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2차 승급 심사
구름 한 점 없다.
북쪽 펜스 아래 작은 그늘을 제외하고는 한껏 기세가 오른 칠월 초의 햇볕을 막아 줄 공간이 없었다.
모두들 따가운 햇살 아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지만 불평을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 건너뛴 후 치러지는 승급심사의 긴장감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심사에 참가하지 않는 자들은 ‘누구누구가 이번 심사에 도전할 것이지만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누가 A클래스가 될 것이고, 누구누구는 B클래스로 강급될 것이 틀림없다. 또 누구는 가능성이 반반이다’ 따위의 짐작들을 나누며 흥분해 있었고, 심사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긴장감을 달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중 노리앙의 승급도 제법 흥미를 끄는 쟁점 중 하나였다. 승급이 틀림없다는 평가가 대세였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았다. 원인은 노리앙의 성격에 기인했다.
승급심사의 상대를 고를 때는 비교적 약한 자를 택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 명만 이겨야 한다면 모르지만 승급을 위해서는 상위 클래스 두 명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월등한 실력이 아니라면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연거푸 두 번 이기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에 더해 A클래스에는 특수한 문제가 존재했다. A클래스의 절반 이상이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이다. 또한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자들 중 다시 절반은 B클래스가 도저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팔찌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A클래스의 상위 랭커들마저 쩔쩔 맬 실력이었다. 북부에서는 그런 자들을 따로 분류해 ‘스크래치’라고 불렀다. 싸움꾼 혹은 찌꺼기라는 뜻의 고대 방언에서 기인한 명칭이다.
때문에 B클래스에게 도전받는 자들은 항상 A클래스의 최하위 이십 퍼센트 정도였다.
조노량이 승급에 실패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바로 그 부분에 주목했다. 노리앙이라는 사내가 지난 육 개월간 보여준 성향으로 봐서는 적당히 약한 자를 고르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럴 경우 승부는 뻔했다. 소드마스터의 위력은 겪어 보지 않은 자는 절대 모른다. 조노량은 아직 이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다행히 그가 약한 자를 고른다면 스크래치라고 불리는 그룹에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승급에 실패하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크로아지크 검투사들은 곧 시작할 승급심사에 유난히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도신(刀身)의 너비가 한 치 반에 길이가 석 자, 도파(刀把)의 길이가 한 자, 도합 넉 자에 가까운 길이다. 이곳의 일반적인 검과 비교했을 때 한 자 반가량 길다. 도신의 길이는 일반적인 중원 검의 길이와 유사하나, 도파는 일반적이지 않다. 내공이 부족했던 시절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노량이 특별히 만들어 썼던 양손용 손잡이의 습관이 지금의 첩도에도 적용되어 있었다.
고동(古銅)은 중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둥근 형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 검의 일자형 호수(護手)를 그대로 박아 넣었고, 운두는 작고 둥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도를 움직일 때 편하도록 했다. 도수(刀穗)는 아직 매달지 않았지만 적당한 놈을 구하면 달 생각이다.
조노량은 도배(刀背)를 아래로 향하게 하고 한 손으로 도배의 중간을,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 아래를 받친 채 눈높이까지 끌어 올렸다. 도의 날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마치 뭔가를 겨누는 듯한 모습처럼 보인다. 어느 쪽으로도 휘지 않은 도인(刀刃)이 점(点)이 된다. 만족스럽다.
이번에는 칼날을 살펴본다. 면도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예리하게 갈렸다. 대장간의 거친 숫돌과 어렵게 구한 연리석 조각, 그리고 가우렐리온이 아껴 두었던 갈리온 가죽 하나를 통째로 망가트린 결과물이었다.
이곳 기준으로는 지금 정도만 해도 충분히 날카롭다고 할 만했지만 중원의 기준으로는 예리함이 많이 모자랐다. 하지만 글라디우스처럼 쇠고리에 걸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하다. 칼집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도첨(刀尖)도 조금 뭉툭한 편이다. 중원에서보다는 조금 더 뾰쪽하게 만든다고 만들었지만 찌르기 위주로 특화된 검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다. 뭐, 애초에 도라는 무기가 찌르기보다 베기 위주인 것을 감안할 때 이 정도면 충분히 첨예(尖銳)하다.
중원의 도처럼 날렵하지도, 이곳 검처럼 강인해 보이지도 않는다. 모양만으로 봤을 때는 좀 어정쩡한 편이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무기답게 모양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 많이 투박하다. 혈조(血爪)를 만들지 못한 것도 좀 아쉽다. 혈조를 만들기에는 기술이 부족했다. 억지로 만들자면 못 만들 것도 없었지만 혈조를 잘못 팠다가는 도의 강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조노량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원형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검투사들이 클래스별로 끼리끼리 모여 소곤거리거나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황토바람이 한 차례 훈련장을 맴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원하다.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회색로브의 사내가 눈에 띄었고, 번쩍이는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부소장이 그 옆에 앉아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보기에도 불편한 갑옷을 꼬박꼬박 챙겨 입고 다니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 번질거리는 기름땀이 본인도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두 개 기대가 완전무장한 채 관중석과 펜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기사나 종사급으로 보이는 자들이 관중석 곳곳에 박혀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승급심사는 수용소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위험성이 높은 행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중들 대부분은 아도니아의 일등 시민이었다.
어지간히 지위가 있거나 부유하지 않고서는 이곳 크로아지크 수용소까지 들어와 이들 검투단의 승급심사를 관전할 수 없었다. 저들 대부분은 곧 열릴 아도니아 제1시합에 대비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온 유력인사나 최상급 경제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여타 검투단에 비해 조건이 불리했다.
펜스 위에 기대서서 아래쪽을 바라보는 쿤나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스마르의 모습이 눈에 띈다. 아마도 오늘 승급심사의 감시를 맡은 두 개 기대 중 하나가 쿤나 기대인 모양이다.
쿤나의 실력은 알 수 없지만 지난 가을 갱도 붕괴 사고에서 보여준 과감성과 결단력만으로도 지휘관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해 보였다. 아마도 강한 전사일 것이 틀림없다.
이야기를 마친 스마르가 훈련장 가운데로 나섰다.
“지금부터 승급심사를 시작한다. 규칙은 전과 동일하다. 신참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우선 A클래스부터…….”
다른 수용소나 일반반에서 이동해 온 자들을 위해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조노량은 이미 알고 있는 규칙들이다.
“S클래스에 도전할 자는 나서라!”
관중들과 검투반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제스가 롤에게 다시 도전할 것인지도 관심사였다. 하지만 제스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대로 S클래스에 대한 도전자가 안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만큼 S클래스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의외의 인물이 S클래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도전하오.”
브레우스라는 삼십 대 후반의 건장한 사내다. 검게 그을린 얼굴 곳곳에 흩어진 굵직한 상흔들이 강인한 인상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관중들과 달리, 검투반원 간에는 약간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스크래치 그룹에 속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마나를 배제했을 때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스마르는 한동안 브레우스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좋다. 지명자는?”
“롤.”
그 말에 예니에프와 투덕거리고 있던 롤이 고개를 돌려 브레우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제길! 또 난가? 내가 그렇게 만만하단 말이냐?”
예니에프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고, 도끼눈을 뜬 롤의 주먹이 예니에프의 뒤통수로 날아갔다.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는 예니에프에게서 시선을 거둔 롤이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왜 매번 나만 피곤해야 하는 거냔 말이다. 진짜 피를 봐야 나를 내버려 둘 건가?”
롤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스마르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도전자가 있는가?”
“…….”
더 이상 나서는 자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크로아지크 검투단 최강의 남자라는 예니에프나 흑색 갈리온의 더드리안 쥬시아누스에게 도전할 만큼 대담한 자는 흔치 않다.
준비 절차는 전과 같았다. 롤과 브레우스가 회색로브의 마법사에게 가 마나 팔찌를 풀고 와서 양쪽으로 대치해 섰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쥬시아누스 역시 마나 팔찌를 해제했다는 점이다. 롤의 폭주를 막기 위한 수용소 측의 특별한 배려다.
롤은 여전히 둥근 라운드실드와 글라디우스를 장착하고 있었다. 북부의 가장 기본적인 무장인지라 S클래스의 롤을 평범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롤은 절대 평범한 자가 아니다. 광전사 롤의 이름은 아도니아 검투계에서도 모르는 자가 없을 만큼 유명했다. 아마도 출신지인 세스카시보다 지금이 더 유명할 것이 틀림없다.
반면 브레우스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투핸드소드를 등에 메고 등장했다. 그가 들고 있는 투핸드소드는 글라디우스보다 두 배 이상 길고 세 배 이상 무거운 무기였다. 쥬시아누스가 사용하는 검과 동일하다. 하지만 쥬시아누스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브레우스에게는 버거워 보였다.
“휴……. 유언이라도 미리 해 둬라, 브레우스.”
“한 수 배우겠소.”
“유언으로는 적당하지 않군. 배워서? 저승에라도 가서 써먹을 셈이냐?”
어떻게 보면 기분이 상한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체념한 것 같기도 한 롤의 말투. 더 이어질 것 같은 롤의 말을 스마르가 끊었다.
“롤, 준비되었습니까?”
말을 이으려던 롤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나? 브레우스.”
