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승급 심사(2)
조노량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가능하다고는 생각도 못해 본 일이다.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 전 자신은 분명히 검에 기를 실었다. 삼양락(三陽絡)을 타고 흘러 내려간 기가 장심을 통과해 검첨까지 똑바로 뻗어나간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자신이 검에 기를 실을 수 있다니?
기가 신체를 벗어나 그와 연결된 물체, 가령 무기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경지를 차기(借氣)라 한다. 나아가 허공중에까지 뿌릴 수 있게 되면 이를 발경(發經)이라 한다. 당연히 차기보다는 발경이 한 단계 높은 경지다. 매개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며, 또한 발산된 기의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차이다. 다시 말해 발산된 기가 매개체 없이도 허공중에서 일시에 흩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비로소 발경지경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발경은 우선 차기의 단계를 거치고,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인 발기(發氣)를 넘은 후에야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는 말이다. 수련의 성격이나 정도에 따라서는 차기나 발기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발경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권공을 수련한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권공으로써 일류가 된다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어찌되었든 요지는 내면의 기를 유형화해 외부로 뻗어 낼 수 있는 경지의 처음이 차기다.
조노량은 스스로 차기의 초입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보무관에서도 노관장과 운호법, 그리고 젊은 관장 단 셋만이 이룬 경지다. 기를 회복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이룬 성과치고는 과할 정도다.
조노량은 손가락을 들어 검날을 쓰다듬으며 차분히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한 걸음 나아가기가 어렵지, 한 번 내디딘 걸음은 언제든 다시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없다면 B클래스로 넘어가겠다.”
날카로운 통증이 손가락을 찌른다. 조노량은 눈을 들어 검날을 더듬고 있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방울져 배어 나온 피가 느린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우둘투둘하다고 할 정도로 무딘 검날. 절대 손가락에 상처를 입힐 만한 도구가 아니다. 손가락에 상처가 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두껍고 무딘 날에 새겨진 깊은 홈.
홈의 매끈한 단면이 날카로운 예각을 그리고 있다. 검신의 삼분의 일 가까이 파고든 홈이 총 다섯 개. 롤과의 격돌 횟수와 일치한다. 이 다섯 개의 예리한 홈은 거친 검날과 대비되어 묘한 부조화를 연출했다. 조노량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이렇게 조노량이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 때, 몇 개의 시선이 조노량에게 머물렀다. 심사가 진행되자 대부분은 시선을 거두었으나 하나의 시선만은 계속 조노량을 좇고 있었다. 아니 조노량을 바라보고 있다고 단정 짓기도 애매한 시선이다.
그 시선은 미지근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얼핏 비웃는 듯도, 혹은 호기심에 찬 듯도, 아니면 우연히 시선이 그곳에 머무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선이 꽤 오랫동안 조노량에게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상념에서 깨어난 조노량도 그 미지근한 시선을 느꼈지만 무심히 넘겨 버렸다. 그만큼 그의 시선은 덤덤했다.
아직 충분히 길어지지 못한 햇살이 벌써 머리 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래서는 오늘 중으로 승급심사를 모두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S클래스에 도전한 자는 제스가 유일했고, A클래스에 도전하는 자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클래스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B클래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한 클래스다. 어설픈 실력으로 A클래스에 올라섰다간 다음번 아도니아 시합에서 시체로 실려 나올 것이 거의 확실하다. 때문에 B클래스에 속한 자들은 충분히 자신할 만큼 실력이 향상되지 않으면 일부러라도 A클래스에 도전하지 않는다. 물론 A클래스가 좀 더 편하지만 목숨을 담보할 만큼 충분한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게 신중히 선택한 A클래스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넘치도록 강했다. 그것이 크로아지크가 강한 이유 중 하나였다.
겉으로도 충분히 강해 보이는 B클래스의 다섯 사내. 단 다섯만이 A클래스에 도전했다.
그중 하나가 지금 죽었다. 스완이라는 이십 대 사내다. A클래스에 도전할 만큼 충분히 강했고 힘이 넘쳤다. 하지만 성급한 젊음이 그를 무리하게 했고, 그 강함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사정을 봐 줄 만큼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할 상황. 상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것이 검투반의 운명이다.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검투장 안 가득,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A클래스에 대한 도전은 마감되었다. 한 차례 이긴 자는 있었으나 승급에 성공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다음은 C클래스 차례다.
