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감시자들(1)
해가 진 지 오래지 않았으나 그믐인 탓에 한 치 앞도 구별 못할 정도로 어두웠다. 콤프치우스 광장 정면에 위치한 높다란 석조건물은 그래도 조금 밝은 편. 충분하지는 않지만 곳곳에 밝혀진 횃불과 몇 개의 석등이 어둠을 물리고 있었다. 광장을 둘러싼 대부분의 건물이 높고 컸지만 이 석조건물은 그에 비해서도 월등히 크고 높았다. 이곳이 바로 제3목민관 트라쿠스의 관저이자 사저이다. 이런 종류의 건물이 대부분 그렇듯이 트라쿠스의 관저에도 몇 개의 첨탑이 존재한다. 방어를 목적으로 지은 성도 아니건만 관행상 첨탑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장 가혹한 전쟁들을 치른 북부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강력한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시가전을 펼쳤던 것이 이백 년도 지난 일이란 것을 감안하면 분명 오버였다. 과연 현존하는 북부 최강의 도시 아도니아, 그 가장 중심에 위치한 광장에서 다시 시가전이 벌어질 일이 있을까?
그러나 최근 새로 짓는 건물마다 예외 없이 첨탑을 설치하는 것을 보면 관행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첨탑이 빠지면 왠지 건물 전체가 맥 빠져 보인다는 아도니아인의 의식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고.
그나마 빛이 존재하는 하단부와 달리 첨탑 부분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단 하나, 트라쿠스의 개인 사저에 해당하는 중심부 첨탑을 제외하곤 말이다.
다른 첨탑과 달리 이 첨탑에는 작은 창이 하나 뚫려 있을 뿐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마법사나 궁수들이 사격할 만한 창이 여럿 뚫려 있지 않다는 의미는 이 첨탑이 방어용이 아님을 증명한다.
지금 그 작은 창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 일로 우리의 의지가 프리온가에게 적절히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의외일 겁니다. 트라쿠스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프리온가를 적대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테니까 말이죠.”
“그나저나 프리온가에서 바로 반응을 보이긴 힘들겠지?”
“아무래도 치프만가의 눈치를 봐야 할 테니, 보름 이상은 우리 쪽의 반응을 살피기만 할 겁니다. 성급히 움직여 준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일이고요. 그보다는 제1목민관 로크리안의 귀환이 더 빠를 듯합니다.”
“로크리안이라……. 그가 과연 우리 쪽 손을 들어 줄까? 역시 껄끄러워.”
트라쿠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이 년째 전장을 누비느라 단 한 번도 아도니아에 입성하지 않았던 로크리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같은 임기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천생 무인인 로크리안과, 무인이라기보다는 직업 정치인에 가까운 자신은 생각하는 방식도 다를뿐더러 기본적으로 출신 자체가 달랐다.
로크리안은 상인의 집안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글라디우스 한 자루로 제1목민관의 지위까지 올라선 전사였고, 자신은 수백 년간 아도니아를 지배해 온 유력 가문인 트라쿠스가의 장남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기회도 없었고, 쌓을 필요성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아도니아 전체 시민의 절반 이상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목민관에 당선될 당시만 해도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최근 이 년간의 전쟁 결과는 그의 인기를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가장 최근의 패전은 빼고 말이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귀환한다고 통지해 온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귀환 이유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질도 없이 그냥 귀환하겠다는 짧은 전통이 다였다. 형식적으로나마 원로원의 허가를 구하고 귀환하는 것이 순서였는데도 말이다.
트라쿠스는 다시 한 번 얼굴을 찌푸렸다. 제1목민관 로크리안의 성격이 워낙 제멋대로인지라 어디로 튈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귀환해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면 자칫 그 동안의 계획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다분했다.
“사이트리온 님께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요.”
“그렇겠지? 안 그러면 곤란해. 어쨌든 개선 행진을 준비해 둬야겠지?”
“그렇긴 한데, 시기가 참 묘하군요. 최근 이례 없이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러고서 개선이라니…….”
트라쿠스의 정면에 앉아 있는 중년의 학자풍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3목민관저의 중앙첨탑은 트라쿠스의 개인 공간으로서 중요한 모임 등에나 쓰이는 특별한 장소였다. 사이런스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은 물론, 공간적 구조 자체가 누구도 엿듣기 힘든 구조였기에 비밀 모임을 가지기에는 더없이 적합했다. 그런 장소에서 트라쿠스와 독대하고 있는 학자풍의 중년인 역시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도 이해할 수가 없구먼. 무골이긴 하지만 그렇게 미련한 자는 아닌데.”
