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9화 (29/142)

29. 봉인

“빌어먹을 인간 놈들이 저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이봐, 플리즈?”

달빛 아래 첨탑은 제법 눈에 띄는 장소다. 그 눈에 띄는 장소에 보란 듯이 편안하게 앉아 있는 두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들은 첨탑 지붕의 날카로운 각이 무슨 의자의 등받이라도 되는 듯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첨탑 바로 아래에서 경비를 도는 병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아도니아의 제1감옥인 ‘트라쿠스의 성’이다. 먼 옛날, 마계대전 당시 위대한 기사 아그리파 트라쿠스(제3목민관 하드리아누스 트라쿠스의 선조다)에 의해 축조되기 시작한 성이기에 이름도 트라쿠스의 성으로 명명되었다. 성은 수용 인원만 무려 천에 다다를 정도로 넓은 지하 감옥을 보유한 건물이다.

현재 트라쿠스의 성에는 대단한 인물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켈커티스 동맹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이자,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엄청난 실력의 검투사들이 지금 바로 이 발밑에 수용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크로아지크 검투단원 전원과 각지의 포로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 기사급 포로들이 그들이었다.

트라쿠스의 성, 지상으로 드러난 건물의 위용도 만만치 않지만 진짜 대단한 것은 바로 지하 감옥이었다. 마계대전 당시 피난처로 지어지기 시작했다가 마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수많은 증축과 개축이 이뤄졌는데, 지하로는 시민궁까지 연결되어 있다. 지상에서 봤을 때는 두 개의 건축물이지만 지하에서 보면 하나의 건축물인 셈이다.

이 유서 깊은 건물은 지하에 주요 구조물이 형성된 관계로, 언젠가부터 지하 감옥으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명의 탈주자도 없었으리만치 훌륭히 그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철통같은 구조물이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수의 실력자들이 수용된 만큼 경비가 강화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탑 위의 존재들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은 채 한가로이 첨탑에 기대앉아 있는 것이다.

등에 돋아난 거대한 박쥐날개가 유난히 눈에 띄는 음침한 사내가 회색로브의 사내를 돌아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거기가 어딘 줄 아냐고? 응?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그 기형아 놈이 지배하는 숲이란 말일세.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들어서자마자 그놈이 아주 반갑게 마중 나올걸! 자네? 자네라면 좀 버티겠지. 그래 봐야 며칠이나? 그 기형아 놈과 일대일로 붙는다면, 물론 자네가 부족하다고는 말하진 않겠네. 하지만 거긴 그놈의 영역이야. 꼬붕들만도 셀 수가 없을 정도야. 아니, 설사 자네가 다 쓸어버릴 수 있다고 치세, 그분이 뭐라고 할까? 도와줘서 고맙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자네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니, 물을 필요도 없이 자네를 봄으로 인해 그분이 각성이라도 하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게 되면? 응? 자네 주인의 지시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만약 자네가 무모한 행동을 하면, 난 내 주인의 뜻에 의해 자네를 막아야 할 걸세.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이치가 그렇다는 얘기라구! 내가 어디 자네의 상대나 되겠나. 아, 그럼! 그랬거나 저랬거나 대책을 세워야 안 되겠나? 그대로 두면 죽어 버릴 것이 뻔하고. 개입하자니 그 결과가 어떨지 짐작할 수도 없고……. 거참 답답하구먼. 말 좀 해 보게. 응, 말 좀 해 보라구! 플리즈.”

박쥐날개의 수다에 질린 듯 회색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독히도 시끄러운 놈,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입 좀, 닥쳐라.”

회색로브의 사내, 빙하의 기사 글라키에스의 반응에 박쥐날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많은 건 인정한다. 하지만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닥친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글라키에스와 자신은 같은 임무를 가지고 이 땅에 임했을진대, 도무지 상의할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글라키에스를 바라보며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꽉 막히고, 답답하고, 대책 없는 신의 사도 같으니라고! 왜 하필 이런 놈을 내려보냈단 말인가? ‘훈풍의 기사’나, 성질은 좀 지랄 맞아도 ‘화산의 기사’가 파트너였다면 지금보다는 덜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 닥칠 테니 말 좀 해 보게. 어찌할 셈인가?”

회색로브의 사내는 아무런 표정도, 반응도 없이 밝게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쥐날개가 그 모습에 지쳐갈 때쯤 회색로브의 입이 벌어졌다.

“스스로 봉인되겠다. 개입하지도, 방관하지도 않기 위해서.”

“자네……?”

“맞네. 그 검, 오첩도라던가. 그 검의 기운이 무엇인지는 알겠지?”

“물론 안다네. 드레곤의 하트 조각으로 제련된 검. 자네의 영을 담기에 부족하지 않은 검이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언제 각성할지 알고? 자칫 그 검이 상하기라도 하면 자넨 끝장이야. 당연히 그분을 지키지도 못하고. 왜 그런 무모한 짓을?”

“그것도 생각해 두었지.”

“무슨 생각?”

“지난번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잊지는 않았겠지?”

“뭐,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게 왜? 뭐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 거침없이 말해 보게. 자네의 유언이 될지도 모를 부탁인데, 이 의리의 사나이 퓨콤뜨리아리트가 당연히 들어줘야지!”

“자네가 함께 봉인돼 줘야겠어.”

“힉? 농담이겠지? 헤헤, 그 좁은 검에 둘씩이나? 그것도 자네와? 헤헤, 농담도 참.”

박쥐날개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도 네놈과 함께 봉인될 생각은 없다. 그에게는 영성을 담을 만한 검이 또 하나 있지.”

