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2화 (22/142)

22. 탈출 감행(1)

숙소로 돌아온 일행은 아도니아에서의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를 식사를 시작했다. 제공된 식사는 배를 불리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요리에 가까운 특식이었다.

개인전 준우승!

근래 거둔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성적 중 가장 높은 성적이었다.

쥬시아누스는 예상대로 극도의 피로를 보이는 스피로스를 상대로 우세한 힘과 체력을 바탕으로 거칠게 몰아붙여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제법 고전을 예상했지만 스피로스는 투쟁심은커녕 별다른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쥬시아누스에게는 물론 그 다음 치러진 아폴리온과의 3, 4위전은 아예 기권해 버리고 검투장을 떠나갔다. 검투사로서 상대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스피로스와 크리소스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서야 스피로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승 역시 싱겁게 끝나 버렸다. 아나스타시오스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던 쥬시아누스가 결국 기권을 하고 만 것이다. 승률에서도 드러나듯이 애초에 아나스타스오스의 승리가 확실시된 경기였지만, 아나스타시오스가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쥬시아누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승리를 따내자 관중들은 만족해했다.

커트리안을 비롯한 일행들도 만족해했다. 이길 필요가 없는 경기였으니까.

일행은 아무런 부상도 없이 복귀한 쥬시아누스를 맞으며 가슴이 설렜다. 거의 최상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롤의 부상이 약간 안타까웠으나 전력이 조금 약화된 정도? 움직임에 지장이 없으니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준우승을 축하해 특별히 제공된 포도주도 존스케빈산 상등품이었다. 조노량으로선 생전 처음 마셔본 포도주였고, 그 맛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충분히 즐길 수는 없었다. 밤이 되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할 것이니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해야만 했다.

간수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다음날 아침식사를 거절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약속된 시간은 새벽 두 시! 남은 시간은 다섯 시간! 충분히 숙면을 취해야 한다.

새벽 두 시경 조노량은 어깨를 흔드는 손에 잠을 털어냈다. 나머지 사람들을 깨우고 커트리안의 방으로 들어섰다. 숙소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어둠 속에서 눈빛만 주고받으며 대기하기를 십여 분?

뿌드득

침상 아래 석판이 들썩였다. 아주 작은 소음이었지만 조노량에게는 가슴이 덜컥할 만큼 큰 소리로 들렸다.

서둘러 들썩인 석판을 걷어내자 검은색 인형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몸에 짝 달라붙는 특이한 형태의 옷을 걸쳤다.

그는 상체만 내밀고 주변을 슬쩍 둘러 본 후 커트리안을 향해 손짓을 했다. 커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색 인형은 석판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커트리안은 일행들과 한 차례 눈을 맞추고 석판 아래로 내려갔다. 커트리안을 필두로 한 명씩 시커멓게 뚫린 석판 아래로 내려가고, 맨 마지막에 스마르가 석판 조각을 제자리에 맞춘 후 뒤따랐다.

동혈은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았고, 벽면에는 일직선으로 매듭지어진 외사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거의 십여 미터를 내려가자 검은 옷을 걸친 자가 외사다리의 매듭을 빠르게 분해한 후 한쪽 편에 밀쳐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수평으로 뚫린 갱도였다. 역시 사람 하나가 기어서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았다. 갱도에 익숙한 조노량이지만 이 정도로 좁은 갱도는 처음이었다.

삼 년이 넘도록 광산을 드나들었다. 수많은 사고를 목격했고, 무너진 갱도에 갇혀 본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마음이 이는 것이다.

자신의 앞에서 기고 있는 쥬시아누스를 바라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만약 쥬시아누스의 몸이 끼어서 못 움직이게 된다면?

덩치가 작은 조노량도 답답해할 정도의 좁은 동혈을 커다란 덩치의 쥬시아누스가 막고 있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깊어진 내공 탓에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윤곽 정도는 구별해 낼 수 있었다. 조노량은 가랑이 사이로 뒤편을 바라보았다.

롤의 등이 갱도의 천장에 자꾸 부딪힌다. 부목을 댄 팔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탓이다. 저러다가 갱도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모르긴 몰라도 갱도는 그대로 일행의 무덤이 되리라. 이 정도 깊은 땅속에 묻히면 아무리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장사라도, 등선(登仙)을 코앞에 둔 도사라도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젠장, 끼었군.”

그때 쥬시아누스가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 놓았다.

‘이런 제길!’

청천벽력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니 생각이 씨가 되어 버렸다. 머리가 띵해져 왔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헉헉, 어쩌지?”

쥬시아누스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어렸다.

팔과 다리가 접힌 채로 움쩍달싹 못하게 되었으니 천하의 쥬시아누스라도 당황할 수밖에. 물론 더 당황한 것은 조노량이다.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다. 차라리 난적을 만나 생사를 겨루는 것이 났지,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롤이 발꿈치까지 바짝 다가선 것이 느껴졌다.

