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4화 (14/142)

14. 마계의 대륙 침공 전설

동남쪽으로 하루간의 여정이었다.

아도니아 제1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총 열한 명의 A클래스원이 출발했다. 한 번 출정에 평균 사망률이 이 할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이 중 두세 명은 살아서 복귀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두세 명 중 하나가 조노량 자신일지도 몰랐다. 옆에서 걷고 있는 샤마노프에게 충분히 설명을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검투사로서의 실전은 낯설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다.

한 개 기대와 십여 기의 갈리온라이더들이 일행을 감시했다. 붉은 황야와 끝없는 지평선, 고개를 꼿꼿이 들고 띄엄띄엄 서 있는 비연목만으로 이루어진, 지루한 풍경이다. 아무리 걸어도 수용소 앞마당 풍경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작열하는 태양과 간간히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걸어서 도착한 곳 역시 지금까지의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작은 차이, 높이 삼 장 정도의 회색 기둥 열두 개가 원을 그리며 서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풍경 속에서 그 작은 차이는 충분히 이질적이었다. 아주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기둥들은 일행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기둥 주위로 몇 개의 막사가 세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은 바대로라면 게이트를 지키는 독립부대의 주둔지일 것이다. 두 개 기대 규모라고 했던가? 이런 황량한 벌판에 주둔하는 것은 무척 곤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좀 더 가까이 가자 비연목이 아닌 다른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가지는 없고 꼭대기에만 넓적한 잎사귀가 몇 개 나 있는 키 작은 나무였다. 그 나무들은 호수라기에는 작고, 연못이라기에는 넓은 물을 끼고 자라나고 있었다.

“캬! 물맛이 정말 달고 시원하지. 내가 아는 한 그 연못의 물보다 더 맛있는 물은 없다네.”

아도니아 제2시합에 참가하고 온 크리들이 언젠가 해 줬던 말이다. 찌는 듯한 더위 속을 하루 종일 걸은 후 마신 물이니 그 어떤 물인들 달고 시원하지 않겠는가? 조노량의 생각은 실제로 그 물맛을 본 후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기둥들은 그 연못의 가운데에 자리한 낮은 섬 위에 세워져 있었다. 낮은 섬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섬의 높이가 정말로 낮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면과 거의 높이 차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바위 몇 개를 연못에 던져 넣는다면 섬 전체가 잠겨 버릴 것 같았다. 그 특이한 섬과 황야를 잇는 것은 좁다란 석재 구름다리 하나였다.

일행을 맞이한 것은 웃통을 거의 벗다시피 한 일단의 병사들이었다. 호위해 온 기대들과 서로 안면이 있는지 희희낙락 떠들어 대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런 황량한 곳에 근무하면 사람이 그리운 법이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양 연못으로 향했다.

연못의 한쪽 면에는 식수대로 쓰는 듯 석재로 다듬어진 홈이 있었고, 커다란 바가지가 몇 개 떠 있었다. 수면이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강행군에 지친 병사들은 바가지를 돌려가며 물을 퍼 마시고 서로에게 끼얹으며 즐거워했다. 병사들이 다 마신 이후에야 조노량 등에게 바가지가 넘어왔다.

“헤지크의 물을 맘껏 마실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병사들이 물 마시는 것을 목울대를 깔딱이며 지켜보던 포로들은 그제야 바가지 가득 물을 퍼 마시기 시작했다.

샤마노프가 밝은 미소를 띠며 조노량에게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된통 당한 후에도 여전히 친절하다. 건네준 바가지를 받아든 조노량도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었지만 감로수가 있다면 바로 이 맛을 것이다.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데워진 연못의 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입안에 머무는 싸한 청량감과 함께 달콤한 뒷맛까지 그야말로 물맛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맛이었다.

조노량의 감탄을 바라보며 샤마노프가 미소를 지었다.

