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련
“노리앙이라고 했던가? 저 친구, 예상보다 더 잘하는군.”
롤은 묵묵히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는 쥬시아누스에게 말했다. 그 말에 쥬시아누스의 옆에 있던 예니에프가 대꾸했다.
“롤 아저씨에게는 상극이겠군요. 광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잖아요.”
롤의 인상이 구겨졌다.
“왜 나를 끌어들여? 그리고 B클래스의 애송이와 나를 비교하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그 말에 쥬시아누스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팔찌를 차고 한다면 만만치 않겠는걸.”
“이봐, 쥬시아누스, 쥬시아누스 더드리안! 자네마저 이 세스카의 롤을 무시하는 건가?”
“커트리안 님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거 같은데요.”
롤의 시선이 좌측 뒤편으로 향했다. 건장한 체구지만 쥬시아누스처럼 무식하게 크지 않은 사내 하나가, 관중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미지근한 시선으로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닿는 선상에, 막 상대방의 목덜미에 훈련용 목검을 가져다 대고 있는 조노량의 모습이 위치해 있었다.
검투반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반장인 스마르도, S클래스의 3인방인 롤도, 쥬시아누스도 그리고 최강이라는 예니에프도 아니었다. 검투반을 지배하는 절대자는 바로 저기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커트리안인 것이다.
조노량의 하루 일과는 늘 똑같았다. 남들보다 두어 시간 일찍 일어나 운기를 했고, 오전에는 검술을 수련했다.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기본 수련이 주를 이루었고, 마지막 삼십여 분간 연결 동작을 연습한 후 두 번의 대무를 치렀다. 점심을 먹고는 대장간에서 검을 만들었고, 저녁 후 잠들기 전까지는 내공 수련에 전념을 했다. 보무관의 고된 수련에서도, 제현의 뒷골목에서도, 조노량은 독종으로 통했다. 천성적으로 성실했던 조노량이기에 스스로의 삶에 통제권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 성향은 이런 황당한 상황, 다시 말해 이유도 모른 채 이상한 세상에 떨어져 전쟁 포로가 되고, 극악의 수용소 생활을 겪고 있는 지금에도 변함이 없었다.
천부적인 반사 신경과 운동감각을 가졌음에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내공의 진보가 더뎌 삼류 무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 중원과 달리, 이곳에서는 내공이 엄청나게 증진하고 있음에 가슴이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성실함은 내공의 빠른 진보로 이어졌고, 내공의 진보는 다시 생활의 고단함을 극복시켜 주었다. 운기의 효과로 인해 하루 두 시진의 수면만으로도 신체에 충분히 활기를 보충해 줄 회복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 같은 일상이지만 상승의 무공을 갈망하는 조노량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허나 조노량에게도 참기 힘들만큼의 굴욕적인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 눈이 녹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코가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가시고 맑은 하늘이 빛나는 아침. 조노량은 언제나와 같이 식사를 마치고 훈련장에 들어섰다.
가볍게 몸을 풀고 기본 동작을 수련하려는 조노량 앞으로 하이오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클래스가 나눠진 이후 한동안 마주치지 않았던 하이오지다.
“노리앙, 샤마노프 님이 부르시는데.”
“……?”
하이오지는 손가락을 들어 좌측을 가리켰다.
조노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이오지의 손가락을 따라 좌측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조노량에게 수용소 생활 최초로, 최악의 굴욕을 안겨줄 당사자 안트로프스키 샤마노프.
육 척이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첫인상은 4반의 젝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갈색 머리에, 아래로 약간 흘러내린 눈매가 선량해 보였다. 모든 A클래스가 그렇듯 그의 팔에도 마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샤마노프는 기다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조노량을 부르고 있었다. 입가에 눈매와 비슷한 선량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낯은 익으나 인사를 나눈 적은 없는 자다. A클래스라고 했던가? 열여섯 명의 A클래스 중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지만 승급심사 시엔 절대 지명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자라고 했다.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그가 A클래스에 머물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마나를 수준급으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마나만 제외한다면 그는 S클래스에 올려놓아도 뒤지지 않는 실력자라는 말이었다.
무공을 찾아가면서 다시 나오기 시작한 걸음걸이. 조노량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현과 보가촌의 뒷골목을 누빌 때 조노량은 언제나 지금과 같은 걸음을 걸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경박하다고 할 만한 걸음걸이다. 하지만 조노량은 이 걸음걸이를 무척 편하게 생각한다. 몸을 가볍게 하고 주위의 어떤 기습이나 위협에도 쉽게 대응할 수 있도록 몸을 조금씩 튕겨 주는 형태의 걸음걸이다. 건들거리는 걸음과 달리 조노량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당신이 노리앙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전 샤마노프라고 합니다. 앞으로 샤마노프 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조노량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짐작했겠지만 오늘은 당신에게 대무를 청하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한 수 나눠 보시겠습니까?”
“샤마노프, 난…….”
“샤마노프 님이라고 부르세요.”
“샤마노프 님 대무는 점심쯤…….”
“아, 아, 당신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가 하자고 하면 하셔야 합니다.”
조노량의 말꼬리를 간단히 잘라먹는 샤마노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동안 상대해 왔던 B클래스와 달리 샤마노프는 A클래스였다.
클래스가 곧 계급인 검투반이었기에 샤마노프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샤마노프의 말을 무시하기 위해서는 샤마노프보다 강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겨 주면 된다. 조노량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마름모꼴의 짧고 무거운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샤마노프가 히죽이 웃으며 단창과 쇠그물을 들어 올려 보였다. 자신의 무기라는 뜻이다. 단창의 창두에는 둥근 쇳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아무리 연습용 창이라도 찔리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에 나온 보완 장치다. 조노량도 습관적으로 검 끝에 쇳조각을 끼우려는 순간 샤마노프가 말했다.
“아, 아, 당신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검은 제 몸을 상하게 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상당히 광오(狂傲)한 말이다. 상대방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서 있다는 자신감이 없이는 절대 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안 그래도 검의 중심이 검두에 몰려 있어서 빠르게 처리하기가 불편한 마당에 그 끝에 추까지 달아서 사용하려니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찌르기만 적당히 자제하면 된다.
조노량은 쇳조각을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샤마노프가 히죽이 웃었다.
“예의를 아는 분이시로군요. 그만 한 대우를 해 드려야겠지요. 자, 전 준비가 되었습니다만.”
조노량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샤마노프는 쇠그물을 출렁거리며 공격 의사를 전달했다. 단창이 아닌 쇠그물로 공격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조노량은 싸움이 시작되면 상대의 예의를 믿지 않는다. 속임수는 싸움의 기술일 뿐이다.
하지만 샤마노프는 진정이었는지 쇠그물을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해 왔다.
무시무시한 공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노량은 가볍게 피하며 상대방을 향해 빠르게 다가들었다. 그물과 단창 모두 중거리 무기들이다. 반면 조노량이 가진 무기는 짧은 검 한 자루. 상대를 제압하려면 붙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노량의 장기는 검과 함께 펼쳐지는 박투였다.
