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도니아 제1시합
영혼이 육체의 끈을 놓고 자유를 찾은 느낌이랄까? 신체에서 느껴지던 익숙한 감각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얀색 빛 무리만 가득했다. 눈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느끼는 빛이었다. 그 빛들은 휘돌다가 빨려들고, 번쩍이며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 느끼는 광휘였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언제였더라? 지금과 같은 느낌, 처음은 아니다. 조노량은 먼 기억의 저편을 더듬었다.
불현듯 불쾌감이 몰려들었다. 기억이 난 것이다.
죽음.
음습하게 떠오르는 느낌. 바로 그 느낌이다. 낭아도가 등에서부터 복부까지 뚫고 빠져나간 후 아득해지던 정신과 그와 동행해 느껴지던 어둠, 그때도 그랬다. 눈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느껴지던 어둠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휘돌고 빨려들며, 긴 동공을 지났다.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초월의 시간이 흐른 후 어딘가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짧은 인식의 끈도 놓아 버렸다. 그게 죽음이라고 느꼈었다.
실제로,
나는 죽었으리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으므로.
그럼,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누굴까?
그 순간 심한 현기증과 함께 뭔가 익숙한 사물들이 빙빙 돌아가는 시야에 잡혔다. 흐릿하던 사물의 영상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초록이 무성한 숲, 그리고 파란 하늘과 푸드덕 날아가는 몇 마리의 참새. 싱그러운 풀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충분히 설명을 들었던 터였지만 실제로 겪고 보니 절로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상이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경신법조차도 필요 없지 않겠는가?
“키메라가 되고 싶지 않으면 빨리빨리 튀어 나왓!”
퍼뜩 정신을 차린 조노량은 병사들의 재촉에 따라 서둘러 게이트를 벗어났다.
먼저 게이트를 탔던 일행들이 밑동만 남은 커다란 나무 주변에 퍼질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숲이었다. 그것도 아주 울창한 숲 속이었다. 성인 두 명이 팔을 뻗어야 둘레를 채울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시야를 가로막았다.
조노량은 어느 정도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벗어나도 빽빽한 숲, 그 한가운데에 숲과 어울리지 않는 널찍한 공터가 있었고, 그 공터 위에 껍질이 벗겨진 검은색 나무, 일곱 그루가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특이하게도 가지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나무들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나무 꼭대기의 푸른 잎사귀 몇 개뿐이었다.
모든 게이트들이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게이트를 이루는 구성들도 달랐고, 기둥의 역할을 하는 나무들의 개수도 달랐다. 오직 같은 것은 원을 그리고 있는 나무들의 중심을 구성하는 석재 원반과 이해할 수 없는 문양들뿐이었다.
게이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굵은 나무로 지어진 막사가 몇 채 보였고, 막사 뒤편으로 제법 널찍한 가도가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도는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주변의 흙과 다르게 밝은 갈색 빛을 띠는 단단한 바닥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숲의 주인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거나 아주 열심히 정리해 주어야만 한다.
언뜻 보기에도 가도를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관리를 잘해 준다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게이트를 둘러싸고 두 개 기대가량의 병사들이 엄밀히 감시를 하고 있었고, 일부는 갈리온을 탄 상태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여기서 반나절만 가면 아도니아시가 나옵니다.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죠. 켈커티스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도니아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북부 문화의 중심도시는 역시 아도니아죠. 그에 비하면 켈커티스는 정말…… 삭막한 군사도시죠. 아, 저기 있군요. 지금부터는 걷지 않아도 됩니다. 저 마차들을 타고 편안하게 여행을 즐기면 되는 겁니다.”
샤마노프의 손을 따라가자 굵은 나무로 창살을 만들어 댄 마차가 두 대 보였다.
조노량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차의 모양이 중원의 그것과 몹시 흡사했기 때문이다. 매여 있는 짐승만 다를 뿐, 죄인을 압송할 때 사용하는 소달구지와 거의 똑같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푸니킨과 자오코프를 마지막으로 열한 명 전원의 전송이 끝났다.
“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놈의 게이트를 타고 나면 기분이 정말 더럽다니까.”
일행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비틀거리며 다가온 푸니킨은 아무렇게나 철푸덕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명목상으로는 푸니킨이 이 중 랭킹이 가장 높다. 최근 스바스친이 죽는 바람에 한 단계 올라서서 A클래스 서열 4위가 되었다. 하지만 랭킹을 내세워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지난번 승급심사에서 노리앙과 샤마노프의 숨은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푸니킨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전사인 만큼 그 둘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히 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날 이후로 노리앙이나 샤마노프를 대하는 푸니킨의 태도는 백팔십도 바뀌었다. 제법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노리앙, 게이트는 처음 타 봤지? 어떻던가? 아주 더러운 기분이지 않은가?”
“놀라운 일이더군.”
“촌놈이 출세했네. 아,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 그냥 농담일 뿐이야.”
포로들보다 먼저 게이트를 탔던 호송책임 기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푸니킨 등을 돌아보며 눈으로 인원 점검을 마쳤다. 겨우 열한 명이라 쭉 훑어보면 그만이었다. 호송책임자는 사십 대의 특징 없는 남자다. 기사로서는 조금 왜소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평균 이하는 아니다. 흔한 갈색머리에 가장 평범한 글라디우스로 무장하고 있다. 이름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파린이라는 이 남자가 크로아지크 황야의 호송을 맡은 기대의 기대장이며, 검투사들의 마지막 검투시합까지 함께하다가 수용소에 복귀할 때까지의 모든 책임을 맡은 자라 한다.
A클래스 이상의 호송은 언제나 이 남자가 담당한다고 한다. 겉모습과는 달리 강한 자임에 틀림없다.
점검을 마친 호송책임자는 이곳 게이트를 관리하는 행정관에게 양피 두루마리를 넘겼다. 아마도 포로들의 신상명세 따위가 적힌 문서일 것이다.
문서를 넘겨준 호송책임자는 늙은 병사 하나가 끌고 온 회색 갈리온을 타고 품속에서 회색 곰이 그려진 깃발을 꺼내 깃대에 걸었다. 검투반의 막사 위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크로아지크 검투단을 상징하는 깃발이리라.
행정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갈리온을 타고 있던 건장한 기사가 조노량 등을 돌아보았다.
“자, 크로아지크 검투사 여러분, 부득이하게 그대들의 자유를 구속함을 용서하시오.”
대우가 달랐다. 수용소에서는 일개 포로지만 이곳에서는 한 사람의 전사로 취급받는 것이다.
일행은 안내병들을 따라 두 대의 마차에 나눠 수용되었다. 검투반원들을 존중해 주고 있었지만 감시는 더욱 엄밀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크로아지크 황야와 달리, 이곳에서 탈출이 이뤄진다면 잡아들이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일행의 감시를 맡은 기대도 가려 뽑은 정예병인 듯, 각 기대원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기대에 배치된 갈리온도 삼십여 기에 달했다. 아도니아에 가까운 지역답게 정예들이 배치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편안한 여정이었다. 잘 닦인 가도를 따라 숲을 벗어나자 농밀한 밀 향기를 풍기는 농장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나지막한 언덕들에는 소 떼와 드물게 덩치 큰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빠른 데다가 지구력까지 뛰어난 갈리온에 밀려 그 효용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은 여성들과 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탈것이었다. 더욱이 가격적인 측면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다. 갈리온 한 기 값이면 평균 네 필의 말을 구입할 수 있다.
북부에서는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앙 대륙에서는 기마대의 효용을 높이 쳐줘 전투에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드넓은 밀밭을 가로지르며 두어 시간 달려가자 멀리 높다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회색빛 성벽 위로 드문드문 솟아 있는 첨탑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첨탑 꼭대기에는 각양각색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멀어서 아직 그 문양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형태는 대부분 삼각형이었다.
성벽에 다가감에 따라 안 보이던 좌우측 성벽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 너비가 지평선을 꽉 채울 만큼 넓었다.
성으로 다가감에 따라 일반 시민들의 모습이 점차 늘어났다. 밀밭에서 허리를 펴고 두 대의 죄수 호송용 마차와 삼십여 기의 갈리온, 그리고 백여 명의 호송대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고, 지나가다가 말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일행들에게 길을 양보하기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손을 흔들었고, 일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손바닥을 부딪치거나 휘파람을 불며 환영을 표하기도 했다. 대부분 일행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조노량은 샤마노프와 일부 검투반원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손을 흔들기도 하고, 두 손을 입에다가 모았다가 좌우로 넓게 벌려 보이기도 하며 점차 늘어나는 환호에 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굵은 나무로 격자 지어진 죄수 호송용 마차에 타고 있지 않았다면 무슨 개선장군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제 처지도 잊고 저리 즐거울 수 있을까?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 후로도 두어 시간을 더 달려서야 성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문 앞으로는 오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해자가 둘러져 있었는데, 상당히 깊은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한낮인 탓에 도개교가 내려져 있었고, 십여 명의 병사들이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수상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특별히 불러 세워 검문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행이 다가가자 성벽 위에서 성문을 지키는 책임자인 듯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인가?”
“그렇다. 이들은 총 열한 명의 크로아지크 검투단원이며, 본인은 지온게이트의 코르세온 기대 기대장 코르세온이다. 이들의 호송을 책임진 기사 파린이 함께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증명서가 내 손에 있다.”
코르세온이라고 자칭한 건장한 기대장이 품속에서 양피 두루마리를 꺼내서 높이 들어 올리자 양피 두루마리가 흘러내리듯 펼쳐졌다.
성문 안쪽에서 누군가 나와 문서를 확인하고 간단한 인원 점검을 마친 후에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성의 규모에 비해 무척 수월하게 진입했다고 느꼈으나 성문에 진입하고 나서 그 생각을 바꿔야 했다.
성문 뒤편에는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두 개 규모의 기대가 질서정연하게 정렬해 있었던 것이다.
☆ ☆ ☆
마차 네 대가 동시에 지나다닐 만큼 널따란 가도를 사이에 두고 웅장한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성 밖에서 보았던 군중보다 족히 열 배는 더 많은 군중들이 일행을 향해 환호했다.
조노량의 정신이 쏙 빠질 때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행이 짐을 푼 곳은 엄청난 크기의 검투장에 부속된 석조 건물이다. 부속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크로아지크의 검투장에 버금가는 크기였다.
“이번에는 2호실이군요. 하하, 3호실이 더 좋은데……. 뭐, 그래도 1호실보다는 나으니까, 만족합니다.”
샤마노프가 어리둥절해하는 조노량의 어깨를 툭 치며 밝게 웃었다.
“여기 전체를 우리가 다 쓴단 말이오? 저 훈련장까지?”
“좀 크죠? 그렇다고 다른 검투사들과 섞어 놓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을 호실이라고 부르다니, 적절하지 않군.”
