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증명
가치 증명
과감한 선택으로 당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니, 회사는 한동안 평온을 찾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 진행에 박차를 가하면 되겠거니 생각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헌데, 오늘 내 눈을 뜨게 만든 건 늘 듣던 시계 알람이 아니라 연이은 인스타그램 DM 알림이었다. 계속된 미세한 진동에 나도 모르게 잠을 설쳤던 건지 찌뿌둥한 느낌을 덜어내려 쭉 기지개를 켜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핸드폰을 열었다. 평소에도 아침에는 늘 DM이 쌓여 있었지만, 평균치보다 훨씬 더 많은 DM과 댓글들이 간밤에 쌓여 알림창 스크롤이 끝도 없이 내려갔다.
re-라희 언니, 뷰갤 글 해명해 주세요.
re-언니~ 커뮤니티에 언니 글 떴는데 진짜예요?
re-왜 라방 안 해요? 해명 안 하나요?
Direct message
@mijl** | 스토리에서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eod**** | (최근 활동 : 4시간 전) 답변해 주세요.
@qoa12** | 사진을 전송하였습니다.
대뜸 해명을 하라는 글들이 쏟아져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찬찬히 글들을 하나씩 살폈다. 대부분의 댓글과 메시지에는 공통적인 링크가 존재했다. 링크를 누르니 어느 커뮤니티의 글이 나왔다. 이 게시 글이 캡처되어 SNS 탐색 라인을 장악했고, 예전에 올려뒀던 유튜브 영상의 댓글 창까지 점령되어 저 밑에 있던 과거 영상들이 끌어 올려지고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루머라서 대응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는 이제 한 회사 대표이니까, 나만 괜찮다고 괜찮을 리 없었다. 나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직원들이 같이 욕을 먹고 있으니 서둘러 사무실로 출근해 팀장급 회의를 요청했다.
내 곁을 둘러싸고 앉은 팀장급 직원들은 적게는 1년, 많게는 5년도 넘게 알고 지낸 내 오랜 동료들이었다. 뷰티 블로거 시절부터 알음알음 알고 지내다 유튜브 채널을 같이 기획하고 꾸려온 크루이니 나에 대한 믿음이 그 누구보다 두터웠다. 그런데도 여태껏 겪어본 위기와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에 다다르니 다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게 회의실 공기만으로도 느껴졌다. 진실이 아니라는 걸 말로 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프린트된 문제의 게시 글을 찬찬히 읽어 내리니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목 : 라희 채널 팔로워 수 조작 의혹
작성자: lalala****
유튜브 본사 관계자를 알거나, 구글 가계정으로 팔로워를 샀던 게 아니라면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라희 채널 팔로워 수 급감은 비정상적임.
2주 전 채널 구독자 90만 명대로 1차 급감
그다음 날, 채널 구독자 60만 명대로 2차 급감
팔로워 수가 애초에 조작되었거나, 아직 공개되지 않았거나,
일부로 공개 안 하거나 못 한(?) 논란이 있는 게 아닐지?
댓글
: 이 정도면 업계에서 보이콧하고 있는 거 아님?
: 이번에 브랜드 론칭한다는데 타사 도용한 거 아니야?
: 혹시 얘도 학폭? 아님 주작? ㅋㅋㅋ 유튜버 논란 하루 이틀임?
: 새로 론칭하는 브랜드는 자기가 만든 거 진짜 맞음? 아무도 모를 일
: 또 멍청한 시녀들이 사주겠지? 한심 쯧쯧
: ㄴㄴㄴ 중국제 택갈이 하고 있다는 거 같은데
: 전문가도 아닌 게 갑자기 웬 제조? 하던 거나 잘하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구취하지. ㅃㅇ
모두가 함께 눈으로 내용을 훑어보고는 말이 없었다. 회의실 안에서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조용하다니.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고 홍보 팀장이 먼저 나섰다.
“대표님, 이거는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채널 커뮤니티에 입장 표명 글을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아니, 저도 해명을 하고 싶은데 자연적으로 팔로워들이 이렇게 빠져나간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나라고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 10만 명, 그리고 그다음에 30만 명이 빠져나간 건 분명 내가 자초한 일이니, 계산대로라면 60만 명 정도의 팔로워가 남았어야 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겨우 30만 명 남짓. 예상한 수치보다도 반이 더 줄었다.