스마르의 진행에 따라 열여섯 명이 나섰다. 조노량이 나섰고, 크리들이 나섰다. 검투반에서 가장 안전하고, 또한 충분히 편한 클래스가 B클래스다. 매번 도전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시합이다. 조노량은 제법 강해 보이는 삼십 대 사내를 지목했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굳건한 다리가 인상적인 사내다. 지목된 사내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역시 A클래스에 충분히 도전할 만큼 강하다고 인정받고 있던 사내다. 말하자면 도전 전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달까?
C클래스 시합은 한 번에 네 명씩 치러졌다. 처음 나선 네 명의 사내 중 한 명만이 B클래스를 제압했다.
조노량과 크리들은 두 번째 조로 나섰다. 여러 명의 시선이 조노량에게 집중되었다. 아까의 미지근한 시선도 포함되어 있다.
조노량은 망가진 검 대신에 새로 받은 검을 양손으로 번갈아 쥐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낯설다. 잠시라도 사용했다고 이전 검이 손에 익었던 모양이다.
스마르의 시합 개시 선언이 있자, 조노량과 갈색머리 사내의 눈빛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묘하게 닮아 있다. 둘 모두 무덤덤한 표정이다. 결전을 앞둔 자들의 눈빛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잠시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두 사내 중 갈색머리 사내의 얼굴로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B클래스에 도전하는 대부분의 C클래스는 바짝 긴장하기 마련이다. 반년 전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처럼 긴장하지 않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의 표현인가? 아니면 물정 모르는 풋내기인가?
갈색머리의 사내, 라브로는 이 건방진 신출내기를 혼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검투사로 산다는 것은 언제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 전 실려나간 스완처럼 말이다. A클래스에 도전하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실력. 자신과 겨루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했던 스완. 그러나 젊음의 병, 즉 경솔이 그의 짧은 생을 끝나게 만들었다. 경솔한 자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라브로는 늘어트렸던 방패를 가슴까지 끌어 올렸다. 그 방패 위로 검을 두어 번 두드렸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도전자가 먼저 공격한다.’
조노량은 중원에서의 습관대로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다. 짧고 뭉툭한 검. 방패는 없다. 어차피 들어 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새로 얻은 낯선 검을 사선으로 휘둘러보았다. 이 검의 무게중심을 대충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검은 각기 무게중심이 다르다. 같은 공방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검사라면 눈을 감고도 자신의 검을 구별해 낼 수 있다. 바로 무게중심 때문이다. 그 무게중심에 의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때문에 고수들은 자신의 검이 아닌 타인의 검으로 본래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몇 걸음 동안 조노량은 검과 자신을 동화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검을 신체의 일부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조노량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검을 휘저으며 다가오자 라브로는 왠지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손봐 줄 생각은 슬그머니 들어가 버렸다. 더구나 저 건방진 자세는 무엇인가? 방패는 또 어디에 갔다 버렸단 말인가?
무덤덤하던 라브로의 표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라브로는 방패를 앞세우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기다리겠다는 자세에서 선공으로 바뀐 것이다. 조노량으로서는 기만으로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정도는 아니다. 뒷골목에서 충분히 겪어 왔던 터였다.
두터운 방패의 면에 흘리듯 검을 가져다 댐과 동시에 가볍게 빠지는 한 걸음.
관성은 라브로의 몸을 두어 발자국 더 전진시키고서야 정지를 허락했다. 물론 라브로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의 돌격을 피해 낸 것을 인지한 순간, 이미 그의 방패는 조노량을 향해 돌려져 있었다. 몸은 전진하지만 방패는 상대의 반격을 봉쇄하는 위치를 점했다.
한 번 피해 냈다고 라브로의 공격이 멈춘 것 역시 아니었다. 두어 발자국 전진한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고, 그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 몸이 멈춤과 동시에 방패를 중심으로 회전한 라브로는 상대방의 반격 범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반격할 생각이 없었던 듯 조노량이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기 때문이다. 헛손질!
낯 뜨거운 일이다. 하지만 다치는 것보다는 낫지 아닌가?
