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도(刀)를 만들다
어렵지 않게 상대를 눕힐 수 있었다. B클래스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강한 자가 아니었다. 강하고자 노력하는 자임에는 틀림없으나 아직은 부족한 감이 많았다. B클래스에도 두 종류가 있다. A클래스에 접근한 최강집단, 그리고 언제나 C클래스의 도전 상대가 되어야 하는 비교적 약한 집단. 상대는 젊고 힘이 넘쳤지만 후자에 가까운 자였다.
처음부터 대무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은 형을 다시 익히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몸!
분명 내 몸이긴 하나 어쩌면 내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몸, 분명 자신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라진 내공은? 아니, 애초에 수련한 적도 없었다는 듯 단전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몸은? 내공은 차치하고라도 온몸을 뒤덮다시피 한 수많은 상처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리고 낯선 감각. 내공을 되찾고 나서부터 확연히 느껴지기 시작한 이 예민하고도 날카로운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중원에서도 감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지금 이 몸이 느끼고 있는 감각들은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월등하다. 혹 갓 태어난 아이의 때 묻지 않은 감각이 이러할까?
지금은 누가 뒤에서 접근하면 귀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세포 하나하나가 이미 이를 알아차리고 있다. 무림의 일류 고수가 은밀히 접근하더라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한판 겨뤄 보지 않겠는가?”
조노량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로 황톳빛 머리색을 하고 있다. 글쎄, 붉다고 해야 하나? 저 건장한 체구들, 두꺼운 옷 속에 감춰진 근육들을 느낄 수 있다. 이젠 지겨울 정도다. 어째서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런 체형을 하고 있단 말인가?
“별로.”
“쿠루티투스는 상대하고 나하고는 못하겠다는 건가? 내 실력이 미심쩍은가?”
사내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꺼운 얼굴 가죽 위로 굵은 주름이 잡혔다.
“나에게는 수련이 필요하다. 대무는 며칠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사내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조노량을 바라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땅만 파다 왔으니 감각을 찾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해한다. 그럼 며칠 후 부탁하겠다.”
저런 면은 꽤 마음에 든다. 구질구질한 느낌이 없다. 무시당했다고 찌짜를 붙는 경우도 드물다. 저게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여유고, 전사의 자부심일까?
어쨌든 오늘은 더 이상 대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두 번의 대무를 펼쳤다. 원치 않았지만 신참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무는 사양하고 싶다. 벌써 여러 차례 느낀 점이지만 지금의 몸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분명 머리로는 기억하고 있는 초식임에도 몸은 마치 처음 펼치는 초식인 것마냥 어색해한다. 그나마 뛰어난 감각으로 그럴듯하게 펼치고는 있지만 그 초식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조노량이 대무를 거부하자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 주위를 맴돌던 다른 자들도 돌아섰다.
우선 기본적인 자세들을 체화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연결 동작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조노량의 짧은 칼이 좌에서 우로 그어졌다. 삼재검법의 가장 단순한 동작인 좌베기이다.
삼재검법은 조노량이 아는 유일한 검법이다. 비록 도를 쓰지만, 배운 것은 검법. 대충 맞추어 쓸 뿐이다. 더구나 지금 쥐고 있는 것도 형태가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 검이다.
어차피 삼재검법은 기본 동작만을 위주로 하고 있다. 기본 동작에 있어서는 도법이라고 그다지 다를 것도 없다.
모든 검법은 그 검법만의 기본 동작의 연결로 하나의 식이 나오고, 그 식이 조합되어서 초식이 이루어진다. 검법의 위력은 바로 이 초식에서 나온다.
가장 효율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적을 혼란스럽게 해서 쉽게 방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 등이 바로 이 초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검법의 위력이 나뉜다. 하지만 삼재검법을 검법으로 치는 무림인은 별로 없다. 삼재검법에는 초식답지도 않은 초식만, 그것도 달랑 세 개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우베기.
좌베기도 좀 어색했지만 우베기는 좌베기에 비해서 이질감이 좀 더 크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다시 우베기. 그리고 찌르기.
아주 기본적인 동작들이다.
주변에서 수련하는 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조노량은 이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뭔가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자세가 잡힌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빨리 익숙해지기란 불가능하다. 중원에서는 십 년이 넘게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곧 체화될 것 같았다.
연속적으로 휘돌아가는 자신의 칼을 마치 취한 듯 바라보던 조노량의 뇌리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처음 삼재검법을 가르치던 노관장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왜 이름이 삼재검법(三才劍法)인지는 잘 모르겠다. 거창하게는 천지인의 묘리가 담겨 있다고 해서 삼재검법이라는 말도 있고, 찌르고, 베고, 피하는 이 세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해서 삼재검법이라는 설도 있다. 또 초식이 세 개뿐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삼재검법은 모든 검법의 기초이니, 반드시 능숙하게 익혀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 아무도 익히지 않으려는 하찮은 검법 취급을 받고 있지만 삼재검법을 창시하셨다는 우허자 도인은 이 검법 하나로 천하제일검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나도 믿기지 않는다만 기초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검법임에 틀림없다.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니라.”
크게 위력이 있는 검법은 아니지만 관장의 말대로 모든 검법의 기초가 되는 검법임에는 틀림없었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동작들이다. 조노량은 오래전에 익혔던 동작들을 수십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검의 각도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삼재검법의 기본을 이루는 세 가지 동작, 즉 찌르기, 베기, 피하기는 각기 수십 가지의 세부적인 동작으로 나뉘느니. 찌르기만 해도 찌르는 방식이나 각도, 나와 상대의 자세, 찌르는 부위별로 요령이 다르다. 베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니라.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느 위치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베는가, 혹은 얼마만큼의 힘을 실어 베느냐 등으로 세분된다. 피하기 역시 다르지 않다. 피하기에는 몸만 움직여서 피하는 방법이 있고, 자신의 무기를 이용해 막음으로써 피하는 방법이 있다. 이 모든 동작을 합하면 321가지나 된다.
