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6화 (16/142)

16. 신관 제우스

대지의 여신 로리안의 하급신관 제우스는 지금 막 실려 온 두 사내의 상태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막 치료를 마쳤는데, 또 다시 두 사람이나 실려 온 것이다.

알량한 신성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저 두 사람 대신 차라리 자신이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신 아디의 상급신관인 지르코를 비롯해 서너 명의 보조신관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지르코 본인도 무척 지친 상태일 것은 자명했으나, 그래도 신성력이 높기로 이름 난 주신의 사제였으므로 어느 정도 여유는 있으리라. 더구나 소일리언의 응급처치를 마친 후 하급신관들에게 임무를 넘기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한 지르코였기에 어느 정도 회복도 되어 있을 터였다.

제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의사와 신관들 틈에 끼어들었다.

한 명은 그 유명한 카카트로스였다. 조금 전 시합이 아도니아 제1시합의 결승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심 별 탈 없이 끝나거나 혹은 신관으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이지만 둘 중 한 사람의 죽음으로-보나마나 카카트로스의 상대방이겠지만- 끝나기를 기대했었는데, 신관들로서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제우스는 한숨을 쉬는 와중에도 카카트로스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내를 돌아보았다. 이름도 못 들어본 작은 사내다. 도저히 아도니아 제1시합의 결승전에 오른 자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저런 사내가 무적의 챔피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부를 떠나 카카트로스에게 이 정도 부상을 입힌 자는 없었다.

사내는 덩치도 작을뿐더러 외모도 상당히 특이하다. 삐쩍 마른 체형에 어깨도 좁고 허리도 가늘다. 외모만으로는 강한 전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저 친구, 어떻게 카카트로스 님을 이 지경까지 만든 거지?”

폭력과 파괴의 신 에쿠제의 일반신관인 주한도 같은 의문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니, 제우스 본인이나 주한은 물론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도니아 제1시합의 절대 챔피언 카카트로스와 이름도 잘 모르는 신참 검투사, 게다가 덩치마저 자라다 만 것 같은 왜소한 사내를 비교해 본다면 당연한 결론이다.

“그게 아니랍니다, 형제. 카카트로스 님이 새로 개발하신 큰 기술을 쓰다가 스스로 입은 상처라더군요.”

둘을 메고 온 병사들에게 들은 말일 터였다.

“카카트로스 님이 너무 자만하셨나 보군. 애송이를 상대하며 큰 기술을 시험하시다니.”

“시험하기에는 너무 무식한 기술인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형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군요. 깨어난다고 해도 한동안은 검투를 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의사가 카카트로스의 옷을 작은 가위로 제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몇몇 신관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다른 의사가 작은 사내의 옷을 제거하고 있었다.

작은 사내의 옷이 먼저 제거되었다. 갑옷을 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카카트로스를 상대하며 갑옷조차 착용하지 않다니, 죽기를 각오한 것인가?

사내의 상태는 얼핏 봐도 살기는 틀렸다. 카카트로스는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었지만 모두 피륙에 입은 상처였던 데 반해, 사내는 서너 군데 외에는 상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가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은 상처의 깊이 때문이다. 가장 큰 상처인 옆구리만 해도 일반인이라면 벌써 절명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실려 올 때부터 병사 하나가 그의 내장을 따로 받치고 들어와야 했을 정도다. 침상은 그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이미 흥건했다. 이제는 더 이상 흘릴 피도 없는지 쿨럭거리며 쏟아지던 피도 거의 멎은 상태였다.

의사가 흘러나온 내장을 억지로 밀어 넣고 꿰매기 시작했다. 상당히 끔찍한 광경이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 땀, 한 땀 봉제를 해 가고 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가죽구두라도 꿰매는 모습이다. 하긴 검투장에 배속된 의사나 신관들은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도 수시로 접하다 보니 웬만한 상처에는 무감각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 사이에 카카트로스의 옷이 모두 제거되어 봉합에 들어갔다. 작은 사내와 달리 상처가 너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카카트로스가 흘린 피의 양도 엄청났다. 비교적 검은 편이었던 카카트로스의 혈색이 하얗게 탈색되어 보일 지경이다.

봉합용 굵은 바늘이 미끄러지듯 상처를 누비고 있었지만 두 사내 모두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하긴 바늘 따위에 통증을 느끼고 깨어난다면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그만큼 부상의 정도가 가볍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작은 사내의 봉합이 끝나가자 지르코가 명령했다.

“주한 형제, 제우스 형제. 형제들은 저 친구를 좀 돌봐 주시오.”

짐작했던 바다. 일반신관임에도 불구하고 치료 쪽 권능이 떨어지는 주한과 하급신관인 제우스에게 작은 사내의 치료를 맡기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작은 사내는 치료를 하더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공감대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카카트로스가 그만큼 비중 있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주한과 제우스가 사내에게 배치됨으로써 자동으로 카카트로스에게는 상급신관인 지르코를 비롯한 네 명의 신관이 배치되었다.

성격이 괄괄한 편인 주한이지만 지르코의 명에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는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릴 뿐이었다.

봉합을 끝낸 의사가 바늘을 들고 한 걸음 물러서며 주한과 제우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끝났다는 의사 표시다.

“내가 성수를 바르지. 형제가 먼저 힘 좀 쓰시게.”

