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5화 (25/142)

25. 마계의 문

“거울의 방?”

로크리안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마계 검투! 마물들을 상대로 대규모 검투대회를 열겠소. 각 포로수용소에 나눠 수용된 기사와 종사급 포로들을 한꺼번에 마계의 문에 쓸어 넣을 것이오. 각 도시의 수장들은 북부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검투 시합을 보게 될 것이며, 피의 향연을 보게 될 것이오. 그 속에서 수장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때 작전권의 통일과 총력전을 제안할 것이오. 흥분은 전염되는 법! 그들은 분위기에 휩쓸리게 될 것이오. 그럼에도 동참하지 않는 폴리스는? 연합에서 제명함과 동시에 연합의 적으로 공포할 생각이오. 참가하지 않을 경우 연합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면, 감히 거부할 폴리스가 있겠소? 흥분한 폴리스 대표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연합의 적이 되겠다고 선언할 간담이 있겠소? 그 다음! 전의를 불태운 수장들과 함께 켈커티스를 지도상에서 지워 버릴 것이오.”

제3목민관 트라쿠스는 전율을 느꼈다. 다른 원로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어차피 처형될 포로들을 이용해 각 도시의 대표들을 격동시키고 의지를 이끌어, 전례가 없었던 대통합을 이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된 지휘권 아래 뭉친 아도니아 연합은 켈커티스 동맹을 너끈히 쓸어버릴 전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두 배 이상의 병력과 풍부한 보급, 잘 제련된 무기는 켈커티스의 그것보다 당연히 월등하다.

‘마계의 문’, 비밀 검투시합의 장소가 되거나 일부 사형수들의 마지막 처형지로만 이용되던 그곳!

아도니아는 마계대전 당시 구축된 거울의 방이 있는 도시다. 마계의 문으로 가는 북부 최대 포탈이 거기에 있으며, 마계의 문 중앙 숲 광장을 비추는 대형 거울들이 있었다. 시민궁 가장 깊숙한 지하에 위치한 그 거울의 방은 일종의 지하 광장이었다.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는 불길한 장소지만 특수한 경우 은밀한 내기의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기도 했다.

대상이 사형수일 경우 내기의 종류는 그가 몇 마리를 죽이고 얼마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남느냐였는데, 사실 그다지 재미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간혹 열리는 비밀 검투시합은 사람들을 극도로 흥분시키는 요소가 있었다. 맞붙은 마물에 따라 시간 단위로 베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매 순간순간이 베팅 지점이기 때문에 그 긴박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처음 포탈을 탄 자들은 포탈 멀미로 몸도 가누기 전에 마물들에게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걸 극복해 낸 자들의 전투는 피를 끓어오르게 한다. 수백, 수천의 마물들이 검투사를 덮친다. 대부분 허약한 마물들이다. 때문에 처음에는 통쾌할 정도로 마물들을 죽여 나간다.

그리고 조금씩 지쳐 간다.

점점 둔화되는 몸놀림과 잘못된 판단들이 검투사를 좀먹기 시작한다. 하나둘 늘어나는 상처로부터 빠져나가는 피는 검투사의 체력을 갉아먹고, 찢어진 근육은 몸을 마비시킨다. 그렇게 그들은 서서히 마물들의 밥이 되어 간다. 사지가 찢기고 내장이 파헤쳐지고 목이 떨어진다.

일반 사형수들도 이럴진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검투사들이라면? 전장을 누비며 오오라를 끌어올렸던 기사들이라면? 그것도 수백 명으로 꾸려질 대규모 마계 검투라면 모두의 피를 끓게 할 것이다. 그대로 들고 일어나 켈커티스로 진격하자고 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아도니아 최상급 검투단 중의 하나인 크로아지크 검투단, 그들의 마지막 검투는 화려할 것이다. 최고의 검투사들이 기대 단위로 펼치는 마계 검투. 아! 자신조차 기대감에 들뜨고 있었다.

물론 그런 크로아지크 검투단이라고 하더라도 마계 광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수천의 마물을 상대한다고? 어림없는 일이다. 설사 벗어난다고 해도 수장들의 복수심만 키울 것이다. 오히려 미진한 복수를 끝내자고 들고 일어날지 모른다. 역시 나쁘지 않은 결론이다.

하지만 아도니아 제3목민관으로서, 마계 광장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아는 트라쿠스는 그들이 절대 마계 광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나마 불가능하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십여 년 전 발생한 단 한 번의 사건 때문이었다.

마계의 문 중앙 광장을 벗어난 이들이 있었다. 당시 마계 검투를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 대단한 화재가 되었던 사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주인공들 역시 켈커티스 출신이었다. 아도니아 검투계를 초토화시켰던 크로아지크 삼인방, 헤트르 폰티나, 어둠의 클라흐, 거신 고골리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중 헤트르 폰티나는 현재 아도니아의 자랑이라는 로크리안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무위를 지닌 자였다. 무위도 무위였지만 그들이 마계 광장을 벗어난 것은 아주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폭풍이라니…….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들은 중앙 광장을 벗어남으로써, 동시에 거울의 범위에서도 벗어났기 때문에 최후를 보지는 못했지만 결코 살아남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광장을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뿐. 그것만 해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그들이 광장을 벗어난다는 데 돈을 걸었던 상인 하나가 판돈을 싹쓸이하는 기록이 세워지기도 했다.

