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5화 (5/142)

5. 금광의 비밀

“이 자식 죽은 거 아냐?”

“앉아서 죽은 놈 봤냐? 어이, 일어나!”

“거 봐. 움직이지도 않잖아? 그리고 저놈 빵이 세 덩이나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 물도 마시지 않았어.”

그제야 단구의 간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문 안으로 들어와 조노량을 흔들어 보았다.

그때 조노량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눈에서는 순간적으로 정광이 쏟아져 나왔다.

심법 중에 예기치 않게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삼류 내공심법 와호공의 유일한 장점이다.

정심한 내공심법을 수련 중이었다면 위험했겠지만 건강호흡법에 가까운 와호공은 외부의 자극에도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다.

조노량의 눈빛에 간수는 순간 흠칫하고 물러났다.

“아니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보았나?”

횃불을 받친 채 문밖에 서 있던 다른 간수가 웃으며 묻자, 그제야 단구의 간수는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아니네. 헛것을 보았나보이. 이놈아, 죽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러도 대답을 안 해? 며칠 더 있고 싶은 게냐? 따라 나와!”

단구의 간수는 조노량을 한 번 윽박지르고 방을 나섰다.

그제야 조노량도 정신을 차리고 간수를 바라보았다.

“사면입니까?”

뒤돌아 나가던 간수가 어이없다는 듯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너 오 일짜리 아니었냐? 더 있고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던 조노량은 퍼뜩 놀라서 되물었다.

“벌써 닷새가 지났단 말입니까?”

“이놈 미친 거 아냐?”

후다닥 일어나던 조노량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몸이 너무나 가벼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간수가 혀를 찼다.

며칠 썩고 나서는 중심도 제대로 못 잡고 비틀거리는 죄수들을 수없이 봐 왔다. 독방 생활을 하고 풀려날 때 흔히 있는 일이다. 간수의 오해와는 달리 조노량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단전에서 상당량의 내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빵 세 덩이를 주워 들고 독방을 나섰다.

두 명의 병사를 뒤로하고 조노량은 막사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밖의 온도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실내 공기다. 아직 취침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지라 난로가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장작을 때고 있다.

이제 막 저녁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온 반원들이 조노량을 맞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들을 잃은 터라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용히 조노량의 무사귀환을 반겼다. 조노량을 마지막으로 독방에 끌려간 동료 셋이 모두 무사히 돌아온 것은 다행이나, 반장과 루드는 아직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다. 끔찍한 부상을 입었으니 당분간 복귀하기는 힘들 것이다. 특히 루드의 복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허글러가 말없이 조노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일견 봐도 조노량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몸은 불과 닷새 만에 훌쩍 말라 버렸고, 씻지 못한 얼굴에는 허물이 들고 일어나 검무죽죽하게 묻어났다.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혀를 차는 동료들의 반응과 달리 조노량은 그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개운했다. 심하게 배가 고프긴 했지만 챙겨온 빵을 씹으면 곧 해결될 것이다.

침상에 자리를 잡자마자 늙다리 우글라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우글라로 인해 주머니칼을 잃어버리고 독방 신세까지 졌으니 감정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큰 사건들을 치른 터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제 와서 어쩌겠소. 좀 쉬고 싶소만.”

얼른 가져온 빵을 먹고 싶은 생각에 우글라를 쫓아 버리려 했지만 우글라는 물러갈 생각이 없는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제 막 돌아온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우글라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리크도 죽었다네. 사고가 난 다음날 작업장에서 또 사고를 당했지. 주갱도 작업을 하다가 천장에서 떨어진 바위에 맞았다는데,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말이네.”

‘리크가 죽었다고?’

놀라는 조노량의 표정을 살피던 우글라가 조노량에게 바짝 다가앉아서 귓가에 대고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머리의 상처가 바위에 맞았다기보다는 망치로 내려친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젊어서 용병질을 좀 하고 다녀서 아는데, 두개골이 동그랗게 함몰된 모양새가 작고 둥근 해머에 맞은 상처임에 틀림없어. 작업용 망치를 어림하면 비슷할 걸세.”