브레우스가 등에서 거검을 풀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
스마르가 들어 올렸던 팔을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롤의 눈에 조금씩 핏발이 오르기 시작했다. 롤의 걸음이 움직였다.
“크크크, 이 세스카의 롤이 그렇게 우습더란 말이냐?”
브레우스는 두 손으로 거검을 움켜쥐었다. 깊게 가라앉은 브레우스의 눈빛이 롤의 핏빛 눈빛과 대조를 이뤘다. 일말의 움츠림도 느낄 수 없다.
그 역시 수많은 전투를 치른 백전노장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싸우기도 전에 주눅 들 만큼 노긋노긋한 사내가 아니었다.
브레우스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며 롤을 맞이했다.
첫 번째 격돌은 브레우스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렸던 거검이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휘잉
거검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조노량의 귀에까지 전달됐다.
쾅!
브레우스의 투핸드소드가 롤의 라운드 방패를 가격했다. 투핸드소드를 쓰는 방법은 하나다. 무게와 힘을 통한 강성 위주의 공격. 진로의 변경은 절대 없다. 검을 만나면 검을 부수고, 방패를 만나면 방패를 부순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막는 것을 전제로 한 공격이었고, 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전진하는 공격이었다.
푸석
롤의 방패가 단 한 번의 격돌로 너덜너덜해졌다.
롤의 글라디우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글라디우스를 감싼 붉은 오오라가 거칠게 떨고 있었다. 분노의 표현이리라.
롤은 반쯤 쪼개지다시피 한 방패를 브레우스에게 거칠게 집어 던졌다. 그리고 뒤이어 붉게 물든 글라디우스가 날았다.
방패를 들었던 왼손은 날갯짓하듯 일직선으로 뻗어나갔고, 거친 오른손만이 적을 향했다.
퍽!
쾅!
브레우스는 방패를 가슴으로 받았다. 그리고 연이어 날아드는 글라디우스를 막아냈다.
가슴을 가격한 방패의 타격, 제법 큰 충격임에도 브레우스는 전혀 주춤거리지 않았다. 주춤거리는 순간 뒤이어 날아오는 글라디우스에 목을 내놔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크래치들이 그러하듯이, 브레우스 역시 스크래치라는 명성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노련하고 강인한 사내였다.
☆ ☆ ☆
첫 번째 충돌이 있은 후, 두 사람은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연이어 격돌했다.
글라디우스, 무거운 공격을 위해 탄생한 북부의 대표적인 검이다. 그만큼 두껍고 무겁다. 하지만 아무리 무겁다 한들 브레우스가 들고 있는 투핸드소드에는 미치지 못한다.
광기에 휩싸여 제멋대로 휘도는 한 손, 그리고 무겁게 내리꽂는 두 손.
겉으로 드러난 두 검의 격돌은 금방이라도 롤의 글라디우스가 부서져 나갈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는 격돌 때마다 조금씩 글라디우스가 뒤로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핑!
검의 파편이 튀어 올랐다.
누구의 검인지는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분명 한쪽의 검이 부서져 나갔다. 인상만으로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글라디우스의 파편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롤의 눈빛이 완연히 핏빛으로 물들었다.
글라디우스에 맺힌 붉은 오오라의 색상도 점점 진해져 갔다.
쾅!
격돌과 동시에 튕겨져 나갔던 글라디우스의 짧은 검신이 재차 날아올랐다.
그 순간 놀라운 속도로 브레우스가 뒤로 물러났다. 그 덕에 롤의 검이 목표를 잃고 허공에 멈춰 섰다.
브레우스는 투핸드소드의 검날을 살펴보았다. 검이라기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울 정도로 두터운 검신 곳곳이 움푹 패여 있었다. 두 번 연달아 부닥친 부분은 손가락 한 마디 깊이까지 파였다. 이래서는 아무리 투핸드소드라도 버텨 낼 재간이 없다.
목표를 잃고 숙여져 있던 롤의 고개가 반쯤 들렸다. 브레우스를 향해 치켜떠진 롤의 눈빛이 광기로 물들어 갔다.
“크르르.”
롤의 느릿한 걸음이 시작되었다. 브레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좌측으로 돌아나갔다. 제스 때와 같은 양상이다.
롤이 비스듬히 원을 그리며 좌측으로 돌아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브레우스의 신형이 급하게 우측으로 튕겨져 나오며 롤의 하단을 향해 거검을 휘둘렀다. 글라디우스는 전혀 닫지 않을 거리에서 거검이 롤의 발목을 노리고 묵직하게 휘돌아 들어왔다.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쾌속했다. 그대로라면 롤의 발목이 잘려 나가거나 부러지고 말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롤이 달리 광전사라고 불리겠는가.
롤은 크게 한 발자국 전진해 들어갔다. 마치 일부러 거검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동작으로 브레우스의 목덜미도 글라디우스의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롤은 스스럼없이 글라디우스를 날렸다. 그대로라면 롤은 발목을 잃고, 브레우스는 목을 잃을 판이다.
누가 보더라도 브레우스가 손해다. 하지만 롤 역시 전사로서의 생명이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돌이키기 힘들 것 같은 상황이 순식간에 해제되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로 브레우스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면서 아슬아슬하게 글라디우스를 흘려 버렸다. 그리고 브레우스의 거검이 롤의 발목에 닿았다 싶은 순간 롤의 발바닥이 교묘하게 들리고, 그 안으로 거검이 빨려들듯 사라졌다.
한마디로 거검이 롤의 발아래 밟혀 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롤의 글라디우스가 재차 쏟아져 내렸고, 브레우스는 파고들던 기세를 살려 그대로 태클을 들어갔다. 브레우스의 두꺼운 어깨가 롤의 가슴에 작렬하자 롤의 신형이 튕기듯 주르륵 밀려나갔다. 그 틈에 브레우스는 거검을 주워 들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브레우스의 선택은 훌륭했다. 튕겨 나가던 롤의 불가능할 정도의 도약으로 브레우스가 있던 자리로 되날아오며 글라디우스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롤의 글라디우스는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흉험함을 더해 가고 있었다.
둘의 접전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서로 숨 쉴 틈 없이 몰아쳤고, 찰나의 순간에 공수가 교차했다. 억세고 냉정한 무인과 광기에 휩싸인 맹수의 대결. 맹수의 거센 발톱이 무인의 가슴을 찢어발길 듯 사납게 날뛰었지만 무인은 잘 버텨 내고 있었다.
브레우스의 의외의 선전에 관중들과 검투반원들은 손에 땀을 쥐고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브레우스가 투핸드소드를 들고 나온 이유는 분명했다.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브레우스가 롤의 오오라를 막기 위해서는 보통의 검 이상의 검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투핸드소드로도 오오라로 둘러싸여 있는 롤의 글라디우스를 온전히 막아 내기에는 부족했다. 접전이 더해 갈수록 투핸드소드의 칼날은 조금씩 부서져 나갔다.
그래도 브레우스의 활약은 눈부셨다.
S클래스의 롤을 상대로 크게 밀리지 않는 전투력을 보여주며 스크래치의 자존심을 살려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둘의 격차는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치지 않고 몰아치는 롤의 기세와 달리 브레우스의 숨결은 거칠게 요동쳤다.
S클래스이면서도 실력 면에서는 나머지 둘에 비해 많이 처지는 롤이다. 그런 롤이 S클래스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 지치지 않는 기세였다.
검에 오오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력이 소모된다. 갓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자들은 보통 오 분을 넘기지 못한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마스터들도 삼십 분을 넘기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롤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오오라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세를 더해 가면서 말이다.
롤이 광전사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브레우스가 선전했지만 결국 롤의 검 아래 무릎을 꿇고 말았다.
쾅!
마지막 파성이 울림과 동시에 투핸드소드의 두꺼운 검신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검이 부러지자 브레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 달아났다. 우직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브레우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쥬시아누스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 뒤를 빠르게 롤의 그림자가 따르고 있었다.
브레우스의 의도를 눈치챈 쥬시아누스가 자신의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일어섰다. 어느새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에도 묵빛 오오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쥬시아누스라 해도 오오라를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로 롤의 검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콰앙!
지금까지와는 다른 파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라와 오오라의 격돌이었고, 엄청나게 기세가 오른 롤의 글라디우스와 묵빛 오오라를 가득 머금은 투핸드소드의 격돌이었다.
달려오던 롤이 주춤 물러섰다. 생각 이상의 반탄력이 롤의 오오라를 뒤흔든 것이다.
“멈춰라! 세스카의 롤이여―.”
롤의 글라디우스가 새로운 상대를 찾아 휘둘러졌다.
콰앙!
또다시 롤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멈춰라! 세스카의 롤!”
서너 번의 격돌이 더 있고서야 롤의 눈동자에 어린 핏빛 적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끄응―.”
롤의 검이 아주 힘겹게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마치 싸우려는 자아와 멈추려는 자아가 치열한 싸움이라도 벌이는 모습이다. 검을 내리는 동작이 지금까지의 어느 동작보다 힘겨워 보였다.
“끝났군.”
검이 완전히 내려갔다. 롤은 아직까지 붉은빛을 머금은 눈빛으로 쥬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무척 지친 표정이다.
“왜 항상 나란 말이냐? 피곤하단 말이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롤에게는 죽이지 않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이었다.
“롤, 승!”
스마르의 짧은 선언이 있었다.
빠르게 장내가 정리되었다.