예측 공격이 빗나갔지만 그때는 라브로도 이미 상대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보다 정확히 상대를 향해 이차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상체만 기울여도 충분히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라브로의 검이 조노량을 향해 내리꽂혔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검놀림이었지만 어느새 조노량의 신형은 오른쪽으로 빠져 나갔다. 바로 라브로의 방패가 위치한 방향이다.
라브로의 방패가 우측으로 크게 휘둘러졌다. 공격과 동시에 시야를 확보하겠다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 휘두름이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패 운용 방법이다. 더구나 단단한 근육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력은 결코 검에 못지않았다. 아니 무게감에 있어서는 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았다.
쾅!
그 궤적에 조노량의 검이 걸려들었다.
접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검과 방패가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이다.
조노량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엄청난 힘이었다. 조노량은 인상을 쓰며 검을 쥔 오른손목을 주물렀다.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한 라브로는 조노량에게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조노량을 향해 돌진했다. 최초의 격돌이 라브로에게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았는지, 돌격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라브로의 치명적 실수였다.
조노량은 더 이상 상대방의 공격에 정면으로 마주칠 생각이 없었다.
낮게 숙여진 조노량의 신형이 꺼지듯 가라앉았다. 처음 막사에서 보여주었던 쓸어차기가 라브로의 굳건한 정강이를 훑었고, 그 결과로 라브로는 볼품사납게 나뒹굴고 말았다.
돌격이 강했던 만큼 거세게 구르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자세를 잡으려던 라브로의 목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대어져 있었다.
너무나 어이없고, 너무나 깔끔한 승리였다.
그 모습을 본 스마르가 손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뻗었다. 결과가 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라브로는 멍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아직 힘의 절반도 쏟아내지 못했는데, 이 쥐새끼 같은 신출내기가 치사한 방법으로 승리를 가로채지 않았는가? 어떻게 전사가 상대의 다리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라브로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남자답게 정면으로 힘과 기술을 겨뤄야지 누워서 상대의 다리나 걷어차다니…….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스마르의 손은 이미 승패를 판정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치사한 승리에 대한 응징은 나중에라도 충분히 갚아주고 말 테다.
조노량이 검을 거두자 라브로는 자신의 검을 거칠게 내팽개쳤다가 다시 주워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수습하는 조노량을 바라보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라브로가 누구인가? B클래스에서도 제법 강하다고 소문난 자였다.
처음 신고식을 아무런 상처 없이 통과했을 때까지도, 또 롤의 검을 몇 차례 받아 넘겼을 때만 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식시합이었다. 그것도 라브로라면 절대 운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저 친구, 제법 쓸 만하지 않은가?”
관중석에 앉아 있던 뚱뚱한 중년인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봐야 아직 마나도 못 다루는 B급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몸놀림에 군더더기가 없어. 마치 잘 벼려진 시미터 같지 않은가.”
“글쎄요, 상대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는 건 좀…….”
“전투 중에 상대의 다리를 거는 게 쉬울 것 같은가?”
“…….”
“잘 주시하게.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꽤 기대해 볼 만할 걸세.”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생김새도 좀 이상하고 말입니다.”
“껄껄, 사내의 외모를 따지다니. 자넨 북부 사나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네그려.”
“부끄럽습니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B클래스라면 아도니아 제2시합에서 뛰는 레벨이다. 제1시합은 아니더라도 가장 많은 시민들이 관전하는 시합인 만큼 내기 돈이 적지 않았다.
잡담을 주고받는 두 남자의 뒤편, 관중석 맨 위쪽에 앉아 있던 회색로브의 사내도 조노량 쪽만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로브의 그늘진 아래로 잘 면도된 턱,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만이 슬쩍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가 처음부터 관중석에 앉아 있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수용소의 특성상 아무리 유력인사라 해도 수용소 안에서만큼은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그가 나타난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것이다.
걸음을 옮기던 조노량의 눈이 얼핏 로브의 사내를 스쳐지나 좌로 돌아갔다. 아까부터 조노량을 주시하던 미지근한 시선. 그 시선의 주인공이 거기 있었다.
옅은 갈색머리와 가늘고 사각진 눈매, 육 척의 키에 적당히 건장한 체구,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모다. 그야말로 평범한 모습의 삼십 대 사내다.