“뭐, 대책이 있으시겠지요. 그나저나 이번 검투시합에서는 좀 건지셨습니까?”
“아, 뭐……. 많지는 않지만 쓸 만한 친구를 몇 명 접촉해 놓았지. 그런데 아쉽게 된 자가 하나 있어.”
“아쉽다니요?”
“자네도 알 것 같은데……. 혹시 노리앙이라는 자를 아는가?”
“글쎄요?”
“이번에 결승에 올랐던 자지.”
“아! 크로아지크의?”
“맞네. 정말 아까운 자였지. 지켜볼 만한 친구였는데, 그만 카카트로스에게 당했어. 아마도 회복하기 힘들 거야.”
트라쿠스는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대단했지. 카카트로스가 쩔쩔맸으니까. 참 자네, 투명오오라를 아는가?”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엔젤나이트인…… 헉?”
“맞네. 위력은 좀 떨어지지만 분명 투명오오라였네. 투명오오라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도 처음 알았지 뭔가.”
“음…….”
“알아보니, 켈커티스의 유력 가문 출신도 아니고, 일반병사였던 모양일세.”
“일반병사가?”
“놀라운 일이지. 부소장 로뜨 말로는 일반포로에서 검투반으로 옮긴 지 불과 몇 달 만에 그 정도 실력을 쌓았다더군. 기사나 종사 출신도 아니고 일반병사가 단시일에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니, 정말 놀랄 일이지 않은가?”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하지. 더구나 투명오오라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더군. 그래도 사실인 걸 어떡하나?”
“정말 아쉽게 되었군요. 진작 발견했다면 적당한 회유로 충분히 포섭했을 텐데 말입니다. 전력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고요.”
“살아난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시민궁 시합에 밀어 넣어 보면 옥석이 가려질 테니 그때 손써도 늦지 않아. 포로들에 대한 관할권도 내게 있고, 또 모든 시합의 주관자도 나니까. 뭐,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고.”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 트라쿠스가 정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피오레 자네 이번에 5서클을 마스터했다던데, 정말인가?”
“모두 트라쿠스 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축하하네, 축하해. 정말 대단하이. 그럼 이제 6서클의 마법사로군, 그래?”
“부끄럽습니다.”
“하하,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지 않은가? 우리 계파에도 날개가 달렸어.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하네.”
둘의 대화가 점차 한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지. 아직 주변이 복잡해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북국의 도시 중 경비가 가장 철통같은 아도니아시, 그중에서도 중심지인 목민관 관저의 가장 은밀한 장소인 중앙첨탑 꼭대기에 걸터앉아, 목민관과 6서클의 마법사 피오레의 대화를 태연히 엿듣고 있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는 중앙첨탑의 지붕은 사람이 앉아 있기에는 지나치게 가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건장한 사내는 너무도 편안한 모습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단순한 행정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행정관 출신인 트라쿠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6서클의 마법사인 피오레의 이목을 속이고 대화를 엿듣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영구적으로 걸려 있는 사일런스 마법은 폼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는 지붕은커녕 창틀도 넘지 못해야 정상이다.
편안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회색로브 사내의 표정은 무척 고민스러워 보였다.
인간으로서 절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과도한 신성력을 쏟아 부어 테스트한 결과, 그가 목표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테스트해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결코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크크, 무엇을 고민하는 게냐? 기사여.”
중앙첨탑의 지붕 위,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울린 음산한 목소리에도 회색로브의 사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네놈 따위가 무슨 볼일이지? 말살당하고 싶은가?”
그 말에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박쥐였다. 아니 박쥐치고는 너무 컸다. 놀랍게도 그것은 박쥐의 날개를 단 음침한 인상의 사내였다. 박쥐날개 사내는 회색로브의 한마디에 음침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렇게 험악한 말을 하다니, 너무 무정하지 않은가?”
“누가 친구란 말이냐?”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 대화를 나눠 보세. 어차피 우리에게는 공통의 주제가 있지 않은가?”
“네놈 따위와 공통의 주제가 있을 리 없다. 사라져라. 말살당하고 싶지 않다면!”
