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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기-4화 (4/142)

4. 一次覺醒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식사를 마친 이십여 명의 반원들이 막 막사로 들어섰을 때, 조노량은 심상치 않은 기운에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먼저 돌아와 있던 열 몇 명의 반원들은 각자의 침상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고, 일르크를 포함한 세 명의 감독관과 경비병 댓 명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3반의 감독관인 브라디우스도 포함되었다.

“12번, 28번, 32번 침상의 주인은 앞으로 나서라!”

일르크가 아니라 브라디우스의 날카로운 목소리다.

28번은 바로 조노량의 침상이다. 조노량과 두 명의 반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

차렷 자세를 잡기 무섭게 브라디우스의 몽둥이가 세 명을 향해 한 차례씩 날라 들었다.

“윽!”

세 번의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행정관인 브라디우스의 몽둥이 정도는 가뿐히 피할 수 있었지만 감히 누구 하나 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브라디우스는 조노량 등의 앞쪽에 몇 개의 물건을 던져 놓았다. 그제야 조노량의 안색이 변했다. 물건 중에 주머니칼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오늘 막사 수색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급한 나머지 주머니칼을 안전하게 숨기지 못한 것이 하루 종일 걸렸었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12번 독방 이 일! 28번 독방 오 일! 32번 독방 삼 일이다. 사유는 각자 짐작할 수 있겠지?”

독방 오 일이라니? 이건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삼 일 정도는 각오했다. 하지만 오 일은 너무한 것 아닌가?

조노량이 번쩍 고개를 들자 브라디우스가 거만한 시선을 보낸다.

“28번,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뭐? 엄살이라도 부릴 셈이냐?”

차가운 브라디우스의 시선에 조노량은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언감생심 감독관에게 대들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브라디우스는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아닌 모양이다.

일르크를 바라보았지만 일르크는 뒷짐을 진 채 외면해 버린다.

“감히 무기를 숨겨 둬? 탈출이라도 꿈꿨나? 그 주제에 엄살까지 부려?”

브라디우스의 몽둥이가 다시금 조노량의 어깨를 향해 떨어졌다. 짧지만 굵은 몽둥이다. 묵직한 타격감에 조노량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주머니칼이 무기라니? 그걸로 탈출이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도리가 없다.

주머니칼도 무기라면 무기일 수 있다. 설사 목침일지라도 감독관이 무기라면 무기인 것이다. 그리고 칼이라고 이름 붙은 물건은 규정상 소지가 엄격히 금지된 물건이다.

“그리고 허글러! 사고가 너에겐 행운이 되었구나. 삼 일 독방 처분은 반장이 돌아올 때까지 유보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브라디우스의 말에 허글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조노량 등은 그 길로 경비병의 손에 이끌려 수용소의 단 두 개뿐인 석조건물 중 하나로 향했다.

단단히 지어진 단층짜리 사각형 건물이다.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수용소의 감옥은 이 건물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만약을 대비해 지하 삼 층까지 파 내려간 감옥은 수용 인원이 무려 삼백 명에 이른다. 물론 독방에 네 명씩 처넣었을 때의 경우지만 말이다. 그런 때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 네 명이 포개져 앉아야 한다.

수용소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감옥은 처벌을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 독방에 들게 되면 우선 노동에서는 해방된다. 하지만 한 줌의 빛조차 없는 독방의 어둠과 극한의 추위, 그리고 작은 빵 한 덩어리와 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텨야 한다. 체력이 생명인 이곳에서 독방 생활은 그야말로 죽음이다.

아무리 건강한 자라도 독방에 사흘만 갇히면 건강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상한 건강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열악한 수용소 생활이 회복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독방형을 오 일이나 받은 것이다.

경비병들은 조노량과 다른 두 명을 간수에게 인계하고 돌아갔다.

건장한 대머리 간수는 몽둥이를 이용해 수감자들을 각자의 독방으로 친절히 안내해 줬다.

