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3화 (3/142)

3. 무너진 갱도

부아칸산은 아도니아의 아주 귀중한 보고다. 바로 이 산에서 무기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철광석이 채취되기 때문이다. 드물게 암염이 채취되기도 하는데, 염분이 부족한 포로들에게 꼭 필요한 염분을 제공한다. 물론 조노량도 암염 덩어리를 하나 가지고 있다.

이 산이 아도니아 제3포로수용소인 크로아지크 수용소의 작업장이다. 정확히는 산의 남사면 절벽에 뚫린 갱도다.

절벽을 따라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대부분은 더 이상 철광석이 채취되지 않아 폐쇄되었다.

현재 포로들이 작업하고 있는 갱도는 남사면을 따라 오백 미터쯤 더 걸어가야 한다.

입구에서 일부가 행군을 멈춘다. 파쇄작업반이다.

같이 행군해 온 기대장이 6반, 15반, 22반을 파쇄 작업장의 병사들에게 넘긴다. 넘기기 전 인원 점검은 기본이다. 기사들끼리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다시 행군을 시작한다. 남사면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현재 채광 중인 갱도가 나오고, 반대로 산의 서쪽 방향으로 조금 돌아가면 검투반이 작업을 하는 대규모 대장간이 나온다. 작업장 곳곳에는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쫙 깔려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 채광이 진행 중인 광산에 도착한다.

다시 인원 점검을 끝내자 호송을 맡았던 기대 중 한 개 기대는 돌아가고 한 개 기대는 남는다. 작업장에 배치된 기존 병력으로도 감시는 충분했지만, 훈련을 겸해 한 개 기대가 가까운 곳에 남는 것이다.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각 반별로 도구를 지급받고 작업이 시작된다. 같은 갱도에 배속된 4반과 5반이 함께 갱도로 진입했다. 이제부터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시커먼 주갱도의 아가리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행군하면서 얼어붙었던 몸이 스르르 녹는다.

드문드문 횃불을 밝혔다고는 하나, 어둠을 물리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갱도의 벽면을 타고 형성된 작은 물줄기가 보인다. 갱도 안이 비교적 따뜻해 얼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 탓에 낡은 침목은 본래의 색보다 더욱 진한 어둠을 품는다. 보수를 한다고는 하지만 일부 침목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고 있다. 아무리 단단한 비연목이라도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1조는 나와 함께 어제 작업하던 32번 갱도를 맡겠소.”

주갱도와 지갱도의 첫 번째 분기점에 도착하자 반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한 개의 주갱도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지갱도가 곳곳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일부는 현재 채광 중인 갱도고 일부는 폐쇄된 갱도다. 그들이야 이 갱도를 제 집 드나들 듯해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지만, 만약 모르는 자가 달랑 횃불 하나만 들고 들어온다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들어올 일도 없겠지만, 경비병들은 갱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은근히 꺼린다.

4반은 9명 정도씩 총 4개 조로 나뉘어 작업을 진행했다. 조노량이 소속된 1조가 작업할 갱도는 보름 전부터 파기 시작한 32번 갱도다. 1조에 속한 운반조는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 파 들어간 거리가 짧기 때문에 운반에 걸리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 그만큼 쉴 시간이 많다는 이야기다.

“허글러, 2조를 책임져 주시오. 케인, 3조를 부탁하겠소.”

반장은 간결하면서도 소소한 곳까지 정확히 지시하고 1조를 이끌었다. 우리 조는 피트, 리크, 칸까지 다섯 명이 채광을 담당하고, 젝과 제리 등 다섯 명이 운반을 맡았다. 다른 조보다 인원이 한 명 더 많다. 첫 번째 이유는 1조에 속한 반장이 수시로 다른 갱도를 순찰하러 다니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1조의 채광 속도가 다른 조에 비해 월등히 빨라 운반조의 인원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32번 갱도 안쪽 깊숙이 숨겨 둔 곡괭이를 찾았다. 횡목의 틈 위쪽에 잘 숨겨져 있다. 얼마 전 하이오지 덕분에 감추는 데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조노량의 곡괭이는 한쪽 끝이 납작하고 반대쪽 날은 아주 뾰쪽하다. 푸석푸석한 철광석 틈 사이로 찍어 넣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적당히 휜 각도가 환상적이다. 이 정도 각도면 철광석을 찍고 난 후 곡괭이의 머리를 지렛대로 삼아 멋지게 들어낼 수 있다.

이곳의 곡괭이는 비교적 직선에 가까웠다. 찍기는 편하지만 들어내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중원인에 비해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이곳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리라. 꽤 약골 취급을 받는 루드나 젝만 해도 순수한 힘으로 치면 조노량보다 강했다.

일행은 입구에서 나눠 받은 횃불을 들고 갱도로 진입했다. 중간 중간 버팀목에 뚫린 횃대에 횃불을 하나씩 꽂으며 삼십여 미터를 진행하자, 어느새 막다른 갱구에 도착했다.

“피트, 버팀목을 설치하시오.”

피트는 조노량보다 일 년 늦게 수용소에 들어왔지만 완력이 좋아 처음부터 부반장 자리를 노리고 다른 반원들에게 수시로 시비를 걸었던 전력이 있었다. 조노량도 두어 번 얻어맞은 적이 있기 때문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허글러가 들어온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갱도는 가로 삼 미터, 높이 이 미터 반 정도의 사각형으로 뚫었다. 사각형으로 뚫는 이유는 바로 버팀목의 설치를 위해서다.

반장의 지시에 어제 미리 가져다 놓았던 허벅지 굵기의 버팀목과 횡목, 세로목 등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기준대로라면 2미터 간격으로 설치해야 하지만, 버팀목 설치 작업이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기준을 지키는 반은 없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컸지만 4반에서는 아직 사고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여기에는 지질을 보는 데 날카롭기 그지없는 반장의 눈이 크게 한몫했다. 반장은 버팀목을 어느 정도 지점에, 또 얼마만큼 튼튼하게 설치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삼 미터 조금 넘는 거리다. 좀 멀다고 생각했지만 반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반장의 지시에 따라 조원들이 버팀목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덩치가 좋은 칸과 리크가 발판에 올라서서 세로목을 받쳤다. 세로목과 횡목의 접점이 되는 지점을 받치고 있던 칸이 아래에서 올려 준 횡목을 받아서 세로목에 끼웠다. 세로목과 횡목의 끝에는 서로 아귀가 잘 맞도록 비슷한 굵기의 홈이 파여 있다.

피트가 두 명이 들어야 할 버팀목을 혼자서 날라 왔다. 성인 허벅지 굵기의 단단한 비연목이다. 피트는 버팀목을 횡목에 비스듬히 대고 건장한 어깨를 이용해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어느 정도는 벽 쪽으로 붙었지만 아직까지 직각으로 선 상태가 아니다.

피트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버팀목의 좌우 각도를 살폈다. 기울거나 하면 곤란하다. 피트가 뒤로 손을 내밀자 제리가 해머를 건넸다. 묵직한 것이 전투 해머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해머는 각 반별로 한 개씩만 지급된다. 1조에서 사용을 마치면 2조로 건네지는 식으로 교대로 사용해야 한다.

해머를 건네받은 피트가 제리를 바라보자 제리는 얼른 넓적한 나무토막을 버팀목의 상단에 가져다 댔다. 해머질로 인해 비연목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목이다.

쿵!

해머질 한 번으로 버팀목이 거의 직각에 가깝게 일어섰다. 피트는 다시 한 번 버팀목의 각도를 살피고 기울어진 곳을 툭툭 쳐 각도를 바로잡았다. 각도가 정확히 잡히자 칸은 알아서 받치고 있던 횡목에서 손을 뗐다. 다시 제리가 버팀목 상단에 나무토막을 가져다 대자 피트는 망설임 없이 해머를 내려쳤다.

