스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성장했단 말인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 ☆ ☆
샤마노프는 노리앙이라는 볼품없는 사내가 검투반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법 빠르고 또 훌륭한 반사 신경과 임기응변의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당시의 노리앙은 가능성이 보이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잘해야 B클래스 상급? 마나를 다루게 된다면 A클래스까지 성장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나를 다룬다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체계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자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샤마노프의 예상을 깨고 노리앙은 불과 몇 달 만에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때쯤 커트리안이 자신에게 노리앙을 훈련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커트리안이 처음 젝을 노리앙에게 붙여 주었을 때도 과하다고 생각했다. 젝이 비록 B클래스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의로 클래스를 낮춘 실력자였다. 제대로 싸운다면 A클래스에서도 상급에 속할 만한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노리앙을 맡겼다. 커트리안의 지시에 불만을 가질 만큼 대담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의외였다. 커트리안은 노리앙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단 일 개월 만에 싹 지워지고 말았다. 딱 그쯤이었다.
노리앙을 지도한 지 일 개월이 지나자 노리앙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6개월 만에 망신을 당했지만 말이다.
일러도 너무 일렀다. 마나도 모르던 자가 일 년여 만에 자신을 넘어섰다. 나름 천재라는 말을 듣고 성장했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을 넘어서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봐야 했다. 첫 번째 사내인 예니에프야 애초에 실력 차이도 별로 없었고, 체계적인 수련을 거친 천재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노리앙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이제 자신의 경지를 두어 단계는 뛰어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도 자신이 장기로 삼은 속도 면에서 말이다.
‘칫.’
동료의 성장을 질투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둔재가 된 것 같아 조금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경이로운 사내였다.
‘어느 부족 출신이지?’
외모로 보아선 북부 원주민 출신이지 싶었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북부에는 마계전쟁 이후 워낙 다양한 종족들이 얽혀 버려서 외모만으로는 무엇 하나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종족이 마나 팔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종족은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타고난다는 말을 들은 바 있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으니 그 종족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나 팔찌는 저항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나 자체를 봉쇄하는 장치인데,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노리앙이라는 사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평소 말수도 적을뿐더러 왠지 자신의 이야기를 꺼리는 듯한 느낌이어서 물어보질 못했다. 크리들이나 하이오지 등 친하게 지내는 자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도 노리앙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니 그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사내가 나타난 것일까?
‘만약 그가 속한 종족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샤마노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종족 전체가 저 모양이라면 아마 북부는 그들에 의해 진즉에 통일되었을 것이다. 1년 만에 마나를 다루고, 북부 최강의 전사들을 넘어서는 종족이라니? 말도 안 된다.
천재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천재라고 믿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불길한 느낌의 회색 숲까지의 거리는 이제 이백여 미터를 남겨두고 있었다. 전방을 가로막는 마물들의 수는 대략 30여 마리?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대열의 뒤를 추격해 오는 마물들의 수는 아마 그 배는 될 것이다.
후위에서 연신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명백했다. 이대로라면 피해가 너무 컸다. 속도를 더 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 일인가? 지금 속도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찬 상황이다.
조노량은 전방을 바라보았다. 안력을 집중하자 뿌옇고 찐득거리는 대기를 가르고 마물들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모습들이다.
그중 절반은 검기를 한껏 끌어올려야 벨 수 있는 괴물들이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치명타를 가할 만큼 빠르고 강한 놈들도 여럿이다.
‘쳇!’
조노량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머리를 굴릴 때가 아니라 한 번이라도 더 칼질을 할 때다. 선두에서 더 많은 괴물들을 처리하고, 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야 후위가 안전해질 수 있다. 조노량은 가빠오는 숨을 참으며 오첩도를 고쳐 잡았다.
때마침 머리가 둘인 거인이 조노량에게 달려들었다. 스마르가 젖혀 버린 놈이다. 아니 놈은 그대로 서 있었으나, 일행이 달리고 있었기에 조노량의 몫이 돼 버린 것이다.
