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6화 (26/142)

26. 마계 검투

지금은 통곡의 계절. 해가 저문 후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직 여섯 시도 되지 않았건만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유난히 넓은 막사 안에 밝혀진 등불은 입구 쪽에 하나 막사 중앙에 하나, 합이 둘뿐이었다. 그나마 질 나쁜 지방유를 사용하는 탓에 밝지도 않다. 가끔 타닥거리며 불똥이 튀기도 하지만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까무러져 버린다. 하지만 오래된 지방이 타는 구릿한 냄새는 충분히 막사 곳곳에 가 닿는다.

검투반의 막사는 그나마 일반 막사에 비해 환경이 좋다. 외풍이 멋대로 드나들 만큼 허술한 들창도 없었고, 땔감도 제법 넉넉히 공급되고 있었다.

조노량 등은 이른 저녁을 마친 후 벌겋게 달아오른 난롯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조노량과 함께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이전과는 다르다. 커트리안이나 스마르까지 끼지는 않았지만 쥬시아누스, 롤, 예니에프 삼인방과 샤마노프 등 A클래스의 몇몇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다.

아직까지는 크리들이나 하이오지가 더 편하지만, 이들과의 관계도 그다지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껄껄, 그래서 오오라의 밀도를 높여 보라는 거야. 노리앙 자네는 눈도 좋고, 반응 속도도 빠른데 기세가 부족해. 당분간은 마나 수련에만 전념해 보라는 말이지.”

자신은 마나가 뭔지도 모른다는 걸 말해야 할까? 하긴 말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내공의 증진에만 전념하면 될 일이다. 게이트의 샘물이라도 공급받는다면 좋겠는데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평소의 롤은 털털한 사람이었다. 충고를 아끼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대로 이야기하고 격의 없이 상대를 대한다. 상대가 비록 C클래스의 풋내기라 해도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검투반의 실질적 지배자인 커트리안이나 찬바람이 풀풀 날리는 스마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격의 없음으로 인해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최소한 검투반 내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24시간을 붙어서 지내는데 오해하고 자시고 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롤을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거나 싱거운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 영락없는 옆집 아저씨다. 지난 시민궁 시합에서 보여준 광기를 떠올리면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본인이나 수련을 좀 하시라고요.”

이야기를 듣던 예니에프가 핀잔을 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롤은 거의 수련을 하지 않는다. 가끔 다른 사람들의 수련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 같은 천재는 수련을 많이 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천성적으로 게을러서라는 말이 맞을 게다.

검투반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첫 번째는 커트리안이고, 두 번째가 롤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예니에프 자신이다. 하지만 예니에프는 자칭 천재인 롤과 달리 자타가 인정하는 천재다. 그럼에도 한때는 수련광이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게으른 자들의 대열에 합류해 있지만 말이다.

커트리안이나 롤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다른 이들의 수련을 지켜보는 것이 주요 일과라면, 그래도 예니에프는 검을 손에 들고 가끔 휘둘러보곤 한다. 그래봐야 감을 유지하기 위한 정도겠지. 어쨌든 현재로서는 누가 누구에게 게으르다고 지적할 정도까지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S클래스를 유지한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껄껄, 예니에프야, 네가 내 글라디우스 맛을 잊은 듯 보이는구나. 대련이라도 한번 해 보련?”

“아, 됐습니다, 영감님. 날도 추운데, 난롯불이나 쬐세요.”

“죽고 싶냐?”

“옹졸하시긴…….”