쿵!

단 네 번의 해머질로 버팀목은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거침이 없다. 역시 허글러가 아니었으면 충분히 부반장을 해 먹고도 남았을 인물이다.

이번에는 반대쪽 버팀목을 설치해야 한다. 작업에는 말이 필요 없다. 누가 언제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정해진 순서대로 착착 맞아떨어진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진행이다.

불과 삼십 분도 안 돼 버팀목 설치 작업이 끝났다. 작업이 끝나자 제리가 해머를 들고 막장을 빠져 나갔다. 2조에게 해머를 건네주기 위해서다.

☆ ☆ ☆

“자, 오늘은 특별히 힘을 좀 내 봅시다. 노리앙, 몸은 괜찮소?”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도 마주 끄덕여 보인다. 채광에 있어서는 조노량이 최고다. 조노량은 곡괭이를 들고 일어섰다. 곡괭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볍게 몸을 풀자 뼈마디에서 뿌드득 소리가 들렸다. 약간 찌뿌둥한 느낌이 있지만 아까처럼 견디기 힘든 정도는 아니다. 그럭저럭 정상적이라고 할 만했다.

조노량이 왼쪽에 서고 반장이 오른쪽에, 그리고 칸이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 비좁은 느낌이 들지만 가장 적당한 간격이다.

조노량의 괭이가 힘차게 푸석한 돌 틈으로 박혀 들었다. 신호라도 되는 듯 칸과 반장의 곡괭이도 힘차게 움직였다.

퍽, 푸스스

박아 넣은 곡괭이를 비틀어 올리자 광석 덩어리가 한 움큼 쏟아져 내렸다. 처음 몇 번은 천천히 진행된다. 감각을 찾기 위함이다. 서너 번의 곡괭이질이 오간 후부터는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휘둘리는 곡괭이의 각도가 예리하다.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목표했던 지점에 정확히 가서 박혔다.

곡괭이질에도 요령이 있다. 바위의 단단한 부분과 연한 부분을 잘 구별해 줘야 한다. 또 그 결을 정확히 읽어 내야 한다. 자칫 철광석이 아닌 자갈이라도 치게 되면 날이 상할 수 있다.

이곳의 제철 기술은 많이 떨어져 철 자체가 무르다. 순수한 강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상급의 곡괭이를 아주 소중히 다뤄야 한다.

조노량은 결과 결 사이의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는다. 결만 잘 탄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곡괭이가 푸석한 광석의 틈 사이로 깊이 박혀 들어간다.

박혀 들어간 곡괭이를 빼는 각도도 중요하다. 약간 휘어진 곡괭이를 위로 들어 올리듯 슬쩍 꺾어 주면 다량의 철광석이 힘없이 떨어져 내린다. 철광석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곡괭이의 무게를 이용해 적당히 휘돌리며 다시 머리 위로 치켜든다. 아주 규칙적이다.

질통을 메고 운반을 준비하고 있던 제리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조노량의 괭이질을 바라보았다. 반장이나 칸에 비해 체구가 많이 작은 조노량이다. 하지만 조노량의 곡괭이질은 그들을 압도했다. 그의 곡괭이질은 쉬는 법이 없다. 마치 악공이 북채를 두드리듯 힘도 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밑에는 벌써 수북이 광석이 쌓여 갔다.

어느 정도 광석이 쏟아져 내리자 기다란 삽을 들고 대기 중이던 피트가 조노량과 칸 사이에 흘러내린 광석을 퍼서 질통에 퍼 담았다. 반대편에서는 귀공자 리크가 삽질 중이다.

슬슬 땀이 배어 나왔다. 식은땀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흐르는 건강한 땀이다. 조노량은 겉옷을 벗어 던졌다. 곡괭이를 휘두를수록 힘이 배가되는 기분이다.

쿵, 하나, 둘, 푸석, 하나, 둘, 쿵

박자가 척척 맞아 들어갔다. 신명이 오른다. 조노량은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을 팔소매로 쓱 문질러 닦고는 박차를 가했다.

조노량 쪽에서는 이미 질통이 네 개나 나갔다. 반장 쪽에서도 막 네 번째 질통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칸은 아직 세 개뿐이다.

조노량의 시선을 느꼈는지 칸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덩치는 셋 중에 가장 큰데 작업량은 항상 꼴찌다. 그래도 항상 웃는다. 유쾌한 사내다.

그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다. 힘으로만 치면 4반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한 사내지만, 한 번도 힘을 내세워 이득을 보려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힘없는 자들을 배려하여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을 골라서 떠맡았다.

조노량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조노량을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싱거운 우스갯소리로 위로해 주곤 했다. 그래서 조노량은 칸을 좋아한다.

칸은 질 수 없다는 듯이 곡괭이에 더욱 힘을 주지만 요령이 없다. 몇 번이나 요령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이마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지 않겠다는 생각보다는 반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내다.

반장이 힐끗 칸을 바라보고는 조노량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척 정감어린 미소다. 이렇게 힘든 처지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따스한 미소를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 점이 반원들이 반장을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하는 이유다.

별 것 아닌 반장의 행동에 조노량은 묘하게 힘이 나는 느낌이다. 곡괭이질에 실린 리듬이 조금 더 빨라졌다.

좋은 술을 좋은 부대에 담듯 삽질에 일가견이 있는 피트가 조노량 쪽을 담당했다.

그는 벌써 다섯 번째 질통을 채우고 있다. 채광 담당 3명, 삽질 2명, 나머지 다섯 명은 운반조다. 하지만 언제나 운반 쪽이 모자란다. 갱도가 깊어지면 채광은 2명으로 줄어든다. 삽질도 1명이 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운반조로 편성된다. 그래도 운반조가 딸린다.

질통을 지고 쉴 틈 없이 막장과 입구를 오가는 운반조가 노동 강도도 가장 높다. 위안거리라면 채광을 담당한 반의 운반조가 그나마 편한 축에 속한다는 점이다.

갱구에서 파쇄터까지 운반을 담당한 반은 오백 미터나 되는 암석투성이 벌판을 질통을 메고 끊임없이 왕복해야 한다. 수만 년 동안 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바윗덩이와 자갈로 인해 수레를 이용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런 이유로 무려 3개 반이나 운반을 담당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채광반의 운반조는 다소간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파쇄터까지 운반을 담당한 반은 늘 감시에 시달린다. 혹시라도 탈주를 할까 봐 곳곳에 감시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데다, 갈리온을 탄 기사나 종사들도 수시로 왔다 갔다 해 도무지 꾀를 부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렇게 쉴 틈 없이 움직여도 운반반은 작업량을 다 채우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그들에게는 꼴등을 주지 않는다. 운반반은 그날의 작업량을 다 채우면 무조건 일등으로 친다.

규칙상 가장 쉬운 일을 맡은 파쇄반에는 일등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중간과 꼴등만 가능하다. 그래도 작업이 너무 수월해 꼴등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불과 한 개 반만 파쇄반에 배치되는데도 말이다.

꼴등은 늘 채광반에서 나온다. 반면 일등도 채광반이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채광반끼리의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 일등과 꼴찌의 차이는 무척 크다. 일등을 하면 저녁 배식이 두 배고, 꼴등을 하면 정량의 반이다. 치열해 지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나름대로 이곳 사람들의 성향이 느껴지는 아주 공정한 규칙이다.

나머지 두 개 반은 부아칸산의 남사면 절벽을 끼고 돌아가는 좁다란 길에서 길을 닦고 있다. 수레를 이용하기 위해서라지만 아직 초입에서 깔짝대는 정도다. 그만큼 이곳은 바위가 많은 지형이다.

☆ ☆ ☆

뿍!