“협정을 잊었는가?”
“네놈 하나 죽인다고 협정이 깨질 것 같은가?”
“빡빡하긴! ……그래, 내가 졌다. 어쨌거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고 그대에게 손해가 나지는 않을 게야. 응, 조금만?”
잠시 화를 내려던 박쥐날개가 금방 얼굴을 풀고 회색로브의 사내를 달랬다.
“흥.”
“자네 주인도 그 일 때문에 자네를 보낸 것 아닌가? 사실 나의 군주도 마찬가지라네. 서로 조금씩만 돕자는데, 뭐, 나쁠 것 없지 않은가? 목표가 같잖아, 헤헤.”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 보게! 내가 방해를 하면 자네도 힘들지 않은가? 내 방해하지 않음세. 아니 오히려 돕겠다네. 응, 응? 도움이 될 게야. 자네도 내 능력을 잘 알 텐데? 자네가 길게 얘기하는 걸 싫어하니 짧게 말함세. 자네나 나나 그가 그 분인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 이제 확인까지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응? 어쩔 거냐고? 자네 주인은 어쩌라고 이야기 해 주었나? 뭘 어째야지 방해를 하든 돕든 하지 않겠나? 뭘 어쩔 건데? 응? 자넨 결정을 내렸나? 천만에 자네도, 그리고 자네 주인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 했을걸? 물론 나도, 나의 주인도 마찬가지지. 멸살? 위험 부담이 너무너무 크지. 그럼 계속 보호해? 언제까지? 몇 백 년, 몇 천 년? 그 분이 각성할 때까지? 가능한 일일까? 그 후에는? 자, 상의를 해 보자고. 어떻게 하면 좋겠나?”
전혀 짧지 않은 말이었다.
“시끄러운 놈.”
“그래, 그래, 내가 좀 시끄러운 편이지. 그건 친구들이 다 아는 일이니 새삼 자네가 내 비밀을 누설했다고 항의하진 않겠네. 내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 주지. 각설하고, 어차피 결론이 없는 일이네. 친구, 그냥 지켜보는 것 말고 또 무슨 수가 있겠나? 결정은? 그야 주인들이 내려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켜보다가 뭔가 변화가 있으면 보고하는 일이 다일 걸? 안 그런가? 헤헤.”
“고작 결론이 그냥 지켜보자는 것인가?”
회색로브 사내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박쥐날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박쥐날개는 정색을 하며 항의했다.
“아니, 그럼? 기사 나부랭이는 뭔가 대책이 있다는 말인가? 있으면 제발 나에게도 말해 주게. 응? 뭘 원하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주게. 내 힘닿는 데까지 들어주겠네. 기브 앤 테이크! 좋잖아? 응?”
“당분간은 지켜봐야겠지.”
그 말에 박쥐날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 나쁜 놈……. 놀리는 거냐?”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갔지 전혀 올라갈 것 같지 않던 회색로브 사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피식.’
“그래 좋다. 당분간 지켜보자. ……우씨, 내 말이 그 말이었다고!”
버럭 화를 내려던 박쥐날개가 겨우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자네 의견이라고 해 두지. 어쨌든 자네에게 작은 부탁이 있네. 그에게 뭔가 변화가 생기면 나에게도 연락해 주면 아주, 아주 고맙겠어. 내 당분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뭐냐고? 아, 별건 아니고, 북쪽에 기형아 놈이 하나 있지 않나? 그놈 힘이 너무 세졌어. 통제도 안 되고 말일세. 이걸 어떻게 해야겠는데, 가서 간이나 한번 보려고 말이야. 응, 도와줄 거지? 내 부탁함세. 자네 소원을 하나 생각해 두게. 내 갔다 와서 들어줌세. 당분간 그에게 뭔가 변화가 있을 거 같지도 않으니, 자네에게 손해가 가는 장사도 아니잖은가? 그치? 응? 그치? 내 후딱 다녀옴세에-.”
박쥐날개는 혼자서 잔뜩 떠들더니 회색로브 사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순식간에 파닥거리며 하늘 높이 떠올라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끝말은 회색로브 사내의 귓가로 또렷이 전달되었다. 음산하게 등장했던 처음과 달리 유난히 경박스러운 퇴장이었다.
하지만 첨탑 내부에서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트라쿠스와 피오레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