“들어오면서 못 보신 모양이군요. 정문에 2호실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는데 말이죠?”
조노량의 얼굴이 붉어졌다.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중원에서는 그래도 몇 글자 정도는 읽고 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단 한 자도 읽지 못했다.
붉어지는 조노량의 얼굴을 보던 샤마노프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비웃는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대놓고 웃어 버리니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글을 읽을 줄 모르시는군요. 하하, 그렇다고 얼굴이 빨개질 필요는 없잖아요. 글을 못 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하하. 여관의 호실하고는 개념이 다르지만 호실은 호실이죠. 이런 규모의 호실이 총 일곱 개가 더 있습니다. 2호실을 포함해서 세 개는 폐쇄형이고, 네 개는 개방형이죠. 뭐, 우리 처지가 처지다 보니 늘 폐쇄형을 사용하죠. 물론 다른 검투단이 사용할 때는 저 철문이 닫혀 있지는 않겠죠? 호? 노리앙의 얼굴이 빨개지는 건 처음 보네요. 무뚝뚝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예민하시군요. 하하.”
샤마노프는 점점 뜨거워지는 조노량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아, 0호실을 빠트렸네요. 바로 요기 2호실 지하에 있습니다. 비스트와 검투를 해야 하는 사형수들의 숙소죠.”
주절거리는 샤마노프를 뒤로 하고, 숙소로 내정된 건물로 들어섰다. 돌로 지어진 깔끔한 건물이었다.
침실로 들어서자 흰색 천이 씌워진 넓고 푹신한 침대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조노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일급 여관이나 다름없었다. 천도 비단을 연상시킬 만큼 보드랍다. 도저히 포로의 숙소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조노량을 따라 들어온 샤마노프의 설명이 이어졌다.
“크로아지크로 돌아가면 포로 신세지만 여기서는 엄연한 한 명의 검투사로 취급받습니다. 다른 검투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죠. 2호실에는 이런 침실이 전부 열 개가 있습니다. 이리로 따라와 보세요. 욕실을 보여 드리죠.”
샤마노프를 따라 복도를 지나치자 한 번에 스무 명은 목욕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욕실이 나타났다. 욕실의 가운데에는 열 명은 거뜬히 몸을 담글 수 있는 커다란 대리석 욕조가 있었고, 그 가장자리에 파인 기다란 홈에는 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분위기상 당연히 씻기 위한 물인 것을 알겠지만 이건 식수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리만치 깨끗했다. 찰랑이는 물 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돌바닥에는 이끼 하나 끼어 있지 않았다. 얼마나 잘 관리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노량이 놀라고 있는 동안 다른 검투사들은 각기 침실을 잡고 휴식에 들어갔다. 일부는 같이, 일부는 혼자서 방을 독차지했다. 시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소 안에는 단 한 명의 감시병도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식사시간이 되어서 조노량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산해진미였다. 각종 고기가 수북이 쌓이고, 희고 부드러운 빵과 절인 생선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양뿐만 아니라 질까지 담보된 최고의 식탁이었다.
☆ ☆ ☆
이건 쉬워도 너무 쉬웠다. 적당히 쉬면서 싸워도 충분할 만큼 상대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샤마노프의 반도 못 미치는 실력이다. 이 정도 상대라면 두 명을 한 번에 상대한다 해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싶다.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상대의 좌측으로 빠지며 조노량은 가볍게 오첩도를 휘둘렀다. 상대의 어깨 견갑의 한쪽이 여지없이 떨어져 나갔다.
검투 직전에 지급받은 익숙지 않은 갑옷을 철렁이며 상대가 돌아서기를 기다려 주었다.
검 끝에 얼핏 마나가 어린 듯했지만 상대는 힘만 센 소였다.
“크로아지크의 공식적인 방침은 규칙을 따르는 거지만, 검투 중에는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일이죠.”
샤마노프가 어젯밤 중얼거린 말이다.
한마디로 상대의 안위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아니, 가능하면 죽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연스러운 환경을 조성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조노량은 옆에서 싸우고 있는 샤마노프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상대의 검을 겨우겨우 피해 내고 있었다. 샤마노프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조노량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샤마노프의 상대인 갈색머리 역시 자신의 상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물을 이용해 상대를 물러나게 한 샤마노프의 눈이 조노량의 눈과 마주쳤다.
입에서는 헉헉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의 눈은 짓궂게 웃고 있었다.
쉬익!
조노량을 향해 달려들던 소는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조노량의 오첩도를 피해 급히 물러났다.
샤마노프의 한쪽 눈이 찡긋 감겼다가 떠졌다. 그 순간 그물을 피해 물러났던 갈색머리가 방패를 앞세우며 거센 기세로 밀고 들어왔다. 샤마노프는 당황한 모습으로 급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뒤로 넘어갔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실수였다.
샤마노프가 뒤로 넘어가자 갈색머리는 그대로 몸을 띄워 검을 찔러 들어왔다.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순간, 샤마노프의 단창이 위로 향했다. 단창이라지만 검보다는 월등히 긴 길이다. 상대방은 저 혼자 샤마노프의 단창에 목을 들이민 듯한 모습으로 ‘꾸룩’ 소리와 함께 목이 꿰고 말았다. 단창의 한쪽 끝은 땅바닥에, 다른 한쪽은 상대의 목을 꿰뚫고 한 뼘 정도 뒤로 나와 있는 상태로 잠시 동작이 정지되었다. 갈색머리와 단창이 삼지창 두 개를 마주 세워 놓은 듯한 모습으로 정지해 있는 동안 샤마노프는 기듯이 뒤로 빠졌다. 비로소 갈색머리와 단창이 한쪽으로 기울며 비스듬히 쓰러졌다.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더욱 커졌다.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단오 때 벌어지는 개싸움을 연상케 했다.
옆에서 한 사람이 죽어 나가자 조노량의 상대는 잠시 움찔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거칠게 쇄도해 들어왔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미늘 갑옷을 피해 팔꿈치를 베어 버렸다.
상대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지만 흘린 피가 만만치 않았다. 그 탓인지 급히 물러난 상대의 다리가 눈에 띄게 후들거렸다.
흙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킨 샤마노프가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환호에 답했다.
그 순간 조노량의 발이 상대의 가슴을 걷어찼다. 볼썽사납게 나가떨어진 상대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조노량의 오첩도가 상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상대방의 손에서 툭하고 검이 떨어져 나온다. 명백한 항복의 의사다.
조노량은 규칙대로 관중석 높은 단 위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눈을 돌렸다. 시합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던 금색 옷의 사내가 조노량을 향했다.
사내의 엄지손가락이 위를 향했다. 살리라는 말이다. 조노량은 상대의 목젖에서 오첩도를 거둬들였다. 함성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합장 자체의 크기만도 크로아지크 검투장의 네 배가 넘는 규모다. 관중석은 백 배도 넘어 보였다. 물결치듯 끊이지 않는 함성이기에 누구에게 보내는지 구별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조노량은 지금 울린 함성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조노량은 손을 가볍게 한 번 휘젓고는 한쪽에 뚫린 승자의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샤마노프가 조노량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두 번째 상대 역시 그다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회복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노량이라 체력적인 문제도 없었다.
세 번째 상대는 제법 강단이 있었으나 역시 전력을 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샤마노프에 비한다면 확실히 모자람이 많았다. 정작 어이없는 일은 상당한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샤마노프가 매번 아슬아슬하게 승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두 명이 죽고, 한 명은 불구가 되었다. 반면 조노량의 상대 셋은 모두 큰 부상 없이 시합을 마쳤다.
“우승하셔도 됩니다. 그것이 커트리안의 뜻입니다.”
세 번째 시합을 마치고 들어오자 샤마노프가 한 말이었다.
“샤마노프, 당신은 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거요?”
“당분간 아도니아 제1시합에 머물러야 하니까요.”
“어째서?”
“뭐,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냥 커트리안의 뜻이라고만 알아두세요.”
커트리안의 무게는 어디까지인가? 검투반에 들어온 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조노량은 커트리안이 길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승낙의 의사를 표했고, 지그시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써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지크 검투반은 커트리안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심지어는 세 명의 S클래스들조차 커트리안의 의사에 반하거나 불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두들 그러하오?”
“모두는 아닙니다. 저와 몇몇이 있을 뿐이죠.”
샤마노프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누구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가령 저기 헤벌쭉 웃고 있는 부리오티스가 그중 하나다. 그 동안 훈련 모습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절대 샤마노프에 비해 떨어지는 실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식 랭킹은 A클래스 13위에 불과했다.
“이제 곧 오늘의 마지막 시합이군요. 대진표 상으로 보면 울리아리온과 붙게 되어 있더군요.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물론 노리앙이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울리아리온?”
“프리온 검투단의 정예죠. 제법 강합니다. 우승 후보 중 하나니까요.”
“당신과 비교하면?”
“글쎄요. 제가 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쉽게 이기기도 힘든 상대죠. 겉으론 말이죠. 아 참, 가능하면 치명상을 안겨 줬으면 좋겠군요. 물론 가능하겠죠?”
샤마노프의 한쪽 눈이 살짝 감겼다 떠졌다.
“역시 그 이유인가?”
“그냥 전통이라고 해 두죠. 위험한 크로아지크 정도?”
1차 베팅의 가집계 상황을 알아보러 갔던 사내가 급히 관중들을 헤치며 관람 테라스 쪽으로 다가왔다.
겨우 너덧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라스였지만 만 오천 관중이 빼곡히 들어찬 일반 관중석에 비하면 대단히 여유 있는 장소다. 그 여유 있는 장소를 뚱뚱한 사십 대 사내가 혼자서 독차지하고 앉아 과일바구니를 더듬고 있었다.
총 이십 개밖에 마련되지 않은 특석답게 대여료만 해도 오십 골드가 넘어가는 비싼 좌석이었다. 이런 고급좌석을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도나아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크로아지크 검투장에도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후덕한 상인풍의 사내였다.
테라스에 도착한 삼십 대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대로 우승까지만 가 준다면 칠십 배당은 족히 올릴 수 있을 겁니다. 하하.”
“칠십 배당? 칠십 배당이라……. 역시 그랬던 거군. 확률이 무척 높아졌는걸?”
잠시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던 사내가 담뿍 웃어 보였다.
“예?”
뚱뚱한 사내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삼십 대 사내가 의문을 표하자 뚱뚱한 사내가 부연설명을 해 주었다.
“총 판돈이 이만 오천 골드일세. 내가 백 골드를 걸었으니 정상적이라면 이백 배당 이상은 나왔어야지. 요행을 바라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멋모르고 밀어 넣었다 쳐도 말일세. 가집계상으로 칠십 배당이 나왔다는 건 누군가 우리보다 더 밀어 넣었다는 뜻이야. 그게 누구겠나?”