조노량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곡괭이 끝에 마치 끈적이는 듯한 물질이 잡혔다. 푸석한 철광석의 느낌이 아니다. 곡괭이를 뽑아내는데도 꼭 엿가락에 박힌 이빨을 벌리듯 ‘쩍’하고 떨어져 나왔다.

조노량은 허리를 숙이고 손을 이용해 부셔져 내린 흙덩이를 헤쳐 냈다. 어제부터는 철광석의 양도 슬슬 적어지는 느낌이었는데 뭔가 관련이 있는 듯싶었다. 조노량은 손짓을 해 횃불을 가까이 가져오게 했다. 피트가 횃대에 걸어 놓았던 횃불을 꺼내 왔다.

조노량이 작업을 멈추고 지질을 살피자, 반장도 곡괭이질을 멈추고 조노량 쪽으로 다가왔다. 칸도 작업을 멈추고 멀뚱히 조노량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오? 노리앙.”

피트가 횃불을 가까이 비추자 바위틈에 아슴푸레한 누런빛이 반짝였다. 조노량은 조심스럽게 주변의 흙을 좀 더 헤쳐 내었다. 반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노리앙?”

조노량이 작은 조각을 하나 떼어 내었다. 횃불에 반사된 누런빛이 아주 영롱하다.

“금입니다.”

반장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피트와 칸 그리고 리크의 입도 쩍 벌어졌다.

“이럴 수가!”

그때 막 질통을 부리고 돌아온 제리의 모습이 보였다. 반장은 제리를 향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제리, 다른 운반조원이 다가오지 못하게 멈춰 세우시오. 아니, 다른 조를 도우라고 지시하시오.”

제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청히 서 있자 피트가 제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다. 일단 12번 갱도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입구를 경계해라.”

그때 멀리서 빈 질통을 걸머지고 귀퉁이를 돌아오는 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젝, 위러그와 함께 4조 쪽으로 지원을 가라.”

피트의 지시를 들은 젝은 꾸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의문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쪽 채광은 끝난 듯하다. 새로운 갱구를 찾기까지 4조를 돕도록.”

그제야 젝은 이해가 되었다는 듯 순순히 온 길을 되돌아갔다. 채광 중 철광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보통 갱도를 바꾼다. 늘 있어 왔던 일이기 때문에 젝은 그다지 의문을 품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나갔다.

“제리, 자네는 12번 갱도 입구에서 운반조를 다른 작업조에 배치하게. 그리고 그 자리에서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서 있고.”

제리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까 보기론 철광석이 끊긴 거 같진 않던데…….”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니까. 서둘러서 시킨 대로 하게!”

피트의 짜증스런 목소리 끝에 반장의 말이 이어졌다.

“제리, 이유는 묻지 말고 그렇게 해 주겠나?”

제리는 의문이 들었지만 반장의 지시가 있자 어쩔 수 없이 길을 되돌아 나갔다.

“부반장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트의 말에 반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야. 그리고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네.”

반장의 시선이 다시 조노량을 향했다. 피트는 여전히 제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를 지키며 사방을 경계했다.

“어떤가?”

“여기를 보시면 얇은 노란 선이 점점 넓어지면서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금이 아닌 압착된 덩어리 형태입니다. 상당량의 금맥이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죠.”

흙덩이를 파헤친 후 곡괭이를 짧게 잡고 바위 조각을 조금 부숴 내자 얇고 노란 선이 점점 길어지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조노량은 작게 떼어낸 조각을 반장에게 건넸다. 반장은 작은 조각을 이빨로 깨물어 보았다. 별다른 저항 없이 꾹 눌려 지는 느낌이다. 조각을 바라보자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틀림없군. 금이야.”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칸과 리크의 눈빛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이 광산에서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반장은 직접 곡괭이를 놀려 좀 더 파 내려갔다. 파 내려갈수록 금맥의 폭과 길이가 늘어났다. 상당량의 금이 틀림없었다.

“노리앙, 파시오. 가능하면 부서지지 않게 파내야 하오. 큰 조각이 유지되게끔 말이오.”

반장의 지시에 따라 조노량은 조심스럽게 금맥을 파 들어갔다. 금맥은 끊어질 듯 얇아지다가도 다시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파 내려가자 한 주먹 분량의 금 덩어리를 채취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양이면 가치로 따져도 상당하다.

“곧 점심시간이오. 이쯤에서 덮어야겠소. 다들 알겠지만 이 일은 절대 비밀이오.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오.”

반장의 시선이 날카롭게 모두를 둘러보았다. 평소 부드럽던 시선이 아니다.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 말에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내 이름을 걸고 무사치 못하리라는 것을 맹세하겠소. 단, 이후 이 금으로 인한 결과물은 모두 공평하게 누리게 될 것이오. 믿어도 좋소.”

역시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리크와 칸은 결의에 찬 눈빛까지 보였다. 반장은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맹세를 시켰다. 맹세가 끝나자 반장은 모아 놓은 금덩이를 리크에게 건넸다.

“리크, 항문에 넣으시오.”

얼굴이 곱상하고 반반한 데다 체구까지 늘씬해 귀공자라고 불리는 리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포로수용소인 만큼 남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문에 뭔가를 집어넣는다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다. 더구나 제법 날카로운 조각들도 많았다. 하지만 반장의 냉정한 시선을 느낀 리크는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까고 조심스럽게 모아 놓은 금 조각들을 몸 안에 밀어 넣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항문에 금을 집어넣고 있는 귀공자 리크의 표정이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웃는 이가 없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이별 그 후,

빛바랜 백양목 서탁 위에

오래된 걸레질 자욱이 보인다.

메마른 물결 자국, 그 흔적 위 뽀얀 먼지가 슬프다.

먼지 속에서 그대의 냄새가 난다.

낡은 서탁 구석진 귀퉁이

회색빛 먼지,

그 속에서 또

그대의 냄새가 난다.

코가 천천히 숙여진다.

젖은 물결무늬가 하나 늘었다.

-불쌍한 노리앙의 노래 中

☆ ☆ ☆

리크의 단독 작업이 끝나자 반장의 지시가 이어졌다.

“갱도를 폐쇄해야겠소.”

“아니 왜 폐쇄를?”

피트가 놀라서 반장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모두 포로 신세요. 금을 소지할 수 없거니와 쓸 일도 없소. 그로 인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소. 금은 우리가 자유를 찾은 후, 그때 비로소 가치를 가질 것이오. 만약을 대비해서 폐쇄해 버리는 것이 맞소!”

반장의 말이 옳다. 수용소에서는 금보다 빵이 필요하고, 한 그릇 죽이 필요하다. 금으로는 절대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금을 사용했다가는 결국 누군가에게 걸리게 되고, 추궁이 시작되면 금맥의 존재를 토설할 수밖에 없어서 금의 발원지가 금방 발각될 것이다. 또한 이런 중대사를 보고하지 않고 숨겼다가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순순히 보고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제야 모두들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의 지시가 이어졌다.

“여기서 여기까지 무너뜨릴 수 있겠소?”

반장은 손을 들어 갱도를 무너뜨릴 위치를 지정해 주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반장이 가리키는 위치는 금맥이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뒤로 일 미터쯤 후방에서 오늘 설치한 버팀목까지 이 미터가량의 거리였다.

“일손이 더 필요합니다, 반장.”

리크가 반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인원으로는 세로목과 횡목을 받칠 수 없다. 모두들 말하지는 않았지만 버팀목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은 알고 있다.

반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제리를 불러오시오. 지금쯤이면 운반조원들이 모두 다른 조에 배치되었을 거요.”

반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리크가 소리쳐 제리를 불렀다. 갱도 안에서는 소리의 전달이 빠르다. 비록 꺾어져 있기는 하지만 불과 삼십여 미터 바깥에 서 있던 제리는 리크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제리가 도착했다. 어차피 의심을 하고 있던 제리다. 반장은 간략히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제리에게 침묵의 맹세를 강요했다.

