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1화 (21/142)

21. 시민궁 시합

보름 후 조노량은 에크미어의 자격으로 첫 시민궁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게이트를 탔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으로서는 근 몇 년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시합이었다.

출발 전 검투반에 남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샤마노프, 부리오티스, 젝 등과는 굳게 손을 잡고 아쉬움을 표했다. 비록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커트리안을 믿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반드시 커트리안이 그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것을!

그러려면 누가 되었든 반드시 3위 이내로 입상해야 한다. 물론 제1관에 묵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1관이 아니면 입상을 노릴 필요까지는 없다. 통곡의 계절이 끼어 있기 때문에 자동으로 내년으로 계획이 미뤄질 것이다.

시민궁 시합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까? 조노량은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중원의 용어로 일취월장, 괄목상대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고 자부했다. 내공을 되찾고 나서 검투반에 들어온 보람이 있는 세월이었다. 중원에서와 비교해 월등히 강해진 자신이지만 과연 시민궁 시합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시민궁 시합은 그동안 경험했던 제1시합과는 격이 다른 시합이다. 진출 자격 자체가 제1시합에서 최소 3회 이상 우승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약자는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약한 자도 조노량 자신과 동급인 것이다.

롤이나 예니에프 같은 자들로 이루어진 리그! 지금의 조노량으로서는 그 수준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들은 바에 따르면 검투반 최강자인 예니에프조차도 당분간은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공언한 실력자들이 네 명을 넘어선다.

그들과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도 또 그들을 만나서 손속을 겨뤄 보고도 싶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조노량은 게이트를 넘었고, 익숙한 들판을 지나 수확이 끝난 밀밭을 지났다.

통곡의 계절이 코앞인지라 이전처럼 호송대를 향해 환호해 주는 시민들은 없었다. 아도니아 자체가 상당히 남쪽에 위치한 도시라 최북단인 크로아지크만큼 춥지는 않았지만, 계절이 계절인 만큼 다들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호송대원들조차 온몸을 꽁꽁 싸매고 추위를 견뎌야 했다.

천운이 따랐는지 1관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순조로운 출발이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커트리안, 스마르, 쥬시아누스, 예니에프, 롤, 조노량 여섯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호송을 맡았던 기대가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나가자 숙소 경비를 책임진 병사들이 일행을 건물 안으로 서둘러 몰아넣었다.

“꾸물거리지 말란 말이다!”

제법 늙수그레한 고참 병사 하나가 커트리안의 등을 떠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고참 병사는 자신의 등으로 시야를 가리며 커트리안에게 양피조각 하나를 슬그머니 건네주었다. 커트리안은 밀리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양피조각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숙소 안에서는 특별한 감시가 없다. 지금부터는 포로의 신분이 아니라 당당한 검투사의 신분! 존중해 주는 것이다.

넓지 않은 단층짜리 건물. 두꺼운 석재가 내뿜는 냉기에 몸서리를 치며 예니에프가 높다랗게 쌓여 있는 장작에 불을 지폈다. 수용소와 달리 충분한 장작이 제공된다는 데 만족감을 느꼈다.

추위에 떨었던지라 여섯 명은 자연스레 불가에 모여 앉았다.

“다행히 1관에 배정을 받았군요.”

예니에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쉿!”

스마르가 재빨리 제지하고 나섰다. 순간 놀란 예니에프가 자기도 모르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주보고 있던 롤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를 그대로 따라했다. 예니에프의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발광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신들만 있는 공간이라지만 마법을 동원하면 엿듣는 건 일도 아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마디 잡담으로 노닥거린 후 각자의 방을 찾아서 일찌감치 휴식에 들어갔다. 다음날 일찍 시합장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일행들과 함께 호송된 장소는 조노량이 평소 알던 검투장이 아니었다.

거칠게 다듬어진 화강암을 벽돌 쌓듯 쌓아 만든 비교적 소규모 경기장이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위쪽 관중석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고, 그 우측으로 꺾여 들어가는 좁은 복도가 있었다. 병사들에 의해 그 복도를 통과하자 널따란 공간이 나왔고, 그 앞쪽으로 세 개의 철창이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그중 좌측의 철창문을 열리고 커트리안 일행이 들어섰다. 그곳이 일행의 최종 목적지이자 대기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조노량이 들어가자 병사들은 굵은 자물쇠로 철창을 걸어 잠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칠게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었다. 상질의 장작을 썼는지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들어선 곳은 대략 일곱 평 정도의 마름모꼴 공간이었는데,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휑한 느낌이다.

좌우 벽은 화강암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앞뒤로는 철창이었다. 앞쪽 철창에 다가가자 한 이 미터 사이를 두고 또 하나의 철창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철창과 철창 사이 벽에는 일행의 무기가 세워져 있었고, 병사 다섯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 앞쪽으로 환한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아마도 시합장인 모양이었다. 지름이 대략 삼십 미터가량으로 보이는 원형의 마당이었는데, 제1시합장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넓이다. 반면 관중석으로 이어지는 벽면은 십오 미터가량? 제1시합장의 두 배가 넘는다. 거기다가 상층부는 한 자가량 앞쪽으로 튀어 나와 있었기에 도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어오르기 힘든 구조였다.

저 정도 높이라면 무림의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단숨에 뛰어오르기 힘들 것이다.

경기장의 규모상 제1시합과 달리 별도의 공간에 출전자 대기실을 만들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렇듯 경기장이 빤히 바라보이는 위치에 대기실을 만든 걸 보면 말이다. 조노량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시민궁 시합을 지켜볼 수 있지 않은가.

“조금 쉬어두는 게 좋을 게야. 빌어먹을 놈들이 매번 우리를 두 시간이나 먼저 대기시켜 놓거든.”

롤이 호기심을 보이는 조노량에게 조언을 했다.

하긴 일반 관중이나 사설 검투사들과 입장 과정에서 마주쳐 봐야 좋은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따라서 포로 신분인 크로아지크 검투단이 먼저 와서 대기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그저 일별하면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구조이니 더 이상 살펴볼 것도 없긴 하다. 조노량은 나무의자를 들어다 화강암 벽에 붙여 놓고 엉덩이를 걸쳤다.

등으로는 화강암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고, 뻥 뚫린 창살로 통곡의 계절 직전의 추위가 몰아쳐 들어왔다. 아무리 아도니아가 남쪽에 치우쳐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크기의 모닥불이 없었다면 시합에 참가하기도 전에 몸이 굳어 버렸을 터였다.

쥬시아누스나 롤 등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동안 조노량은 의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모두들 조노량의 독특한 명상법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기에 호기심을 보이거나 말을 붙인다든가 하지는 않았다.

지난번 카카트로스와의 시합 이후 양유와 음유의 경계가 이어진 상태였다. 임독맥이 타동된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긴 했지만 작은 맥 하나라도 더 뚫린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기가 통하면 통하는 만큼 운기의 폭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운기가 자유롭다는 말은 수발이 편하다는 말이고, 또 그만큼 유통이 빠르다는 말이다. 빠르다는 말은 다시 기가 막힐 염려가 줄어든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 효과가 미미할망정 결정적인 순간에는 큰 도움이 된다. 작은 차이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

조노량은 단전에 웅크린 양강의 기운을 장강혈(長强穴)로 밀어 내렸다. 충분히 다져진 기로가 열리며 장강으로부터 독맥(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양의 맥)을 타고 요유(腰兪), 명문(命門), 현추(懸樞), 지양(至陽), 신주(身柱)를 차례로 치고 올라가 대추(大椎), 풍부(風府), 백회(百會)의 요혈을 돌아 전정(前頂)에 이르러 정점을 찍고 빠르게 밀려 내려와 임맥의 승장혈(承漿穴)을 거세게 두드렸다.

두둥

뇌가 흔들릴 지경이지만 승장혈은 굳건하게 버틴다. 아직 반 갑자가 조금 넘는 내공으로 임독맥을 타동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의 경로가 그렇게 이어졌으니 매번 한 번씩 겪는 일일 뿐이다.

승장혈을 두드린 기운은 거센 저항에 주춤하더니 우회하여 밀려 내려간다. 큰 줄기를 이루어 흐르던 기운이 수많은 세류로 흩어져 기경팔맥에 고루 퍼졌다가 다시 단전으로 모여든다.

단전에서 또 한 번 거대한 물줄기를 이룬 기운이 이번에는 회음(會陰)을 거쳐 중극(中極), 기해(氣海), 음교(陰交), 건리(建里), 거궐(巨闕)을 차례로 방문한 후 옥당(玉堂), 화개(華蓋), 천돌(天突)을 거쳐 다시 승장(承漿)에 이르러서 급격히 기세가 꺾였다. 임맥(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음의 맥)을 한 바퀴 돌아내린 기운은 다시 한 번 작은 물줄기로 흩어져 전신 요혈들을 두루 거친 후 단전에 갈무리되었다.

한 번의 대주천만으로도 온몸의 기감이 살아나 펄떡인다. 천지에 흩어진 기운들이 전신 모공을 통해 흡수되어 세맥을 가득 채운다.

조노량의 눈이 천천히 반개했다.

무아지경에 빠졌던 조노량의 귓가로 시끄러운 소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관중석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호화로운 좌석에 기대앉아 연신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다. 관중석 중간 중간에 피워 올린 모닥불들이 관중석의 열기를 더한다. 계절을 잊게 할 정도로 후끈한 열기다.

“자 이제 곧 시작이다. 준비들 하자.”

오늘의 첫 출전자인 스마르가 허리를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고 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 모양이다.

잠시 후 요란한 징소리가 울리고 출전자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곳에는 사자후만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도니아 제1시합에 비해 규모가 작다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런 소음을 뚫고 경기장을 가득 채울 만큼 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철커덕

경기장 방향으로 뚫린 철창이 열리자 스마르가 앞으로 나섰다.

글라디우스보다 두 배나 긴 자신의 무기를 찾아 든 스마르가 두 번째 철창문을 열고 나서자, 경기장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마나 팔찌를 풀어주었다.

스마르가 경기장 한쪽에 자리를 잡자, 곧 상대 선수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울리고 반대편의 철창문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몸을 드러냈다.

사내는 거무죽죽한 가죽갑옷 위로 체인메일까지 겹쳐 입고, 머리통만한 도끼 두 개를 양손에 나눠 쥐고 있었다.

