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1화 (11/142)

11. 루드

붕대를 감은 왼손이 심하게 가려웠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가 치유된 점에서는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자신이 무슨 괴물이라도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심기가 불편했다.

루드는 살짝 붕대를 풀어 보았다. 어느샌가 뻘건 살 위에 손톱이 자라고 있었다.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 루드는 누가 볼세라 급히 붕대를 감았다.

도대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보름 전 파쇄 작업을 하다가 사고로 뭉개져 버린 검지가 자라고 있었다. 세 마디 모두 절단된 손가락이 이틀 만에 거의 원형을 회복하다니. 거기에 이제는 손톱까지 나고 있었다.

손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조금 쓰라린 감이 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기능하고 있다. 아니,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 괴력을 발산하기도 했다.

어젯밤 너무 가려워 붕대를 감은 채 손을 침상에 대고 긁었다. 그 순간 루드는 경악하고 말았다. 단단한 비연목 침상이 푹 하고 파여져 버린 것이다. 혹시 나무가 썩은 것이 아닌가 의심되어 주변을 눌러보았다. 푹푹 파인다. ‘역시 썩은 것이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른 손가락으로 파인 구멍을 만져 보았다.

비연목 특유의 차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건 절대 썩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새로 자라난 손가락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더욱 걱정되는 일은 가끔씩 정신을 잃는다는 것이다. 정신을 잃었다고 털썩 주저앉거나 쓰러진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슬쩍 물어 보면 평소와 다른 행동을 전혀 못 느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그 주기가 좀 더 잦아졌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몇 개월 전에도 사고로 허리 아래를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허리 아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고 걱정했지만 얼마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털고 일어났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마비 증상이었을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빨리 회복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 신기한 것은 그날 이후부터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는 점이다. 웬만한 작업에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무거운 석탄을 나르는 운반조였기 때문에 늘 허리가 아팠었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허리가 아팠던 적이 없었다.

무심히 넘겼던 일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허리 역시 손가락과 같은 맥락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잘린 손가락이 다시 자라고, 마비된 하반신이 멀쩡해지다니? 루드는 난생 처음 겪는 일에 머리가 혼란했다.

아픈 오른쪽 어금니를 빼면 이빨도 새로 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날 밤 루드는 꿈을 꾸었다. 작업 중 갱도가 무너지는 꿈이다.

혼미한 와중에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허리 아래로는 통증이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정말 다행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거요?”

“안 그러면? 허글러, 자네가 책임질 텐가?”

허글러? 저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

“내가 한 번만 더…….”

잔뜩 위축된 늙은이의 목소리다.

“시끄럽다. 더 쏟아 부을 신성력이 남아 있기라도 한 게냐? 네놈 따위 어설픈 늙은 신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는 걸 모르는가? 살리고 싶다면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번에는 음침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그렇다고 소환 의식을 치르다니? 그게 어떤 의민지 알고나 하는 소리요?”

이번 것은 허글러의 목소리가 틀림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까! 아니면 다 죽일 셈이냐?”

다시 한 번 예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미친…….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세 명의 사내, 그중 검은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뭔가 더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마치 다른 나라 말을 듣는 듯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아주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다. 습기라고는 전혀 묻어나지 않는 음침한 목소리. 뭔가 강렬한 거부감이 밀려든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너져 내렸다. 의식이 가물가물 사라져 갔다. 눈은커녕 귀조차도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점차 의식이 멀어져 갔다. 무의식중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종, 나의 육신이여, 복종할지어다.’

“헉!”

루드는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막사 안은 아직 깊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씬 젖어 있다. 으슬으슬 떨려온다. 추위는커녕 더위를 느껴야 할 계절, 유월이다. 때문에 지금 느끼는 한기가 추위 탓이 아님은 분명했다. 뼛속까지 잠겨 오는 한기, 영혼까지 침범하는 한기의 정체는 절대 추위가 아니었다.

루드는 오싹하고 돋는 소름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지막한 코골이 소리. 잠결에 뒤척이는 익숙한 소음들이 어둠 속에 가득했다. 그제야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안도감이다. 왜 낯선 곳에 혼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드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 끔찍한 수용소에서 깨어났다는 것이 과연 안도할 일인가?

이곳이 아닌 낯선 곳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불안해야 할 일일까?

