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무게
리더의 무게
강연이 끝나니 수업 인증서를 받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졌다. 그사이에 몇몇은 지금이 기회다 싶은지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수업 중 너무 파격적인 의견을 제시했던 탓인지 내 명함을 달라고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어차피 큰 도움을 주고받기에 나는 너무 새내기 대표이니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밀린 일들이 떠올라 인증서를 받고 어서 카페로 가서 결재 서류나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라희야! 너 라희 맞지?”
고개를 다 돌리기도 전에 눈앞에 훅 나타난 손에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때 같은 유튜버 기획사에 소속되어 친하게 지냈던 나미 언니였다. 사람들 사이를 잘도 헤치고 다가와서는 덥석 손부터 잡고 반가운 듯 흔들었다. 언니도 유튜버 하면서 사업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야, 아까 너 보고 엄청 놀랐어. 너도 온지 몰랐지.”
“언니도 프로그램 이수 중이에요?”
“나도 사무실 이 근처니까! 뭐야. 이번 기수였으면 같이 다닐걸!”
낯선 이들 속에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서 한껏 신난 듯했다. 그러자 내 앞뒤로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당황스러움에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시선이 느껴지니 이대로 있기는 민망해 내가 나서서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저 인증서 받고 1층 카페로 갈게요. 먼저 가 있어요. 시간 있으면 차 한잔해요!”
“그래. 먼저 가 있을게. 천천히 와!”
잠시 후, 커피숍으로 가보니 이미 언니가 앉은 테이블은 커피뿐 아니라 오만 일거리로 가득했다. 펼쳐진 노트북과 업무 수첩, 그 위에 쌓인 서류들. 그리고 내가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핸드폰까지. 누가 봐도 딱 청년 사업가였다. 이런 사람을 보고 ‘진짜’ 청년 사업가라고 해야 맞는 거지. 초짜배기 사장인 나랑은 확연히 달라 보였다.
“언니 왜 이렇게 바빠요? 전화 끊으면 또 오고, 끊으면 또 오고. 제가 시간 뺏은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야. 점심시간이니까 이제 좀 여유 있을 거야.”
“난 언니도 왔을 줄 몰랐지. 이미 회사 세운 지도 꽤 되었고 자리도 잘 잡은 것 같았는데 웬 지원 사업?”
“사업에 자리 잡는 게 어디 있어. 온통 가시밭길이지. 알고 지내는 대표 중에 열이면 열 다 자기 죽겠다고 하지, 살 만하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
“하긴 뭐. 숨만 쉬어도 돈 들어오는 거 아니면 다들 뭘 하든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는 너는 뭐야. 난 너 회사 그만뒀다는 거 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그만둔 거야?”
“왜 소문인 줄만 알았어요?”
“회사 지겨워도 월급 포기 못 하겠다며! 지난번 물어봤을 때도 얼마나 단호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야.”
언니가 해주는 이야기에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맞는 말이다. 회사를 다니는 게 맘에 들진 않았어도 이 회사를 박차고 나갈 일은 없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단언하고 다녔던, 그랬던 때가 있었다. 회사 대표는 아무나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같이 즉흥적인 사람이 사장이 되면 직원들 굶어 죽이기 딱 좋으니, 세상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 어쩌다 넘어선 안 될 강을 건너버렸는지, 이젠 돌이킬 수 없이 멀리 왔다.
“유튜버 하면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좋았어요. 편집 맡은 친구들이 점점 전업으로 전환하길 바랐는데, 계속 같이 일하려면 제가 결정을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 사람들 믿고 지른 거죠. 저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네요.”
“넌 믿을 게 없어서 직원을 믿어? 너를 믿는 것도 아니고? 와, 대단하다.”
“워낙 오래 같이 했으니까…. 언니도 예전 편집자들 지금 회사에 그대로 있지 않아요?”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고…. 야,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을 수가 없어요.”
말을 하며 언니는 어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가 알고 있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언니는 통통 튀는 사람이었는데, 3년 차 회사 대표가 된 언니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한층 달라진 언니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그래도 언니네 회사 정도면 규모도 크니까 다들 커리어에 도움이 되잖아요. 오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전부 사장 생각이지. 막상 직원들 생각은 그렇지도 않아. 옛말 틀린 거 없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야.”
언니는 어딘가 더 단단해졌고, 한편으로 끝없이 시니컬해진 것 같았다.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유튜브 화면 속의 언니와는 분명 달라졌다.
“너도 직원 관리 잘 해.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이더라.”
“우리 애들은 다 착해서 괜찮아요.”
“회사에 착한 사람이 왜 필요해. 아까 말할 땐 똑순이 같더니만 순 맹탕이구나, 너.”
언니는 사람들을 각각의 부류로 나눠서 구분하는 듯 말했다. 이 언니가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단정 지어 말했던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지?
“뭐 직원들 때문에 신경 쓸 일 있어요?”
“사람은 세 명만 모여도 정치라는 걸 해요. 내가 직원도 아니고, 대표가 되면 사내 정치 때문에 머리 아플 일은 없을 줄 알았거든? 와 근데 이건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문제야. 환장한다. 너도 곧 겪게 될걸.”
