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청년 창업가 (19/25)

청년 창업가

청년 창업가

학교를 졸업한 게 언제였더라. 손가락을 접어가면서 세다가 말았다. 이걸 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대충 생각해 봐도 이미 10년이 훌쩍 넘는 게 확실한데. 마치 학교에 등교한 학생처럼 반듯하게 줄 맞춰진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수업을 듣고 있으려니 자꾸만 딴생각이 든다. 수업을 열심히 들을 생각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그냥 시간을 채우려고 앉아 있던 터라 손에 든 펜을 두어 번 휙휙 돌려보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해야 할 일들을 종이 한 귀퉁이에 쓱쓱 적어 내렸다.

○ 콘텐츠팀 4주 차 기획안 검토

○ 틴트 5차 샘플 체크, 점도 확인

○ 팔레트 금형 샘플 확정

○ 회계 정산, 부가세 신고 검토

○ 10월 임직원 급여 신고

써 내려가다 마지막 항목이 마음에 걸려 생각의 흐름이 더 뻗어 나가지 못했다.

○ 10월 임직원 급여 신고

한 번 더 밑줄을 그으며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이번 달에도 제품 출시가 미뤄졌는데 자본금은 떨어져 가고, 수익은 없으니 어떻게 채워야 하지. 법인 대출 상담이라도 받으러 가야 하는 건가. 은행 미팅 약속을 잡아달라고 회계팀에 얘기해야 할까.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톡톡톡 치며 생각에 빠지니 반복되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거기, 모자 쓰고 흰색 블라우스 입으신 대표님?”

눈빛은 이미 집중력을 잃은 지 오래였고 턱까지 괴고 삐딱한 자세로 수업을 듣다가 콕 집어 나를 부르는 강연자의 목소리에 헛기침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네.”

“우리 대표님, 직원과 소통을 위해 어떻게 하시나요?”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는 지금 창조경제센터에 있고,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중소기업 창업가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러 왔다. 앞뒤 양옆에는 각각 회사 대표라는 공통점 이외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나이도 다르고 업종도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고로 이 강의는 다양한 대표들을 아우르는 강의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풀어놓고 있었다. 질문을 듣고 시선을 살짝 올려 강사 뒤로 보이는 화면 속 제목을 힐끔 읽었다.

[젊은 기업을 위한 조직 커뮤니케이션]

젊은 기업이라. 한 번 더 오늘 수업이 지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내 옆에 앉은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분이나 앞에 앉은 머리가 서서히 하얗게 변해가는 사장님까지, 모두 소위 꼰대 소리 안 듣고 좋은 대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이 수업을 듣고 있겠지만, 강의를 듣는다고 해결될 문제라면 애당초 MZ세대라는 말도 없었을 거다. 우리 또래 애들을 묶어서 세대가 다르다며 선 그을 필요 없었을 테니까.

“저는 소통을 위해서 직원들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나는 답답함을 엉뚱한 대답으로 표현했다.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더 여쭤봐도 될까요? 대표님?”

“직원들은 업무상 필요하면 말을 할 테니까 대표는 먼저 말을 안 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회사에서 굳이 일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직원들은 없을 테니까요.”

“와. 역시 젊은 대표님이셔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한 대답이네요.”

내가 어떤 대답을 했어도 강연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앞에 서 있는 강연자의 리액션이 아니라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야 진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다소 도전적인 대답에 누군가는 위아래로 나를 흘겨보았고, 누군가는 감탄하며 빈 노트에 감상을 끄적였다. 이 각기각색의 인간 군상들이 ‘청년 사업가’라는 이름으로 모여 강의를 듣는 것이 세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말 도움이 될까? 어차피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정부 예산으로 만든 프로그램이라면 대표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모름지기 회사를 굴릴 자본일 테니 차라리 직접 현물 지원을 해주는 게 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렇게 아쉬움을 말하는 나도 완벽한 대표는 아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대표들이 모두 하나같이 꼰대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다. 모두 다 마음만은 젊은 대표로서 직원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고, 좋은 마음으로 같이 성장하길 바라며 강연을 듣고 있겠지. 그래도 사람이란 늘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판단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이 어떤 이에게는 좋은 대표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상 최악의 빌런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다들 그저, 자기 직원들에게는 꽤 괜찮은 대표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거지.

회사를 차린 지 고작 몇 개월. 처음엔 이렇게까지 사업을 펼칠 생각이 없었는데 조금씩 욕심을 더 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대학 시절 취미로 시작했던 블로그를 꾸준히 운영한 덕분에 사람들의 인정을 얻었다. 또 우연히 영상 편집 수업을 듣고 시작하게 된 유튜브 덕분에 화장품 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전부터 채널 운영을 같이 하던 크루가 있어 회사에 다니면서도 꾸준히 유튜버로 활동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채널이 성장하고 구독자 수 증가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크루는 조직이 되었고 작은 개인 회사로 성장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을 텐데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재미에 빠져버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시작은 공구 마켓, 그 뒤에는 브랜드 콜라보와 브랜드 기획까지. 나는 색조 화장품을 좋아하는데 회사에서는 스킨케어 제품만 줄기차게 맡기니 결국 원년 크루의 응원과 부추김에 힘입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내 사업에 뛰어들었다. 나는 백만 명의 선택을 받은 믿을 만한 유튜버니까, 내 이름 걸고 소개할 수 있는 품질 좋고, 성분 좋은 색조 화장품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직접 회사를 차리고 나니, 그제야 회사원이 얼마나 값진 직업인지 절실히 다가왔다. 들쑥날쑥 예측되지 않는 수입이 아니라, 일정한 날짜와 시간에 정확히 약속한 만큼 입금되는 월급. 그리고 그 월급이 주는 안정감. 매일 봐서 지겹고, 가끔은 헛소리를 해서 화도 나지만 내일 또 만날 동료가 있다는 소속감.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커피를 수혈해 주지 않으면 숨도 쉴 수 없을 것 같은 피곤함에도 꿋꿋이 출근함으로써 유지되는 인간다운 생활 리듬. 이 모든 걸 다 내던지고 멋진 CEO가 될 줄 알았는데, 그 끝엔 ‘대표이사’라고 쓰고 ‘이 구역의 빌런’이라고 읽는 이름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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