이성과 본능적인 두려움이 괴리를 일으켰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아도니아인인 자신이 아도니아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한단 말인가? 전쟁터라고는 구경도 못해 본 자신이 전쟁 포로들 틈에 누워 있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증오심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임에도 그를 생각할 때마다 증오심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나를 위한 일이라고? 누구의 생각인가?’

나의 의지는? 그리고 나를 통제하기 위해 빼앗아간 두 생명의 의지는 어찌할 것인가? 당신의 아도니아, 당신의 가문…… 당신의 의지는 결코 관철되지 못할 것이다.

분노에 떨던 루드는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내일도 작업에 나가려면 잠을 자 둬야 한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도 버티기 힘든 환경이 아닌가. 잠을 설쳐서는 곤란하다. 온전하게 이곳을 벗어나야 원하던 복수도 할 수 있다.

어렴풋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루드는 문득 손가락이 가렵다고 느꼈다.

☆ ☆ ☆

시합장 가득 격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오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작열하는 태양이 모든 습기를 거둬들이고 있다.

근 열흘간 비는커녕 이슬도 내리지 않았다. 왜 이 땅이 황야라 불리게 되었는지, 왜 이 땅에 자생하는 나무가 비연목뿐인지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날씨다.

롤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훈련장을 겸한 간이 검투장을 돌아보았다. 거친 호흡과 질펀한 땀 냄새로 가득하다. 손부채를 부쳐 보지만 펜스로 둘러싸인 훈련장은 바람도 멈춰 있는 공간이다. 퀴퀴한 냄새는 외부와 단절돼, 훈련장에서만 농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커트리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뭐가 말입니까? 롤.”

“저 친구 말이야.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는데, 도통 시합에 내 보낼 생각을 안 하잖아?”

“뭔가 생각이 있겠죠. 이유 없이 움직이는 분이 아니니까요.”

“뭐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는구먼. 저런 실력이면 제2시합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이거 너무 더운 거 아냐?”

“글쎄요. 사흘 후에 있을 승급심사를 거쳐 제1시합에 내 보낼 생각일지도…….”

“1시합? 비밀병기로 말인가? 하긴 저 친구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니 한 번쯤 진하게 써먹을 수는 있겠구먼. 아, 맞다! 지난 번 승급심사는 왜 건너 뛴 거지? 그때도 충분히 A클래스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혹 모르죠. 1시합이 아니라 에크미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어엉? 시민궁 시합? 말도 안 돼. 1시합이면 모를까, 에크미는 무리라고. 마나도 못 다루는 친구가 어떻게 에크미에 나간다는 말이야?”

“롤, 제발 머리 좀 쓰세요. 기억 안 나세요? 저 친구 처음 들어왔을 때 실력하고, 지금 실력하고 비교 좀 해 보시라고요. 글라디우스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친구가 지금은 어떤가요? 샤마노프도 쩔쩔매고 있는 모습 좀 보시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샤마노프의 모습은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온몸에 흙칠을 하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모습이, 맞은편에 서서 반 토막 난 목검을 쥐고 난감해하고 있는 노리앙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박빙이었다. 단지 무기가 조금 불리할 따름이다. 왜 그가 계속 목검 따위를 고집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야, 샤마노프가 팔찌를 차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쯧쯧, 롤, 롤.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불과 넉 달 전에도 같은 조건이었다는 것을 잊었나요?”

“어?”

“저놈 괴물입니다. 저렇게 빨리 느는 놈을 본 적이 없어요. 샤마노프가 어떤 놈입니까? 커트리안이 박아 놓은 징검다리란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팔찌를 차고서는 롤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걸요?”

“아니, 이 자식이! 또 날 끌어들이네. 내가 어째서 샤마노프 같은 애송이와 비교를 당해야 하는 거냐고?”

“에이, 또 발끈하시긴. 말이 그렇다는 거죠. 샤마노프가 숨은 실력을 드러내면 A클래스에서는 샤마노프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자가 스마르 빼고는 없다고요.”

“말이 그렇다고? 뭐가 말이 그래? 왜 쥬시아누스 뒤로 숨는 거냐? 이리 못 나와? 이봐, 쥬시아누스 그놈 좀 잡아 봐.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내 오늘 저놈을 아예 요절을 내 버릴 테다. 거기 못 서!”

해바라기씨를 우물거리고 있는 쥬시아누스 주위로 또 한바탕 우스꽝스러운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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