“실컷 마셔 두십시오. 제가 아는 한 헤지크의 물보다 맛있는 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동감이었다. 아니, ‘맛있다’라는 단순한 표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정도의 맛이었다. 커다란 바가지를 절반이나 비운 후 조노량은 남은 물을 머리에 끼얹었다. 김이 오를 정도로 덥여졌던 머리가 속살까지 상쾌해졌다. 몇 바가지 더 뒤집어쓴다면 틀림없이 오한을 느꼈을 것이다.

주둔군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갈증을 해소한 일행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크로아지크에서 단련된 병사들과 검투사들에게도 고된 행군이었다. 미처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해 석양이 기울고 있는 지금에야 도착한 것이다.

정상적인 행군이라면 하루 반은 걸려야 하는 거리였지만, 중간에 야영을 하지 않기 위해 속보로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탈출을 염두에 둔 것인지, 식량과 물은 일절 지참하지 않은 상태로 행군했다.

조노량도 다른 자들처럼 큰 대자로 누워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물이 있기 때문일까? 황야와 어울리지 않는 진초록색의 잡풀들이 넓게 자라고 있었다. 불과 몇 장만 벗어나면 먼지가 풀풀 날리는 황야건만 조노량이 누워 있는 곳은 푹신한 초록으로 가득했다. 얼마 만에 맡아 보는 풀 향기인가?

그 진한 향기를 음미하며 누워 있던 조노량은 갑작스럽게 단전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샤마노프와 푸니킨을 포함한 포로들은 편안한 얼굴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행히 중독 현상은 아닌 듯했지만 단전에 느껴지는 후끈거림은 점차 강도를 더해 갔다.

조노량은 급히 가부좌를 틀고 운기에 들어갔다. 그제야 단전에서 꿈틀거리던 열기가 혈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저 친구 왜 저래? 명상이라도 하나?”

“원래 자주 저럽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조노량이 운기하는 모습을 처음 본 병사들이 희한한 듯 쳐다보자 포로들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군.”

병사들은 곧 신경을 끄고 다시 휴식을 취했다.

소주천을 마치자 후끈거리던 열기가 씻은 듯 사라지고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가만히 몸 상태를 점검한 조노량은 내공이 부쩍 증진된 것을 느끼고 뛸 듯이 기뻤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연못물이 내공 증진에 도움을 준 것 같았다. 한 방울이면 십년의 내공을 증진시켜 준다는 공청석유 같은 유는 아니지만 내공 증진에 효험 있는 물이 틀림없었다. 조노량 평생 처음 얻는 기연이었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자들은 아무런 변화도 못 느끼는지 평온한 안색이다.

욕심이 생긴 조노량은 다시 물 한 바가지를 퍼 마셨지만 이번에는 큰 효험이 없었다. 아마도 한꺼번에 많이 먹는다고 효과가 발휘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식사가 준비되었다. 아주 잘 조리된 스프와 부드러운 빵, 그리고 제대로 된 양념을 발라 구운 양고기였다. 게이트에 근무하는 유일한 장점은 풍부한 보급이라 했다. 게이트를 통해 보급받기 때문에 언제나 신선한 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간이 밴 뽀얀 스프에는 잘게 다져진 고기와 가루 낸 향초가 뿌려져 있었으며, 빵은 수용소에서 먹던 것과 달리 입안에서 저절로 녹아 사라질 만큼 부드러웠다. 알 수 없는 양념을 발라 노릇하게 구운 양고기 역시 맛을 위해 조리한 제대로 된 것이었다.

스프 속에서 푹 삶아지고 뭉개진 고기조각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향기로운 스프를 떠먹던 조노량은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정신없이 흘러간 지난 삼 년 동안 몇 번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이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바빴던 세월이니까. 하지만 중원에서 먹던 요리만큼이나 맛난 음식을 대하자 고향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분명히 죽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었다. 분명하지 않은 어떤 순간, 숨이 끊어진 자신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깨어 보니 낯선 세상이었다. 그것도 멀쩡히 살아 있는 몸으로 말이다.