“아! 크로아지크에서?”
“그렇지. 크로아지크 말고 또 누가 있겠나? 첫 출전자에게 백 골드 이상 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과도 같지. 크로아지크가 무리한 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좋아! 2차 베팅에는…….”
“예, 어르신.”
“천 골드를 얹게.”
“헉.”
완고한 인상의 삼십 대 사내는 주인의 얼굴을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 골드면 아도니아 중심가에 고급저택을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 돈을 무명의 첫 출전자에게 건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도니아 1시합에서 말이다.
“판돈이 제법 자라겠어. 아예 지금 걸고 오게.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자라지 않겠나?”
후덕한 인상의 사십 대 주인은 껄껄 웃으며 삼십 대 사내의 등을 떠밀었다.
“2차에서도 십 배당 이상은 터트릴 수 있을 게야. 껄껄.”
☆ ☆ ☆
오늘의 마지막 시합이자 네 번째 시합이었다.
한 시간이면 될 거라던 샤마노프의 말과 달리 부리오티스가 불려 나가고도 반 시간이 더 지나서야 호출을 받았다. 도합 두 시간을 기다린 셈이다.
“시합이 생각보다 길어진 모양이네요.”
시합이 늦어지거나 빨라지거나 조노량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샤마노프의 사고방식은 아주 편리해 보인다.
은색의 휘황찬란한 갑옷을 걸친 병사 하나가 크로아지크 대기실에 들어와 조노량을 호출했다.
하지만 시합장으로 나가는 거대한 나무 문 앞에서 또 다시 대기해야 했다. 시합장으로부터 들리는 함성소리가 잦아들며 또랑또랑한 목소리 하나가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굵은 나무문을 넘어서까지 들리는 사내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컸다. 그의 크고 과장된 목소리는 ‘놀라운 신예, 들고양이 같은 몸놀림, 첫 출전에 삼전 전승’ 어쩌고 하는 낯 뜨거운 소리들을 토해 내었다. 그러고도 잠시간 뜸을 들이고 나무문이 위로 올라갔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가볍게 휘두르며 시합장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시선이 조노량을 향했다. 16강부터는 한 번에 시합 하나만 진행된다고 했다. 모든 시선이 조노량을 향하는 것도 당연했다. 원형 경기장 중앙에 울리아리온으로 짐작되는 사내가 둔중한 투핸드소드를 비켜 세우고 조노량을 노려보고 있었다.
울리아리온과 마주보는 위치로 나선 조노량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족히 사 미터는 넘을 듯한 높은 펜스와 펜스 위에 일렬로 빽빽이 둘러서 있는 중무장 보병과 궁병들. 그리고 열광하고 있는 관중들. 저 많은 시선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중원에서도 관중들에 둘러싸여 비무를 치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많아야 수백 명이다. 관전이 주가 아니라 비무 자체가 주이기 때문이다. 은밀히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한다. 비무에 대해 공개적으로 떠들지도 않는다. 어떻게든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자들도 관계자들에게 쫓겨나기 일쑤이다. 물론 어느 정도 명성을 쌓은 자라면 한자리 차지할 수도 있다. 그래 봐야 대부분 십여 명 내외다. 정말 대단한 비무라면 수십 명이 몰리기도 하고, 때로는 수백 명의 참관인이 지켜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조노량은 아직 그런 비무를 치러본 적이 없다.
관중석 북쪽 단상. 그 위에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금색 옷의 사내가 손을 들자, 그 옆에 시립해 있던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프리온의 울리아리온, 크로아지크의 조 노리앙은 용맹한 북국의 전사임을 이 자리에서 증명하라. 시작!”
이미 입장 전에 검투사에 대한 소개가 끝났다. 검투의 개시 선언이 길어질 이유가 없다.
둘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울리아리온이라는 사내는 삼십 대가량의 다부진 체구의 사내다. 그다지 큰 키는 아니지만 너비만으로는 조노량의 두 배도 넘는 두꺼운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두 개의 뿔이 솟은 붉은색 투구 아래로 네모난 얼굴이 사나운 표정으로 조노량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인상을 쓰거나 말거나 조노량의 표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오른쪽 바깥으로 누인 형태로 들어 올려졌다. 가슴이 훤히 드러난 모습이다.
건방진 햇병아리가?
어떻게 보면 무방비 상태로도 보일 수 있는 조노량의 자세에 울리아리온은 분노를 드러내며 전의를 키웠다. 울리아리온의 투핸드소드에서 진한 푸른색의 오오라가 어리기 시작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다. 글라디우스가 아니라 투핸드소드에 오오라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 검 자체가 넓고 긴 탓이다. 또 그만큼 마나의 소모가 과다하다. 그런 투핸드소드에 처음부터 오오라를 채우는 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단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거나 오래도록 마나를 유지할 만큼 소드마스터로서의 수련 정도가 깊다는 뜻이다.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면서도 울리아리온은 서둘러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상대를 압박하겠다는 듯 투핸드소드를 치켜들고 한 발자국 당당히 다가들었다.
상대가 들어와 주니 조노량은 기다리면 된다.
울리아리온은 비쩍 마른 상대를 바라보며 승리를 자신했다. 얼핏 보더라도 상대는 전형적인 스피더다. 하지만 아무리 스피드가 빨라도 힘이 받쳐 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저런 체구에 빈약한 검을 들고는 힘을 내기가 어렵다.
스피드라면 자신 역시 누구에게도 쉽게 뒤지지 않는다. 거기다 힘까지 상대를 압도한다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울리아리온은 맹수가 얼어붙은 사냥감을 압박하듯 여유 있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들었다. 여유 있게 걸었건만 처음 스무 발자국이 순식간에 열 발자국, 다섯 발자국으로 줄어들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세만으로는 시민궁 검투사들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울리아리온이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슬금슬금 물러서거나 옆으로 돌며 자신을 견제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저 건방진 햇병아리는 그냥 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니 조금은 지루해하는 듯한 모습? 뭘 모르는 게 틀림없다.
안 그래도 투기를 끌어 올려야 하는 판에 상대의 반응은 울리아리온의 분노를 자극했다. 내디디던 울리아리온의 오른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한 바닥에 선명한 발자국이 찍혔다.
쿵!
다시 한 발자국.
이제 세 걸음. 투핸드소드를 그냥 휘둘러도 닿을 만한 거리다. 글라디우스의 세 배는 됨직한 묵직한 투핸드소드가 조노량을 향해 내리꽂혔다. 기습이 아님을 알리듯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맞는다면 두개골이 터져 나갈 것이다.
슬쩍
울리아리온은 일단 어이가 없었다. 검은 머리 꼬마가 단지 한 발자국만 옆으로 움직여 투핸드소드를 피해 버린 것이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바로 옆 흙바닥을 친 투핸드소드가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고 있는데도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적의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화가 난 울리아리온은 바닥을 친 탄력을 이용해 상대의 허리를 타격해 갔다. 오오라를 머금은 투핸드소드는 무기의 특성을 무시하고 상대의 허리를 베어 버릴 수도 있다. 거리상 충분한 파괴력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오오라가 품은 파괴 에너지는 그 핸디캡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퍽!
“와하하!”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검은 머리 꼬마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대가 멀리 피했나?
아니었다.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제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투핸드소드를 올려 치는 순간 상대의 발이 자신의 가슴으로 빠르게 다가드는 순간이 기억났다. 그리고 허리가 숙여질 만큼 강한 격통이 밀려들었다.
단련된 몸답게 막힌 호흡은 금방 뚫렸다. 하지만 울리아리온의 얼굴은 흡사 아직도 호흡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선 채로 상대의 발길질을 맞다니? 이런 망신은 처음이었다. 상대의 발에 차이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비열한 자들이 제압되어 쓰러진 상대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경우가 있다. 울리아리온 역시 애송이 시절 그런 경험을 겪었다. 물론 그 상대방은 살아 있지 않다. 몇 년 후 자신이 그 자의 심장에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관중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심한 모욕감이 밀려들었다. 칼도 아닌 발에 차였다는 것은 전사로서 용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선 채로 차였으니 그 모욕감은 더욱 심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울리아리온의 분노가 정점에 달했다. 매번 억지로 끌어 올려야 했던 투기가 자연스럽게 치솟아 올랐다. 검투사 생활 십 년 만에 이렇게 격해진 적은 없었다.
투핸드소드에 어렸던 오오라가 진한 푸른색으로 농도를 더해 가, 검신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울리아리온의 신형이 쏘아지듯 상대방에게 다가들었다. 결단코 지금보다 빨리 움직여 본 적은 없다.
텅!
텅? 익숙지 않은 소리와 함께 투핸드소드가 힘없이 좌측으로 꺾여 허공을 베었다.
상대방의 칼을 타고 꺾여 버린 것이다. 어어 하는 사이에 칼과 함께 몸이 반쯤 옆으로 돌아갔다.
퍽!
“와하하하!”
뭔가 등을 때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확 들며 죽음을 예감했으나 등에 느껴지는 타격감이 생소했다. 예리하게 베어지는 느낌도 아니었고, 글라디우스처럼 무식하게 살을 파고드는 느낌도 아니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몇 발자국 밀려 나가며 울리아리온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등에 느껴지던 타격감의 정체를 깨달은 탓이다. 느낌은 단단한 해머에 맞았을 때와 비슷했지만 무기는 해머가 아니었다. 상대방이 또다시 자신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울리아리온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관중들은 검투장이 떠나가라 웃어 제쳤다.
겨우 중심을 잡고 돌아보자 예상과 달리 상대방의 얼굴에는 전혀 비웃음이 서려 있지 않았다. 자신의 성공을 한껏 뽐내며 미소 짓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상대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점이 더욱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상대로 실험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선 울리아리온은 광포한 황소처럼 다시 조노량을 향해 쏘아져 갔다. 상대방의 가냘파 보이는 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얼핏 보아도 오오라가 어린 것 같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라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미늘 갑옷을 뚫기 어려울 것이다. 기껏해야 갑옷으로 감싸고 있지 않은 팔다리 정도를 찌르는 것이 다일 것이다. 검투사로서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아니, 이 버릇없는 애송이의 숨통을 단번에 끊을 수 있다면 몸통에 구멍이 뚫린다고 해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투핸드소드가 거칠게 대기를 갈랐다. 소드에 어린 파란 오오라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미꾸라지 같은 상대방은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했다. 투핸드소드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바닥을 치고 올라와야 했으나, 울리아리온의 투핸드소드는 바닥의 탄력을 이용하지도 않고 구십 도 이상 꺾여 상대의 사타구니 언저리를 찍어 올렸다.
