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발경(發經)
좁은 복도 사이로 두 개의 방이 마주보고 있다. 복도와 방을 구획하는 것은 팔목 두께의 쇠창살뿐이다. 창살의 간격이 촘촘하다고는 하나, 방 안의 정경을 감추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방 안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였기 때문에 창살의 역할은 적절했다. 그런 취지에서 보면 광량은 또 부족하다. 십 미터 정도 떨어진 복도에 설치된 횃불은 가끔 방 안으로 일렁이는 붉은 그림자를 던져 줄 뿐이다.
이래서는 감시는커녕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더구나 복도에는 감시병 하나 없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사생활이 보장되기에 충분하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수감자들은 탈출을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가 바로 트라쿠스의 성이기 때문이다.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감옥을 들라면 바로 이 트라쿠스의 성을 들 수밖에 없다. 가장 유서 깊은 감옥일뿐더러 절대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땅속을 파고드는 재주가 없다면 탈출을 꿈꾸기보다는 그냥 빈둥대는 게 남는 곳이다.
지하의 생활이라는 것은 밤과 낮을 구별할 필요가 없는 생활이다. 가끔 밥이 들어오면 먹고, 할 일이 없으니 자고, 그러다 깨어나면 또 잔다.
처음 며칠간은 울부짖는 놈, 화를 내는 놈, 벽을 차고 창살을 휘어 보려는 놈, 동료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놈 등 다양한 형태의 반응들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먹고 자는 것만이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의의라도 되는 양 몰두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어떠한 간섭도 없을뿐더러 식단 또한 아주 훌륭하다는 점이다. 가끔 달달한 술도 한 잔씩 제공된다. 은근히 다음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마계의 문으로 간다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갔으면 좋겠군.”
잠꼬대라도 하는 걸까? 조노량과 한 방을 쓰는 네 명 중 하나인 크리들이 뒤돌아 누우며 웅얼거린다.
언젠가 루드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괴상망측한 전설 정도로 치부한 곳. 검투반 전원과 그와 맞먹는 수의 일반 포로들이 마계 정화라는 위대한 사명을 띠고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물론 웃기는 얘기다. 그런 영광된 사명을 포로들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단지 죽음이 확정된 자들에게 적당한 명분을 주는 배려일 뿐, 고마워해야 할까?
조노량은 옅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동료들은 특이한 수면 자세라며 억지웃음을 날렸던 가부좌 자세다.
반면 다른 자들은 꿈속에서나마 지인들을 불러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거나, 애써 달아나는 잠을 붙잡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퐁!
어느새 눈을 뜬 조노량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가슴 바로 아래까지 들어 올렸던 오른쪽 장심에서 왼쪽 손바닥으로 작은 압력이 몰려들었다. 왼손이 퉁하고 밀려날 만큼의 세기다. 이만하면 반응 속도도 좋고, 힘 조절도 적당하다. 차기를 넘어 미약하나마 검 끝에 아지랑이를 이룰 만큼 작은 검기를 실은 지 한 달 만에 이루어 낸 발경의 경지다. 검도 없으니 장풍이나 연습해 보자고 한 것이, 어느새 의발이 자유롭다.
조노량의 왼손이 건너편 방에 자고 있는 하이오지를 향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픽!
건넌방으로부터 아주 미세한 파열음이 전달되어 왔다. 내공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다.
“아, 씨발! 지하 몇 층인데 바람이 불고 지랄이야. 으, 추워…….”
하이오지가 모포를 머리끝까지 둘러쓰며 투덜거렸다.
피식하고 실소가 새어나왔다. 이번에는 조금 강도를 올려 보았다.
퉁!
“으악! 뭐야? 누구야?”
하이오지가 모포를 걷어치우며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권투의 자세를 취한다.
퍽!
마치 주먹으로 얻어맞았을 때와 흡사한 정도의 타격에 하이오지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하이오지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좌우 주먹을 번갈아 날리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뭐야?”
집중하지 않으면 손바닥의 윤곽조차 뚜렷하지 않은 어둠 속이지만 눈앞에 사물을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하이오지는 B클래스에 오를 만큼 감각이 발달한 전사다. 그런 전사가 헛손질을 오래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이오지는 곧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채고 주먹질을 멈췄다. 하지만 두 주먹을 턱 끝까지 올려놓은 채로 경계 자세를 풀지 않았다. 하이오지의 쭉 째진 눈이 잠들어 있는 다른 세 명의 사내를 훑었다. 미심쩍은 눈빛이었으나 그들이 일어났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세 번째 바람이 하이오지의 하복부를 강타했다.
“우욱!”
하이오지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헛구역질을 잠깐 하는 듯하더니 바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허둥지둥 뒤쪽 벽으로 물러났다.
“귀, 귀신이닷!”
감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하이오지가 잠자던 동료들을 후다닥 깨우기 시작했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외침은 멀리, 그리고 크게 퍼지는 법. 순식간에 지하 3층에 위치한 감방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뭐냐?”
“하이오지 아냐?”
적막하던 감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리에 놀란 경비병들까지 후다닥 뛰쳐나왔다.
경비병들은 몽둥이로 창살을 후려치며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조용해! 무슨 일이냐? 닥치지 못하겠나?”
예상 밖의 소란에 조노량은 속으로 찔끔하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귀신이오. 감옥에서 죽어 버린 귀신이 나타났단 말이오.”