양질의 식사를 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며 웃고 떠들지만 조노량의 속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커트리안이 오랜 기간 준비했다던 탈출은 어이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근 한 달 전 일이지만 아직까지 진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니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울분에 가까웠다. 애초에 몰랐다면, 아니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았었다면 속이라도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어떻게 수용소장이 그 계획을 입수하고 저지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가슴이 답답해 수련에 집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떠드는 이들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담대한 건지 무사태평한 건지…….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처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임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날 이후 부소장 로뜨는 계속해서 험악한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거나 징벌을 내리지는 않고 있었다. 검투반 담당 기대장의 말에 따르면 당시 사건은 크로아지크 병사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 했다. 또한 사건 후 수용소장인 아드리안에 의해 일절 외부에 누설하지 못하도록 엄명이 떨어졌기에 아도니아에서는 사건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크로아지크 수용소의 치부가 될 사건이었기에 외부에 비밀로 하고 덮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포로들의 탈출 기도라면, 더구나 시민궁 시합에 참가하는 검투사들의 탈출미수 사건이라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닐진대, 어떻게 그대로 두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외부에 밝혀진다면 수용소장 자신의 목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일진대, 물론 당사자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자체 징벌이라도 내려야 마땅했다.

더구나 지지난해 여름에 있었던 두 번의 탈출 사건으로 인해 수용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흉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차라리 태형이나 독방형이라도 받았었다면 마음은 편했을 것 같다. 아무런 조치가 없으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어쨌든 조노량의 기분은 아직까지 우울했다. 저만치서 미지근한 시선으로 목각인형을 깎고 있는 커트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자다. 탈출 당시 들은 바에 따르면 그의 탈출을 위해 가문의 역량을 전부 동원했다고 했다. 실패는 그에게도, 그의 가문에도 치명적인 손실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귀하다는 마법사와 네 명의 정예기사까지 체포된 상황. 저렇게 태평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혹, 지난여름 탈출했던 루드나 허글러처럼 수용소에서 기회를 엿보는 것일까? 그들로 인해 이제 크로아지크 수용소도 더 이상 탈출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물론 지난 번 탈주 시도까지 겹쳐 경비가 대폭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목숨을 건다면 다시 시도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제발 그래 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다시 한 번 목숨을 걸어 볼 생각이다. 잠깐이라도 자유의 맛을 본 후로는 수용소 생활 자체가 미치도록 답답했다. 이대로라면 혼자서라도 탈출을 시도할 것 같았다. 잡혀서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외부 활동이 금지된 통곡의 계절답게 아무 일 없이 저녁시간은 흘러갔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쾅!

요란한 군홧발 소리와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에 이른 새벽의 정적이 깨져 나갔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탓에, 열어젖혀진 문밖으로는 이리저리로 그림자를 옮겨가며 횃불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통곡의 계절을 대변이라도 하듯 매서운 칼바람이 병사들과 함께 막사로 들이닥쳤다. 그 거친 기세에 새벽 옅은 온기를 간직했던 난로마저 싸늘히 식어 버렸다.

기상 시간이 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시간이 남았음을 이유로 항의할 만큼 눈치가 없는 검투반원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검투반원들은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침상 앞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일까? 조노량도 불안한 마음을 안고 침상 앞에 부동자세로 정렬을 했다.

“검투 시합이 준비되었다! 각자의 무기들은 이미 꾸려진 상태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원 99명 전원은 아도니아 특별 검투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금일 전원 이동한다. 스마르! 인원 점검을 실시하라.”

무슨 소리지? 통곡의 계절에? 검투반원 전원이 참가하는 검투 시합이라니? 크로아지크 검투반이 생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하지만 살갗을 에는 긴장감이 모두의 입술을 얼려 버렸는지 항의는커녕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지 않았다.

“침상 앞으로 정렬! 좌측 선입부터 좌로 번호!”

구멍 뚫린 내복 바람으로 복도에 나선 스마르의 외침이 짧게 끊어졌다. 많이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완전무장을 한 경비병들이 무기를 뽑아 든 채 막사 안 좌우로 늘어섰다. 막사 안에 난입한 경비병들의 숫자만도 한 개 기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병력이다. 게다가 병사들 틈에는 눈에 익은 기대장들과 종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완전무장을 갖춘 병사들을 상대로 맨손에 마나 팔찌까지 차고 있는 검투반원들은 어떠한 저항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한 그들이 진입한 이후에도 문밖에서 일렁이는 횃불의 숫자가 전혀 줄어들어 보이지 않는다. 난입한 병력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스물!”