상대방이 두 걸음 좌측으로 이동했다. 얄미울 정도로 빠르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울리아리온이 아니다. 울리아리온의 투핸드소드는 마치 글라디우스라도 되는 듯 날렵하게 상대의 우측 어깨를 따라 날았다. 아도니아 제1시합에서 최상급 검투사로 분류되는 울리아리온이지만 투핸드소드로 이 정도 급격한 동선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울리아리온은 더 이상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투기가 끌어 올라 평소보다 능력을 백이십분 발휘했다.
☆ ☆ ☆
상대의 몸이 다시 좌측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공격에 당황한 티가 역력하다. 하지만 투핸드소드의 공격 범위는 글라디우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상대의 예상보다 훨씬 먼 거리까지 추격할 수 있다.
상대의 발이 아무리 빠르다 할지라도 검의 범위 안에서는 검보다 빠를 수 없다. 울리아리온의 예상대로 상대는 다시 허둥지둥 뒤로 빠진다. 순간적으로 검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 정도만 해도 상대의 속도를 인정해 줄 만하다. 하지만 울리아리온의 다리라고 놀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울리아리온은 뒤로 빠지는 상대를 향해 뛰듯이 파고들었다.
또다시 검의 범위에 들어선 상대방이 어깨를 틀며, 동시에 허리를 젖혀 투핸드소드를 흘린다. 분통이 터질 만큼 재빠른 상대다. 하긴 그 정도가 되었으니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제1시합에 참가할 배짱이 생겼을 것이다.
울리아리온은 이빨을 깨물며 상대를 따라붙었다. 지금 놓치면 다시는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억지로 속도를 내다 보니 흉한 자세로 버둥거리며 큰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다분히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웃음소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를 따질 만한 게재가 아니다.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친다면, 어쩌면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 놈에게 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울리아리온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발과 검을 놀려, 가까스로 상대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도무지 맞힐 수가 없었다. 차라리 칼을 들어 막는다면 그 칼과 함께 통째로 부숴 버릴 텐데,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상대는 피하거나 검을 흘리기 일쑤다. 특히 화가 나는 것은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상대의 칼과 닿았다 싶으면 자신의 투핸드소드가 얼음판에라도 미끄러지듯 쭉쭉 미끄러져 버린다는 점이다.
흘리기 기술이야 검을 다루는 자로서 충분히 배우고 수련하는 바지만 저것은 좀 지나치다. 상대의 무기와 평행을 이루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은 예각이라도 발생할 것이고, 그렇다면 저항이 생겨야 마땅하다. 저렇게 얼음에 기름칠한 듯 미끄러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투핸드소드의 속도와 무게를 감안한다면 아무리 작은 저항이라도 웬만한 검들은 그대로 부숴 버릴 만큼 강력하다.
울리아리온의 얼굴이 투기와 분기로 얼룩진 채 점점 더 달아올랐다. 그래, 무슨 요술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지칠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방! 그걸로 끝이다. 체력이라면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뒤진 적이 없다. 저렇게 왜소한 놈이 버텨 봐야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자세 따위는 포기한 채, 방어 역시 포기한 채, 그리고 체력 소모가 많은 오오라까지 거두고 오직 검의 속도와 무게만으로 상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노량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세상에, 롤만큼이나 무식한 자가 여기 또 있다니!
처음 탐색 차원에서 두어 번 걷어차 주었다. 그러자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동체 속도만으로 보면 샤마노프보다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검의 속도만큼은 대단했다. 같은 속도라도 창대로 후려치는 것은 웬만해서는 목숨을 위협하기 힘들다. 반면 검은 충분히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검이 무식한 투핸드소드임에야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랴. 자칫 한 방이라도 잘못 맞았다가는 그걸로 끝일 것이다.
워낙 넓은 범위를 자랑하는 투핸드소드인지라 조노량도 울리아리온의 검을 피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반면 그만큼 틈도 많았다. 온몸의 급소란 급소는 모두 드러내고 덤벼드는데, 이건 뭐,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급소를 피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일찌감치 시합을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 시합에 조금씩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우선 거의 처음 접해 보다시피 한 투핸드소드라는 무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중원에도 검의 형태야 무척 다양하지만 저렇게 무식한 검은 없었다. 가장 근사한 무기라면 우선 장군검이 떠올랐다. 전장에서 지휘용으로 사용하는 검이다. 이름 그대로 장군들이 위엄을 세우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검이다. 너무 크고 무거운 탓에 실전적인 효용성은 많이 떨어진다. 대신 귀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검신에까지 온갖 문양을 그려 넣는 등 한껏 멋을 내 세공하기 때문에 미려한 외모를 갖는다.
반면 투핸드소드는 표면이 울퉁불퉁할 정도로 투박한 검신과 날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검날, 그리고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통짜 손잡이가 다다. 거기에 그 크기는 장군검의 두 배는 됨직하다. 형태로만 보면 실전용인데, 크기로 보아선 도무지 실전용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드물지 않게 저런 거검을 사용한다. 그것도 저 무식한 자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다.
큰 만큼 무겁지만, 크기답지 않게 빠르다. 게다가 공격 범위는 창에 버금갈 정도로 넓으면서도 위력은 창보다 월등히 높다.
이번 기회에 투핸드소드에 익숙해질 겸, 몇 가지 실험도 할 겸 해서 시합을 좀 길게 끌기로 했다.
우선 저런 무거운 검을 오첩도로 막아 낼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했다. 진기를 주입한 후 상대의 검을 비스듬히 흘려 보았다. 흘리는 기술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나 흘리더라도 그 힘과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는데, 오첩도가 제법 단단히 받쳐 주었다. 아무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조노량은 조금씩 흘리는 각을 세워 갔다. 그만큼 강한 저항이 오첩도에 실리기 시작했다. 진기를 주입했음에도 손목이 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다. 그럼에도 오첩도는 잘 버텨 주었다.
나중에는 직각으로 막아 보았는데, 역시 무리 없이 버텨 냈다. 날이 조금씩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한두 번 갈면 복구될 정도의 가벼운 것이었다.
검은머리 꼬마놈이 슬슬 지쳐 가는구나.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더니 속도가 현격히 떨어졌다. 이제는 아까처럼 검을 흘리지도 못하고 갈수록 각이 넓어졌다. 그만큼 강한 저항이 투핸드소드에 실렸다. 울리아리온이 투핸드소드를 선택한 것은 글라디우스 같은 작은 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비록 빠르게 놀릴 수는 있지만 너무 짧고 허약했다. 웬만한 글라디우스는 자신의 투핸드소드를 몇 번 받아내지도 못한다. 그런데 저 애송이의 이상한 칼은 그보다 더 허약해 보인다. 길이는 반 배 정도 더 길지만 그게 그거다. 반면 두께는 반도 안 돼 보인다. 너비도 글라디우스에 한참 모자란다.
그런 가냘파 보이는 칼로 자신의 투핸드소드를 어느 정도 버텨내는 것은 의외였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제 거두었던 오오라를 실어 한두 번 때리면 여지없이 부서져 나갈 것이 틀림없다.
언제부터인가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잦아졌다. 둘의 공방전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빨라져 갔다.
울리아리온 본인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다시 힘을 내 투핸드소드를 진한 푸른빛의 오오라로 감쌌다.
상대방의 긴장감이 여과 없이 울리아리온에게 전해져 왔다. 하긴 투핸드소드의 확연한 변화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쾅!
한 번!
부서지지 않는다. 의외로 단단한 칼인 모양이다.
쾅!
두 번!
상대가 선 채로 주룩 밀린다. 하지만 아직 버텨 내고 있다. 몇 번까지 받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쾅!
세 번!
저런 허약한 칼로 오오라가 잔뜩 응축된 투핸드소드를 세 번까지 받아 내다니? 아직까지도 저항감이 만만치 않다. 울리아리온의 눈가가 조금 찌푸려졌다.
쾅!
네 번!
뭔가 이상하다. 이쯤에서는 작은 조짐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의 칼에 대한 의구심만큼 상대에 대한 의구심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격돌할 때마다 조금씩 밀리기는 하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다. 칼이 부서지든지 단번에 주저앉아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라야 했다. 그런데?
울리아리온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이건 정말이지, 정상이 아니다.
이런 형태의 싸움은 처음부터 자신이 유리한 싸움이었다. 누구에게도 뒤져 본 적이 없는 힘, 중병의 이점, 한껏 끌어올린 마나의 위력……. 그런데도 벌써 네 번이나 버티고 있다. 지쳐서 피하지도 못하는 자가 자신의 힘과 오오라를 감당하고 있다니? 불가사의다.
쾅!
다섯 번!
상대의 다리가 주룩 밀린다. 또다시 바닥에 두 줄기 골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버텨내고 있다.
쾅!
여섯 번!
어? 저게 뭐지?
미소?
울리아리온의 시야에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상대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잡혔다.
울리아리온은 불안한 예감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뭐지?
이번에도 상대는 여지없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잔뜩 일그러져야 하는 상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뭐란 말인가?
일곱 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조노량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터져 나왔다.
다시 한 번 투핸드소드를 높이 치켜들었던 울리아리온의 복부로 조노량의 앞차기가 날아들었다.
퍽!
울리아리온은 명치끝에 가해지는 둔격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울리아리온의 가슴으로 격통이 날아들었다. 울리아리온을 바짝 따라붙은 조노량의 팔꿈치가 작렬한 것이다. 가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빠르고 강렬한 가격이었다. 울리아리온은 둔기가 아닌 인간의 육체가 이런 충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처음 깨달았다. 그 순간 안면으로 다시 조노량의 발등이 날아들었다. 두 개의 뿔이 달린 붉은색 투구가 하늘을 날았다.
울리아리온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숨죽이며 둘의 격돌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 버린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불과 일이 초? 관중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잠시간 침묵에 휩싸였던 검투장이 요란한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작은 사내가 한순간에 형세를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눈에는 조노량이 처음 몇 차례 우세를 점하다가 일방적으로 몰렸던 것으로 보였었다. 끝내는 피하지도 못하고 뒤로 밀리며 힘겹게 방어에만 치중하던 조노량이 기회를 노려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한 것으로 보였으니 환호할 만도 했다. 역전은 언제나 짜릿한 것.
“노리앙!”
한구석에서 노리앙이라는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신인이다 보니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누군가 처음 소개할 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작게 시작된 연호는 연못에 파문이 일듯 순식간에 검투장을 물들였다.
“노리앙, 노리앙!”
노리앙의 이름은 박자라도 맞추듯 열광적으로 퍼져 나갔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환호였다. 중원에서는 무명의 삼류 무사였기에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멋쩍게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환호가 더욱 커졌다.