대머리 간수가 든 흐릿한 횃불 빛 너머로 보이는 방 안의 전경이 일목요연하다. 워낙 작아 둘러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독방은 한 평 반 남짓 되는 작은 공간이다. 벽은 온통 거친 바위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창문 따위는 있을 턱이 없다. 바닥에는 거적이 깔려 있었지만 한기를 막는 용도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수분을 머금은 거적은 가볍게 얼어붙어 있다. 간수는 머뭇거리는 조노량의 엉덩이를 차는 것으로 투숙을 마무리 지었다. 엎어진 조노량의 뒤로 감방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수용소에 늦게 돌아온 덕에 저녁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독방에 갇히는 자들은 원래 저녁조차 지급하지 않고 바로 갇히는 것이 관행이었다.

조노량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의 몸 상태로 이곳에서 닷새를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된 일과로 인해 몸은 이미 탈진 상태다.

최대한 체력을 보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자칫 시체로 실려 나갈 수도 있다.

반장과 루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반장은 몰라도 루드는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애써 구한 보람이 없는데……. 상념이 밀려들었다.

조노량은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몸에 휴식을 줘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웅크리고 눕자 몸이 떨려 왔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몸살로 인한 오한 탓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조노량은 피식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까짓 걸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인가?

몸을 더욱 웅크린다.

손은 품속에 찔러 넣어 추위를 피했지만 발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시린 발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양모 양말을 챙겨 오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조노량은 모자를 벗어 발을 감쌌다. 조금 나아진 느낌이다. 대신 바닥에 닿은 귀가 시리다. 어쩔 수 없이 한 손을 빼서 베고 누웠다.

낡은 리넨 장갑. 헤진 틈 사이로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계속 뒤척이는 사이, 조노량은 어느덧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추위 속에서도 탈진 상태의 몸은 조노량을 쉽게 수면의 세계로 인도했다.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채, 조노량의 의식은 가뭇가뭇 사라져 갔다.

- “훗날, 아주 먼 훗날에야 그 꿈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되었소.”

☆ ☆ ☆

“이곳이 어디지?”

분명 죽었다. 커다란 낭아도가 그의 복부를 관통하고 내장을 헤집고 지나갔을 때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산산이 뜯겨져 나간 내장과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온몸으로 느꼈다. 대라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려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 빠르게 풀려 가는 노관장의 동공, 그리고 평행 상태로 추락하던 제갈가의 소공자, 그 위로 겹쳐지던 자신과 노관장의 주검. 실제로는 촌음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후,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까마득한 어둠뿐이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과 너무나 깊고 절망적인 어둠, 그것이 죽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곳은 저승인가? 저승치고는 너무 현실감 있지 않은가?

조노량은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벌거벗고 있었다. 급히 등을 더듬었다. 매끈한 등줄기가 느껴진다. 피는커녕 상처의 흔적조차 만져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전신을 빼곡히 덮고 있던 뒷골목의 싸구려 상흔들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백면서생과 같이 하얗고 미끈한 몸매다.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익숙한 자신의 얼굴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처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동일하다. 아니 한 가지 더, 바로 내공이 전폐되었다. 한 줌의 내공도 모이지 않음은 물론 단전조차 형성되지 않는다. 단전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생성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한마디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몸과 같은 상태였다. 분명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의 몸이 아닌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여기는 또 어디란 말이냐? 진정 저승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 보고 꼬집어 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승이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초원을 헤매고 다녔다. 무려 일주일이 넘도록,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초원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로 헤맨 끝에야 작은 마을을 찾아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말로만 전해 듣던 색목인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노량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곳에서 쓰러졌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조노량을 성심껏 돌봐 줬다. 겨우 체력을 회복했을 때 일단의 병사들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어이없게 중원에서도 당하지 않았던 징집을 당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전쟁터. 그 첫 번째 전투에서 조노량은 포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끔찍한 포로수용소의 강제노역이 조노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중노동. 부족한 식사량.

