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탈주 소식
검투사들을 위한 아도니아 제4병원은 콤프치우스 광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시민검투장에서도 멀지 않아 부상당한 검투사들이 신속하게 이송될 수 있는 위치다. 검투장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부상자들은 들것을 통해 이곳 제4병원으로 이송된다. 굳이 마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오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검투사 전용 병원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외관만은 여타 건축물에 비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예쁘장하게 지어져 있다. 어떻게 보면 병원답지 않은 외관이다. 내외벽 모두 흰색의 석회석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예쁘장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병원이라는 인식을 주고 있었다.
제4병원의 곳곳에는 경무장한 경비병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거친 검투사들의 난동에 대비하는 의미도 있지만 크로아지크 검투사가 두 명이나 입원해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평소의 두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십여 명의 경비가 보충되었고, 기대장급 지휘관도 한 명 더 배치되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조노량이 꿈틀거렸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잔떨림을 안고 살짝 들어 올려졌다. 사흘 만에 보인 움직임이다. 그대로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처였기에 사흘 만에 깨어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샤마노프가 반색하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무척 반가우면서도 한편 의아해했던 현상. 그런 상처를 입었음에도 사흘 만에 깨어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이미 흐릿한 상처만 남기고 모두 아물어 버린 상처를 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
샤마노프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의문으로 무척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현상들이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샤마노프의 말에 옆 침상에서 미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카카트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자다가 깬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조노량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요?”
“제4병원입니다. 다행입니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내일 복귀하기로 결정되었거든요. 노리앙이 깨어나든 못 깨어나든 말입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조노량은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가 아프군.”
“안 아프면 비정상이겠죠. 다른 데는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카카트로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조노량의 침상을 향했다.
“대단하군. 트롤의 후예쯤 되나?”
자연스러운 반말이다. 전사는 검을 나눠 보아야 상대를 인정한다. 나름 친근감의 표현이었다.
“무슨 소리요? 당신은 누구지?”
“카카트로스 님입니다. 붕대 때문에 알아보기 힘드시겠지만.”
샤마노프가 끼어들어 소개해 주었다.
“자네 상처는 이미 다 아물었네. 보다시피 내 꼴은 아직 이 모양이고.”
조노량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자신의 생명을 거둘 뻔한 인물이지만 별다른 악의는 없었다. 그게 무사의 삶이니까. 중원의 무사든 이곳의 전사든 본질은 동일하다. 상대방이 반말을 하면 자신도 반말을 하면 된다. 그게 더 자연스럽다.
“내가 그런 건 아니야.”
카카트로스가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노량은 새삼 생각났다는 듯이 옆구리를 만져 보았다. 헐렁한 환자복 안으로 밋밋한 옆구리가 만져졌다. 통증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요?”
샤마노프를 향해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노리앙,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혹시 진짜 트롤의 후예쯤 되시는 겁니까?”
샤마노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리앙을 바라볼 때 카카트로스가 끼어들었다.
“대단한 신관이 하나 탄생했다더군. 자네는 운 좋게 그 친구의 치료를 받았고 말일세. 난 보다시피 그런 혜택을 보지 못했네.”
“음…….”
조노량의 시선이 카카트로스에게서 다시 샤마노프에게로 옮겨 갔다.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대신관에게 치료를 받는다 치더라도 저렇게 빠른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치료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고요. 이 상처를 보십시오. 이런 상처를 입고 살아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샤마노프는 조노량의 환자복을 훌러덩 뒤집어 카카트로스에게 보였다. 붕대조차 감겨 있지 않은 조노량의 옆구리에는 배꼽 바로 좌측부터 가느다란 상흔이 등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선은 아마도 침상 때문에 가려져 있는 등 쪽 척추 근처까지 이어져 있을 것이다.
샤마노프의 행동에 카카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조노량의 인상이 살풋 찡그려졌다.
“이 정도 상처를 입고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역시 트롤입니까?”
말을 마친 샤마노프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조노량을 내려다보았다.
조노량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샤마노프의 손을 쳐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몸을 일으킨 후 상태를 살펴보니 거의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조금 어지러운 것을 제외한다면 마치 푹 자고 일어난 듯 개운할 정도였다.
카카트로스의 부러운 눈빛을 무시한 조노량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운기를 해 봐야 알겠지만 들끓던 내기도 완벽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눈에 띄게 증가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쌰.”
조노량은 폴짝이며 제자리 뛰기를 해 보았다. 충만한 기가 자연스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천장을 뚫고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의 의술은 정말 믿기 힘들 정도군.”