“A클래스에 도전할 자들은 나서라.”
스마르의 말이 떨어지자 일곱 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중에는 기이한 모양의 칼을 덜렁덜렁 들고 나온 조노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마르의 시선이 조노량에게 향했다가 다시 그의 손에 들린 칼로 옮겼다.
푸른빛을 띤 날이 척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인다.
스마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날을 세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검은 날을 예리하게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면도를 한다거나 질긴 물건을 자를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를 위한 무기는 굳이 그럴 필요성이 없다. 단단한 갑옷, 즉 플레이트 메일이나 체인 메일 등은 베기도 힘들뿐더러 베는 것이나 치는 것이나 치명적인 것은 똑같다. 또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면 꼭 날카롭지 않아도 베는 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무기를 예리하게 하는 것보다는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예리하게 다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날카롭다는 것은 얇다는 것을 의미했고, 얇다는 것은 또 강도가 약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아무리 예리하게 갈아 봐야 한두 번의 전투로 금세 쓸모없어질 것이 뻔하다. 날을 예리하게 세우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허영일 뿐이다.
안 그래도 얇아 보이는 칼에 날까지 갈다니, 이번 승급심사나 제대로 견딜지 의문이다.
스마르는 그가 지난 육 개월간 오후 수련을 포기하고 대장간에서 시간을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저 어정쩡한 칼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실망스러웠다.
스마르의 시선이 맨 앞쪽에 나선 사내에게 옮겨 갔다.
조노량의 시선도 스마르를 따라 맨 먼저 나섰던 사내를 향했다.
두어 달 전 이송되어 온 사내다. 켈커티스 기대장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적당한 키에 다부진 체구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와 검게 그을린 피부색 그리고 그 위를 가르는 굵직한 상처들, 전형적인 북부인의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북부의 최대 도시 아도니아 반대편에 서서 당당히 버텨 온 켈커티스. 수백 년을 이어 내려온 아도니아에 비해 역사는 짧으나 북부를 대표하는 전사의 도시로 알려진 북부 최강 도시였다. 또한 커트리안과 쥬시아누스, 스마르의 출신 도시이기도 했다. 켈커티스 출신이 바로 이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주류였다.
베리어투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경력이나 실력 면에서 A클래스에 모자라지 않는 사내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송 후 바로 A클래스로 임명되지 못했다. 그 외에 자오코프라는 자 역시 이상하게도 A클래스에 임명되지 못하고 B클래스에 머물고 있었다. 그 증거로 둘은 B클래스임에도 마나 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 둘은 오늘 승급심사에서 A클래스로 승급될 것이 확실했다.
“상대를 지목하라.”
그가 지목한 상대는 인니라는 중급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내였다. 그와는 훈련 때 이미 우열을 가린 적이 있었다. 확실히 베리어투스보다 한 단계 아래 실력이었다.
아마도 승급심사 따위에서 힘을 빼기 싫다는 의도이리라. 그렇다 해도 A클래스의 중급이라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거꾸로 당할 소지도 다분했다.
그에 이어 나머지 두 남자와 세 명의 고참 B클래스 사내들도 차례로 상대를 지명했다.
예상대로 지목된 사람들은 A클래스에서 약체로 평가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늘 지목당하는 A클래스의 하위 그룹은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급심사 때마다 A클래스와 B클래스를 번갈아 오가는 신세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A클래스라는 명패를 달았던 만큼 절대 만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중 일부는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 해도 스크래치라고 불리는 극강의 전사들 아닌가.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B클래스 도전자들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마지막으로 스마르의 시선이 조노량에게 머물렀다.
“지목하라.”
그 순간 푸니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신을 지목해 달라는 도발이었다. 지난번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던 푸니킨은 오랫동안 승급심사를 별러 왔다. 마나 팔찌만 풀 수 있다면 저 조그만 검은머리 사내 정도는 단숨에 두 동강을 내 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조노량은 힐끗도 안 하고 전혀 의외의 상대를 지목했다.
“샤마노프.”
순간 지켜보던 검투반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샤마노프가 누구인가? A클래스 랭킹 7위로 인정받는 크로아지크 최강 전사 중 하나이자 조노량의 전담 교관 격이 아니던가. 한동안은 매일, 최근 서너 달간은 주에 하루씩 꼬박 조노량을 훈련시킨 인물이었다.
검투반원들은 그가 최근 들어 샤마노프와 박빙의 승부를 펼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샤마노프가 마나 팔찌를 차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승급심사에서는 마나 팔찌를 벗게 된다.
승부는 뻔했다. 마나 팔찌를 찬 샤마노프도 못 이기는 노리앙이 마나 팔찌를 벗은 샤마노프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노량에게 내기를 걸었던 검투반원들은 한숨을 쉬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 ☆ ☆
“저 친구 미친 거 아닌가?”
“대단하군. 샤마노프를 지목하다니.”
“무슨 속셈이지?”
“허, 저 노리앙이라는 친구, A클래스로 가기 싫은 건가?”
“B클래스가 아무래도 살아남기에는 유리하지.”
“비겁한 놈이군.”
“그 동안의 정리로 샤마노프가 봐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용감한 거야, 비겁한 거야?”
“비겁한 자에게 검의 응징을.”
곳곳에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묵묵히 스마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의 도전에 잠시 멈칫했던 스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명당한 A클래스들과 함께 샤마노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일으켰다.
샤마노프의 시선이 잠깐 커트리안을 스쳐지나갔다.
커트리안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당사자인 샤마노프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커트리안과의 은밀한 대화를 마친 샤마노프의 얼굴에 예의 그 해맑은 웃음이 묻어 나왔다. 안 그래도 최근 조노량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던 샤마노프는 이번 기회에 진정한 소드마스터의 위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도전자는 총 일곱 명, 베리어투스, 자오코프, 게일러, 브로트, 니타, 헤리엇, 노리앙이었고, 도전을 받은 자는 인니, 작슨, 아메조프, 푸트, 코니터스, 아무조프노티우스 그리고 샤마노프였다.
누구 하나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도전받는 그룹인 인니와 샤마노프는 소드마스터였고, 푸트와 작슨은 스크래치로 분류된 자였다.
그리고 나머지 비교적 약체로 평가되는 코니터스나 아무조프노티우스, 아메조프도 두 명의 강자를 연이어 누르고 A클래스가 된 자들이었다.
도전자인 베리어투스와 자오코프는 포로가 되기 전 기대를 이끌었던 기대장으로 소드마스터가 분명했고, 니타는 스크래치였다. 그는 지난 승급심사에서 푸트와 자니프스키에게 연달아 패하며 B클래스로 주저앉았다. 아마도 명예회복을 다짐하고 심사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가 첫 번째로 지목한 상대가 바로 푸트라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 외 게일러와 브로트는 입문 단계긴 하지만 최근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하긴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감히 A클래스에 도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A클래스 랭킹 5위인-노리앙에게 지목당하지 못해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푸니킨을 꺾은 적이 있는 노리앙이라는 작은 사내도 만만찮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마나 팔찌를 차긴 했지만 A클래스 랭킹 5위를 꺾었다는 것은 그만 한 실력이 뒷받침된다는 의미였다. 단지 그가 지명한 상대가 샤마노프라는 것이 승급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헤리엇이라는 애송이는 왜 승급심사에 도전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약체로 논외의 대상이었다.
이번 승급심사는 한 번 건너뛴 만큼 많은 강자들의 격돌이 예상되었고,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팽배해져 있었다.
“베리어투스 대 인니는 남쪽, 노리앙 대 샤마노프는 북쪽, 자오코프 대 작슨은 동쪽, 헤리엇 대 코니터스는 서쪽이다. 각자 팔찌를 풀고 위치로 이동한다.”
검투반 구십여 명이 동시에 훈련할 수 있을 만큼 넓고, 임시 검투장으로도 사용되는 공간이다. 네 방향에서 동시에 시합을 진행한다고 해도 서로 부딪힐 염려는 별로 없었다. 물론 부딪힐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운이고 실력이었다.
스마르의 지시에 따라 각자 마나 팔찌를 풀고 자신들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마나 팔찌를 착용하지 않은 도전자 그룹이 먼저 위치를 잡고 상대를 기다렸다. 물론 베리어투스나 자오코프는 예외였다.
조노량은 북쪽 공간에 먼저 가 자리를 잡았다. 승급심사는 정오에 시작되었다. 비록 롤의 시합이 있었지만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
조노량은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서남쪽으로 조금 기울긴 했지만 그림자가 반 자 이상 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전투에서 태양의 위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조노량은 대충 자리를 잡고 샤마노프를 기다렸다.
우연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북쪽 구역은 안전 때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관중들에게서 가장 먼 위치였으며, S클래스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가장 가까웠다.
그 때문에 남쪽 관중석까지 가서 마나 팔찌를 풀고 와야 했던 샤마노프가 다른 조보다 늦게 자리를 잡았다.
“노리앙, 지겹지도 않습니까? 늘 겨루면서 승급심사에서까지 이 샤마노프를 지목하다니, 너무하시는군요.”
샤마노프는 자리를 잡자마자 과장되게 엄살을 떨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한껏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노량의 시선이 샤마노프의 무기에 가 멈췄다. 단창은 평소에 쓰던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살상을 피하기 위해 창끝에 꽂아 놓았던 둥근 쇳조각이 빠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물은 평소 샤마노프가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크기는 비슷했으나 각 그물코마다 아주 작은 갈고리들이 무수히 달려 있었다. 평소처럼 뒤집어썼다간 잘게 다져질 판이었다.