트윈헤드오우거라 했던가? 번들거리는 두 개의 대머리에서 흘러내리는 기름기와 역한 암내 때문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놈의 손에는 장정 허리통만 한 나무가 뿌리째 뽑혀져 들려 있다. 힘은 엄청난 놈이다. 하지만 조노량의 표정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차라리 저런 놈들이라면 상대하기가 편했다. 아무리 흉포하고 힘이 세더라도, 저렇게 느려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댓 발자국 앞에서 막 달려들려는 놈을 향해 조노량의 신형이 튀었다.
‘일위진천환영보.’
이름만 거창한 삼류 보법이다. 이제는 완전히 체화돼, 일부러 펼치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게다가 내공이 뒷받침되니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트윈헤드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벌레만 한 놈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니 자신의 옆구리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타난 순간 반사적으로 통나무를 휘둘렀지만 통나무는 반도 뻗지 못하고 목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트윈헤드오우거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무작위로 통나무를 휘둘러댔다. 그 순간 조노량은 이미 자신의 자리로 복귀해 스마르가 넘긴 새로운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잘려진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초록빛 액체가 질펀하게 바닥을 적실 때쯤, 날카로운 창날 하나가 오우거의 남아 있는 목을 뚫고 들어왔다.
샤마노프는 오우거의 목에서 단창을 뽑아내며 혀를 내둘렀다. 뭐, 저런 인간이 있단 말인가?
트윈헤드오우거는 흔히 볼 수 있는 마물이 아니었다. 일반 오우거보다 느리지만 힘이 세고 그 성정이 폭급하여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롭다고 알려진 마물이다. 그런 마물을 고블린 베듯 단번에 제압해 버리다니? 방금도 트윈헤드오우거는 대열을 향해 돌진하려던 모습이었다. 성정이 폭급한 만큼 앞뒤 재지 않고 돌진했을 것이고, 돌진이 일행의 후위를 향했었다면 진형이 깨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우거의 그런 저의를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노리앙은 진영을 다섯 발자국 이상 벗어나 놈을 상대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 눈부신 움직임에 감탄을 했고, 적절히 타격을 주고 빠져주는 순간 판단력에 놀라고 있었다.
머리 하나를 잃고 당황한 트윈헤드오우거는 대열의 전진으로 인해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단창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창만 찔러 넣으면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만일 의도된 행동이라면 그야말로 난전의 대가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샤마노프는 노리앙이 패스한 또 한 마리의 염소머리를 제치고 있었다.
그 순간 예니에프의 격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망할! 노인네? 정신 차리지 못하겠어. 진형이 흐트러지잖아. 이 씨발 노인네야!”
상념에서 깨어난 샤마노프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경황 중에도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 미쳐 돌아가려는 롤을 컨트롤하기 위해 예니에프가 무진장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소리는 참다 참다 못한 예니에프가 롤을 향해 터트린 분노의 외침이었다.
그 탓인지 벌써 한 발자국 앞으로 뛰쳐나가 있던 롤의 눈빛에 광기가 조금 사그라졌다. 하지만 예니에프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롤의 눈빛에 어렸던 광기가 조금씩 분노로 대체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
“대우를 받고 싶으면 정신이나 차리라고 미친 늙은이야! 뭐, 내 말이 틀렸어?”
예니에프는 롤의 어눌한 말을 단번에 끊어 버린 후 마물을 향해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뭐라고! 이런 젖비린내 나는 꼬마 놈이?”
분노한 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노로 인해 롤의 광기가 걷히고 이성이 되돌아왔다. 물론 그 분노로 인해, 돌아왔던 이성을 다시 잃어가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롤, 선두를 맡아라.”
분노한 롤이 예니에프 대신 마물 허리를 통째로 끊어 버리는 와중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바로 커트리안의 목소리였다.
“예……?”
롤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커트리안을 바라보는 동안 커트리안이 말을 이었다.
“정신을 놓아도 좋다. 단, 전진은 무조건 직선이다. 좌우를 돌아보지 마라. 안 그러면 버리고 가겠다.”
커트리안의 말을 알아들은 롤은 환하게 표정을 밝혔다. 자신이 원했던 말이었다. 이제야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롤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탕탕 두드려 보였다.
하지만 주변인들은 사뭇 못 믿겠다는 분위기였다. 롤의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광기는 마물들이 주는 원초적인 두려움조차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의 눈빛이 광기로 물들기 시작하면 그가 어떻게 변하는지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속도 조절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다. 커트리안의 주문처럼 숲을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일행들은 급박한 와중에도 호흡을 고르며 롤의 폭주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쥬시아누스가 선두에 섰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질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롤은 마지막으로 예니에프를 한 번 째려본 후 선두로 자리를 옮겨갔다.