명심하거라. 아무리 삼류검법이라 해도 실전에 사용되는 검법이다.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늘부터 노부는 너희들에게 하루에 세 가지 동작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칠 일간의 시간을 주겠다. 그 칠일 동안 세 가지 동작을 몸에 익숙해지도록 익혀야 한다.”
무림에서는 검법으로 치지도 않는다는 삼재검법의 321가지 자세와 동작을 조노량은 삼 년에 걸쳐서야 겨우 다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검법을 익숙하게 구사하기까지 다시 이십여 년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그것을 다시 익히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짧고 강하게 내려치는 천지세(天地勢). 중요한 점은 끊어 치는 것이다. 목표를 놓치더라도 검이 절대 상대의 인중 아래까지 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 지점에서는 이미 검이 회수되고 있어야 한다.
다른 자세와 달리 천지세는 쉽게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가 너무 짧았다. 임기응변으로 두 손을 겹쳐 쥐었지만 운두 때문에 제대로 된 검로가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날 때는 짧은 원을 그리지만 상대의 머리 위를 가를 때는 넓은 원을 그려야 한다. 마치 검이 쭉 늘어나는 모습이 되어야 제대로 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게중심이 왼손에 있어야 하며, 오른손은 방향을 잡아주고 마지막에 끊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검은 너무 짧고 무거우며, 무게중심도 맞지 않는다. 손잡이는 또 왜 이리 짧게 만들었으며, 운두는 검을 쥐기조차 불편하게 모를 주었단 말인가?
자고로 검은 ‘一種平直, 細長, 帶尖, 兩面有刃的短兵械, 是內涵最爲豊富的兵器之一(평평하고 곧고 가늘고 길며, 끝이 뾰족하고 양쪽에 날이 있는 단병기로 함축된 의미가 가장 풍부한 병기 중 하나다)’이라 했다. 지금 휘두르고 있는 검은 이와 어느 것 하나 부합하지 않는다.
조노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의 칠 할 이상이 자신과 흡사한 검을 사용하고 있다. 대장간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진 평범한 검. 이곳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무기라 했다. 하지만 자신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 검이다.
C클래스와 달리 B클래스부터는 하루 종일 수련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노량은 검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장간 작업은 C클래스에게는 의무지만 B클래스 이상부터는 선택이다. 그리고 다행히, 고아였던 조노량은 어릴 적에 보가촌의 허름한 대장간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해서 검을 만드는 방법은 대충 알고 있었다.
‘맞지 않는다면 만들면 되는 거다.’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이대로 감각을 잡아 간다면 옛 실력을 되찾는 데에 그다지 많은 시일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는 내공의 속도로 보았을 때, 옛 경지를 뛰어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을 정리하자 오히려 이 검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상대할 자들의 칠 할은 이 검을 들고 나설 터이니 말이다.
이곳의 쇠는 무척 물러서 마나를 다루는 기사들은 검을 자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검은 몇 차례 마나를 사용하면 못 쓰게 되기 때문이다. 검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무른 쇠로 얇고 긴 검을 생산했다가는 전투에서 몇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부러지거나 휘어져 버릴 것이다. 쇠의 강도가 사용자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을 제대로 세우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몇 번만 부닥치면 망가져 버릴 날을 애써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전쟁을 주로 하는 이곳에서는 단검이나 창이 좀 더 유리할 것이다. 멀리서는 창을 던지거나 휘두르고, 가까이 붙으면 짧은 검을 휘두른다. 소수 대 소수의 싸움이 주를 이루는 무림과는 조건이 전혀 다르다.
“허글러가 그렇게 괴물이라면서?”
‘허글러’라는 말에 조노량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 ☆ ☆
한동안 가만히 서 있자 누군가 말을 걸어 온 것이다.
괴물? 하긴 괴물이라고 불러도 그다지 과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한 명도 없지만 4반이라고 검투반으로 옮긴 사람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가장 최근에 죽은 미르코프를 포함해 검투반으로 옮긴 많은 강자들도 허글러를 어쩌지 못했다. 어쩌기는커녕 단 일합도 견뎌 내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허글러 이전에 부반장을 맡고 있던 두와즈도 마찬가지였다. 각 반의 무력을 대변하는 부반장. 단언컨대 그중 허글러를 감당할 만한 자는 글쎄…… 없을 것이다.
“겨뤄 본 적이 없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인해 더욱 무뚝뚝해 보이는 조노량의 어투에 상대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부반장 허글러.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내내 침울해하던 옛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채 추위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운반조로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검투반으로 옮기기 전부터 우려하던 일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 출소하게 될 것이라던 반장은 아직도 출소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에 차질이 있었다는데, 사람들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반장의 어깨가 좁아져 보였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도 부쩍 옅어진 듯했다. 아마도 흰머리가 많이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루드와는 달리 지난 번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크다. 오른팔은 아예 망가졌고, 다리도 절고 있었다. 허글러도 간단히 복종시킬 만큼 절대적이었던 반장의 모습이 어쩐지 작아진 느낌이라 마음이 좋지 못했다.
반 분위기와 달리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루드가 조노량을 보고 싱긋 웃었다. 건강해 보였다. 들어올 때부터 골골거리던 모습과 무척 대조되는 느낌이다. 조노량이 자신의 몫으로 배당받은 빵을 은밀히 건네자 쑥스러워하면서도 신속히 받아 챙기는 모습이 조금은 루드답지 않았다. 이제야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 가는 모양이다.
사실 검투반원이 옛 동료들에게 음식물을 건네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걸리면 둘 다 독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검투사에게 지급되는 아침은 일반 포로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감시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겨우 허기나 채울 정도의 식사를 나눠줘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일반 포로와 검투반이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아침 시간 동안, 공식적으로는 식량을 포함한 어떠한 교류도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규칙일 따름이다. 위반을 막기도 힘들뿐더러 막는다고 될 문제도 아니었다.