“잉? 그런 게 있었어? 모르겠는걸. 달랑 그거 하나 아니었나? 아 참, 난 그런 짓 안 해! 미쳤냐구? 그리고 난 스스로 봉인되는 기술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단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어도 못해!”

박쥐날개가 격정적으로 손사래를 쳐댔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봉인시켜 주지.”

“……”

박쥐날개의 입이 뻐금거렸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가 가진 단검을 기억하나? 드레곤의 기운을 담은.”

“아……, 맞아. 뭣? 뭐라고? 그 단검? 그 허접한 거? 드레곤의 기운은 무슨? 겨우 조각난 하트 부스러기 쬐금 묻은 거? 이…… 이 위대하신 퓨콤뜨리아리트 님더러 그 조잡한 단검에 들어가라고? 못해! 절대 못해! 내 자식들이 들으면 노망났다고 난리 칠거야. 자네 미친 거 아닌가? 내가 왜 거길 들어가? 차라리 날 죽여! 빙하의 기사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면 그나마 체면이라도 서지. 녹슨 단검에 들어가 동강 나 죽었다고 하면? 내 자식들도 얼굴 들고 못 다닐 거야. 차라리 그냥 죽여!”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떻게 거기 들어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거검이 회색로브 사이로 반쯤 뽑혀 나오고 있었다.

“신의 사도에게 허언을 하다니, 노망이 난 거였군.”

박쥐날개가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잠깐, 잠깐마안! 그거야 부탁하느라고 그냥 했던 소리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분의 동태를 지켜봐 달라는 거였고, 에, 또……. 그게 또, 또한 자네에게도 임무지 않은가? 자네가 나에게 보고를 해 준 거도 아니고…… 아, 잠깐만이라니까!”

회색로브 사내의 거검이 완전히 뽑혀 나왔다.

“내게서 검을 뽑게 만들고 살아남은 존재는 없었다. 준비할 시간은 주지.”

“이런 빌어먹을 기사 놈! 알았다고! 하면 될 거 아냐? 편협한 놈, 치사한 놈, 지옥 불구덩이에서 석 달 열흘은 튀겨질 놈! 아, 한다고! 한다니까…… 그런데 바꾸면 안 될까? 자네가 단검에…… 아, 그냥 내 의견이라니까! 그 흉측한 검 좀 치워.”

글라키에스는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자발적인 희생의 뜻을 높이 사, 내 원칙에 예외를 두도록 하지.”

언제나 상대를 무시하듯 사용하던 네놈이라는 호칭도 잠시지만 자네라는 호칭으로 대체되었다.

“……고, 고맙네.”

박쥐날개는 마지못해 사의를 표했다.

“네 말대로 그 단검은 네놈의 영혼을 담기에는 너무 약하지. 그 때문에 오히려 각성하기가 쉬울 거다. 몇 번의 타격만 견뎌낸다면 쉽게 깨어나겠지. 물론 내가 네놈을 봉인시킬 때도 쉽게 깰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고.”

슬그머니 원래대로 돌아온 호칭. 하지만 박쥐날개는 그런 사소한 것에 주목할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깨어나면 그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하면서 그분을 지키는 것이 네놈의 첫 번째 임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깨어날 수 있도록 그 저주받을 기술을 나에게 쏘아 주는 거지.”

“내가 무슨 자네의 신통력 있는 장신구쯤 되는 줄 아는가?”

“빨리 각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거다. 각성한 후에는 스스로 방어할 수 있을 테니까. 자네 말대로 그 단검은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 않더군.”

“……끄응, 한마디로 깨어나는 것이 먼저냐? 깨져 버리는 것이 먼저냐? 그것이 문제로군.”

“그렇지. 역시 렌토르의 아비답게 영민하군.”

“그 빌어먹을 놈 얘기는 빼 줬으면 좋겠군.”

퓨콤뜨리아리트는 열일곱의 자식을 두었다. 그중 열이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식이 일곱이다. 사이렛(기형아), 실그리파(괴물), 시나토스(반항아), 로제르마(야수), 크리산트(광녀), 토리도(자유), 렌토르(귀족)가 그들이다.

퓨콤뜨리아리트에게서 낳지만 퓨콤뜨리아리트보다 강한 권능을 지니게 된 일곱 자식들!

그들은 퓨콤뜨리아리트를 넘어서서 각자의 일족을 만들었다.

모든 뱀파이어는 시조인 퓨콤뜨리아리트를 따른다. 하지만 수장의 명보다 앞설 수는 없다. 즉 퓨콤뜨리아리트에게 복종하지만 로드의 명이라면 퓨콤뜨리아리트의 목숨을 거두라 해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걸 시행한 자가 바로 렌토르였다. 퓨콤뜨리아리트의 궁을 지키던 벤틀루 일족이 렌토르의 명에 따라 퓨콤뜨리아리트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스스로 작위를 부여하며 귀족이라 일컫는 일족, 그런 자부심만큼이나 강대한 힘을 자랑하는 벤트루 일족. 그 일족은 수장의 명에 따라 지금까지 섬겨 왔던 주인을 공격했다.

렌토르는 퓨콤뜨리아리트가 처음으로 권능을 부여했던 자, 첫 번째 자식이었다. 그가 부여받은 강대한 권능은 자신의 이름보다 앞선 이름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저 아비를 무시하고 마는 다른 자식들과 달리 렌토르는 자신보다 앞에 쓰인 이름을 지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비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한 종족의 시조로서 홀로 존재하던 강대한 마왕인 퓨콤뜨리아리트도 그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궁을 떠나 벨제뷰트에게 몸을 의탁하고 만다.

렌토르란 이름만으로도 퓨콤뜨리아리트가 골치를 싸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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