제리는 절대 미련한 자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명석한 자다. 반장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제리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작업 지시가 이어졌다.

항상 갱도를 무너지지 않게끔 작업해 왔던 일행이지만 반대로 무너지게 하는 요령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피트, 해머를 확보해 오시오. 좌측 세로목은 나와 노리앙이 받치겠소. 우측은 칸과 제리가 맡고, 횡목은 리크가 수고해 줘야겠소.”

피트가 해머를 가지러 뛰어간 사이 모두들 말이 없었다. 아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갱도 안을 휩쌌다. 이 작업에서 자칫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해머를 가지러 다른 조로 달려간 피트가 도착했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행여 버팀목을 쳐 낼 때 갱도가 무너지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다. 이제부터는 자못 조심해야 한다. 우선 안쪽 세로목 끝을 받치고 있는 버팀목을 쳐 내기로 했다.

받침대를 놓고 각자 맡은 부분에 달라붙었다. 모두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해머를 잡은 피트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치시오!”

반장의 단호한 지시가 떨어지자 피트는 조심스럽게 왼쪽 버팀목을 안쪽으로 밀어 쳐 냈다.

퉁퉁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으나 단단히 고정된 버팀목은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팅하는 울림소리와 함께 세로목 사이 천장에서는 작은 돌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단번에 쳐 내시오, 피트. 다들 세로목을 단단히 고정시키시오. 지금이오!”

반장의 턱 아래로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피트는 이를 악물고 해머를 들어 올렸다. 해머의 힘을 고르게 받아 줄 나무토막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갖춘다는 것은 사치다. 피트는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버팀목의 상단부를 노려보았다. 거무튀튀한 비연목의 어둠이 횃불의 빛을 잡아먹을 듯 느껴진다. 초점이 흔들린다. 피트는 고개를 휘저어 초점을 바로잡았다. 타격점이 잡히자 해머가 천천히 정점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왼쪽 어깨 쪽으로 한 바퀴 휘돌며 아래로 슬쩍 떨어지는 듯하더니,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쾅!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 보인다. 다시 한 번 천장에서 우수수 흙더미와 돌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조노량은 입술을 깨물고 세로목을 부여잡았다. 세로목으로부터 생각보다 강한 진동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쾅! 쾅!

이를 악문 피트가 연속해서 버팀목의 상단을 쳐내었다. 버팀목은 제법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네 번째 타격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세로목과 횡목을 받치고 있던 일행도 강한 진동에 이빨을 앙다물었다. 특히 타격 지점 가까운 곳을 받치고 있던 반장과 노리앙의 얼굴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드디어 왼쪽 버팀목이 넘어가자 이번에는 오른쪽 버팀목 쪽으로 피트의 해머가 이동했다.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피트는 망설임 없이 해머질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강한 타격이다.

오른쪽 버팀목은 세 번 만에 넘어갔다. 강한 충격을 받은 천장에서 불길한 진동이 느껴졌다.

양쪽 버팀목이 떨어지자 횡목이 분리되었다. 횡목을 혼자서 받치고 있던 리크가 힘겹게 횡목을 내려놓고 바깥쪽 횡목으로 이동했다.

피트 역시 바깥쪽 버팀목 쪽으로 이동했다. 조노량은 아연 긴장했다. 반대쪽 버팀목을 쳐 낼 때도 발끝까지 짜르르 울릴 정도로 진동이 있었는데, 이제 자신의 앞에 있는 버팀목에 직접적인 진동이 가해질 차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안쪽에서는 칸과 제리가 버팀목 대신 직접 세로목을 받치고 있다. 버팀목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멀쩡한 갱도지만 한 번 버팀목을 설치했다가 제거하게 되면 무너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설치할 때 가해지는 충격과 제거할 때 가해지는 충격이 누적되면서 천장의 긴밀도가 현저히 저하되기 때문이다. 물론 철광산은 지질 자체의 긴밀도가 높아서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강한 진동과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돌 부스러기들이 조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어찌되었든 버팀목을 힘으로 제거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금이라는 엄청난 비밀 앞에 누구 하나 다른 의견을 낼 엄두를 못 냈다. 두 개의 버팀목을 제거한 이상 바퀴는 이미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피트는 먼저 조노량 쪽 버팀목 앞에 버티고 섰다. 그도 동굴 내를 울리는 진동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다. 이제 최대한 빨리,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나머지 버팀목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힘이 약한 노리앙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버텨주기를 기대해야 한다.

피트의 해머가 신중하게 호선을 그리며 조노량 쪽의 버팀목을 강하게 타격했다.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이번에도 세 번 만에 버팀목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까지는 이상이 없다. 피트는 힐끗 조노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로목을 받치고 있는 손이 조금씩 처지는 느낌이다. 다리도 심하게 떨리고 있다. 횡목을 받치고 있던 리크가 조노량 쪽으로 약간 이동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기 위한 행동이다. 피트는 리크의 눈치 빠른 행동에 다소 안심하면서 좌측 버팀목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한다. 이미 세 군데 지지대가 떨어져 나간 상태다. 조노량은 물론 반장과 제리도 버티기 힘들다는 눈치다. 천장의 진동이 바닥까지 전해진다.

피트는 장갑을 벗어 던졌다. 땀으로 흠씬 젖은 장갑이 한쪽으로 심하게 밀려 있다. 이래서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장갑을 벗은 피트는 양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급히 땀을 닦고 해머를 치켜들었다.

쿵!

쿵! 쿵!

쉽게 빠지지 않는다. 처음 끼울 때도 애를 먹였던 놈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버팀목의 길이가 조금 길었던 것 같다. 애초에 땅을 조금 파고 설치했어야 하는 놈을 힘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 불찰이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 없다.

피트의 해머가 다시 한 번 호선을 그렸다. 해머 자루가 땀으로 미끌거린다.

쿵!

다시 한 번 충격이 가해졌지만 기울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쿵!!

순간적으로 천장을 받치고 있던 세로목의 무게가 달라졌다. 동시에 뿌직하는 미세한 느낌이 조노량의 어깨로 전달되었다. 세로목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조노량의 표정이 급변했다.

“위험해!”

☆ ☆ ☆

원래의 목적은 안전하게 버팀목을 제거하고 곡괭이를 이용해 천장의 흙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간 과정이 생략돼 버리는 바람에 일이 예상 밖으로 진행되어 갔다. 단지 버팀목을 제거한 것만으로도 갱도의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조노량이 외치기 전부터 이미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던 두 사람이다.

조노량의 외침이 계기가 되어 제리와 테무아가 뛰기 시작했다.

콰쾅!

받치던 세로목을 놓자마자 그 지점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제리와 반장의 뒤로 떨어져 내렸다. 갱도가 온통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찾아왔다.

“뭣들 하는가? 어서 뛰어!”

불과 삼 미터! 조노량과 피트도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반장의 추가적인 외침이 없었더라도 이미 반쯤 뛰고 있었던 그들이다. 리크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피트도 해머를 집어 던지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조노량도 혼신의 힘을 다해 입구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한 번 죽었다.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는 없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단전에서 미세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노량은 무의식중에 기를 다리로 내려 보냈다.

우르릉, 쾅!

조노량의 뒤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으로 횃대에 걸린 횃불이 떨어져 나갔다. 어둡다.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하단에 힘이 들어갔다.

뿌직! 쿵!

의도하지 않았던 버팀목들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입구 쪽에 걸린 횃불의 빛이 코너를 돌아서 은은히 느껴졌지만 발밑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칫 발이라도 걸려 넘어졌다가는 그대로 인생 하직이다.