롤에게 자리를 내준 쥬시아누스는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웬만하면 지치지 않는 쥬시아누스였건만 마물들을 상대로 선두에 선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잠시 주춤했던 진형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예니에프에 의해 겨우겨우 눌려졌던 롤의 광기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크아앙-!”
☆ ☆ ☆
마음껏 광기에 물든 롤이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절대 인간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괴성이었다.
갑작스럽게 탄력을 받은 속도에 순간적으로 선두와의 간격이 벌어졌다. 2선과 3선이 다급성을 토해 내며 롤의 뒤를 따라붙었다. 4선과 5선을 지나며 간격이 점차 벌어졌다. 아무리 선두가 속도를 낸다고 하더라도 상대하던 마물들을 내버려 두고 달리기에만 전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현상은 뒷선으로 갈수록 심해졌다. 마치 진형이 한순간 쭉 늘어나는 모습이었다.
7, 8선까지 펼쳐졌던 진형이 5선까지 좁혀져 버렸다. 다행히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전사들이었기 때문에 혼란은 금세 수습되었다. 하지만 후위가 버거워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좁혀졌던 라인은 더 이상 늘어날 수가 없었다. 오히려 5선에서 버티는 것만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 탓에 후위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잦아졌다.
그 여파는 2선에서 5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선두권도 자잘한 상처가 늘어났으며 숨을 헐떡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롤은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을 토해 내며 마물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잔뜩 웅크리다가 순간적으로 튀어 나가 마물들을 으깨 놓았다. 마치 뜀뛰기라도 하듯 튀는 통에 후위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인 건 진짜 광전사로 변해 버린 롤의 무위가 쥬시아누스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웬만한 마물들은 2선까지 내려오지도 않았다. 부닥치면 부닥치는 대로 부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간혹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지 못한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뒤돌아서는 경우가 있었는데, 커트리안의 외침에 의해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그런 점을 보면 아예 이성을 상실한 것은 아닌 듯했다.
문제는 전진의 속도가 너무 불규칙하다는 점이었다. 머무는 듯하다가는 순간적으로 뛰쳐나갔고, 뛴다 싶으면 멈춰 서서 마물을 분해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후위가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무척 힘겨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진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법 곧게 회색 숲을 향해 전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불규칙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속도 면에서도 쥬시아누스 때보다는 월등히 빠른 편이었다.
“으악!”
후위에서 연신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처진 인원이 바짝 따라붙은 마물들에게 사냥을 당하는 소리다.
일행들은 그때마다 이를 악물 뿐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뒤돌아서기는커녕 속도를 줄일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롤이 맡고부터 남은 거리 이백 미터를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주파해 버렸다.
대략 20분?
그 짧은 시간에 불길한 회색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쥬시아누스가 한 시간 가까이에 뚫은 거리를 롤은 절반의 시간으로 뚫어 버렸다. 그 대가로 강철로 두 번 덧댄 롤의 방패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그의 글라디우스는 반 토막이 되었다. 게다가 방패를 쥔 왼쪽 어깨는 통째로 덜렁거렸으며, 옆구리로는 허연 창자가 비집고 나와 있었다.
일대일로는 상대하기도 벅찬 마물들이 그의 글라디우스 아래 10여 마리 이상 분해된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싼 대가였다.
첫 번째 진입조가 마계 광장에 도착한 지 어느덧 다섯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숲에 진입한 조노량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앞길을 막아서던 마물들 중 살아서 일행을 따라오고 있는 마물들은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뒤로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일행을 추격하고 있었다.
절단된 후위 일부가 서너 마리의 마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노량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다.
그중 하나가 마물의 공격을 피해 내며 약삭빠르게 고립된 후위를 벗어나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라브로다. B클래스인 그가 왜 거기에 섞여 있는지 모르겠다.
조노량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에게 등을 맡기고 있던 구루의 넙적한 등으로 라브로가 피한 마물의 기다란 발톱이 찍혀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비열한 놈!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자신에게 등을 맡긴 자가 있다면 막아내야 했다. 피한다면 결과가 뻔하지 않은가?