조노량의 돌진에 샤마노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그물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그 속도와 방향이 교묘했다. 바닥을 쓸듯이 회수되는 그물의 궤적은 조노량이 다가드는 속도보다 빠르게 조노량의 뒤꿈치 쪽을 향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조노량은 몸을 가볍게 띄우며 그물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물이 그 아래를 지나가기까지 촌각도 걸리지 않아야 정상인 극히 짧은 시간.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흘렀음에도 그물은 조노량의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순간 조노량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공중에서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조노량의 발 바로 아래서 방향을 바꿔 조노량의 신형을 따라 솟구쳐 오른 그물은 간단히 조노량의 발목을 잡아챘다. 날개가 없는 한 공중에 뜬 상태에서 가해지는 힘에는 대항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조노량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조노량의 신형은 어느새 거꾸로 반 바퀴를 돌아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정말 볼썽사나운 꼴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싸움꾼답게 조노량은 일말의 지체도 없이 구르던 탄력을 이용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헉!”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조노량의 시야에 샤마노프가 단창에 끼웠던 둥근 쇳조각이 가득 찼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순간에 샤마노프의 단창이 조노량의 안면을 향해 날아 왔던 것이다. 급히 몸을 틀었지만 완전히 피해 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다행히 얼굴을 피했으나 샤마노프의 단창은 조노량의 좌측 어깨를 강타하고 회수되었다.
“뭐, 그다지 빠르지도 않으시군요.”
샤마노프는 히쭉 웃어 보였다. 마치 몸을 움직인 적도 없다는 듯,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정중한 말투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조노량은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의 통증을 무시하고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당연하지요.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노량은 환영보를 시전했다. 곧이어 현란한 발놀림이 샤마노프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 무슨 약장수 같은 짓입니까?”
샤마노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렇게나 그물을 휘둘렀다. 아까와 달리 이번 그물은 하늘에서 쫙 펴지며 조노량의 그림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워낙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조노량은 기겁을 하며 뒤로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샤마노프는 조노량의 움직임을 정확히 잡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조노량은 내심 크게 놀랐다. 팔찌로 인해 마나의 사용이 금제된 자가 어찌 내공을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상회한단 말인가?
비록 아직까지는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공을 사용하기 전보다 두 배는 강해졌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마치 자신을 가지고 놀듯 하지 않는가?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조노량의 움직임을 파악한 샤마노프의 단창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환영보의 순서대로 급히 단창의 공격에서 벗어났으나 이번에는 그물이 채찍처럼 허리를 감싸 들어왔다. 공격은커녕 방어하기에도 급급한 실정이었다.
검투반으로 옮긴 후 이렇게 당해 보긴 처음이었다. A클래스의 벽이 이토록 높았단 말인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그들의 대무는 점심이 가까울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승부는 벌써 여러 번 났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온몸에 피와 먼지로 만신창이가 된 조노량에 비해 샤마노프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옷에는 흙 한 줌 묻지 않았을뿐더러 호흡조차 안정을 유지했다.
조노량은 이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조노량의 머리 위로 샤마노프의 그물이 넓게 펴지면서 떨어져 내렸다.
조노량은 치를 떨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저렇게 대놓고 떨어지는 데도 말이다. 벌써 몇 번째 치욕을 당하고 있는지 세기도 어려웠다. 처음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이 되었을 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고, 두 번째부터는 그의 그물 다루는 솜씨에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차라리 맞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 무슨 수치란 말인가? 이제는 기술도 걸지 않는다. 마치 투망질하듯 그물을 던져 조노량을 낚고만 있다. 더 분통 터지는 일은 이미 힘도 내공도 바닥이 나, 저 단순한 투망질조차 피해 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었다.
이제부터 닥칠 일도 더욱 기분을 비참하게 했다. 상대는 자신을 그물 채 바닥에 끌고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월척을 자랑하는 강태공처럼 말이다.
여덟 번째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이 된 조노량을 향해 미지근한 시선 하나가 오랫동안 고정되어 있었다.
“어째서 샤마노프가 저 친구를 건드리는 거지?”
롤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글쎄요. 뭔가 내막이 있지 않을까요?”
“무슨 내막? 예니에프, 자네 뭐 아는 거라도 있나?”
“글쎄요……. 저 친구 간택 받은 게 아닐까요?”
“간택? 뭔 매력이 있다고? 생긴 건 좀 아니잖아?”
“롤 아저씨! 바보 아니에요? 선택되었다고요, 선택!”
“아, 커트리안? 그렇다면 고생 좀 하겠군. 하지만 운이 좋은 거지. 하하.”
“운이 좋은 건지, 어쩐 건지……. 하필 샤마노프가 첫 타자라니.”
“그러게, 샤마노프 저 친구 정말 재수 없는데 말이야.”
“그거야, 롤 아저씨의 첫 번째 천적이니까 그렇죠. 곧 두 번째 천적이 등장하겠지만 말이에요. 하하.”
예니에프의 말에 롤은 얼굴이 벌개져서 벌컥 화를 냈다.
“그거야 팔찌를 차고 하니까 그렇지! 지난번 승급심사에서 덤비는 놈을 거의 죽여 줬잖아.”
“그거야 마나를 좀 잘 다뤄서 그런 거지. 실력이 아니잖아요?”
“오늘 나랑 한 번 해 볼텨?”
“아, 알았어요. 그만해요. 나이 먹어 가지고 옹졸하시긴…….”
“뭣이?”
☆ ☆ ☆
조노량은 그물에 걸린 채 이 장여를 끌려 다녔다. 흙먼지와 얼음조각이 저고리 틈, 목덜미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얼음조각이 옷섶에서 차갑게 녹아감에도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죽일지언정 전사에게 수치를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검투반에서만은 통하지 않았다. 이미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굴욕을 감내해 왔던 그들이다. 스스로에게 통하지 않는 격언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자, 당신은 죽은 겁니다. 몇 번째였죠……? 뭐 어쨌든, 다시 살려드릴 테니 이번에는 힘 좀 내보시기 바랍니다.”
샤마노프는 왼손을 까닥하는 것만으로 절대 풀릴 것 같지 않았던 쇠그물을 단번에 벗겨냈다.
힘겹게 일어섰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조노량은 똑바로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단 한 줌의 내공도 모이지 않았다. 온몸의 기란 기는 모두 쥐어짜 소모시킨 뒤였다. 근육들이 가닥가닥 해체된 듯 흐트러져 버렸다.
샤마노프는 비틀거리는 조노량을 향해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허약하셔서야 검투반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힘들 것 같으니, 내일 다시 가르쳐 드리지요. 내일은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저는 나아지지 않는 자를 가르칠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 제 귀중한 시간을 앗아간 대가를 치르셔야 할 겁니다.”