일견해도 위압감이 만만치 않다. 키는 좀 작지만 덩치는 쥬시아누스에 버금갈 정도다.

“이글루란 자야. 힘도 장사지만 몸놀림도 장난이 아니지.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좀 처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껄껄.”

구수한 목소리로 롤이 부연설명을 했다.

저런 목소리를 가진 자가 전투에만 나서면 광전사로 돌변한다니, 참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저 자식과 붙어야 하는데 말이지. 아쉽게 되었어. 정말 싸울 맛이 나는 친군데. 쩝.”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이곳 사람들이 모두 싸움을 즐기는 것인지 롤이 유별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궁벽한 벽촌에 며칠 머문 것 말고는 대부분이 수용소에서의 경험뿐인 조노량이었기에 정말로 궁금한 사항이었다.

트라쿠스가 맞은편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도니아 제3목민관이라 했던가? 지난번 시합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조노량을 찾은 적이 있는 사내다. 간단히 몇 가지 묻고 물러갔지만 꽤 호감어린 목소리로 시민궁 시합에서 성적을 거둔다면 제안할 것이 있다는 말을 했었다. 덕분에 나쁘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시민궁 시합 역시 그의 소관인 듯, 트라쿠스가 손짓을 하자 거대한 징이 울렸다.

징소리와 함께 이글루가 스마르를 향해 위협적인 포효를 내질렀지만 스마르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릴 뿐 미동도 하지 않자 이글루가 건들거리며 다가들었다.

둘의 무기가 맞닿을 정도까지 거리가 좁혀졌는데도 스마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났는지 이글루가 “건방진 켈커티스 놈이!”라는 외침과 함께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묵직한 도끼날이 스마르의 왼쪽 관자놀이를 스치듯 지나가자마자 반대편 도끼가 스마르의 허리를 갈라왔다.

고개를 꺾어 첫 번째 도끼를 흘린 스마르의 검이 이글루의 목젖을 향해 쏘아졌다.

핑!

☆ ☆ ☆

쏘아진 화살에서나 날 법한 파공음이 스마르의 검 끝에서 흘러나왔다. 그만큼 빠른 공격이었다.

질겁한 이글루가 두 번째 도끼를 급히 회수하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른 몸놀림이다. 그 모습을 보니 몸놀림이 장난이 아니라는 롤의 말이 이해가 갔다.

물러난 이글루의 목덜미에 가는 혈선이 그어져있다. 조금만 느렸어도 그대로 시합이 끝날 뻔한 것이다.

어찌 보면 초반 탐색조차 없이 바로 승부수를 띄운 모양새다.

“끌끌, 상대가 안 좋았어. 하필 스마르라니. 상성이 안 좋아.”

화가 난 이글루가 한껏 마나를 끌어올려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스마르는 상체만 움직여 도끼를 피해내며 짧게 검을 내지르는 것으로 응수했다.

워낙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드는 스마르의 검에 이글루의 신형은 번번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이글루 역시 만만한 실력자가 아님을 증명하듯 금방 스마르의 움직임에 적응했다.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가 왼편으로 빠지고 다시 오른편에서 치고 들어가기를 반복하자, 스마르도 더 이상 제자리를 고집할 수 없었다.

스마르의 검이 향하는 곳이 갑옷으로 감싼 부분일 경우 이글루는 손해를 감수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부상을 입을지언정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스마르의 검도 중간에 회수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역시 이글루군. 아무리 스마르라도 발톱을 감추고 이기긴 힘들겠어.”

스마르나 커트리안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조차 본신의 재주를 다 펼친 것이 아니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움직여 봐야 두서너 발자국, 그 덕에 전장은 중앙부에 고정되다시피 했다.

그러길 십 여분? 마나가 달리는 이글루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어를 도외시하고 거친 공격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왼손의 도끼가 스마르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꺾여 들어가고 거의 동시에 오른손의 도끼도 도저히 불가능한 각도에서 튀어 나왔다. 두 도끼의 연환이 스마르라 해도 깜짝 놀랄 만큼 짧은 간극에서 이루어졌다.

피하기에는 늦었고, 어쩔 도리 없이 검으로 막아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스마르는 살짝 몸을 틀며 이글루의 안쪽 허벅지를 강하게 밀어 찼다. 그 수로 인해 이글루의 도끼들은 스마르의 가슴 앞쪽에서 휘돌아 내려갔다. 불의의 일격을 가하다가 거꾸로 불의의 일격을 맞은 꼴이랄까? 이글루의 오른쪽 다리 안쪽 부위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꺾여 들어갔다. 무릎이 꿇릴 정도의 강한 밀어차기다.

폴레인(무릎받이) 덕에 충격 자체는 심한 편이 아니었다. 문제는 중심, 허벅지 안쪽이 무너짐으로 인해 이글루의 중심이 우측으로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롤이 조노량을 힐끗 쳐다보며 혀를 찼다.

“스마르마저? 쯧쯧, 발톱을 드러내기는커녕 발길질을 해 버렸군.”

조노량은 롤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차라리 나뒹굴었다면 피할 여지라도 있겠건만 찍어 눌려 버렸으니 고스란히 스마르에게 측면을 내준 꼴이 돼버렸다.

아무리 몸놀림이 좋은 이글루라도 이런 형편이면 포기해야 했다. 자세 자체가 참수를 당하는 죄인과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글루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몸을 빼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상황에서 어설프게 반항하다가는 목이라도 떨어질 판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마르의 검첨이 목덜미에 닿았다. 이글루는 분루를 삼키면서도 한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내려쳐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검 끝이 닿았다는 것은 승리만 확정짓겠다는 의사표현이 아닌가?

목숨은 건진 것이다. 목민관의 결정이 남아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민궁 시합 참가자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스마르의 시선이 트라쿠스에게 향했다. 이글루의 처분을 청하는 것이다.

트라쿠스가 만족한 미소를 띠며 엄지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로써 이글루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떨었던 가슴이 진정되자 이글루는 다시금 분기가 치밀어 올랐다.

발차기를 하다니, 전혀 생각도 못했다. 미리 알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거니와 거꾸로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발을 쓰려면 본인의 중심이 먼저 흐트러질 수밖에 없고, 그 순간 바디첵만 넣어도 상황은 끝이다.

‘비겁한 자식!’

이글루는 돌아서는 스마르를 잠시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터, 그때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스마르가 들어섰다.

커트리안이 스마르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스마르가 오른팔을 가슴에 붙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주군에 대한 예다. 검투반의 반장인 스마르지만 커트리안에게 있어서만은 깍듯하게 예를 다한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 년 가까이 커트리안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조노량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스마르가 앞에서 행정적인 귀찮음을 담당한다면 커트리안은 배후에서 조율한다. 켈커티스 출신은 물론 세스카 출신인 롤조차도 커트리안의 의견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조노량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샤마노프의 말에 따르면 커트리안은 한때 바실레오스에 가장 근접했던 사내라 했다. 중원으로 치자면 왕과 비슷한 위치인 것 같은데, 왕은 아니고 최고 권력자에 해당되는 지위였다.

조금 특이한 점은 선출직이라는 것과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는 것이다. 뭐, 그 점에 있어서는 아도니아 역시 세 명의 선출직 목민관을 두고 있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단 아도니아는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반면, 켈커티스는 주요 가문들의 협의체인 원로원에서 선출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옛 지위로 검투반을 장악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같은 포로 신분인 데다가 출신 폴리스조차 다른데 함부로 거들먹거렸다가는 오히려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가 검투반을 장악하고 반원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이끌어 낸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이었다.

S클래스 삼인방이 인정하고 따른다는 것은 무력 자체도 결코 삼인방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고, 말썽 많은 검투반원들이 절대적으로 따를 만큼 강한 카리스마도 지니고 있었다.

냉정한 스마르와는 달리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할까?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의외로 따뜻함이다. 그 따뜻함은 상대를 매료시키지만 함부로 다가들게 하지도 않는다. 어려운 아버지와 같은 분위기랄까? 자신의 보호자지만 응석을 부리다가는 회초리가 날아올 것 같은 느낌? 따뜻하지만 엄격함을 담고 있는 시선, 그 눈빛을 대하고 있으면 절로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스마르여, 스마르여. 자네도 노리앙의 마수에 물들어 버렸구먼.”

롤이 스마르를 놀리듯 한마디 하자 스마르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짧게 대답했다.

“쓸 만하더군요.”

예니에프가 조노량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며 씩 웃어 보였다.

두 번째 경기는 크로아지크 검투반원이 참가하지 않았기에 편안히 앉아서 감상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경기도 스마르의 경기만큼 날카로운 공방을 주고받았다. 눈으로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빠른 공방에 역시 시민궁 시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특히 붉은색 가죽갑옷을 입은 사내의 역도는 과연 자신이 받아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했는데, 그럼에도 승부는 반대편 사내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승부를 보고 예니에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리소스는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네. 도대체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는 건지, 원!”

전에 예니에프가 말했던 당분간 이기기 힘들다던 몇 명의 검투사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아나스타시오스, 바실, 크리소스, 스피로스를 언급했는데, 일명 4대 천왕으로 불린다고 했다. 방금 검투를 끝마친 사내가 바로 그중 하나인 크리소스였다.

예니에프에게 고개까지 내젓게 만든 크리소스를 상대로도 그다지 밀리지 않았던 붉은 갑옷의 사내 역시 만만치 않은 강자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아도니아 일등시민들만 관람할 수 있다는 시민궁 시합은 누구나 관람이 가능한 제1시합과 격이 달랐다.

세 번째 시합은 롤의 차례였다.

상대는 조노량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 바로 카카트로스였다. 조노량을 이기면서 시민궁 시합에 진출한 걸출한 실력자인 것이다.

둘 모두 정석적인 무장을 했다. 한 손에는 글라디우스, 다른 한 손에는 원형의 방패를 들고 검투에 돌입했다.

조노량도 익히 경험해 봐서 아는 검투의 교본과 같은 사내 카카트로스의 선공이 롤의 방패에 작렬했다.

롤의 눈에 핏빛이 돌고 반격이 시작되었다. 철저히 상대를 부수는 롤의 정공법과 검투의 교본과 같은 사내 카카트로스의 검과 방패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정석과 정석이 마주쳤으니 이번 시합은 제법 시간이 길어질 것으로 생각됐지만 의외로 시합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크로아지크에서 보았던 롤이 아니었다. 같은 광전사라도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롤의 진공은 승급심사 때 보았던 것과 그 위력 자체가 달랐다. 처음 몇 차례 검을 마주하던 카카트로스가 순식간에 밀리기 시작했다.