“며칠 사이에 줄어든 건,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연적으로 줄어든 게 맞아요. 그렇게 급감하기 시작한 건 최초로 의혹이 제기된 커뮤니티 글이 베스트로 랭크된 시점부터도 맞고요. 글이 퍼지면서 제기된 의혹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 뒤 구독자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 30만 명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게시 글에 쓰인 것처럼 초반 어떤 시점에 갑자기 몇십만 명의 구독자가 한꺼번에 감소한 건 사유가 파악되지 않는데, 혹시 대표님 짐작 가는 부분 있으세요?”
짐작이 아니라 확실한 이유가 있지. 처음 시작은 내가 팔로워를 교환소에 대가로 지불했기 때문이니. 그렇다고 사실대로 직원들에게 말하기는 뭐했다. 이런 얘기를 믿어줄까 싶기도 하고, 더욱이 그 사실을 공개하면 더 큰 논란이 발생할 테니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 채널에 신경을 못 쓴 건 사실이죠. 사업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여기 나온 대로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진 않았잖아요. 제가 어디 업계에서 책잡힐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고요.”
“그러면 이건 법적으로 소송 준비해요. 회사 차원에서도 루머는 바로 잡고 가야죠.”
“그래요. 이건 법무 법인 섭외해서 해결할 만한 문제인 거 같아요.”
돈을 써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할 수 있다지만 한번 떨어진 신뢰도와 사람들의 의심은 대체 어떻게 바로잡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구독자들이 빠져나간 걸 보면서 견고할 거라 믿었던 채널의 인기가 얼마나 가변적인지 깨달아야 했다. 이 사태로 인해 걱정되는 건 나보다도 앞으로의 브랜드 이미지였다.
“루머에 강경 대응하는 거야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건 브랜드 이미지예요. 우리가 강경 대응을 해서 오히려 더 루머를 부추기는 꼴이 될 수도 있어요.”
강 팀장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있는 대로 고소만 한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나아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제론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는 누군가에게 쏟는 믿음이니, 영원할 것 같다가도 한순간에 종잇장처럼 가벼워질 수 있었다. 그걸 지금 눈으로 보고 있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역풍이 불어올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쌓아온 것들을 주먹에 쥔 모래알처럼 다 흘러가 버리게 둘 수도 없는 노릇. 하루아침에 날 믿어달라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외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직원들 분위기는 좀 어때요…?”
나의 물음에 다들 시선을 피했다. 팀장들이라고 지금 이 상황에 별다른 대처법이 있을 리 없으니 본인들도 답답하겠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음, 일단 회계팀은 얘기 나온 대로 루머 소송 관련해서 법무 법인 알아봐 주시고, 홍보팀은 보도 자료 준비해 주세요. 온에어를 하든, 안 하든 일단 작성해 두고 상황 봐서 배포 시점 말씀드릴게요. 하루만, 하루만 더 지켜보고 방법을 다시 한번 얘기해 봅시다. 일단 해당 게시 글은 사이트에 명예훼손 신고로 내려놓은 상태니까.”
“직원들 지금 관련 콘텐츠 클리핑하고 있는데 계속 작업할까요? 아니면 다른 업무 진행할까요?”
“오늘은 일단 클리핑이랑, 채널별로 댓글, 상담 등 고객 관리 쪽으로 전환해서 업무 진행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평소와 달리 브랜드 위기관리에 투입되어 앞뒤 상황도 모르고 갑자기 브랜드와 대표를 대변하는 게 썩 기분 좋을 순 없지.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조용히 사무실을 돌아보면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직원들이 평소와 달리 무표정으로 일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어느 회사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회사 대표가 하는 일이 모두 옳다고 믿지 않을 텐데, 하물며 이런 루머가 퍼졌는데 진위도 모른 채 그저 대표가 아니라고 하니까 기계처럼 답을 다는 게 달갑겠어?
나 홀로 만든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크루와 백만 구독자를 달성했을 때도, 그리고 함께 회사를 만들었을 때도, 소통 하나는 누구보다 끝내주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나는 이 조직의 리더로서 지금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매 순간 조직원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부터 해치우다 보면 언젠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애물들이 다 걷히고 성공을 향한 열린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한참 달리다 보니 조직이라는 건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인형의 집이 아니라, 때마다 조금씩 손보며 가꾸어나가야 하는 살아 있는 정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만 명 중 반의반밖에 안 남은 구독자를 보며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괜찮다고 해야 하는 건지, 나라는 그릇이 여기까지니 차라리 회사를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나을지, 정답 없는 질문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다. 묘하게 이어지지 않는 직원들과 나 사이의 동상이몽은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그냥 회사원이던 시절, 늘 조직 안에서 내 가치를 증명하며 리더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가 되어보니 이 세계에선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서로에게 증명해야만 같이 살아남는 거였다. 가장 최악의 상황, 나는 직원들에게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