가르쳐 준다고? 언제 가르쳐 달라고 했던가? 어이없게도 샤마노프는 몸조리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조노량은 굴욕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서 있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조노량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벽은 처음이었다. 비무 내내 샤마노프는 자신을 놀리듯 가지고 놀았다.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나중에는 그냥 던지는 그물조차 피하지 못할 만큼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조노량 혼자서만 죽어라고 뛰어다닌 것은 아니었다. 그 무거운 쇠그물을 다루는 것 자체만으로도 샤마노프는 조노량 이상으로 체력이 소모되었다. 그럼에도 샤마노프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고, 조노량만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지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이유는 조노량도 알고 있었다. 무사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이치이기 때문이다.
샤마노프는 자신보다 최소 한 단계 이상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샤마노프는 시간을 지배했다. 그는 비무 내내 자신의 작은 근육 한 가닥조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잘 단련된 무사라 해도 반 시진 이상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긴장과 이완이라는 순환 과정을 적절히 분배해야 장시간 전투를 치를 수 있다. 하지만 샤마노프는 조노량에게 그럴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조노량이 긴장을 풀라 치면 샤마노프의 단창이, 쇠그물이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조노량이 나뒹굴고 있는 동안 샤마노프 자신은 근육을 이완시켜 피로를 회복했다. 그리고 조노량이 오래 누워 있을 틈을 주지 않고 쇠그물을 날렸다.
실력 차이란 단지 승패를 가늠하는 기준만이 아니다. 상대를 얼마만큼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끄느냐는 것 역시 중요한 관건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비무는 조노량의 완패였다. 조노량은 샤마노프에게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했다. 본인은 쉬어 가면서도 상대방은 전혀 쉴 틈을 주지 않는 것. 그것은 최소한 상대방보다 한 단계 이상 높은 경지에 올라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조노량은 지친 몸을 억지로 추슬러 가부좌를 틀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운기에 집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노량의 귓가로 ‘쏴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실제로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엄청난 양의 자연지기가 몰아쳐 들어왔다. 대지의 기운이 거침없이 조노량의 온몸으로 몰아쳐 들어왔다가 바람처럼 빠져 나갔다. 마치 폭풍 속에 내던져진 조각구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다.
이 기의 폭풍에 몸이 동화되어 갈수록 조노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자칫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쾌감이었다.
몰아쳐 들어온 기는 탈진 상태의 세포 하나하나에 활력을 주고, 긁히고 찢긴 상처마저 빠르게 회복시켜 주었다.
극도로 지쳐 육체의 한계 상황에 도달한 이후, 또 마지막 한 줌의 내공까지 모두 소모시킨 후의 운기는 오히려 평소보다 내공의 축적을 더 용이하게 했다. 평소라면 몰아쳐 들어온 기가 대부분 그대로 빠져나갔으나, 지금은 평소보다 배는 더 단전으로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다.
“노리앙, 춥지 않은가?”
조노량은 어깨에 얹히는 이물감을 느끼며 서서히 운기에서 깨어났다. 개운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활력은 절반 이상 회복되었다.
크리들이 미소를 지으며 조노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이 도착했군. 명상도 좋지만 식사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하하.”
오늘따라 유난히 명랑해 보인다. 아니 일부러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듯 느껴진다. 웃음소리도 다분히 작위적이다.
“자네가 당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네. 바람의 샤마노프라고 하더니 명불허전이더군.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네.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싸운다면 검투반 최강이라는 소문도 있으니까 말일세.”
조노량은 크리들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다지 미소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부풀어 반쯤 감긴 눈두덩이, 터진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피를 주먹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번져 버린 자국, 그 위로 엉겨 붙은 흙먼지. 그런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봐야 미소라고 느껴질 턱이 없었다.
조노량은 응달진 그늘에 쌓여 있는 눈덩이를 두 손으로 흩트려 얼굴에 문댔다. 붉고 지저분한 눈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얼굴에 올랐던 열기가 조금 식는 느낌이다. 조노량은 두어 번 더 문대고 나서 크리들과 함께 배식 줄의 끄트머리에 가 섰다. 배식을 담당하던 특수작업조 아사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안부를 물어온다. 아사의 국자가 유난히 깊은 곳을 헤집어 고깃덩이를 건져 올렸다.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자 크리들이 물었다.
“좀 괜찮은가?”
“뭐, 그럭저럭.”
“많이 상했군.”
“이 정도를 상처라고 부르다니, 민망하군. 피륙이 긁힌 정도요.”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껍데기에 난 상처 따위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아무는 법이다. 자신의 상처를 화제로 삼는다는 것이 어색해진 조노량이 말을 돌렸다.
“아침에 보니 우라도와 티프의 사이가 전 같지 않아 보이던데?”
크리들은 씹던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우라도가 고단수라고는 하지만 티프에 비해서는 부족함이 많지. 수가 얕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힘이 받쳐 주지 않는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라네. 우라도는 조만간 선택을 해야 할걸세. 티프의 꼭두각시가 되거나 아니면 쫓겨나거나.”
“무서운 자로군.”
크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들과 조노량의 말투는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반존대로 바뀌었다. 나이는 크리들이 조금 많았으나 이곳에서 나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동기와 비슷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퍽! 치직-치-
나무통이 터져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폭발적인 소음과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한껏 달군 쇠가 바로 물통에 몸을 담갔기 때문이다. 담금질이라 불리는 과정이다.
보통은 적당히 두드려 주고 담금질을 하게 되는데, 조노량은 밤새 가열되었던 쇠판을 꺼내자마자 담가 버린 것이다.
옆에서 작업을 하던 일꾼 하나가 뜨거운 물방울들을 뒤집어쓰고 펄쩍 뛰었다.
“이런 미친놈! 조심하란 말이다!”
작열하던 쇠판이 한순간에 검회색으로 변해 버렸다.
꺼내 들자 순식간에 물기가 말라 버린다. 급랭시켰다고는 하지만 쇠판의 온도는 여전히 고기를 태워 버릴 정도로 높기 때문이다.
늙은 대장장이가 뼛조각을 화덕에 던져 넣으며 말을 이었다.
“노량아, 쇠란 말이다. 두부와도 같다. 처음 두부를 쑤면 두툼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더냐? 그걸 말리면 얇고 딱딱한 건두부(중국에서 즐겨먹는 마른 두부)가 되거든. 두부 속에 있는 물기가 빠지면서 단단해지는 거란다. 우리 노량이도 건두부 좋아하지?”
어린 조노량이 군침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늙은 대장장이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쇠도 두부와 같다. 다만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 조금 까다로울 뿐이다. 우리 노량이도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를 맞지? 같은 이치로, 쇠도 두드려서 말을 듣게 만드는 것이지. 그 외에도 쇠를 단단하게 하는 방법은 여럿 있느니 더운 물에 담금질하는 것도 그것이요, 뼛조각을 화덕에 넣는 것도 그것이며, 마지막 담금질은 짐승의 피로 하는 것도 그 이유니라.”