특수작업조원들이 점심을 날라 오는 것으로 오전 훈련 시간은 끝이 났다. 다른 자와 함께 큼지막한 들통을 둘러메고 오는 아사가 땀을 닦고 있는 조노량을 향해 알은 체했다. 다른 자들에 비해 왜소한 체구지만 생김새만큼은 어느 귀공자 못지않다. 포로답지 않게 유난스레 흰 얼굴도 돋보인다.
조노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르지 않게 그을린 얼굴들. 눈에 반사된 햇살은 피부를 불규칙하게 태운다. 모자로 둘러싸인 이마와 좌우 뺨은 부자연스러운 백색과 옅은 반점으로 얼룩져 있고, 코를 비롯한 중앙 부분은 검게 그을린 피부에 탈색된 흰 점들이 고르지 않게 분포되어 있다. 더구나 곳곳에 벗다만 허물이 흉물스럽게 부스럼을 만들어 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홀로 깔끔한 꼴을 하고 있는 아사는 무척 이질적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특수작업조로 배치된 까닭이 병사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 있는 남색의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긴 평소의 행동도 여성스러움이 물씬 묻어났다.
조노량은 빵 두 덩이와 양배추를 비롯한 건더기가 수북이 올라와 있는 국그릇을 들고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크리들이 따라 올라온다. 하이오지를 비롯한 다른 자들은 종종거리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배급을 받으려면 아직 줄이 멀다. 배급은 철저히 클래스 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몸을 풀었더니 기분이 상쾌하군. 그렇지 않소?”
조노량은 입천장이 벗겨질 정도로 뜨끈한 국물을 한 입 가득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렇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이 오랜만에 쓰임새를 가졌다는 듯이 충만한 기쁨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반장 자리를 뺏겼다고 하던데……. 티프라는 사내 때문이오?”
막 입가로 가져가던 크리들의 숟가락이 잠시 멈췄다. 고통을 되새기듯 잠시 침묵하던 크리들이 입을 열었다.
“뭐 이제 와서 꺼릴 것도 없겠지.”
크리들은 멈췄던 숟가락을 맛나게 빨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희미하게 웃음기까지 묻어 있다.
“그 친구, 티프 말이오. 무척 불쾌한 친구요. 그 친구가 처음 막사에 나타난 건 반년 전이었소.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지. 하루 종일 멍한 상태였소. 작업장에서도 얼빠진 표정으로 실수를 연발하기 일쑤였고. 막사에서는 내내 천장만 쳐다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는 먹는 데에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소.”
크리들은 큼지막하게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소. 뭔가 심하게 음침한 분위기, 아니 그보다는 어둠의 족속들에게나 느껴질 법한 아주 기분 나쁜 기운을 뿜어내는 자였소. 왠지 꺼려진 달까? 자칫 잘못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 어쨌든 그 기분 나쁜 분위기만 아니라면 아주 조용한 친구였지.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소. 그날은 마침 휴식일이라 다들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정신이라도 든 것처럼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소. 아주 생소한 환경을 바라보는 듯 무척 놀란 표정으로 말이오.
그때부터 본모습이 드러났소.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게 적의를 표했고, 잔혹하게 개선시켜 나갔소. 그 작고 마른 몸집으로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마치 당신처럼 말이오.
그날부터 그가 5반을 장악해 나가자 아무도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소. 그를 불편하게 했던 많은 자들이 잔인한 보복을 당했소. 당신도 알 거요. 소고리라는 사내. 5반에서는 나름 잘 나가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아침 시체로 발견되었소. 엄청난 피를 흘린 채 말이오.
아, 아니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소. 그 광경을 지켜본 자에 의하면 소고리가 자신의 불침번 시간을 이용해 티프를 제거하려 했던 거요.
소고리 그 친구 고양이처럼 빠르고 은밀한 자요. 잠든 티프를 향해 숨겨둔 꼬챙이를 꽂으려는 순간, 잠든 줄 알았던 티프의 손이 소고리의 목젖을 뜯어 버렸고, 소고리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바닥에 나가떨어져 버린 거요. 끔찍한 건 그래놓고도 티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누워 자 버렸다는 거지. 콸콸 쏟아져 나온 소고리의 피로 막사 안이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하는데도 말이오.”
크리들은 국그릇을 통째로 들고 후루룩 들이켰다. 양배추 조각을 우물거리던 크리들이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우라도가 그를 싸고돌았소. 반장이긴 하지만 솔직히 반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었소. 공평하지 못했거든. 하지만 티프와 붙어먹는 순간부터 그의 장악력은 최고가 되었소. 모든 반원들이 우라도와 티프를 두려워했지. 그들 눈에 벗어난 순간 죽거나 병신이 될 각오를 해야 했으니까.
지난 가을 5반에서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다쳤던 사고를 기억하시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셋 다 나를 따르던 자들이었소. 반장과 티프에 대항하던 마지막 반원들이었지. 쿡은 살해된 것이 틀림없소. 5반에서 가장 힘이 좋은 자였는데, 한 줌도 안 되는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시오? 팔병신이 된 나머지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나와는 대화도 안 하려 들더구려. 오직 우라도와 티프에게 굽실거릴 뿐이었소.”
잠시 말을 멈춘 크리들의 잇새로 씨잇 하는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사건 이후 5반에는 긍지 높은 북국의 전사들 대신 비굴한 노예들만 남게 됐소. 솔직히 그 친구가 나보다 강한 것이 사실이오. 그 정도로 강했다면 처음부터 도전을 했어야지. 실제로는 이미 부반장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부반장 지위를 승계 받지는 않는 거요.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나를 무력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아까 당신 말은 틀렸소. 여기 오기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내가 5반 부반장이었으니까.
