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감시자들(2)
어둠에 물든 크로아지크 황야. 짙은 회색빛 하늘은 곧 눈이라도 뿌릴 듯한 표정이었다. 하늘색에 물들어 버린 탓인가? 붉은 황야도 원래의 색을 잃고 회색빛 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회색 일색의 공간에 회색빛을 더하는 존재가 있었다. 크로아지크 승급심사에 나타났었고, 아도니아 제1시합에도 몸을 드러낸 바 있는 회색로브의 사내였다.
그는 마치 정물화처럼 일절 움직임도 없이 어둠에 물든 크로아지크 수용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 느껴지는 존재감도 희미하다. 이는 직접적으로 확인한 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분명 뉴클리우스가 틀림없는데, 지극히 평범할 뿐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퍼덕, 퍼덕
작게 중얼거리는 사내의 뒤로 거친 바람소리가 들렸다. 특정 위치에서 반복적인 운동에 의해 발생하는 바람소리였다. 당연히 자연에 의한 바람은 아니었다.
“잘 있었나?”
“…….”
“친구가 멀리서 왔으면 마땅히 반겨줄 일이지. 어찌 이리도 무심한 겐가? 수백 년이 지나도 무뚝뚝함은 여전하이? 개과천선할 생각이 없나?”
언젠가 그와 함께 트라쿠스의 첨탑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 박쥐날개였다.
“개과천선이라? 네놈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런데, 몰골이 많이 상했군?”
“빌어먹을! 말도 말게. 기형아 놈이 그 정도까지 성장했을 줄은 꿈도 못 꿨다네. 뒈지게 맞고 겨우 도망쳐 오는 길일세. 뭐,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혹시 자네 주인이나 그 떨거지…… 아, 미안! 미안하다니까! 잠깐, 잠깐”
회색로브 사내의 로브 자락에서 튀어나온 바스타드소드가 저 혼자 하늘을 날아 박쥐날개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났다가 되돌아왔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빠르기였다.
박쥐날개의 사내는 가까스로 검을 피하며 화려한 비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비행이 화려해도 꽁지에 검을 매달고 나는 바에야 모양이 좋아 보일 리가 없다.
“아, 이봐! 실수했다고. 이크! 안 그래도 지금 몸 상태가 엉망이란 말이네.”
그림자마저 끊어 내며 서너 차례를 도망친 후에야 검이 거두어졌다.
“하찮은 네 목숨을 취하는 일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진 않군.”
“그렇지? 그래, 잘 생각했네. 내 목숨 정도야 서까래 아래 웅크리고 있는 박쥐와 다를 바 없지 않나? 고맙다. 자네의 넓은 아량에 감사할 따름일세.”
“흥!”
박쥐날개 사내의 과장된 입담에 회색로브의 사내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박쥐날개의 사내, 퓨콤뜨리아리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때문이다. 푼수처럼 떠벌떠벌거려도 기실 마왕급에 준하는 존재다. 진정으로 그를 제압하려면 지금처럼 마법검이나 날려서는 불가능하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큰일일세. 그 기형아 놈이 생각보다 너무 컸어. 허투루 생각했다가 큰 코 다쳤단 말이지. 실컷 두들겨 맞고 겨우 마계로 도망쳤단 말이지. 그 때문에 좀 늦어졌다네. 어쩌면 좋지? 그놈 끌고 가는 것도 임무 중 하나였는데 말일세.”
얼음보다 차가운 피와 드높은 자존심으로 뭉쳐 있다는 퓨콤뜨리아리트! 사이렛, 실그리파, 크리산트, 로제르마, 시나토스, 렌토르, 토리도의 아버지이며 모든 뱀파이어의 시조인 자가 바로 그다. 잔인함의 대명사이자 피의 살육자로 통하며, 기생의 왕으로도 불리는 대악마로서 인간들에게는 마계 군주보다도 더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바로 저 퓨콤뜨리아리트다. 비록 실상은 광대나 푼수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그 전투력이나 잔혹함만큼은 진짜였다. 그런 자가 꼬리를 말고 도망쳐 왔다면 그 기형 존재의 강함은 생각 이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빙하의 기사로 불리는 회색로브 사내는 침중한 표정으로 퓨콤뜨리아리트를 응시했다. 이제야 착한 청중의 자세를 갖춘 빙하의 기사를 바라보며 퓨콤뜨리아리트는 좀 더 냉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지. 아, 이놈이 어떻게 느꼈는지 멀찌감치에서 나를 척 바라보는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존재감을 지우면 그렇게 쉽게 노출되지 않잖아? 내가 바로 뭇 생명체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밤의 신사다 이 말이지. 그런데 그놈이 날 알아보는 거야. 가슴이 철렁하지 않겠나? 그래도 임무가 있기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지. ‘이놈, 썩 나와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아 물론 나와는 있었지.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게 멋있잖아……?”