가우렐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저 작은 친구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뼈다귀를 구해 달래서 구해다 줬더니 화덕에 던져 넣어 태워 버리지를 않나, 쇠판을 놀놀하게 달궈 주었더니 오자마자 물통에 담가 버리지를 않나? 그렇다고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진지했다.
지금도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맺힌 땀방울을 팔뚝으로 쓰윽 문질러 닦고는 반쯤 식어 버린 쇠판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던 망치질도 이제는 노련한 대장장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대장장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울림이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조노량의 망치질 소리는 다른 일꾼들의 망치질 소리와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단지 리드미컬한 망치질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망치질에 리듬을 타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검투사들 중에는 당연히 없었고, 전문 대장장이들도 십 년은 두드려 줘야 저 정도의 리듬을 가질 수 있다. 그 리듬감 외에 노리앙의 망치질에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다. 뭔가 정상과는 조금 다른 소리다. 쇠를 두드릴 때 나는 파열음, 그 뒤에 숨어 있는 미세한 울림?
어쨌든 그의 망치질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가우렐리온처럼 평생을 쇠와 함께한 사람은 쇠의 소리를 단순한 소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뜨거운 가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음률과 울림은 한 편의 음악과 다르지 않았다.
예전에 대장간에서 잠깐 일해 봤다는 말은 이제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자는 지금껏 쭉 이 일을 해 왔을지도 모른다. 상당히 특이한 방법으로 제련을 하지만 대륙에는 별별 종족들이 다 있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제련법을 가지고 있으니 저자도 그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여겼다. 대장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서는 저런 자세가 나올 수도 없다.
가우렐리온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조노량은 달군 쇠판을 다시 모루에 올려놓고 힘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박자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음률도 딱딱 들어맞는다.
조노량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는 기의 수발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망치와 쇠판이 만나는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에만 빠르게 기가 주입되었다가 회수된다.
제때 기가 주입된 망치와 기의 흐름이 흐트러진 망치질은 소리 자체가 달랐다. 지금의 망치질 소리는 듣기에 무척 좋았다. 아주 좋은 울림이다.
☆ ☆ ☆
내게 왜 이러는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목적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를 넘어서야 해결될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거 멀쩡하지 않으십니까? 회복력 하나는 인정해 드려야겠군요.”
끔찍한 일이다. 이유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해야 한다니.
“오늘은 어떤 걸 가르쳐 드릴까요……? 어제 배운 것을 복습해 볼까요?”
가르친다고? 이런 걸 가르친다고 표현하나?
벌써 일주일째다. 하지만 실력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여전히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샤마노프였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조노량의 체력은 급격히 하락했고, 샤마노프는 처음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곳 사람들의 타고난 체력도 체력이지만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는 조노량과 쉬엄쉬엄 전투를 풀어 나가는 샤마노프의 근본적인 실력 차이가 더 큰 이유였다.
하지만 샤마노프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처음 상대했을 때와 지금의 노리앙은 뭔가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미세한 차이로 인해 자신의 긴장감도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처음 여유 있게 상대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조금만 틈을 주면 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샤마노프로서도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일주일 정도 밟아 줬다면, 마주서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어야 정상이다. 경험상 그랬다. 지금껏 사흘 이상 버티는 놈을 보지 못했는데, 저 작은 사내는 일주일을 당하고도 전혀 공포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샤마노프는 느낄 수 있었다. 저 무표정한 황색 가죽 뒤편에 흐르는 여유, 그리고 투기를 말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날이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어 갔다. 저런 사내를 지금부터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밟아 주려면 자신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처음과 달리 전투에서의 여유도 조금씩 사라져 가는 지금, 자신 역시 전력을 다해야 한다.
네 시간 가까이 온힘을 쏟아야 한다면 자신 역시 버티기 어려워진다. 피곤하다. 그 때문에 샤마노프는 잠시 후 조노량의 제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하지만 샤마노프는 그로 인해 벌어질 상황을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샤마노프는 특유의 맑은 미소를 보이며 조노량을 향했다.
“시작해 볼까요?”
“시간이 필요하오.”
크지 않은 목소리다. 하지만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뭐라고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소.”
“하루쯤 쉬자는 말입니까?”
“아니오. 한 시간에 오 분쯤만 쉴 틈을 달라는 말이오.”
“저런, 저런, 제법 잘 버티시더니 벌써 꼬리를 마는 겁니까?”
그럼 그렇지. 내심 안도하는 샤마노프였다. 처음으로 상대방이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나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시간을 준다면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리겠소.”
저 정도 변명이 따라 주는 것은 정상이다. 못 이기는 척하며 배려해 주면 된다.
“흠……. 그렇다면야, 좋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저한테는 얕은 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샤마노프는 두 손을 벌리며 해맑게 웃음 지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였다.
하지만 조노량에게는 그 미소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런 얼굴로 스스럼없이 상대를 짓이긴다. 또한 사정을 봐주는 법도 없다.
뒷골목에서 자라온 조노량이다. 더 끔찍한 일도 당해 봤으나 지금처럼 규칙적이며, 일방적으로 당해 본 적은 없었다. 도저히 못 당할 상대를 만나면 숨어서 칼침을 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조노량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자, 갑니다.”
하루의 시작치고는 고약하다.
샤마노프의 그물이 날아온다. 검을 들어 좌측으로 걷어냈다. 여기까지는 정해진 수순이다. 이제 단창이 날아오거나 재차 그물이 휘둘러져 올 것이다. 피하거나 막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장거리 무기의 장점은 실력 차이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상대방의 접근만 차단한다면 본인은 항상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샤마노프도 마찬가지다. 조노량에게는 끊임없이 긴장을 요구하며 자신은 여유를 갖는다.
조노량은 여유를 갖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자신이 포기한 것은 상대방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
조노량의 신형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샤마노프의 입술 끝이 벌어지며 피식하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념은 알아줄 만했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한다.
샤마노프는 좌측으로 한 걸음 빠지며 뻗어진 쇠그물을 우측으로 끌어당겼다.
그 단순한 동작에 쇠그물이 마치 채찍이라도 되는 듯 조노량의 옆구리를 휘돌아 들어왔다. 뛰어서 피하거나 뒤로 빠져야 한다.
예상대로 상대방이 뛰어오른다. 어리석은 선택이다. 자신에게는 장거리 무기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샤마노프의 단창이 전광석화처럼 공중에 떠 있는 조노량의 가슴을 찔러 갔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는 일. 선택은 하나다.
지금부터는 샤마노프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싸움을 이끌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수순은 조노량 역시 예상하고 있던 일. 비록 상대방이 반 박자쯤 빠른 것은 사실이나 이미 다음 동작을 준비하고 있던 조노량이다. 조노량의 검이 사선을 그리며 단창의 방향을 틀어냄과 동시에 창대와 창날이 만나는 부분, 그 틈에 검을 걸고 끌어당겼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창을 끌어당긴다.