더욱 이상한 일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다시 수많은 상처로 뒤덮였지만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당시에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몸이었다. 보무관에서, 그리고 제현의 뒷골목에서 입었던 그 어떤 상처의 흔적도 없었고, 자질 없는 신체일망정 억지로, 억지로 쌓아 놓았던 내공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제갈가의 무사에게 당했던 상처,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낭아도의 흔적이 없었다. 너무나 희고 매끈한 복부와 등은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었다고? 아무리 상처가 잘 아물어도 낭아도에 당한 상처가 이렇게 완벽하게 아물 수는 없는 일이다. 유엽도에 당해도 한 줄기 징그러운 상처가 남기 마련인데, 하물며 낭아도에 당한 상처임에야 말해 무엇 하랴.

그렇다고 자신의 몸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미간에 잡힌 두 가닥의 깊은 주름과 재미로 보았던 손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다르지 않았다. 낯선 숲에서 깨어나 처음 몸을 움직였을 때는 그런 의심조차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왜 이런 몸이 되었는지, 이곳이 어딘지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어느 할 일 없는 신선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깨끗이 치료한 후, 그것도 예전의 상처까지 모두 치료하고 내공까지 폐한 후에 이상한 세상에 떨어뜨리어 놨다? 그러고는 나 몰라라 돌아가 버렸다?

말이 되지 않는다.

혼란스러웠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밤은 쉽게 찾아왔다. 게이트답게 각양각색의 막사가 세워져 있었지만 포로들은 작고 튼튼해 보이는 막사에 일찌감치 감금당했다. 막사의 주변으로는 밤새 번이 세워질 것이다. 다들 피곤한 안색이었지만 그렇다고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별로 밝지 않은 등불을 마주보며 샤마노프가 입을 열었다.

“게이트를 타 본 적이 있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아주 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먼 옛날, 대륙이 마계의 침공을 받아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고 하지요. 마계의 군대가 쓸고 간 자리에는 인간은 물론 초식동물 한 마리까지 싹쓸이되었답니다.”

일부는 살아남았다.

마계의 몬스터에게 당하고도 살아남은 자들은 그 마기에 물들어 마인이 되고, 괴수가 되었다. 그렇게 마계의 군대는 세를 불려 나갔고, 대륙의 멸망은 현실이 되어 갔다. 남은 인류는 마계의 군대가 아직 힘을 미치지 못하는 북쪽으로, 북쪽으로 쫓겨났다.

드레곤도 사냥했다던 고대의 강대했던 군대도 죽음과 어둠의 힘에는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고대의 다양한 인종들이 어둠의 군대에 쫓겨 모인 곳이 지금의 북부 대륙이다. 고대의 국가들이 연합했고, 수많은 고클래스의 마법사들과 소드마스터들로만 이루어진 군대가 북부에 자리를 잡고 마계의 군대에 대항했다.

하지만 죽음도 넘어서는 마계의 군대에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고, 북부 역시도 오래지 않아 전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혼전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곳 북부를 전사의 땅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수많은 종족들이 몰려들었고 가장 강한 전사만이 살아남았죠. 서로 문화가 다르고 융합될 수 없는 종족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며, 가장 강했던 전사들의 후예로 이루어진 대륙이 바로 이 북부 대륙인 셈입니다. 지금껏 통일된 국가가 세워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들 하죠.”

북부가 마계의 힘에 먹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북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척 척박한 땅이다. 한꺼번에 몰린 인간들로 인하여 살아남은 동물들이 씨가 말랐고, 농작물은 익기도 전에 약탈당했다. 최후에는 다른 인종들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약한 자들은 먹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덕보다, 성욕보다 더 강한 것은 식욕이었다. 여자들이 먼저 죽었고, 원주민과 그 아이들이 죽었다. 마법사들은 등에 칼을 맞아야 했다.

연합은 쉽게 깨져 버렸고, 서로를 불신하여 흩어져 갔다. 단단한 진지를 구축하고 접근하는 모든 자를 죽였다. 그리고 차례대로 마계의 군대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갔다.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엔젤나이트였다. 최초의 등장이며 대륙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등장한 사건이었다.