순간 조노량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피트를 향했다. 침상에 쭈그리고 앉아 태연히 양말을 깁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칸이 죽었고, 제리가 죽었다. 그리고 리크가 죽었다면 이제 금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자신과 반장 그리고 피트 셋만 남은 셈이다. 반장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니 어쩌면 피트와 자신만이 금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피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조노량으로서는 피트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1조원들이 대부분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리크와 피트가 임시로 운반조로 편성되었다네. 피트 말이 32번 갱도를 지나치다가 사고의 여파로 미처 고정되지 못한 바위가 떨어졌다더구먼. 리크의 머리에 맞았다는 피 묻은 바위도 발견되었지만 영 개운치가 않아.”

피트와 함께 있었다? 의심해 볼 수도 있는 정황이지만 설마 피트가 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리크를 살해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럼 리크가 보관하고 있던 금은 어디로 갔을까? 피트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우글라가 미적거리며 몇 마디 더 늘어놓으려 했지만 노골적인 조노량의 축객령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조노량은 품속에 감춘 빵 세 덩이를 꺼내 남의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만찬을 즐겼다.

독방 신세를 진 자는 다음날 하루 작업불능자로 분류되어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하루의 휴식을 취한 다음날 의외로 반장이 빠르게 복귀했다. 다리와 팔에 각각 부목을 댄 상태였다. 생각보다는 부상의 정도가 크지 않았던 듯 비교적 정신도 멀쩡했다. 어차피 의무실에서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했었다. 애송이 신관의 신성력이라야 뻔했으니까. 반장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스스로 복귀를 희망했다고 했다. 의무실에 누워 있으나 작업불능자로 분류되어 막사에 누워 있으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날 작업이 끝나고 조노량과 피트 그리고 반장이 따로 모였다.

“루드는 어떻습니까?”

피트가 걱정스럽다는 듯 루드의 안부를 물었다.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오. 첫날 특별 병실로 옮긴 이후로는 얼굴조차 보지 못했소.”

“그나저나 부상은 좀 어떻습니까?”

피트가 다시 물었다.

“다리는 깔끔하게 부러져서 한 두어 달 후면 나을 것 같소. 하지만 팔은 회복이 힘들겠소. 거의 으스러지다시피 한 터라…….”

조노량이 침음을 흘렸다. 회복이 된다면 모를까, 팔병신으로 반장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허글러가 반장의 지위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리크가 사고를 당했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조노량의 눈빛이 날카롭게 피트를 향했다. 하지만 피트는 침울한 표정을 지을 뿐 잠시간 말을 잇지 않았다.

“사고였습니다. 하필 그때 바위가 떨어져 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자칫했으면 저도 당할 뻔했으니까요.”

반장도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친구였는데……. 금은 회수했소?”

가장 궁금했던 내용이었으리라.

피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사고 당일 밤에 볼일을 보았습니다.”

반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보관은?”

잠시 우물쭈물하던 피트가 조노량의 눈치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불침번 때 막사 천장…… 네 번째 기둥 뒤쪽에 숨겼습니다. 절대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아주 잘했소. 우리가 여길 벗어날 중요한 수단이니 철저히 비밀을 지켜야 할 것이오. 내 따로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길 바라오.”

반장의 시선이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노량에게 향했다.

“노리앙, 우리 셋은 이제 운명을 함께할 것이오. 그대의 입이 무거운 것은 알지만 다시 한 번 다짐해 두는 바요. 비밀은 우리 셋 이외에 누구도 알아선 안 될 것이오.”

조노량의 고개가 단호히 끄덕여졌다.

피트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 얼핏 스쳤다. 반장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날 밤 조노량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피트의 반응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갱도 복구 작업 중에도 피트는 자신의 곁을 맴돌다시피 했다. 저녁때도 마찬가지다. 황금을 숨긴 위치를 말하면서도 계속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단지 경계를 하는 것인지 혹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판단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피트가 말한 장소에 진짜 황금이 숨겨져 있을까? 그리고 리크의 죽음은 진정 피트와 관계없는 일일까? 반장은 딱히 피트를 의심하는 눈치가 아니다. 생각이 깊은 반장조차 피트를 의심하지 않는데, 자신이 과민한 것일까?

