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7화 (27/142)

27. 신관 제우스Ⅱ

조노량은 누운 자세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다. 땀까지 밸 정도의 강행군으로 데워졌던 육체에 하늘만큼 시린 냉기가 정신을 일깨워줬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언제까지 다른 자들의 의지에 휘둘려야 하는가?’

이대로 일 년 정도만 더 수련할 수 있었다면 탈출이 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체내에 쌓은 내공은 벌써 반 갑자를 훌쩍 넘겼다. 대놓고 연습할 수는 없었지만 경공의 수위도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속도? 글쎄……. 말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개들에게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공이라면 그 정도 속도로 반나절은 쉼 없이 달릴 수 있다. 혼자서 탈출한다면? 상체를 일으켜 세운 조노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송을 담당한 병사들이 지친 몸을 추스르는 동안, 포탈에 대기하고 있던 기대가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달리 갈리온들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역시 아직까지 탈출은 무리다. 병사들은 따돌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말과 비슷한 속도를 가진, 더구나 말보다 강한 지구력을 가졌다는 갈리온을 따돌릴 수는 없다.

병사들도 당장 움직일 생각은 아닌지 포로들이 쉴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조노량은 앉은 김에 운기를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가부좌를 틀 수는 없었기에 연못 주변 나무에 적당히 등을 기대고 앉은 상태였다.

조노량의 내공심법인 와호공.

내공심법이라기보다는 건강 도인술에 가까운 호흡법이다. 당연히 진전이 더딜 수밖에 없고, 그 성취에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름의 장점도 있다. 유일한 장점이긴 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자세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정좌를 한 것만큼 효율이 좋지는 않다. 그게 자세 탓인지 아니면 습관 탓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와호공은 삼류로 치부하는 그 와호공이 아닌 듯하다. 감로수의 영향까지 받아 거침없이 치닫던 기운이 회음으로 살짝 내려가는 듯하더니 미려를 지나 명문, 영대혈을 감싸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추를 통과해 기경팔맥을 휘돌았다.

아직까지 임독맥을 타통할 만큼의 수련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임독맥을 뚫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곳에서 감로수를 마시며 삼 년만 죽어라 수련을 쌓는다면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일주천을 할 때마다 내공이 증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속도다.

중원의 어떤 내공심법도 일주천 만에 증진된 내공을 느낄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심법이 있었다면 십 년이면 절정고수의 반열에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개나 소나 다 일류 고수가 되었거나, 벌써 중원이 일통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현상은 절대 심법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기운! 이제는 피부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밀도 높게 대기를 휘도는 이 알 수 없는 기운. 원인이라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혹시 이게 마나인가?’

일주천을 끝냈을 즈음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삐익! 집합!”

추위도 잊고 제멋대로 너부러져 있던 검투반원들과 일부 일반반원들이 순식간에 자세를 갖추고 모여들었다.

“삼열 종대! 뒤로 번호!”

던져진 조각만두를 발견한 잉어 떼를 방불케 하는 속도다.

“하나, 둘, 셋…….”

번호는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정도로 끝나버렸다.

중간에 처형당한 자 한 명과 일반반에서 추가된 일곱 명, 총 일백다섯 명. 인원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질 재주가 없다면 빠져나갔을 수가 없다.

“앞 열로부터 세 명씩 포탈을 탄다. 여유 시간은 삼 초 준다. 뭉개지고 싶지 않으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좋을 거다.”

이미 여러 차례 포탈을 타 본 경험이 있는 조노량은 그게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도착 후에 포탈 멀미로 뭉그적거렸다가는 다음 이동자와 합체돼 버린다는 뜻이었다. 그건 여지없이 사망이다. 그렇게 키메라가 된 시체를 치울 틈도 없으니 그 이후로 이동하는 자들 모두 거대한 고깃덩이가 될 것이 뻔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순간적으로 불끈했지만 방법이 없다.

기사의 장담대로 포탈은 삼 초 간격으로 열렸고, 한 명의 사고도 없이 도착함으로써 검투반원들은 인간의 정신력을 증명해 보였다.

“제우스라고 했소? 잘 들으시오.

그대들은 하루 종일 기도나 하고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지. 그리고 때가 되면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오.

어떤 것을 먹을까? 어떤 음식을 목구멍에 넘기면 더 즐거울까?

하!

우린 어떤 줄 아시오? 우린 그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소. 때가 되면 건량을 씹어 삼키고, 얼어 터진 빵덩이를 씹는다오. 여건이 된다면 따뜻한 물을 한 잔 곁들이오. 단지 오 분이오.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루한 행군이 시작되오. 행여나 얼어붙은 대지에 발이 붙어 버릴까 걱정하며 걷기 시작하는 거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지.

목적지? 있지! 목적지에 도달하면 행복할 것 같소? 우린 군인이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자신들의 무덤이지.

그래도 일부는 아도니아에 돌아오오. 모든 군인들은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일 것이라고 믿지. 바로 옆에 걷고 있는 전우나 자신 둘 중 하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이지. 그런데?