“그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도무지…….”
“화장실 좀 가야겠소. 좀 무겁군.”
샤마노프의 안내를 받아 사라지는 조노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카트로스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저런 친구가 나타난 거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친구군.”
다시 붙는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결론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까지 큰 부상을 줄 정도의 기술이었다. 연습 때는 결단코 한 번도 발휘된 적이 없을 정도의 위력을 보였던 자신의 기예. 그런 기예로부터도 살아남은 자였다.
카카트로스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결코 피해 낼 수 없는 상황에서 보여준 상대의 회피 동작을 말이다. 당시 상대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가 상대방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대의 몸은 본능적인 회피 동작을 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본인이 가진 위력을 터무니없이 뛰어넘은 궁극기를 피해 낼 만큼 눈부신 동작이었다. 아니었다면 허리가 양단되었을 테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카카트로스는 누운 자세로 슬그머니 그 기술의 기수식을 취해 보았다.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상상 속에서는 기술을 펼치고 있었다. 가상의 적은 바로 저 믿을 수 없는 친구.
하지만 도무지 당시와 같은 위력을 재현해 낼 수가 없었다.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만약 안전하게 재현해 낼 수만 있다면 한 단계 이상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아니 장담하건대, 북부 전체에서 이 기술을 막아낼 수 있는 전사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이룰 수만 있다면…….
‘우연인가?’
아도니아 제1시합의 최강자, 아니, 이제 시민궁 검투사 자격을 획득한 카카트로스의 번민은 깊어만 갔다.
상처 핑계를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며칠은 더 쉴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조노량과 일행은 다음날 바로 수용소로 복귀했다. 무려 십여 일 만이었다. 총 열한 명이 출발하여 돌아온 인원은 아홉 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다지 어두운 얼굴들은 아니었다. 두 명의 사상자가 난 것은 아쉬운 일이나, 검투사의 운명이 원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잘 먹어서인지 모두들 살이 오른 티가 역력했다. 그런 분위기는 게이트를 넘으면서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조노량은 수용소에 복귀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용소는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였다. 무려 세 개 기대가 수용소를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었다. 검투반으로 복귀한 조노량은 크리들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사내가 수용소를 탈출한 것이다.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크로아지크 수용소에서 발생한 사상 열두 번째의 탈출 기도. 그 열두 번 중 탈출에 성공한 것은 단 한 건! 당연히 이번 탈출도 그저 시도에 그치는 것이 정상임에도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탈출이 일어난 날이 조노량 등이 아도니아를 향해 게이트를 넘은 바로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부터 따지더라도 무려 아흐레나 흘렀다는 이야기다.
크로아지크 황야를 걸어서 벗어나는 데 걸리는 기간이 대충 아흐레에서 열흘가량이다. 이미 아흐레나 흘렀는데도 붙잡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탈출자들이 탈출에 거의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놀라운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탈출은 한 건이 아니고 두 건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탈출은 두 명에 의해 이루어졌고, 두 번째 탈출은 첫 번째 탈출이 있은 바로 다음날 한 명에 의해 이뤄졌다. 수용소가 발칵 뒤집힌 이유 중 상당 부분이 이 두 번째 탈출 탓이었다.
첫 탈출이 일어난 후 삼엄해진 경비를 뚫고 다시 탈출이 이뤄진 것은 크로아지크 수용소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야말로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첫 탈출자가 생겼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경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당시 경비를 책임졌던 2개 기대장은 무척 억울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번째 탈출이 일어났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두 기대장은 물론 크로아지크 수용소 전체적으로 큰 처벌이 따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탈출을 시도한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크로아지크가 탈출이 불가능한 수용소라는 명성을 그냥 얻은 것은 아니었다. 경비도 경비지만 탈출 후 크로아지크 황야를 벗어나는 일이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도 없고,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갈리온 기대를 따돌리고 열흘을 달릴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 현재의 조노량으로서도 무리였다. 그게 가능했다면 크로아지크 검투반이 탈출을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탈출자들의 이름을 들은 조노량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서로 말을 놓기 시작한 크리들이 말했다.
“4반하고 5반이네.”
어리둥절한 얼굴로 크리들을 바라보던 조노량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
“하나는 티프고, 다른 하나는 루드라더군. 잘 아는가?”
잘 알지. 잘 알고말고.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작년 가을까지 자신과 같은 소조였던 친구가 바로 루드다. 늘 자신을 챙겨 주던 병약한 친구.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착한 친구다.
“루드라는 친구가 티프와 함께 탈출했다고 하더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군. 왜 티프가 루드라는 친구를 데리고 탈출했을까? 그 친구가 그렇게 대단한 친구였나?”