그제야 조노량은 오첩도를 기절해 있는 울리아리온의 목젖에 대고 금빛 옷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큰 부상을 당했거나 치료를 받더라도 재기하기 힘든 경우에 전사다운 죽음을 선사한다. 반대로 실력이 형편없어서 검투사로서의 장래가 어둡다거나, 비겁한 검투를 펼친 경우에도 죽음을 내린다.
그런데 금빛 옷의 사내는 들었던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게 돌려 내렸다. 울리아리온의 죽음을 명한 것이다.
울리아리온은 비록 기절해 있다고는 하지만 깨어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상태였다. 또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될 정도로 강한 검투사였다. 검투 중 비겁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북국의 기준에서는 상대를 발로 차 버린 조노량이 전사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금빛 옷을 입은 사내의 손가락은 아래를 향했다. 왜?
사내의 표정은 아주 온화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행동을 요구했다.
“죽음을!”
“죽음을!”
노리앙을 연호하던 관중들이 울리아리온의 죽음을 외치기 시작했다.
조노량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중원에서도 사람의 목숨은 그다지 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특히 일반 백성들의 목숨은 아무도 존중해 주지 않는다. 하찮은 범죄라도 저지른 범죄자들의 목숨은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그건 무림인이나 뒷골목 건달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무에 패해 무방비 상태가 된 상대를 죽이지는 않는다. 물론 원한 관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대체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중원보다 더한 것 같다.
조노량의 표정이 다시 사라졌다. 뭐, 죽이라면 죽이면 되는 거다. 사람 한두 번 죽여 본 것도 아니고, 거리낄 것이 전혀 없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울리아리온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단숨에 죽여주는 것이 자비이리라.
울리아리온의 몸이 아주 잠깐 꿈틀거렸지만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붉은 피가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금빛 옷의 사내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석조건물답게 창이 크지 않다. 창틀에는 나무로 짠 창문이 안팎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창문이 둘이라는 뜻이다. 창문이 둘인 이유는 그만큼 벽이 두껍기 때문이다. 지금은 팔월, 한여름이라 두 개의 작은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상태다. 더울 법도 하건만 석조건물답게 실내는 서늘한 편이다. 두꺼운 석재들이 한기를 뿜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시간으로 이미 열두 시가 넘었다. 그래도 실내의 정물이 비교적 또렷이 구분된다. 좁은 창으로 스며들어오는 만월의 빛만으로도 실내를 밝히기에 충분했다.
조노량은 작은 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총총히 박혀 있는 별빛들도 만만치 않다. 하늘 가득 보석이라도 뿌려 놓은 듯하다. 조노량은 몸을 뒤척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푹신한 침상이 낯설었다. 너무 오래 지저분한 나무 침상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옆 침상에서는 나지막이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의 호사였지만 샤마노프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한때는 일등시민 소리를 들었던 자였으니 지금의 호사가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직까지도 손끝에 맴도는 파육의 느낌. 익숙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생소한 느낌도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 첫 살인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조노량 역시 아직까지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도 목젖이었다.
열여섯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뒷골목 패싸움에서 한 남자를 죽였다. 이십 대 초반쯤이었을까? 난전 중에 휘두른 칼이 그의 목젖을 베고 흘러내렸다. 뭔가 스친 느낌이었지만 극도의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죽였다라는 피상적인 기억뿐. 하지만 그날 밤 돌아와 누워서는 그 느낌이 점차 또렷하게 살아나 조노량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첫 살인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에 무림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다. 그 후로도 조노량은 많은 사람을 베었고, 어느덧 심드렁해질 정도까지 변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지 않은가?
무감각해졌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 첫 살인의 기억이다. 오늘 일도 그러리라. 다만 무슨 이유로 죽이지 않아도 될 자를 죽이라 명한 것인지 의아할 뿐이었다. 샤마노프에게 듣기로도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금의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중지도(笑中之刀)라 했던가?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었으나 냉정한 자였다. 어디에나 그런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단지 그가 왜 일반적이지 않은 지시를 했느냐가 조금 궁금할 따름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머리 쓰는 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다. 우선은 살아남는 일이 중요하다.
“오늘은 세 번만 싸우면 됩니다. 물론 결승까지 올라갔을 때 말이죠. 그나저나 전 오늘 한 번만 싸울 생각이었는데, 어제 같은 일이 있을까 봐 걱정이네요. 결승까지 간다 해도 같은 상황일 거고…….”
샤마노프는 말미에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 유쾌하던 웃음이 아니다. 그 역시 자신의 운명을 저당 잡힌 포로 검투사일 뿐이다. 실력이 있으니 위로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죽을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이 세계 최강자가 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어차피 똑같은 결과라면 예정대로 가는 것이 맞겠죠? 하하.”
그가 평소의 웃음을 찾는다. 그래, 그게 샤마노프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조노량은 문득 샤마노프의 성격이 루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단지 샤마노프는 루드와 달리 진심으로 착하지 않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그 외에는 무척 유사하다. 가끔 얄밉기는 하지만 늘 친절하고, 늘 상대를 존중해 준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잠시 후 동료들로부터 소박한 응원을 받으며 샤마노프가 먼저 불려 나갔다. 그가 오늘의 첫 번째 출전자였다. 8강전이라고 했던가? 총 일곱 차례의 검투가 진행될 것이라 했다. 누군가 어제의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치면 최대 세 번의 경기를 갖는다. 결승까지 진출하는 경우에 말이다.
‘세 번의 경기를 치를 수 있을까? 아마도…….’
피곤한 일이다. 검투사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아무런 득이 없다. 그래도 눈부시게 발전한 무공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그래서 검투반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조노량은 거친 숫돌과 가죽띠를 이용해 오첩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경기로 오첩도가 많이 망가졌다. 몇몇 부분은 너무 깊이 패여 날을 간다고 정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새삼 오오라가 충만한 투핸드소드의 위력을 절감했다. 오첩도의 손질이 끝나자 발목에 채워 놓은 단검을 꺼내 날을 내기 시작했다. 가우렐리온에게 선물 받은 단검이다.
이곳에서 생산한 검답지 않게 제법 단단하고 날이 잘 서있다. 미미하게 붉은 빛이 도는 단검, 오첩도 역시 붉은 빛이 은은히 어려있다. 터진 틈새에 먹인 피 탓에 일어나는 착시 현상이다. 그래서인지 이 단검은 오첩도와 한 쌍처럼 잘 어울렸다.
단검을 선물하며 가우렐리온이 말했다.
“껄껄, 최근에 만든 건데 아주 잘 나왔기에 한번 써보라고 가져왔네.”
그리고 잠시 우물거리더니 한마디 물어왔다.
“혹시 자네, 고로에서 뭔가 이상한 뼛조각을 보지 못했나? 약간 붉은 빛이 도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뼛조각?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모르면 됐고. 그 검 제법 쓸 만할 게야. 최근에 만든 놈 중에선 최고라고. 껄껄, 잘 쓰게나.”
아주 잘 쓰고 있다. 단검은 의외로 쓰임새가 많은 도구니까. 게다가 검투 시에 방패나 보조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조노량이었기에 보조무기 대용으로 착용하고 나갔다. 아직까지는 별달리 사용할 기회가 없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단검은 그다지 날이 상할 일이 없었기에 가죽띠에만 몇 번 문지른 후 발목에 갈무리했다.
일류 고수들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검과 하나가 되어 검날을 손본다고 하지만 조노량은 검날을 손질하면서 온갖 상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상한 경지는 억지로 한다고 해서 들어설 수 있는 경지가 아닐 것이다.
조노량으로서는 지금 작은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충분히 넘어설 것 같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마나를 제한받고 있는 샤마노프나 기타 검투반원들을 상대로는 마음껏 훈련을 할 수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오오라를 끌어올리지 않은 상대방의 무기를 동강내 버릴 수 있는 탓에 마음껏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은 마나 팔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조절하는 수밖에.
물론 차기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다. 어제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오오라가 충만한 투핸드소드를 견뎌 냈으니 대단하다고 할 만하지만, 완전히 무사한 것도 아니었다. 오오라가 실리지 않은 검을 상대하기에는 넘치지만 오오라가 충만한 검을 상대하기에는 또 조금 모자라다. 검기! 검기를 이뤄야 한다.
차기(借氣)를 넘어 발기(發氣)의 단계에 이르러야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 중원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경지지만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아니 아주 근접한 경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어떻게 해 보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치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데, 쉽게 그 실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가슴만 더 답답해진다. 운기를 할 때도 충분히 집중할 수가 없다. 아마도 조급증 탓이리라. 마음을 편히 먹으려 해도 그 경지가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칫 주화입마에라도 들까 봐 요즘은 운기도 조심스럽다.
검기의 경지에만 이른다면 웬만한 수준의 오오라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텐데…….
“비켜!”
우당탕 소리와 함께 샤마노프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하다. 옆구리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동료들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샤마노프가 얼굴을 찡그리며 조노량을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무사한 모양이다.
“큰 부상은 아니다. 곧 신관이 올 것이다. 저리 가란 말이다.”
들것을 들고 온 병사들은 검투사들이 귀찮게 굴자 호통을 쳤다. 검투사들은 샤마노프의 들것을 넘겨받아 대기실 한쪽에 마련된 간이침상에 뉘였다.
“괜찮은가?”
병사들이 나가자 나이 많은 지홉이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샤마노프를 바라보았다.
“거의 다 잡았는데, 으윽.”
샤마노프의 얼굴에 분기와 고통의 표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미리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진짜라고 느낄 만큼 그럴듯했다. 조노량은 무심결에 터지려는 헛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부상을 당한 자 앞에서 웃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부리오티스가 헤벌쭉 웃고 있다.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인다.
다음 시합엔 크로아지크 검투단 중 누구도 참가하지 않는다. 8강에 진출한 검투사가 샤마노프와 조노량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16강에서 탈락한 부리오티스가 조노량에게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몸을 풀어주는 것이다.
“고맙군.”
“고맙긴.”
별로 친하진 않지만 부리오티스와는 말을 놓고 지낸다. 부리오티스 자신이 깍듯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풀려 보이는 외모와 행동거지, 조노량 역시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미리미리 준비해 놓아야지. 시합이 의외로 금방 끝날 수도 있거든.”
“그렇겠지.”
“이길 거지?”
“그래야지.”
“헤헤, 제이온이라는 놈인데, 별로 강하진 않아. 나이도 많고, 적당히 주물러 주고 들어오라고.”
부리오티스의 말대로 그리 강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노련한 만큼 버티는 힘이 있어서 부리오티스의 말처럼 적당히 주물러 주고 들어올 수 없었다. 울리아리온 같은 힘도 없었고, 샤마노프와 같은 빠르기도 없었지만, 묘하게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때문에 시합이 끝났을 때 조노량은 울리아리온을 상대했을 때만큼 지치고 말았다.
