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탈출 감행(2)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일행을 안내했다. 방을 나서자 제법 큰 거실이 나왔고, 거실에는 다시 세 명의 사내가 더 있었다. 그중 고동색 로브를 입은 자를 향해 커트리안이 다가갔다.
“하스필드 님.”
커트리안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소가주!”
하스필드라 불린 노년의 사내는 커트리안을 마주 대하자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어 커트리안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스마르가 하스필드 앞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하스필드는 커트리안의 손을 놓고 로브 자락으로 글썽이는 눈물을 훔쳤다.
“스마르,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스마르 역시 냉철했던 그동안의 모습과 달리 격동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셋의 감격의 해후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아도니아 기사 복장을 한 사내가 다가섰다.
“소우루스 경…….”
커트리안이 만감이 어린 목소리로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소가주님.”
“그래, 그래. 회포는 이 빌어먹을 폴리스를 빠져나가서 풀기로 합시다. 예상보다 시간이 늦어졌소. 커트리안 님, 우선 팔찌를.”
노마법사가 말을 끊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커트리안이 손목을 내밀자 노마법사는 간단한 주문으로 팔찌에 걸린 마법을 해제했다. 해제 주문은 당연히 아도니아의 중요 보안 사항이겠지만 어떻게 입수했는지 노마법사는 능숙하게 일행의 마나 팔찌를 풀어 주었다.
나머지 일행들의 마나 팔찌도 차례로 풀렸다. 롤은 마나 팔찌가 풀리자마자 답답했다는 듯 손목을 쓰다듬고 몸을 풀었다.
그 후 미리 준비된 무기가 각자에게 주어졌고, 조노량에게도 제법 날이 선 글라디우스 한 자루와 방패가 지급되었다. 거의 다섯 달 가까이 공을 들였던 오첩도 대신 다시 글라디우스를 잡게 되자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검 한 자루 때문에 탈출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조노량은 미련을 접고 글라디우스를 두어 번 휘둘러보았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검의 무게 중심에 익숙해져야 했다.
“갈리온을 구하기 어려워 발이 빠른 말 열세 필을 남문 밖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식량은 미리 실어 두었으니 복장만 갈아입고 출발하시면 됩니다.”
말과 동시에 소우루스라 불린 사내가 거실 한쪽 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가죽갑옷을 가리켰다. 아도니아 고참병들이 흔히 입는 복장이었다.
일행이 복장을 갈아입는 동안 사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신분을 증명하는 명패입니다. 아도니아 제2군단 직속 정보부대 소속으로 신분을 위장해 놓았습니다. 성문을 빠져 나갈 때 사용할 겁니다. 남문에 사람을 심어 두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그리고…….”
소우루스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자 커트리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거로군?”
“그게……. 제1왕인 브라흐하 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로 켈커티스로 향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싶습니다.”
“심상치 않다?”
“폴리스에 예비대 두 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제4군단과 7군단을 켈커티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주요 포로들이 켈커티스로 이송되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온 상태입니다. 그리고 브라흐하 왕 측 가문들의 회동이 잦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로 교환을 준비 중인 것 아닌가?”
“가주님의 말씀으로는, 벌써 세 번이나 아도니아 측의 제안을 거절했던 브라흐하 왕이 새삼 포로 교환을 추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시더군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브라흐하 왕이 소가주님의 귀환을 반길 리도 없고요. 또, 최근 가문의 사업들에 대한 견제도 노골적입니다. 이번 탈출 계획도 그런 맥락에서 급히 진행된 것입니다.”
소우루스의 말에 커트리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준비된 장소는 있는가?”
“카스투스 폴리스에 거점을 마련하셨습니다. 우선 그리로 향할 것입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던 커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흠, 그렇게 하지. 그리고 아버님의 건강은 좀 어떠신가?”