주한은 제우스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한은 하급신관인 제우스에 비해서도 치료권능이 떨어졌다. 치료권능이 떨어지는 것은 주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시는 신의 특성 탓인지 에쿠제의 신관들은 대부분 치료 쪽에는 소질이 없다. 제우스는 에쿠제의 신관이 왜 검투장에 배치되는지 늘 의문이었다. 검투장에 배치된 수많은 신관 중에 에쿠제의 신관은 주한이 유일했다.

반면 대지의 여신을 모시는 제우스는 하급신관이지만 치료 쪽 권능만으로는 거의 일반신관에 버금갈 만큼 뛰어났다. 지르코가 주한과 제우스를 사내에게 배치했을 때, 이미 암묵적으로 치료의 주관을 제우스에게 맡긴 셈이다.

제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안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일이었다.

주한은 짧게 기도를 마친 후 작은 병에 든 성수를 철퍽거리며 빠르게 발랐다. 치료 쪽 신성력은 떨어지지만 성수를 도배하는 솜씨는 단연 발군이다. 신관임에도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에쿠제의 신관답게 손이 빠른 것이다.

꿰맨 상처에서 부글거리며 작은 거품 덩이들이 일어난다.

도배를 마친 주한이 제우스를 바라보았다.

제우스는 치렁거리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작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가장 큰 상처인 옆구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제우스는 깜짝 놀라서 손을 뗄 뻔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치민 것이다.

이미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상당히 익숙하면서도 또한 꺼려지는 것이었다.

마치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성물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제우스는 고개를 흔들며 집중했다. 소일리언의 치료 때 신성력을 너무 소모한 탓일 것이다.

제우스의 손에서 작은 발광이 발생했다. 일반적인 빛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발광이다. 살포시 감겨진 제우스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봉합된 상처의 거품이 조금 더 활성화되었다.

그 순간 제우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폭풍이 몰아치듯 신성력이 몰아치고 있었다.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제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운은 신성력답지 않게 거칠게 몰아쳤다. 소모된 신성력이 찰나지간에 가득 차고도 남아 외려 넘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제우스의 몸은 끊임없이 떨려 왔다. 제우스의 몸 전체에서 은은한 발광이 일어났다.

지켜보던 주한은 물론 카카트로스에 매달린 신관들조차 제우스의 변화를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성력 충만? 신탁?’

지금 제우스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극히 드문 경우기는 하지만 성력 충만이나 신탁을 받을 때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상급신관인 지르코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다. 신관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것이 성력 충만과 신탁이다. 둘 모두 신관에게 있어서는 평생의 영광이다. 그중 신탁은 특히 더했다. 신탁은 받기도 어려울뿐더러 받게 된 자는 대부분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이 수순이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사제만이 신탁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신탁은 각 교단마다 한 세대에 한 명 정도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드문 일이었기에 북부에서는 몇 세기에 걸쳐 단 두 명만이 신탁을 받았던 전례가 있었다.

‘그럴 리가?’

지르코는 신탁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지르코의 기억으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하급신관에게 신탁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더구나 로리안의 사제가 신탁을 받았다는 기록은 전 역사에 걸쳐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지의 여신, 로리안.

그를 모시는 사제들은 어찌 보면 불행한 자들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신으로부터 단 한 번도 신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리안의 존재가 부정되지 않는 이유는 그를 받드는 신관들의 탁월한 치료력 덕분이다. 신성력의 가장 대표적인 표출 형태인 치료력은 신관들의 믿음과 권능을 증명하는 주요한 요소로 인정된다.

그런 면에서 로리안의 신관들은 여타 다른 신을 모시는 신관들에 비해 월등했다. 비록 신탁을 내리지 않는, 침묵하는 신 로리안이었지만 신성력에 있어서만큼은 야박하게 굴지 않았다.

남은 가능성은 ‘성력 충만’ 하나였다.

신관에 따라서는 신탁이나 성력 충만과 유사한 형태의 모습을 일부러 연출할 수도 있겠지만 제우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지르코 자신도 불가능한 일이다.

교황이나 추기경급 중 특별히 신앙심이 깊은 자가 내재된 성력을 고도로 집중해 신성력을 온몸으로 뿜어내면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한정된 몇몇 고급신관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대단위 집회 때 자신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간혹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그 행위 자체가 어떤 특수한 신성력을 발휘하거나 집회에 참여한 환자들을 광범위하게 치료하는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관습일 따름이다.

제우스에게 그런 권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런 권능이 있었다면 벌써 중앙 대륙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거기서 고풍스런 책상을 하나 차지하고 앉아 있지, 북부 오지에서 이 끔찍한 짓을 업으로 삼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니지. 이전에 그가 그런 능력이 있었거나 없었거나 곧 고풍스런 책상을 하나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제우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성력 충만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교단의 추기경 중에도 성력 충만을 경험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쎄……. 로리안의 신전은 잘 모르겠지만 주신 아디의 신전에는 몇 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제우스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거의 정신을 놓아 버린 제우스였기에 주변에 대해서 아무런 인식도 할 수 없겠지만, 지르코는 다른 신관들이나 의사들이 제우스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양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제우스가 기도를 마치면 지금의 현상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제우스의 기도가 길어지자 지르코는 다른 신관들을 시켜 카카트로스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세 명의 신관이 모든 신성력을 고갈시키며 카카트로스를 치료하는데도 제우스가 깨어나지 않자, 지르코도 어쩔 수 없이 카카트로스에게 붙었다. 하지만 아무도 빈사 상태에 빠진 조노량에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마치 환자가 카카트로스와 제우스 두 사람이기라도 한 듯 그 둘에게만 온통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를 하고 있는 제우스의 두 손이 아직까지 조노량의 배에 얹혀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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