난 바보가 아니오. 때로는 비열하기도 하지. 그들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나를 이용하기 위해 남겨둔 것이 틀림없소.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된 거요. 심사에 통과한 날, 마지막 밤은 정말 한숨도 못 잤지. 잠들면 죽을 것 같았거든.”
함께 이야기를 듣던 하이오지가 녹은 눈 틈새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잔돌 하나를 걷어찼다. 세차게 굴러간 돌멩이가 나란히 걷고 있던 감시병들의 다리 사이를 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감시병들이 인상을 쓰며 돌아보자, 하이오지는 비굴한 미소를 띠며 손바닥을 머리 위로 붙이고 어깨부터 굽실거렸다.
점심 후 A클래스의 폴과 B클래스 인원 네 명이 포함된 대장간 작업조 사십칠 명은 높게 걸린 태양을 바라보며 작업장으로 향했다.
길게 늘어선 대열, 하지만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줄을 맞췄다기보다는 적당히 모여 걷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갑옷까지 걸치고 좌우를 감시하며 행군하고 있는 병사들이 오히려 포로 같다.
여전히 거센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가지만, 한낮의 태양은 제법 따스하다. 그 태양을 품고 있는 유난히 높고 푸른 하늘과 드문드문 떠 있는 밝은 색의 버섯구름. 어떻게 보면 중원의 하늘보다 아름답다고 할만하다.
온통 하얀 벌판 위로 갈색 줄이 그어져 있다. 작업반원들이 수없이 오고간 흔적이다. ‘혼자 남더라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구나’라는 한가한 생각을 하며 걷던 조노량의 발걸음이 옆 사람과 엉켜 버렸다. 갈림길에서 습관적으로 남사면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C클래스의 사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못은 조노량이 저질렀지만 사과는 상대방이 한다.
부아칸산의 서쪽 면을 따라 돌아가자 중규모의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나지막한 갈색 지붕들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마을 중앙엔 뻥 뚫린 광장이 보인다. 광장의 남쪽 면에는 장작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디서 저렇게 모아 왔을까 싶을 정도로 하늘을 찌를 기세다. 그 반대편에는 잘게 부서진 철광석더미가 또 산처럼 쌓여 있다. 파쇄반에서 날라 온 것일 게다.
마을에는 희고 검은 연기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거대한 풍차가 하나 눈에 띄었다. 몽환적인 느낌이다.
☆ ☆ ☆
어느 정도 다가가자 벌써 은은한 열기가 느껴진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 풀무 돌아가는 소리, 달궈진 쇠를 식히는 소리와 뽀얗게 피어오르는 운무, 메케한 쇠 냄새가 일행을 반겼다.
행군 때와는 달리 입구에서의 점호는 엄격히 이루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불렸고 얼굴을 아는 병사들이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목책으로 완벽히 둘러싸인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은 겉에서 본 것보다 규모가 큰 편이었다. 일견하기에도 수십 채는 되어 보였다. 일부는 나무로 만든 집이고, 일부는 흙을 개어 만든 집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의무 작업조인 C클래스는 병사들의 인솔하에 각자 담당 구역으로 흩어졌고, A클래스의 폴과 B클래스 네 명만이 남게 됐다.
폴이 네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작업장으로 가 볼까?”
폴은 특이하게도 백발에 얼굴이 길쭉한 사내다. 얼굴로 보아 절대 삼십이 넘어 보이지 않는 젊은 놈인데도 말이다.
눈의 색깔도 그렇고 머리색도 그렇고, 하여간 별의별 색을 다 보았지만 저렇게 완벽한 백발은 처음이다. 자기가 무슨 오자서라도 된단 말인가?
포로들의 호송을 담당했던 기대가 마을 곳곳에 추가로 배치되고, 감시 역의 병사 두엇만이 그들을 따랐다. 새로 배치된 인원, 즉 검투반을 호송해 온 기대를 제하고라도 대장간은 중요한 시설물답게 경비가 무척 삼엄한 편이었다.
각 건물마다 경비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주요 길목에는 기사나 종사급의 인물도 제법 눈에 띄었다. 각 건물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갈색으로 통일된 옷을 입고 있는 일반인이었다. 회색 옷을 입고 있는 포로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마을의 중앙 대로를 따라 잠시 걷자 삼면만 흙벽으로 막혀 있고, 전면은 뻥 뚫린 건물에 도착했다. 대략 방원 칠 장 정도 되어 보이는 크지 않은 건물이었다.
좌측 벽면으로는 각종 도구가 무질서하게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기다란 나무통에 가득 물이 찰랑대고 있었다. 또 그 앞으로 커다란 모루 십여 개가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있었다. 정면 벽에는 둥글고 높다란 흙가마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일부 가마는 집 안으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집 밖에 위치해 있었다. 마치 건물이 커다란 꼬리를 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른 어깨 높이 정도에 위치한 가마의 주둥이에는 큼지막한 쇠문이 달려 있었는데, 보기에도 후끈거릴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쇠문의 하단에는 어른 팔뚝만 한 틈이 가로로 길쭉하게 벌어져 있었고, 그 틈새로 달아오른 쇠막대기 몇 개가 걸쳐져 있었다. 쇠막대기 사이사이로 일렁이는 불꽃이 틈틈이 혀를 내밀었다. 가마에서 나오는 열기가 집 전체에 아지랑이를 만들 지경이었다.
일행이 도착하자 건물 안에서 일하던 열두 명의 장인 중 하나가 일행을 맞이했다. 나머지 장인들은 검투반원들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각자의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오늘은 총 다섯 명입니다. A클래스의 폴, 그리고 B클래스의…….”
감시 역으로 따라온 병사가 포로들의 이름이 적힌 목판을 오십 대로 보이는 장한에게 넘겨주며 각자의 이름을 하나하나씩 체크해 주었다.