빙하의 기사가 한숨을 쉴 듯한 표정을 지으려 하자 퓨콤뜨리아리트는 그런 회색로브 사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놈은 콧방귀를 뀌는 거야. 이게 말이 돼? 응? 마흑의 어둠에서 태어난 기형 마물 따위가 이 퓨콤뜨리아리트의 위엄 서린 목소리를 듣고 콧방귀를 뀌다니? 내가 성격이 좋아서 한 번은 참아 줬지. 한낱 미천한 마물 따위와 실랑이를 벌일 수 없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였지. 흠, 나다운 처신이었지. 어쨌든 한 번만 참아 주고 다음에는 뜨거운 맛을 보여줄 생각이었네. 그래서 좀 더 위엄 있게, 마왕답게…….”
“언제부터 조무래기들이 마왕을 사칭할 수 있게 되었지?”
그 말에 퓨콤뜨리아리트의 창백한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우씨! 위대하신 벨제뷰트 님의 영광스런 군단장 중에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퓨콤뜨리아리트를 조무래기라고 부르다니? 이자를 그냥 확…… 자네니까 한 번 참지.”
“계속 참아야 할걸. 덤비는 조무래기를 용인할 만큼 좋은 성격이 아니다.”
퓨콤뜨리아리트는 좀 더 붉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신의 강아지 같으니라고.’
“군단장이면 마왕급 맞아! 그냥 그래. 그렇다니까! 이야기를 듣지 않을 셈인가? 그만할까?”
빙하의 기사의 표정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이 피식하고 헛웃음을 흘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보지 못할 퓨콤뜨리아리트가 아니었지만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엔젤나이트 나부랭이들과 시비를 붙어 봤자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놈, 껍데기를 발라 놓고 체액을 남김없이 빨아주기 전에 이 퓨콤뜨리아리트 님을 경배하지 못할까! 어? 잠깐, 잠깐! 자네 말고, 그놈한테 그랬다고! 아, 이거 왜 이러나? 그놈! 그놈에게 말이야! 휴……. 두 번째 경고를 날렸던 거지. 자네한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내가 어찌 오랜 친우에게 그런 험한 말을 하겠나?
아, 그랬더니 갑자기 하급 마물 몇 마리가 날아오르는 거야. 이 퓨콤뜨리아리트에게 하급 마물을 날리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서 어둠의 오오라를 조금 발산해 줬지. 그 정도만 해도 하급 마물 따위는 범을 보고 오줌을 지리는 강아지 새끼가 되어 버리거든. 근데 이 건방진 마물 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 퓨콤뜨리아리트 님을 물려고 덤비더란 말이지. 품위가 조금 손상되지만 어쩌겠나? 그냥 한 대씩 쥐어박아 줬지. 진짜 소멸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그놈들 중 일부가 소멸해 버린 건 절대 내 탓이 아니라고. 당연히 제 주제도 모르고 덤빈 탓 아닌가? 더 나쁜 건 그런 허약한 것들로 나를 공격하라고 시킨 그 기형아 탓이고 말이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좀 더 센 놈들이 덤벼들더란 말이지. 대체로 중급에 이른 놈들이었지. 그래 봐야 마물 아니겠나? 깡그리 버릇을 고쳐 놓았지. 처음엔 그랬어. 그런데 이게 한도 끝도 없더란 말이지. 슬슬 성질이 나지 않겠나? 그래서 아예 그 기형아 놈을 잡으려는데, 갑자기 센 놈들이 덤벼드는 거야. 앞뜰에 그 정도까지 성장한 마물들이 태어나다니, 거참 모를 일일세. 그 때문인지 앞뜰로 소풍 갔던 친구들이 잘 돌아오지 못했던 거였나 보군.
어쨌든 나로서도 좀 움직여야 할 놈들이더라고. 열 대를 때리면 한 대는 맞아 줘야 할 정도로 말일세. 그렇게 한창 지쳐 가는데 이 기형아 놈이 기습을 날리는 거야. 생각 외로 좀 벅차더군. 몇 대 때려 주긴 했는데, 그만 팔 하나가 달랑거리더란 말이지. 조금 있으니 발목도 조금 달랑거리고, 그리고 목도……. 그래서 일단 두고 도망쳐 왔지. 나 아니었으면 아마 그 자리에 뼈를 묻었을 걸?”
결론은 실컷 두들겨 맞고 도망쳐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걸 자랑스럽게 떠벌려 대고 있는 퓨콤뜨리아리트를 바라보며 빙하의 기사는 로브 아래로 머리를 깊숙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한심한 놈.’