순간적으로 걸린 압력에 샤마노프는 급히 창대를 쥔 손에 힘을 가하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단창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샤마노프는 단창을 틀어쥐며 거꾸로 상대방의 검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약했다. 동시에 조노량의 머리 부분을 노리며 쇠그물을 회전시켰다.
마치 젖은 빨래가 휘돌듯 회전하며 뻗어간 쇠그물이 조노량의 머리를 찢어발길 듯 흉악하게 짓쳐들어왔다.
검을 빼내려 했지만 단창의 귀두 부분에 단단히 걸려 꼼짝하지 않는다. 조노량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틀어 쇠그물을 받아냈다.
파바박, 퍽!
어깨에 덧댄 가죽이 형편없이 뜯겨져 나가며 피가 튀었다. 뜨거운 통증이 몰려왔지만 고통을 감상할 틈이 없다. 조노량의 검에 얽혀 있던 샤마노프의 단창이 자유를 찾으며 조노량의 목을 향해 휘둘러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창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리듯 나뒹굴었다. 두어 바퀴도 채 구르기 전에 샤마노프의 그물이 날아왔다.
구르던 탄력을 이용해 한 바퀴 더 구른 조노량의 몸이 튕겨지듯 일어나며 회수되는 쇠그물과 함께 샤마노프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샤마노프로서도 대경할 노릇이었다. 어깨에 가해진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피하기는커녕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돌진해 오다니.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쉴 틈이 없다.
샤마노프의 단창과 쇠그물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에 따라 조노량의 몸도 이리저리 휘둘리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둘의 대결이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다. 그 사이 조노량은 일곱 번을 나뒹굴었고,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어제의 상처로 채 가라앉지 않은 눈두덩이에 가해진 가격으로 왼쪽 눈은 아예 감겨 버릴 지경이었다.
“헉헉, 약속한 한 시간이오.”
뻗어 나가던 쇠그물이 바닥에 가라앉았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후훗.”
형편없이 망가진 조노량에 비해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샤마노프였으나, 그의 호흡도 알게 모르게 조금은 거칠어진 상태였다.
오전 내내 쉬지 않고 조노량을 몰아붙이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조노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샤마노프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대로 뻗어서 쉬어도 모자랄 판에 보기에도 불편한 자세로 앉아 명상이라니? 같이 생활하면서 노리앙이 저런 기괴한 자세로 명상에 잠기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지금 그러기에는 적절치 못한 시간이다.
상대가 어떤 방법으로 쉬든지 간섭할 문제는 아니었으니.
샤마노프 역시 관중석 펜스에 몸을 기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딱히 지쳤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체력 손실이 많았다.
상대가 부상을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 오는 바람에 자신 역시 그다지 많은 여유를 가지지 못한 탓이다.
잠시 후 상대방의 눈이 번쩍 떠졌다. 감겼던 왼쪽 눈에 실처럼 갈라지며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여간 회복력 하나는 대단한 자다.
“준비되었소.”
샤마노프는 흠칫 놀랐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마치 처음 시작할 때와 비슷한 활력이 느껴졌다.
샤마노프가 그물을 추스르며 단창을 들어 올리자 조노량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재차 격돌.
그다지 바뀐 양상은 아니었다. 아니 거의 동일했다. 조노량은 끊임없이 몰아쳐 왔고, 샤마노프는 조노량의 공세를 흘리며 여러 차례 타격을 가했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다.
샤마노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정상적이지 않다. 아무리 쉬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몸놀림은 첫 한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전혀 지쳐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샤마노프 자신이 힘들 지경이었다.
두 번째 시간이 지나가고 세 번째 시간이 되었을 때, 샤마노프의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잠시 쉬고 나온 상대방의 움직임이 또 첫 번째 시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 작은 사내의 체력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온통 찢기고 멍든 모습으로 펄펄 날고 있는 상대방을 보자 징그러움마저 느껴졌다. 괴물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시간이 되었을 때 샤마노프로서는 치욕적인 한 방을 허용하고 말았다. 허벅지에 가해지는 엄청난 통증.
돌멩이를 걷어차듯 상대가 자신의 허벅지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급히 단창을 내지르며 상대방을 쓰러트렸으나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의 충격이었다.
일주일 만에 처음 입는 타격이었다. 그리고 그 타격은 저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자신답지 않게 흥분한 샤마노프는 거칠게 상대방을 짓이겨 버렸지만, 네 번째 시간이 끝났을 때 파김치가 되어 버린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상대는 몬스터에 가까운 회복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다. 다른 자들이라면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 할 정도의 타격을 줘도 다음 날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쉬지 않고 네 시간을 뛰는 것이 지금보다 덜 지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은근히 내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을 상대로 일주일이나 버틴 것만 해도 믿기지 않는데, 이제는 오히려 저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내일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 ☆ ☆
발광량이 턱없이 모자란 작은 등불 두 개로 막사의 어둠을 몰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른 반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이 들어앉아 있는 막사다. 크기가 월등한 것도 당연하다. 조노량은 겉옷에 가죽을 덧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바늘의 움직임이 눈부시다. 바느질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었다. 더구나 이처럼 제대로 모양을 갖춘 바늘이라면 더욱 쉽다. 바늘이라기보다는 송곳에 가까웠지만 미약한 등불 빛에도 반짝일 수 있는 날카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충분히 공급되는 가죽과 제대로 된 도구. 일반반에 있을 때와는 천양지차다. 한 땀을 더 딸까 고민하다가 마감하기로 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탄탄하다. 조노량이 바느질을 끝낸 것을 확인한 C클래스원이 바늘을 받아들고 간다. 비록 작다고는 해도 충분히 무기가 될 수 있는 쇠붙이다. 공급은 충분히 되지만 수량 관리도 철저하다.
조노량은 잘 꿰매진 겉옷을 한쪽에 밀어 놓았다. 취침시간에 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막사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 막사의 중앙 부분에 S클래스의 세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A클래스의 위력을 체감한 후로는 새삼 그들이 대단해 보인다. 적어도 샤마노프보다 뛰어난 무사들일 것이다.
쥬시아누스가 웅크리고서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그는 늘 해바라기씨를 우물거린다. 그 덩치를 하고서 작은 해바라기씨를 요령껏 까먹는 것을 보면, 흡사 묘기를 보는 것 같다.
쥬시아누스 더드리안, 흑색 갈리온의 더드리안이라고 했던가? 한때 아도니아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는 자다. 들은 바에 따르면 그의 전투 방식은 이러했다.
그의 기대는 적을 만나도 전투 태세를 취하지 않는다. 오직 한 명, 기대장인 더드리안만이 흑색의 갈리온을 몰고 적진에 뛰어든다. 피를 보고 광폭해진 갈리온과 그 주인이 적진을 마음껏 유린한 후 빠지면 그제야 쉬고 있던 기대가 너덜너덜해진 적을 마무리 짓는다고 했다. 심지어는 그의 기대 하나에 아도니아 정예기대 다섯이 한꺼번에 전멸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또 그가 활동하던 이 년 동안 수십을 헤아리는 기사가 그의 갈리온과 거검의 제물이 되었다고도 했고, 부상당한 그를 사로잡는 데 열 개의 기대가 동원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대단한 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대단한 자가 어두운 막사에 앉아 해바라기씨를 우물거리고 있으니 왠지 웃음이 났다.