검술에 있어서는 카카트로스가 우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가진 바 힘의 크기가 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롤의 글라디우스가 핏빛을 더해 가는 반면, 카카트로스의 글라디우스는 빛을 잃어 갔다.

검과 검이 마주치고 방패와 방패가 맞닿았다. 카카트로스의 방패는 방어를 위해 존재했고, 롤의 방패는 공격을 위해 존재했다.

그때 조노량의 눈에 카카트로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자신과의 검투 때 사용했던 그 기술이 시전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끔찍했던 기술, 아무리 롤이라고 하더라도 위험하다.

하지만 곧 조노량은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조노량이 예측한 대로 카카트로스는 예의 그 기술을 시전했다. 하지만 카카트로스가 첫 번째 회전을 마치기도 전에 롤의 방패가 카카트로스의 검과 몸통을 동시에 후려쳐 버린 것이다.

한순간에 기술이 깨져 버리며 카카트로스의 신형이 몇 미터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기술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 조노량으로서는 허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했던 기술을 힘으로 깨 버리다니?

광기에 찬 롤의 신형이 이미 정신을 잃은 카카트로스를 향해 뛰어 올랐다. 광전사답게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롤의 진공은 어느새 경기장에 난입한 다섯 명의 기사와 그들이 던진 거대한 그물에 의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시퍼런 마나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철그물은 광전사 롤의 움직임을 완전히 차단했다. 기세 상으로 보아도 하나하나가 롤에 비해 약하지 않은 기사들이다. 그들 다섯 명이 합심한 힘에는 광전사 롤조차 어쩔 수 없이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롤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주최 측에서 미리 대기시켜 놓은 기사들이라는 예니에프의 설명이 따랐다.

“저런 사람이 크로아지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검투사라니, 참나.”

롤은 손목에 마나 팔찌가 채워지고 철창에 던져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분명 이겼음에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이기긴 이긴 모양이군. 껄껄.”

정신을 차리자마자 껄껄거리는 롤을 보며 조노량도 내심 혀를 차고 말았다.

다음 시합은 조노량의 차례였다.

첫 출전인 만큼 잔뜩 긴장한 조노량을 향해 커트리안이 다가왔다.

“굳이 이기려고 하지 말기 바란다. 무사히 귀환해라.”

따뜻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조노량은 마음을 가라 앉혔다.

침착함을 되찾은 조노량이 커트리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트리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다시 한 번 조노량을 안심시켰다. 생사를 가를지도 모를 시합에 나가며 안심이 된다니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분명 초초함이 사라지고 여유를 되찾은 것만은 확실했다.

☆ ☆ ☆

육중한 철창을 밀고 나서자 한쪽 편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무기들이 보였다. 크로아지크에서 공수해 온 무기들이다. 계획대로 내일모래 탈출하게 된다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애병 오첩도가 그 가운데 놓여 있었다.

중원에서 보던 미끈한 검과 달리 투박하다. 검배는 물론 검신에까지 갈라지고 터진 자국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은빛 검신 위로 검붉은 물결무늬가 보일 듯 말듯 흐릿하게 이어져 검첨에까지 닿아 있다. 제작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긴 무늬여서인지 전혀 어색하지 않고 한편 멋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조노량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터이지만.

부족한 기술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겉모습이 어떻든 강도 면에서는 아주 만족스럽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섯 번이나 접는 과정에서 잡다한 불순물이 빠져 나간 덕에 정강(精剛)에 가까워졌다. 아니 체감 상으로는 오히려 중원에서 사용했던 무기보다 더 단단한 느낌이다.

무기의 단단함을 알려면 날의 손상 여부를 가늠하면 된다. 비록 차기의 덕을 본다고 하더라도 오첩도의 날은 쉬이 상하지 않는다.

날이 쉬이 물러지지 않고 잘 선다는 것도 장점이다. 검기는 물론 이곳의 오오라도 무기의 모양을 그대로 연장한 기운이다. 즉 무기의 면과 각을 따라 연장된 선이기 때문에 무기 자체가 예리한 각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 예리한 각에서 연장된 검기는 더욱 예리하다는 말과 같다. 아무도 검기의 두께를 논하지 않는다.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강한 검기가 예리함의 끝, 즉 일점에 집중되니 그 무서움은 논할 필요가 없다. 검을 다루는 자가 검기를 꿈꾸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쇠몽둥이에 검기를 싣는다면 단지 강도를 높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장점이 없다. 둥근면이 연장된다고 해서 날카로움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검기를 다룰 수 있을 정도의 무사라면 힘과 속도만으로 대상을 파괴해 버릴 수는 있다. 하지만 베어 내는 것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조노량은 손때가 묻어 검게 변색된 손잡이를 잡았다. 본체에 단단히 밀착된 갈리온 가죽이 매끄럽게 손바닥에 감겨온다. 대장장이 가우렐리온의 정성이 담겨져 있다.

어쩌면 이번 경기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잡아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오첩도, 진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조노량이 준비를 알리자 바깥쪽 병사가 경기장으로 통하는 두 번째 철창을 열었다.

철창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흰색로브의 마법사가 마나 팔찌를 풀어주었다. 사실 조노량에게는 의미 없는 행동이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는 마나 팔찌,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시끄러운 소개가 이어지고 반대편 철창이 열렸다.

와렛이라는 이름의 검투사다. 하이힙이라는 공립 검투단 출신으로 키는 샤마노프 정도? 하지만 몸집은 쥬시아누스를 연상케 할 만큼 건장하다. 체인메일 같은 무거운 갑옷 대신 갈색 가죽 갑옷만을 받쳐 입고 있다. 짧게 자른 머리에는 투구조차 쓰지 않았다. 한 손에는 글라디우스, 반대편 손에는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쇠사슬을 끌고 있다.

손목에 작은 방패를 부착하고 있지만 겉모습만 보아도 공격 위주의 전투를 즐기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차림 면에서는 조노량과 닮아 있다.

조노량 역시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방어를 위한 갑옷은 아니다. 보온용, 한마디로 추우니까 입은 것이다.

사내는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조노량을 노려보았다. 침착함을 유지하기보다는 일부러 적개심을 고양시키는 모습이다. 이곳 전사들의 특징 중 하나다.

조노량과 와렛은 트라쿠스 쪽을 향해 몸을 돌려 섰다. 그의 선언이 있어야 비로소 검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트라쿠스가 조노량을 향해 슬쩍 격려의 미소를 보여준 후 당수를 하듯 손을 내리그었다. 그에 맞춰 고수가 거대한 징을 울렸다.

징이 울리자 와렛이 조노량을 향해 돌아서며 자세를 낮췄다.

조노량은 오른손으로 호수(護手-칼받이) 바로 뒤편을 가볍게 감싸고, 왼손은 손바닥을 한껏 폈다가 검병(劍柄-손잡이)의 끝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오른손은 검의 움직임을 최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왼손은 힘을 가하는 역할을 한다.

와렛이 몸을 낮춘 채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츳!

잇소리를 내며 마치 달려들 것처럼 상체를 움찍거리다가 씩 웃으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상대의 긴장을 유발하기 위한 동작,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몇 차례 더 위협을 해 보지만 조노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초와 실초를 구분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 저렇게 노골적인 허초에 동요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조노량의 반응에 실망한 와렛은 쳇! 하는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세 갈래로 갈라진 쇠사슬이 공중을 두어 바퀴 돌더니 묵직하게 쏘아져 들어온다. 샤마노프의 그물과 비슷한 공격법이다. 하지만 쇠사슬에 실린 기도는 그물과는 격이 다르다.

함부로 검을 들이대다가는 그대로 밀려 버리거나 감겨 버릴 터였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형태의 공격. 굳이 검을 들어 막을 필요는 없다. 신형을 오른쪽으로 슬쩍 틀며 사슬을 피해 냈다. 그 순간 와렛이 쇠사슬을 잡아챘다. 조노량을 한참 지나쳐 들어가던 쇠사슬의 끝이 출렁이더니 조노량의 뒤통수를 향해 되돌아 나온다.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변화라 조노량 역시 순간 당황했지만 급히 몸을 돌려나오며 쇠사슬을 피해냈다.

현재 조노량은 뒤쪽으로부터 전해져 온 기세라 해도 충분히 인지할 만큼 기감이 높다.

두 번째 쇠사슬을 피하자마자 조노량은 환영보를 밟으며 다가들었다. 오첩도를 날리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순간적으로 글라디우스가 날아오고, 몸을 빼자 쇠사슬을 던졌다.

몇 차례 빠른 공방을 주고받으며 조노량은 상대의 속도를 읽었다. 싸움은 시간과 간격을 지배하는 자가 이긴다. 그것은 내공의 유무와 무관하다. 서로 비슷한 수준으로서 내가 상대의 검을 받을 수 있고, 상대가 내 검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속도의 싸움이다. 몇 차례 부닥쳐 본 결과 상대의 오오라는 조노량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위력이었다.

서너 번의 공수를 더 주고받으며 와렛의 속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속도를 가늠한다. 그리고 와렛의 속도에서 움직임을 예상한다.

와렛의 글라디우스가 조노량의 우측 어깨를 스치고 내려갔다. 지금이다. 조노량의 어깨가 두 치가량 가라앉으며 회전했다.

베었다!

오첩도가 와렛의 옆구리를 쓸듯이 밀려들어간다. 가죽갑옷의 저항이 느껴졌지만 뚫고 파고든다.

피가 터져 나오지만 깊지는 않다.

글라디우스가 솟구쳐 올라온다. 하지만 글라디우스가 자신의 몸에 접근하는 시간보다 자신의 몸이 돌아나가는 시간이 더 짧을 것이다.

조노량은 글라디우스를 막는 대신 오첩도의 진행 속도를 더했다. 오첩도가 빠르게 돌아가고 탄성을 받은 몸이 강하게 회전했다. 예상대로 글라디우스가 등을 스치듯 비껴 올라가는 사이, 회전력을 받은 오첩도가 재차 와렛의 목을 향해 쳐내려갔다.

캉!

와렛 역시 시민궁 시합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다. 되돌릴 여유가 없는 글라디우스를 포기하고 왼손목의 방패로 오첩도를 받아 냈다. 하지만 진기를 한껏 머금고 풀로 회전한 오첩도의 기세를 온전히 받아내지는 못했다.