말더듬이, 순둥이 구루.
덩치만으로는 쥬시아누스에 버금가는 구루지만 사마귀처럼 생긴 마물의 손톱은 그의 등을 관통하고도 남을 정도로 길었다. 마치 포크에 찍힌 감자조각처럼 구루의 몸이 찍혀 올라갔다. 산만 한 덩치가 너무도 간단히 들려졌다. 구루의 단짝이었던 뮤트가 몸을 날려 구루의 다리에 매달렸다.
구루에 비해서도 턱없이 덩치가 작은 뮤트의 몸무게로는 마물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 역시 덩달아 딸려 올라갈 뿐이다.
둘의 빈자리로 다른 마물이 치고 들어왔다. 그로 인해 남겨졌던 후위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따라붙은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일행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죽어라고 뛰던 라브로의 앞을 덩치 큰 마물 하나가 막아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순간의 일이다. 조노량은 눈을 돌렸다.
뒤를 돌아본 자들과 돌아보지 않은 자들, 뒤를 돌아본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인 양 뛰고 있었다. 광장보다 더 침침한 회색빛 대기를 가르며 뛰고 있었다.
숲은 마치 마물의 아가리라도 되는 듯 음침한 기운이 뿜어내며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다. 일행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아가리 깊숙이 걸음을 서둘렀다. 꿈결 속이라도 되는 듯 연이은 비명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맴돈다.
가까이 따라붙었던 서너 마리의 마물은 반전한 선두에 의해 정리되었다.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후위를 끊어먹은 덕분에 시간을 벌긴 했지만 곧 추격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처럼 지친 상태에서, 또 다시 접전을 벌여야 한다면 버틸 수가 없다.
조노량은 호흡을 조절했다. 진기의 수발이 자연스러워진 덕분에 다른 누구보다 체력 소모가 적었다. 그럼에도 숲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에 차 있었다. 자신이 이럴진대, 무식하게 오오라를 뿜어내던 자들은 오죽하랴.
요동치던 진기가 가라앉았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가볍게 경공을 펼치고 있지만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는다. 그냥 달리는 정도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달릴 수 있다.
가볍게 몸을 띄워 본다. 가뿐하다. 전투로 달궈졌던 몸이 차가운 냉기에 빠르게 식어 갔다.
다행히 숲 안쪽으로는 마물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살아 있는 마물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 썩은 강시 비슷한 마물을 몇 마주쳤지만 일행의 발걸음을 늦출 만큼 대단치는 않았다.
조노량은 주위에서 들리는 거친 호흡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중원에 데려다 놓아도 일류 고수 소리를 들을 만한 실력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기운을 조절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공이 대단한 자라도 저렇듯 물 쓰듯 써 버린다면 견딜 재간이 없다. 저 정도의 고수들이 어째서 조절하는 법도 익히지 않은 것일까?
내공의 조절이라는 것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익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즉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고, 노력한다면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종류의 기교인 것이다.
이는 흔히 무명소졸이라고 부르는 삼류 무사들에게 더욱 절실한 기술이다. 그렇기에 수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이 부분에 집중한다. 절대적인 내공량을 늘릴 수 없으니, 그나마 있는 쥐꼬리만 한 내공이라도 아껴 쓰고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신체 조건 자체가 중원인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저렇게 함부로 써서는 곤란하다.
조노량은 내공과 달리 배열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마나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사의 마나라는 것은 마법사처럼 배열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공처럼 수발이 자유로울 수는 없는 능력이었다. 거두었다가 다시 일으키느니 유지하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반시간을 더 달리고서야 일행의 발걸음이 멎었다.
커트리안의 지시가 있자 일행은 쓰러지듯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조노량 역시 적당한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불거리며 하늘 높이 솟아있는 회색빛 거목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거미줄 같은 섬모가 늘어진 길고 무성한 나뭇잎 탓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숲은 일행의 헉헉거리는 숨소리 말고는 완벽히 침묵에 휩싸여 있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어쩐지 조화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다. 비단 회색빛 대기나 낯선 환경 탓은 아니다.
조노량은 흐릿한 비린내를 맡았다. 그리고 약간 답답한 느낌. 대기 탓인가?