그 얼굴은 조노량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저녁식사를 인솔하던 사내. 그가 움직이고서야 스마르를 비롯한 나머지 검투반원들도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시선이 모호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치 일상적인 풍경을 바라보듯 무심하고 덤덤한 시선이기에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여겼지만, 그 시선이 계속 자신을 따라다니는 바에야 더 이상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마치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감시당하는 데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거구의 구루가 자리로 돌아오는 조노량을 향해 헤벌쭉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뭔가 어눌한 말투로 수다를 떨려고 했지만 조노량은 간단히 무시해 버리고 시합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다른 자들의 시합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조노량의 조가 너무 빨리 끝난 것이다.
조노량의 시선이 크리들에게 향했다. 다른 자들에 비해 조금 작다 싶을 만한 체구. 그다지 강해 보이는 외모가 아니다. 하지만 크리들 역시 무력으로 부반장이 되었을 만큼 절대 약한 자는 아니었다. 장대한 체구의 사내들 틈이라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그다지 왜소한 체구도 아니다. 조노량보다는 오히려 약간 큰 편이다.
크리들의 상대는 육 척 반가량의 건장한 이십 대 사내였다. 하지만 크리들은 어렵지 않게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힘은 상대방이 우위에 서 있었으나 기교면에서는 크리들이 월등히 높아 보였다.
특이한 것은 크리들이 검이 아닌 장창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장창의 놀림이 어찌나 현란하던지 상대는 감히 크리들에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상대가 창대를 부러트리겠다는 듯 검을 휘두르면 크리들의 창은 어느새 회수되어 있었고, 상대가 다가들려 하면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창을 향해 방패를 들이밀면 창은 어느새 방패를 타넘고 상대의 목을 향해 찔러들었다.
일각여의 접전 끝에 결국 상대는 어깨에 일격을 받고 검을 떨어뜨림으로써 패배를 자인했다. 크리들의 승리는 어느 정도 예측된 상황이었는지 조노량의 승리 때와 같은 반향은 없었다.
그 후 나머지 두 명의 도전자가 패배함으로써 두 번째 조의 시합도 마무리되었다.
세 번째 시합에서 한 명이 어렵게 승리했고, 또 한 명의 중상자가 나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젓는 것으로 보아 상태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네 번째 시합에서도 한 명의 승리자가 나옴으로써 C클래스에서는 1차 시합을 통과한 자가 총 네 명으로 확정되었다.
네 명은 각기 2차 시합의 상대를 선택해야 했다. 크리들을 포함해 검투반의 상황을 잘 아는 세 명은 비교적 쉬운 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수용소에서 삼 년이나 있었음에도 검투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조노량은 또 다시 강한 상대를 선택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십 대로 보이는 날렵한 체구의 사내였다.
그 사내가 조노량에게 지명을 받자 갈색머리의 사내는 그를 손짓해 불렀다.
이십 대 사내는 무척 조심스러운 자세로 갈색머리 사내 옆으로 가서 귀를 낮췄다. 갈색머리 사내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모습이다. 비록 갈색머리 사내가 A클래스 무리에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토록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좀 이상해 보였다. 더구나 같은 A클래스의 사람들도 갈색머리 사내가 이십 대 사내를 부르자 적당히 간격을 넓혀 그가 갈색머리 사내에게 다가가기 좋도록 공간을 넓혀 주었다.
심지어는 스마르마저 이십 대 사내가 시합장으로 바로 나서지 않는데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조노량은 그가 앞으로 나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 후 이십 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고개를 숙이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쓸 듯이 천천히 등장한 사내가 고개를 들며 밝게 웃었다.
“전 젝이라 합니다. 당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습니다.”
흔한 이름이다. 스스로 젝이라 칭한 이십 대 사내는 짧고 가느다란 단검을 들어 보였다. 그것이 자신의 무기라는 표시인가 보다.
말과 함께 젝은 스마르를 바라보았다. 조노량과 젝의 조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개 조는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다.
스마르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의 오른손이 내려갔다. 시합의 개시를 알리는 표시다.
“B클래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조금 빠를 뿐이죠. 당신도 빠른 것 같습-니-다만.”
