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가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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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 크루 온라인 교환소
까만 화면에 배너가 반짝반짝 빛나고, 그 아래에는 언니가 설명한 대로 정보 기입란만 몇 개 있었다. 아주 간단한 디자인의 사이트. 집에 돌아와 찬찬히 다시 봐도, 더 살펴볼 것도 없을 만큼 딱 설명한 게 전부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내온 언니고, 믿을 만한 회사의 대표라지만 세상이 흉흉한데 뭘 믿고 이런 데 함부로 내 정보를 남기겠어. 어디 개인 정보 유출돼서 사기당하는 건 아닐까. 한참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닫고 한숨을 쉬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니, 분명 빈 천장을 보고 있는데 왜 눈앞에 숫자들이 아른아른한 건지. 나도 모르게 입술이 샐쭉 나온 걸 느끼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곧이어 울리는 알림음에 핸드폰을 보니 샘플 요청했던 공장에서 연락이 왔다.
수원 공장 정 실장님| 대표님, 이번에 보내드린 샘플 검토하셨을까요?
시계를 보니 아직 근무 시간이었다.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하는 게 낫겠다 싶어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최라희입니다.”
“네, 최 대표님. 기획팀 연락드리니 오늘 외근이라고 하셔서 문자 남겼는데 미팅은 잘 마무리하셨어요?”
“네. 근데 제가 사무실로 안 가고 바로 집으로 와서요. 샘플 도착한 거는 들었는데 확인을 못 했어요. 아마 내일이나 내일모레 직원들이랑 검토하고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기획팀에서 대표님한테 연락하라 해서 메시지 남겼던 건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쉬움이 가득 섞인 목소리. 정 실장은 내가 단번에 답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전화를 한 듯싶지만, 물건도 안 보고 어떻게 결정을 할까.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모르나? 그보다도, 나한테 연락하라고 했다는 사람은 누구야. 박 팀장인가? 박 팀장이 그렇게 대책 없이 나한테 전화하라고 했을 리는 없는데. 내가 아무리 최종 의사 결정권자여도 그렇지, 회사에 있는 사람이면 내가 샘플 확인을 못 한 상황이라는 거 정도는 알지 않아? 뭐 이렇게 융통성 없게 일을 하는 거야. 네가 대표니까 알아서 다 하라는 거야 뭐야. 진짜 황당하네. 사무실에 안 나가면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잖아?
“늦어져서 죄송해요. 자꾸 샘플만 수정 요청해서 죄송하고요…. 이번에는 진짜 꼭 결론 내서 연락 빨리 드릴게요.”
“네, 이게 샘플이 픽스되어야 저희도 견적서를 확정할 수 있어서요. 아시죠…?”
슬며시 던지는 질문에는 결국 ‘돈 내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아마도 전화를 걸어 이렇게 재촉하는 가장 큰 이유가 돈 때문일 테니까.
“아, 네. 알죠. 내일 꼭 연락 다시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지금 내 몸이 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다고 해서 업무에서 벗어날 순 없다. 내가 사장이니까. 내가 대표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벌인 일이고 최종 수습도 결국 내 몫이니까. 사업은 어쩌면 남들 일할 때는 물론이고, 남들 놀 때도 일하려고 벌이는 거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전화가 다시 또 울렸다.
“네, 최라희입니다.”
“대표님, 저 회계팀 수민인데요.”
“네, 이 팀장님.”
“내일 급여일이라서 미리 정산하고 있는데, 생산 쪽 대금 언제까지 미룰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샘플비 지급하면 급여 지급이 어려울 듯싶어요.”
“아….”
내가 탄식을 내뱉으면 안 되는 위치라는 걸 너무나 잘 알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확인한 현재 자금 상황에 마음이 급해졌다. 탄식을 듣고 있는 수화기 너머의 직원도 할 말이 없으니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안 그래도 방금 실장님이랑 통화했어요. 내일은 샘플을 확정 지어야 하니 아마 금주에 견적 비용 지출돼야 할 거예요. 급여는… 일단 먼저 처리해 주세요. 이번 달부터 인턴들 다 정직원 전환되었죠?”
“네. 세 명이요.”
“필요한 금액 정리해서 카톡으로 보내주세요. 1시간 내로 다시 답변 드릴게요.”