“스물 하나!”

“스물 둘!”

“스물 셋!”

평소의 느긋한 검투반원들의 목소리가 아니다. 험악한 분위기 탓인지 바짝 긴장한 목소리들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신참들처럼 넓은 막사 안을 쩌렁쩌렁 울리도록 번호를 붙이고 있었다.

“아흔 일곱!”

“아흔 여덟!”

침상 위에서 릴레이를 하듯 이어지던 번호가 아흔 여덟에서 끝났다. 조노량이 기억하건대 일반반에서조차 이토록 짧은 시간에 번호가 끝났던 적은 없었다. 번개가 몰아치듯 이어지던 외침들이 끝나자 순간적인 정적이 찾아왔다.

“아흔 아홉! 번호 끝! 전원 이상 무!”

막사 안쪽을 향해 부동자세를 취하던 스마르가 절도 있게 돌아서며 마지막 번호를 외치는 것으로 보고를 마쳤다.

“지금부터 일 분 이내에 복장을 갖춘다. 행여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즉결처분될 것을 약속한다. 실시!”

횃불을 등진 탓에 음영으로만 보이는 지휘자의 얼굴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투반원들은 평소 검을 날리던 속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엄청난 빠르기로 옷들을 꿰기 시작했다.

‘후다닥’하는 소리가 검의 속도보다 빠르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조노량 역시 질세라 급하게 웃을 주워 입었다.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탓에 본능적으로 평소에 아끼던 속옷까지 하나 더 껴입었음에도,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옷을 입고 침상에 정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검투반원들 중 이런 의문을 떠올리는 자는 불과 몇 명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자기 조성된 위기감과 강압적인 분위기에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고 지시에 따르기 바빴다.

지휘자는 경험이 많은 자가 틀림없었다. 충분한 위협과 함께 생각할 시간도 없이 몰아붙인다면 아무리 무리한 명령이라도 착한 갈리온처럼 따르기 마련이다. 물론 이유 따위를 설명해 줄 필요도 없다.

엄중한 감시 속에서 막사 밖으로 한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가는 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었다. 입구를 나서면서 한 사람씩 꼼꼼히 쇠사슬이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내심 처형을 생각했다. 단순히 징벌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 ☆

쇠사슬을 차고 먼저 나가 정렬해 있던 반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통곡의 계절은 밖에 서서 버틸 만큼 만만한 날씨가 아니다. 그야말로 뼈를 에는 칼바람이 옷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든 신체 부위를 얼려 버리기 때문이다.

조노량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눈치가 있어서인지 있는 옷 없는 옷 모두 껴입고 나섰지만, 아직 해가 나지 않은 새벽 칼바람을 견디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똑바로 줄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고 있었다.

조노량 역시 두 팔과 발목을 연결하는 기다란 사슬을 차고 문 밖으로 나섰다. 난로의 온기가 식었다고 해도 안과 밖은 천양지차였다. 나서자마자 호흡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자주 깎지 않아 까칠하게 돋아난 수염 위로 얼음알갱이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조노량은 급히 내공을 회전시켰다. 단전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언제부터인가 급속하게 증가한 내공이 전신을 치달아 차가워진 피를 데우기 시작했다. 한서불침의 단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냉기를 몰아낼 수 있었다. 간절한 표정으로 한 사람씩 쇠사슬이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는 다른 자들과 달리 조노량은 조금씩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추위가 가시자 조노량의 두뇌가 회전을 시작했다. 아직까지 추위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다른 반원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을 자다가 날벼락을 맞았을 때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면, 지금은 논리적인 두려움이랄까? 마치 형장에 끌려가는 죄인들 같지 않은가?

‘뭐지?’