인수인계가 끝나자 두 명의 병사는 뻥 뚫린 건물의 전면에 놓인, 그리고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른 건물의 흙벽에 기대어진 의자에 가서 앉았다. 대장간 안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자리다. 아마도 저 자리가 감시병들의 근무 위치인 모양이었다.
“다들 어서 오게. 마크는 안 온 모양이군?”
“그 친구 오늘부터 열흘간 마나 수련조로 편성되었거든요. 한창 맛들일 시기라 당분간은 얼굴 보기 힘들 겁니다.”
폴이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껄껄, 그럼 다음 시합 때는 마크에게 걸어야겠구먼. 기대가 커. 그런데 이 친구는 처음 보는군?”
오십 대 장한이 조노량을 바라보자 폴이 다시 한 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대단한 친굽니다. 검투반으로 오자마자 B클래스가 된 잡니다. 격투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죠. 마나까지 다루게 된다면 저로서도 만만치 않을 거 같습니다. 하하.”
“그래? 눈여겨봐야겠군. 반갑네. 난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가우레리온이라고 하네.”
가우레리온이라 자칭한 오십 대 장한은 말과 함께 오른손을 내밀었다. 체구에 어울리는 크고 투박한 손이었다. 손만 봐도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온통 화상 자국으로 덮여 있었고,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듯한 검은 때가 터서 갈라진 손등 틈 사이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조노량입니다.”
조노량은 가우레리온의 손을 마주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나무껍질처럼 굳고 거친 손이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힘도 나이와는 달리 만만치 않았다.
“무기를 만들러 온 게지? 검인가? 창인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게. 내 다 구해 줌세. 껄껄.”
조노량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자, 가우레리온은 흡족한 듯 머리를 끄덕이며 폴에게 돌아섰다.
“자네 막대기는 미리 달궈 놓았다네. 부피가 많이 줄었더군. 그리고 오늘 불이 아주 좋아. 케더린이 힘 좀 썼다네.”
“고맙군요. 하하.”
폴은 한쪽 벽에 겉옷을 벗어 놓고 가마로 다가갔다. 지금 복장으로는 절대 저 안에서 일을 할 수 없을 듯했다. 조노량도 다른 자들을 따라 겉옷을 벗어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열기였다. 행군 동안 얼었던 몸이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다.
폴이 가마 옆에 놓여 있는 투박한 집게로 가마 뚜껑을 툭하고 건드리자 붉게 달아오른 화덕이 드러났다. 화덕에는 십여 개의 쇠몽둥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폴은 그중 하나를 집게로 집어 들었다. 밝은 색으로 달아오른 둥그런 방망이 모양이었다. 붉은 덩어리는 화덕을 벗어나자마자 아지랑이를 피워 올릴 정도로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다. 폴은 팔을 멀리 뻗어 불빛을 감상하곤 말했다.
“이거, 제대로 달궈졌네요. 흑석을 좀 구한 모양이군요? 가우리.”
“오늘 아침에 좀 배정받았지. 아껴 쓴다면 삼사 일은 아쉽지 않게 쓸 양일세.”
“와우, 멋지군요.”
폴이 한시가 아깝다는 듯 바로 작업에 들어가자 가우렐리온이 조노량에게 돌아섰다.
“그래 검인가? 창인가?”
“검입니다.”
“흠, 케스팅을 원하나? 아니면 럼프를 원하나?”
“……?”
무슨 소린가? 조노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언어를 배웠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정도다. 이렇게 전문적인 용어를 물어 온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조노량이 대답을 못하고 서 있자 가우렐리온은 조노량이 결정을 못 내려 망설이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초보자겠지? 아무래도 편하게 쓰려면 케스팅이 좋을 거야. 형태도 갖춰진 데다가 적당히 두드려서 부피만 줄여 주면 되거든. 좀 약한 것이 흠이긴 하지만 말일세.”
‘아, 주물? 그건 곤란한데.’
“거푸집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원하는 대로 고르게.”
“럼프는……?”
“허, 이 친구 욕심도 많네그려. 초보 주제에 럼프를 다뤄 보겠다고? 껄껄. 망치질은 좀 할 줄 아나? 꼴 잡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일세.”
“오래 해 본 건 아니고, 전에 대장간에서 잠깐 심부름을 했었습니다.”
“오, 그래? 어쩐지 럼프를 원한다 했더니, 초보자가 아니었군. 하긴 제대로 된 놈을 만들려면 럼프가 되어야지. 부은 놈들은 아무리 두드려 줘도 단단해지지가 않는단 말씀이야. 자고로 검투사라면 진짜를 써야 하는 법일세. 대충 두꺼운 놈을 골라 쓰다간 골로 가기 딱이지. 케스팅은 마나는커녕 계집 거시기 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네.”
무슨 소리인지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주물은 곤란했다. 검은 절대 주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물로는 화살촉 이상의 것은 만들지 못한다.
“어느 정도를 원하지? 마침 럼프 몇 개가 있다네. 이리 와서 골라보게. 지난달에 생산된 놈들인데, 제법 잘 빠진 놈들이지. 내가 좀 확보해 놨지. 껄껄.”
가우렐리온은 조노량을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
무엇인가가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그 위를 더러운 리넨 천이 덮고 있었다. 가우렐리온은 조노량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며 단번에 천을 벗겨 냈다.
걷어진 천 아래에는 다양한 크기의 원통형 괴(塊)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어떤 것은 지름 한 치 정도로 비교적 얇은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조노량의 팔뚝만큼 두꺼운 것도 있었다. 길이도 다양해서 두 자가 채 안 되는 것부터 네 자는 족히 넘어 보이는 물건까지 있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붉은 녹이 가득 덮여 있었다.
“이래 봬도 이놈들이 바로 지난달 초에 빠진 것들이라고. 최근 육 개월 동안 생산된 놈들 중에 가장 순도가 높지. 자 이놈과 이놈을 들어 보게.”