원 매치로 끝나는 시합이 아닌 만큼 체력의 안배는 무척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그 승리로 인해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의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조노량에게 걸린 베팅의 2차 배당은 7.8배, 적은 배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중들이 혀를 찰 만큼 큰 배당도 아니었다. 누군지 거액의 골드를 조노량에게 베팅했기 때문이다. 정상대로라면 아마도 수십 배 배당은 나왔으리라.
이제 두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다. 그만큼 우승에 가까워진 것이다. 단순 수치로만 따져도 사분의 일이다. 관중들은 왜 진작 노리앙이라는 신인에게 조금이라도 걸지 않았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베팅이 끝났기에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아쉬움에 약간의 위안이 되는 건 첫 시합을 길게 끄는 바람에 노리앙이라는 신인이 제법 지쳤을 거라는 안도감이었다. 그만큼 우승에서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음 시합 때는 반드시 노리앙이라는 사내에게 조금 걸어 두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노량은 운기조식을 통해 대부분의 체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샤마노프와의 연습 때도 오전 내내 쉬지 않고 훈련한 날들이 적지 않았다. 이 정도 시합에 지칠 조노량이 아님을 관중들은 몰랐다.
그래서 두 번째 시합에 나섰을 때 조노량은 첫 시합만큼 싱싱한 상태였다.
왠지 흐릿한 인상? 정오를 갓 넘긴 팔월의 햇살은 검투장을 뜨겁게 달궈 놓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탓인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팔뚝으로 입 주변을 가리고 있는 퀴아노프라는 상대의 인상이 무척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두 개의 짧은 검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오른쪽 검은 하늘을 향한 채 왼쪽 어깨 위에 머물러 있었고, 왼쪽 검은 허벅지 뒤로 살짝 가려지게 내려뜨린 상태였다. 척 봐도 속도를 주특기로 하는 자였다.
조노량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마른 탓인지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마치 거미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팔다리가 유난히 길어 짧은 검으로도 충분한 거리를 커버할 수 있어 보였다. 검이 짧고 가벼운 만큼 빠를 것이고, 팔이 긴 만큼 짧은 칼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조노량이 다가들자 퀴아노프는 옆으로 살짝 돌며 해를 등졌다. 눈이 부실 만한 각도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일광을 이용할 줄 아는 약은 자였다.
둘의 공방은 누구도 느끼지 못한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조노량도 빠르고 퀴아노프도 빨랐다. 샤마노프와 비슷한 정도? 하지만 긴 팔다리 때문에 오히려 더 빠른 느낌.
까가캉!
순간적으로 서너 번의 칼질이 오고갔다. 퀴아노프의 단검에 어린 시퍼런 오오라가 매섭게 빛났다. 허벅지 뒤로 감춰진 왼쪽 단검이 무척 위협적이다.
☆ ☆ ☆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은 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멈췄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서로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 흐릿한 인상처럼 칼 쓰는 방법도 흐릿한 느낌이다. 언제 어느 각도로 그의 짧은 칼이 날아들지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반면 조노량의 오첩도는 퀴아노프의 단검보다 월등히 길었다. 길다고 해서 느리지도 않았다.
그 점이 퀴아노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의 변칙적인 공격과 속도를 감당해 낸 자는 몇 없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이름도 잘 모르는 애송이 녀석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결승에서 붙게 될 것이 틀림없는 카카트로스만이 목표였다. 검투사답지 않게 평범한 외모를 가졌지만 아도니아 제1시합에서 가장 껄끄러운 자였다. 평범한 외모답지 않게 강력한 챔피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오월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무려 세 번이나 연속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아마도 이번 대회가 끝나면 시민궁 시합으로 진출할 것이 틀림없다. 그 전에 잡아야 했다. 벌써 두 번이나 퀴아노프에게 패배를 안겨준 상대가 바로 카카트로스였다. 이번에 잡지 못하면 그에게 복수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제1시합에서 네 번 연속 우승하지 못하면 시민궁 시합에 오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제3 목민관이 직접 지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흔한 경우가 아니다.
카카트로스의 강점은 그가 정통파라는 것이다. 퀴아노프 자신의 ‘피투리온의 술(術)’은 정통파에게 가장 강하지만 반대로 정통파에게 가장 취약했다. 상치되는 말이지만 그건 시합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주도권을 내 준 순간 정통파를 상대로 가장 취약한 검술이 될 수밖에 없고, 주도권을 쥔 순간 정통파 검술에 가장 무서운 대적자가 된다.
그런데 지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자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속도도 퀴아노프 자신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경험 면에서는 자신이 월등히 앞서겠지만 방심할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니다.
퀴아노프는 바짝 긴장한 채 오른쪽으로 돌며 상대의 틈을 노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저놈은 대체 어디서 튀어 나온 놈이야?”
검게 그을린 얼굴의 건장한 사내 앞에 서기쯤으로 보이는 작은 사내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몇 되지 않는 특석 테라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흔치 않은 붉은색 겉감에 금색 수실로 시침질한 화려한 의상이 사내의 검고 투박한 얼굴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가 바로 프리온 검투단의 단장이자 자랑스러운 아도니아 원로원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알프치우스 프리온이었다.
“최근에 큰 놈을 포획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도대체 저놈은 뭐냔 말이다.”
“예, 예, 맞습니다요. 최근엔 전쟁도 소강상태라서 켈커티스 측의 거물을 확보한 일은 없습니다. 있었다면 당연히 제가 보고를 받았을 겝니다요. 어제 급히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일반병사 출신이라는…….”
“뭣?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기사도 아닌 일반병사 나부랭이가 울리아리온을 꺾고 퀴아노프를 저렇게 몰아붙여?”
작은 사내를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알프치우스의 팔뚝 근육이 꿈틀거렸다. 알프치우스가 분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까지 일류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프로온 검투단이지만, 프리온가의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선수층은 그 어떤 검투단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두텁게 형성해 놓았다. 최근 현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물러난 알프치우스의 부친인 코오다가 이뤄 놓은 성과였다. 그 뒤를 이어 알프치우스 역시 검투단의 운영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민궁 시합도 아닌 아도니아 제1시합을 직접 참관한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직까지 시민궁 시합을 접수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1시합에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상대 검투단의 전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변명이 따를 수 있겠는가?”
작은 사내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그 역시 이번 시합에서는 반드시 프리온 검투단이 우승할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카카트로스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카카트로스를 잡을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울리아리온은 물론 자존심 강한 퀴아노프까지도 육 개월간이나 자신의 출신지에 가서 뼈를 깎는 훈련을 하고 돌아온 것 아닌가?
그런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풋내기가 프리온 대표 주자 두 명을 연달아 깨고 있으니 알프치우스의 기분이 더러운 것도 당연했다.
“저! 저런.”
알프치우스는 건장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방정맞은 모습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퀴아노프의 오른쪽 상박에서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세 번째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둘의 검투는 모든 관중들이 손에 땀을 쥐고 집중할 만큼 박진감이 넘쳤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가는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둘은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또 반대 방향으로 돌고, 정물화처럼 멈췄다 싶으면 순식간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 부닥침이 잦지는 않았지만 한 번 부닥칠 때마다 최소 서너 번에서 많게는 일고여덟 번이나 검을 주고받았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대부분 한두 번 투닥거리고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격돌 때마다 손해를 보는 것은 대부분 퀴아노프였다. 방금 입은 상박의 상처 외에도 옆구리와 목 쪽에 기다란 검상을 입었다. 세 군데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달아오른 검투장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지만 시간을 끈다면 혈액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것이 분명했다.
알프치우스는 퀴아노프의 왼손 단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허벅지 뒤쪽에 감춰져 있다가 기회를 잡으면 그 치명적 독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 순간 상대방은 바닥에 눕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프리온 검투단의 넘버 투이면서 시민궁 검투사인 바든마저도 퀴아노프의 왼손 단검을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다.
“저 정도면 시민궁 시합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습니다.”
퀴아노프를 겨우 잡고 난 바든이 알프치우스에게 했던 말이다. 그만큼 위력적인 퀴아노프의 기술이 저 노리앙이라는 작자에게는 도무지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의 검이 상대방의 하나뿐인 검을 차단하면 왼손 단검이 날아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노리앙이라는 자의 속도는 도저히 하나의 단검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간혹 기회를 잡는다 싶으면 어느새 손이나 발이 날아와 다음 공격을 미리 차단해 버렸다. 심지어는 어깨나 무릎, 때로는 팔꿈치까지 공격에 가세하다 보니 두 개의 단검이 오히려 부족해 보였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알프치우스는 그 본인이 상당한 실력자였기 때문에 검투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반인에 눈에도 퀴아노프가 밀리는 것으로 보였지만 알프치우스의 눈에는 거의 절망적으로 비쳐졌다. 상대는 분명 정통파가 아니었다. 그건 검만 봐도 알 수 있다. 흔하지 않은 형태의 외날 검. 정통 검술을 구사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그의 검술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아니 검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조차 애매하다. 그에게 있어서 검은 수많은 공격 도구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치 모든 신체가 공격을 위한 도구인 듯 현란한 동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뭐 저런 검술이 있단 말인가?’
뻥
알프치우스는 가죽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안 봐도 그 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퍽!
아니나 다를까 뭔가 땅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먼지도 뿌옇게 솟아올랐으리라.
알프치우스가 눈을 감아 버린 이유는 노리앙이라는 자의 발길질이 퀴아노프의 명치끝을 강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전개 상황이 눈꺼풀 위로 그려졌다.
후다닥하는 소리가 났다. 치명적인 타격이 아니었으니 퀴아노프가 몸을 일으켰으리라. 그래봐야 뻔했다. 도저히 상황을 역전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퀴아노프의 거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퀴아노프는 의외의 복병으로 인해 이전 시합에서 너무 체력을 소모해 버렸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는데, 노리앙의 이전 상대인 제이온이라는 자는 그의 체력조차 뽑아 놓지 못한 모양이다.
알프치우스가 양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동안, 병장기가 부닥치는 소리가 서너 번 더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처절한 비명소리.
알프치우스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떠 보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퀴아노프의 가슴이 쩍 갈라져 피분수를 뿜어내고 있었고, 상당히 고가를 지불하고 구입했던 두 개의 단검이 멀찍이 떨어져 배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리앙이 거친 숨을 토해 놓으며 금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알프치우스의 눈도 자연스럽게 목민관을 향했다.
“끄응.”
일별하던 알프치우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민관 트라쿠스의 손가락이 여지없이 아래로 떨어진 탓이다.