그 옆에서 롤과 예니에프가 투닥거리고 있었다. 일견해도 사십은 넘어 보이는 롤과 이제 갓 이십을 넘긴 듯한 예니에프가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롤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주먹을 휘두르면 예니에프가 잽싸게 쥬시아누스의 뒤로 숨는다. 그 둘이 쥬시아누스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숨바꼭질을 벌여도 쥬시아누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해바라기씨만 우물거린다.
롤에게 쫓겨 다니며 엄살을 부리는 예니에프, 조노량에 비해서도 그리 크지 않은 몸매에 장난기가 넘치는 젊은이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그를 판단해선 안 된다. 그가 바로 저 대단한 쥬시아누스를 꺾고 S클래스가 된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막내처럼 스스럼없이 굴고 있다.
조노량으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점이 하나 있었다. 분명 그들이 검투반의 최강자였건만 검투반을 지배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과 떨어져 한쪽 기둥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삼십 대 사내. 흔한 갈색머리에 각진 턱이 도드라진 사내다.
조노량은 아직 그가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S클래스의 삼인조를 포함한 검투반의 모든 인원이 그를 어려워했다. 북국에서 가장 존중받는 사람은 전사다. 더욱이 검투사라는 직업은 그 지닌 바 무위가 곧 계급이었다.
커트리안.
강해 보이기는 하나, 조노량이 알고 있기로는 A클래스의 사내다. S클래스의 사내들이 저처럼 어려워해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광전사라는 롤을 포함하여 과묵한 쥬시아누스, 그리고 장난기 넘치는 예니에프까지 커트리안 앞에서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검투반 중 절반은 그에 대해 알지 못했고, 또 절반은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조노량으로서도 그가 어떤 사내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남들이 따르니 조노량도 따를 뿐이었다.
“노리앙이라고 했나?”
조노량은 고개를 들었다. 푸니킨이라는 A클래스 사내다. 공식 서열로는 샤마노프보다도 위인 덩치다.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검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특이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노량이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검을 만들고 있긴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푸니킨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만 한 길이로 다른 검의 두 배 정도 무거운 검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푸니킨은 검의 길이를 가르쳐 주려는 듯 팔을 벌려 보였다.
“무기를 만드는 일은 C클래스의 일이라 들었소.”
조노량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푸니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점점 인상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날아온 발길질이 조노량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어찌나 강렬했던지 침상 끝까지 굴러가 벽에 부딪히고서야 가까스로 멈추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격이다.
“이 건방진 새끼가. 주제에 지시를 거부하겠다는 말이냐?”
나동그라진 조노량을 향해 푸니킨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한동안 가슴을 부여잡고 쭈그리고 있던 조노량이 허리를 폈다. 한순간 막혔던 숨이 이제야 터진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덩치답지 않게 빠른 몸놀림이었다. 역시 A클래스는 A클래스다.
조노량은 좌우로 허리를 틀어 보았다. 몸에 특별한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묘하게도 중원에서 시비를 거는 뜨내기들에게 선빵을 맞았던 기억이 났다. 조노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푸니킨에게 다가갔다. 중원에서의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조금씩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다.
맞뻗으면 서로 간에 주먹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자 팔짱을 끼고 있던 푸니킨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 건방진 태도는 뭐냐? 한 번 해 보겠다는 말이냐?”
다시 한 번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조노량의 입술 끝으로 새어 나왔다.
푸니킨에게는 충분히 비웃음으로 보일 만큼 노골적이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구나.”
분노한 푸니킨의 주먹이 어둠을 갈랐다. 어둠은 속도를 왜곡시킨다. 안 그래도 빠른 주먹이 어둠에 가속을 받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던 조노량이다.
조노량의 몸이 낮게 가라앉았다.
휘어졌던 대나무가 튕기듯 몸 전체가 튕겨 푸니킨의 주먹 바로 아래 공간을 파고들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던 푸니킨의 눈이 커졌다.
예상했던 공격이었다. 그리고 기습이라면 기습일 수 있는 반격. 일자로 뻗어나간 조노량의 몸이 이마부터 푸니킨의 가슴에 작렬했다.
빡!
막사 전체를 울리는 소음이 뒤를 따랐다.
연이어 조노량의 두 손이 뒤로 넘어가는 푸니킨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 탄력으로 함께 넘어가던 조노량의 몸이 곧게 섰다. 반대로 푸니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침상 옆 복도로 나가떨어졌다.
거구답게 쿵하는 소리가 흙바닥을 울렸다.
푸니킨은 누운 채로 고개를 좌우로 털어냈다. 가슴이 뻐근했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강력한 타격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타격에 어떻게 될 자신이 아니었다. 쥬시아누스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버텼던 자신이 아닌가?
하지만 어이가 없었다. 감히 반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저런 변칙적인 공격은 생전 처음이었다. 머리로 들이받다니?
검은 머리의 작은 사내가 자세를 잡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망신을 당한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푸니킨은 ‘끙’ 소리를 내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저 건방진 놈의 숨통을 끊어 놔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는 푸니킨의 어깨로 누군가의 손이 올라와 전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푸니킨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스마르였다. A클래스의 최상위 랭커이자 공식적인 검투반 반장.
푸니킨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봤지 않나? 저 건방진 새끼를 단단히 교육해야겠다.”
스마르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규칙을 잊었나?”
“이건 교육이다. A클래스로서 정당한 권리다.”
“아니, 부당한 요구에 따른 싸움이었다.”
“이…….”
“원한다면 내일 훈련시간에 검투로 해결하라.”
검투반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었다. 막사에서는 절대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외라면 신입반원에 대한 신고식과 기준이 애매한 하위 클래스에 대한 교육이었다. 푸니킨이 교육이라는 점을 강조한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싸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일단 싸움이라는 스마르의 선언이 있는 이상, 싸움인 것이다. 푸니킨은 이를 갈며 스마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푸니킨은 내심 언젠가 스마르를 밟아 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스마르가 비록 A클래스라고는 하지만 S클래스에 가장 접근한 사내이기 때문이다. 검투반에 온 이후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유일한 사내가 바로 스마르였다. 왜 S클래스에 도전하지 않는지 의문일 정도로 강력한 인물인 것이다.
푸니킨은 한동안 조노량을 노려보다가 퉤하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돌아서서는, 막사 안의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 저 새끼는 내 차지다.”
조노량은 어젯밤 일을 기억하며 내심 긴장했다. 기를 충만하게 돌린 후 감행한 회심의 일격이었다. 물론 제현의 뒷골목에서 삼류 건달들을 상대로 가끔 발휘된 필살기였지만 자신의 몸통박치기를 받고 멀쩡히 정신을 차린 놈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놈은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났다.