드드득

오첩도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손목방패가 조각조각 부서져 나갔다. 전체가 쇠로 이루어진 방패지만 다급한 와중에 오오라를 충분히 싣지 못한 것이다.

중심마저 흐트러진 절체절명의 순간, 와렛은 무릎을 튕기는 힘으로 더 빨리 넘어지며 글라디우스를 날렸다. 상대를 맞히려기보다는 안전하게 넘어지기 위한 동작이다.

오오라를 머금고 휘둘러지는 글라디우스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일이었기에 조노량도 잠시 주춤했다.

그 사이 뒤로 두어 바퀴 구른 와렛이 몸을 추슬렀다. 자세를 낮추고 다음 공격을 대비하지만 조노량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와렛과 눈을 맞췄다. 조노량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와렛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몸 상태를 가늠했다. 옆구리의 상처는 별거 아니다. 문제는 왼손목. 무쇠로 만든 방패가 깨져 나갈 정도의 강력한 타격이었다. 사슬을 움켜쥐어 보자 시큰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금 정도는 갔을 것이다. 사슬을 쥐고 있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부상은 감춰야 한다. 쓸모없어진 사슬이나마 움켜쥐고 있어야 상대가 부상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여유 있게 승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상대를 경시하다가 된통 당한 꼴이라니.

와렛의 눈이 다시 한 번 상대를 살폈다.

이제 막 시민궁 시합에 첫발을 내디딘 사내. 작은 몸집과 좌우로 찢어진 눈, 그리고 낮게 누워 있는 콧등, 갈색의 피부. 미개한 변방족 출신임이 분명하다. 절대 강해 보이지 않는 외모지만 더 이상 경시하는 마음은 사라졌다.

와렛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잇!

조노량이 자세를 낮춘 후 잇소리를 내며 달려들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자 와렛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조노량은 씩 웃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처음 와렛이 했던 바로 그 위협이다.

와렛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막상 당하고 보니 치욕적이다. 같은 행위에 상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순간적으로 반응해 버린 것이다. 반응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다시 한 번 상대가 진공 자세를 취하자 와렛의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와렛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다시 두어 번 위협이 가해졌지만 와렛은 굳게 마음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에 조노량이 치고 들어왔다.

반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독이 되었다. 정작 반응해야 할 순간에 반응하지 못하고 한 박자 늦어지게 된 것이다.

오첩도가 날고 글라디우스가 막아냈다. 하지만 중심이 나쁘다. 뒤로 기울어지는 상체를 억지로 돌려세울 때 오첩도가 다시 한 번 글라디우스를 쳐냈다. 마치 왼손의 사슬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움직임이다.

타격에 의해 몸 밖으로 벌어지려는 글라디우스를 억지로 끌어당길 때 조노량의 몸이 와렛의 품 안으로 안길 듯 회전했다.

꽈직!

회전을 마친 조노량의 왼팔꿈치가 투구도 쓰지 않은 와렛의 관자놀이에 박혔다.

그리고 전해지는 끔찍한 통증.

그러나 조노량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타격을 가했던 왼팔이 자연스럽게 펴지는 극점에서 손목이 움직이고, 손날에 진기가 집중됐다. 그 궤적에 뒤로 넘어가는 와렛의 관자놀이가 다시 걸렸다.

퍽!

두 번째 타격에서 와렛은 의식을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조노량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워낙 찰나지간에 이어진 두 번의 타격으로 아직까지도 넘어가고 있는 와중인 와렛의 명치로 조노량의 무릎이 박혔다.

그 충격이 와렛이 쓰러지는 속도를 더욱 가속시켜 지면과 충돌하게 만들었다.

빠각!

지면과 충돌했을 때 나는 소리와는 조금 다른 소리.

조노량의 무릎은 그때까지 와렛의 명치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로 인해 와렛의 갈비뼈가 조각나는 소리였다.

첫 번째 팔꿈치 공격이 작렬한 순간부터 네 번째 타격까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이뤄졌다.

상대가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한 조노량이 와렛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관중석이 정적에 휩싸였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된 마무리였다. 와렛이 몇 번의 타격을 받았는지 관중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요란한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주 인상적인 검투, 아니 격투였다.

전과 달리 조노량은 관중들의 환호에 왼손을 들어 호응한 후 수순대로 와렛의 목에 오첩도를 겨누고 트라쿠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트라쿠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시민권만 부여해 줘도 충분히 포섭이 가능하리라. 아도니아 시내에 집을 마련해 주고 넉넉히 급료를 챙겨줄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이 후원하는 검투단으로 이적시키는 거다. 아니, 그보다 자신의 호위로 곁에 두는 것이 좋겠다. 그게 좋겠다. 스피로스 등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겠지만 저 정도 몸놀림이라면 위급한 상황에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다른 호위들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트라쿠스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했다.

지금 와렛을 죽일 이유도 없거니와 에크미어(시민궁 시합 검투사)를 이유 없이 죽이기도 쉽지 않다. 관중 모두가 최소 일등 시민들이다. 아도니아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자들인 것이다. 목민관이 부당하게 판정할 경우 다음 선거에 불리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 제1시합에서처럼 쓸데없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조노량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퇴장했다.

☆ ☆ ☆

조노량이 들어오자 롤이 껄껄거리며 포옹을 해 왔다. 뒤에 서 있던 커트리안이 미소를 머금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는 듯한 어투에 조노량은 한껏 고양된 기분을 느꼈다.

커트리안에게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반대로 그를 실망시키는 것은 꺼려졌다. 그렇게까지 느낄 필요는 없겠지만 수장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커트리안의 믿음과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승리를 실감했다. 첫 시합에서의 승리로 시민궁 시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걷혀 나갔다. 더불어 자신의 실력이 시민궁 시합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조노량의 자신감은 다음 예니에프의 시합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하필 첫 상대가 예니에프 자신이 언급했던 자들 중 하나인 아나스타시오스였다.

치열한 접전을 펼치기는 했지만 어깨에 부상까지 입고 패배하고 만 것이다. 아나스타시오스는 투핸드소드를 글라디우스 다루듯 가볍게 휘두르며 예니에프를 압도했다. 양손에 글라디우스 두 자루를 나눠진 예니에프가 특유의 날렵함으로 아니스타시오스를 압박했지만, 아니스타시오스의 거검에 예니에프의 글라디우스 하나가 동강나며 어깨에까지 부상을 입었다.

쥬시아누스를 누르고 S클래스의 자격을 획득할 만큼 예니에프는 누가 뭐래도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최강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하고 말았다.

크로아지크는 이번 시합에서 반드시 준결승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그 임무에 가장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공식 최강자인 예니에프다. 그런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조노량 자신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까지 느껴지던 예니에프가 온힘을 다해 상대했음에도 이길 수 없는 자. 그 외에도 여럿이 있다고 했다. 사전에 언급되지도 않았던 와렛 하나를 이겼다고 자신만만해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이후 커트리안과 쥬시아누스가 차례로 출전했는데 큰 부상 없이 2회전에 진출했다. 거의 하루 종일 치러진 1회전 경기 동안 관중들은 주최 측에서 공급한 뜨거운 와인과 음식으로 배를 불려가며 여유롭게 경기를 관전했다. 다행히 시합은 이른 오후에 마무리되어 일행도 숙소로 돌아가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느긋한 일행들과 달리 조노량은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고 온 예니에프마저 부상자답지 않게 쾌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겠어요.”

“뭘 잘했다고 비실비실 웃고 있는 게냐? 패한 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다치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병신같이 부상이나 쳐 입고!”

롤의 면박에도 예니에프는 별반 개의치 않고 히죽거렸다.

“움직이는 데 별 지장 없다니까요. 그리고 뭐, 롤 삼촌이 4강 안에 들어 주겠죠. 다치지도 않고 말입니다. 하하!”

격의 없는 말이고 악의 없는 의사전달이었지만 표현의 본질은 너나 조심하세요라는 말이었다.

“끄응, 속 편해서 좋겠다.”

롤은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듣고 찔끔해서 물러나 버렸다.

롤의 스타일상 다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고, 또한 성적을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투만 시작되면 미쳐 돌아가니 커트리안의 당부고 뭐고 먹혀들지 않았다.

그동안도 시합 때마다 부상 빈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롤이었으니 실상 걱정을 해야 하는 건 예니에프보다는 롤이었다. 오히려 아직까지 팔다리가 성한 게 불가사의다.

어쨌거나 이번 시합에서의 부상은 다른 때와는 의미가 다르다. 자칫 심각한 부상이라도 입는 날에는 여지없이 남겨져야 할 판이다. 그리고 남겨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롤 자신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다면 적당히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기에 천운에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모래 아침은 어떻게 하실 거죠?”

예니에프의 시선은 커트리안에게 향했지만 대답은 스마르에게서 나왔다.

“내일 시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휴식일을 생각하나? 뭐, 그렇게 된다면 지난번 약속한 대로 아침은 거부할 예정이다. 늦잠이나 실컷 자 보도록! 성적을 낸다면 그 정도야 못 들어주겠는가?”

서로 간에 시선이 마주쳤다. 모래 아침은 거부해야 한다. 미리 아침을 거부했을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행의 탈출을 눈치채는 가장 빠른 시간은 점심이 배달될 무렵. 그로써 적어도 열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래야 추격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시합 중에는 일찍 자는 대신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탈출은 할 수 있겠지만 도저히 시간을 벌 방법이 없다. 때문에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합이 끝난 후 휴식일로 탈출 일자를 잡은 것이다.

조노량은 티격태격하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면서 먼저 침소로 돌아갔다. 운기조식이라도 하며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둘째 날도 다른 검투단보다 한참 이른 새벽에 시민궁 시합장에 도착했다. 대기실은 밀폐된 공간도 아니고 경기장 쪽으로는 통째로 훤히 터진 환경이라서, 거대한 모닥불이 없었다면 새벽 추위를 견뎌내기 힘들었을 터였다.

“오라지게 춥구먼.”