아도니아의 제3목민관 트라쿠스는 프리온가의 일을 방해하기로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검투시합 따위의 소소한 일이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는 보다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알프치우스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조노량은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했다. 비록 승리했으나 힘든 싸움이었다. 무척 지친 느낌이다. 지금껏 싸운 자들 중 가장 강했던 상대였다. 하지만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비검을 사용했다면 오히려 힘들었겠지만 그 짧은 무기를 고집스럽게 놓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사실 좀 어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언제 상대의 단검이 던져질지 알 수 없어서 무척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단검을 사용하는 자들은 대부분 여러 개의 단검을 감춰두고 적절하게 날리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속될수록 조노량은 상대에게 여분의 단검이 없고, 또 지금의 단검도 결코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의 단검은 던지는 용도가 아닌 것이다.
그 이후로는 싸움이 쉬웠다. 한 치가 길면 한 치가 유리한 법. 상대가 빠르다고는 하나 감당 못할 정도도 아니다. 더욱이 무기의 유리함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라면 승부는 뻔했다.
샤마노프와 비교한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샤마노프가 승리할 확률이 구 할 이상은 될 것이다. 중원에서 만약 샤마노프를 만났다면? 백 번 싸워 백 번 모두 패했으리라. 노관장의 실력이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노관장 역시 차기의 단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삼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숨은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 ☆ ☆
검투장의 열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신성 노리앙이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퀴아노프를 꺾으며 결승에 안착했다. 또 반대편에서는 예상대로 지난 대회 우승자인 카카트로스가 결승에 진출했다.
두 사람에게 걸린 배당률은 각각 3.2배와 7.8배.
배당률이 말해주듯 누가 보더라도 카카트로스의 세 번째 우승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리앙이라는 신예의 약진도 만만치 않았다. 퀴아노프가 누구인가? 비록 카카트로스에게 두 번이나 패하긴 했지만 아도니아 제1시합의 터줏대감이었다. 그의 단검에 비명횡사한 검투사의 숫자만 하더라도 두 손으로 셀 수 없지 않은가? 그런 퀴아노프를 잠재워 버린 노리앙의 인기가 치솟는 것은 당연했다.
카카트로스라는 절대 강자를 꺾어주길 바라는 관중들의 심리가 자연스럽게 노리앙에 대한 응원으로 바뀌고 있었다. 카카트로스에게 돈을 건 관중들을 제외하고, 이미 탈락한 검투사들에게 돈을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리앙을 연호했다.
그 연호 소리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육중한 나무문이 들어 올려지며 노리앙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죽 갑옷은 벗어 버린 모습이었다. 노리앙은 작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검투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오후의 햇살이 노리앙의 오른손에 들려진 기이한 모양의 외날 검에 산란되어 흩어졌다.
노리앙이 자리를 잡자마자 반대쪽 나무문도 들어 올려지며 건장한 체구의 카카트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거대한 함성소리가 콜로세움을 가득 메우고 울려 퍼졌다. 제1시합의 영웅 카카트로스의 인기를 반영하는 함성소리였다.
중키의 단단한 체형. 검게 그을린 피부와 깨끗이 면도된 굵은 턱선이 그의 강인함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자리를 잡은 둘은 절차에 따라 금의인을 향해 팔을 앞쪽으로 길게 뻗어 예를 취하고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대단하다 들었소. 카카트로스라고 하오. 잘 부탁드리겠소.”
무척 중후한 음성이다. 깍듯한 예의가 느껴졌다. 어설픈 자들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상대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진짜 실력자는 언제나 상대를 존중할 줄 안다.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상대를 무시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노량 역시 겸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실력의 고하를 넘어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자에 대한 예의다.
검투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이 시합을 끝으로 검투장에서도, 도박판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것이다.
“시작하라!”
금의인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깡마른 몸집의 사내가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대단한 목소리다.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사자후라도 터트리는 것 같다. 검투장을 두어 바퀴는 돌고도 남을 것 같은 울림을 지녔다. 시합을 앞둔 상태였건만 조노량은 엉뚱하게도 그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준비 자세를 확인한 둘은 가볍게 뒤로 물러섰다. 한쪽은 돌격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쪽은 돌격에 대비하기 위한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카카트로스의 돌격으로 승부가 시작했다.
캉!
조노량은 급히 몸을 틀며 좌측으로 돌아나갔다.
손목이 시큰할 정도다. 상대의 무기는 원형 방패와 글라디우스. 가장 전형적인 무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라디우스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울리아리온의 투핸드소드를 정면으로 받아 낸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글라디우스가 무거운 검이기는 하나 투핸드소드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카카트로스의 글라디우스는 투핸드소드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첫 번째 돌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카카트로스는 돌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좌측으로 돌아서며 두 번째 검을 날렸다. 시퍼런 오오라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캉, 캉! 쾅!
글라디우스가 두 번 날고, 연이어 방패가 밀고 들어왔다.
조노량은 오첩도로 방패를 누르고 그 탄력을 이용해 뒤로 번쩍 물러났다.
카카트로스의 글라디우스 사용법은 조노량도 익히 겪어 보았던 가장 평범한 방식이었다. 조노량 역시 크로아지크 검투장에서 수없이 봐 왔고, 직접 부딪혀 보았던 방식이다. 그러나 그 동작에 내포된 위력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반 박자 빠르고, 반 배 정도 더 무겁다.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그 작은 차이가 조노량을 숨 막히게 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물러나며 카카트로스의 글라디우스를 막고, 흘리고, 피해 내야 했다. 이 시합이 끝나면 필히 오첩도의 검날을 손봐야 할 것 같다.
퍽
카카트로스의 방패날이 흐르고 회수되는 틈을 타, 조노량의 오른발이 날아올랐다. 그 발을 두껍게 쇠를 댄 카카트로스의 방패가 가로막았다.
조노량의 몸이 반 바퀴쯤 돌았다. 그리고 반대편 어깨가 방패를 강하게 밀어 버렸다. 살짝 틀어진 방패 틈 사이로 오첩도가 비집고 들어갔다.
카카트로스의 몸이 신속히 조노량의 왼쪽으로 돌아나갔다. 그로 인해 오첩도가 자연스럽게 허공을 갈랐다. 순간 측면을 내준 조노량을 향해 카카트로스의 글라디우스가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이번 공격 역시 조노량의 호흡보다 반 박자 빨랐다. 전 같았으면 무척 당황했을 공격이지만 이미 속도에 대한 훈련은 충분했다. 그리고 속도라면 조노량이 한 수 위였다. 조노량의 몸이 좌측 방향으로 눈부시게 회전하며 오첩도를 회수했다. 회수되는 오첩도의 내측 면에 글라디우스가 걸린다. 마치 운 좋게 막아낸 모양새지만 치밀히 계산된 동작들이다.
까까캉, 퉁
풍차처럼 휘도는 글라디우스와 날렵하게 틈을 헤집는 오첩도가 공중에서 수십 번씩 조우했다.
카카트로스도 조노량의 속도를 잡을 수 없었고, 조노량도 단단한 카카트로스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퀴아노프와의 대결과는 다른 양상으로 시간이 늘어지고 있었다. 퀴아노프 때에는 실제로 부닥치는 시간보다 서로에 대한 견제와 탐색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카카트로스와의 대결은 그야말로 폭풍같이 진행됐다. 한시도 검이 날지 않는 순간이 없었고, 한시도 제자리에 머무는 시간이 없었다.
카카트로스가 전진하고 조노량은 돌았다.
조노량의 환영보가 극성까지 시전되었지만 카카트로스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카카트로스가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카트로스도 상대의 낯선 움직임에 적잖게 당황했고, 조노량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데만도 전력을 투구해야 했다. 우직하게 쫓는 자와 제비처럼 빠져 나가는 자 간의 지루한 싸움이었다.
둘 모두 체력의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없는 대결 구도였다. 그리고 둘 모두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서로가 지칠 것을 기대했지만 근 반 시간에 걸친 접전에도 둘 모두 여전히 첫 움직임과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인내심의 대결이다.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이 가장 원하는 방식의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대결은 지리한 탐색전이 완전히 배제된, 그야말로 화끈한 접전의 연속이었다.
쾅! 퍽! 캉캉
끊임없이 울리는 격타음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치명적 공격들.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화려한 기술들이 난무했다.
어느 사이엔가 둘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쏟아지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땅바닥이 짙은 색으로 젖어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자세히 본다면 조노량이 흘리는 땀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중갑을 걸친 카카트로스와 갑옷을 벗어 던진 조노량의 부담이 같을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과다한 움직임을 보일 때에는 그 정도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치익!
오첩도가 카카트로스의 견갑에 흠집을 내며 타 넘었다. 견갑을 가르고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었지만 처음으로 상대의 방어가 뚫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카카트로스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1시합에서는 더 이상 상대가 없다고 자부했던 자신이다. 그런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자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난 것까지는 좋았다. 언제나 신진 세력이 치고 올라오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상대의 몸놀림이었다.
스스로 빠르지는 않지만 빠른 자들을 잡는 방법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무리 쫓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지치겠지’라는 마음으로 밀어 붙였지만 이 작은 사내는 어디서 힘이 솟는지 지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지쳐 가고 있었다.
눈썹 끝에 매달린 땀방울이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다. 시야를 가릴 지경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투구의 무게가 어깨로 내려앉는다. 좋지 않다.
그로 인해 잠깐 주의력이 흩어진 사이에 일검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두 번째, 세 번째 검을 허용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갑옷이 막아 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관통되지는 않았지만 날카롭게 베인 견갑을 보건대,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의 검에도 오오라가 맺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무색의 오오라? 누구였더라? 이론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무색의 오오라를 가진 기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정오의 기사 제레미엘.
전설 속의 엔젤나이트다. 그의 오오라가 투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무도 그가 엔젤나이트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벌어진 응징의 향연은 아직도 노래로 불릴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의 오오라는 분명 자신의 오오라에 밀린다. 직접 칼을 맞대면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오오라는 상대의 검 본체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었다. 그렇다. 오오라의 순도 면에서는 분명 자신이 한 수 위다. 만약 그가 제레미엘과 같은 종류의 오오라를 지녔다면 자신의 검은 벌써 두 동강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오라의 밀도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밀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아직까지 크게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의 주도권은 상대에게 조금씩 넘어갈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검투를 지켜보던 아도니아 제3목민관 트라쿠스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운 좋은 신출내기라고 생각하던 마음이 싹 가셨다.
크로아지크가 언제 저런 괴물을 키워낸 것일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최근 크로아지크로 간 거물은 없었다. 애초에 전쟁도 소강상태라 포로의 수급 자체가 드물다. 만약 이름 있는 기사를 포획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결론은 크로아지크가 자체적으로 키워 냈다는 것인데, 어떻게 저렇게 성장할 때까지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을까? 재능 있는 자를 발견했다 해도, 저 정도까지 키워 내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렸을 것이다. 선수층이 얇은 크로아지크에게 그런 여유가 있었을까?