조노량은 오늘도 어김없이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곡괭이질을 멈추고 싶었지만 멈춰지지가 않는다. 억지로 멈춰 보려고 했지만 타인의 몸인 양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몸은 마치 기계라도 돼 버린 듯, 끝없이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다. 주변의 동료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종국에는 자신만 남아서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다. 한없이 파고들어간다.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만지려 했지만 만질 수도 없다.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에 소름이 돋는다.

폭포수처럼 배어 나오는 땀으로 온몸이 흠씬 젖는다.

갱도 안이 시뻘겋게 불타오른다. 뜨겁다.

목이 마르다.

갈수록 갈증이 심해진다.

곡괭이질 따위는 어떻게 돼도 좋다.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영원토록이라도 하겠다!

어둠 속에서 얼마나 잠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조노량은 심한 갈증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감방 문틈, 식사가 제공되는 작은 공간으로 가느다란 횃불 빛이 흘러든다.

아주 약한 빛이라서 어둠을 물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빛에 손을 가져다 대도 손가락의 윤곽조차 제대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

혹시나 하고 더듬어 보았지만 물그릇 따위는 없다. 하루에 한 번 지급되는 식사와 물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아침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신마저 혼미해져 간다. 찬물일 망정 한 그릇만 들이켰으면 소원이 없겠다.

온몸에 감각이 없다. 이마를 짚어 보자 열이 펄펄 끓고 있다. 스스로 뜨겁다고 느낄 정도라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인 것이다.

또 그 꿈이다. 등이 결렸다. 죽음의 기억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자랐던 작은 무관의 몰락도, 자신의 칼 아래 마지막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소공자의 죽음도, 노관장을 비롯한 친인들의 죽음도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자신의 유일한 터전이며 삶 자체였던 보가촌의 작은 무관. 조노량의 모든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넉넉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부질없었고 티끌처럼 가벼운 인과가 되어 버렸다. 모든 인연이 허무할 뿐이었다.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기억은 전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다시 살아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아직도 그의 등에는 희미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아무런 상처도,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그는 등이 아팠다. 낭아도가 파고들었던 그 자리,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미 꿈에서 깨었건만 아직까지 은근한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묵직하게 결려 온다.

다시금 갈증이 밀려왔다. 뜨겁다. 정신이 희미해진다.

조노량은 참을 수 없는 갈증 속에서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아니 정신을 놓았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어둠은 그대로지만 어찌되었든 아침이 왔다. 문틈 조그만 공간으로 말라비틀어진 빵 한 덩어리가 밀려들어왔다. 더운물도 한 대접 들어온다.

하지만 조노량은 깨어날 줄 몰랐다. 마치 시체처럼 웅크린 채 미동도 없었다. 더운 물이 차갑게 식어 갔다.

조노량이 깔고 누운 부분의 거적이 짙은 색으로 바뀌었다. 물기가 흥건하다.

조노량의 옷자락으로부터, 거적으로부터, 벽에까지 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땀으로 흠씬 젖어 있던 작업복의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거적도 허옇게 말라 간다.

그리고 또 한참. 도저히 인간의 신체에서 발생할 수 없는 강렬한 열기가 독방 안을 후끈하게 달구었다.

“단전이 형성되지도 않았어. 벌써 삼 년이구나. 전혀 느껴지지 않느냐?”

“하하, 이제 되었다. 오늘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말고 남들의 배는 연공해야 할 것이다. 너 정도의 무골이라면 초식 수련은 조금 줄여도 무관할 터! 이미 많이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노량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어째서 내공 부분만큼은 이리도 진전이 늦단 말이냐?”

“네놈은 보무관의 수치다! 어찌 십 년을 연공하고도 내공이 고작 보포삼만도 못하다 말이냐?”

“흥, 이제 내 일 검도 감당하지 못하는 거요?”

“가가, 너무 심려치 마세요.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고 하잖아요.”

“노량 형, 보무관에서 형을 당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까짓것 내공 따위 없어도 그만 아니오?”