늘씬하게 큰 키에서 뿌려대는 그물 공격은 조노량에게 여전히 까다로웠다.
샤마노프 역시 조노량의 무기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들고 나오던 목검이 아니었다. 하긴 승급심사에 목검을 들고 나오는 어리석은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샤마노프는 북국의 전사답게 좋은 눈을 가졌다. 그 눈이 노리앙의 검을 자세히 살폈다. 북부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폭이 좁은 형태의 외날 검이었다. 더구나 길이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길었다. 저래서는 오오라를 응집시킨 글라디우스와 만나면 여지없이 동강나 버릴 것이다. 더구나 칼등에는 일부러 멋을 부렸는지 검붉은 선들이 어지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에 멋을 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샤마노프는 잠깐 무기를 바꿔 볼까도 생각했지만, 곧 단창으로도 충분히 잘라 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 만들었다는 검이 그겁니까? 실용적이지 못하군요. 길이를 원한다면 차라리 저처럼 단창을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걸로 충분하오.”
“아쉽군요. 모처럼 만든 검인데 망가져 버리겠군요.”
“…….”
또 대답이 없다. 유난히 말을 아끼는 남자다. 그 정도 비벼댔으면 친해질 법도 한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왠지 거리감을 만드는 남자다.
그 동안 겪은 노리앙이라는 사내는 커트리안이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전투 감각만큼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발전 속도도 자신의 예상보다 월등히 빨랐다. 하지만 그 발전이라는 것이 단지 육체적인 것뿐이라면 문제가 있다.
쓸 만한 검투사가 되려면 마나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단지 실력 있는 스크래치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커트리안의 예상은 빗나간 것일지도 몰랐다. 샤마노프는 오늘 그에게 소드마스터의 벽을 절감케 한 후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발전이 없다면 그때는 커트리안이 잘못 본 것이리라.
☆ ☆ ☆
이때 검투장 중간에 위치한 스마르의 짧고 간결한 외침이 온 검투장을 울렸다.
“준비! 시작!”
동시에 네 방향에서 검투가 시작했다.
샤마노프의 단창에 뿌연 오오라가 맺혔다. 사람에 따라 오오라의 색이 바뀐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뿌연 빛깔의 오오라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어찌 보면 살짝 안개가 서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런 색이라면 오오라의 밀도를 짐작하기 어렵겠다는 한가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준비를 하시죠? 노리앙.”
여전히 자세를 잡지 않는 노리앙을 바라보며 샤마노프가 가볍게 경고했다.
“이건 실전이란 말입니다. 긴장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답니다.”
조노량은 천천히 오첩도를 가슴 높이까지 끌어 올렸다가 털어 내렸다.
명문을 타고 올라온 기가 순간적으로 오첩도에 실렸다가 거짓말처럼 거둬졌다. 기의 수발이 자연스럽다. 동선 역시 아주 매끄럽다. 만들면서 수없이 들어 봤던 오첩도이기에 자연히 그 무게도 익숙하다.
웅
털어 낸 오첩도를 다시 눈높이까지 끌어 올리며 기를 주입하자, 마치 피를 갈구하듯 가벼운 떨림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봐 왔던 노리앙의 준비 자세. 샤마노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쇠그물을 흔들기 시작했다. 역시 조노량에게도 익숙한 샤마노프의 공격 패턴이다.
위잉!
흔들리던 쇠그물이 공간을 덮었다. 탐색에 가까운 공격이다. 조노량은 일위진천환영보를 가볍게 펼치며 쇠그물의 범위에서 물러났다. 이름을 되뇔 때마다 멋쩍어지는 보법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 특별히 보법을 펼치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방위를 밟고 있을 정도로 체화되었다.
펼쳐진 그물이 날카로운 각을 그리며 꺾여 들어왔다. 샤마노프의 그물은 뻗어질 때 한 번, 거둬들일 때 한 번, 이렇게 두 번의 공격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공격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거세게 나뒹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거둬들이는 것이 아니고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공격이 가미되는 탓이다. 벌써 수십 번은 당한 수법이기 때문에 조노량은 그물의 마지막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순간 단창이 격하게 공간으로 뻗어져 나왔다. 쇠그물이 미처 거둬지기도 전이었다. 이것 역시 충분히 예상된 공격이다. 하지만 그 빠르기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오첩도를 들어 단창을 튕겨 냈다. 단창에서 강력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뿌연 오오라에 둘러싸인 단창의 위력이었다. 익숙지 않은 이질감이다.
‘이것이 오오라인가?’
조노량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 단창의 궤적을 따라 몸을 날렸다.
샤마노프는 마치 자석에라도 딸려 오듯 단창과 함께 회수되는 조노량의 신형을 보며 가볍게 몸을 틀었다. 그 가벼운 움직임만으로도 조노량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샤마노프에게 있어서도 조노량의 반격은 익숙한 것이었다.
둘은 가뿐하게 서로의 위치를 바꿔 자세를 잡았다.
샤마노프의 시선이 힐끗 오첩도를 스쳤다. ‘퉁’하고 튕겨지듯 가벼운 격돌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칼이 부러졌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워낙 허약해 보이는 칼이어서 한 번쯤 살펴본 것이었다. 역시 부러지지는 않았다.
샤마노프가 머리 위로 쇠그물을 돌리기 시작했다. 가볍지 않은 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한 손으로 옮겨 잡고 늘어트렸다.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무리가 따르지 않을 만큼 유연한 자세였다.
윙! 윙!
샤마노프의 그물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각도에서 뻗어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른손에 쥔 단창에서도 무럭무럭 오오라가 뿜어져 올라왔다. 쇠그물이 먼저일지, 단창이 먼저일지도 짐작할 수 없다.
순간 단창이 바닥을 쓸듯이 하반신을 노리며 휘돌아 들어왔고, 쇠그물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보법을 펼치며 그 둘의 범위를 간신히 벗어났다.
샤마노프는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고 느낀 순간 좌측으로 몸을 틀며 조노량의 반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조노량은 평소처럼 샤마노프의 좌측 허점을 파고들지 않고 회수되는 단창을 강하게 내리쳤다.
탕!
샤마노프는 단창을 쥔 오른손에 급히 힘을 주었다. 꼴사납게 단창을 놓칠 뻔했기 때문이다. 샤마노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검이 아닐지라도 오오라가 응집되어 있는 단창이었다. 일반 검으로 잘못 치다가는 그대로 동강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흉험한 무기다. 그런 단창을 저런 허약해 보이는 검으로 막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더구나 평소 목검을 사용하는 노리앙은 무기 간의 부닥침을 극도로 싫어했지 않은가? 그 두 가지가 샤마노프가 단창을 놓칠 뻔한 이유였다.
조노량 역시 이번 격돌로 확신을 얻었다. 칼에 충분한 기를 싣는다면 소드마스터의 오오라도 버텨 내지 못할 성질의 기운이 아니었다.
샤마노프는 푸니킨처럼 마나를 다룬다는 것 하나로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자가 아니었다.
노리앙이 접전을 피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샤마노프는 시험이라도 하듯 마나를 가득 실은 단창을 연속적으로 뻗어내기 시작했다. 한 번 뻗는 것만으로도 서너 번씩 찌르고 휘돌려졌다. 그때마다 노리앙은 특유의 희한한 몸놀림을 보이며 피해 내거나 이상한 검을 들어 막아 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전과 달리 무기 간의 부닥침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저 허약한 검이 언제까지 버틸지 궁금해졌다. 샤마노프는 더욱 기세를 올리며 단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탓에 쇠그물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조노량의 칼이 직선으로 뻗던 단창을 거세게 걷어 내며 샤마노프의 코앞까지 붙어 왔다.
단창과 쇠그물 모두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 무기였다.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는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 틈을 파고든 조노량의 오첩도가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샤마노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샤마노프는 거리를 벌리기 위해 정신없이 물러나고 방향을 선회했지만, 조노량은 마치 끈이라도 달아 놓은 듯 샤마노프의 신형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샤마노프의 짧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끊어져 나갔고, 얇은 여름 마의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조노량의 검이 휘돌 때마다 붉은 선들이 현란하게 공간을 수놓았다.
샤마노프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너무 좋은 것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빠른 칼놀림 속에서 그 무늬까지 구별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마노프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붙은 막대기를 빠르게 휘돌렸을 때처럼 현란하게 느껴졌다.
카캉! 캉!
그 붉은 선들이 자신의 몸을 갈라올 때마다 단창을 들어 아슬아슬하게 막아내야 했다. 그때마다 거센 쇳소리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자신의 단창과 노리앙의 외날 검이 벌써 수십 번 넘게 충돌했다. 이때쯤이면 상대의 검이 부서져 나가야 정상이었다. 기실 샤마노프의 오오라는 크로아지크 검투반에서도 최상급에 해당했다. 다른 자들의 오오라처럼 선명한 색상을 띠지 않아서 그렇지, 그 밀집도는 A클래스에서 스마르를 제외하고 최강이었다. 커트리안의 지시만 아니라면 벌써 롤 정도는 충분히 제압하고 S클래스에 오를 수 있었다고 자부하는 샤마노프였다. 그런 자신이 혼신의 힘을 실어 휘두르는 단창에 부닥치고도 거침없이 쇄도해 오는 저 검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노리앙의 검에는 오오라가 맺혀져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아직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 그런데도 멀쩡한 저 검은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샤마노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니 미쳐 버리기도 전에 자칫 꼴사나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샤마노프가 밀리네?”
