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4화 (24/142)

24. 피의 축제

‘기사급 포로들을 모두 처형해 버리다니? 켈커티스가 정녕 미쳤단 말인가?’

트라쿠스의 상념은 한 인물의 고성에 간단히 깨져 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우리도 당장 다 죽여 버려야 합니다. 다 죽여 버린 후, 켈커티스로 단숨에 진격해 남은 놈들까지 싹 다 쓸어 버려야 합니다.”

벌컥 화를 내는 내무위 원로를 보며 트라쿠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미 쉰을 넘겼건만, 노장군의 성정은 여전히 불같았다.

트라쿠스는 혀를 차며 상념을 이어갔다. 켈커티스에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며 과연 아도니아의 반응을 짐작하지 못했을까?

켈커티스가 비록 야만스럽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이 없는 작자들은 아니었다. 더구나 영악한 바라흐하가 아도니아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뭔가 노림수가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리가 없다.

아도니아의 분위기는 벌써 전면전을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소강상태에 들어선 지 겨우 삼 년 만에 다시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켈커티스나 아도니아 모두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 한 번의 패전이 있었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늘 수세적이었던 켈커티스다. 그 한 번의 승리를 기화로 확전을 유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경제력이나 군사력 모든 면에서 아도니아 연합이 우세한 상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적으로 열세인 켈커티스가 확전을 통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확전으로 피해가 커진다면 바라흐하의 통치 기반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일, 그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제미온, 프레시아, 조칼로, 히드리안 등의 연합도시에선 벌써 전면전을 주장하는 파발이 도착해 있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속속 전령들이 도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내외부적으로 모두 전면전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힘을 얻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자들의 지당한 반응이다.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일까? 과연 놈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로크리안? 그대가 가져온 소식 아니오? 그대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노장군의 요구에 모두의 시선이 로크리안에게 향했다. 로크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모습이다. 들려진 턱을 덮고 있는 검은 수염이 인상적이다.

떡 벌어진 어깨, 다른 사람들보다 반배는 큰 머리, 거친 인상 덕에 앉아 있을 때는 대단한 거구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작은 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가 바로 아도니아 제1목민관이며, 아드리안과 함께 아도니아 최강의 사내라 불리는 두 명 중 한 명인 것이다.

두 사람은 자주 비교되는 대상이었다. 상인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로크리안과, 아도니아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독선적인 성격 탓에 원로들과 잦은 마찰을 빚어 결국 크로아지크 수용소 소장으로 좌천된 아드리안.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오랜 시간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이다. 아도니아의 양대 무력답게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처지가 달라졌지만 한때는 명문가 출신인 아드리안이 로크리안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이끌어 주던 시기도 있었다.

그 결과로 한 명은 크로아지크 황야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아도니아 최강의 무력과 함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로크리안의 눈이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도니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원로들이다. 그들 개개인이 각 계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로크리안을 지지하는 중도파, 제2목민관인 피온 치프만이 이끄는 급진파, 그리고 제3목민관 트라쿠스를 대표로 하는 보수파 인물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가장 강한 세를 자랑하는 급진파와 그에 맞설 만큼 세를 결집시키고 있는 보수파, 그리고 특별히 세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중도파의 밀월이었다. 원래는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받지도 못하던 중도파가 요 몇 년 새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오직 로크리안의 힘이었다.

등받이 없는 나지막한 석재 의자들이 여러 겹으로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는 좁은 실내. 중앙에 원형 탁자라도 하나 놓여 있다면 어울릴 것 같은 공간이지만, 탁자 따위는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기실 그 좁은 방 안에 스물여덟 명의 인원이 모여 앉아 있으니 탁자를 들여놓을 공간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이곳이 바로 아도니아의 실질적인 통치기구의 역할을 하는 곳, ‘헌신의 전당’이다. 트라쿠스성 지하에 형성된 대규모 자연 동굴, 그 동굴의 가장 은밀한 갈래를 다듬어 만든 좁은 회의실. 이곳은 오랜 옛날 마계대전 때부터 폴리스의 중요 정책과 의사를 결정하던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헌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순수했던 시절 참석자들은 마물들과의 전투에 앞장서 스스로를 희생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좁은 회의실이 그런 역할을 해온 데는 이유가 있다. 마물들뿐만 아니라 천지에 경쟁자와 위협이 산재해 있던 시절, 안전하고도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고, 이 지하 회의실은 그 목적에 부합했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원로들의 면면, 원로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인물들만 추리고 추려 스물다섯 명의 상원을 구성했다. 거기에 세 명의 목민관을 포함해 총 스물여덟 명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로 이 상원회다. 목민관이며 동시에 상원의 자격을 갖춘 치프만이 있었기에 한 좌석은 비어 있다. 그를 제외하고 로크리안이나 트라쿠스 자신은 목민관의 임기가 끝나면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잃게 된다. 뭐, 상관없다. 로크리안은 몰라도 자신은 오래지 않아 상원의 자격을 획득할 테니까.