아쉽게도 오늘은 불침번이 없었다. 피트의 말을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조노량이 얼핏 눈을 뜬 건 새벽 두 시경.

독방에 다녀온 이후로 예민해진 감각에 미세한 살기가 잡혔다. 평생을 무사로 살아온 탓에 살기에는 민감하다. 슬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살기는 자신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흐릿한 횃불 빛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언뜻 스쳐 갔다. 자연스럽게 뒤척이며 고개를 돌리자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피트?

다른 불침번이 깨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피트 자신이 불침번인 모양이다. 피트는 살금살금 막사의 안쪽 난롯가로 이동했다.

순간 조노량은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난로를 중심으로 남쪽 침대에는 반장이, 북쪽 침대에는 부반장의 침상이 놓여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피트의 신형이 희끗한 무언가를 들고 반장의 침상으로 향했다.

혹시 하는 찰나에 피트의 거구가 반장의 양쪽 어깨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올라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반장의 신형이 꿈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작은 움직임이었을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 피트가 반장에게 마른 과일조각을 건네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초란초? 루드가 약으로 자주 사용하는 풀이라서 잘 알고 있다. 적당량을 씹으면 약이 되기도 하지만 즙을 추출해 과하게 사용하면 미약이 되는 식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깊이 잠들었다고 해도 저런 거구가 내리누르는데 깨지 않을 수는 없다.

거의 동시에 희끗한 물체가 반장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베게?

그제야 조노량의 신형이 잘 당겨진 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진기를 유통하고 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전성기 때의 몸놀림이 살아났다.

조노량도 몇 차례 얻어맞았듯이 피트의 무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피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침상을 넘어 도약한 조노량의 발뒤꿈치가 피트의 등을 가격했다. 진기를 실은 발차기다. 조노량의 몸무게가 아무리 가볍더라도 정통으로 맞고 버틸 수 있는 성질의 발차기가 아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피트가 침상 위를 굴러 막사의 벽에 가 처박혔다. 반장의 숨통을 죄던 베게도 피트를 따라 던져지듯 굴러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에 깊이 잠들어 있던 반원들이 깨어났다.

조노량의 신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착지와 동시에 회전하며 팔꿈치를 찍어 내렸다. 그 궤적에 막사 벽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피트의 관자놀이가 걸렸다. 우직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피트는 거칠게 조노량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만약 자신이 이 정도 타격을 받았다면 그대로 기절했겠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자다. 피트에게 떠밀려 한 바퀴 구른 조노량은 우선 반장의 상태를 살폈다. 눈을 부릅뜬 반장이 상반신을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죽여!’

입을 막으란 소리다. 일이 실패한 것을 안 피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수용소 측에 비밀을 토설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조노량은 지체 없이 손끝을 세워 목 중앙의 염천혈(廉泉穴)을 날카롭게 찔렀다. 충분한 진기를 싣지 못했다 하더라도 치명적인 위치다. 순식간에 숨골을 막아 버린 타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피트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재차 손끝을 날리려 할 때에 조노량은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다가온 허글러가 조노량의 안면을 거칠게 가격하여 피트로부터 떼어 놓은 것이다.

피트는 그대로 엎어져서 거칠게 숨을 토했다. 쉽게 숨이 돌아오지 않는 듯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고 있었다.

거탑과 같은 허글러가 중앙에 버티고 서자 조노량으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상황은 명확해졌다. 탈출할 때 피트의 앞에서 달리던 칸의 비명도 의심스러웠고, 리크의 죽음도 의문이었다. 또 오늘 작업장에서 하루 종일 조노량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도 그렇다. 그의 의도는 오늘 반장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명확히 증명되었다.

피트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그의 입을 막는 것뿐이다. 하지만 모든 반원들이 잠에서 깨어난 지금 피트를 죽이는 일은 요원해졌다.

조노량의 입술이 타들어 갔다. 막막한 상황인 것이다.

반원들은 의문을 담은 시선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깨어난 반원들은 반장이 위해를 당할 뻔했다는 것까지는 추정할 수 있었지만 가해자가 누군지는 아직까지 명확치 않았다.