“어? 정말?”
“저거 무늬만 오오라 아냐?”
“좀 약해 보이긴 하지. 뿌연 게 색상도 흐릿하잖아.”
“그래도 대단하네. 이거 잘하면 내기에 이기겠는데?”
B클래스의 사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관중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뚱뚱한 중년인이 좌측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심사 때도 고지식해 보이는 삼십 대 사내를 대동하고 시합을 관전했던 후덕한 남자였다.
“저 친구 검놀림이 제법이구먼?”
“지난번보다 월등히 좋아졌는데요?”
“한 번에 한 등급씩 상승이라? 역시 눈여겨봐야 할 선수구먼.”
“저 정도 검투사를 왜 그 동안 시합에 내보내지 않은 걸까요?”
“비밀병기로 써먹을 생각인 걸까?”
“마나를 다루지는 못하는 것 같은데, 비밀병기로는 좀 무리지 않을까요? 상대의 오오라가 형편없어서 그렇지, 제대로 마나를 다루는 상대를 만난다면 좀 힘들 거라 생각됩니다만…….”
화려한 색상의 통천을 둘러 감은 뚱뚱한 남자는 삼십 대 사내의 질문에 대꾸하는 대신 말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지시했다.
“저자가 2시합에 나온다면 이백 골드, 1시합에 나온다면 무조건 백 골드를 걸게.”
“케언공? 거꾸로 말하신 거 아닌가요?”
“제대로 말했네. 2시합에 이백 골드, 1시합에 백 골드네. 잊지 말게나.”
한동안 넓은 검투장을 좁다하고 뛰어다니던 샤마노프는 단창과 쇠그물을 열다섯 번이나 연거푸 쏟아내고서 겨우 조노량을 떼어 놓을 수 있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는 조노량과 달리 샤마노프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망신도 망신이지만 체력적인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 조노량을 만났을 때와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샤마노프는 북쪽 펜스에 붙어 앉아 있는 커트리안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커트리안은 살짝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샤마노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저 검은 더 이상 허약한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말로만 듣던 마법검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눈을 어지럽히는 붉은 선들도 그랬고, 자신의 오오라를 받아내고도 멀쩡한 강도가 그랬다. 얼핏 봐도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조노량이 마법사가 아닌 바에야, 그것도 5서클 이상의 고위급 마법사가 아닌 바에야 언감생심 마법도구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마법검은 현세대 최고의 마법 클래스인 7서클의 마법사도 힘겨운 작업이라 했다.
만약 그가 마법사였다면 이런 곳에서 썩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그의 전사적 능력은 도저히 마법사가 흉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샤마노프는 다시 차분히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오오라라는 이점이 아니더라도 실력 면에서는 자신이 한 수 위였다. 미세한 차이지만 승부를 가르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샤마노프의 예상대로 이후 접전의 주도권은 다시 자신에게 넘어왔다. 아까처럼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시간이 좀 걸릴지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목숨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불구를 만들지 않을 정도의 상처라면 커트리안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조노량은 뭔가 미심쩍은 마음에 잠시 수세로 전환하며 연속적으로 차기를 시도했다. 순간적으로 대여섯 번의 기가 실렸다가 거둬졌다.
‘이상하다.’
☆ ☆ ☆
검을 낼 때, 그때 온몸의 신경을 검 끝에 집중하라. 기를 쓰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보무관의 가르침이며, 삼류 무사들이 검을 쓰는 방법이었다. 검을 내는 순간, 그 순간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오직 한 점! 검과 검이, 검과 살이 닿는 그 순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집중도와 내 무기의 강도는 비례한다.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상대가 집중한다면 십중팔구 내 무기가 상하게 된다. 검면은 검날을 받을 수 없다. 검이 봉과 달리 면을 갖는 이유다. 날로 받았을 때는 그 면의 두께만큼의 강도를 갖는다. 하지만 면은 날의 두께만큼의 얇은 철판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그만큼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내 무기가 상대의 몸과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타격하는 그 순간 집중하지 못해 상대에게 힘이 남아 있다면 내 자신이 위험해진다. 흔히 말하는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다. 일부러 살을 내주는 미친 짓을 하는 놈은 없겠지만, 이미 살을 내준 상황이라면 상대의 뼈를 깎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 검이 단번에 상대를 베지 못하고 묶이게 되면, 그 순간 자유로운 상대의 검은 내 목을 노릴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상대의 무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대가가 바로 양패구상(兩敗俱傷)이다.
조노량과 같은 삼류 무사에게는 무척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내공이 보잘것없는 자들은 있는 내공을 최대한 집중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 내거나 흘려 버려야 한다. 명문 대파의 제자로 갓 출도한 어설픈 애송이들이 높은 내공을 보유하고도 어이없이 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또한 삼류 무사들이 뒷골목을 지배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보가촌 출신의 고아로 제현의 뒷골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조노량은 힘을 집중해야 하는 시점을 잘 안다. 명문 대파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기의 수발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힘이 넘치는 자들은 굳이 힘을 모을 필요가 없지만 힘이 모자란 자들은 쥐어짜서라도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버텨낼 수 있는 것이다. 힘 조절? 삼류 무사에게 조절할 힘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조노량은 명문가의 제자들처럼 검기를 남발하는, 저기 저 샤마노프처럼 끊임없이 오오라를 뿜어내는 낭비에는 익숙지 않다. 단 한 점, 그 시점에 집중하는 것으로 족하다. 차기를 이룬 지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오랜 습관은 조노량으로 하여금 지금의 상황을 민감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오첩도에 계속 기를 주입하고 싸웠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가 소모되는지, 아니면 사라지는지. 몇 번 연속해서 기를 주입해 보던 조노량이 도달한 결론은 오첩도가 기를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미미해서 느끼지는 못했지만 분명 오첩도는 조노량이 뿜은 기를 먹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기가 사라지지 않고 오첩도에 머물고 있음을.
스팟!
필요한 만큼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다. 조노량의 왼쪽 어깨로 서너 개의 잔금이 가며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샤마노프의 그물이, 날카로운 고리들이 스치고 지나간 결과였다.
조노량은 정신을 집중했다. 혼란스러웠지만 고민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연속해서 뒷걸음질하던 조노량의 오첩도가 회수되는 그물을 타고 날았다.
날카로운 반격이었지만 이미 조노량의 패턴에 익숙해진 샤마노프는 단창을 마중 보내는 것으로 가볍게 상황을 해소했다. 오첩도가 길다고는 하나 단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조노량 역시 미련 없이 추격을 포기하고 변화를 기했다. 원래 변화보다는 힘과 쾌를 중요시하던 조노량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유난히 변화에 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좀 더 변화에 신경 쓰고 있었다.
찔러 가던 오첩도가 과격한 호선을 그리며 꺾여 나갔다.
샤마노프가 한 걸음 물러나며 단창을 날렸다. 놀라운 빠르기다. 중원에서도 단창을 쓰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단언컨대 샤마노프만큼 빠른 찌르기를 구사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아, 물론 조노량과 같은 삼류 무사들 중에서 말이다. 조노량 정도의 사내가 악가창이니, 소림봉 따위의 거창한 무공을 경험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조노량은 그런 샤마노프의 공격을 여유 있게 받아넘기는 자신이 신기했다. 받아넘기는 정도를 넘어서 조노량의 오첩도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샤마노프 역시 조노량의 반격을 예상했다는 듯 단창을 회수하며 그물을 날렸다. 그물은 마치 단창이나 된 듯 빠르게 찔러져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넓게 퍼져 조노량의 머리를 노렸다.
공격에 나섰던 오첩도가 급히 선회하여 날아온 그물을 공중에서 튕겨 냈다.
툭
급박한 전투 중에 들리는 아주 미세한 소리.
제대로 된 무사라면 무기를 쥔 순간 그 무기는 이미 무기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여야 한다. 조노량은 오첩도로 전해지는 미세한 단절음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몇 올 되지는 않겠지만 그물의 올이 오첩도에 의해 잘려 나갔다.
조노량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오오라로 무장한 단창은 오첩도의 날카로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물은 달랐다. 그 육중하고 넓은 그물 전체에 마나를 실을 수 없을뿐더러 얇은 철사로 이루어진 그물이 오오라를 견뎌 내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시도해 볼 만했다.
조노량은 다음 번 그물을 기다렸다. 공격을 튕겨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물을 잘라 내기 위한 반격을 준비했다.
그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단창을 회수하며 견제의 의미로 던진 그물이 넓게 펼쳐졌다. 굵게 뭉쳐진 상태가 아니라면 훨씬 일이 쉬울 것이다.
조노량은 머리 위로 덮치는 그물을 피하지 않고 모든 기를 오첩도에 집중했다.
촤라라락
공간을 가르며 날아오는 그물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을 길게 늘이기라도 한 것처럼 날아오는 한순간 한순간의 전진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물이 조노량의 몸을 덮치기 위해 하강을 시작한 그 시점, 조노량의 신형은 그물의 하강 속도보다 빠르게 아래로 꺼지듯 내려갔다가 우측으로 솟구쳐 올랐다.