젝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이라는 발음이 들린 것은 조노량의 바로 옆에서였다.
☆ ☆ ☆
조노량이 채 감을 잡기도 전에 젝의 단검이 날아왔다. 엄청난 빠르기였다. 조노량은 급박하게 좌측으로 돌며 검을 뻗었지만 어느새 젝의 그림자가 우측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치익!
새로 배급받은 두터운 옷이 한 자가량 길게 갈라졌다. 조노량은 흠칫하며 보법을 시전했다. 보무관에서 배웠던 잡기 중 하나다. ‘일위진천환영보(一位振天幻影步)’, 노관장의 선대 때 늙은 거지가 전수해 주고 갔다는 이름만 거창한 삼류보법이다. 전혀 대단할 것 없는 보법이지만 내공의 운용이 뒷받침되자 제법 쓸 만한 보법으로 느껴졌다.
조노량의 신영이 현란하게 위치를 바꿔갔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였다. 시합을 관전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지만 갈색머리 사내의 입가엔 피식하고 조소가 스쳐갔다.
조노량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지만 젝의 움직임 역시 그에 맞춰 충분히 반응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조노량보다 더 빠르면 빨랐지 느린 편이 아니었다. 덕분에 조노량은 생애 처음 보법을 보법답게 펼쳐 보이면서도 좀처럼 젝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검이 너무 무겁고 짧았다.
도무지 원하는 검로를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익히고 있었던 삼재검법의 묘리를 제대로 살리기도 힘들었다. 이건 검이 아니라 차라리 단봉에 가까웠다. 아니 어쩌면 단봉만도 못했다. 철로 만든 단봉을 누가 쓴단 말인가?
몸을 빼는 것과 검을 들어 막는 것. 이 두 가지는 적절히 조화가 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겁고 짧은 검이 계속 조노량의 운신을 버겁게 하고 있었다.
예리한 젝의 단검을 피해 내고 있는 일등공신은 보법보다는 오히려 반사 신경이었다. 내공 덕을 전혀 보지 못했던 중원에서도 이것 하나로 버텨 왔던 조노량이다. 거기에 어느 정도 내공까지 보태지자 조노량의 반응 속도는 그야말로 눈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역시 충분하지는 못했다.
조노량의 고개가 왼쪽으로 한 뼘가량 기울어졌다. 그 위를 날카로운 단검이 스치듯 지나갔다. 오른쪽 뺨이 따끔거렸다.
검기가 실리지 않은 단검임에도 그 예기만으로 조노량의 뺨에 상처를 입혔다.
젝의 검이 스쳐 간 부위가 벌써 예닐곱 군데가 넘었다. 일부에서는 핏줄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데거는 중부대륙에서 건너온 것이지요. 날카롭습니다. 주의하시-길!”
경고보다 빠른 움직임.
느낀 순간 허리를 틀었지만 또 한 번 옷자락이 짧게 베어졌다. 아깝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의복의 중요성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조노량으로서는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젝의 몸놀림은 보법을 밟고 있는 조노량으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만큼 빨랐다.
힘보다는 감각과 속도에 의지해 싸우고 있는 조노량에게는 상극이랄 수 있는 상대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조노량이지만 곳곳에 상처를 입게 되자 슬슬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무사로서의 피가 끓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심을 통과한 기가 검첨으로 흘러 내려갔다. 조노량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운기였다.
좀 전보다 월등히 빨라진 검속.
‘이번에는 좌측이다!’
조노량은 보지도 않고 검을 좌측으로 뻗었다. 마침 그쪽으로 다가가던 젝이 서둘러 몸을 물렸다.
검으로 느끼는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
더 이상 손해를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젝을 잡기에 충분한 만큼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젝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검을 막아야 할 상황을 만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텐데, 젝은 좀처럼 검을 마주대지 않았다. 공격하면 빠져나갔고, 공격을 막으려 하면 검을 피했다. 한 번만 강하게 부닥칠 수 있다면 저 작고 가는 단검으로는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좀처럼 젝을 잡아낼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조노량은 흥분으로 달궈진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침착해야 한다. 흥분은 금물이다.