마계의 문은 북부 대륙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지역이다. 그 가운데 위치한 것이 바로 마계의 중앙 숲 광장이다. 그들이 아무리 대단한 전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광대한 땅, 마계의 문 자체를 벗어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수백 년 전 마계의 문이 생성되고 나서 총 네 차례에 걸친 원정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모험가들의 진입은 수를 셀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마계의 문에 발을 들여놓고 다시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기 수천의 전사와 수천의 신관들로 이루어진 세 번의 원정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원정은 총 규모가 삼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만 모아 만든 열 개 사단! 북부의 난다 긴다 하는 레인저들이 길잡이로 나섰고, 중앙 대륙의 최고 검사들과 가장 유명하다는 기사단들이 몸을 던졌다. 각 신전의 상급 신관급들로만 구성된 사제단의 수는 천오백을 헤아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못했다. 백 년에 걸친 네 차례 원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원정대가 구성되지 않았다. 마물들이 마계의 문 너머로 진출할 수 없도록 구축된 결계까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귀한 목숨들을 희생시키느냐는 자기 합리화적 결론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트라쿠스는 무표정한 로크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북부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계획을 세우면서 저렇게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다니?

역시 대단한 자다.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도니아의 제1목민관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가 아도니아 최강의 사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패전에서 돌아온 그가 모든 정치적 제안을 물리치고 칩거하며 세우고 있었던 계획이 바로 이것이었다니? 아니, 돌아오기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이후 수순들까지 치밀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충분히 가능하다. 전면전을 외치는 도시는 물론,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은 도시의 수장들까지, 마계의 문 원정이라는 역사의 한 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서, 혹은 전무후무한 대규모 마계 검투를 관전하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어쩌면 참관자의 규모를 제한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참관자들은 피가 튀는 검투를 지켜보며 흥분할 것이다. 그리고 확전을 요구하는 도시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기름만 뿌려 준다면 거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아도니아의 지휘 아래 모여드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일부는 복수를 위해서, 일부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또 일부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리고 일부는 겁이 나서!

영리한 자들은 추후 북부의 대세가 아도니아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임을 눈치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가 무르익었다. 아도니아도 이제 켈커티스처럼 통일된 지휘 아래 좀 더 강한 결집체로서 거듭날 때가!

로크리안의 시선이 트라쿠스에게 향했다. 무슨 요구를 하고 싶은 것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름을 붙는 역할을 요청하는 것이다. 아도니아 제일의 선동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아도니아 제일의 선동가인 트라쿠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오늘부터 숙제를 준비해야겠다. 제법 부담되는 숙제지만.

선동가는 타고난다기보다 만들어진다. 치밀히 분석하고, 철저히 연구하고, 논리의 순서를 정해야 한다. 미세한 어감과 속도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연설이 시작되기 전, 분위기는 미리 조성해 놓아야 한다. 연설이 시작되었을 때 분위기를 몰아간다는 것은 이미 절반은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선동이 먹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연단에 올라야 한다. 그 상황은 로크리안이 만들어 놓았다. 큰 짐 하나는 덜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아주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이번 선동에 성공한다면 트라쿠스 가문과 자신의 이름은 북부 통일의 주역으로 기억될 것이다. 종전 후 더욱 높아진 아도니아의 위상과 그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어쩌면 향후 주도권은 치프만가가 이끄는 급진파가 아닌 보수파인 자신들이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확전을 통해 보수파가 세를 얻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일이 그렇게 전개된다면 지금 트라쿠스가 우려하는 문제, 즉 켈커티스의 숨은 의도를 파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든지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물량 앞에서는 어떤 기교도 의미가 없어진다.

선대 때부터 이어져 오던 이 지겨운 전쟁을 종식시키고 트라쿠스가가 주도하는 아도니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북부는 다시 아도니아의 통제 속에서 평화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트라쿠스의 머리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럼 마계의 문에 들어갈 포로의 수는 얼마로 잡아야 될까? 가능하면 많아야 할까? 아니면 기사급으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 너무 많아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기사급에만 한정하면 너무 적다. 더구나 기사급만 포함시킨다면 켈커티스 유력 가문의 자제들 중 제외되는 자가 나올 수도 있다. 결국 종사급까지 포함해서 검투 자체가 마물을 상대로 한 ‘기대전’의 양상을 띠게 해야 할 것이다. 내정을 담당한 제3목민관답게 답은 금방 나왔다. 기사와 종사급으로 범위를 잡는다면, 우선 크로아지크만도 백여 명, 기타 포로수용소에 속한 종사급 이상의 포로 숫자를 모두 합친다면 역시 백여 명. 이백여 명이면 가장 적정한 수준이다. 기사와 종사급으로만 이루어진 약간 모자란 두 개 기대. 그 안에 켈커티스 유력 가문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했다. 유력 가문의 구성원이면서 종사급도 안 되는 자들도 있겠으나, 그들은 가문에서의 비중도 낮은 자들일 것이기에 무시해도 좋았다.

이 정도 인원만 해도, 과거 네 차례의 원정을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인원이 마계의 문으로 들어선 기록이 될 것이다. 그것도 마계의 문 중앙 한복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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