반장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피트는 아직까지 흙바닥에 처박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직 조노량만이 살기를 흘리며 피트를 노려보고 있는 상태였다.

허글러가 해명을 해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조노량으로서도 난감한 상황. 피트의 의도를 말하려면 황금이라는 원인까지 토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번 사고의 원인이 황금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 밝혀진다면 설사 반장이라 하더라도 무사치는 못할 것이다.

더구나 특별작업조원들까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입을 여는 것은 절대 불가한 일이다.

조노량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사용하겠다는 듯 허글러가 조노량을 향해 한 발자국 접근했다.

그때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 반장이 피트를 막아서고 있는 부반장에게 절룩거리며 다가갔다. 부반장과 잠시 시선을 맞추던 반장이 부반장의 어깨를 밀어냈다. 힘으로야 부반장을 밀쳐낼 수 없겠지만 그는 반의 최고 권력자다. 상황을 모르는 부반장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부목을 댄 다리를 쭉 편 채 반장은 아직까지 바닥을 기고 있는 피트를 향해 몸을 굽힌 후, 피트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젖혀 들었다. 그는 허벅지 안쪽 부목 틈 사이에서 이십 센티 길이의 날카로운 나뭇조각을 꺼내듦과 동시에 들려진 피트의 턱 안쪽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끅!”

날카로운 나뭇조각이 턱 아래에서 위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반장은 삐죽이 나와 있는 나뭇조각 끄트머리를 손바닥으로 가격해 더 깊이 찔러 넣었다. 턱 아래에서 파고든 나뭇조각은 피트의 뇌를 뚫고 두개골에 닿아서야 멈췄다.

그제야 반장은 움켜쥔 피트의 머리채를 내동댕이치듯 던져 버렸다.

시선이 반장의 등에 가려 상황 파악이 어려웠던 것도 있지만,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였기에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다들 멍청해져 있는 와중에 허글러의 반응이 가장 빨랐다. 반장의 어깨를 잡아 밀쳐내고 서둘러 피트의 상태를 살폈지만 피트는 이미 절명한 후였다.

허글러가 급히 크레이그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문을 경계해!”

크레이그를 포함한 두어 명이 급히 막사 문을 막아서며 문틈으로 밖을 경계했다.

“무슨 짓이오?”

힘없이 나동그라진 반장이 하나 남은 팔로 땅을 짚고 상체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피트의 짓이네.”

“무엇이 말이오?”

“사고의 원인…… 피트의 짓이네.”

“……?”

“그날 갱도에서 다툼이 있었지. 피트가 제리를 살해했네. 칸이 말리려다가 밀려서 새로 설치한 버팀목을 들이받았던 것이 붕괴의 원인이네.”

이야기를 듣던 조노량이 멍한 표정으로 반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반장은 태연히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붕괴가 시작된 상태였지. 잘잘못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네. 난 덮어두려 했는데 피트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더군.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 것 같네. 나까지 포함해서 말일세.”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허글러를 포함한 반원들이 침음을 흘렸다.

“그럼 리크의 사고도?”

성격 급한 엘짐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노리앙이 아니었다면 오늘 꼼짝없이 당했을 걸세. 자기 전에 피트가 건넨 건과일에 초란초액이 발라져 있었던 모양이네. 아직까지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반원들이 피트를 향해 침을 뱉거나 욕설을 해댔다.

“그렇다고 직접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았소? 사실을 밝혔다면…….”

허글러의 말에 반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북국인의 복수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 복수를 아도니아 놈들에게 맡기란 말인가?”

그 말에는 허글러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이 북국인의 정서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반장의 말은 특별작업조원의 입을 통해 감독관에게 전해졌고, 반장은 열흘간이나 독방 신세를 져야 했다. 정상적이라면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 반장의 정당성과 포로들의 반발, 그리고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 반장이라는 위치를 고려해 독방형으로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 ☆ ☆

그해 겨울도 언제나 똑같은 일상, 똑같은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살아 있기 힘들 것이라던 루드가 겨울 초입이 되자 생생해져서 돌아왔다. 마치 다른 사람인 양 병까지 씻은 듯 완치되어 돌아온 것이다.