새벽 여명을 받아 희뿌옇게 밝아오는 시합장을 바라보며 롤은 지급된 모포를 둘둘 휘어 감았다. 오랜 세월 피를 먹어 진갈색으로 변한 흙바닥이 간밤에 내린 눈으로 한결 옅은 색을 띠고 있다. 치운다고 치운 모양이지만 건조한 싸라기눈 알갱이를 완전히 치우지는 못한 탓이다. 본격적으로 해가 나면 녹게 될지, 아니면 추운 날씨 탓에 그대로 얼어붙을지 알 수 없지만 시합에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은 두 시간, 조노량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운기에 돌입했다.

대주천을 끝내고, 다시 소주천까지 한 번 더 진행했을 즈음 시끌벅적한 관중들의 소음이 들려왔다. 관중들이 입장했다는 것은 곧 시합이 시작된다는 말이기에 조노량은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다.

오늘 치러지는 검투는 총 16경기가 될 예정이다. 중원에서의 비무대회와 그다지 다른 모습은 아니다. 열여섯 명이 싸우고, 다시 여덟 명이 싸운다. 거기서 추려진 네 명이 준결승을 치러 패배한 둘은 3, 4위전을 가지고, 이긴 둘이 최종적으로 결승을 치르게 된다.

결승에 진출한 자는 최대 네 번까지 싸우는 셈이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력 안배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부상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칫 이기고도 부상으로 다음 경기에서 기권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예니에프를 제외한 다섯 명이 2회전에 진출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문제는 오늘의 결과다. 다섯 중 하나는 최소 준결승까지는 진출해야 한다. 그래야 하루의 휴식을 제공받고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내년으로 계획을 미뤄야 한다.

징소리가 울리고 첫 번째 검투가 시작되었다. 조노량은 창살에 달라붙어 시합을 유심히 관찰했다. 조금이라도 이들의 전력을 탐색하고 전투 방식을 익히기 위해서다. 단단한 체구의 두 검투사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어제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 둘 모두 자신보다 강한 느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시합은 끝났고, 다음 차례는 크로아지크의 쥬시아누스였다.

쥬시아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조노량이 느끼기에 쥬시아누스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쥬시아누스는 롤과 달리 광적으로 싸움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싸움에 임해 즐거워한다는 것은 뭔가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롤이 한마디 던진다.

“무식한 놈들끼리 다시 붙게 되었군.”

이번 대결이 처음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쥬시아누스는 덩치와 달리 결코 무식하게 전투를 치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식한 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확실하게 눌러 주고 오지.”

지난번 검투에서 쥬시아누스가 이겼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니 이번엔 확실하게 눌러 준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쥬시아누스가 기대하게 했던 싸움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침착한 쥬시아누스답지 않게 살짝 흥분한 모습으로 철창을 벗어났다. 쥬시아누스가 시합장에 들어서자 그 체구로 인해 시합장이 꽉 찬 느낌이었다.

목소리 큰 자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선수 소개를 끝마치자 반대편 철창이 열렸다. 반대편에서 시합장에 들어선 자는 쥬시아누스에 비견될 만큼 커다란 사내였다. 사내는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관중석을 향해 포효했다. 관중들이 함성으로 답하자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쥬시아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조노량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쥬시아누스의 복사판이다.

키는 쥬시아누스보다도 반 뼘 정도 컸고 몸집은 약간 더 호리한 느낌? 실제로 왜소한 것이 아니라 키 탓에 상대적으로 호리해 보인다는 말이다. 살이 조금 빠진 쥬시아누스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컸다.

엄청난 거구의 두 사내가 시합장을 꽉 채웠다.

둘은 서로를 잘 아는 듯 입가를 비틀며 인사를 나눴다. 당연히 좋은 사이일 리는 없다.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시합 선언이 있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천천히 걸어 나와 중앙에 자리를 잡고 마주섰다.

평소 투핸드소드 하나만을 사용하는 쥬시아누스가 이례적으로 라운드쉴드를 장착하고 있다. 상대방 역시 투박한 모습의 투핸드소드를 들고 나왔는데, 그와 대조적으로 방패는 각종 문양이 멋스럽게 양각되어 있는 카이트쉴드(삼각방패)다.

“오호! 쿨칸이 멋진 방패를 하나 장만했군요.”

예니에프의 말에 롤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곧 망가질 텐데, 돈지랄이지.”

“제법 강도가 있어 보이는데요?”

“흥, 열 번!”

“스무 번!”

“무슨 내기할래?”

“…….”

예니에프의 입에서는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실상 둘 모두 수감자 신세, 개인 소유물이 없으니 음식물을 제외하고는 달리 내기할 거리가 없는 것이다. 늘 풍족한 음식물을 제공받는 검투반원이라도 음식물이 내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둘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징소리가 울렸다.

쥬시아누스가 투핸드소드로 라운드쉴드를 깡깡 쳐 보였다. 그러자 쿨칸이 씩 웃으며 투핸드소드를 들어 올렸다.

쾅!

쿨칸의 투핸드소드가 쥬시아누스의 라운드쉴드를 강하게 가격했다. 목표 자체가 쉴드임이 분명해 보이는 동작이다.

쥬시아누스의 신형이 두어 발자국 뒤로 밀렸다. 상당한 충격이 가해진 느낌이다. 쿨칸은 기세를 잡았음에도 재차 공격을 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쥬시아누스가 제자리로 돌아와 투핸드소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쿨칸은 방패를 몸 가까이 끌어들이며 자세를 잡았다. 명백한 방어 동작, 그것도 방패를 굳건히 쥐기 위한 동작일 뿐 다른 곳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둔 모습이 아니다.

푸른색 오오라를 진하게 품은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가 힘차게 내리꽂혔다.

역시 목표는 상대의 방패!

쾅!

쿨칸의 몸 역시 뒤로 두 발자국 밀려났다.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시합장 가득 울려 퍼졌다.

☆ ☆ ☆

둘의 무기는 노골적으로 상대의 방패만을 노렸다. 오오라를 한껏 끌어올려 상대의 방패를 부수기 위해 검을 날렸고, 상대방 역시 피하지 않고 방패를 들어 막았다. 조노량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싸움 방식이었지만 관중들은 환호했다. 힘과 힘이 격돌하고, 오오라와 오오라가 부닥쳤다.

“부숴 버려!”

“한 번 더! 힘내라, 쥬시!”

롤과 예니에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쥬시아누스를 응원했다.

조노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지만 예니에프의 말에 의하면 흔히 있는 대결이라고 했다. 남자답다나?

쥬시아누스의 실력은 조노량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조노량으로서는 절대 쥬시아누스를 누를 수 없다. 그는 힘뿐만 아니라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전사이기 때문이다.

둘은 지금 실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짜고 하는 싸움인 양 둘은 한 번씩 공방을 주고받았다. 한 사람이 공격하고 다른 사람이 기다려 준다. 아주 공평하게 한 번씩 주고받는 것이다. 오직 힘의 대결. 다른 방식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쾅!

“열한 번! 롤, 봤지요?”

“끄응…….”

열네 번째에 쥬시아누스의 라운드쉴드가 먼저 깨져 나갔다. 비록 강철제라고는 하지만 수용소에서 제공되는 일반적인 방패였다. 아무리 오오라로 받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강도의 영향을 받는다.

주시아누스가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쿨칸이 처음 나왔을 때처럼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관중들을 향해 포효했다.

쿨칸이 등을 보이는데도 쥬시아누스는 인상만 구기고 서 있었다.

그에 맞춰 관중들이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쥬시아누스를 마주한 쿨칸이 자신의 검으로 방패를 두드렸다. ‘자, 공격해 봐라’라는 표시다.

쥬시아누스는 지금까지와 달리 투핸드소드를 두 손으로 모아잡고 엄청난 기세로 쿨칸의 방패를 가격했다.

쾅!

충격에 쿨칸은 세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하지만 쿨칸의 방패는 우그러졌을 뿐 깨져 나가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지켜보던 롤이 얼굴을 구겼다.

쿨칸이 광소를 터트리며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려 쥬시아누스의 어깨 부위를 향해 내려쳤다. 방패를 잃은 쥬시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쿨칸의 방패는 다시 세 번의 공격을 더 견뎌 내고 깨져 나갔다.

동등한 조건이 된 것이다.

이런 식의 싸움은 서로의 몸을 갉아먹는다. 비록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몸 자체에 충격이 누적될 수밖에 없는 싸움인 것이다. 둘은 비틀거리면서 마주섰다.

이제 한 번씩 주고받는 형태의 싸움이 아니다. 둘 모두 전력을 다해 검을 마주쳐 갔다.

쾅!

어찌나 강렬했던지 둘의 몸이 겹쳐졌다가 떨어진다.

쾅!

쿨칸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린다.

쾅!

쥬시아누스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쾅!

오오라의 격돌에 섬광이 터져 나온다.

쾅!

커억!

드디어 결론이 났다. 쥬시아누스의 승리다. 쿨칸은 버티지 못하고 입에서 핏줄기를 뿜어내며 나가떨어졌다.

와아!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시합장을 가득 메운다.

“됐어!”

롤은 벌떡 일어나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쿨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투핸드소드를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버티고 섰다. 쥬시아누스가 뚜벅뚜벅 걸어가 쿨칸과 마주섰다. 쿨칸이 힘겹게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쾅!

퍽!

방금 전 격돌로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쿨칸의 몸이 날리듯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일어섰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무너져 내렸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지만 충격이 누적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쥬시아누스가 자신의 검으로 쿨칸의 목덜미를 겨눈 채 트라쿠스를 향했다.

죽여라! 죽여라!

관중들의 외침소리에 시합장이 떠나갈 듯하다. 실제로 죽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의례적인 외침을 뿐이었다.

비록 패했다고는 하지만 쿨칸 역시 남자답게 당당히 싸웠다. 당연히 리벤지 매치를 원하지, 이번 싸움으로 끝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트라쿠스의 엄지손가락도 위로 향했다. 당연한 귀결이다.

들것이 들어오고 쿨칸이 실려 나갔다. 승리한 쥬시아누스 역시 병사들에 이끌려 다른 출구로 나갔다. 그 역시 신관들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쥬시아누스의 시합에 이어 커트리안의 시합이 있었다. 그다지 강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커트리안이 패했다. 나름 혈투였으나 피륙에 입은 작은 상처들뿐 치명적인 부상은 없었다.

반면 롤은 형편없이 얻어터지고 실려 나가야 했다. 다행인 점은 상대가 워낙 강했던 덕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롤의 상대는 예니에프가 언급했던 바실이라는 검투사였는데, 온갖 퍼포먼스를 다 펼치며 광전사로 돌변한 롤을 가지고 놀다가 단번에 무너트려 버렸다.