당신이 가겠다고 하는 그곳, 그런 희망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들이 늘 끼고 사는 그 책에서 보지 못했소?

마계의 문에 들어갔던 원정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로크리안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제우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하,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군. 당신의 이야기는 들었소. 아도니아 출신의 추기경이 탄생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이었지. 사십 년 만이라며 온 도시가 들떠 있더군. 정말 장하오.

그런데! 그 보장된 미래를? 신에게 봉사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이런 식으로 차 버리겠다는 말이오? 당신은 할 일이 많소. 이런 식으로 생을 마감하겠단 말이오?

생각해 보시오. 네 차례의 원정도 거울의 방에서 시작하진 않았소. 그들이 떨어질 마계 광장은 마계의 문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곳이오. 발을 들여 놓았다간 절대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이란 말이오. 알아듣겠소?”

“목민관이시여. 그런 곳으로 어째서 인간을 들이는 겁니까? 그건 옳은 일이란 말입니까?”

로크리안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짜증이 드러났다. 이 철없는 젊은이가 도대체 무슨 한가한 소리를 지껄이는가. 세상에 대해 뭘 알고나 떠드는 것인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로크리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친우의 조카며 오랫동안 자신을 후원했던 가문의 자식이 아닌가.

“가문에서 허락한 일이오?”

흔한 말 돌리기.

하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결심은 아닌 듯 보였다.

“전 이미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 제 결정에 대해 가문의 허락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로크리안의 인내에도 한계가 닥쳤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젊은이다. 그가 가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고려해 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원한다면 보내 주지. 원대로 가서 죽으라지!

“정 원한다면 허락하겠소. 하지만 잘 기억하시오. 당신보다 더 대단했던 사제들도 마계의 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마계의 문은 전사는 물론이고, 신의 사도라 자처하는 자들의 영혼까지 어둠에 물들여 버린다는 것을! 당신은 그들과 같게 될 것이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검은 영혼으로 마계의 문을 떠돌게 될 것이오!”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가 높아졌던 로크리안의 눈이 감겼다. 감긴 눈 속으로 믿기 싫은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거울을 통해 본 마물들의 모습이다. 신체에 각인이라도 된 듯 신의 문장을 마치 무늬처럼 두르고 있던 마물들. 신의 문장이 얼마만큼 추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피칠갑을 하고 날뛰던 더러운 마물들의 모습을.

“다시…….”

“후회는 없습니다.”

제우스는 어렵게 입을 열던 로크리안의 입을 단호하게 막아 버렸다.

로크리안은 이 꽉 막힌 사제, 친우의 조카에 대한 설득을 포기했다.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의지는 더 이상 확고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단호해 보였다.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사내라면, 더구나 이렇게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제라면 자신이 선택한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 그와 닮은 마물이 거울을 통해 자신과 눈을 맞추더라도 절대 양심에 찔리거나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로크리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경비병!”

폼프니우스가의 어린 아들 제우스는 경비병의 안내를 받으며 제1목민관저를 나섰다. 로리안의 하급신관에서 일약 추기경 후보로 추대된 풋내기 신관의 표정은 결연했다. 아도니아 최고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전사의 길이 아닌 사제의 길을 택하고, 로리안에게 귀의하기까지 숫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어이없는 장소에서 성령을 입어 곧 중앙 대륙으로 내려가 수업을 쌓고 추기경이 될 것이 확실시되던 자신이었다. 신관이 되어 버린 자신을 비웃던 사촌들이 사원을 방문해 축복을 앙원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 듣게 된 소식이 바로 마계 검투였다. 함부로 공개되지 못하는 은밀한 검투였지만 아도니아 최고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조금은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검투사들이 바로 크로아지크 검투단임을 알게 된 것이 문제였다. 언젠가 꼭 한 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내.

노리앙이라고 했던가? 성령을 받고 기도의 방에 틀어박혀 꼬박 백 일간의 기도를 하는 와중에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사내의 모습.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유를 알 수도 없었다. 처음 그의 몸에 손을 대었을 때의 기억, 충격, 감동.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뇌리를 장악해 기도조차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신탁이라도 받은 듯 그를 만나야 하겠다는 알 수 없는 집념만이 그의 뇌리를 장악해 들어갔다.

그가 마계 검투사가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치 신성한 사명이라도 받은 듯 자신의 길이 결정되어 버렸다. 가야 했다. 자신이 성령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래서 로크리안을 찾았다. 그와 안면이 있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자기 자신이 이미 아도니아에서 유명인사가 돼 버린 탓에 어렵지 않게 로크리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비겁하지만 마계 검투의 존재를 일반 시민들은 물론 종단에까지 보고한다는 위협과 아드리안의 조카로서, 로크리안의 정치적 후견자인 폼프니우스 가문의 아들로서, 간곡한 부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것이다.

제우스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과연 이 시련을 자신이 감내해 낼 수 있을까?

‘탄생의 어머니시며, 자애롭고 위대한 대지의 여신 로리안이시여! 이 미천한 종에게 참된 믿음과 굳건한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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