가우렐리온은 바닥을 구르는 철괴 하나를 주워 들고는 비슷한 크기의 괴를 찾아 두 개 모두 조노량의 손에 들려 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이 녹슬고, 더러워 보였다.
“어떤가? 무게 차이가 확연하지 않은가?”
조노량은 두 개의 괴를 양손에 나눠 쥐고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비슷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우렐리온이 권한 괴가 확연히 무거웠다. 하지만 둘 다 지독히 무거운 것은 똑같았다. 이런 것을 들고는 도저히 휘두를 자신이 없을 정도다.
조노량이 무겁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가우렐리온은 껄껄 웃으며 두 개의 괴를 받아 들었다.
“자네도 일을 해 봤다니 알겠지만 말일세. 이 괴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야 비로소 검이 될 수가 있네. 덩치만 큰 케스팅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자네 정도라면 이 정도 길이가 적당할 거야.”
가우렐리온은 나란히 세워진 괴 중에서 길이가 조노량 팔의 삼분의 이 정도 되는 쇠몽둥이를 권했다. 하지만 조노량은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석 자 정도 길이의 팔뚝만큼 두꺼운 놈으로 골라 들었다.
가우렐리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이거? 욕심이 정말 대단하군. 이건 아무리 줄여도 자네가 들기에는 무리일세. 너무 길지 않은가? 좀 얇고 짧은 놈이 좋지 않겠나?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놈들은 순도가 높아서 잘 줄어들지도 않는다네.”
“이것이 좋습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조노량이 단호하게 말하자 가우렐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고생이야 자네가 하지 내가 하는가? 자, 달궈다 줌세. 여기 가마보다는 중앙 가마에서 달궈야 빨리 달궈진다네. 예서라면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릴 게야. 내일부터는 미리 달궈 놈세. 어이, 케더린. 이놈 좀 제스에게 갖다 주게. 아주 나긋나긋하게 녹여 달라고 하게나. 떡친 계집 궁둥짝처럼 흐물흐물하게 말일세. 껄껄.”
☆ ☆ ☆
가우렐리온이라는 노인은, 그 말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무척 유쾌한 자였다. 짤막한 반백의 머리를 갈색 띠로 두르고, 그다지 넓다고 할 수 없는 작업장을 쉼 없이 돌아다니며 일꾼들에게 잔소리를 해 댔다. 하지만 꾸중을 하는 것도,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일꾼들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아니 이 망치도 자루가 썩었더란 말이냐? 자네는 망치자루를 왜 이렇게 망가트리는 게야? 보기보다는 힘이 센 건가, 아니면 손이 썩어 망치자루에 전염이라도 시키는 겐가? 이거, 무슨 뒷간에 석 달 담가 놓은 각좆을 만들어 놨어!”
가우렐리온은 망치를 받아들 생각도 않고 조노량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벌써 세 번째다.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받아들었지만 역시 먼젓번 것과 같은 상태였다.
조노량이 내민 반토막짜리 망치자루는 도저히 비연목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마치 수백 년간 비바람에 골아 버린 고목과 다름없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푸스스 부서져 버리는 비연목을 누가 비연목이라 믿겠는가?
처음에는 썩은 자루를 공급해 준 지미온을 들입다 욕하던 가우렐리온이었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조노량이 세 번째 망치를 내밀자, 더 이상 망치자루 탓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조노량이 들고 온 망치는 조금 전 내어주기 전에 자신이 직접 망치자루를 살펴보지 않았던가? 모루에 대고 힘차게 부닥쳐 봐도 손만 짜르르 울릴 뿐 까딱없던 상등품이었다.
그런 놈을 삼십 분도 안 되어 썩은 코르크 마개를 만들어 왔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혹시 쇠로 된 자루가 없겠습니까?”
가우렐리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자네, 마법산가? 아니지, 아니야. 아무리 겔커티스 촌놈이라도 마법사라면 이 따위 곳에서 굴러먹고 있을 리가 없지. 거참, 도대체 뭔 조화란 말인가? 뭐? 쇠자루?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나? 앗! 있다!”
가우렐리온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작년에 말일세. 어떤 미친놈이 자기는 망치가 좋대나 어쨌대나 하면서 자루까지 쇠로 된 워해머를 만들겠다고 깝죽거리지 않겠나? 그놈 제법 정성을 들였는데, 미처 써 보지도 못하고 골로 갔더란 말이지.”
“우그노요.”
옆에서 폴이 끼어들었다.
“아 그래. 우그놈! 그런데 좀 커. 자네가 체구답지 않게 힘을 좀 쓰는 모양인데, 어디 한 번 써 볼 텐가? 이놈이 어디 있더라?”
“우그놈이 아니라 우그노…….”
“아, 글쎄 알았다구.”
가우렐리온은 다른 일꾼들의 작업을 방해해 가며 부산을 떨더니, 기어이 가마 재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워해머를 찾아냈다.
“껄껄, 이놈이 여기 있었군. 이 자루 말인가? 조금 길지? 내가 금세 잘라 줌세. 어디, 이만큼? 좀 더 길게? 더 짧게 말인가? 알았네. 넉넉잡고 삼십 분만 기다리게. 이놈도 흐물흐물하게 녹여 줘야 제 살을 내준단 말씀이야.”
그래서 받은 것이 무식하게 무거운 이 망치였다. 한쪽은 뾰쪽하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반대쪽은 일반 망치처럼 뭉툭했다.
조노량이 쇠망치를 쓰게 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남들보다 힘이 약한 조노량으로서는 효과적으로 쇠를 다루기 위해서 차기(借氣)를 해야 했고, 망치에 기를 불어 넣자 나무로 만든 자루가 버텨내지 못한 탓이었다.