겨울의 한복판, 1월 한 달여의 기간. 북부에서는 이때를 가리켜 통곡의 계절이라 부른다. 모든 생명체가 죽어 나가는 계절인 탓이다. 곰이나 뱀 등 동면을 준비하는 짐승들은 물론, 비교적 추위에 강한 늑대나 갈리온같이 동면이 필요 없는 동물들조차 이때만은 절대 둥지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나 몬스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생명체로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혹한의 계절인 셈이다.

통곡의 계절에는 광산 작업도 잠시 중지된다. 포로들에게 있어서 휴가와 같은 시기이지만 꼭 반갑지만은 않다. 혹한의 계절임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땔감과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배급. 쇠약한 자들은 이 시기를 버티지 못한다. 추위는 굶주린 자에게 한층 가혹한 법이다.

4반에서도 벌써 두 명이나 시체로 실려 나갔다. 해븐이라는 토치 출신의 나무꾼과 늙다리 우글라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반원들은 그들을 위해 슬퍼해 주었다.

그들의 시체는 다른 반 시체와 함께 공터에 방치되어 있다가 날이 풀리면 매장될 것이다. 그들 사이에 루드가 끼어 있지 않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그만큼 병이 깊었던 친군데, 사고 후 갑자기 건강해졌다.

무능한 수습신관이 기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통곡의 계절에는 감시도 소홀하다. 하지만 아무도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얼어붙은 황야에서는 불과 반나절도 버티지 못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막사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못한다.

스스로 외출을 금지시킨 포로들은 하루 종일 침상에 웅크린다. 최대한 열량 소비를 막기 위해서다.

막사 내벽은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허연 서리로 덮여 있다. 얼어붙은 숨결이다.

모두들 세 겹, 네 겹 있는 대로 껴입어 보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불과 한 걸음 정도만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은 허약한 난로와 사십 명의 체온은, 잔혹한 바람에 속절없이 열기를 내 줄 뿐이었다.

그해 겨울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이례적이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흔치 않은 경우임에는 틀림없다.

바로 반장의 면회 사건이다. 면회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때문에 귀족에 해당하는 일등시민이나 기사 혹은 폴리스에서 정치적 입지가 굳건한 포로의 경우 종종 면회가 있기도 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병 출신이 면회를 받는다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다.

반원들 사이에서는 반장이 출신 폴리스에서 제법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거나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정작 반장 자신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사실로 증명된 바는 없었다. 반장은 면회를 다녀오고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한편 옹기종기 난롯가에 모여 있거나 모포를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침상에 웅크린 반원들과 달리, 유독 조노량만은 가부좌를 틀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 역시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천 쪼가리를 두르고 있지만 자세는 천지 차이다. 조노량은 그 불편한 자세로 미동조차 없었다.

의자도 아니고 평평한 침상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 있는 조노량을 보며 루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눕기 싫다면 차라리 편하게라도 앉아 있지, 어째서 저런 불편한 자세를 고집하는 것일까? 야영 시에도 저런 해괴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바위가 있다면 걸터앉을 것이요, 그마저 없다면 나뭇등걸에라도 기대앉을 것이다.

루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에는 그래도 자기 전에나 잠깐 하고 말더니 통곡의 계절이 닥치자 하루 종일 저러고 있다.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다. 그건 통곡의 계절 초입에 하이오지가 증명해 준 바다.

물건을 빌리러 왔던 하이오지가 기괴한 자세로 앉아 있는 조노량을 발견하고 신기하다는 듯 툭툭 건드려 보다가 된통 당한 일이 있었다.

하이오지는 대놓고 비열한 짓을 할 만큼 제법 무력을 갖춘 사내다. 그런 하이오지가 그야말로 아얏 소리도 못 내보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막사 밖으로 던져졌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식했을 때는 이미 막사 문이 닫히고 있었다. 벙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던 루드의 시선에 허글러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잡혔다. 워낙에 압도적으로 진행된 탓이리라. 분명 이전의 조노량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무위였다.

어쨌든 그 후로는 아무도 조노량을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건드릴 필요도 없었다.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도 없었고, 통곡의 계절의 유일한 단체행동인 식사 시간도 알아서 지켰다. 더구나 자기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 법도 없었다.