“좋은 편은 아니십니다. 이번 계획에 그나마 남아 있던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했습니다. 반드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서두르십시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일행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포로수용소로 오기 전, 대부분의 인생을 군대에서 보냈던 일행이기에 복장을 갈아입은 것만으로도 고참병의 풍모가 물씬 풍겨 나왔다. 단지 조노량만이 조금 어색해할 뿐이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제법 규모 있는 저택이었다. 주변의 집들도 비슷한 규모인 것으로 보아 아도니아 상류층들의 주거지역인 듯 보였다. 저택을 빠져나온 일행은 서둘러 남문으로 향했다. 중간에 순찰을 도는 병사들을 만났지만 아도니아 정규기사의 복장을 한 소우루스가 신분패를 보여주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보내 주었다.
오래지 않아 남문에 도착했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는 병력입니까?”
남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일단의 병사들이 일행을 막아섰다.
“제2군단 정보부대 정찰대다. 모종의 임무를 받고 이동 중이다. 여기 2군단장의 명령서와 제3목민관의 승인서가 있다.”
아도니아 기사 복장을 입고 있는 소우루스가 나서서 신분패와 두 장의 양피 두루마리를 제시했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서서 서류를 확인했다. 그는 소우루스와 시선을 주고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없습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기를 기원드립니다. 성문을 내려라!”
성문 전체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내려져 도개교의 형태를 취했다. 마치 외나무다리 같은 느낌이랄까?
열한 명의 인원이 성문을 모두 건너자 도개교가 다시 올라갔다. 일단 아도니아 시는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아도니아의 영역권을 벗어나려면 최소한 이틀은 달려야 한다. 안도하기는 아직 일렀다. 일행은 서둘러 말이 준비되어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소우루스와 그 일행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길을 서둘렀다. 기도로 보아 그들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기사들로 보였다. 하긴, 적진 한복판까지 잠입한 친구들이니 보통의 실력자들은 아닐 것이다.
작은 숲을 지나 드디어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 넓지 않은 공터였는데 준비되어 있다는 말은 없고 한 사내가 달빛을 받으며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외딴 지역이었고 늦은 밤이었다.
소우루스가 일행을 저지하며 잔뜩 긴장한 자세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많이 늦었군. 난 또 정보가 잘못된 줄 알았다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커트리안이 침음성을 흘렸다.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사십 대의 사내. 갸름한 얼굴선에 뚜렷한 이목구비, 중후한 멋이 풍기면서도 잘 다듬어진 몸매가 남다른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크로아지크 수용소장이며, 로크리안과 함께 아도니아 최강의 무력이라는 아드리안이었다.
그 순간 롤과 소우루스가 튀어나갔다. 롤은 아드리안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소우루스는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에 움직인 것이었다.
성격 급한 롤은 그렇다 쳐도, 소우루스는 상대에 대해 잘 몰랐다.
롤과 소우루스는 한순간에 거리를 좁혀 아드리안에게 검을 뻗고 있었다.
깡!
퍽!
퍽!
세 번의 타격음.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상황. 급히 검을 뽑아 들던 쥬시아누스와 예니에프, 조노량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이 롤의 검을 막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문제였다. 단 두 번의 타격! 그것도 검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라 주먹에 의해 이뤄진 일, 아드리안은 단 두 번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롤과 소우루스를 동시에 날려 버린 것이다.
소우루스는 그대로 기절했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롤은 억지로 일어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조노량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충격에 휩싸였다. 소우루스는 몰라도 롤은 그렇게 한 방에 나가떨어질 대상이 아니었다.
“아드리안…….”
아드리안의 청색 눈동자가 교교한 달빛을 받아 더욱 푸르게 빛났다.
“후후. 커트리안,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얌전히 돌아가는 것! 두 번째는 나와 크로아지크의 두 개 기대를 뚫고 원래의 목적을 이루는 것!”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숲 곳곳에 횃불이 밝혀졌고, 부소장 로뜨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와 같이 눈부시게 광을 낸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상태였다. 쥐를 연상시키는 로뜨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아드리안은 숲속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방법을 권하고 싶다만, 현명한 자네라면 첫 번째를 택하겠지?”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다.