☆ ☆ ☆

“피난 초기에 대륙 최고의 마법사들에 의해 거미줄처럼 건설되었던 게이트가 혼란의 이십 년을 겪으면서 절반 이상이 파괴된 후 복구되지 못했죠. 그리고 수백 년의 세월 동안 하나둘 그 기능을 잃어 갔습니다. 지금껏 작동하는 게이트는 삼십여 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내일 우리가 이용할 게이트죠. 아마 평생 게이트를 못 타 본 사람이 대부분일걸요. 하하.”

그 이십 년은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한의 세월이었다. 북부로 몰려들었던 수백만의 사람 중 그 이십 년을 온전히 견뎌 낸 사람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전사들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극한의 세월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건장하던 젊은 전사가 피골이 상접한 늙은이로 변화된 시간치고는 지나치게 짧았다. 그러나 그 세월을 버티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간으로서 한계를 극복하고 마계의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존재로 거듭났다. 마지막 삼 년간은 더 이상 인간을 사냥하지 않고도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식량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바로 인간을 사냥하던 마계의 괴수들이 그들의 식량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좀 우스운 일이지만 인간과 마물이 서로를 사냥해 식량으로 삼았다. 지금은 눈살을 찌푸릴 일이지만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식량은 오크였다. 트롤의 피가 의학적으로 얼마나 귀중한 재료인지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먹고, 또 이용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이 이뤄졌다.

마계의 괴수들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어둠의 힘에 물들어 섭취한 자들까지 어둠의 족속으로 만들어 버리는 종류였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괴물들로서 섭취해도 하등 피해가 가지 않는 종류였다.

전자는 어둠에 물든 마인들과 언데드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오크나 오우거, 트롤 같은 것들이었다.

“그중 슬라임이라는 늪지 괴물도 무척 인기 있는 식품 중 하나였다죠. 푸딩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다른 놈들처럼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서 즐겨 먹었답니다. 우웩, 토할 것 같네요.”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또 한 가지 이유는 파죽지세로 중앙 대륙을 집어삼킨 마왕급 괴물 중 대부분이 북부로 넘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북부로 넘어온 마계의 군대는 대부분 먹이사슬의 하단부를 이루는 놈들이었다.

만약 마계의 군대가 온전히 북부로 밀려들었다면 이십 년은커녕 이 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삼 년 덕에 인간 사이의 연대가 다시 이루어졌고, 엔젤나이트들이 넘어왔을 때 그들과 함께 마계의 군대를 물리칠 막강한 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다.

역사상 이 군대보다 더 강력한 군대는 없었다. 그랜드급 소드마스터가 수두룩했으며, 가장 약한 전사도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온전하게 보전된 게이트들은 군대의 기동력을 배가시켜 주었고, 종횡무진한 인간의 군대는 불과 반년도 안 되어 마계의 군대를 지금의 '마계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최북단 볼모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엔젤나이트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북부로 넘어온 일곱 마왕은 단 두 명의 엔젤나이트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추방당했다. 그나마 온전하게 중앙 대륙으로 도주한 마왕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북부에는 참 다양한 형태의 이름이 존재하죠? 노리앙처럼 중앙 대륙의 프라농 지방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베리어투스 같은 스키노 지방냄새를 풍기는 이름도 있고, 자오코프같이 코시악 지방색을 띠는 이름도 많죠. 북부는 그야말로 인종시장 같은 지역입니다. 생김새가 이상하거나 말투가 이상하다고 차별받지 않는 지역은 아마 북부가 유일할 겁니다. 아도니아는 고대 인그리드 왕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세운 도시죠. 그래서 아도니아 이름들에는 유독 무슨무슨 온 같은 이름이 많습니다. 저기 저 갈리온이나 차루아온도 이들이 붙인 이름이죠. 가장 강대한 전사들을 배출했던 하이브답게 북부의 많은 사물들이 인그리드식 명칭으로 고정되었죠.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죠. 북부를 대표하는 두 도시 중 하나가 바로 아도니아니까요.”