그때 ‘악’하는 비명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칸의 목소리다. 하지만 뒤돌아볼 수는 없다.

“죠!”

비명소리에 이어 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껏 뛰어도 모자란 판에 자신을 부르고 있다. 주춤거릴 뻔했던 조노량은 다시 한 번 다리에 힘을 주었다.

조노량은 놀라운 속도로 32번 갱도를 빠져나갔다. 이미 갱도 입구에는 다른 반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조노량은 입구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화살처럼 주갱도의 입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모여 섰던 반원들이 바람처럼 쏘아져 오는 조노량의 속도에 놀라 길을 내줬다. 도저히 인간의 속도라고 믿어지지 않는 빠르기였다. 뒤이어 리크가 32번 갱도에서 빠져 나왔다. 리크도 멈추지 않고 주갱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제야 놀란 반원들이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주갱도의 남은 백여 미터를 숨도 쉬지 않고 달려 나온 조노량은 맑은 하늘을 보고서야 멈춰 섰다. 다른 반원들도 하나둘 밖으로 달려 나왔다. 주갱도를 공유하고 있던 4반과 일부 5반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갱도 밖으로 뛰쳐나왔다.

경비병들도 갱도 입구로 몰려들었다. 은은한 진동과 울림소리에 벌써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을 알아챈 것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주 드믄 일도 아니다. 광산 작업이라는 것이 그처럼 위험한 일이다.

다행히 잠시 후 마지막 우르릉 소리와 함께 진동이 멎었다. 푹! 하고 입구 쪽으로 진한 먼지 덩어리가 밀려 나왔다. 터져 나온 바람은 흙가루를 날릴 만큼 거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조노량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리크는 아예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역시 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반장 테무아와 제리의 모습도 찾을 수 없다. 예상치 못한 붕괴에 사고를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조노량은 피트를 돌아보았다. 갱도에서 그를 부른 이유를 묻는 것이다. 하지만 피트는 우물쭈물하면서 조노량의 시선을 외면했다.

한쪽에서 5반원들도 술렁이고 있다. 32번 지갱도를 지나쳐 안쪽으로 이어진 주갱도 쪽에서 작업하던 5반원은 대부분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4반의 작업 갱도 중 32번 갱도가 가장 안쪽이었으므로 그보다 입구 쪽 갱도에서 작업을 하던 4반원들은 대체로 빠져나온 것이다. 반대로 32번 지갱도보다 더 안쪽 갱도에서 작업하고 있던 5반원들은 상당수의 인원이 비었다.

허글러가 피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피트도 건장한 체격이지만 허글러의 손에 번쩍 들려졌다.

“피트! 어찌된 일이냐?”

허글러의 시선이 불타오르는 듯하다. 피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다. 허글러의 다른 손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리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귀족적인 말끔한 얼굴에, 낡은 옷이나마 항상 깨끗이 관리하던 리크의 꼴이 말이 아니다. 온통 흙과 먼지로 얼룩진 옷과 얼굴에서는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지 않나?”

허글러의 시선이 다시 조노량을 향했다.

“노리앙!”

허글러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다. 피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채……광 중 갑자기 갱도가 울리더니…….”

“빠져나오지 못한 자는?”

미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연이어 질문이 쏟아진다.

“반장과 제리, 그리고…… 칸입니다.”

더 이상의 대답은 의미가 없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이 순간은 갱도가 무너졌다는 것과 누군가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허글러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사십 명밖에 안 되는 인원이니 한눈에 모자란 인원을 파악할 수 있다. 리크가 말한 인원 외에도 루드와 리브온의 모습이 보지 않았다.

허글러가 다른 반원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아 들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확인해 봐야겠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허글러가 갱도로 뛰어 들어갔다. 반원들과 경비병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허글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번 붕괴가 시작된 갱도는 언제 다시 붕괴가 재개될지 모른다. 적어도 반시간은 흘러야 안심할 수 있다. 허글러를 제외한 누구도 갱도로 진입할 생각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은 조노량을 포함한 4반과 5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온기 없는 태양빛이 포로들의 흐린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조노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5반의 크리들이 삽과 곡괭이를 챙겨 들었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잠시 시커먼 갱도의 아가리를 노려보다가 곧 단호한 표정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러자 꺽다리 젝도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크리들의 뒤를 따랐다.

모두의 시선이 크리들과 젝의 뒷모습을 좇는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어둠은 순식간의 그들의 모습을 집어 삼켰다. 크리들과 젝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모두의 시선은 한동안 갱도의 입구를 떠나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땅을 울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쿵쿵, 쿵쿵!

☆ ☆ ☆

다행히 익숙한 갈리온의 발굽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쿤나 기대의 기대장 쿤나가 갈리온 몇 기를 거느리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웅성웅성 모여 있던 포로들이 다급하게 길을 비켜섰다. 자칫 밟히기라도 하면 그걸로 끝이다. 조노량도 얼른 옆쪽으로 물러났다.

깃털 장식이 달린 높다란 투구 사이로 희끗한 귀밑머리가 드러나 보이는 노병이 얼른 쿤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쿤나의 시선이 포로들의 머리 위로 한 바퀴 돌았다. 얼핏 봐도 인원이 많이 부족하다.

“인원 점검을 한다. 각 반의 반장들은 나서라.”

“저 기사님, 두 반장이 모두 나오지 못했습니다요.”

고참답게 라숍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허! 그럼 부반장이라도 나서서 인원 점검을 하라.”

“부반장 둘도 방금 전에 상황을 파악하러 갱도로 진입했습니다요.”

쿤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한심한 놈들! 아무나 얼른 인원 파악부터 햇!”

그제야 각 반별로 인원 파악에 들어갔다.

4반은 이미 파악하고 있던 바대로 반장과 칸, 제리가 비었고, 루드를 포함해 세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분명 다른 조로 지원하러 갔을 텐데……. 그리고 5반은 총 서른여덟 명 중 절반이 넘는 스물한 명이 비어 있었다.

잠시 후 인원 파악과 보고가 끝나자 쿤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크로아지크의 포로들은 아도니아로서도 꽤 귀중한 존재들이다. 아도니아 전체 철 수급량의 일 할이 이곳 부아칸산에서 채광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인원이 무려 스물일곱 명이나 된단 말인가?”

“조금 전 갱도로 진입한 인원까지 합치면 서른 명입니다.”

“진입한 지 얼마나 되었나?”

“반시간쯤 된 듯합니다.”

“그 정도면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나왔을 시간 아닌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삼십 분이면 이미 정찰이 끝났을 시간이다. 누구 하나쯤은 나와서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든 고개를 젓든 해야 했다.

“한심한 놈들! 추가 붕괴의 조짐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진동도 느껴지지 않고요.”

쿤나의 각진 턱 선이 도드라졌다. 뭔가 결심을 굳힌 모양이다.

“더 이상 위험은 없을 듯하다. 안내자가 필요하니 지원자를 받겠다. 누가 나와 함께 들어가겠는가?”

쿤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포로들의 머리 위를 휘돌았다. 붕괴의 후폭풍에 의해 주갱도의 횃불이 무사할 것이라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갱도의 지리에 대해 잘 아는 자가 필요했다.

낯선 자로서는 주갱도와 지갱도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주갱도가 직선도 아닐뿐더러 너비와 높이가 지갱도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평소 갱도에 들어갈 일이 그다지 없었던 쿤나에겐 반드시 안내자가 필요했다.

포로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상황을 파악하겠다는 쿤나의 용기가 기사답다. 조노량은 다시 한 번 이곳 사람들의 남자다움에 감탄했다. 딱히 포로들을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위험을 마다않는 이들의 자부심은 높이 사 줄 만하다.

