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트라쿠스의 야심
아도니아 연합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고, 연합에 참여하지 않았던 중립 도시의 중요 인사들까지 아도니아를 방문했다. 연합이 강화되고 있었다. 기존 도시의 결속력이 한층 공고해졌고, 새롭게 참여 의사를 밝힌 도시의 증가로 세력권도 넓어졌다.
아직까지 최종 사인을 하지 않은 도시들도 결국 연합에 참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연합에 무엇을 얼마만큼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만 타결되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기존의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느슨한 관계에서 좀 더 긴밀해지고 적극적이 되는 과정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번 마계 검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켈커티스 동맹 쪽에서도 바짝 긴장한 채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과 비시민권자들, 심지어는 노예들까지도 강력한 무언가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시끄러울 정도로 대규모 방문자들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간에 수십 년을 끌어왔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조금씩 들뜨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제3목민관인 트라쿠스의 움직임도 무척 바빠졌다. 마계 검투 후 이어질 연설과 연합회의 때 이루어질 연설의 원고를 다듬고, 그 연설이 강력한 지지를 받고 호응을 얻을 수 있도록 사전 준비도 철저히 했다.
각 도시 대표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각 도시의 특징과 바라는 바에 맞춰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방금 면담을 끝낸 존스케빈의 수석원로인 존의 경우는 조금 까다로웠지만 결국은 트라쿠스의 의도대로 결말이 지어졌다.
존스케빈의 지정학적 위치가 주요 공략 대상이었다. 지금은 주요 전장에서 제외되어 있는 지역이지만 만약 존스케빈에 주둔한 아도니아 연합의 수비군을 남부 방면 공격 쪽으로 돌린다면 켈커티스는 우회 공격로로 존스케빈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주요 논점이었다. 그리고 현재 구도상으로는 전면적인 확전을 꾀할 수밖에 없으며, 그쪽 수비를 현재처럼 유지시킬 수는 없는 형편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피력했다. 주요 전장에서 제외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전방임에는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트라쿠스는 그쯤에서 미미하게 구겨지는 존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노회한 너구리인 존이 아도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트라쿠스 자신의 말이 결코 허언이나 협박이 아닐 거라는 확신을 스스로 도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슬그머니 해결책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쪽 지리를 잘 아는 병력과 보급만 충분하다면 연합의 공격 루트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겠습니다만…….”
너구리는 싫어도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상당한 출혈을 각오하라는 말이군. 어느 정도면 되겠나?”
“회의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각 도시들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한다면야…….”
그 단계에서 반쯤은 결정 난 것이다.
“분위기를 몰아 달라는 말이군. 그러려면 존스케빈에서 솔선을 보여야 할 테고? 하하, 자네 정말 많이 컸군.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단독으로 방어를 하겠다면?”
“존스케빈의 고유 권리입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자신감이 넘치는군. 만약 우리가 켈커티스 쪽에 붙는다면? 지정학상 존스케빈은 켈커티스와 동맹을 맺더라도 무리가 없는 위치지 않을까?”
“반대는 않겠습니다만……. 몇 가지 이유로 권해 드리고 싶지 않은 선택입니다. 우선 켈커티스는 은원이 확실한 폴리스입니다. 칠 년 전 사건을 쉽게 잊을 자들이 아니지요. 두 번째, 자!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연합도시 대표들이 잔뜩 흥분해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새로 연합에 참여하겠다고 몰려온 중립 도시들의 대표가 몇인지 아십니까? 아도니아 연합은 이 전쟁을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있으신지요?”
“허, 이십 년 전 더벅머리 사병이 너구리가 되어 돌아왔군. 졌네. 우리가 부담해야 할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 제시해 주게. 단 연합회의에서 우리가 아도니아를 적극 지지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줬으면 좋겠군.”
노쇠한 너구리는 당연히 자신의 영역을 젊은 너구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새 세상은 젊은 너구리의 몫이니까.
이제 밑밥은 깔아놓았으니 다음 번 미팅 때는 물량을 적당히 감해 주고 작전권을 언급하면 된다. 어차피 확전이 예상된 바에야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트라쿠스는 천천히 걸어서 관저를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 병력이 따라붙는다. 익숙한 친구들이니 자신의 상념을 방해하진 않는다. 트라쿠스는 존과의 논의를 뒤로하고 그동안 골치를 썩였던 라쿠스 시의 요구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상인 고프레이를 협박해 얻어낸 기부금, 그 기부금에다 폴리스의 여유 자금 일부를 더하면 그동안 미뤄 왔던 항구도시 라쿠스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다.
라쿠스 시는 연합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며 중부 이스테르의 지배자다.
북부 대륙의 남북을 종으로 가르는 이스테르강은 켈커티스 동맹과의 주요 경계선이다. 그 강에서 가장 발달한 항구 페르만시오가 바로 라쿠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라쿠스 시는 해군력에 있어서만큼은 이스테르강의 그 어떤 도시보다 월등하다.