최근 몇 년간 크로아지크는 부진의 연속이었다. 십 년 전 최강 삼인방을 마계검투로 보내 버린 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직까지 강호로 취급해 주곤 있지만, 글쎄……. 아나스타시오스, 바실, 크리소스, 스피로스 등이 버티고 있는 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건 무리라고 봤다.
그 와중에 저런 자를 키워낸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다. 저 정도면 충분히 시민궁 시합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여타 크로아지크 출신들처럼 아나스타시오스 등을 넘어서긴 어렵겠지만, 뭐, 충분히 쓸모는 있을 것이다.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면 좋겠는데 말이야.’
트라쿠스는 심복에게 노리앙이라는 자의 신상 정보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느긋이 검투를 관전했다.
어쩌면, 자신에게 쓸 만한 말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트라쿠스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렸다.
☆ ☆ ☆
트라쿠스가 미소를 짓는 그 시간.
왼쪽 끝, 펜스 가장 높은 위치 즉 검투장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아 있는 회색로브의 사내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깊이 눌러쓴 회색로브 아래로 깨끗이 면도된 각진 턱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겨울용 굵은 모직 로브를 착용하고 있는 탓에 주변 사람들이 다 더워질 지경이었다.
언젠가 크로아지크 승급시합 때 검투장 뒤편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던 회색로브지만 한여름인 지금은 적나라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두꺼운 로브로 가려진 그의 체구는 평균 이상으로 건장해 보였다.
로브를 착용하는 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마법사거나, 성직자거나 혹은 평범한 학자이다. 그리고 그 세 직종에 종사하는 자들은 대체로 체구가 작은 편이다. 그런데 회색로브의 사내는 전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건장했다.
그의 목덜미 부근, 로브 안쪽에 작은 펜던트가 은은한 빛을 발했다. 대낮이고, 굵은 로브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주 집중해 보지 않는다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빛이었다. 그로 보아 회색로브의 사내는 마법사나 성직자인 듯했다. 그래도 조금 이상한 것이, 보통 펜던트는 마법이나 신성력이 발현될 때 빛을 발한다.
검투를 관전하는 와중에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할 일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있다.
바로 신성력이나 마법을 이용해 승부 조작을 시도할 경우다. 성직자의 회복의 축복이나 4서클의 헤이스트 마법 그리고 마나 폭주 등 수없이 많은 기술들이 발현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를 구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검투장 곳곳에 위치한 마법사들이 혹시 있을지 모를 마나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직자들은 종교적 특성상 신성력을 믿음에 반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다.
북부의 전사들은 전 대륙에 걸쳐 가장 긍지가 높기로 유명하다. 그런 전사의 땅에서 벌어지는 신성한 승부에 조작을 가한다는 것은 전사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다. 그 벌은 오직 하나, 사형이었다. 당사자는 물론 그 행위에 가담한 모든 자들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회색로브의 사내가 지금 승부를 조작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마나의 유동 없이 마법을 구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한다는 것은 회색로브의 사내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승부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펜던트가 저절로 빛을 발하는 희귀한 종류의 아티팩트라서일까?
회색로브 사내의 시선은 검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오직 조노량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펜던트의 발광량도 조금씩 진해지기 시작했다.
결승전답게 시합이 길어지고 있었다. 둘 모두 상당히 지쳤을 만도 한데, 전혀 박진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관중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힘차고 빨랐다. 그러나 관중들이 보는 것과 달리 지쳐 가는 것은 카카트로스뿐이었다. 반면 조노량은 처음보다 더 왕성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철 체력을 자랑하던 카카트로스는 자신이 체력에서 밀린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시민궁 시합인 ‘에크미’라면 몰라도 아도니아 제1시합 검투사 중에 자신보다 강한 체력을 가진 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 본 카카트로스였다. 타고난 체력도 체력이지만 인간이기를 거부할 정도의 뼈를 깎는 훈련도 있었다.
카카트로스의 턱에 굵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어금니를 악문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패하는 것은 결국 자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기술을 써야 하는가?’
아직 미완성의 기술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 기술을 썼을 경우 자신 역시 온전치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 기술만이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마리였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릴 것인가? 카카트로스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이 시합만 이기면 서른네 해 동안 꿈꿨던 에크미어가 된다. 에크미어가…….
시합이 벌써 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카카트로스의 움직임을 거의 대부분 파악한 조노량은 슬슬 시합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싸워 보았다. 체력적으로도 전혀 힘든 줄을 몰랐다. 무사의 피가 흐르는 조노량으로서는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통쾌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몸 상태만 보자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기들이 이유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강력하게 요동치는 단전의 기운들은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거칠게 약동하는 느낌이다. 내기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으나, 너무 강력하게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오히려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지금 단전의 충만함은 운기를 막 끝냈을 때보다 오히려 더했다. 절대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오첩도가 솜털보다 가볍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빨라지고 더 강해진다. 폭주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마치 앵속이라도 씹어 삼킨 것처럼 기분까지 덩달아 고양되었으니, 냉정히 생각해 보면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조노량은 이제 시합을 끝내고 정제되지 않은 내기를 가라앉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러한 형태의 내기는 자칫 위험을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충만한 내기로 인해 양유(陽維), 음유(陰維) 간의 경계에 강한 압박이 형성되고 있었다. 운기 중이라면 몰라도 내기를 소모시키는 와중에 발생하는 현상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양유와 음유는 독맥(督脈), 임맥(任脈)과 마찬가지로 단절된 두 기로(汽路)이다. 자칫 상하기라도 하면 주화입마의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두 맥의 통로가 뚫린다고 해서 큰 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뚫린다고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뚫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위험도에 비하면 실익이 없는 맥들인 셈이다. 물론 지금 상태가 그 정도로 위태한 것은 아니나, 소모되어야 마땅한 내기가 오히려 증가되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것도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가속이 붙는 느낌이다.
조노량은 여전히 일검, 일검에 혼신의 힘을 담아서 막아내다가, 쉼 없이 진공해 오는 카카트로스의 가슴을 발로 힘껏 밀쳐 냈다. 처음 같으면 어림없는 동작이었으나 이미 꽤 지쳐 있던 카카트로스는 조노량의 발을 크게 허용했다. 갑옷 덕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지만 공격의 맥을 끊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카카트로스는 크게 모욕을 받은 느낌에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자들이 당할 때는 ‘그게 뭐 대수랴’ 했지만 실제로 가슴에 발을 허용하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포로들로 이루어진 크로아지크 출신임에도 전사의 예로 대했건만, 돌아온 것은 모욕이었다. 그것이 검이었다면 피를 흘릴지언정 당당하게 패배를 시인했으리라. 그런데 이런 모욕이라니!
더욱이 공격의 정점, 그 바로 직전에서 맥을 끊어 버리는 발길질은 마치 디뎌야 될 땅이 꺼져 허공을 밟은 듯한 느낌이랄까? 일순간에 힘이 쭉 빠져 버리는 느낌이다.
허전함과 분노가 교차되었다.
그 탓에 끊임없이 진공하던 카카트로스의 진공이 잠시간 멈추었다.
그때 조노량의 신형이 쭉 뽑아져 오르며 오첩도가 원을 그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졌던 댓 걸음 정도의 간격이 찰나지간에 좁혀졌다. 평범한 원이었건만 카카트로스는 본능적으로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본능이 외치는 위기감!
이 세 가지 요소는 카카트로스가 오랫동안 망설였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이성의 끈이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카카트로스의 몸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조노량을 맞이해 갔다. 특이한 점은 몸의 회전력을 팔과 글라디우스가 따라가지 못하고 등 뒤로 기이하게 꺾였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에서 발하는 오오라가 좌우로 십 센티미터 이상 넓어짐과 동시에 길이까지 삼십 센티미터 이상 길어졌다는 점이다.
그 순간 이성을 잃었던 카카트로스도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연습 때 모았던 양을 훌쩍 넘는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회전이 더욱 급해졌고, 마나량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회전력에 착시현상을 일으켰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공격을 가하던 조노량은 그것이 착시에 의한 현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바로 중원에서 말하는 검기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기술은 완성되어 있지 못했다. 회전력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허점이 많았다.
조노량은 단전에 모인 내공을 한껏 개방하며 오첩도에 밀어 넣었다. 거칠게 요동치던 내기가 있을 수 없는 속도로 전신을 치달았다.
그때 조노량의 눈에 관중석 북쪽 끝에 앉아 있는 회색로브의 사내가 들어왔다. 아니, 그 사내가 아니고 그 사내의 붉게 빛나는 두 눈이 조노량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확대되어 왔다. 수많은 관중들 틈에 끼어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거리다.
일주천!
‘헉!’
운기를 한 것도 아닌데, 개방된 기운이 마치 운기를 하듯 전신을 휘돌았다. 더구나 그 속도는 도저히 현실 불가능한 속도였다.
이주천!
그 순간 대자연의 기가 전신 모공을 통해 폭발적으로 흡수되며 단전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양유와 음유의 경계벽인 심유혈로 몰아쳐 갔다. 그야말로 순간적인 일이었다. 조노량 본인조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순간 심유혈이 터져 나갔다.
……어느 순간 눈앞을 가득 메우던 붉은 눈동자가 사라지며 시야가 하얗게 백열했다.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몰아쳐 왔다.
그러나 그 고통도 꿈인 듯 순간적으로 잊혔다.
낭아도가 등을 뚫고 들어와 복부를 관통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왜지?
생각도 잠시, 수없이 점멸하는 흰색 빛덩이들의 폭발과 함께 조노량은 의식의 끊을 놓쳐 버렸다.
카카트로스의 회전력 덕분에 뿌옇게 치솟아 올랐던 먼지가 가라앉았다. 피투성이가 된 카카트로스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통제되지 못한 자신의 오오라가 자기 자신마저 상처를 입혀 버린 것이다. 튼튼하게 만든 가죽 갑옷도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터져 나갔다. 쓰러진 카카트로스의 몸 곳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전신에 빠짐없이 상처를 입은 모양새다. 겉모습만으로는 쓰러져 있는 조노량보다 오히려 더 큰 부상으로 보인다.
관중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 넓은 검투장이 신새벽 황야에서처럼 침묵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검투를 벌이던 두 사람이 붉은 먼지와 함께 한꺼번에 누워 버리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순간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카카트로스의 몸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아직도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는 카카트로스가 땅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겨우 한쪽 무릎을 세웠으나 더 이상 몸을 일으키는 것은 무리였다. 카카트로스의 시선이 그 자세 그대로 조노량을 향했다.
조노량의 옆구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흙바닥을 흥건히 적시고도 모자라 진창을 만들 태세였다. 그의 옆구리 사이로 흐르는 것은 피뿐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명하겠다는 듯 희고 기다란 내장이 꿈틀거리며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카트로스가 눈을 돌려 목민관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