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20화 (20/142)

20. 탈출 모의

최근 검투반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발길질이다. 조노량만의 전매품처럼 여겨져 오던 발길질이 이제는 전 검투반원들이 익히고자 하는 기술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만큼 발길질의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이오지처럼 어설피 사용했다가는 거꾸로 당하기 십상이다. 상대가 검을 휘두르는데 발을 들이민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검투반원은 발길질에 익숙지 못했다. 중심이 흐트러지기 일쑤니 효과적으로 사용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검이나 바디첵이 들어오면 거꾸로 나동그라지기 일쑤다.

발길질에 대한 연습 없이 뼈가 굳어진 자들이 새로 발길질을 익힌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단차기 정도의 동작은 크게 무리가 없었고, 그것만으로도 전투력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천박한 짓거리들을 하고 자빠졌네.”

그런 풍조에 대해 롤은 코웃음을 쳤지만 본인이 예니에프와의 연습에서 하단차기로 한 방을 먹인 후 멋쩍은 표정으로 웃어 보이기도 했다.

“제법 쓸 만한걸.”

쓰러진 상대를 모욕할 때나 사용하던 발차기가 일상적인 전투 기술로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풍조에 대해 스마르나 커트리안이 한마디 할만도 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는 것도 발차기가 빠르게 확산되는 데 일조했다. 아니, 언젠가 조노량을 쓰러트린 후 스마르가 간접적으로 던진 말은 있었다.

“어떤 기술을 쓰든지 알 바 아니다. 나를 눌러라. 그러면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탈출 사건이 있은 후로도 검투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클래스가 법이었고, 커트리안의 부드러운,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검투반을 지배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노량의 위상이 갓 들어온 신출내기에서 마지막 한 번의 우승을 남겨둔 최강그룹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A클래스지만 에크미어(시민궁 시합 자격자)인 커트리안이나 스마르는 예외로 하더라도 나머지 A클래스 중에선 최강자로 인정받았다.

제1시합에서의 몇 차례 우승으로 아도니아에서도 이미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변칙적인 공격과 발차기 덕에 ‘비열한 촌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별명은 검투반에서의 하이오지와 같은 별명이었다. 별명이야 어쨌든 간에 조노량은 아도니아 제1시합 출전자 중 시민궁 시합에 진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로 평가받았다. 이전 카카트로스의 명성을 압도할 정도였다.

상대는 역대 최약체라고 평가받는 결승 진출자다. 절묘한 대진운과 부전승이 빚어낸 결과다. 내기의 배당률도 형편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이전 카카트로스의 인기를 능가하는 조노량과 운 좋은 결승 진출자의 대결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상대의 전투 모습은 이전 카카트로스를 연상케 할 만큼 정석적이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글라디우스와 원형 방패의 조합. 공격은 형편없었다. 빠르지도 않고 그다지 위력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외로 완강하게 버틴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상대는 온몸을 철판으로 둘둘 감고 나왔다. 아무리 마나를 다룬다고 해도 그런 무게를 안고 전투를 벌인다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체력 소모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마나를 다루는 능력만큼은 인정해 줘야 했다. 벌써 삼십 분을 넘게 전투를 벌이면서도 아직까지 시퍼런 마나를 줄기줄기 뿜어 대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왼팔뚝에 걸려 있는 방패는 평균보다 작지만 전체가 쇠로 이루어졌다. 그 묵직한 방패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휘돌리는지 도무지 뚫릴 기세가 아니다. 오첩도에 기를 실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옅지만 은은한 푸른 마나막이 방패에까지 둘러져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나온 느낌이다. 가끔씩 기습적인 한 방을 날리기는 했지만 그다지 위력적이지도 않다.

관중들도 난리다. 벌써 삼십 분 넘게 이러고 있으니 지루하지 않을 턱이 없다. 이제는 적당히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이번 시합만 끝나면 에크미어의 자격을 얻는다. 커트리안의 요청대로 시민궁 시합에 참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퍽!

조노량의 하단차기가 상대의 종아리에 꽂혔다.