“저희 회사는 아직 몇 명 없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나이도 다들 비슷하고, 생각도 비슷하니까.”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생각이 비슷해. 그거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개를 내저으며 테이블에 있던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는 언니를 보며 꽤 사람들에게 치였구나 싶다가도, 회사 생활을 한 번도 안 겪고 대표가 된 거라 더욱더 힘들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와 관계없이 조직의 일원으로 일해봤다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바라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을 텐데. 아까 내가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직원들에게 가장 좋은 소통 방법이라고 말한 것도 실제로 내가 직원일 때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대표는 자기 돈으로 회사를 만들었으니 돈을 버는 게 목표고, 직원은 계약 조건에 명시된 대로 일을 하고 정해진 월급을 받는 게 목표이니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가길 바라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됐다. 다만 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난 오래 보아온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또 우리 팀원들은 회사를 만들자고 오히려 먼저 제안한 사람들이니까. 다르겠지, 좀 다를 거야.
신기한 건, 언니는 사람에 대한 피곤함을 토로하면서도 더 이상 직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꺼내놓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조직 생활에는 서툴러도, 결국 회사에 대한 직원의 불만이 언젠가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걸 아는 어엿한 대표 같았다. 어쨌든 언니의 고민은 나 같은 신출내기 대표에게는 그저 배부른 고민처럼 느껴졌다. 회사가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자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게 당장 급급하지 않으니 저런 고민을 하는 거지. 나는 교육 점수 맞춰서 지원금 신청하려고 여기 온 거니까.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하느라 언니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고, 그걸 본 언니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때? 회사 운영해 보니까 할 만해?”
“운영할 만한 회사가 어디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인데….”
“난 그냥 다 싫고 돈 많은 백수나 하고 싶다.”
“최고죠. 돈 많은 백수. 최고의 꿈이다. 나도 돈 많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지는 게, 숨기려고 해도 마음처럼 자금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충 모양만 갖춘 제품을 내놓자니 여태껏 쌓아 올린 백만 유튜버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고, 이걸 버티려니 자금이 계속해서 모자란다. 직원들 월급이랑 식비, 샘플 생산비에 사무실 임대료, 공과금까지. 가만히 숨만 쉬고 유지하려는 데도 이렇게나 돈이 많이 든다니.
“자금 사정 어려운가 보구나?”
그저 한탄만 내뱉었을 뿐인데, 정곡을 콕 찌르는 언니. 앞서 걸어본 길이라서 뻔히 보이는 건지, 아니면 사람 보는 눈이 도가 터서 척 보면 딱인지.
“자금은 뭐…. 쉽진 않네요.”
“일단 버텨. 버티면 다 때가 온다.”
“알죠. 아는데 그 버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습관처럼 입술을 앞으로 삐죽였다. 그걸 알아차리고 다시 꼭 다물 땐 이미 마주 앉아 있는 언니가 씩 웃으며 나를 귀엽다는 듯 보고 있었다.
“내가 웬만하면 안 알려주는 방법인데, 너는 알아서 잘 할 거 같으니까 괜찮은 자금줄 하나 알려줄까?”
“자금줄?”
“기다려봐.”
말을 끝낸 언니는 테이블에 올려놨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혼자 한참을 두드리더니 보여주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화면을 끄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내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내가 메시지 하나 보냈는데, 집에 가서 한번 봐봐.”
“이게 뭔데요?”
핸드폰을 집어 들어 메시지를 보니 언니로부터 URL 하나가 덜렁 와 있었다. 발신자에 언니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더라면 스팸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듣도 보도 못한 URL이었다.
“아, 집에 가서 보라니까.”
“아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뭔지는 알려줘야 보든지 말든지 하죠.”
의심이 잔뜩 끼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니 언니는 혼자 낄낄 웃어댄 후에야 술술 이야기를 풀었다.
“팔로워 백만 명 이상인 인플루언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온라인 교환소야.”
“온라인 교환소?”
“나도 아는 사람한테 소개받은 거라 어디서부터 시작돼서,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는 잘 모르는데 확실한 건 담보 대출도 아니고, 신용 대출도 아니고 아는 사람만 아는 교환소야.”
“뭐를 교환하는데요?”
“팔로워랑 현금이랑.”
“에엥?”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내 입에서 오묘한 소리가 나왔다. 그런 반응도 예상했다는 듯 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 명당 100원이야. 최소 기준은 1만 명. 사이트에 들어가서 네 유튜브 계정 아이디 넣고 계좌번호 입력하고 교환할 팔로워 수만 입력하면 끝. 몇 분 안에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고 다음 날 팔로워 수는 줄어들어 있을 거야.”
“그게 된다고요? 진짜로? 아니 왜?”
말도 안 되는 프로세스에 질문을 마구 쏟아냈지만, 그녀의 대답도 어디 하나 명확한 구석이 없었다.
“모르지. 나도 전해들은 거라 정확히 모른다니까. 근데 해보니까 되긴 돼. 진짜 돈이 들어오더라고. 팔로워도 그냥 줄어들기만 하고 뭐 없어. 악플이 달리는 것도 아니고. 그 뒤로 돈을 갚아라 하는 것도 없이 조용하더라고. 그래서 아주 급할 때 사용했었지. 지금은 안 쓰지만.”
“에이, 그럼 도움 없이도 사업이 잘 굴러간다는 말이네. 언니, 부럽다.”
“이게 네 사업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네가 직접 해봐야 알 테니까 일단 해봐. 손해 볼 건 없잖아. 너도 어차피 사업하는 입장이면 투자라는 개념을 모르진 않을 텐데.”
도통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언니의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그저 부딪혀 보라는 말인 듯한데 그 뜻을 내가 다 알 길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