더구나 아무렇게나 내지른 발길질에 숨까지 막힐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것 또한 잊기 힘들었다. 단순히 맷집만 좋은 놈은 아닌 것이다. 한 방만 제대로 걸려도 버티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푸니킨은 수련장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곧 있을 싸움을 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한 미소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샤마노프와 달리 그의 움직임이 읽힌다는 것이다. 조노량의 느낌으로는 절대 샤마노프보다 우위에 선 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샤마노프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역시 뭔가 한 수가 있지 않을까?
하이오지가 목검을 건넨다. 나무로 만든 것이지만 묵직하다. 얼핏 봐도 비연목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연목 특유의 굵은 무늬가 검 끝에서부터 손잡이까지 빙 둘러져 있다. 흘려 보면 용무늬라도 휘감겨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조노량은 아직 좋은 검을 가져본 적이 없다. 시골 대장간에서 대충 성긴 투박한 도가 그의 애도였다. 물론 접는다거나 하는 고급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런 검은 제련 기간이 긴 만큼 생산량도 적었고, 값도 만만치 않았다. 두 번 접은 검은 군부로 납품되었고, 세 번 이상 접은 검은 명문 대파에 비싼 값으로 팔렸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조노량은 목검을 좌우로 휘둘러보았다. 묵직하지만 진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목검을 선택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하이오지에게 지시한 것도 잘한 일이다. 약삭빠른 하이오지답게 제대로 골라 놓았다.
일부러 이곳 검의 형태로 가공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약간 갸름한 원형의 막대기, 하지만 길이는 일반적인 검보다 두 뼘 이상 길다. 중원에서 사용하던 훈련용 목검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푸니킨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전혀 상대를 배려해 줄 것 같지 않은 인상이다.
훈련용 망치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어깨에 걸쳐 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훈련용인지라 망치의 머리 부위는 목검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크기는 푸니킨의 머리통만 하다. 게다가 자루는 단창의 자루 그대로였다. 단창의 자루인 만큼, 말할 것도 없이 쇠로 만들어져 있다.
제대로 맞으면 사람 머리통 정도는 간단히 으깨 버릴 만큼 흉악하다. 그 머리가 나무인 것만으로는 전혀 위험도가 줄지 않는다. 그대로 들고 전투에 나간다 해도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일 것이다.
☆ ☆ ☆
조노량의 눈에 거무죽죽하게 변색돼 있는 망치의 머리가 들어왔다. 비연목의 색이 어둡긴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 제법 피를 머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자신에게 향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노량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거기 샤마노프가 빙글 빙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것일까? 조노량은 슬그머니 부아가 올랐다. 지금의 자신에게 넘어서기 힘든 벽을 선사한 당사자. 그 웃음기 머금은 얼굴에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무리였다.
샤마노프는 마치 코치라도 되는 듯 조노량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설마 저런 곰탱이에게 나가떨어지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실망이 클 겁니다. 하지만 조심은 해야겠지요. 앞발에 한 번 걸리면 살아남기 힘들거든요. 그리고 곰은 한 방에 때려잡을 수 없는 거, 아시죠?”
더운 입김이 귓가를 간질였다. 불쾌했지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계집애 같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
“저 정도 상대는 가볍게 눌러 줘야 가르치는 보람이 있습니다. 나요? 아하, 그거 믿지 마세요. 단지 숫자일 뿐입니다. 저 곰탱이가 저보다 높은 랭킹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말이죠. 저 바보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있고, 난 감추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미련한 짓은 장수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별거 없는 놈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하하.”
말을 마친 샤마노프는 조노량 귓가에서 입을 떼며 어깨를 토닥였다.
조노량이 멀뚱히 쳐다보자 ‘무뚝뚝하긴, 쳇’이라는 말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둘을 위해 비워진 공간은 제법 널찍했다. 시합이 갖는 의미가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훈련이 아닌, 어쩌면 생사가 갈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젯밤 막사에서 벌어진 소동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A클래스와 그에게 도전하는 강력한 B클래스. 푸니킨이 이긴다면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푸니킨이 지기라도 한다면 검투반 순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푸니킨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고, 하위자들에게 지속적인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또 노리앙은 다음 승급심사가 있기 전까지 일찌감치 A클래스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S클래스 삼인방을 포함한 검투반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둘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시합 당사자 둘 모두 일말의 긴장감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 푸니킨은 물론이고, 검투반에 옮겨온 지 두 달도 안 된 햇병아리조차 전혀 긴장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노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단지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두꺼운 얼굴가죽과 제현의 뒷골목에서 터득한 싸움의 자세, 오랫동안 체화되어 이제는 하나의 품성이 되어 버린 그것이 조노량의 긴장감을 잘 감춰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 흥분해서는 안 된다. 적을 꺼려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적당한 자신감을 드러내거나 조금쯤은 상대를 깔보는 모습을 보여라. 하지만 그보다, 가능하다면 무심함을 보여라. 무심함은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약점을 드러나게 한다. 어떤 자는 흥분할 것이요, 어떤 자는 주눅이 들 것이며, 어떤 자는 조급해할 것이다.
일말의 긴장감도 드러내지 않고 몸을 풀고 있는 노리앙을 바라보며 푸니킨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쯤 꼬리를 말고 살살 다뤄 달라고 애원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저 빈약해 보이는 자식이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괴상한 동작으로 몸을 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동작, 저 이상한 몸놀림이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푸니킨은 점점 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벌써 흥분하기 시작한 상대를 보며 조노량이 도리어 어이가 없어졌다. 뒷골목의 삼류 무사도 저 정도로 쉽게 흥분하지는 않는다. 도무지……, 제대로 된 싸움을 해 보기나 한 것일까? 싸움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타고난 신력만으로 버틸 만큼 만만한 세상이란 말인가?
자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흥분한 자를 다루는 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푸니킨을 향해 조노량의 입 꼬리가 씨익하고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푸니킨과 비슷한 자세로 목검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이제 들어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니나 다를까 푸니킨은 미련한 곰처럼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두어 번 발을 구르고는 조노량을 가리키며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콧김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흡사 ‘자 보았지 않느냐? 저 건방진 놈이 스스로 목숨을 재촉하고 있는 거다. 이제부터 저 미친 새끼를 죽여 버릴 생각이니까 아무도 말리지 마라’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일부러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푸니킨이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어흥’하는 괴성과 함께 조노량을 향해 해머를 내리찍었다. 나무라지만 충분히 육중한 해머가 바람처럼 조노량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일말의 경고도 없었다.
하지만 조노량의 머리를 부숴 버리기에는 너무 느렸다.
샤마노프에게 당하면서 예전보다 더욱 눈이 좋아진 조노량이다.
조노량의 신형은 어느새 해머의 궤적을 살짝 벗어나 이동했다. 얼핏 보면 움직이지 않은 듯 느껴질 정도로 최소한의 움직임이다.