상대는 자신보다 빠르다. 익숙지 않은 보법을 끝까지 펼치려다가 오히려 허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젝이라는 사내는 자신보다 항상 반 박자쯤 빨랐다. 보법의 마지막 마무리, 즉 상대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그 순간만큼씩 젝의 움직임이 빨랐다.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은?
‘바로 관중석의 벽이다.’
접전이 꽤 길어지고 있었다. 서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못하고 시간만 끌고 있는 상태였다.
아까와는 반대로 조노량의 시합이 가장 길어지고 있었다. 나머지 세 조는 이미 승부가 결정 났다. 크리들만이 승리하였고, 나머지 둘은 승급에 실패했다.
B클래스의 벽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더구나 승급을 위해서는 B클래스 두 명을 꺾어야 한다. 웬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이제 관중석과 검투반원의 모든 시선이 조노량과 젝의 접전에 집중되었다.
어느덧 해도 관중석 끝에 낮게 걸려 있었다.
시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장내는 긴장감으로 팽팽해져 있었다.
겨우 B클래스에 도전하는 시합에 이토록 집중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그만큼 둘의 접전은 치열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현란한 움직임. 그리고 치명적인 공격들. A클래스 시합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어느 순간부터 조노량은 젝의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는 듯한 모습으로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우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여기저기 찢겨 피를 흘리고 있는 조노량과 아직까지 움직임이 둔해지지 않고 있는 젝.
젝이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침착하게 조노량을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조노량은 등이 관중석의 벽에 닿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젝의 공격 방향은 후방을 제외한 삼면. 그나마 좌우는 관중석으로 인해 약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관중석의 높은 벽을 타넘고 쏟아지는 황혼의 붉은 햇살이 조노량의 발아래, 이 장여 앞에까지 그늘을 드리웠다. 원하던 조건이다.
관중석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감시병들이 바짝 긴장했다. 지금껏 보여준 이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삼 미터에 달하는 관중석 벽도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노량의 움직임이 멈췄다. 검은 낮게 하단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치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자세다.
조노량이 벽을 방패삼자, 젝의 움직임도 신중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둘을 휘감았다.
젝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시작된 가는 땀방울 한 줄기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썹 끝에 매달렸다. 눈을 깜박여 떨구어 내자 그 소금기에 눈이 따끔거렸다. 스스로도 상당히 긴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수.
상대가 승부를 걸어온 셈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 검은 머리 사내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검투의 양상은 전과 같았으나, 더 이상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지 못한 지 벌써 반시간이나 흘렀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근육에 쌓인 피로도 만만치 않았다.
이토록 전력을 다해 싸워 본 것이 언제였던가?
커트리안은 최선을 다하라 했다. 이제 승부를 결정지을 때다.
젝은 은밀히 데거에 마나를 주입했다. 투명한 아지랑이가 데거를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는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기운이다.
지금껏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암살자 젝의 필살기를 보여줄 시간이다.
젝은 벌써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내내 감춰두고 있던 기술을 펼칠 시간인 것이다.
자신의 요구대로 상대방 역시 승부를 걸어왔다. 저 예쁘장한 노랑머리 남자의 단검에 어리는 강력한 기감. 상대는 절대 B클래스의 남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말인가? 왜?
조노량은 미소까지 머금은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좌우로 한 자가량씩 여유 있게 흔들거리고 있다. 공격의 초점을 흐리겠다는 뜻인가?
조노량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햇살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상대와 부닥칠 위치를 계산했다. 낮아진 태양의 붉은 빛은 둘이 서 있는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당하지 않다. 상대가 물러날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 걸음쯤 더 앞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접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어야 한다.
상대의 흔들거림은 마치 좌우 방향으로 피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즉, 횡의 공격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노량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의 첫 번째 검을 뒤로 흘림과 동시에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공격은 상대의 의도대로 횡으로 시작해야 한다.
조노량은 두 손으로 검의 짧은 손잡이를 겹쳐 쥐었다. 힘은 배가 될지 모르나 반응에 있어서는 오히려 느릴 수밖에 없는 자세, 마치 상대의 주문대로 충실히 따라주겠다는 표시처럼 보였다.
조노량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젝이 단검을 회전시키며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반대편 손은 단검보다 오히려 앞쪽으로 뻗어진 상태다.
조노량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핫!”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전광석화처럼 좌우를 가르는 백색 선!