호흡은 진정되었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잠깐 휴식을 취한다. 짧게 식사를 마치도록!”
커트리안의 지시를 받은 스마르가 낮은 소리로 외쳤다.
일행은 배낭에서 물과 빵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당연히 쓸모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챙겨준 아도니아의 배려였다. 그래도 명색이 마계 원정대 아닌가?
조노량도 배낭을 벗었다. 거친 천으로 만든 배낭은 마물들의 체액으로 질펀하게 젖어 있다. 위쪽으로 뚫려 있는 주둥이 주변은 더욱 가관이다. 붉고, 푸른 정체불명의 끈적한 액체들이 가득하다. 액체들은 배낭의 성긴 틈을 비집고 안쪽까지 스며든 상태였다.
과연 이 안의 내용물을 먹을 수 있을까?
먹어야 했다. 조노량은 빵 덩이에 묻어 있는 초록빛 액체를 속옷에 쓰윽 문질러 닦아내고는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지급된 빵이 단단하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배낭마저 뚫어냈던 초록색 액체가 빵 안쪽까지는 스며들지 못했다.
목에 메인다. 가죽주머니에 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유난히 꺼끌꺼끌한 빵조각이었지만 모두들 허겁지겁 집어 삼키고 있었다. 끔찍한 하루를 보냈음에도 식탐을 할 만큼 체력의 소모가 많았던 것이다.
반면 전혀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저기 허리를 숙이고 구토를 해대고 있는 제우스라는 신관처럼 말이다.
대충 식사가 끝나자 인원 점검이 있었다.
총인원 99명.
출발 전 인원이 경상자 포함 143명이었다.
돌파 과정에서 또 다시 사십 명이 넘는 인원을 잃은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수였다.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함께 ‘아고투스 아르고스’를 외치던 동료의 삼분의 일을 잃은 것이다.
누군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향집 뒷동산 눈이 녹으면 돌아가리.
곧 돌아가리.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
십 년을 담아 둔 이야기, 웃으며 말하리.
잘 가라 친구여.
그대의 소식을 전하마.
친구여,
내 가슴에 자리가 있으니
함께 가자.
낡은 칼 닦아두고 그대를 위해 잔을 채우리.
설원의 여행자 중 한 부분이다. 먼저 간 동료를 애도할 때 부르곤 했던 그 노래.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용소에서도 떠나보내는 동료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오래전부터 전사를 떠나보낼 때 불렸던 노래 한 곡을 바칠 뿐. 마계의 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위해 무엇 하나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산 채로 마물들에게 뜯어 먹히는 동료를 뒤로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틈이 났기에 습관적으로 애도의 노래를 웅얼거리는 것이다.
☆ ☆ ☆
하나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할 즈음 스마르의 낮은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고 싶은가? 마물들을 불러들이고 싶나?”
단번에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물들을 유인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삼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죽은 동료들을 애도하는 소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분위기가 더욱 침울해졌다. 동료를 거두기는커녕 작은 추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출발한다.”
스마르의 신호에 따라 지친 몸을 일으킨다.
밤이 오기 전에 안전한 장소를 알아봐야 했다. 또 먹을 수 있는 것도 찾아봐야 했다. 알량한 빵 한 덩어리로는 당장의 주림도 해결하기에 모자랐다. 그리고 일행에게는 여분의 식량이 없었다.
모두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숲속을 전진했다. 숙련된 전사들답게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움직임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척후로 나섰던 몇 명이 끊임없이 전방의 상황을 전해 왔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위험은 없는 것 같았다.
몇 시간? 혹은 몇 십 분? 얼마나 전진했을까. 태양을 볼 수 없으니 시간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선명하지 않은 시야에 자꾸 눈을 비벼 보지만 그렇다고 시야가 밝아질 리 없다. 회색빛 찐득한 냉기에 온몸이 얼어붙는다. 통곡의 계절에 버금갈 정도의 추위 속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행군을 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들이 생기고 있었다. 전투로 더워졌던 몸이 식고 뼈를 에는 냉기에 신체의 모든 기능이 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침묵이 깨져 나갔다. 곳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는 마물들에게 들키기 십상이다.
“우웅, 추워 죽겠네. 무거워 죽겠네. 힘들어 죽겠네. 덜덜.”