이십 년 전 라쿠스가 연합에 참여한 이후로 켈커티스는 이스테르강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라쿠스 시는 아도니아 연합에서도 가장 콧대가 높기로 유명했다. 최근에 중부 대륙으로부터 삼단 갤리선의 설계도를 입수한 라쿠스 시가 대규모 자금을 투여해 이를 건조하겠다고 통지해 왔다. 그것도 무려 열한 척이나 말이다. 통지문에는 자금의 분담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방적으로 통지를 하면서 비용을 내놓으라니!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안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합군의 원활한 작전 수행과 도하를 목적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물론 바다로의 진출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다. 그 정도 크기는 되어야 아퀼로 해협을 건널 수 있을 테니까. 뭐, 나쁘지는 않다. 바다를 통해 중부 대륙을 이을 수 있다면 아도니아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비용이 너무 과도했다. 라쿠스로서도 상당히 무리를 한 셈이다.
자금이 부족하면 대수를 줄이면 될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민폐를 끼치다니, 쯧!
물론 좋은 점도 있다. 그 좋은 점이 지금에 있어서는 매우, 아주 좋은 점이 되었다. 연합군의 원활한 작전 수행과 도하라는 명분은, 거꾸로 연합군에 필요할 때 라쿠스 시에게 당당하게 사용권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너무나 고맙게도 말이다.
한 척당 사백의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있다? 열한 척을 전부 동원한다면 대략 한 개 군단이라는 말인데……, 후훗!
그 때문에 뚱보 고프레이를 협박하고, 지금까지 미뤄 두었던 자금 집행을 서두르는 것이다. 마계 검투 이후 그 배들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해 주겠다. 마르고 닳도록!
트라쿠스는 마차도 없이 가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걷는 게 도움이 된다. 그의 앞뒤로 경호병들이 열 명 남짓 따라붙었다. 앞선 경호병이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히 주의하며 길을 열었다. 위대한 아도니아 제3목민관인 트라쿠스의 경호로는 숫자가 너무 단출해 보이지만 도시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경호병들은 암살자가 뜬다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해낼 만한 실력자들이다. 그들을 뚫고 단숨에 자신의 목을 따지 못한다면 암살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가도를 걷는 자들의 절반은 시민이었고, 그 절반의 시민들은 대부분 예비군이다.
트라쿠스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아도니아의 목민관이 아도니아 가도를 자유롭게 걷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정겹게 인사를 던져 왔다. 전장에서는 예하 병사들이지만 종군 시기가 아닐 때는 유권자일 따름이다. 기본적으로 시민들 간에는 상하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물론 재산이나 권력에 따라 일등시민과 그냥 시민으로 구분된다. 비공식적으로 말이다.
일반 시민들은 3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3년간 생업에 종사한다. 그리고 다시 3년간 재복무를 한다. 군복무 기간이 아닐 때라도 폴리스에서 연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생활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
본인만 원한다면 만 오십 세가 되기 전까지 그런 식의 반군인 생활을 반복할 수 있다. 의무 복무 기간은 2회 총 6년이지만, 그렇게 반복해서 오십 세까지 과오 없이 복무를 마치면 명예군인의 자격이 주어져서 죽을 때까지 연금을 지급받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빈약한 시민들이 흔히 택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고참병들이 아도니아의 실질적인 힘이다.
그 연금을 충당하는 자들이 일등시민이다. 그들은 일반 시민들을 고용하거나 노예들을 부려 자신의 봉토에 대규모 농장을 운영한다. 때로는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공방을 운영하기도 한다. 거기서 나오는 세금이 복무 중인 일반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것이다. 그들이 내는 세금은 전체 수입의 반, 다른 도시에 비해 과다한 면이 있으나, 그 이상을 버니 그 정도 내는 것이 당연하다.
트라쿠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임기 기간 내내 세금 정책이 투명하고 공정해지도록 개혁하고 정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덕에 재정에 여유가 생겼고, 각종 복지 정책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폴리스 내에서 자신의 이미지는 친근하면서도 열정적인, 그리고 공정한 목민관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좋은 일이다.
마계 검투라? 새삼 로크리안에게 감탄하게 된다. 군사 정책에 있어서는 따라갈 사람이 없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탁월한 전술가면서도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지 않은가? 이번 일은 켈커티스가 포로 처형이라는 악수를 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작전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발상을 했다는 자체가 경이롭다.
과연 언제까지 로크리안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치프만가에 대한 견제책으로 더없이 훌륭한 파트너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기를 잘 노려야 할 것이다. 치프만가와 프리온가를 제거한다면 자신과 가문이 가진 기반이 아도니아 최고가 될 것이다. 삼각구도만 아니라면 정치적 기반이 약한 로크리안을 거세하는 데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로크리안이 탁월한 정치가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정치란 자신만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든든한 배경과 정치적 토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 기반은 한두 세대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정치가란 말은 타고난 소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기반을 말하는 것이다.
고맙게도 이번 마계 검투를 통해 자신의 기반이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번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얼굴 역할을 하는 건 결국 자신이기 때문이다. 로크리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도니아의 미래는 자신과 트라쿠스가에 맡겨질 것이다.
이제 이틀이 남았다. 마계 검투에 투입될 인원은 모두 아도니아에 도착해 있었다. 비록 지하 감옥에 수용되어 있지만 호사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명예로운 마계 원정대로서 최고의 대우를 해 주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곧 죽으러 갈 자들이니 그 정도 대우는 해 주는 것이 옳다. 내정을 책임진 자신의 너그러움도 알릴 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