“네…. 저 근데, 대표님.”
어딘가 꽤 무거운 말투.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아직 듣지도 않았는데 그다음 말이 두려웠다.
“네, 말씀하세요.”
“가수금으로 처리하시려는 거지요?”
“어,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할 거 같아요. 개인 계좌에서 법인으로 입금할게요.”
“가수금 이미 좀 있어서 이거 다음 분기 전에는 정산해야 해요. 계속 쌓이면 재무제표에도 안 좋아서…. 일단은 참고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금액 정리해서 카톡 보내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그대로 테이블에 툭 올려두었다. 대단히 힘을 쏟아야 하는 논쟁을 벌인 것도 아닌데 힘이 쭉 빠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본금 좀 더 모아서 시작할걸. 아니야. 이미 끌어당길 수 있는 만큼 모았는데 예상처럼 일이 안 굴러가서 이렇게 된 거지. 회계 공부를 더 해야 했을까? 전에 회사 다닐 때 경영 기획팀이랑 더 친하게 지낼걸. 절친이라도 하나 만들어둘걸 그랬다. 어쩜 봐도, 봐도 회계는 놓치는 게 생기는지. 일하다 보면 결국 놓치는 것 천지였다. 그나마 회계팀 직원이 믿음직스러워서 다행이란 생각도 잠깐, 이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얼마나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드니 닫아버린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다시 노트북을 끌고 와 펼치니 닫기 직전의 화면이 보였다. 은행 가기에는 틀려먹었고, 지금 해결하려면 지인 찬스뿐인데 어차피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릴 거라면 그전에 속는 셈 치고 한번 테스트나 해보자. 이제 정보 유출이고 그런 거 신경 쓸 처지가 아닌 것 같다. 시간이 엄청 필요한 것도 아니니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조심스레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적었다. 곧이어 메시지 알림도 울렸다.
회계팀 수민| 대표님, 임직원 일곱 명 19,653,650원입니다.
| 1천만 원 정도만 메꾸면 될 듯합니다.
| 이번 달도 대표님 월급 무급 신고하면 될까요?
나| 네, 그렇게 해주세요. 1시간 내로 입금할게요.
답장을 보낸 뒤, 반짝반짝 배너가 빛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교환 희망 금액
짧은 시간, 조금 더 고민하다 결국 숫자 키를 하나씩 눌렀다.
10,000,000원
입력하니 금액에 따라 환산된 팔로워 수가 자동으로 계산되어 화면에 떴다.
10만 명의 팔로워가 차감됩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속는 셈 치고 해보는 거지. 뭐, 안 되면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야 하니 책장에 처박아둔 명함집을 꺼내 와야겠다. 마른침을 삼키고 ‘등록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한동안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지만, ‘신청 완료’ 이외에 다른 화면이 뜨지도 않고 핸드폰도 조용할 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 2분 정도를 더 그렇게 있었더니 혹시나 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요행을 바라면 안 되지. 이렇게 돈 버는 법이 어디 있겠어. 헛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집을 찾으러 방으로 향했다.
책장 한구석에 꽂힌 명함집. 오랫동안 손이 닿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그만큼 명함집 속 사람들은 꽤 오래된 인연들이라 연락을 받을지 모르겠다. 그냥 친한 친구들에게 한 번 더 부탁하는 게 나을까 싶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함집을 들고 다시 테이블로 나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대로인 노트북 화면을 힐끔 보고는 테이블 구석으로 밀었다. 한 손으로 명함집을 넘기며 다른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켜보니 은행에서 알림이 와 있었다.
신우은행| 16시 45분 교환소 10,000,000원 입금
알림을 보고도 믿기지 않아 은행 앱에 들어가 잔액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보며 자릿수를 확인하니 진짜 문자 그대로 들어와 있는 1천만 원의 돈. 얼떨떨한 마음을 뒤로하고 바로 노트북을 끌고 와 유튜브에 접속했다. 지난달 기준으로 백만 명이 넘었던 팔로워 수가 지금은 90만 명이 조금 넘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줄어든 건 확실하다. 하루아침에 10만 명이나 빠져나갈 만큼 내가 사고 친 건 없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어도 언니 말대로 교환소는 명확히 제시한 조건대로 등가교환을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