“멈춰! 쥬시아누스가 끼었소.”

조노량은 후위를 향해 다급히 정지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롤은 바짝 다가선 상태. 답답함이 배가 된다. 이 중 누구 하나라도 이성을 잃고 발광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 같다. 조노량은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착해야 한다. 아예 눈을 감고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엎드렸다.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때 검은 옷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커트리안 님. 이 밧줄 끝을 그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맨 앞에서 기고 있던 검은 옷의 사내가 허리춤에 감고 있던 밧줄을 커트리안에게 밀어주었다. 커트리안 역시 가랑이 사이로 밧줄 끝을 쥬시아누스에게 건넸다.

“쥬시아누스 뒤가 노리앙인가?”

커트리안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묻어 있었다.

차라리 힘이 센 롤이 배치되었다면 좋았을걸. 아니 예니에프나 스마르라도 노리앙보다는 나았으리라. 통로가 이렇게 좁을 거란 생각을 못한 것이 불찰이다.

“쥬시아누스 밧줄을 잡고 최대한 몸을 펴라. 노리앙 준비가 되면 쥬시아누스의 발을 밀도록!”

쥬시아누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팔을 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무릎을 펴기 위해서는 무릎을 세웠다가 뻗어야 하는데, 공간 자체가 무릎을 세울 만큼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최대한 들어 천장을 비비기 시작했다. 천장의 흙더미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헉!”

흙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에 조노량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동혈이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두려움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처박았다. 겨우 채광반을 벗어나 검투반에 왔는데, 결국 갱도에서 죽게 되다니…….

십여 분을 끙끙거린 결과 쥬시아누스의 한쪽 무릎이 펴졌다. 한쪽이 펴지면서 공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다른 쪽 무릎도 비스듬히 펴질 수 있었다.

땅바닥에 배를 깔고 바짝 엎드린 모양새다.

‘후…….’

흙더미가 제법 쏟아져 내렸지만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행이다.

“자세 탓에 앞쪽에서도 끄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뒤쪽에서 힘껏 밀어야 할 것이다.”

엎드려 웅크린 자세로 밧줄을 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뒤쪽 역시 마찬가지. 힘을 쓰기에는 자세가 좋지 못하다. 그래도 앞쪽보다는 여건이 나을 터, 조노량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자, 지금이다.”

검은 옷의 사내와 커트리안이 용쓰는 소리가 들려오자, 조노량은 숨을 바듯하게 내뱉으며 양팔에 진기를 집중했다. 쥬시아누스의 발바닥을 힘껏 밀어냈다.

잔뜩 힘을 준 채 경직되어 있던 쥬시아누스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힘을 썼다.

앞쪽 사람이 조금씩 전진하는 소리가 들렸고, 조노량은 끊임없이 진기를 끌어 올렸다.

십여 미터를 전진하고 나서야 겨우 좁아진 구간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십여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걸린 시간이 무려 삼십 여분. 기진맥진한 조노량이 널브러졌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노리앙이 선전해 준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면 이후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길 뻔했다. 커트리안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헐떡이는 숨소리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전사치고는 의외로 힘이 약한 작은 체구의 사내. 체구를 보면 힘을 못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그의 검투 실력은 진짜였다. 검투반에 온 지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시민궁 시합의 출전 자격을 획득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힘이라는 측면만 놓고 보았을 때 그는 C클래스보다 못했다. 그럼에도 에크미어가 되었다는 말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 정도 힘이라면 A클래스, 아니 B클래스의 한 방조차 받아낼 수 없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그는 샤마노프의 단창을 수도 없이 받아내었다. 마나 팔찌를 벗어 놓고 하는 시합이라면 오오라의 힘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연습에서는 당연히 마나 팔찌를 벗지 못한다. 즉 순수한 힘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비껴내고 흘리는 기술은 검투반의 그 누구보다 탁월했다.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 일. 때로는 정면에서 받아낼 수밖에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었다.

지금과 같은 어설픈 자세에서 쥬시아누스라는 거구의 사내를 십 미터 이상 밀어냈다는 것은 결국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커트리안은 노리앙이라는 사내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높였다.

“의외로 힘을 좀 쓰는데? 몸집이 작아서 자세가 나오는 건가?”

롤의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널브러진 조노량의 심기를 긁었다. 화가 났지만 덕분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다시 반 시간가량을 기어가자 갱도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위쪽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버팀목도 없는 갱도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준 것이 신통했다.

잠시 후 앞쪽에서 뭔가 덜컹이는 소리가 나고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갱도는 넓지 않은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밝게 느껴지던 불빛은 수용소에서 사용하던 등잔과 별 차이가 없는 작은 등불이었다.

조노량은 갱도를 벗어나자마자 석벽에 무너지듯 기대앉았다. 추운 날씨도 무색하게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다.

<4권에서 계속>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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