“티프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네. 5반의 부반장이 왜 4반의 일반 반원을 데리고 탈출했을까? 5반원들도 많은데 말이지. 아 참, 두 번째도 4반이네.”
“또 4반?”
“크크, 그 친구 일 낼 줄 알았지. 허글러네.”
“허글러?”
조노량의 눈이 크게 떠졌다. 두 번째 탈출자 역시 4반에서 나왔다. 그것도 첫 번째 탈출자들이 생기고 경비가 강화된 와중에 두 번째 탈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첫 번째 탈출자와 뭔가 교류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자도 있었지만, 뭐 때문에 두 번에 나눠서 탈출하겠는가 라는 반박도 있었다. 결과가 증명하듯 탈출자가 생기면 경비가 더욱 삼엄해 질 것이 뻔한데 말이다.
최근 수용소의 화제는 오직 이 탈출 사건 하나였다. 탈출 날짜를 체크해가며 내기를 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이만한 내기거리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내기의 향방은 대체로 탈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탈출 쪽에 걸었던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챙길 가능성이 높아졌다. 탈출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 ☆ ☆
결론적으로 그들은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느새 그들이 탈출한 지 스무날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만일 잡았다면 출동했던 추격조가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추격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이 더 지나서야 추격에 나섰던 두 개 기대 중 인크레디안 기대가 돌아왔다. 탈출자의 목을 창대에 높이 걸고 당당히 입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돌아온 인크레디안 기대의 꼬락서니가 형편없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추레한 패잔병의 몰골로 돌아온 인원이 겨우 칠십여 명, 기대장인 인크레디안은 물론 절반에 이르는 기대원이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날 도착한 두 번째 기대는 그래도 조금 나은 형편이었다. 후줄근한 몰골이나 부상병이 다수 포함된 모습은 비슷했지만 그나마 인원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포로들 사이에서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무성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가장 공감을 얻은 소문은 출동했던 기대가 대규모 켈커티스군과 조우하는 바람에 그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특히 일부 5반원들 사이에서는- 탈주자들에게 당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피력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은 곧 일축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소식이 수용소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경비병들이 쉬쉬했지만 비밀은 새기 마련이다. 어떤 입 가벼운 병사의 입에서 나온 소식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소문이 거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는 포로들의 질문에 대부분의 감독관이나 병사들은 부정을 하는 대신 버럭 화를 내거나 질문한 포로를 작신 두들겨 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이어 새어 나온 정보는 5반원들 사이에서 미미하게 돌았던 그 터무니없는 소문이 진실에 가장 가까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첫 번째 탈주자들을 추격했던 인크레디안 기대에게 전술상으로는 전멸로 여겨질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바로 첫 번째 탈주자들이었다.
모두들 터무니없는 소문으로 치부할 만큼 현실성이 결여된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단 두 명의 탈주자가 백오십여 명으로 구성된 북국의 정예기대를 그 지경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해서 그 둘이 검투반이 아닌 일반 작업반이었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이미 알고 있듯이 검투반에는 기사나 종사급 포로들이 다수 포진해 있지만 일반반은 대부분 병사급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티프가 5반의 부반장이기는 하지만 전투력 면에서는 검투반의 B클래스에나 겨우 미칠 만한 실력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머지 하나는 지극히 평범한 일반반원이었고 말이다.
두 번째 탈주자인 허글러를 추격했던 기대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출동했던 기대만큼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결국 생포하거나 주살하지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피해만 입었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기사와 종사가 포함된 일 개 기대가 단 한 명을 잡지 못하고 피해만 입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으려 할까?
두 건의 각기 다른 탈출 사건의 주인공들이 그 정도로 대단한 자였는가를 되돌아볼 때 대다수의 포로들은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검투반의 S클래스에 속하는 인물이 탈주했다고 하더라도 일 개 기대를 온전히 감당해 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기대장만 하더라도 충분히 A클래스에 속할 만한 실력일 터이고, 그에 준하는 수 명의 종사들이 배치된다. 더구나 일반병사들도 넘치도록 훈련 받은 북국의 최정예병이다. 아무리 S클래스의 인물이라고 하더라고 상대가 기대 단위라고 하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쨌든 추격에 나섰던 두 개 기대가 복귀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내기에 이긴 포로들은 내기에 걸렸던 반대급부를 생각하며 은밀히 웃음을 감췄고, 내기에 진 포로들도 내기 결과에 관계없이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검투반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진중한 편인 커트리안이나 스마르, 쥬시아누스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B클래스나 C클래스의 인원들은 대부분 함빡 웃음을 머금고 다녔다. 이번 일을 계기로 탈출 시나리오를 그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꿈이라도 꿔 볼 여지가 생긴 것이다. B, C클래스원들이야 그렇다 쳐도 S클래스의 롤이나 예니에프까지 노골적인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샤마노프의 핀잔을 들을 지경이었다. 평소에 속을 알 수 없는 샤마노프 본인도 입꼬리에 꿈틀거리는 미소를 매달고선 말이다.