“젊음이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근육이 힘을 잃으면 무엇으로 움직이려느냐? 조만간 다 너를 추월해 갈 것이야! 미련한 놈!”

“형은 삼류 인생만 살다 갈 거요? 난 오늘 보무관을 떠날 거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내 꿈을 펼치려오. 더 이상 형은 내 경쟁 상대조차 되지 못하오.”

“특이하게 생긴 놈이로군. 노리앙이라고? 제법 몸은 빠르다만 힘은 형편없구나. 생긴 것도 이상하고……. 너 혹시 계집이냐?”

“어이쿠! 제법이구나. 한 방 먹었는걸. 그런데 계집한테 뺨 맞은 느낌이잖아?”

저들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들인가?

조노량은 의문이 가득 찬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둡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숙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조노량은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놈인데, 안개와도 같다.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놈이 자신을 쫓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향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편안할 것 같은 느낌이다.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 쫓겨 얼마나 도망쳤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무한한 시간이 흘렀던 것도 같고, 찰나지간인 것도 같다.

시간?

조노량은 스스로의 시간을 관조했다. 무엇을 밟고 뛰고 있는지도 모를 텅 빈 공간에서 한없이 달리고 있는 자신이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간화선(看話禪)에라도 들었는가? 조노량은 도망을 중단했다. 뒤돌아섰다.

검은 안개가 덮쳐 왔다. 소리는 없었으나 마치 조노량을 비웃듯 흔들린다. 목젖을 흔들며 껄껄거리는 느낌이다. 불쾌하다.

그 순간 검은 안개가 조노량의 숨을 타고 밀려들어왔다. 안개는 목을 타고 가슴을 지나 아랫배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아랫배가 불타오른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열기다. 마치 몸이 터져나갈 듯하다.

안개는 불로써 조노량을 정화하기라도 하려는 듯 거침없이 산지사방으로 몰아쳐 갔다. 어깨를 지나 손가락 끝까지, 그리고 하초를 지나 발끝까지 고루고루 퍼져 나갔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풍선마냥 텅 빈 껍데기 같다. 그 텅 빈 공간을 안개가 가득 채운다. 몸 전체가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바람 빠지듯 꺼져 든다. 수축과 팽창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되풀이된다. 수억 겁을 되풀이하다가 한순간에 터져 버린다.

어둠 속에서 폭죽이 터지듯 찬란히 불타오른다. 수많은 성상(星狀)이 명멸한다. 마치 타인이라도 된 듯 자신을 관찰한다. 끔찍한 상황임에도 전혀 감흥이 없다.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순간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또 다시 텅 빈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다. 마치 내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시야도, 감각도, 호흡도 느낄 수 없다.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억겁을 지나온 것도 같고, 억겁을 지켜본 것도 같다. 아득히 의식이 멀어져 갔다. 이곳에서 내 의지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 ☆ ☆

조노량은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할 수 없지만 뭔가 지독한 꿈을 꾼 것 같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밀려든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감방 안이 이상하게 후끈하다. 목이 마르다. 식도가 타들어가듯 갈증이 심하다. 다시 입구 쪽을 더듬는다. 물그릇과 빵으로 짐작되는 무엇인가가 잡힌다. 급히 물그릇을 쥐어 들었다. 너무 가볍다. 물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 마셔 버렸지? 기억이 없는데……. 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갈증이 더욱 심해진다.

그때 문 아래쪽 배식구가 열렸다. 강렬한 불빛이 새어 들어온다. 눈이 부시다.

“어이! 물그릇 내놔라.”

아침인가? 그렇다면 벌써 이틀이 지났단 말인가?

“얼른!”

조노량은 급히 물그릇을 배식구로 가져갔다.

“따뜻할 때 마셔 둬라.”

되돌아온 조그만 빵 덩어리와 물그릇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빵 덩어리는 바닥에 내려놓고 우선 물그릇을 입가로 가져갔다. 마치 감로수를 대하듯 감격스럽다.