하이오지가 아래턱을 덜덜 떨며 쇠창살을 붙잡고 외쳤다.
“이런 미친놈! 귀신이 어디 있단 말이냐?”
경비병은 뭉툭한 몽둥이를 들어 창살 사이로 하이오지의 어깨를 후려쳤다.
“윽! ……방, 방금 귀신이 나를 때렸단 말이오.”
“내가 이곳 경비를 맡은 지 십 년이다, 이놈아! 허튼소리는 집어 치워라.”
“우이씨! 분명 있었는데, 어디 간 거지?”
“미친놈!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조노량의 짓이니 귀신이 있을 턱이 없었다. 덕분에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하이오지는 아직도 얼얼한 마빡을 어루만지며 혼잣말로 투덜거릴 뿐이었다. 그런 하이오지를 향해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동료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심약한 자식! 전사의 자부심을 가져! 마계의 문 따위가 그리 겁나더냐? 이왕 갈 거라면 당당히 가는 거다. 이름이 아깝군.”
“아니……, 그게 아니고…….”
빡!
뭔가 항변하려던 하이오지의 뒤통수로 샤마노프의 주먹이 날아왔다.
“끄응.”
☆ ☆ ☆
지하 감옥은 밤낮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시간은 간다. 지상에서는 연합회의 준비로 떠들썩했지만 조노량 등이 수감된 트라쿠스 성의 지하는 고요했다. 제법 풍성한 식탁과 맘껏 늘어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평온한 생활이었다. 그 삶이 시한부라는 것만 빼면 만족할 만했다. 그런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너 명이 미쳐 버렸고, 다시 두어 명은 음식물을 거부하다가 시체로 실려 나갔지만. 대부분은 그럭저럭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아무리 태평한 삶이라도 우여곡절이 있고, 그 끝이 있는 법.
제3목민관저 중앙첨탑 꼭대기 트라쿠스의 밀실은 아도니아에서 가장 안전한 대화 장소였다. 이곳의 주인인 트라쿠스와 그의 동반자이자 아도니아 최고 마법사인 피오레는 한 가지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아직도 상황이 여전한가?”
트라쿠스의 질문에 6서클에 들어선 마법사 피오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게……, 여전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전에도 마물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경우는 많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어찌 보면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상대를 죽이고도 섭취할 생각을 않고 다른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새롭게 등장한 마물들이 광장을 점령하고 있는데, 모습만으로는 기존 마물들보다 월등해 보이지만 개체수가 적습니다.”
반쯤 벗겨진 피오레의 회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트라쿠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지장이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새로운 마물들은 수도 적은 데다가 기존 마물들과 싸우는 데 정신을 팔고 있는지라……. 새로운 먹이에게 과연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일는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와서 행사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인데…….”
트라쿠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피오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마계의 문에 관한 일은 아무리 6서클의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어찌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행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겠군. 운이 따르는 놈들이군.”
“그래 봐야 결과는 같습니다.”
“결과야 같겠지만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 끝까지 보지 못한다면 마계 검투의 효과가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나?”
“글쎄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새로 등장한 마물들의 전투력이 상당합니다. 하급 마물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중급 이상입니다. 개체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마물들이 마계 광장을 거의 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습지요. 포로들이 광장을 벗어난다고 단언하기는 이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행이고. 베팅은 마감되었겠지?”
“네, 예정대로 오늘 오후에 마감을 지었습니다. 금액만으로 봤을 때는 예상을 상회합니다.”
“금액만으로?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모양이지?”
“그게, 광장을 벗어난다는 데 건 사람이 있습니다.”
“뭐? 또 어떤 얼간이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단 말인가?”
“고프레이입니다.”
“뚱보 고프레이? 그 금귀가 또?”
“오백 골드를 넣었습니다.”
“끄응……. 진정 운이 강한 자로군. 총 얼마나 걸렸나?”
“1백3십7만5천2백8십1골드 6십3실버입니다.”
“허? 대단하군.”
“만약 고프레이가 이긴다면 대략 2천6백 배당이군요.”
트라쿠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혹시 더 건 사람은 없나?”
“몇몇이 장난 식으로…….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마계 광장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말입니다. 합쳐 봐야 17골드 정돕니다. 그나마도 지난번 선례가 있어서 건 거지요.”
“곤란하군. 고프레이를 핍박할 생각은 없지만, 각 도시의 대표들에게 어느 정도 맛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래서 말인데……, 애초에 마나 팔찌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아……? 그래, 팔찌를 풀어 주지 않고 투여한다?”
트라쿠스는 피오레의 말을 곧장 알아들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공정하지 못한데…….”
피오레는 얼굴을 찌푸리는 트라쿠스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어차피 명분만 마계 원정이지 실제로는 포로 처형이잖습니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구나 마계 원정은 북부 통일의 대명제를 위한 요식 행위지요. 한마디로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켈커티스 원정에 대한 흥분으로 고조된 분위기에서 그런 문제를 들고 나올 멍청이는 없을 것입니다. 현명한 판단이 요구될 때입니다.”
“그래도 영 내키지가 않는군.”
“잘 생각해 보십시오. 각 도시의 대표들이 각자 수십 골드에서 수백 골드 이상 베팅을 했을 텐데, 아도니아 상인 하나가 독식을 한다면? 글쎄요. 연합회의가 우리의 의도대로 진행된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아도니아가 거울의 방을 통해 상황을 미리 알고 베팅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을 염려도 다분합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