“엔젤나이트는 어떤 자들이오?”

“하하, 궁금해 할 줄 알았습니다. 엔젤나이트는 흔히 신의 기사라고 불리는 존재들이죠. 역사상 총 일곱 명의 엔젤나이트가 등장했었습니다. 물론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라진 엔젤나이트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기록으로 존재하는 엔젤나이트 중 네 명이 마계대전 때 등장했다는 말은 이미 했고요. 나머지 세 명은 각기 시대를 달리하며 한 명씩 등장했습니다. 마계대전 때 등장한 네 명은 당연히 다른 존재들이고, 그 후 등장한 세 명 역시 다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기록상의 생김새가 다 달랐으니까요. 머리색은 물론 피부색도 다르고 사용하는 무기도 다 제각각이었죠. 한 가지 동일한 점은 하나같이 인간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는 것이죠. 검의 끝을 보았다는 위대한 그랜드소드마스터인 추파인 경도 그중 한 명과의 대결에서 영원히 검을 잃었죠. 마계대전 때 등장한 목련의 기사의 손에 두 명의 마왕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는 전설은 아직도 노래로 구전될 정도니까요. 일설에는 엔젤나이트 한 명이 마계의 군주 하나를 감당할 만하다고도 하죠. 아, 이건 과장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계 군주는 일반 마왕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니까요. 어쨌든 아쉽게도 마계대전 때 강림했던 유일한 마계 군주 워리놈과의 대결은 이루어지진 않았으니까, 궁금증을 풀 길은 없죠. 하하.

북부에 침략한 마물들을 마계의 문에 몰아넣은 인간의 군대는 중부 대륙으로 눈을 돌렸죠. 이십 년이 넘도록 고향을 그리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묘하게도 인간들과 엔젤나이트가 중앙 대륙의 수복을 위해 내려갔을 때는 군주 워리놈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왕들이 스스로 마계로 귀환한 후였죠. 엔젤나이트들이 두려워 도망쳤다는 설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엔젤나이트 중 한 명인 수국의 기사가 네 명의 마왕에게 협공당해 소멸된 사건은 무척 유명한 이야기죠. 아마 역사상 유일한 사망자일 겁니다. 강대한 마왕 중 하나인 나바스(지옥궁의 어릿광대)가 그 사건의 주역이었죠. 어찌되었든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칠 만큼 워리놈의 군대는 약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엔젤나이트도 무적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된 사건이기도 하고요. 군주 워리놈과 강대한 마왕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도 세 명의 엔젤나이트로서도 버거웠을 거라는 논평이 지배적이죠.”

마물들이 마계의 문으로 도망쳐 고립되자, 엔젤나이트들은 더 이상 그들을 쫓지 않고 위대한 결계를 쳐 마계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은 후에야 인간의 군대를 따라 중부로 내려갔다. 그때 친 결계는 마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어서 인간의 출입은 가능했다. 그 탓에 엔젤나이트들마저 귀천한 후, 신관들이 주축이 된 인간의 군대가 후환을 거두고 땅을 정화시키기 위해 마계의 문으로 들어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그 네 차례의 원정에서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멸이었죠. 참, 마계의 문에도 게이트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마계의 문이 형성되기 전에 건설된 게이트인데, 특이하게도 거울의 방이라는 곳에서는 그곳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워낙 비밀스러운 내용이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도니아 시민궁 내부 깊숙한 곳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을 만한 소문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샤마노프의 이야기는 잠들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삼 년 넘게 이곳에서 생활한 조노량이었으나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 황당함을 감추기도 어려웠다. 특히 마왕이니 언데드니 하는 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옥이니 지옥이니 하는 땡초들의 시답잖은 이야기에도 콧방귀를 뀌었던 조노량이 그보다 열 배는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마치 역사인 듯 읊어대고 있는 것을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염라대왕이 마졸들을 대리고 중원에 현신해 인간들을 잡아먹었다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죽은 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금까지의 동료들을 잡아먹었다고?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강시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아니지, 강시도 죽자마자 되는 것이 아니다. 마교의 비밀스런 연단 과정을 거쳐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한 구가 완성된다고 했다. 물론 애들이나 믿는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첫 검투시합의 긴장감을 풀어 주기 위한 샤마노프의 배려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짧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열한 명의 A클래스들은 삼엄한 경계 속에 게이트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얕은 물이었다. 물 아래 석재의 균열까지 그대로 드러날 만큼 맑고 투명했다.