이미 두 번이나 우승한 조노량이다. 조노량의 상대들은 대부분 조노량의 기술을 파악하고 나왔다. 조지우스라는 이번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속도로는 조노량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차라리 방어에 더 주력하자는 목적으로 신체 주요 부위마다 쇠판을 덧대고 나온 것이다. 종아리에도 주물을 뜬 것이 분명한 가드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충격이 없을 수는 없다. 진기를 충분히 실어서 마음먹고 날린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특정 부위에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대신 무릎 아래가 전체적으로 충격을 받는다.

움찔하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한 조노량은 오첩도로 상대의 방패를 가격함과 동시에 다시 한 번 하단차기를 날렸다.

강철가드를 믿고 버티던 상대가 또 한 차례 움찔거린다. 피하거나 막기도 만만치 않다. 방패를 내리자니 오첩도의 날카로움이 두렵고, 피하자니 발이 느리다.

퍽! 퍽! 퍽!

조노량의 하단차기가 연속으로 들어간다. 이를 악물고 버티지만 점차로 충격이 누적된다.

진기를 잔뜩 응축한 조노량의 발이 얼얼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상대가 나동그라졌다.

다리를 절뚝거리면 일어나는 상대를 향해 다시 한 번 오첩도가 날았다.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에서도 절묘하게 막아내었지만 그 순간 다시 조노량의 발차기가 상대인 조지우스의 종아리 철판을 가격했다.

퍽!

이번엔 한 번에 나뒹군다.

조지우스는 격통도 격통이지만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았다지만 그도 결승에 오를 만큼 강한 전사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버텨 내고 있었다.

다시 한 차례 조노량의 발이 종아리로 날아들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고 있던 조지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조노량의 발을 향해 방패를 들이댔다.

깡!

발차기는 막아냈으나 오른손에 쥐고 있던 글라디우스가 날아갔다. 신경이 분산된 틈을 타 조노량의 오첩도가 조지우스의 글라디우스를 쳐내 버린 것이다.

조지우스는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날아가는 글라디우스를 바라보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노량의 검은 조지우스의 목덜미에 걸쳐져 있었다.

목소리 큰 자에 의해 우승 선언이 있었고, 트라쿠스로부터 트로피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시민궁 시합의 출전 자격을 얻었다.

조노량이 알고 있기로 다음 시민궁 시합은 보름 후였다. 조금 급한 감이 있지만 커트리안은 이번 우승 후 바로 시민궁 시합의 출전을 예고한 상태였다.

통곡의 계절을 한 달 앞둔 시점. 훈련장 한쪽 귀퉁이 양지바른 곳에 모인 인물들은 바로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커트리안을 중심으로 적당히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꼭 해바라기를 즐기는 노인네들과 다름없었다.

수준에 맞는 자들끼리 끼리끼리 모여 있는 모습으로 보였기에 감시병들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예니에프가 나른한 표정으로 한껏 기지개를 켠다.

“이번에는 가능하겠습니까?”

쥬시아누스가 해바라기씨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제1관에 머물게 된다는 가정하에 시민궁 시합이 끝나는 다음날 밤 두 시.”

커트리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검투반원들을 바라보았다.

“중심을 아래로 두라니까! 내가 시범을 보여줄까? 엉! 준비는 완료된 것이오?”

롤이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부리오티스를 거칠게 코치하다가 커트리안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커트리안이 특유의 미지근한 시선으로 롤을 바라보았다.

“운이 좋다면 이번에 가능할 것이오.”

“반드시 1관에 묵어야 한다……. 4강 안에 들어야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개인전뿐인데……. 그야말로 운이로군.”

“맞소.”

혼자 서서 훈련 중인 검투반원을 관리하고 있던 스마르가 뒤를 향해 나지막이 대답했다.

“하긴 4강 안에 들지 못하면 시합이 끝나는 대로 바로 귀환을 타야 하니 기회가 없겠지.”

입상, 즉 3위 안에 들면 하루의 휴식이 주어진다. 준우승일 경우 이틀, 우승을 하면 사흘간 아도니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롤이 수긍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아도니아를 벗어난 후가 될 거요. 충분한 갈리온이 준비될 예정이오만 전투가 불가피한 상황이 예상되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아도니아시다. 아도니아 연합의 중심도시인 곳이다.