붉은 오오라를 줄기줄기 뿌려대며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롤은 마치 투우를 연상시켰지만 바실은 장난감 다루듯 슬쩍슬쩍 피하며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지루해질 쯤 이어진 두 번의 타격. 창대가 롤의 왼팔을 부러트렸고, 그래도 달려들던 롤의 턱이 부서져 나갔다.

그 경기를 보며 조노량은 또 한 번 산 넘어 산이라는 격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실력을 익히 아는 카카트로스를 압도했던 롤이 바실을 상대로는 거꾸로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그 다음 경기에서 스마르는 간단히 상대를 눕혀 버렸고, 조노량은 2회전의 마지막 시합을 치르게 되었다.

운이 나쁘게도 조노량의 상대는 아도니아 최강 검투사 중 하나로 꼽히는 스피로스였다. 그는 시민궁 시합에서 네 번이나 우승을 거머쥐었던 실력자다.

워낙 뻔한 승부이다 보니 베팅 비율은 형편없이 낮았고, 관중들도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노량이 시합장으로 나설 때는 예니에프가 미리 조노량을 위로해 줄 지경이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피로스라는 사내, 의외로 왜소하다. 키는 조노량보다 조금 큰 정도? 이곳 기준으로는 단신에 속했다. 덩치 역시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1회전에서 시합하는 장면을 지켜본 바가 있긴 하지만 특징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대단한 움직임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상대를 압도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싸워서 이겼다고나 할까?

적의를 드러내면 반응하기 마련. 조노량은 상대의 눈을 노려봤다. 하지만 상대는 그저 심드렁한 반응뿐. 조노량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트라쿠스의 개시 선언이 떨어지자 스피로스는 그제야 조노량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흔한 글라디우스 한 자루. 조노량과 마찬가지로 방패조차 들지 않았다.

조노량은 자세를 낮추고 상대의 진공에 대비했지만 스피로스는 별로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조노량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들어오라는 말인가?

조노량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전투 시 조노량은 늘 시간과 간격을 중요시한다. 상대방의 거리에서는 싸우지 않고 자신의 거리를 유지한다.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의 시간을 읽는다.

우선 간격!

조노량의 오첩도는 상대의 글라디우스보다 반 배는 길다. 조노량은 일정 거리에서 더 이상 간격을 좁히지 않았다. 조노량이 즐기는 간격이다. 반면 글라디우스는 반 발자국 정도 더 가까워져야 유효한 간격이 된다.

조노량이 슬그머니 오첩도를 내질러 봤다. 스피로스의 글라디우스가 간단하게 오첩도를 쳐낸다.

가볍게 튕겨진 오첩도가 탄성을 이용해 반대로 돌아 올라온다.

스피로스는 여전히 가볍게 오첩도를 튕겨낸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칼놀림이다. 몇 차례 상대의 속도를 가늠하던 조노량이 오첩도를 내뻗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하단차기를 날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날아드는 하단차기는 막기가 까다롭다. 특히 발차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곳 사람들은 이때 대부분 당황하거나 허둥대기 일쑤였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스피로스는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글라디우스를 던지듯 뻗었다.

발차기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할 수는 없다. 반면 오오라가 담긴 글라디우스는 상대의 목숨을 앗을 수 있다.

발차기를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글라디우스를 막아내지 못한다. 거꾸로 당황한 조노량이 급히 환영보를 펼치며 옆으로 돌았다. 뒤로 물러나서는 계속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노량의 특기에는 박투도 포함되어 있다.

환영보로 옆으로 돌아나간 조노량의 오첩도가 재차 스피로스의 목을 향해 쏘아져 갔다.

스피로스는 슬쩍 고개를 비트는 것만으로 오첩도를 피해 낸다. 여기까지는 조노량도 예상한 움직임. 왼손을 오첩도에서 분리함과 동시에 한 발자국 더 다가들며 팔꿈치를 휘돌렸다. 그 궤적은 상대의 턱. 하지만 미처 턱에 닿기도 전에 상대의 손바닥이 팔꿈치를 튕겨낸다.

오첩도의 손잡이 부분이 휘돌며 상대의 관자놀이로 향했다. 물 흐르듯 연결되는 동작이다. 피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스피로스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는 것만으로 깔끔하게 피해낸다. 초 근접 전투다. 조노량이 오첩도의 간격 다음으로 좋아하는 거리다.

검을 쥔 조노량의 오른손이 상대방의 어깨에 걸쳐지며 무릎이 날아오른다. 목덜미를 감아쥐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유는 없다.

다시 한 번 상대방의 손바닥이 조노량의 무릎을 쳐 내리자 무릎이 쭉 펴지며 발끝이 명치를 향한다. 스피로스의 왼손이 조노량의 발끝을 툭 쳐낸다.

그 힘에 조노량의 중심이 흐트러진다. 원래대로라면 탄성을 이용해 회전해야 마땅하지만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간격을 벌렸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의 글라디우스가 조노량이 회전해야 할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조노량이 간격을 벌리자 스피로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여, 친구! 감이 좋은데?”

가벼운 탐색전이었다. 몇 차례 공수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조노량은 상대의 강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상대는 맨손 전투에도 익숙한 것이 틀림없다.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조노량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거나 피해 버렸다. 이런 전투 방식이라면 직접 맞상대를 해 보기 전에는 상대의 강함을 가늠하기 어렵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상대다.

좀 더 신중해지지 않으면 어이없이 패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조노량은 일위진천환영보를 극성으로 펼치며 스피로스의 주위를 휘돌기 시작했다. 바닥이 미끄럽다. 조건은 상대방 역시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에게도 움직임을 강요해 내야 한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변칙적으로 날았다. 공간을 가르다가 되돌아나가고 좌측으로 돌아나가다가 우측으로 뻗는다. 오첩도는 상대가 글라디우스를 내밀기도 전에 회수되었다가 반 박자 느리게 치고 들어간다.

스피로스도 제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조노량의 의도대로 움직여 준다.

둘 모두 격렬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듯 보이지만 정작 무기가 격돌하는 소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자 스피로스가 입을 동그랗게 말아서 감탄성을 토해 놓는다.

“이거 이거 종잡을 수가 없구나. 좋아, 좋아.”

조노량의 움직임에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조노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러 차례 중심이 흐트러질 만한 자세를 유도했음에도 전혀 미끄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미끄러짐이라도 보이면 그 틈을 노리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상대의 발은 자석이라도 붙여 놓은 듯 안정적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노량의 움직임에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빌어먹을 일위진천환영보! 진천(震天)은커녕 진인(震人)도 못한다.

그 순간 스피로스가 조노량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따라잡았다기보다 검을 맞댈 수 있을 정도까지 따라왔다는 것이다.

깡깡!

연달아 검이 부딪쳤다.

그 순간 조노량은 급히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검을 쥔 오른손이 강하게 진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다지 격한 부딪침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강한 반탄력이 전해져 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어때, 짜릿하지?”

스피로스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조노량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그 사이 조노량은 오른손에 진기를 휘돌려 충격을 감쇠시켰다.

“이제부터는 좀 더 강하게 나가 볼 거니까 조심하라고.”

스팟!

☆ ☆ ☆

스피로스가 전광석화처럼 거리를 좁혀 왔다. 잠시 물러나 벌려 놓은 틈이 한순간에 메워졌다. 조노량은 경악성을 울리며 껑충 뒤로 몸을 빼내었다. 미처 돌아나갈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연속해서 공격의 기회를 준다는 것과 다름없는 일. 이후의 공방은 악몽과도 같았다.

분명 반응 속도나 몸놀림은 조노량이 빠르다. 거기에 보법까지 밟고 있다. 그럼에도 스피로스의 공격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기운의 차이 때문이었다.

이제는 스피로스의 검을 백분 피해낼 수 없었다. 오 할? 나머지 오 할은 피하지 못하고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오 할이 조노량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스피로스의 오오라에는 반 갑자의 내공으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한 번 격돌할 때마다 조노량은 검을 놓쳐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어야 했고, 그만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슬슬 끝내자고. 한솥밥을 먹게 될지도 모르는데 다치지 않게 해 주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스피로스의 글라디우스가 조노량의 오첩도를 강하게 쳐냈다.

카앙!

오첩도가 하릴없이 허공을 날았다. 동시에 조노량은 거칠게 튕겨져 쓰러지고 말았다.

가해진 충격으로 양 손목이 마비되는 것은 물론 몸까지 격하게 튕겨 나갔다. 단지 검을 맞댔을 뿐인데 가슴에까지 충격이 전해져 온다.

조노량은 한 모금의 피를 토해 냈다. 진기가 격탕된 것이다.

스피로스는 글라디우스로 조노량의 목덜미를 겨누고 슬쩍 윙크를 해 보였다. 방금까지 칼을 대고 싸웠다기보다는 가벼운 비무를 즐겼다는 표정이다.

돌이켜보니 조노량 혼자서 용을 쓴 것 같다. 상대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여유 있게 검투를 벌였고, 충분히 즐기고 원하는 시점에 검투를 마감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멀었다. 이제 겨우 반 갑자의 내공을 쌓은 주제에 일류 고수라도 된 듯 자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무공의 묘리를 파고들기보다는 반사 신경에만 의지해서 전투를 벌였다. 여전히 뒷골목 삼류건달의 싸움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공의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 형식적인 보법과 형식적인 검법만을 추구하다니.

스피로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글라디우스가 치워졌다. 트라쿠스에 의해 검투가 끝났음이 선언된 것이리라.

큰 부상은 없었다는 판단 때문인지 조노량은 그대로 철창으로 물러나왔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번 조노량을 치료했던 제우스라는 신관이었다.

철창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직까지도 복귀하지 못한 롤을 제외한 일행들이 전부 일어나 조노량을 맞이했다.

“고생했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와 있던 쥬시아누스가 조노량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실 저놈은 나도 이겨 본 적이 없어. 아직은 무리야.”

예니에프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큰 부상은 아니겠지?”

커트리안도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상처를 살폈다. 따뜻함이 묻어나는 손길이다.

조노량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급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들끓는 진기를 가라앉히고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조노량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8강 진출자가 모두 가려졌다.

스마르, 쥬시아누스, 아나스타시오스, 스네티우스, 바실, 아폴리온, 크리소스, 스피로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강자들이다. 다시 대진표를 추첨하고 베팅이 진행되는 동안 한 시간가량의 브레이크 타임이 주어졌다.