처음 몇 번은 그럭저럭 버티어 냈지만 계속해서 타격이 가해지자 나무의 조직이 조노량의 기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급격하게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조노량은 워해머를 이용하면서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에 차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덕에 기의 운용이 좀 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졌다. 또한 이 무거운 망치로 강약을 조절하고 타격점을 맞히기 위해서는 그만큼 정교한 조작이 필요했기에, 도구를 신체의 일부로 내화시키는 효과도 겸하게 된 것이다.
“그게 아니야! 어째서 그렇게 납작하게 만드는 것인가? 대장간에서 일해 본 적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세로로는 어떻게 두드릴 셈인가? 그래서는 다 찌그러지고 말 게야.”
쇠막대를 두드리기 시작한 지 나흘째 되던 날, 가우렐리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노량에게 잔소리를 해 대기 시작했다.
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옆에서 혀를 차고 있었다. 그도 벌써 여러 차례 조노량에게 같은 충고를 했지만 이 고집 센 자는 전혀 들어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게. 벌써 이렇게 납작해지지 않았는가? 더 이상 한쪽만 두드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걸세. 어허! 귀한 놈을 던져 줬더니 계집년 치맛자락을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자, 이제라도 살살 이쪽과 이쪽을 두드려 주면 제 모양을 찾을 수 있을 거네. 좋은 검을 만들려면 말일세, 수천 번을 두드려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야 비로소 모양이 잡히는 법이라네. 아, 내 말 들으라니까!”
조노량이 두드리고 있는 원통 막대는 이제 더 이상 원통형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너비 반 자에 높이가 반 치 정도 되는 평평한 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조노량은 두드리던 쇠판을 모루에 기대 놓고 가우렐리온을 바라보았다.
가우렐리온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콧바람을 뿜으며 조노량에게서 쇠판을 빼앗듯 넘겨받더니 세로로 세워서 조심스럽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 자. 이렇게, 이렇게 말일세. 며칠 두드리다 보면 원형을 이룰 거야. 그 모양이 흩어지지 않게 한 열흘 단련하다가 부피가 반쯤 줄어들면 그때 모양을 갖추는 걸세. 어때? 할 수 있겠나?”
가우렐리온은 그 후로도 한참을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처럼 자상하게 조노량에게 검을 만드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잠시 후 가우렐리온은 머리를 싸잡은 채 대장간을 박차고 나갔다.
친절한 설명을 마치고 쇠판을 건네주자마자 조노량이 다시 쇠판을 납작하게 두드려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틀이 지나자 쇠판은 거의 한 자에 가까울 정도까지 넓어졌다.
따다땅! 따당땅!
날이 갈수록 조노량의 망치소리는 음률을 타듯 경쾌해졌고, 판의 넓이도 더욱 넓어졌다.
또 판은 가마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미세하게 얽은 상태가 되었고, 그 상태가 망치질을 통해서 다시 판판해지기를 수십 번씩 반복했다. 가마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쇠에 내포되어 있는 불순물이 타거나 기포가 빠져나가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구멍을 만들기 때문이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쇠판에서는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 불똥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시커먼 먼지로 타서 날아갔지만, 일부는 조노량의 손이나 작업복에 떨어져 화상을 입곤 했다.
최근 들어 흑석의 공급이 원활해진 것은 조노량에게 있어서 아주 큰 행운이었다. 흑석은 쇠 속에 내포되어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쇠의 강도를 높여주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작용을 하는 재료였다. 돌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처럼 불에 타는데, 그 온도가 나무에 비할 바 없이 높았다. 하지만 이 흑석은 한 번 타고 나면 흰색 가루로 변해 두 번 다시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상당히 귀한 재료이기도 했다.
조노량은 한 자가 넘게 넓어진 쇠판을 가늠해 보았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어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반 자 정도에서 접을 생각이었으나 불순물이 너무 많이 포함된 관계로 그 불순물을 최대한 표피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모루의 두께보다 넓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다. 무게 또한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가벼워졌다.
가우렐리온을 분통터지게 만들고 또 더 이상 조노량의 작업에는 참견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방식, 즉 쇠를 접어 검을 만드는 것이 바로 보가촌의 검 제작 방식이었다. 보통은 한 번 접고, 아주 좋은 칼을 만들 때는 두 번 접는다.
더 많이 접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일 년 내내 검을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할 것이 뻔했으므로, 조노량도 두 번 이상 접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쇠를 펴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처음 쇠를 펼 때보다 두 번째 펼 때는 배 이상의 시간이 소모된다. 불순물이 빠져나간 만큼 쇠가 강해지고, 단조(鍛造)되어 눌린 만큼 쇠의 압축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노량은 적어도 세 번 이상 접을 생각이었다.
이곳 쇠가 너무 무르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둘째는 망치에 기를 싣게 되면 쇠를 펴는 작업이 한결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를 실어 망치를 휘두르니, 힘으로만 쇠를 다뤘던 보가촌의 대장장이보다 월등한 효율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무기에 기를 싣는다는 것은 단지 그 무기가 좀 더 강해진다는 의미 이외에, 그 무기를 통해 전달받은 감각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느낄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망치를 통해 전달되는 강철의 미세한 외침. 그 긴밀도와 강약까지 민감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열 번째 날, 조노량은 같은 B클래스에 속한 클리브에게 도움을 청했다.
“클리브, 이 판을 좀 잡아 주겠소? 흔들리지 않게 말이오.”
클리브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기꺼이 도와주었다. 클리브는 조노량의 요청에 따라 집게로 벌겋게 달궈진 쇠판을 단단히 잡았다. 덩치가 있는 만큼 조노량 자신이 잡았을 때보다 더 단단히 고정된 느낌이었다.
달궈진 쇠판이 조금 식기를 기다려 조노량은 대장간 도구 중 두터운 끌을 찾아내 쇠판의 중앙에 대고 망치로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쇠판 중앙으로 미세한 흠집이 나더니 곧 끌의 두께만큼 두툼하게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또 뭐하는 짓인가?”