“윽!”

정말 뜨겁다. 죄수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다. 하루에 한 번, 한기를 녹여 줄 물이라도 뜨거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방 안이 이상하게 후끈하다. 전혀 한기를 느낄 수 없다. 차라리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방뿐 아니라 몸 안에 가득 찬 열기를 식혀 줄 시원한 물이었으면…….

하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다. 조노량은 후후 불어 가며 물을 마셨다. 뜨겁지만 시원하다.

마른 논에 물을 대듯 온몸으로 흡수되는 느낌이다. 살 것 같다.

갈증이 해소되자 허기가 밀려왔다. 배 속이 텅 빈 것 같다. 이틀을 굶었다면 당연한 일이다. 허겁지겁 빵을 뜯었다. 그 와중에도 배식구 주변을 더듬는다. 생각대로 빵 한 덩어리가 더 만져졌다. 나중을 위해 남겨 둬야 하건만 도저히 멈출 수 없다. 조노량은 나머지 빵 한 덩어리마저 모두 먹어 치웠다. 두 개를 먹어 봐야 아침 한 끼 식사 분량이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허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그제야 몸 상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아주 가뿐하다. 몸살 기운은 완전히 가신 듯했다.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무언가 거친 것들이 만져진다. 얼굴 가득 묻어 있다. 어두워서 구별할 수는 없지만 대충 털어 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리란 것은 알고 있다. 단지 뭔가 느끼기 위한 행동이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아직 배식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 주변이 고요한 탓인지 왠지 선명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대기도 상쾌한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다. 마치 초목의 생기로 가득한 첫새벽 숲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다시 한 번 몸 상태를 돌아본 조노량은 가부좌를 틀었다. 갱도를 탈출할 때 자신도 모르게 기를 사용한 것 같다는 어렴풋한 기억과 며칠 전 느꼈던 기감, 그리고 충만한 대기의 기운. 조노량은 자연스럽게 가부좌를 틀었다.

소득은 없었지만 이 년 반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 오던 습관이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경험상 기감이라는 것은 한 번 느꼈다고 바로 안정되는 것도 아니고, 단번에 단전이 생성되는 것도 아니다.

조노량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단전 부위에 정신을 집중했다. 봄날 새싹이 돋아나듯 아주 작고 미세한 무언인가가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조노량은 희열에 몸을 떨었다. 분명 단전이 형성되어 가는 징조다. 아직 몇 개월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의 느낌은 기의 용트림이 확실했다. 잘만 잡아낸다면 오늘 안에 단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칫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조노량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순간 조노량은 흠칫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갑자기 외부로부터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미세하게 꿈틀거리던 기도 거세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참았던 숨을 거칠게 토해 놓으며 운기를 중단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정통의 심법을 익히지 못한 조노량은 이 현상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말로만 듣던 주화입마? 하지만 이제 막 기감을 느끼는 단계에서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혀 가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노관장이라도 있었다면 속 시원히 물어보기라도 하련만……. 지금으로선 일고의 가치도 없는 생각이다.

이대로 운기를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며칠 더 기다려 볼 것인가? 허나 며칠 더 기다린다고 해서 지금의 현상이 또 발생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다면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지금 부닥쳐 보는 것이 옳다! 결심을 굳힌 조노량은 다시 호흡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단전이 형성되는 단계에서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운기를 시도했다. 단전으로부터 꿈틀거리는 무엇인가가 확연히 느껴졌다. 일단 기감을 놓치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이제부터는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기를 제어해야 한다. 이 정도로 확연하게 기감을 느끼려면 첫 기감을 느낀 후 최소 몇 개월은 걸려야 할 일이었지만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경솔히 치부해 버렸다.

조노량은 이전의 경험대로 단전에 느껴지는 기를 둥그런 형태로 모으려고 시도했다. 단지 시도일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수월히 통제된다. 마음먹자 제멋대로 움직이던 기가 한순간에 둥그런 형태로 모여들었다.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된 거다. 단전도 안정되었고, 기의 통제도 순조롭다.