멈칫거리던 손들이 하나둘 올라갔다. 비록 지금은 포로 신세일망정 그들도 자부심 높은 북국의 전사들이다.

먹을 것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반대로 동료들을 위한 위험은 당연히 감수하겠다는 자세도 보인다. 조노량의 손도 어느새 올라가 있었다.

쿤나도 그들의 자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눈에 띄는 두 명을 무작위로 지명했다. 그중에는 쿤나와 가까이 서 있던 조노량도 포함되었다.

일행은 각자 두 개씩 총 여섯 개의 횃불을 양손에 나눠 쥐고 갱도로 진입했다.

예상했던 대로 갱도 안쪽 횃불들은 대부분 횃대를 벗어나 있었다.

갱도가 붕괴되면 커다란 바람이 발생한다. 그 바람은 수십 개 지갱의 대기와 공명하며 휘돌아 세기를 더한다. 거세진 바람은 결국 터질 곳을 찾아 입구로 회오리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기세 속에서 횃대에 허술하게 꽂혀 있던 횃불들이 무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어둠은 평소 익숙하던 길마저 낯설게 만든다. 마치 수많은 아가리를 지닌 미로를 연상시킨다. 하긴 미로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꾸불꾸불 휘어진 주갱도, 주갱도에서 뻗어나간 지갱도, 그리고 그 지갱도에서 뻗어나간 또 다른 지갱도.

낯선 자라면 입구를 찾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헤맨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익숙한 조노량 조차도 갱도가 조금씩 꺾일 때마다 방향감각을 상실할 지경이다. 괴괴한 적막을 울리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 습기 찬 갱도의 공기가 더욱 음습한 느낌을 자아낸다.

조노량은 같이 진입한 5반의 포로를 힐끗 돌아보았다. 작고 비쩍 마른 몸매에 수염만 가득하다. 얼굴은 익숙하지만 이름은 잘 모르겠다. 그 자 역시 불안한 듯 연신 좌우를 돌아본다. 반면 뒤를 따르는 쿤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꾸물거리느냐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저만치 앞쪽에 불 꺼진 횃불이 바닥을 뒹굴고 있다. 좌우를 살펴보니 익숙한 횃대가 보인다. 조노량은 손에 든 횃불을 횃대에 걸고 굴러다니던 횃불을 주워서 불을 붙였다.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기름기는 남아 있었기에 치직 소리와 함께 손쉽게 불이 옮겨 붙는다.

일행은 조금씩 진입해 들어가며 횃불이 발견되면 불을 붙여 횃대에 꽂고, 발견되지 않으면 손에 든 횃불을 꽂아 길을 밝혔다.

수많은 지갱들을 지나 대략 육십여 미터쯤 진입하자 익숙한 갱도들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 4반이 작업하던 갱도들이다. 모퉁이를 돌자 멀리서 횃불의 잔영이 일렁인다. 먼저 진입한 자들의 횃불이리라. 작은 말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아직 거리가 멀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다. 갱도의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이상 함부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다. 일행은 불빛이 보이는 방향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다시 모퉁이를 돌자 이리저리 흔들리는 횃불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뭔가 작업을 하는 듯 웅크리고 있는 덩치와 꺽다리 젝의 그림자가 보였고, 횃불을 말아 쥐고 있는 크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저들도 이쪽을 발견한 듯 작업을 멈추고 일어섰다.

쿤나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부반장들인가?”

크리들이 횃불 하나를 허글러에게 넘겨주며 대답했다.

“5반 부반장인 크리들과 4반 부반장인 허글럽니다.”

“상황은?”

쿤나의 질문에 크리들이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돌무더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히 크게 망가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붕괴는 32번 갱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 이곳은 32번 갱도에서 불과 삼사 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주갱도까지 붕괴된 것은 아니고, 32번 갱도가 무너지면서 쏟아져 나온 토사가 밀려나와 막힌 듯 보입니다.”

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는 확인되었나?”

허글러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살아 있습니다.”

간결한 허글러의 대답에 젝이 얼른 보충 설명을 붙였다.

“멀긴 하지만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도 저쪽까지 붕괴되진 않은 거 같고요. 그쪽에서 작업하던 5반원들도 무사한 것 같습니다.”

젝은 무너진 돌무더기 건너편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쿤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다행이군. 하지만 32번 갱도에서 작업하던 자들은 빠져나오지 못했겠지?”

그 말에 조노량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32번 갱도에서 작업하던 조였습니다.”

쿤나의 시선을 조노량을 향했다.

“다른 조원들은?”

“마침 갱도를 폐쇄하고 이동하던 참이었기에 세 명을 제외한 인원은 모두 무사합니다.”

“세 명이라……. 죽었다고 봐야겠군?”

그 말에 허글러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왠지 강한 부정의 의사가 내포된 시선이다.

동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나약하거나 정이 많은 성격은 아니라고 느꼈었는데,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가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무너진 갱도에 있었던 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구나 그들은 붕괴 지점 바로 앞에 있었다. 붕괴 이유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조노량은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에서 그쳤다니 그나마 천행이다. 추가 붕괴 조짐은 없나?”

허글러의 흥분을 느낀 젝이 얼른 대답했다.

“전혀 없습니다. 32번 갱도도 왜 무너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잠잠합니다.”

젝의 말에 쿤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노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기! 나가서 작업조를 편성하라. 막힌 곳을 뚫는다.”

쿤나가 수염쟁이 5반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지시하자 그 자가 부동자세를 취해 보이고는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군데군데 횃불을 밝혀 놓았으니 엉뚱한 길로 샐 염려는 없었다.

수염쟁이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장비를 들쳐 멘 대규모 인원이 도착했다. 4, 5반뿐만 아니라 다른 갱도에서 작업 중이던 포로들도 눈에 띄었다. 갱도가 무너지는 소리에 가까운 갱도에서 작업하던 인원들도 대피를 했던 듯싶다.

☆ ☆ ☆

갱도가 좁았으므로 직접 막힌 곳을 뚫을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었지만 각 반의 최고 채광 담당들이 앞으로 나서서 막힌 곳을 뚫기 시작했다.

쿤나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크리들이 나서서 채광조를 네 명씩 구성했다. 반의 구별은 없었다. 각 반의 유능한 채광꾼들은 이미 서로서로를 다 파악하고 있는 터라 조 편성이 손쉬웠다. 일차로 네 명이 힘껏 십여 분을 파면 바로 다음 조로 교대가 이루어졌다. 최대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십여 명의 인원은 파낸 흙과 돌더미를 바로바로 뒤로 날랐다. 급한 마당에 밖에까지 옮길 이유는 없다. 힘이 좋은 일부는 뒤에서 대기하다가 커다란 바위덩이가 나오면 힘을 합쳐 들어냈다. 그때마다 크리들은 붕괴의 위험이 없는지 세밀히 관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삼십여 명의 정예 광부대가 편성되었고, 작업에 방해가 되는 나머지 인원은 도로 밖으로 내보냈다.

작업이 시작되자 언제나처럼 입자 굵은 먼지더미들이 솟아올랐다. 잠시 작업을 관찰하던 쿤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부채를 부쳐댔다. 습관이 된 포로들은 먼지 정도에는 거의 무감각해져 있다.

한 개 반의 부반장답게 크리들은 꽤 유능한 면모를 보여줬다. 오히려 허글러가 크리들의 지시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참 곡괭이질을 하던 조노량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비상 상황이라지만 굶주림은 어김없이 표를 낸다. 아침식사는 오전 작업 후 한두 시간이면 꺼지고, 그 후는 점심만을 기다리는 생활이다. 그런데 벌써 오후 두 시는 되었을 테니 뱃가죽이 납작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반원들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조차 배꼽시계가 울리다니, 조노량은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노량은 피로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근육들이 아우성을 질러댄다. 몸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는 것 같다. 분명 수용소 최고의 채광꾼이지만 그건 장기전일 경우에 한한다.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힘을 쓰는 데는 약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붕괴 때 느꼈던 극도의 긴장감이 조노량을 빠르게 탈진시키고 있었다.