젝이 의도했던 바로 그 공격이다. 젝의 신영이 마치 쭉 늘어나듯 뒤쪽으로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왼쪽 손목 아래에서 솟구치듯 튀어나오는 또 하나의 단검. 그리고 물러난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반전하려는 시점!
한 줄기 붉은 빛이 젝의 눈을 찔렀다. 시야를 봉쇄할 정도로 강렬한 빛은 아니었지만 한순간 조노량의 신형이 백색 선 뒤로 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젝은 순간 당황했지만 찰라에 목숨을 거는 암살자답게 망설임 없이 의도했던 기술을 끝까지 펼쳤다.
젝의 왼쪽으로부터 두 개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빠른 전진과 함께 왼손에 들려진 단검이 쏘아져 나갔고, 애초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검이 좌에서 우로 그어진 것이다.
쏘아진 단검은 이미 손을 떠났지만 아직까지 손에 들린 오른쪽 단검은 그음과 동시에 세 방향으로 찔러져 들어갔다. 마치 세 개의 손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스팟-휘이휙!
퍽!
일순간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옆구리에 단검을 꽂고 서 있는 조노량과 옆으로 이 장여나 날아가 대자로 뻗어 있는 젝의 모습이었다.
젝이 조노량의 신형을 놓친 그 순간, 조노량은 공중에서 검을 놓아버림과 동시에 일위진천환영보의 호흡대로 타원을 그리며 젝에게 바짝 붙은 것이다. 첫 번째 직선 전진에 이은 두 번째 곡선 전진이 승부를 갈랐다.
날아간 단검은 위치를 채 벗어나지 못한 조노량의 옆구리에 꽂혔고, 조노량의 위치를 오해한 젝의 전진으로 인해 두 번째 단검은 조노량을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보법의 회전력이 그대로 전달된 정권이 세로로 틀어져 있던 젝의 안면에 정면으로 박혀 버렸다.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갈색머리의 사내, 커트리안이 천천히 박수를 쳤다.
커트리안이 침묵을 깨자 그제야 몇 되지 않는 관중들로부터 불규칙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이해했다는 듯이 거만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보였다.
조노량이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동안, 패배한 B클래스 사내들 간에 클래스 잔존을 위한 짧은 시합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한 젝은 자동으로 C클래스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로서 승급심사가 모두 끝났다.
어느덧 짧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몇 남지 않았던 관중들도 자리를 털고 서둘러 떠나갔다. 햇볕 아래 조금쯤 데워졌던 공기도 싸늘히 식었다. 부상당한 몇몇과 지켜만 보던 몇몇, 그리고 실려나간 에반과 토이크.
이것이 검투반의 현실이다.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죽음과 가까운 이들이 바로 검투반원이다.
수련장 안은 어두운 침묵에 쌓여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잔명만 남아 있는 수련장 구석에서 작은 소음이 시작되었다.
둥, 둥, 두둥
불규칙하면서도 어딘가 규칙이 숨어 있는 타악기 소리.
까강, 깡, 깡깡
날카로운 쇳소리가 묘한 장단을 이루었다.
방패와 검을 두드리는 소리다. 경쾌한 장단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는 가락이다. 조노량도 가끔 들었던 음이다. ‘설원의 여행자’라는 오래된 노래. 먼 옛날 북부가 하나였을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바로 그 노래다.
서너 개의 불협화음으로 시작된 협주는 점점 다양한 소리들로 채워져 넓게 퍼져나갔다. 충분히 클 수도 있겠지만 누구 하나 소리의 강도를 높이지 않았다. 다만 울림이 깊어져 갈 뿐이다.
건조한 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협연임에도 초라하지 않았고, 악기다운 악기 하나 없이도 충분히 남자다운 슬픔을 표현해 내고 있었다. 침묵의 연주가 시작된 지 한참 후, 낮은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향집 뒷동산 눈이 녹으면 돌아가리.
날 기억하는 아내와 아이들
십 년을 담아둔 이야기, 웃으며 말하리.
날 기억하는 아내와 아이들
날 기억하는 친구와 형제들
살찐 칠면조 구워 놓고, 잔을 돌리리.
낡은 지팡이 세워 놓고 그리움에 취하리.
낡은 외투 벗어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