조노량이 다시 엉뚱한 짓을 벌이자 조노량의 주위로 가우렐리온을 비롯한 대장간 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검을 만들겠다고 온 거야? 수련이 귀찮아서 장난질을 치러 온 거야?”
곳곳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조노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자칫 쇠가 갈라지거나 홈이 중심에서 벗어나면 작업이 아주 번거로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조노량은 일부러 차기도 자제하고, 작은 망치를 이용해 아주 조심스럽게 세로로 길게 홈을 그려 나갔다. 끌이 아래로 미끄러질 때마다 쇠판도 조금씩 굽어지기 시작했다. 조노량의 이마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땀이 쇠판에 떨어지며 연거푸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라 버렸다. 작업이 반시간을 넘어가자 호기심을 표하던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가우렐리온만은 계속 작업을 지켜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 살부터 무려 사십칠 년간 쇠만 다뤄온 가우렐리온이다. 처음에는 그도 조노량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쇠판이 꺽쇠 모양으로 구부러지는 것을 보자 번개가 스치듯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접는다! 접고 있잖아? 접어? 쇠를? 왜?’
아니나 다를까. 쇠판에 홈이 완성되자, 클리브에게 쇠판을 세로로 세우도록 부탁한 후 다른 집게를 이용해 클리브가 잡은 반대쪽을 고정하듯 잡은 후 본격적으로 접기 시작했다.
한 번에 조금씩, 아주 조심스럽게 쇠를 접었다. 쇠가 식자 화덕에 달구고 다시 접기를 반복하자 쇠판의 각도가 완연히 꺾이기 시작했다. 작업을 돕던 클리브도 그제야 작업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입을 크게 벌렸다.
조노량은 쇠판이 어느 정도 접히자 제법 장시간 달궈 쇠판을 충분히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제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처음부터 성공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쇠가 무른 것이 오히려 득이 되어 갈라짐 없이 순조롭게 접히고 있었다.
조노량은 집게를 놓고 워해머를 집어 들었다. 장심을 통해 전달된 기가 망치의 머리끝까지 관통하듯 뻗어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수년간 익숙해진 행위라는 듯이 기의 수발이 자연스럽다.
워해머를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후 크게 호선을 그렸다.
“재미있어 보이느냐? 허허, 쇠는 말이다. 아주 부드럽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약하게 두어 번 두드려 질문을 하면 쇠가 대답을 한단다. ‘바로 거기예요’라고 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쇠와 망치, 모두 준비가 된 것이지. 그 다음은, 자 이렇게! 깡!”
잔심부름이나 하는 어린 조노량은 아직 망치를 잡을 수 없었지만, 늙은 대장장이는 시범이라도 보여주듯 망치를 강하게 내려쳤다. 약하게 두 번, 강하게 한 번. 다시 약하게 한 번.
“쇠를 다루는 것은 악기를 다루는 것과 다를 바 없느니라. 음률을 타지 못하면 좋은 쇠가 나오지 못하느니.”
까깡!
조노량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대장장이는 끊임없이 쇠를 내려쳤다. 하지만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네가 이다음에 커서 대장장이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세상 모든 이치가 이와 같다. 늘 강해서도 안 되고, 너무 약해서도 안 된다. 강해야 할 때와 부드러워야 할 때가 서로 다른 법이다. 또 때려야 할 때와 눌러야 할 때가 다른 법이다. 망치질도 때리는 망치질과 누르는 망치질이 다르거든. 무슨 소리냐고? 허허, 너도 크면 알 게다. 가서 물이나 떠 오너라.”
대장장이는 혼자 사는 노인네였다. 그 아래로 건장한 도제들이 여럿 있었지만 대장장이는 어린 조노량을 유독 귀여워했다. 고아였던 조노량 역시 보무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노인네를 무척 따랐다. 둘 모두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수천 번은 물어 보았습니다.’
조노량은 이미 이 널따란 판 부분 부분의 성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깡!
거세게 불똥이 튀었다. 클리브는 팔을 최대한 뻗었다.
깡!
이미 신체의 일부가 되다시피 한 워해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지점을 타격해 내고 있었다.
유난히 커다란 망치질 소리가 대장간을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조노량에게 집중되었다. 대장장이 중 누구도 저렇게 무식하게 망치질을 하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대장일을 전혀 모르는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일 것이다.
깡!
목을 타고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간다.
지금부터 두 번째 고비다. 접히는 안쪽 쇠가 식기 전에 눌러 붙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하고, 빠르게 밀착시켜야 했다.
-깡!
접히는 안쪽 면으로 기포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충분히 압착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쇠를 뚫고 나올 것이다. 그 작은 구멍이 쇠를 약하게 할 것이다. 대장간 할아버지가 도제들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수십 번씩 강조한 말이다. 조노량 역시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깡! 깡!
가우렐리온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쇠를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망친 작품을 부숴 버리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저놈은 도대체 어느 대장간에서 일을 배웠단 말인가? 쇠를 다루는 방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런 방법도 있구나’라고 감탄하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때는 상식을 벗어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쇠를 다루고 있었다. 마치 시험 삼아 만들어 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백여 번의 무식한 망치질 끝에 쇠판은 완전히 반으로 접혔다. 그리고 두 개의 판은 완전히 하나로 눌러 붙었다. 하지만 두께가 고르지 않았고, 접힌 가장자리도 삐뚤어져 있었다. 조노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삐뚤어진 가장자리를 망치로 접어 넣었다. 조노량이 만들려고 하는 것은 검이 아니라 도였기 때문이다. 몇 번을 접더라도 칼날이 위치할 부분은 고르기 마련이다. 대충 접어 넣은 부분은 칼등이 될 것이다.
문제는 고르지 않은 두께였다.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께는 다음 번 펼 때 바로잡으면 된다. 조노량은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