우글라가 죽은 후 반 내의 잔일도 각자 나눠서 맡았는데, 그중 가장 꺼려하는 것이 땔감을 타오는 일이다. 누가 통곡의 계절에 멀리 떨어진 창고까지 나가고 싶겠는가? 차라리 가까운 곳에 똥통을 비우는 일이 편하다. 그 일을 자진해서 맡은 이가 조노량이다. 배급시간이 되면 알아서 땔감용 들통을 들고 나선다. 반장이나 부반장이 지시할 필요도 없다.

최근에는 루드조차 조노량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루드의 시선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특수작업조 삼인방이 난롯가를 차지하고 뭔가 소곤대고 있다. 또 보고 거리를 찾고 있나 보다. 순간 루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통곡의 계절에 무슨 보고 거리가 있겠는가? 하긴 누구도 그들을 상대해 주지 않으니 저들끼리라도 뭉쳐야지 별 수 있겠나.

정말 한가로운 오후다. 최근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 말고는 걱정거리가 없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자신이 아닌 것 같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누군가를 잔인하게 폭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상대는 절대 자신에게 맞을 자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한동안은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몸에 꼭 이상이 생긴 것 같았지만 건강 상태는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남들이 추위에 벌벌 떨 때도 자신은 그다지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배고프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점심이랍시고 한 모금도 안 되는 스프와 손바닥만 한 빵을 하나 맛본 것이 불과 한 시간 전이다. 소화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위까지 전달이 되었는지조차 의문이다.

만일 전에 보았다면 인간의 음식이라고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뉘 집 애완견이 벌을 받거나 학대를 당한다고 생각하고 잊었을 것이다. 식사 때마다 풀코스로 차려지던 프드돈 영지가 그립다.

하지만 지금은 거친 빵이라도 좀 실컷 먹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느덧 부목을 제거한 반장 테무아가 조노량을 불렀다. 근육이 빠져 홀쭉해지긴 했지만 다리는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만 완전히 으깨지다시피 한 오른팔은 회복 불능이어서 그저 덜렁거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반장은 그 팔을 리넨으로 둘러서 가슴에 고정시켜 놓았다.

루드의 부상으로 같은 소조가 된 에드로온과 함께 장작을 수령하러 가던 참인데, 반장이 추위를 무릅쓰고 에드로온 대신 따라나섰다. 뭔가 긴요한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걸음을 멈춘 채 테무아를 바라보았다.

반장의 당당하던 체구는 부쩍 쪼그라들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데다가 먹는 것조차 변변치 않으니 살이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루드 말일세.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지 않나?”

지난 삼 년간 놓지 않았던 말이 근래 들어서 평어로 바뀌었다.

“글쎄요……. 좀 변한 것 같긴 한데, 큰일을 치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용건은 아닐 것이다.

역시나 반장은 잠시간 머뭇거리더니 침중하게 입을 떼었다.

“노리앙, 봄이 오기 전에 난 석방될 거네.”

반색하는 조노량의 반응과 달리 반장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두 사람의 몸값으로는 부족하더군.”

테무아는 순간적으로 굳어진 조노량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나를 믿을 수 있겠나?”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를 믿는다면 일 년만 참고 견뎌 주게.”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자네와 나는 하나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지. 만일 일 년 내에 자네를 구하지 못한다면 비밀을 토설해도 좋네.”

그런 말이었군.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서도 황금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갖는다. 단 두어 시간 만에 그 정도 양을 채취했다면 그 금광은 그야말로 노다지다. 반장도 결코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까?”

“아직 장담은 못하겠네만 폴리스를 움직일 생각이네.”

“상인 집안이라고 하던데…….”

“헛소문일세. 몰락한 정치인일 뿐이네. 하지만 걱정 말게. 충분한 계획이 서 있네. 더 이상은 묻지 말게나. 말할 수도 없거니와 들어도 모를 것이야.”

조노량은 침음을 삼켰다. 일부러 반장의 발목을 잡지 않을 바에야 믿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부탁하겠네. 믿고 기다려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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