“왜 걸어서 건너게 하지 않고 다리를 놓은 건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다리를 건너던 샤마노프가 말을 건넸다.

“…….”

멀거니 바라보는 조노량을 향해 샤마노프가 씩 웃더니 말을 이었다.

“보기에는 평온해 보입니다만 저 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흐르지요. 깊이는 무릎 정도지만 걸어서는 건너기 힘들 만큼 거친 물살이죠. 걸어서 건너려고 했다가는 익사하기 십상이죠. 섬을 중심으로 뱅뱅 돌다가 무릎 깊이의 물에 빠져 죽는 거죠. 실제로 빠져 죽은 놈들도 있다니까요. 어? 안 믿으시는군요?”

샤마노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조노량을 보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가죽조각을 꺼내 슬그머니 물속으로 던졌다.

그 순간 가죽조각은 조노량이 눈으로 좇을 틈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잘 보세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갈색 선이 보였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조금 전 샤마노프가 던진 가죽조각이었다. 그 갈색 선은 조금 더 바깥으로 밀려나가 있었고, 보였다 싶은 순간 다시 사라졌다.

“무엇들 하는가? 빨리빨리 움직여!”

감시병들의 재촉에 의해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조노량은 저 잔잔한 물이 가진 엄청난 역동성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섬은 밖에서 보듯 무척 낮고 평평했다. 각진 사각형 돌들을 나란히 박아 넣은 형태의 넓은 인공 구조물로, 그 중앙 쪽에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회색 기둥 열두 개가 원을 그리며 세워져 있었다. 높이는 대략 삼 장 정도였고, 상단부엔 꽃잎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기석이 얹혀 있었다.

그 기둥들의 중심으로 거울처럼 매끈한 대리석 원반이 놓여 있었다. 반경 이 장 정도의 원반에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게 게이트입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마법사만 알겠지만 저 기둥들과 저 원반의 문양들이 텔레포트를 가능케 해 주는 거죠.”

“저기 서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말이오?”

“그렇죠! 저 게이트는 아도니아 십 킬로 밖의 게이트로 통해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으로 이동하면 그 게이트를 지키는 기대가 마중을 나오죠. 이동하자마자 차례로 낚이는 겁니다. 아 참, 말 안 했던가요? 게이트는 한 번에 세 명밖에 이동이 안 됩니다. 장치적 게이트로서는 세 명이 한계라는 게 정설이죠. 5서클 이상의 고위급 마법사가 한 번에 가능한 인원이 다섯 명인 것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거죠. 5서클 마법사가 게이트에 붙는다면 최대 열 명 이상씩 이동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군…….”

“겪어 보면 알아요. 만약 저 게이트가 없었다면 꼬박 다섯 달은 달려야 아도니아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크로아지크는 아도니아 연합에서도 가장 변방이니까요. 어쨌든 아까 말한 대로 반대편 게이트로 나오게 되면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안 그러면 뾰봉- 합체가 되니까요.”

잡담을 나누는 사이 게이트 주둔병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작업이 마무리되었는지 병사들이 포로들을 불러 세웠다. 섬은 오십여 명의 주둔병과 열한 명의 검투사로 북적였다.

세 명의 검투사가 익숙하게 게이트에 서고, 작은 울림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거기 없었다는 듯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보며 크게 놀랐다.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조노량과 샤마노프는 세 번째로 게이트에 섰다. 가장 가깝고 가장 큰 기둥에 선 누군가의 작은 중얼거림이 이어지고 조노량은 흰 빛에 휩싸였다.

<3권에서 계속>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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