아도니아의 핵심 군단들은 북부 곳곳에 흩어져 주둔 중이거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렇게 빠져나갔다지만 아도니아시와 그 주변에 주둔 중인 예비대만도 무려 세 개 군단이다. 세 개 군단이면 아홉 개 사단 일만 삼천오백 명이다. 그 병력을 피하거나 뚫고 탈출해야 하는 일이었다. 북부의 최강군단으로 불리는 아도니아 직할군단을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출 이후 과정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지만 그래도 확률은 반반이다.

그 절반의 확률에 가문의 역량을 절반 이상 투입했다. 가주는 재기냐, 몰락이냐를 두고 한바탕 모험을 건 것이다. 실패한다면 더글라스 가문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질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커트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재 시민궁 시합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자는 S클래스의 예니에프, 쥬시아누스, 롤과 A클래스의 커트리안, 스마르, 조노량으로 총 여섯 명이었다.

커트리안과 스마르는 자체 심사를 통과하지 않았기에 A클래스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누구도 그들을 S클래스 삼인방 아래로 보지 않았다. 단지 조노량의 경우만 실력 면에서 그들에 비해 조금 처지는 정도다.

“샤마노프나 부리오티스, 젝 등이 함께 못하는 것은 아쉬우나 어쩔 수 없는 일. 그들도 이해할 것이오.”

그 말에 스마르의 아미가 약간 찡그려졌다. 크로아지크의 핵심 멤버이며 자신의 조카인 젝을 두고 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제1시합 참가자까지 함께 탈출하게 될 상황을 대비해 B클래스에서 활동하던 젝을 A클래스로 옮긴 것이 헛된 일이 돼 버렸다.

애초에는 지난 번 조노량이 우승했던 아도니아 제1시합과 시민궁 시합이 함께 예정되어 있었기에 희망을 품었으나 어쩐 일인지 시기가 어긋나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젝이라면 크게 비중 있는 인물도 아니기에 탈출 후 몸값을 준비해서 빼낼 수 있는 일이니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또 1관에 머물게 되지 못한다면 어차피 다음으로 연기될 일.

“편하게 생각합시다. 차라리 소수로 움직이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예니에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쉬운 일이지만 자신들이 검투 일정이나 숙소 배정을 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칫 시간이 길어지면 아도니아에서 거사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 질 수 있다. 상황만 된다면 최대한 빨리 결행하는 것이 옳다. 이것저것 따질 게제가 아닌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스마르는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젝은 큰누이를 닮아서 집착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쏘아진 화살. 추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젝을 빼내겠다고 다짐하며 찜찜한 기분을 털어 내었다.

“그날 밤으로 준비된 루트를 통해 아도니아를 빠져 나간 후, 이틀간 달리면 폴리스 크루니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크루니아는 비록 아도니아 연합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중립을 표방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지. 그중에 게이트를 통제하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소.”

커트리안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언가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딜에 성공했기에 계획이 수립된 것일 터였다. 커트리안은 절대 어설픈 계획을 세울 자가 아니다. 탈출 루트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말이지만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다면 성공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이 노리앙을 향했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몇 차례 언질을 주기는 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이 알아야 할 일과 몰라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자다. 때문에 커트리안도 좀 더 위험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도니아 내부에서 탈주를 도와주는 세력과 계획에 대해서는 노리앙뿐만 아니라 S클래스의 삼인방조차 알 필요가 없다.

조 노리앙이라, 쓰세비니옹 지방의 냄새를 풍기는 이름이다.

흑발과 흑안. 불거진 광대뼈와 홍안(紅顔)의 피부색. 작은 키에 마른 체형. 체구만 봤을 때는 누구도 그 힘을 짐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징집병 출신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이번 탈출 과정에서 반드시 살아남길 바란다.

커트리안의 눈짓에 예니에프가 지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떴다. 쥬시아누스는 여전히 해바라기씨를 우물거리며 하품을 토해 놓는다.

일행은 일상적인 잡담을 늘어놓다가 헤어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흩어졌다.

통곡의 계절 입구에서 바람은 점점 스산해져 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조노량은 갑작스레 밀려든 찬바람에 냉큼 옷섶을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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