웅얼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하이오지였다. 용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아니, 목숨을 부지한 것은 물론 제법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연신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크리들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옆구리와 다리에 상당한 부상을 입은 크리들은 식사 후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런 크리들을 들쳐 업은 것이 하이오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비열한 하이오지’라는 별칭이 풀네임으로 굳어져 버린 하이오지가 아닌가? 그런 그가 크리들을 위해 자신의 체력을 희생한다는 것을 5반 사람들이 들었다면 과연 믿기나 할까? 어쨌든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크리들을 들쳐 메고 걸어왔다.
중간에 스마르가 포기할 것을 종용했지만 하이오지는 전혀 문제없다고 가슴을 쳐 보였다. 특별한 위험이 없는 상태라 스마르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크리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조노량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검투반에 온 이후로는 가장 친하게 지낸 동료가 바로 크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추위에 잠든 것인지 모를 크리들을 바라보았다. 참 기구한 친구다. 마을의 치안대장에서 일반병사가 되었고, 포로가 되어 부반장의 직위까지 올랐다가 쫓기듯 검투사가 되었던 친구. 어쩌면 그 우여곡절 많은 인생의 마감이 가까웠는지 모르겠다.
조노량은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은 감상적인 생각으로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었다. 일행 중 그나마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위에 대한 경계는커녕 앞사람의 뒤꿈치를 바라보며 걷기에도 벅찬 지경이었다.
조노량은 단전의 기운을 사지백해로 고루 회전시켰다. 단전에서 올라온 뜨거운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순간적인 열기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서불침의 단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지금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물론 진기를 돌릴 수 있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이런 식의 행군이 지속된다면 자신 역시 내공의 한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안 그래도 침침하던 회색빛 대기가 조금씩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포로들이 광장을 벗어난 순간, 거울의 방은 침묵에 휩싸였다.
트라쿠스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들이 ‘전진하는 창’을 형성하고 돌진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껏 자리에 앉을 생각도 못했다가 이제야 자리에 앉은 것이다. 아니 앉았다기보다는 무너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리에는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굳게 쥐어져 있던 손도 힘없이 늘어졌다. 흥건히 차 있던 땀방울이 손아귀를 빠져 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도대체 어느 놈들이 일을 망쳐 놓은 것인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아도니아 전체의 이해를, 나아가 북부 통일이라는 대업을 망칠 정도로 어리석은 놈들이 있단 말인가? 이 아도니아에?
혹시 개혁파 놈들이 손을 쓴 것일까? 아니, 그들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우니푸스는 과연 결백할까?
지금의 상항을 수습할 수 있을까?
트라쿠스는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패닉 상태에 빠지다시피 한 머리는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엉켜만 갔다.
미리 준비했던 연설은 첫 문장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준비한 연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트라쿠스는 고개를 돌려 뚱뚱한 중년 사내를 돌아보았다. 뚱보 고프레이다. 입꼬리를 실룩이고 있는 것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다. 1차 베팅에 걸린 돈만 1백40만 골드다. 거의 모두 독식이다. 거기다 2차에 걸린 돈이 다시 오십만 골드. 그중 절반이 또 그의 몫이다. 물경 1백60만 골드에 가까운 돈을 저 장사치 혼자서 통째로 삼켜 버린 것이다.
웃음이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끝내 웃음을 흘리지는 않는다. 그나마 생각이 있다는 것인가?
어? 고프레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아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고프레이의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설마 인사란 말인가? 이 상황에서? 나한테? 도대체 상황을 얼마만큼 악화시킬 작정인가?
트라쿠스는 자신에게 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뜨는 고프레이의 뒷모습을 멍해져서 바라보았다.
왜 인사를 하고 나간단 말인가? 세 계파 중 자신의 보수파가 뒤를 봐주고 있는 상인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꼭 티를 내야 하는가? 상황 파악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트라쿠스는 지금의 상황에, 고프레이의 적절치 못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분노와 의문을 담은 시선들이 트라쿠스에게 쏟아졌다. 트라쿠스는 이마를 짚었다. 왜 하필 그란 말인가?
차라리 다른 도시의 대표자 중에 하나가 독식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나쁜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마계 검투를 통해 연합의 결속을 튼튼히 하고, 나아가 단일한 지휘 체계를 확립해 통일 전쟁을 벌일 참이었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것이다.