샤마노프에게 있어서 이번 공격은 가벼운 견제성이었다. 예상대로 가볍게 피하는 조노량을 확인하며 샤마노프는 그물을 회수하려 했다.
그 순간 조노량의 오첩도가 회수되기 직전의 그물을 베었다. 빠른 눈을 가진 샤마노프가 그 움직임을 못 봤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공격의 의미를 깨닫기에는 그 공격이 통상적인 범주를 벗어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날이 없는 무기로 유연한 그물을 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오오라를 둘러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베기 위해서는, 아니 부숴 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강한 저항이 있어야 했고, 그물은 그 정도의 저항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샤마노프는 조노량의 칼에 맞아 조금 빠르게 흙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물을 예상했다. 공중에서 회수되거나 바닥에서 회수되거나 그게 그거였다. 떨어진 그물을 얌전히 회수하거나 오히려 바닥에 튕겨지는 반발력을 이용해 역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오첩도가 그물의 허리를 갈랐다. 그 순간 샤마노프는 오첩도에 작은 아지랑이가 어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물이 갈라졌다. 그물의 허리가 절반 넘게, 오첩도가 닿는 부위보다 조금 더 길게 베어졌다.
‘어떻게 더 넓은 범위를 벨 수 있었지?’
그 자체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순간적인 당황이 더 컸다. 전장에서, 그리고 검투장에서 그물이 찢어지는 경험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절반 넘게 베어진 경우는 없었다.
처음에는 베인 부위의 무게만큼 그물을 감아쥔 손끝이 허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어서 베어지지 않은 남은 절반 부위로 쏠린 무게에 의해 잠깐 동안 그물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었다.
그 작은 틈을 비집고 조노량의 오첩도가 샤마노프의 옆구리를 노리고 쇄도해 들어왔다.
하지만 샤마노프도 오랜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전사였다. 순간적인 당황으로 목숨을 내줄 만큼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다. 샤마노프는 급히 단창을 휘돌리며 좌측 뒤편으로 물러났다.
조노량의 칼이 목표물을 잃고 허공을 부유할 때, 샤마노프의 왼손이 빙그르르 돌아가며 찢겨진 그물을 휘돌렸다. 직감적으로 더 이상 그물을 펼쳐서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 샤마노프가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 그물을 휘둘러 버린 것이다.
갈라진 만큼 길어진 그물이 조노량의 목을 노리고 휘감겨 들어왔다. 하지만 충분한 통제력을 갖기에는 그물의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다.
샤마노프의 예상보다 그물의 원심력이 좀 더 컸고, 딱 그만큼 출발이 늦었다.
원심력이 크다는 것은 위력이 강하다는 말도 되겠지만, 그 무게를 살리기 위한 출발 속도가 더디다는 단점도 있었다. 미리 휘돌려서 충분한 가속도를 갖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말이다.
그 작은 차이는 조노량에게 필요한 만큼의 여유를 줬다. 그물이 충분한 속도를 얻었을 때, 이미 조노량도 위치를 바꿀 만큼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휘어지는 무기가 가진 공통의 문제점, 즉 순간적인 변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조노량이 휘둘러지는 그물의 측면에 선 순간 샤마노프는 아찔해지고 말았다. 말하지 않아도 조노량의 의도를 예감할 수 있었다.
그 예감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반쯤 베어져 유난히 얇게 보이는 그물의 허리를 조노량의 오첩도가 다시 갈랐다.
샤마노프는 최선을 다해 그물을 회수했다. 그 덕에 오첩도가 살짝 빗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조노량의 오첩도에 베어지고 남은 몇 가닥의 올마저 샤마노프 자신의 힘을 못 버티고 그대로 뜯어져 버리고 말았다.
샤마노프는 공중으로 튕겨져 추락하는 그물을 멍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물은 넓게 펼쳐지며 생애 마지막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승기를 잡은 조노량의 공격에 급히 충격에서 벗어나 단창을 휘둘렀지만 그물을 잃은 샤마노프는 조노량의 공격을 적절히 방어해 내지 못했다.
샤마노프는 그 후로도 제법 오랜 시간을 버텼지만 결국 서너 군데의 자상을 입은 끝에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쭉 뻗어진 단창이 공허하게 허공에서 멈추었고, 샤마노프와 교차하며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의 조노량이 오첩도를 샤마노프의 복부에 대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줘 긋는다면 샤마노프는 내장을 쏟아 내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른 자들의 시합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상황에서 검투장의 모든 시선이 샤마노프와 조노량의 시합에 집중되어 있었다. 샤마노프와 조노량 모두 속도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런 자들의 시합인 만큼 눈이 돌아갈 정도로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있었다. 갓 시합을 끝낸 조마저 미처 호흡을 고르지도 못하고 숨을 죽이며 둘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그런 시합이 마침내 끝이 났다.
그 동안의 움직임이 무색할 정도로 일순간에 모든 동작이 정지되었다.
깊은 자상은 아니지만 시합 도중 정신없이 흩뿌려지던 핏줄기가 동작을 멈춘 순간 그 자리에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노리앙이라는 사내가 제법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팔찌를 푼 샤마노프를 꺾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마나 팔찌를 찬 샤마노프조차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던 사내가 팔찌를 풀고 소드마스터에 복귀한 샤마노프를 이긴 것이다.
샤마노프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복부 바로 앞에 멈춰져 있는 노리앙의 칼을 바라보았다. 폭은 그럭저럭 봐 줄 만했지만 그 두께는 부엌칼로 쓰면 적당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얇은 외날 검이었다. 샤마노프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 검의 날이었다. 시퍼런 날에 눈이 시릴 정도다. 글라디우스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작은 스침만으로도 자신의 육체를 가르고 피를 뽑아 낸 이유가 저것이었다. 그 가냘파 보이는 날은 넓은 파형을 이루며 거침없이 뻗어 있었다.
샤마노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노리앙의 외날 검은 어디에도 이가 빠진 부분이 없었다. 적어도 수십 번, 많게는 백 번 넘게 공격을 주고받았다. 자신의 오오라가 한껏 실린 단창을 받아 내고도 날조차 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리앙, 승!”
아득히 들려오는 스마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경직되었던 샤마노프의 자세가 허물어졌다. 아, 이렇게 지쳤던 적이 언제였던가.
☆ ☆ ☆
첫 번째 A클래스 승급 시합에서는 두 가지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A클래스 승급이 확실시되던 베리어투스가 인니에게 패했고, 소드마스터인 샤마노프가 장시간의 접전 끝에 신예인 노리앙에게 지고 말았다.
비록 소드마스터라고는 하나 그 경지가 낮다고 평가받았던 인니가 베리어투스를 꺾은 사건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지만, A클래스에서도 상위 랭커인 샤마노프가 노리앙에게 패한 사건은 정말 충격이었다. 이번 노리앙의 반란은 시합이 끝나고도 여러 가지 의문을 유발했다.
오오라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샤마노프의 단창이 가냘파 보이는 노리앙의 기형검을 부숴 버리지 못한 것도 의문이지만, 샤마노프에게 몇 개월째 농락당하다시피 했던 노리앙이 팔찌를 푼 샤마노프를 꺾어 버린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샤마노프의 쇠그물이 잘려 나간 사건은 노리앙이 마나를 다루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억측을 낳았다. 물론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이 투명한 불꽃이 없듯 투명한 오오라도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고, 또 시합 내내 노리앙의 외날 검에는 어떠한 색상의 오오라도 덮인 적이 없었다.
나머지 두 시합은 예측과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경솔한 도전자 헤리엇은 코니터스의 해머에 왼쪽 어깨가 망가지는 뼈아픈 교훈을 안고 물러났으며, 자오코프는 예상대로 작슨의 글라디우스를 간단히 부숴 버리며 2차전에 진출했다.
곧이어 벌어진 두 번째 조의 시합도 누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숨 가쁜 접전이 이어졌다. 니타는 어렵게 푸터를 꺾으며 복수에 성공했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두 번째 시합을 진행할 수 없었으며, 게일러는 아무조프노티우스를 꺾기는 했으나 체력 손실이 너무 커 다음 시합에서 오오라를 사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나마 게일러는 승리하기라도 했지만 브로트는 겨우 오 분간 오오라를 연발하다가 제풀에 지쳐 노련한 아메조프에게 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두 번째 시합에 나서게 된 자는 노리앙, 자오코프, 게일러 단 셋뿐이었다.
자오코프를 제외한 노리앙과 게일러가 다음 시합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친 것으로 판단되자, B클래스 첫 번째 시합이 먼저 진행되고 나서 A클래스 승급을 위한 두 번째 시합이 이어졌다.
“자오코프, 상대를 지명하라.”
첫 번째 지명권을 받은 자오코프는 피어릿이라는 스크래치를 선택했고, 게일러가 지명한 자 역시 헝프린이라는 스크래치였다. 첫 번째에서 지명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그 두 명의 실력이 A클래스로서 부족함이 없을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뜻했다.
스마르의 시선이 조노량을 향했다.