로크리안의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우리 측에서도 그에 합당한 응징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오.”

“합당한 응징이라 하면?”

“적어도 십 년에 한 번은 몸값을 지불하거나 포로 교환을 통해 그들이 석방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암묵적인 합의였소. 그리고 몇 번 제안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소. 켈커티스에서 그것을 지킬 용의가 없다면 우리 역시 지킬 필요가 없겠지. 더욱이 최근 기세가 좀 올랐다고 우리 아도니아를 업신여긴다면 매운맛을 보여줄 필요도 있을 거요. 그냥 참아 넘긴다면 아도니아의 자존심과 함께 연합도시들의 지지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오.”

트라쿠스의 인상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자존심? 지지?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허울뿐인 명분을 앞세워 진짜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아도니아 혼자 광분한다고 해서 전쟁의 판도가 단번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전쟁이었으면 지금껏 끌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크리안이여, 과연 그대는 그들의 숨은 의도를 파악이나 하고 말하는 건가? 트라쿠스는 지끈거리는 골치를 부여잡았다.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말이오? 목민관 로크리안!”

일부 조급한 원로들이 로크리안을 닦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크리안의 입에서 좌중을 전율에 빠지게 만들 발언이 나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이후 조노량과 커트리안 일행을 고난의 무대로 이끄는 시발점이 되었다.

원로들의 성화에 로크리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유력 가문의 가장과 아들들을 잃은 도시에서는 벌써부터 총력전을 벼르고 있소. 지금의 분위기로 보면 무작정 전쟁을 확산시킬 태세지. 그랬다가는 저들의 의도에 말려들고 말 거요.”

알고는 있군. 그렇다면 자존심이나 연합도시의 지지 따위를 언급한 이유는 뭐지?

잠시 뜸을 들인 로크리안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각 도시의 책임 있는 자들과 보다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끌어 일원화된 작전권을 보장받아야 하오. 지금의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도 필요하고.”

“거참 답답하오. 그래, 그 방법이 뭐란 말이오? 일원화된 작전권? 그게 가능이나 하겠소? 분노하고 있는 폴리스 몇은 참가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작전권을 순순히 넘기겠소? 그리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다른 폴리스들은 어떻게 설득시킬 셈이오? 속 시원히 알아듣게 이야기해 보란 말이오.”

대책을 세우기 위해 홀에 모여 있는 서른 명 가까운 원로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한 바퀴,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던 로크리안의 시선이 트라쿠스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흘렀다.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들을 처형해 버렸소. 그대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역시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들이 영원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오.”

“처형하자고? 그거야 당연한 말 아니오. 겨우 그 따위 말이나 하려고 이렇게 시간을 끈 것이오? 목민관!”

코트족의 원로인 제우니서스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추궁했다.

그 말에 로크리안은 가벼운 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웃음이 나온단…….”

“그냥 처형한다면 검날만 무뎌질 뿐이지. 우리는 무식한 켈커티스가 아니오.”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이렇게 뜸을 들인단 말인가?

“이 지겨운 전쟁을 끝내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소. 바로 통일된 작전권, 지휘권의 확립이오. 이 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지휘권을 하나로 모아야 하오. 상대적으로 열세인 켈커티스 동맹이 아도니아 연합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통일된 작전권이었소. 그대들 말대로 순순히 넘기진 않겠지. 이 자리에서 난 연합 전체 회의를 제안하는 바이오. 당연히 켈커티스의 만행에 대한 대응이 주제겠지만, 실절적인 회의의 목적은 통일된 지휘권의 확보요. 난 그 수단으로 포로들의 처형을 이용할 생각이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전 도시의 군사 작전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아도니아 연합은 필요에 의해 모인 단체였다. 각 도시의 독립성이 너무 강해 통일된 행동을 취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일부 아도니아 연합의 도시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켈커티스 동맹과의 교류까지 공공연히 자행했다.

그런 도시들은 이번 켈커티스의 포로 처형 사건에서도 한 발자국 물러나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도시들까지 하나로 묶는다? 그 수단으로 포로들의 처형을 이용하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축제를 열 것이오.”

“축제? 무슨 미친…….”

로크리안은 막 화를 내려던 원로들을 제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의 축제! 모두를 흥분시킬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 것이오. 전 도시의 의지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오.”

트라쿠스는 답답함을 참아내지 못하고 기어이 끼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오?”

로크리안은 트라쿠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끊어내듯 말했다.

“거울의 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