반 시간 후 대진표 추첨 결과가 발표되었다. 추첨 방식은 각 검투사 명이 적힌 막대를 아도니아 제3목민관인 트라쿠스가 뽑는 방식이었다. 뽑는 순서대로 대진표가 작성된다.

대진표 결과는,

1조

아나스타시오스 대 바실

2조

아폴리온 대 스네티우스

3조

스마르 대 쥬시아누스

4조

스피로스 대 크리소스

추첨 결과에 따른 대진표를 접한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도니아 최강 사인방이라고 불리는 아나스타시오스, 바실, 스피로스, 크리소스가 각기 한 조로 묶인 것이다.

골고루 흩어져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렇게 몰려 버리면 여러모로 재미가 떨어진다. 더불어 베팅에도 난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강자들 간의 검투는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서로 간에 체력 안배가 쉽지 않아 이긴다고 하더라도 소모된 체력이나 부상으로 인해 자칫 다음 시합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1회전만 무탈하게 넘기면 2회전에서는 비교적 약체로 분류되는 자들을 상대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결승은 제법 기대할 만한 경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이뎐 비러머그을!”

“이거 추점에 조작이 있는 거 아닙니까? 무슨, 1회전에서 우리끼리 붙게 만들다니. 말이나 됩니까?”

깨진 턱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팔에는 부목까지 대고 돌아온 롤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분통을 터트리자, 예니에프도 어이없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쥬시아누스 역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둘 중 하나라도 입상을 해야 하는 판국에 둘 중 하나는 반드시 1회전에서 탈락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사이 트라쿠스의 뒤편에 붙은 목판의 숫자가 정신없이 갱신되고 있었다. 각 검투사들의 베팅액과 배당률이 수정되는 것이다. 사다리에 올라간 사내는 맨 위에서부터 숫자판을 바꿔달았고, 내려오자마자 다시 맨 위로 올라가 새롭게 숫자판을 바꿔달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그러길 삼십여 분. 드디어 최종적인 결과가 공시되었다.

-아나스타시오스-

베팅액 : 5,315골드

승률 : 21.22%

배당률 : 4.48배당

-바실-

베팅액 : 4,584골드

승률 : 18.3%

배당률 : 5.19배당

-아폴리온-

베팅액 : 1,721골드

승률 : 6.87%

배당률 : 13.83배당

-스네티우스-

베팅액 : 778골드

승률 : 3.11%

배당률 : 30.59배당

-스마르-

베팅액 : 914골드

승률 : 3.65%

배당률 : 26.04배당

-쥬시아누스-

베팅액 : 1,795골드

승률 : 7.17%

배당률 : 13.26배당

-스피로스-

베팅액 : 4,956골드

승률 : 19.78%

배당률 : 4.8배당

-크리소스-

베팅액 : 4,987골드

승률 : 19.91%

배당률 : 4.77배당

변수가 많은 대진표였지만 애초에 강약이 명확하다 보니 예측대로 배당률과 승률이 정해졌다.

베팅 결과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검투사는 예니에프를 꺾었던 아나스타시오스였다. 하지만 나머지 바실이나 스피로스, 크리소스 역시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그 뒤를 이어 쥬시아누스가 7.17%로 가장 높았고, 아폴리온이 미세한 차이로 쥬시아누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스마르나 스네티우스는 가장 약체로 분류되어 형편없는 확률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시민궁 시합에서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스마르의 경우 배당률이 무려 26배가 넘는 상황이었다. 만일 스마르가 우승한다면 스마르에게 건 사람들은 대박을 터트리게 될 테지만 가능성이 아주 낮았다.

그렇다고 확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법 많은 골드가 스마르에게 베팅되었다. 당일로 승부를 가리는 검투였기에 실력의 고하를 넘어서는 변수가 작용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우승자를 맞히는 베팅과 더불어 각 조별 승자를 맞히는 베팅판도 함께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은 매 시합 전에 다시 베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커트리안이 턱을 쓸어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인 상태인 걸로 봐서 딱히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커트리안?”

예니에프의 대응이 있고서야 고개를 든 커트리안이 예의 미지근한 시선으로 예니에프를 바라보았다.

“아니, 잘된 일이 맞아.”

아까보다 확실히 힘이 들어간 목소리다.

모두의 시선이 커트리안을 향했다. 기회를 하나 상실한 판인데 무엇이 잘된 일이라는 말인가?

“쥬시아누스, 그리고 스마르. 우리는 힘을 비축할 수 있다. 그렇지, 스마르?”

스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에 하나가 양보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양보해야 할 대상은 스마르다. 직전의 검투로 쥬시아누스가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상급 신관으로부터 충분한 치료를 받았기에 충격은 대부분 상쇄된 상태였다.

“쥬시아누스, 몸에는 무리가 없는가?”

“문제없소.”

쥬시아누스가 대답했다.

“좋아. 스마르, 크리소스와 스피로스의 경기 결과는 어떨 것으로 보이나?”

커트리안의 질문에 스마르가 비교적 길게 전력을 분석했다. 마치 부관이 상관에게 보고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스피로스의 장점은 적응력과 임기응변입니다. 상대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아는 친구지요. 결코 무리하는 법이 없으므로 누구와 붙어도 쉽게 밀리지 않습니다. 특히 날카로운 반격기는 일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크리소스는 기술보다는 속도와 힘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입니다. 물론 기술 면에서도 모자람이 없습니다만 막강한 오오라를 바탕으로 한 속도전을 즐깁니다. 그의 공격에 한 번 휘말리기 시작하면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다는 평판입니다.

둘이 붙는다면 누가 이길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미세하게나마 크리소스가 우세하다고 점쳐집니다.”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에 미소가 담겼다.

“그래서 승산이 있다는 거지. 지금껏 스피로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검투사는 없었다. 아무리 힘이 좋은 아나스타시오스도, 바람의 화신이라는 바실도 그렇지. 그것은 크리소스 역시 마찬가지야. 승부를 점칠 수는 없지만 끈적이 스피로스를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칠 수 있는 자? 적어도 이곳에는 없다.”

“그건 그렇소.”

쥬시아누스가 뭔가 느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생한 상태로 들어설 수 있을 터이고, 크리소스나 스피로스는 심하게 지치거나 아니면 부상을 당한 상태로 검투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거란 거다.”

“오호!”

예니에프가 탄성을 터트렸다.

“맞아, 맞아. 아주 끈적한 놈입니다. 로크리안이나 아드리안이 온다 해도 적어도 삼십 분 안에는 스피로스를 잡지 못한다는 데 목을 걸 용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이기면 되네? 그것도 유리한 상황에서? 그 다음은 기권하더라도 준우승! 오호, 오호!”

말을 끝낸 예니에프의 방긋거리며 즐거워했다.

“나쁘지 않군요. 그런데 누가 상대합니까?”

스마르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철저히 이성적인 사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승부욕이나 명예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은 사내다.

“지친 자에게 쉴 틈을 줘서는 안 되겠지.”

모두의 시선이 쥬시아누스에게 쏠렸다. 결론이 지어진 것이다.

☆ ☆ ☆

첫 번째 검투가 시작되었다. 멎었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쉽게 녹지 않는 싸라기눈이다. 변수로 작용할 여지가 많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검투가 시작되자 조노량은 미동도 없이 둘의 경기에 집중했다. 중원에서도 접해 보지 못한 일류 고수들의 비무. 일정 경지를 넘어선 지금 고수들의 실전을 지켜본다는 것은 무공의 증진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시오스 대 바실. 아도니아 검투계의 최강자들이다.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장관이 펼쳐졌다.

시퍼렇게 면도가 된 사각턱, 짧게 자른 머리, 이 미터에 가까운 장신의 아나스타시오는 투핸드소드와 라운드실드를 장착하고 나왔다. 투핸드소드를 마치 글라디우스 다루듯 가뿐하게 휘두른다.

반면 바실은 바람의 화신이라고 불릴 만큼 빠른 몸놀림을 장기로 삼는다. 콧수염을 기른 강퍅한 인상의 사내로 날이 휜 세이버와 마름모꼴의 손목방패를 착용하고 있다. 세이버를 두 손으로 잡고 몰아치다가 때로는 한 손으로만 휘두르는데, 눈이 돌아갈 지경으로 변화가 무쌍하다. 환검이라고나 할까? 지금 조노량의 실력으로는 그의 허초와 실초를 구별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몸이 빠른 예니에프가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석적인 검투를 벌이는 아나스타시오스와 변칙적인 패턴을 보이는 바실. 그야말로 승부의 향방을 점칠 수 없었다.

결승에서 만나도 모자람이 없을 둘이 8강 첫 시합에서 격돌한 것이다.

비록 한 차례 검투를 펼치기는 했지만 충분히 쉰 덕분에 둘 모두 활력이 넘쳐 보였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과 바위 같은 굳건함이 엿보이는 대결.

조노량은 손에 땀을 쥐고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과연 이런 것이 초고수들의 무공이구나라는 감탄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오스의 거검에 실린 역도는 멀리서 봐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바실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나스타시오스의 투핸드소드에 비하면 가냘파 보일 정도의 세이버로 그 역도를 감당해 내고 있는 것이다. 두 검이 혹은 방패가 충돌할 때마다 시합장 전체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거의 반 시간을 끌던 승부의 향방이 가려진 것은 어이없는 실수였다. 조노량이 스피로스와의 검투 중에 기대했던 미끄러짐이 발생한 것이다. 유독 움직임이 많았던 바실의 발이 막 쌓이기 시작한 싸라기눈으로 인해 발생한 미세한 미끄러짐. 관중들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의 작은 미끄러짐이지만 조노량의 눈에도 확연하게 다가오는 느낌. 검을 맞대고 있는 아나스타시오스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가장 빠른 경로로 아나스타시오스의 방패가 비스듬히 날았다.

퍽!

충분한 기세가 실리지 않은 타격이지만 바실의 중심을 흐트러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어져 아나스타시오스의 투핸드소드가 날았고, 그에 실린 역도를 감당하기에는 바실의 자세가 좋지 않았다.

캉!

안 그래도 기울어진 바실의 자세가 무너지며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바람의 화신이라는 바실의 발이 묶인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투핸드소드의 막강한 연속기는 조노량의 가슴까지 답답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캉! 캉! 캉!