커트리안의 눈매가 미지근하게 바뀌었다.
아드리안, 아도니아 최강의 무력이라는 사내. 현재 켈커티스 전체로 따져 봐도 제1목민관인 로크리안을 제외한다면 아드리안을 맞상대할 만한 자가 없었다. 한 사람의 무력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두 사람 중 하나만으로도 전쟁은 몰라도 개별 전투의 향방을 가를 만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괴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자였다.
몇 년 전 켈커티스와 아도니아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것은 로크리안이 아도니아의 제1목민관으로 당선되어 원정 군단을 이끌면서부터였다. 그야말로 연전연패! 자연히 켈커티스 동맹은 전투에 소극적이게 될 수밖에 없었고, 상대가 성을 끼고 방어적으로 나오니 아도니아 역시 무리할 수 없게 된 국면, 그것이 당시의 소강 국면이었다. 그런 로크리안도 한 수 접어준다는 강자가 바로 아드리안이었다.
그런 아드리안 제거가 커트리안의 임무였다. 물론 궁지에 몰린 가문의 재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거부했어야 할 임무였다.
켈커티스는 아도니아 제2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아드리안이 단 두 개 기대만 이끌고 이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커트리안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아드리안 제거 작전! 이에 커트리안은 자신에게 배속된 한 개 사단에서 추리고 추려낸 정예로만 세 개 기대를 구성했다. 나름 자신이 있었기에 세 개 기대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했다. 그 기습이 커트리안 자신이 포로가 된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단 전체를 동원했어야 할 작전이었다.
그 싸움에서 자신은 아드리안을 상대로 겨우 십여 분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인간 같지 않았던 아드리안의 무위를 떠올리면 벽이라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아드리안은 그걸 다시 한 번 증명했다. 크로아지크 최강 클래스를 단 한 방에 제압함으로써!
그럼에도 커트리안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갔다.
만약 남은 아홉 명이 모두 달라붙는다면? 감정적으로는 시도해 보고 싶었다. 이대로 다시 끌려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더구나 이번 작전을 위해 소모된 가문의 힘을 생각한다면 더더구나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성은 적극적인 경보를 발하고 있었다.
일행의 무력도 만만치 않다.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롤은 그렇다고 쳐도 크로아지크의 최강 검투사가 다섯 명이다. 거기에 가문에서 추리고 추린 기사가 셋이다. 하스필드의 마법도 한몫을 할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커트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볼품없어 보이지만 로뜨 부소장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배후를 봉쇄해 버린 크로아지크 경비 기대, 애초에 최강 검투포로들을 상대하기 위해 구성된 정예 기대다. 병사들은 몰라도 기사와 종사들의 실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승산은…… 없다고 봐야 했다. 설사 이들을 뚫는다 해도 탈출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부터 발각되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돌아간다면? 징벌은 있겠지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켈커티스에 잡혀 있는 아도니아 측 포로들도 무사하진 못할 테니까.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글라디우스를 굳게 움켜쥐고 있지만 아드리안의 무위를 본 순간 이미 반쯤 체념한 표정들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승산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정보가 샜을까? 가문의 최고 마법사며 현자인 하스필드까지 동원된 작전이었기 때문에 치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샜다는 것은 뭔가 다른 구멍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드리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가 있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체념할 때는 깨끗이 체념해야 한다.
“돌아가겠소.”
커트리안의 대답에 아드리안은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노량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싸워 보지도 않고 포기한단 말인가?
아직까지 글라디우스를 움켜쥐고 있는 조노량과 달리, 다른 자들은 물론 쥬시아누스마저 검에서 손을 뗐다.
아드리안을 상대로라면 전혀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노량이 눈빛에 살기를 담자 예니에프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였다.
“미련한 짓 하지 말자, 노리앙.”
예니에프가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고생이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