다음 순서는 축기다. 날숨을 좀 더 느리게 가져간다. 전신의 모공을 서서히 개방한다.

그 순간 다시금, 바람소리가 들린다고 착각될 정도의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밀려들어 왔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다. 멈추려 했으나 이번엔 멈춰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내공을 다루는 데 미숙했던 조노량이었다. 그로서는 이 정도의 거친 기운들을 다스리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이런? 큰일이군. 멈출 수가 없어.’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다. 조노량은 온 정신을 집중해 밀려드는 기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광폭하게 몰아닥치던 기운들은 조노량의 전신을 거칠 것 없이 휘돌다가 제멋대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세차게 단전을 두드리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단전에 형성된 미세한 기운과 하나라도 된 듯 합쳐졌다가 흩어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그 기운은 마치 바람이 허공을 휘돌 듯 거침없이 조노량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아무런 저항감 없이 허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조노량은 굳이 그 기운들을 다스리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허공을 드나들듯 자신의 몸을 드나드는 기운을 어떤 방법으로 막을 수 있으며, 또 그 기운들이 몸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데 억지로 막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뭔가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기운들은 막 형성되기 시작한 조노량의 기와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비슷한 성질의 다른 모습인 듯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조노량은 문득 대기에 포함된 이 엄청난 기운들이 혹여 자연지기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노량아, 일반적으로 축기라는 것은 자연의 기를 받아들인 후 몸 안에서 가공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이니라. 사람이 이 자연지기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기가 충만한 새벽 시간에는 간혹 느껴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운기는 새벽시간에 주로 하는 것이지. 많이 늦은 만큼 배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처음 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스승과도 같은 노관장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자연지기를 몸 안에 축적하는 행위가 바로 내공을 수련하는 행위라 하였다.

사람이 느낄 수 없다던 자연지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내 자신의 기에 전혀 거스름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위험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조노량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심법인 와호공(渦呼功)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단전이 형성된 상태에서는 조금 무리라고 생각되었지만 시도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조노량은 천천히 호흡량을 조절하며 와호공의 구결대로 미세하고 꿈틀거리는 기를 회음으로 밀어 내렸다.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끊길 듯 이어지는 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비록 작은 저항이 느껴졌지만 처음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뚫을 때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마치 미리 뚫어 놓은 길이라도 되는 듯 쉽게 쉽게 밀려 내려갔다.

기의 흐름이 예상 외로 순조롭자 내친 김에 미려를 개통하고 명문혈(命門穴)과 영대혈(靈臺穴)까지 끌어 올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가 협척을 지나 대추까지 치고 올라오자 조노량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축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기를 첫 운기에서 대추혈까지 끌어올리다니? 기의 연결이 당장 끊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더 이상의 진행은 무리라고 생각되자 조노량은 기를 되돌렸다. 그리고 다시 모든 기를 단전에 모았다. 놀랍게도 미세한 꿈틀거림 정도였던 기의 양이 배는 증가되어 있었다. 기가 혈도를 타고 흐르면서 밀려드는 외부의 기운과 융화되어 단전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조노량은 잠시간 모여든 기를 다독거리고는 다시 한 번 운기를 시작했다. 처음 진행보다 더욱 빨라지고 순조로웠다. 전성기 때의 흐름보다 오히려 더 활성화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기실 그가 수련하고 있는 와호공은 무림인들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칠 법한, 흔하디흔한 내공심법이다. 다시 말해 강호의 삼류 무사들이나 수련하는 내공심법이 바로 와호공이다. 어찌 보면 내공심법이라기보다 건강호흡법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의 와호공은 그가 아는 와호공이 아닌 듯싶을 정도로 엄청난 효능을 보이고 있었다.

조노량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운기에 빠져들었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조노량은 갈증도, 허기도 느낄 수 없었다.

조노량은 마치 무념무상에라도 든 고승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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