“노리앙의 상대는 나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명권을 박탈하고 상대를 정해 주는 일은 종종 있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검투반의 공식적인 반장으로서, 시합의 진행자로서, 스마르의 권력은 그만큼 컸다. 새로 이송된 포로들의 클래스를 정해 주는 것조차 스마르의 권한이었다. 그 말은 곧 시합의 승패와 관계없이 그의 한마디로 클래스가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런 점에서 상대를 지명해 준 스마르의 조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바로 스마르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스마르가 누구인가? S클래스의 괴물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검투반의 최강 그룹인 A클래스의 공식 서열 1위가 바로 스마르였다. 그는 칠 년 전 검투반으로 온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다. 비록 S클래스에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쥬시아누스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일 만큼 절대적인 강자였다.
나지막한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커트리안을 제외한다면 검투반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스마르지만, 기본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는 북부인들로서는 스마르의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심지어는 관중석까지 웅성거림으로 소란스러웠다. 관중들 대부분이 검투에 미쳐 있거나 검투시합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다. 그들 중 스마르를 모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도니아 제1시합의 영웅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검투시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불패의 스마르, 냉혈의 도살자라는 그의 별명을 들어보지 못한 자가 없을 만큼 유명했다.
“너무 불공정하지 않은가?”
쥐상의 사나이, 부소장 로뜨 쿠아클라의 톤 높은 목소리가 관중석으로부터 튀어 나왔다. 여성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아무리 점잖게 말해도 전혀 무게감이 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뜨는 한껏 무게를 잡으며 스마르를 내려다보았다.
“자네는 명예로운 아도니아 검투사가 아닌가? 그런 자가 어찌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 따위를 상대한단 말인가?”
스마르의 입가로 슬쩍 조소가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켈커티스의 명문 제시우스 가문의 스마르가 아도니아의 검투사라니?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란 말인가?
무표정한 스마르가 부소장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비록 포로로 잡혀 왔으나 난 명예로운 북국의 전사요. 전사로서 그의 실력을 검증하려는 것이며, 승급심사의 진행권은 나에게 주어진 권리로 알고 있소. 아도니아의 쿠아클라 가문이 켈커티스의 제시우스 가문을 우습게보지 않는다면 기사로서의 명예를 존중해 주시기 바라오.”
자신이 명예로운 전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도니아의 검투사로서가 아니라 켈커티스의 기사로서임을 분명하게 밝힌 말이었다.
비록 속 좁은 로뜨였으나 전사를 존중하는 북국의 정서상 대놓고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 관중석에 자리한 많은 아도니아시의 실력자들에게, 자신이 소장도 아닌 부소장의 알량한 권력을 이용해 상대를 핍박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말대로 승급심사의 진행권은 전적으로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단장인 스마르에게 있었다. 표면적으로 승급심사는 검투단의 내부 행사였다.
게다가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비록 포로들로 구성되었지만 아도니아시에서 존중받는 집단이었고, 그 검투단의 단장인 스마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중요한 검투 시합을 망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직접적으로 시합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부상을 핑계로 선수를 교체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자들로 편성하거나, 고의적인 패배를 지시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무조건 상대방을 죽이도록 지시한다면 로뜨로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마르를 제거하고 다른 자로 대체하면 되지만 그건 사후 조치일 뿐이다. 그 한 건의 사건으로 자신은 아도니아 시민들 사이에서 무능력한 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 뻔했다. 원로원 진출을 꿈꾸고 있는 로뜨로서는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용소의 명예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장 아드리안과 달리, 자신은 장래의 야망을 위해서라도 경력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전후 사정을 재 보니 뭐 하러 끼어들었는지 은근히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결론은 이쯤에서 적당히 무마하고 모양 좋게 물러나는 것이 이로웠다.
마침 스마르가 적절히 한마디 해 준다.
“쿠아클라 가문의 용맹한 기사 로뜨 부소장님의 공평무사하신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려에 존경을 표하며, 그 기대에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로뜨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포로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모습을 관전 중인 아도니아의 일등 시민들에게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선 가치가 있었다. 오히려 좋은 결말이다.
“제시우스 가문을 존중하고, 그 적자인 그대의 명예를 존중한다. 또한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단장인 그대의 권리를 존중한다. 그대의 처리가 그대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정도면 서로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며 부드럽게 타협점을 찾은 셈이다.
스마르는 로뜨를 향해 정중히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언제나 무표정한 스마르의 눈가에 이례적인 짜증이 묻어났다. 스마르의 시선이 좌측을 향했다.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이 그를 받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조노량의 시선도 커트리안을 향했다.
커트리안의 고개가 한 번 끄덕여졌다. 조노량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 육 개월간 검투반에서 생활하면서 검투반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가 자신을 주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육 개월간 그와는 불과 서너 마디밖에 나누지 않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샤마노프도 그랬고, 지금 스마르 역시 그렇다. 과연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자신을 향해 끄덕인 고갯짓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스마르의 음성이 조노량의 주의를 돌렸다.
“예니에프, 승부를 지켜봐 주시오.”
자신이 직접 시합에 참가하니 심판을 봐 달라는 말이었다.
“예이!”
롤의 상처를 돌보고 있던 예니에프가 말끝을 올리고 촐랑거리며 중앙으로 나섰다. 마무리 짓지 않은 붕대가 달랑거리며 풀어져 버렸다. 롤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덩달아 엉덩이까지 들썩거렸다.
“자들, 무기를 준비하고 팔찌를 풀고 오세요.”
예니에프의 말에 따라 참가자들은 마법사에게 가 차례로 마나 팔찌를 풀었다.
스마르의 무기는 북부에서 제법 귀하다는 브로드소드(Broad Sword)였다. 넓이는 조노량의 오첩도와 비슷하지만 두께가 월등히 두껍고 길이도 조금 더 긴 양날 검이다.
형태는 투핸드소드와 비슷하나 투박하기는 글라디우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날도 그다지 날카롭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리함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북부 대륙의 검답다. 아마도 수용소에서 제작되면서 어느 정도는 변형된 형태이리라.
시합을 진행할 세 개 조가 각자의 위치에 섰다.
운기조식을 통해 충분히 체력을 회복한 조노량이나 비교적 손쉬운 승리를 따낸 지오코프와 달리, 게일러는 제법 오랜 휴식을 취했음에도 많이 지쳐 보였다.
조노량은 저렇게 지칠 정도로 무식하게 오오라를 뿜어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필요할 때만 적당히 사용한다면 힘을 절약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위치를 잡은 스마르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검이 특이하군.”
“오래 정성을 들였소.”
“잠시 시험하겠다. 그대의 실력과 그대의 검이 내 검을 막지 못한다면 그 목은 그대의 목이 아닐 것이다.”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시험은 시험이되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직감적으로 느끼기에도 스마르의 기도는 샤마노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저런 자를 이길 수 없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조노량은 삼류 무사답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걸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싸움을 피한 적도 없었다. 패배야 당하기도 하는 일이지만 꼬리를 마는 것은 구역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다. 재기? 어림없는 소리다. 한 번 우습게 보인 자를 받아 줄 만큼 뒷골목도 그리 녹녹한 세계는 아니다. 그래서 조노량은 악종이 되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비겁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암기는 기본이었고, 뒤에서 찌르거나 잠자리를 덮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암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사용할 수 없었다. 중원에서는 당연한 일도 여기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만약 조노량이 암기를 사용한다면 그날 밤으로 시체가 될 것이다. 검투반을, 아니 수용소를 벗어날 수 없다면 절대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쉽게 질 생각도 없었고, 더욱이 자신의 목을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조노량은 태양의 위치를 살폈다. 서쪽으로 반쯤 기운 상태다. 마주보는 것만으로 크게 불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좌측으로 조금 돌아서 태양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작!”
예니에프의 목소리가 검투장을 울렸고, 스마르의 브로드소드가 조노량을 향했다.
☆ ☆ ☆
스마르는 말이 긴 사내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목적에 따라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다.
자신은 상대를 시험할 것이며, 상대가 시험에 통과한다면 살아남을 것이요,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 역시 신의 뜻일 뿐. 대지의 여신 로리안이 그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자신이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스마르는 신중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빨이 있는 상대라면 여우 한 마리를 사냥할 때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하물며 샤마노프를 꺾은 자를 상대하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십 분만 버티기 바란다. 노리앙.’
천천히, 하지만 묵직한 기도를 뿜어내며 접근하는 상대를 바라보던 조노량도 발걸음을 떼었다. 실력에서 밀릴 수는 있어도 기세에서는 절대 밀리면 안 된다.
서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불과 서너 발자국 만에 돌격 거리를 잃었다. 다시 두어 걸음 내딛는 사이에 서로의 무기가 맞닿았다.
일반적인 글라디우스였다면 이쯤에서 격돌이 시작되어야 정상이지만, 둘의 무기는 글라디우스보다 반 배 이상 길었다. 사실은 한 걸음 전쯤에서 격돌이 시작되었어야 했다.
끼릭
둘의 검이 맞닿으며 작지만 귀를 찢는 소음을 토해 냈다. 브로드소드와 오첩도가 주인을 대신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스마르의 무심한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스쳤다. 최소한 상대는 위협 앞에 웅크리는 자가 아니다.
스마르의 브로드소드가 물러났다. 아니, 물러난 것이 단순한 착각이기라도 한 걸까? 물러났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조노량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브로드소드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잔뜩 흥분한 듯 웅웅거린다.
쾅!