첫 번째 타격이 실패하자 푸니킨은 연속적으로 해머를 휘둘러 댔다. 자루가 긴 해머답게 넓은 반경을 제 범위로 하여 조노량을 위협했다. 순식간에 횡과 종을 바꿔가며 조노량을 핍박했다.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공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던 중원에서도 반사 신경 하나로 버틴 조노량이다. 하물며 중원에서보다 내공이 배는 증진된 지금에서야, 저 정도 중병의 움직임을 피하지 못하겠는가.
그나마 조노량이 감탄한 점은 푸니킨의 해머질이 거의 검을 휘두르는 정도로 가볍다는 것이었다. 중병을 저렇게 가볍고 빠르게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왜 그가 A클래스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샤마노프에 비한다면 한 단계 아래 수준이었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샤마노프에게 최소한 한 단계 이상 아래라면, 저 사내는 자신보다 한 단계는 아래임이 틀림없었으니까.
휭!
사람의 머리만 한 해머가 조노량의 옆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궤적이 큰 해머가 지나간 너른 틈 사이로 목검을 들이밀었다.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한 가벼운 응수타진이다.
“허억!”
푸니킨이 헛바람을 삼키며 급히 몸을 뺐다.
요란한 친구다.
자신이 물러난 것을 인식한 푸니킨이 배는 흥분한 모습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아까보다 더 거칠고 빠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기세에 놀라 나가떨어질 만큼 대단하다. 하지만 조노량에게는 수련이 덜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흥분을 잘하는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사라는 자가 싸움 중에 저 정도까지 흥분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일부러 더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혹, 흥분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 곧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푸니킨은 갈수록 약이 올랐다. 저 비리비리한 놈이 매번 자신의 해머를 간발의 차이를 두고 피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당장이라도 해머에 피칠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파삭’하는 통쾌한 느낌이 당장에라도 손끝에 전달될 것 같은데, 저 미꾸라지 같은 놈은 어찌 이리도 운이 좋단 말인가?
자신이 자랑하는 삼단 콤보를 벌써 세 번이나 펼쳤지만 그마저도 아슬아슬하게 피해 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제법 날카롭게 반격까지 해 대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자칫했으면 한 방을 허용할 뻔했다. 저런 보잘것없는 작대기에 맞는다고 해도 별 충격은 없겠지만 체면이 문제였다.
푸니킨은 당장이라도 마나 팔찌를 풀어 버리고 싶었다. 남들은 자신을 힘만 센 곰탱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타고난 마나 친화력으로 서른도 안 되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위력적인 오오라를 구사한다. 이놈의 팔찌만 없었다면, 저놈의 머리는 진작 박살이 났을 것이다.
마나만 돌릴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빨라질 수 있다면…….
퍽! 콰당!
잠시 딴생각을 하던 푸니킨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가 혼란스러웠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겁한 놈이 발을 걸어 버린 것이다. 종아리에 은근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급히 몸을 비틀어 일어났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B클래스의 애송이에게 망신을 당하고 만 것이다. 코에서, 입에서, 그리고 귓구멍에서까지 김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다.
전사가, 검투사가 어떻게 비겁하게 다리를 건단 말인가? 상대의 비겁함은 푸니킨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이 비겁한 놈, 죽여 버린다!”
조노량의 아미가 좁아졌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발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른 자들의 훈련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전투 중에 발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상위 클래스가 하위 클래스를 상대할 때는 몇 번 사용하는 것을 봤다. 용도는 주로 모욕을 주는 데 있다. 제압한 상대에게 발길질을 하는 식이다.
즉, 이곳 사람들은 발길질을 전투에 활용하기보다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겁하달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비겁한 행동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히 비겁한 짓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 역시 비겁한 짓을 꺼려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비겁하지 않은 행동에까지 비겁하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다.
조노량은 기본적으로 친선 비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건 고상한 명문 대파에서나 읊조리는 말이다. 보무관 같은 뒷골목을 관리하는 작은 무관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말이다. 싸움은 수단과 방법을 가려가며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짓이 아니다. 친선? 그런 말이 들어가야 한다면 애당초 하지도 않는다. 남는 것이 없는 싸움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조노량에게 발차기를 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조노량의 목검이 푸니킨의 허벅지에 내리꽂혔다.
푸니킨은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쓰러지지는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리를 질러대며 해머를 내리쳤다.
하여간 맷집은 알아줘야 하는 놈이다. 비록 기를 싣지는 못했어도 타격점만큼은 완벽했다. 절대 만만한 충격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곰 같은 놈은 전혀 충격을 받은 표시가 나지 않는다.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한 타격은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자주, 쉽게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의 정도가 높아진 푸니킨은 이제 거의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럴수록 조노량의 움직임은 편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목검이었다. 여러 차례 시험해 보았던 일이지만, 아무리 비연목이라도 나무는 차기의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몇 번 기를 싣고 나면 여지없이 터져나갔다. 이럴 바에야 불편하더라도 ‘이곳 검을 사용하는 것이 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수없이 나뒹굴고서도 더욱 팔팔하게 날뛰고 있는, 인간의 탈을 쓴 곰을 보면서 더욱 간절해졌다.
근 한 시간 싸움이 진행되자, 두 사람의 검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련하던 자들도 수련을 멈추고 두 사람의 대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푸니킨이 신출내기를 혼내 주는 것으로 종결되리라 판단했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흙투성이가 돼서 헉헉대고 있는 푸니킨과 달리, 조노량의 모습은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채 여유로워 보였다.
샤마노프를 비롯한 몇몇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입을 벌린 채 경악했다.
다시 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 더구나 조노량은 타격의 극점을 아는 자였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급소까지는 피했지만 웬만한 급소는 다 훑고 지나갔다. 설령 진짜 곰이라 해도 쓰러졌을 법한 매질이었다.
처음에는 해머를 조심하느라고 조노량 역시 몇 번 타격을 가하지 못했으나 시작 후 삼십 분이 경과한 시점부터는 거의 일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노량은 거친 호흡을 토해 내는 상대를 두고 힐끗 샤마노프를 바라보았다.
‘당신 역시 이런 기분이었나?’
비슷한 실력이라도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돌이키기 어렵다. 주도권을 쥔 자는 갈수록 여유가 생기는 반면, 밀리는 자는 피로가 배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끝맺음을 지어야 할 때다.
느려 터진 해머가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 허공을 갈랐다. 푸니킨의 몸이 제 힘을 못 이긴 채 반 바퀴쯤 따라 돌며 비틀거렸다.
조노량의 목검이 모질게 푸니킨의 뒷머리를 횡으로 갈랐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뒤통수가 깨져 나갈 정도의 강력한 타격이었다. 하지만 푸니킨의 뒤통수는 단단했다.
두 번째 검이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똑같은 위치에 날아들었다.
그것으로 한 시간을 넘긴 혈투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