조노량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었다. 탈주 시도에 대한 처형일까? 아니, 대상 자체가 검투반원 전체였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을 아예 없앨 생각이 아니라면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액면 그대로 검투 시합을 위해?

통곡의 계절에는 검투도 쉰다. 그런데 백 명에 이르는 검투반원이 모두 참가해야 할 정도의 대규모 검투 시합을 연다? 그것도 말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방에 깔린 병사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는 기대는 물론, 광산의 경비를 담당하는 기대까지 차출된 모습이었다. 어둠 탓에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네 개 기대?

거기다가 기대 전체가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기사나 종사급만 동원된 기대도 다수 있는 듯했다. 정상적인 기대보다 더 많은 기사와 종사들이 검투반 막사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평소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수용소장이 모닥불 앞에 앉아 막사를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드리안이라고 했던가? 아도니아 최강의 사내! 일개 검투사와는 비교할 수 없다던 남자.

그는 로뜨 부소장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대화를 나눈다기보다는 부소장의 툭 튀어나온 입이 쉴 새 없이 뭔가를 주절대고 있었고, 아드리안은 가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철컥, 철컥

지금 막 막사 밖으로 몸을 내민 커트리안의 양 팔목과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졌다. 대부분 막사 밖으로 나오면 진저리를 치거나 어깨를 움츠리기 마련인데, 커트리안은 마치 기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커트리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드리안이 손을 들어 여전히 떠들고 있는 로뜨 부소장의 입을 막고 부관을 향해 손짓을 했다.

부관은 커트리안에게 다가가 쇠사슬을 점검한 후 그를 아드리안 쪽으로 끌고 갔다.

한 사람은 앉은 채, 다른 한 사람은 손과 발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서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청력을 집중해 보았으나 사정없이 몰아치는 칼바람 소리에 모든 대화를 엿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바람소리가 잦아질 때마다 단편적인 대화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 일어서서 커트리안을 맞이했다.

“잘 지냈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 없겠지?”

커트리안은 건조한 표정으로 답했다.

“덕분에 잘 지내긴 했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소만?”

바람에 실려 온 대화에 조노량의 귀가 쫑긋 곤두섰다.

“검투를 하게 될 거네. 더 이상 알려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검투라? 핑계는 아니었군. 뭐, 곧 알게 되겠지.”

심드렁한 반응에 아드리안이 한마디 더 던졌다.

“켈커티스가 자네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 모양이더군.”

“흠.”

아드리안의 말에 커트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자 아드리안도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곧장 화제를 돌렸다.

“자네의 계획이 틀어진 점은 유감일세. 이럴 줄 알았으면 놓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흐흠, 아무리 당신이라도 다칠 텐데?”

“후훗, 나를? 누가? 아도니아의 돼지들이? 크크, 난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지. 아무도 막지 못해.”

아드리안의 입가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명백한 조소며 광오한 자신감이다.

“뭐, 돌아와서 봅시다.”

“아마도 불가능할 걸세. 자네가 이번 검투를 승리한다면 자유일 테고, 패배한다면 죽을 테니까.”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커트리안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호오, 승리를 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실패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물론 나도 기대하는 바이지만 쉽지 않을 걸세. 행운은 빌어 주지.”

그걸로 둘의 대화는 종료되었다. 커트리안은 부관에게 이끌려 다시 원래 줄로 복귀했다.

그 뒤를 아드리안의 시선이 따랐다. 자신의 손에 의해 포로가 된 자, 그리고 자신에 의해 다시 한 번 속박된 자. 그야말로 악연이 아닌가.

시민궁 시합의 검투사? 흥, 자신이 보았을 때 커트리안의 실력은 한낱 검투사 따위가 아니었다. 로크리안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그만 한 실력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훌륭한 적수로 성장할 수 있을 자였지만 아쉽게 되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 모든 것이 귀찮을 뿐이다.