“자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응? 그분께는 별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일세? 알고 보면 그 기형아 놈의 출신이 자네들 쪽 아닌가? 자네들 책임도 크다고. 응?”
저런 놈을 군단장에 앉혀 놓으니 마계의 군대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만 마계의 문에 존재하는 것은 신의 대리인들이었다. 아니 대리인이라고 믿었던 자들이다. 마계대전이 종식된 후, 지상에 남아 있는 마계의 잔존물들을 청소하겠다는 크나큰 사명을 띠고 마계의 문으로 원정에 나섰던 신관들과 전사들이 거꾸로 어둠에 물들어 버린 후 변형된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고 그런 정도의 하급 마물들이 몇 마리 늘어나는 정도였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마물들은 마계의 뜻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계의 문은 조금 특이한 양상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독립된 군단처럼 언젠가부터 마계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 이상한 지역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은 마계의 군주가 탄생할 때나 있을 법한 현상이었다. 물론 불가능하다. 지상에 구현된 마기만으로는 절대 마왕급 이상의 마물이 탄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마계의 일이니 자신들이 간섭할 문제는 아니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었고, 경계해야 할 상황인 것도 맞는 듯했다. 어쩌면 협정에서 제외될 가능성도 충분히 검토할 수 있었다. 마계의 문을 지배한다는 그 마물의 존재감이 이 정도까지 커졌다면 보고해야 마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결계가 약화되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아침 식사시간에 테무아의 석방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무척 심경이 복잡했다. 예정보다 늦게 석방되긴 했지만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과연 테무아가 약속을 지킬 것인가? 일반반원인 테무아(반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용소 내의 직책일 뿐이다)의 석방에도 상당히 거액이 소요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제법 잘나가는 검투사다. 만만치 않은 몸값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공 증진을 위해 옮겨 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검투반으로 온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한창 심난한 생각에 빠진 조노량의 허벅지를 향해 하이오지의 발이 날아들었다. 조노량은 무릎을 들어 막아내며 중심이 흐트러진 하이오지의 어깨를 목검으로 가볍게 내려쳤다.
의외로 무재가 보였다.
약삭빠르고 비열한 놈으로만 치부해 왔던 하이오지는 벌써 크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뒷골목 건달 생활을 하다가 징집되어 버린 하이오지였다. 대부분의 건달들이 그러하듯 별거 아닌 일로 체포된 후 감옥과 병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하이오지 역시 남들처럼 병영을 선택했다.
뒷골목 출신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쌓을 기회가 있었을 턱이 없다. 타고난 완력이나 서열 다툼이나 동네 패싸움을 통해 주먹구구식으로 배운 기술들을 마구잡이로 응용하는 것이 그들의 싸움법이다.
하이오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뒷골목에서 살아 왔던 자답게 약삭빠르고, 비열하고, 치사함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지만 그가 이 정도의 무재까지 갖추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검투반에 소속된 후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되자 그의 실력은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치 중원에서의 조노량 자신을 생각나게 할 만큼 뛰어난 반사 신경과 응용력이 돋보였다.
뻥
그렇다 해도 지금의 조노량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지금 하이오지는 조노량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의 조노량의 위상은 스마르 바로 아래로 취급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검투반으로 새로이 이송된 기사급 인물들이 여럿 있었지만 A클래스에서는 이제 스마르를 제외한 누구도 조노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물론 스마르는 아직까지도 조노량이 넘어설 수 없는 벽이다.
하이오지는 크리들과 함께 조노량에게 줄을 선 덕에 가끔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오늘도 그런 상황이었다. 비록 그의 무재가 생각 외로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조노량을 따라오려면 백 년도 모자랐다.
왜 하이오지가 조노량에게 줄을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노량으로서는 도통 하이오지에게 정을 줄 수가 없었다. 정이 안 가니 자연히 손끝이 매워지고 사정을 봐주게 되지도 않았다. 하이오지는 혹독하게 다뤄졌고, 그런 점이 오히려 빠른 성장을 보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신기한 점은 하이오지의 방어 능력이었다.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결정적인 한 방을 허용하지 않는다. 운인지 실력인지 급소만은 절묘하게 피해서 맞는 능력은 조노량조차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어쨌거나 조금만 더 두들겨 맞는다면 크리들을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 개 반의 부반장을 지낼 정도의 무력을 지닌 크리들을 넘어선다는 것은 검투반 내에서도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아이고, 사람 죽네.”
어깨를 부여잡고 떼구르르 구르고 있는 하이오지를 보며 조노량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마지막 발길질을 맞기까지 두 번이나 조노량의 공격을 회피하고 거꾸로 발을 날리기까지 했다. 물론 그 어설픈 발차기가 허점이 되어 일격을 허용하긴 했지만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놀라운 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