“작업 중지! 무슨 소리가 들린다.”

크리들이 손을 치켜 올리자 모두들 작업을 멈추고 소리를 죽였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누군가의 말소리가 제법 또렷이 들려왔다.

“거기부터 조심하시오.”

크리들이 돌더미에 대고 소리쳤다.

“누구요?”

“4반 반장 테무아요. 거기 작업이 구출을 위한 것이라면 지금부터 조심해 주시오.”

5반원의 목소리가 아니라 테무아의 목소리다. 그동안 미세하게 들리던 소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허글러의 눈빛이 번쩍였다.

“반장? 살아 있었소?”

“허글런가? 그러하네. 아직은 무사하네.”

“또 누가 있소?”

“루드와 같이 있네.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하네.”

허글러의 표정이 환해졌다. 조노량이 느끼기에 허글러가 일 년 반 동안 반원들에게 보여준 표정보다 오늘 보여준 표정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태요?”

“바위틈인 것 같네. 소리로 보아 지금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무너져 버릴 걸세.”

크리들이 쿤나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허글러, 나 그리고 너, 우리 셋이 채광을 맡겠다. 모두들 뒤로 물러나라.”

크리들의 손가락이 조노량을 가리켰다. 힘은 달리지만 조노량의 유연한 곡괭이질이 크리들의 눈에 띈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조심스럽게 파야 하기 때문에 조노량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가장 적임자였다. 이미 탈진에 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조노량은 가장 상태가 나아 보이는 곡괭이를 찾아서 바꿔 쥐었다. 본래 자신의 곡괭이는 저 돌무더기 틈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세 명 모두 베테랑들이다. 작업은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서둘지 않고 리듬을 살려 내자 조노량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작업이 길어질 듯하자 쿤나가 포로를 하나 앞세워 갱도를 빠져 나갔다. 아마도 병사들에게 지시할 사항이 있는 모양이다.

쿤나가 나간 후로도 무려 반시간을 넘게 파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안쪽에서 테무아의 목소리가 방향과 위치를 지시해 주곤 했는데, 방향은 직선이 아니라 32번 갱도 쪽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목소리의 위치로 보아 32번 갱도의 초입부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테무아의 목소리도 점차 힘을 잃어 갔다. 또한 간혹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뱉어 내는 것으로 보아 부상 정도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때 다시 테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보이네.”

허글러가 손을 들어 작업을 멈춰 세우고는 돌더미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허글러의 좌측 약간 아래쪽으로 조그마한 틈이 보였다. 허글러는 허리를 숙이고 손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틈을 헤집었다. 그러자 우수수 흙더미가 떨어져 내리며 틈이 넓어졌다.

“바로 거길세. 허, 횃불 빛이 이렇게 찬란하고 눈이 부신지는 미처 몰랐구먼.”

허글러가 머리를 들이밀고 안쪽을 살펴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허글러가 손짓을 해 삽을 받아 들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구멍을 넓혀 갔다.

“아, 거기 조심해 주게. 루드가 거기 있다고. 으윽.”

허글러의 손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사람의 상체 정도는 들어갈 만큼 구멍이 넓어지자 허글러가 구멍 안으로 횃불을 들이밀고 다시 안쪽을 살폈다. 조노량도 바짝 다가갔다.

그제야 겨우 안쪽의 상황이 보였다. 버팀목이 커다란 바위덩어리들과 교묘하게 얽혀서 좁고 길쭉한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천우신조라 할 만한 상황이다.

구멍 앞쪽으로 루드의 모습이 보였다. 으깨진 턱에서 흘러내린 피로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왜 루드가 말을 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좀 더 자세히 살피자 비스듬히 기울어진 버팀목 하단에 끼인 그의 허리가 보였다. 그쪽으로도 혈흔이 낭자했다. 루드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런 상태로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루드의 뒤쪽으로 반장이 힘겹게 왼손을 들어 보였다.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왼손을 제외한 팔다리는 모두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다.

조노량은 현재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버팀목을 건드리지 않으면 루드를 꺼낼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버팀목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반장이 누워 있는 공간이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쪽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루드가 위치한 곳을 뛰어넘어 반장에게 가기도 애매했다. 그러려면 루드의 하체 부분을 그대로 둔 채 상체만을 치워야 한다. 루드의 상체 부분이 유일한 입구였기 때문이다.

다른 쪽을 다시 판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우선 사방이 모두 굵직한 바위들인 데다 그 바위를 들어낸답시고 함부로 충격을 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반장을 안전하게 살리려면 루드를 포기해야 했다.

그 꼴을 하고서도 루드는 편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조노량은 가슴이 아려왔다. 부반장의 선택이 무엇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안전도 면에서만 보더라도 루드를 희생하는 것이 옳았다. 루드만 희생하면 반장은 안전하게 꺼낼 수 있다. 반면 루드를 살리자면 루드는 물론 반장까지도 위험해질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것은 루드보다는 반장이 절대적으로 더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그의 유능함은 차치하고라도 반장은 4반에서 절대적인 존재다. 부반장인 허글러를 포함해서 말이다. 단호한 허글러의 성격으로 보아 결론은 이미 난 것과 다름없다.

허글러의 눈살이 깊게 찌푸려졌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 ☆ ☆

“루드를 먼저 구한다. 뭔가 받칠 만하거나 지렛대가 될 만한 세로목을 찾아보도록!”

허글러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나왔다. 반드시 루드를 구해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허글러를 향했다.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한 표정들이다. 칼이나 도끼를 준비하라는 끔찍한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 각오하고 있던 터였는데?

사람들의 반응에 허글러는 잠깐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단호하게 의지를 표명했다.

“반장을 위해 동료를 희생시키자고? 제정신들인가?”

루드의 으깨진 턱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꿈틀거렸지만 말은커녕 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화를 포기한 루드가 힘겹게 머리 부분을 움직여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빛으로 보아 고개를 저어 보이려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고갯짓은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경련과 닮아 있다.

“뭣들 하는가? 동료를 구하지 않을 셈이냐?”

허글러의 호통소리가 있고서야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일부는 노골적인 불만까지 표출하고 있다. 가당찮은 허글러의 조치로 인해 반장이 위험해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반장이 저 지경인 이상 허글러에게 대놓고 대항할 담력을 가진 자는 없다. 모든 선택은 허글러의 몫이다.

크리들과 다른 반원들은 묵묵히 허글러의 선택을 인정해 주었다. 4반원의 일이니 4반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만약을 대비해서 뒤로 조금 빠져있을 뿐이다. 어쨌든 저들을 구해야 5반도 작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리들만은 자리를 뜨지 않고 허글러와 눈짓을 교환했다.

조노량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글러의 판단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일견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루드와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하긴 일 년 반을 같은 소조로서 화장실까지 함께했으니, 가족같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조노량이 생각하는 루드는 좋은 청년이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반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빨리 일반적인 길이보다 조금 긴 세로목을 날라 오고, 작업 후 남은 짧고 두꺼운 침목 조각도 준비했다.

그 사이 허글러는 구멍을 좌우로 조금 더 넓히고는 각진 바윗덩어리 하나를 입구의 하단으로 옮겨다 놓았다. 지렛대 받침으로 사용할 생각인 모양이다.

작업 준비가 끝나자 세로목이 루드의 허리 아래쪽에 끼워졌다.

“리크, 버팀목이 들리면 이 침목을 받쳐라.”

허글러의 지시에 리크는 짧은 침목을 안고 구멍 앞에 대기해 섰다.