그러나 조노량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보다 그 주역이 루드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루드라니?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전혀 그럴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몸은 적응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수용소 체제에 더없이 적응해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지난 봄 이후에는 4반 최고 일꾼이라고 불려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몇 없을 정도로 몸마저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너무 건강해진 탓? 이유가 되지 않는다. 건강하다고 탈출을 꿈꾼다면 수용소 인원의 삼분의 일은 벌써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다.
아침 식당에서 가끔 맞닥트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좀 더 건강해지고, 좀 더 쾌활해졌……. 아니, 뭔가 달라지긴 했던 것 같다. 입과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웃고 있었으나 눈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분명 이전에 알고 있던 그 눈빛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음침하다고 해야 할까?
탈출 소식으로 술렁거렸던 수용소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욱 엄격해진 규정과 통제, 그리고 처벌들이 수용소 전체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적당히 넘어갈 실수들도 극단적인 처벌로 이어졌고, 독방은 언제나 손님으로 들끓었다. 특히 배급량의 감소는 포로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 여파가 검투반에까지 이어졌을 정도다. 크로아지크 황야를 건너기 위해서는 물과 식량이 필수였고, 배급량에 그만큼 여유가 있으니 탈주를 위한 식량을 모았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맞이했다.
흐린 날보다 청명한 날이 많은 가을이었지만, 포로들의 기억엔 회색빛 무거운 날씨로 기억되었다.
그 와중에 쥬시아누스와 롤, 예니에프 그리고 A클래스지만 에크미어인 커트리안, 스마르가 오랜만에 시민궁 단체전에서 준우승을 하는 쾌거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그나마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최근 삼 년간 중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조노량이 놀란 것은 롤이 카카트로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가볍게 승리했다는 사실이었다. 카카트로스의 궁극기를 직접 겪어 본 경험이 있는 조노량으로서는 카카트로스가 그다지 밀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싱겁게 롤의 승리로 마감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모두들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데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S클래스라는 벽이 그렇게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 시기에 조노량은 처음으로 커트리안의 부름을 받았다. 건장한 체구와 과묵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커트리안은 조노량에게 다음 제1시합에서 우승을 주문했다. 다음 대회까지 우승하면 연속 세 번 우승으로 시민궁 시합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커트리안은 겨울에 있을 시민궁 시합에 조노량이 출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더불어 샤마노프에 대해 묻자 커트리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샤마노프? 열심히 하면 S클래스는 무리더라도 시민궁 시합의 출전 자격까지는 획득할 수 있다. 그 후엔? 우린 시민궁 시합에서도 승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커트리안은 샤마노프에 대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브리오티스에 대한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의 발전은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요구 자체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지만 조노량은 자신이 있었다. 최근 들어 부쩍 증가한 내공 덕분이다. 거의 반 갑자? 고수가 살펴봐 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짐작만으로도 반 갑자가 넘으면 넘지 모자라지는 않을 듯한 내공량이다. 쌓이지 않는 내공 때문에 명확한 한계를 겪어 본 조노량으로선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샤마노프조차 조노량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속도 면에서 그에 못 미치는 브리오티스 등은 조노량을 상대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S클래스인 롤에게도 마주 버틸 수 있었다. 물론 훈련용의 정형화된 시합이긴 했지만 말이다. 제대로 붙었다면? 아마 카카트로스 꼴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전사인 롤과 이웃집 아저씨인 롤은 분명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니에프가 단숨에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조노량은 단 몇 합 만에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 이후 조노량의 훈련 상대가 샤마노프에서 예니에프로 변경되었다.
“키킥, 우승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게 목적일 것 같아? 그냥 지켜보자고. 대장의 꿍꿍이속을 말이지. 아마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야. 나도 기대하고 있다고.”
훈련 중 왜 그렇게 우승에 집착하느냐는 질문에 예니에프는 장난기 섞인 응답으로 조노량의 궁금증만 증폭시켜 놓았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검투사가 우승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목표로 훈련을 합니까?”
당분간은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