켈커티스 놈들에 대한 처단도 실패했고, 마계 검투도 실패했고, 게다가 모여든 도시의 대표자들의 등을 쳐 골드를 강탈한 꼴이 되지 않았는가?
사람들의 눈길로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그런 트라쿠스의 시선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로크리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키 작은 로크리안의 등이 거대한 절벽처럼 느껴졌다.
제발, 아무 말도 말아 주었으면…….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로크리안은 여전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정확히 트라쿠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 ☆ ☆
마계의 문에서 첫 밤을 맞이한 일행들에게 두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하나는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회색 나무들이 제법 화력이 좋고 연기가 적다는 점이었다.
그래 봐야 통곡의 계절에 버금가는 추위를 극복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아주 큰 문제, 먹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 먹을 것은 물론 식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소지했던 식량 자체가 형식적으로 지급된 분량이다.
조노량은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짙은 회색빛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어둠은 아니다. 타다 남은 잿가루가 안개 속에서 꿈틀대는 느낌이다.
“끄응.”
크리들이 신음소리를 흘린다.
동굴 중앙에 피워 놓은 모닥불 빛에 어렴풋이 크리들의 얼굴이 비친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코밑과 턱수염에 고드름을 달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런 그를 하이오지가 안고 있다.
“의외군.”
조노량의 말에 하이오지가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따뜻하다고!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체온이 필요한 거 아니겠어?”
그 말에 조노량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물론 크리들의 육체가 대단히 뜨겁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하이오지가 크리들을 덮다시피 안고 있는 이유가 그뿐일까?
단지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업고 다녔을까? 아니, 그건 비열한 하이오지를 너무 모르는 말이다. 절대 밤의 온기를 위해 그런 수고를 할 만큼 성실한 인물이 아니다. 차라리 빈 몸으로 다니다가 다른 자의 것을 빼앗았다면 하이오지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크리들을 짊어지고 온 하이오지의 행동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절반 이상이 죽어 버린 현재로서는 B클래스가 가장 약한 집단이나 다름없다. 그가 아무리 약삭빠르게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마물들과 치른 전투가 몇 번이고, 달려온 거리가 얼만가? 그 역시 체력적으로는 바닥일 터였다.
그동안 하이오지를 오해한 것? 아니, 그렇지 않다.
수용소 생활에서 개개인의 인성은 아무리 가장하더라도 한 달이면 드러난다. 비열한 하이오지란 별명이 붙은 채로 4년을 수용소에서 보낸 하이오지다. 애초에 비열한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자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외였다.
“쳇!”
조노량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하이오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노량도 더 이상의 관심을 접고 크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이오지의 머리카락 탓에 그늘진 크리들의 왼쪽 얼굴이 유독 검게 느껴진다. 조노량이 판단하건대, 크리들은 가망이 없었다. 이 추위에 숨결이 얼어붙지 않는다는 건 일반적인 체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체온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그의 체온은 곧 이 끔찍한 냉기에 자리를 내주고 말 것이다.
그 다음은 없는 것이다.
어린 신관이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부상자는 크리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리 어름부터 잘려져 나간 로브가 안쓰럽다. 소맷자락도 이미 다 뜯겨져 나간 지 오래다. 그가 짊어진 배낭 속의 붕대가 바닥나자 자신의 로브를 끊어서 붕대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술이라도 취한 듯 비틀리고 있었다. 신성력이라 했던가? 신기한 능력이지만 무한대는 아닌가 보다. 하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자들과 달리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전투가 끝나거나 이동 중 겨우겨우 틈을 내 휴식을 취할 때조차 그는 부상자들을 돌봤다. 치료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알 수 없는 하얀 가루를 환부에 바르고 붕대로 감싼 다음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 기도 자체가 무척 힘이 드는 행위인 듯싶다. 기도를 마칠 때마다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 갔다. 이제는 거의 목내이(木乃伊)와 같은 모습이다.
곱지 않던 일행들의 시선도 언제부터인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아도니아인임에도 마치 동료를 대하는 시선으로 바뀐 것이다. 단 하루 만에 이들의 시선을 바꿔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그의 헌신이었다. 거부감이나 경계심을 풀어 버린 부상자들의 절박한 시선이 그의 등을 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