글라디우스보다 날씬한 몸체의 브로드소드와 역시 글라디우스보다 왜소한 몸집의 오첩도가 격돌한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시끄럽다.
쾅!
부닥쳤다고 생각되는 순간, 벌써 두 번째 진공이 이어졌다. 묵직하고도 빠른 격돌이 연이어 벌어졌다. 바짝 붙어 서서 휘두르는 만큼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발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상반신은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현란하게 움직인다.
스마르의 브로드소드에 푸른 오오라가 어린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햇살을 받아 날카로운 은빛을 뿌린다.
콰광!
조노량은 이런 무식한 격돌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스마르의 칼이 몸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이다간 몸이 두 동강이 날 것이 자명하다.
쾅!
조노량의 마른 턱이 도드라진다. 그 위로 돋아난 근육이 푸들거린다.
샤마노프와는 또 다른 강함이다. 샤마노프가 현란하다면 스마르는 정직하다.
샤마노프의 움직임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 공격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반면에 스마르의 공격은 예측한 방향에서 시작됨에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 공격을 빤히 보면서도 몸을 움직여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노량은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무리하면서까지 그 공격을 일일이 막아내야 했다.
기의 수발 자체가 바쁘다. 너무 빠르게 싣고 거두다 보니 아예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이런 속도는 정말 무리다.
조노량의 앙다문 입가로 작은 핏줄기가 토해져 나왔다. 기가 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콰과광!
오첩도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몸이 경직된다. 근육들이 피부를 뚫고 튀어 나오려는 듯 용트림을 친다. 마치 몸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샤마노프와의 일전에서 당했던 상처들이 입을 벌리고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쾅!
스마르의 역도를 이기지 못한 조노량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겨우 중심을 잡았지만 심하게 비틀거렸다. 넘어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다.
덕분에 거리가 벌어졌지만, 그렇다고 스마르의 검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미끄러지듯 다가온 스마르의 브로드소드가 비틀거리는 조노량의 두개골을 쪼개기라도 하겠다는 듯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조노량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대로라면 몸이 두 동강 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무모하지만 모험을 걸어야 한다.
스마르의 검에서 오첩도가 자유로워진 작은 틈, 기회는 한 번이다.
비틀거리던 조노량의 발이 환영보의 방위를 밟기 시작했다. 지난 육 개월간 샤마노프와의 훈련을 통해 완숙의 단계에 접어든 보법인 만큼 시전 속도가 눈부실 정도로 빠르고 매끄럽다.
아주 낯선 움직임.
스마르는 브로드소드의 궤적하에 놓여 있던 조노량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곧 좌측으로 몸을 돌리며 흘러내리던 브로드소드를 치켜들었다.
조노량은 환영보를 극한까지 시전해 스마르의 좌측으로 돌아나가며 혼신의 기를 실어 오첩도를 내뻗었다. 상대의 목덜미가 끌어당겨지듯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스팟!
조노량의 움직임이 일순간 정지됐다. 오첩도는 길게 뻗어진 상태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조노량의 눈동자가 우측으로 조금 움직였다. 오첩도의 도인(刀刃)이 지나간 방향으로부터 한 자쯤 떨어진 곳에 정지해 있는 스마르의 갈색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한 치쯤? 스치듯 갈라진 스마르의 목덜미에서 몇 방울의 피가 느리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노량의 눈동자가 다시 조금 더 우측으로 옮겨졌다.
푸른 오오라가 맺혀 있는 브로드소드가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있다. 바로 자신의 목덜미에 얹혀 있는 것이다.
조노량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오첩도가 목표를 적중시켰다고 싶은 순간 스마르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 탓에 오첩도는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거기까지는 보았다.
하지만 섬뜩한 기운을 발하며 자신의 목덜미에 얹혀 있는 이 브로드소드는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검의 궤적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저 푸른 기운의 위력은 굳이 맛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자신의 목은 이 자리에서 분리될 것이다. 그래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상대의 의지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무슨 광대 같은 짓인가?”
언젠가 들어본 말이다. 그때도 상대방은 자신의 환영보를 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몸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굳어져 있는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그 상대방이 누구였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럴 만한 자는 샤마노프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건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왜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톡톡
브로드소드가 조노량의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건드린 부분은 어깨건만, 전신으로 소름이 돋는다.
“좋은 칼이군.”
스마르의 시선이 오첩도에 머물고 있다. 그제야 오른쪽으로 잔뜩 쏠려 있던 조노량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향했다.
가늘게 떨고 있는 오첩도의 몸체가 애처롭다.
“이가 좀 나갔군. 다듬어야겠어.”
스마르가 검을 회수했다. 어느새 검에 어렸던 오오라도 흐릿하게 거두어져 있었다.
굳어졌던 몸이 천천히 풀렸다. 아직까지 뻗고 있던 오첩도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스마르는 조노량을 바라보며 왼손으로 목덜미를 훔쳤다. 서너 줄기로 모여 흘러내리던 피가 지저분하게 번졌다. 손바닥에도 적지 않은 피가 묻어 나왔다.
언제나 무표정했던 스마르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것처럼 보인 것은 오해일까?
“이 정도면 괜찮군. 노리앙, 승급!”
전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스마르의 건조한 음성이 시합장을 울렸다.
☆ ☆ ☆
이번이 루드가 경험한 세 번째 사고다.
열악한 막장의 환경상 사고가 없을 수는 없다. 아니, 제법 자주 발생하는 편이다. 루드의 불행은 그 사고의 중심에 항상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번 사고는 지난번처럼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필 광구가 향하던 지점 바로 위로 흔치 않은 크기의 바윗덩이 하나가 위치해 있었고, 그 바위가 지지대를 잃고 뚝 떨어진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루드는 지난번 사고 이후 생긴 이해할 수 없는 활력 덕에 운반조에서 채광조로 자리를 이동했다. 현재는 채광조 중에서도 가장 유능한 광부로 통했다. 최고의 채광꾼으로 통했던 노리앙보다도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루드의 곡괭이는 지치는 법이 없었다. 빠르고 정확하며 힘이 넘쳤다. 그게 문제였다.
다른 지점보다 철광석이 유난히 단단했다는 것을 주목했어야 했다. 그만큼 압착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무거운 것에 눌리지 않고서는 그 정도로 단단해지기 힘든 일이다.
이 미터쯤? 다른 곳과 달리 힘겹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깨달았으면 추가로 버팀목이라도 설치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이곳 광산에 이 정도 바위가 나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일뿐더러 그 바위가 갱도의 넓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까지 했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다.
루드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전혀 심각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신의 조에는 채광꾼이 두 명만 배치되었다. 자신이 두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기 때문이다.
저기, 그중 한 명인 체리언트의 옆머리가 보인다. 바위 끝에 끼인 두개골이 납작하게 짜부라져 있다. 그의 눈알로 보이는 붉고 둥근 물체가 기다란 꼬리를 매달고 튀어나와 구르고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무척 미끈거릴 것 같은 느낌이다. 수용소 생활만 칠 년째라던 체리언트, 수용소에서 그만큼 버텼다는 것은 생존력이 뛰어나다는 뜻과 같다. 허글러가 아니었다면 부반장 자리도 노려봄직 했을 만큼 강한 사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 정도 바위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능력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체리언트에게서 흘러나온 다량의 액체가 자신 쪽으로 흘러내렸다. 불쾌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옷이 척척해져서 좋을 것은 없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다. 오른쪽 어깨와 다리가 바위에 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체리언트의 두개골처럼 납작해졌을 것이다.
자신은? 아마도 작업불능조로 편성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폐기될지도 모른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나란히 잃고서는 목발조차 짚을 수 없을 것 아닌가? 아마도 지난번과 같은 행운은 없을 것이다.
루드는 두 번째로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병신이 되었는데 이 무슨 한가한 생각이란 말인가? 이성적으로는 심각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끼룩
체리언트의 시체로부터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기 중 일부가 바위틈을 비집고 삐져나오는 소리다. 저게 어떤 기관이지? 길쭉하고 매끄러운 기관이 선홍빛으로 번뜩거리고 있다.
툭
삐져나온 장기의 옆쪽, 무엇인가가 한 박자 늦게 터진 모양이다. 다량의 혈액을 쿨럭 거리며 쏟아낸다. 많다. 체리언트가 저렇게나 많은 피를 품고 있었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루드는 고개를 돌려 천장을 향했다. 편하다. 흐릿하게 깜박이고 있는 횃불이 자신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루드 역시 무심한 시선으로 횃불을 응시했다.
졸졸
드디어 도착했다. 머리카락을 흠씬 적시며 목덜미로 스며든다. 체리언트의 피다.
의외로 따뜻하다. 곧 척척해지겠지만.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대피했던 동료들이 돌아오는 소리다. 추가 붕괴의 조짐이 없자 되돌아 들어오는 것이리라.
막장이 갑작스레 밝아진다. 루드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이 너무 부셨기 때문이다. 감겨진 눈꺼풀 위로 붉은빛이 일렁인다. 여러 개의 횃불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루드는 정신을 잃은 것 같고, 체리언트는 죽었습니다.”
누군가 루드의 뺨을 때렸다.
“루드, 정신 차려!”
‘정신을 잃은 적이 없다.’
“살아 있는 거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아파야 정상이겠지? 그런데 아프지 않다.’
“부반장, 절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팔, 다리 말인가? 그래야겠지. 바위를 치울 수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