모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극도의 긴장감이 갱도를 휘감았다. 동료의 생사가 걸린 일이기도 하지만 자칫 갱도의 이차 붕괴로 이어질 경우 자신들도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뒤로 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연함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결정이 내려지면 자신의 의견과 다를지라도 목숨을 건다는 북국의 가치관이 이런 것인가?

오 미터짜리 세로목에 허글러를 포함한 일곱 명의 사내가 들러붙었다. 세로목이 입구의 안쪽으로 이 미터가량 들어가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삼 미터 정도만이 사람이 붙을 수 있는 길이의 한계였다.

“크리들, 부탁하겠다.”

리크는 긴장한 모습으로 허글러의 지시를 기다렸다. 뒤로 빠지지 않은 유일한 다른 반원인 크리들도 작업을 자세히 관찰하며 위험 요소가 없는지 확인했다.

“아주 천천히 드는 거다. 절대 충격을 가해서는 안 된다. 준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었다. 조노량도 마른침을 삼키며 한 편에 비켜서서 허글러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다른 반원들은 조금 더 뒤쪽으로 물러났다.

“간다!”

말과 함께 사내 일곱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지상과 가까운 지렛대 앞부분에 위치한 사내는 아예 세로목에 올라탔다. 뒤쪽 사내는 두 손으로 세로목을 내리눌렀다. 다른 사내는 세로목을 옆구리에 끼고 온몸을 기울였다.

뒤쪽을 맡은 사내는 점점 더 높아지는 세로목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미터에 가까운 장신인 허글러는 맨 뒤에 서서도 발을 땅에 디딘 채 두 손으로 세로목을 잡아 내리고 있었다. 과연 들릴 수 있을 것인가?

뿌득!

푸스스

나무가 압착되는 소리가 들리고 안쪽으로 흙더미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도 들렸다. 크리들이 횃불을 좀 더 구멍 깊숙이 들이밀었다. 버팀목에 가로막혀 있던 위쪽의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꿈틀거렸다. 혹시라도 균형이 무너지면 바로 무너져 내릴 기세였다.

“끄으응!”

“빠드득!”

사내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금니에서는 이빨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면과 닿아 있던 버팀목의 한쪽 끝이 서서히 지면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크리들이 구멍에서 눈도 떼지 않고,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눌러 보이며 힘 조절을 지시한다.

“조금만 더! 아주 천천히! 흔들리지 않게!”

한꺼번에 힘을 주는 것이라면 오히려 쉽다. 하지만 균형을 잡아 가며 천천히 힘을 쏟기란 무척 어렵다. 한꺼번에 힘을 쏟는 것만큼 힘이 들어가면서도 지속적으로 힘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팀목 위쪽에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는 바윗덩어리를 고려해야 한다.

크리들의 목소리에 사내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세로목을 눌러 내렸다.

그 순간 크리들이 리크의 등을 쳤다. 지금이다!

리크는 침목을 끌어안고 상반신을 구멍에 들이밀었다. 리크의 상반신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조노량의 위치에서는 더 이상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는 여전히 흙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사내들의 신음소리와 섞여 괴기스럽게 어우러졌다.

“됐다! 이제 마지막이다. 천천히, 천천히 내려!”

세로목에 붙어 있는 반원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쯤 되어서야 크리들의 지시가 내려졌다.

허글러의 이마에서도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잠시 후 삐걱 소리와 함께 겨우 지렛대로 사용되던 세로목이 내려졌다.

고정되었다. 무사히 작업이 끝난 것이다.

세로목이 내려질 때까지 침목을 붙잡은 채 균형을 잡고 있던 리크가 구멍에서 빠져 나왔다. 긴장 탓인지 온몸이 땀투성이다.

세로목에 매달렸던 사내들도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는 허글러조차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토해 놓았다.

지켜보던 반원들의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노량이 안쪽을 살피자 루드를 내리누르고 있던 버팀목이 루드의 하체로부터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목은 루드의 바깥쪽에 단단히 받쳐져 있었다.

“버팀목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리크가 다급하게 허글러를 향해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단단한 비연목이라지만 저 정도 무게가 비스듬히 실린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허글러가 겨우 땅을 짚고 일어나 구멍 앞으로 다가와 안쪽을 살폈다.

“루드, 괜찮나?”

하체의 일부는 흙더미에 묻혀 있었고, 드러난 부분도 온통 피투성이어서 도대체 어디를 얼마큼 다쳤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허글러는 상체를 구멍 속에 집어넣어 루드의 작업복 뒷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루드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허글러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다. 흙더미에 묻혔던 루드의 하체 일부가 흙더미를 빠져 나왔다. 다행히 떨어져 나간 부분은 없었다.

곧 루드의 전신이 구멍을 빠져나오자 5반원인 키코가 루드를 들쳐 메고 서둘러 갱도 밖으로 옮겼다. 루드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허글러는 걱정스런 눈빛을 떼지 못했다. 허글러가 언제부터 루드를 그렇게 챙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드는 아마도 수습신관에게 맡겨지리라. 하지만 저 상태로는 살아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 수습신관이 과연 루드를 살려 낼 수 있을까? 불길한 생각이 든다.

“반장, 괜찮소?”

다시 정신을 추스른 허글러가 상체를 들이밀고 반장을 살폈다. 대략 오 미터가량?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 반장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허글러의 시선이 젝을 향했다.

“부탁하겠다.”

통로가 좁은 탓에 덩치 큰 허글러가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다. 또한 힘 좀 쓴다는 자들은 이미 모두 퍼져 있어서 호리호리한 젝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젝은 망설임 없이 횃불 하나만 들고 구멍 속으로 진입했다.

반장이 위치한 곳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였다.

천천히 기어서 반장한테 다가간 젝은 반장의 머리가 입구 쪽을 향하도록 조심스럽게 반장의 몸을 돌려놓은 후 허글러가 그랬듯이 반장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기이한 각도로 꺾인 사지가 제멋대로 덜렁거렸다. 반장의 입 속에서 작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젝은 자신이 먼저 구멍으로 하체를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뒤로 기며 반장을 끌어내었다. 제법 시간이 걸려서야 젝은 반장의 몸을 구멍 밖에까지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반장이 실려 나가자 다시 주갱도 개착(開鑿) 작업이 진행되었다. 아직 칸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지만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은 칸을 찾기 위해 더 이상 32번 갱도에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후로도 꼬박 다섯 시간이 흘러서야 막혔던 주갱도가 뚫렸고, 5반원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다행히 주갱도의 안쪽은 거의 손상이 없었기 때문에 5반원 대부분이 무사했다.

얼굴은 긴장과 초조함으로 지쳐 있었지만 5반 반장인 우라도와 티프란 음침한 사내는 오히려 푹 쉬었다는 듯 여유 있는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조노량이 갱도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물들고 있었다. 다른 반원들은 모두 수용소로 돌아간 상태였고, 쿤나와 쿤나 기대만이 작업조의 호송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두 반의 피해는 경미한 편이었다. 5반에서는 운반을 담당하던 쿡이라는 사내 하나만이 무너진 바위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4반에서는 칸과 제리, 리브온이 실종되었을 뿐이다.

주갱도를 복구하는 과정에 리브온의 시체는 찾아낼 수 있었지만 칸과 제리의 시체는 결국 찾지 못했다. 단 두 구의 시체를 찾기 위해 32번 갱도를 복구할 수는 없었으므로 칸과 제리는 32번 갱도에서 작업하다가 묻힌 것으로 처리되었다. 어쨌든 이 정도 사고에 단 네 명의 손실이라면 아주 양호한 편이다. 쿤나도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하루였다. 그제야 아침식사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몸살 기운도 다시금 몰려온다.

잠시간 휴식이 끝나고 일행은 쿤나 기대의 호송을 받으며 수용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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