검투반원 99명 모두에게 사슬이 채워지자 행군이 시작되었다. 행군 도중 일반반원으로 보이는 인원들이 몇 결합했지만, 여전히 호송병들의 숫자가 네 배는 많아 보였다. 이 열로 늘어서 행군하는 포로들 좌우로 병사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따랐고, 그 옆으로는 기사들과 종사들을 태운 갈리온들이 느린 걸음을 떼고 있었다. 맨 뒤로는 검투반원들의 무기를 실은 것으로 보이는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포로들이나 병사들이나 고생스럽긴 매한가지. 그들이 내뿜는 입김이 차갑게 얼어붙어 갔다.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게야? 일이 어떻게 돼 가는 거냔 말이지? 자네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는가? 말 좀 해 보라고. 아니, 벙어리야?”

크로아지크 황야를 가르고 멀리서 뿌연 여명이 아스라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황야 전체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광량이었다. 그 여명을 등지고 일행을 바라보는 인영이 둘 보였다.

두 인영이 서 있는 위치로 보았을 때 황야에서 노숙을 했다는 말인데……. 통곡의 계절임을 감안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면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붉은 박쥐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자와 회색로브를 눈 아래까지 덮어 쓰고 있는 사내. 외모는 인간에 가까웠지만 절대 인간일 수 없는 두 개체.

그중 붉은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사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회색로브의 사내를 닦달하고 있었다.

“그분의 뜻은 지켜보라는 거였다.”

“아, 정말! 그 해롭고 끔찍한 신성력을 마구 쏟아부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개입하지 않겠다고?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네놈들은 정말 편리한 사고방식을 가졌군. 부럽다, 부러워. 그나저나 이거 어쩌지? 보통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 자네가 책임질 건가? 책임질 거냐고?”

“시끄러운 놈! 저만치 꺼져라. 따라가 보면 알 일을 가지고.”

박쥐날개 사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회색로브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행군은 아침은 물론 점심까지 거른 채 진행되었다. 조금이라도 처진다 싶은 자에게는 가차 없이 채찍이 날아들곤 했다. 채찍을 받는 주체는 거칠기 짝이 없는 검투사들이다. 검투반으로 옮겨 온 이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얌전히 채찍을 받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첫 번째로 채찍을 감아쥐고 대항하던 B클래스 사내의 목이 떨어진 후로는 더 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반항하던 사내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는 순간, 길옆에서 행군하던 갈리온 기사의 신형도 같이 치솟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푸른 오오라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사내의 목은 길 아래로 구르고 있었다.

아무런 경고도 없었고, 위협도 없었다. 조금씩 투덜거림이 번져 가던 행렬은 적막에 휩싸였다. 커트리안의 검미가 꿈틀거렸지만 항의를 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감시병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유례없는 강행군으로 정오를 두 시간쯤 넘긴 즈음에 열두 개의 회색 기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행은 다시 한 시간가량의 행군 끝에 목적지인 헤지크 포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포로들은 물론 감시병들까지 형편없이 지쳐 있었지만 다행히 낙오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분위기상 발생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조노량은 스스로 감로수라고 이름 붙인, 얼지 않는 연못의 물을 정신없이 들이켠 후 눈밭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다른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실 조노량은 그 누구보다 멀쩡한 상태였다. 오랜 행군으로 단지 목이 말랐을 뿐.

마나를 봉인당한 자들과 달리 조노량의 내공은 마나 팔찌로 인해 전혀 제어를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노량 본인이 마나 팔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커트리안이 안다면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들어 낸다고 해도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아야 할 것이다.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조노량은 ‘모난 돌’에 대한 격언과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격언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포탈에도 두 개 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탈출? 크로아지크 황야를 벗어날 방법도 없었지만 수십 기의 갈리온이 포함된 이 정도 병력이라면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애초에 탈출할 꿈도 꾸지 않았지만 조노량의 귀에는 아직까지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승리한다면 자유를 얻을 것이고, 패배한다면 죽을 테니까!’

지금의 분위기를 보더라도 절대 만만한 검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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