세이버가 부러져 나가고 바실의 방패가 조각났다.

바실의 두 손이 올라갔다. 승부가 결정된 것이다. 둘 모두 부상은 없었지만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검투사들끼리 전력을 다해 삼십 분 이상 접전을 벌였으니 지치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진행된 검투였지만 조노량에게는 촌음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출전자들은 약간 수준이 떨어지긴 했으나 그야말로 아주 작은 차이였다. 조노량의 눈에는 첫 번째 검투와 비견될 정도의 박진감이 느껴졌다.

시합이 치열하게 전개될 즈음 불행하게도 치명적인 부상이 발생했다.

아폴리온의 검에 왼손잡이인 스네티우스의 왼팔이 절단돼 버린 것이다. 스네티우스의 팔뚝 언저리에서 뿜어낸 것과 같은 피안개가 터져 나왔다. 조노량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평생을 단련했을 검사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소속은 달라도, 또 경쟁관계에 있다 해도, 검투사들은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이다. 가능하면 서로를 상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정 궤도에 오른 자들 간의 시합에서는 상대를 배려하기가 어렵다. 자칫 그로 인해 본인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매번 목숨을 걸고 검투장에서 만나다 보면 상대에 대한 적의나 복수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일부러 잔인해지는 경우도 많다. 다음번에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저런 이유로 검투장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 일은 다반사다.

스네티우스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명예로운 검투사로 은퇴하게 되었으니 여생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배려로 충분한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스네티우스 정도의 실력자라면 군의 교관 등 관련업계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내가 정리되고 쥬시아누스와 스마르의 검투가 이어졌다. 짜인 시나리오대로 시합이 전개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흉험한 수들이 오고갔지만 이미 크로아지크에서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기에 실제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와 스마르의 브로드소드가 굉음을 토해 내며 격돌하고 있었지만 서로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근육의 떨림과 신호로 무리 없이 시합이 진행되었다.

각본대로의 합이 이어졌기에 절묘한 동작들이 튀어나왔고 기가 막힌 방어가 이뤄졌다. 어찌 보면 실전보다 더 박진감이 넘칠 정도였다. 관전하던 시민들이 혀를 내두들 정도로 긴박감이 넘쳤다.

적당히 공수를 주고받다가 결국 쥬시아누스의 일격에 스마르의 검이 파괴되면서 결전이 마무리되었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 스마르가 오오라를 거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중 수용소장인 아드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로아지크 수용소를 총괄하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수용소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자. 수용소의 일은 대부분 부소장인 로뜨 쿠아클라가 전담해서 처리해왔기 때문에 포로들은 소장 아드리안의 코빼기도 보기 어려웠다.

그런 그가 검투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검투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이 지난날의 성세를 이어가고 있지는 못했지만 나름 강대한 검투단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부임 후 단 한 번도 시합을 참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귀여운 짓들을 하고 있군.”

아드리안이 조소를 담아 읊조렸다.

좌천되기 전에는 제1목민관인 로크리안과 비견되곤 했던 아드리안이다. 아도니아 최강의 무력이라는 로크리안과 쌍벽을 이루는 실력자이면서 한때 로크리안 대신 제1목민관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사내다.

때문에 쥬시아누스와 스마르의 허점투성이 검투는 아드리안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커트리안, 커트리안 자네답지 않아. 나를 그토록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예전의 커트리안은 어디로 간 건가? 집안의 쥐새끼조차 단속하지 못하는 얼간이가 된 것이냐?”

마지막 시합은 첫 시합인 아나스타시오스 전만큼이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스피로스와 크리소스의 대결이었다. 사적으로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막역한 친구로 알려져 있지만 검투장에서만큼은 필생의 호적수였다.

역대 전적은 3승 2패로 크리소스가 미세하게 앞서 있지만 매 검투마다 아슬아슬하게 승부의 향방이 갈렸기에 누구도 쉽사리 승리를 점칠 수 없었다. 베팅에서는 크리소스가 약간 우위에 있지만 단지 수치의 차이일 뿐이었다.

이번 검투로 크리소스의 우위가 확고해 지느냐 아니면 스피로스가 승부의 균형을 맞추며 리벤지에 성공하느냐가 판가름 날 것이다.

먼저 등장한 스피로스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서 관중석을 한 바퀴 돌며 호응을 이끌어 냈다. 제멋대로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동생 같은 성격이랄까? 호남형 얼굴에 친근감 어린 표정으로 관중들과도 격의 없이 소통하는 사내였다. 자연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반면 크리소스는 근육질의 몸매에 남자다운 선이 돋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키는 예니에프나 롤 정도? 헝클어진 갈색 곱슬머리를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떼가 탄 회색 천으로 대충 동여매고 있었다.

조노량이 보기에는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면도를 안 한 건지 혹은 기르는 건지 판단 내릴 수 없을 만큼 어정쩡한 길이로 돋아난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고, 입고 있는 적회색 가죽갑옷도 때가 타서 반질거릴 지경이다.

크리소스는 스피로스와 달리 조용히 등장해서 자신의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 관중들의 호응에도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검투가 시작되자 조용했던 크리소스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피로스와 직접적으로 검을 맞대본 조노량은 그가 얼마큼 강한 사내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크리소스는 처음부터 스피로스를 궁지에 몰아넣으며 검투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커트리안이 명명한 대로 끈적이 스피로스가 아니었다면 초반에 승부가 지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스피로스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특기가 없으면서도 아도니아 검투계 최강 사인방의 일원이 된 자였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아주 적절한 임기응변과 적응력으로 크리소스의 진공을 차분히 막아내고 있었다.

때문에 둘의 시합은 커트리안의 예상대로 지지부진하게 길어지고 있었다. 샤마노프와의 실전 훈련에서도 경험했듯이 비슷한 실력자 간의 싸움은 둘 모두의 체력을 급격히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단 한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았다간 그대로 승부가 날 수도 있는 상태였기에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킬 여가도 없었다.

공격의 주도권을 쥔 크리소스의 쉼 없는 공세를 스피로스가 조금씩 물러서며 막아내고 있었지만 조금만 흔들려도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크리소스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공세를 조금만 늦추어도 스피로스의 강력한 반격기가 튀어나오니 힘들어도 여세를 몰아가는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둘 모두 자잘한 상처가 늘어 갔지만 치명적이거나 전투에 지장을 받을 만한 공격은 철저히 피해 냈다.

그렇게 둘의 검투는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촘촘히 돌아가고 있었다.

무려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검투였지만 둘의 오오라는 아직까지도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강을 다투는 자들답다.

흔히들 검에 오오라를 실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면 소드마스터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검으로 스승(마스터)이 될 자격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경지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소드에 오오라를 싣는 경지에 이르렀다지만 오오라의 밀도나 유지 시간은 재능이나 수련 정도에 따라 모두 달랐다.

마나에 대한 자질이 부족하거나 이제 겨우 마나를 다루기 시작한 자들은 오오라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불과 몇 분을 버티지 못하기도 하고, 지금 검투를 벌이는 두 사내처럼 한 시간을 넘도록 오오라를 폭증시키기도 한다. 오오라를 끌어올리고 두 시간은 버틸 수 있다고 했던 롤의 말을 떠올려 보면 S클래스 삼인방의 경지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원에서 검기를 다루는 자들 역시 내공의 깊이에 따라 비슷한 형태로 표출되니, 결국 오오라는 검기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었다. 단지 검기가 보통 일렁이는 기운 형태로 무색을 띠거나 희뿌연 색을 갖는데 반해, 이곳의 오오라는 총천연색이라는 점이 신기할 뿐이었다.

당사자들에겐 숨 쉴 틈조차 없는 치열한 공방이지만 관전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재미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시오스의 투핸드소드처럼 폭음이 터져 나올 정도의 박진감을 주지도 않았고, 바실처럼 현란하고 절묘한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허참, 스피로스와 검투를 하면 누구든 저런 상황이 돼 버린다니까.”

예니에프가 혀를 찼다.

“디겨운 놈! 내가 뎐투 듕에 뎡신을 차린 거는 평섕 텨음이었댜. 아듀 딩그러운 놈!”

붕대 때문에 입도 제대로 못 벌리면서 롤이 혀 짧은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말과 함께 가슴을 치는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광전사 롤이 전투 중에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지루한 전투였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차라리 크리소스가 이겼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스피로스 놈이 올라오면 아주 피곤할 거 같아요.”

아무리 쥬시아누스라도 스피로스가 버티기로 나온다면 고전을 면키 힘들다. 더구나 스피로스의 반격기는 알면서도 당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바야흐로 검투는 모든 관중들의 하품을 이끌어내며 한 시간 반을 이어가고 있었다. 벌써 여러 차례 붙어본 당사자들이었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점도 검투가 길어지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다가 결승전은 횃불을 밝혀 놓고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낳았다.

그러던 차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거친 연격을 이어가던 크리소스의 오오라가 확연히 기운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막강한 오오라를 바탕으로 한 연계기가 장점인 크리소스의 약점이 의외로 오오라의 짧은 지속 시간임이 드러났다. 한 시간 반을 뿜어냈으니 절대 짧은 시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지금과 같은 장기전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요소였다. 어쩌면 오오라를 너무 강하게 집중시키는 것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때 스피로스의 반격기가 터져 나왔다.

절대 강자의 반열에 올라 있는 크리소스였기에 절묘하게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아니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퍼석!

푸헉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크리소스의 검이 유리 깨지듯 바스라지며 그때까지도 힘을 간직한 스피로스의 글라디우스가 크리소스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스피로스가 급히 검을 거두기는 했지만 오오라를 한껏 머금은 스피로스의 글라디우스는 이미 크리소스의 목덜미를 반 이상 가른 후였다.

크리소스의 심장이 뿜어낸 핏줄기가 대동맥을 벗어나 비산하며 자신의 강건함을 자랑했다.

절단면이 느린 속도로 벌어지며 고개가 왼쪽으로 떨어져 덜렁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굳어 있던 크리소스의 몸이 한 차례 출렁하더니 무너져 내렸다.

크리소스는 물론 스피로스도, 그리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아도니아 최고의 검투사로 삼 년 이상 군림했던 폭풍의 크리소스가 이토록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쓰러진 크리소스를 중심으로 피 웅덩이가 번져 갔고, 스피로스는 그 피 웅덩이를 피하지도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크리소스의 주검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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