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숍
워크숍
“나 가운데 타도 안 불편하면, 내가 가운데 탈게.”
순전히 호의로 한 말이었다. 팀장 직급이 운전하는 차를 회장님처럼 편히 타는 게 편치 않아서 세 명이 타야 하는 뒷자리를 택해 물어본 것인데, 질문을 받는 당사자가 대리와 사원이라니. 순전히 호의로 내뱉은 말도 팀장이란 내 직급 탓에 순식간에 말 돌려 지적하는 꼰대가 되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가운데 탈게요. 대리님이랑 팀장님이 창가에 앉으세요.”
손사래를 치며 가운데에 앉겠다고 나서는 재희를 보니 더 되묻기도 애매했다. 다시금 반복해 물어보면, 더 못된 상사가 될 거란 걸 알았으니 그냥 포기하고 재희의 요청대로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은 홍보 팀장이 시동을 걸며 한숨 쉬기에 뒤에 앉은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좁게 타고 가도 우리끼리 가는 게 낫지요?”
“아우, 당연한 소리야. 대답하기도 귀찮아. 그래도 1박 하자는 거 겨우겨우 설득해서 당일치기로 밥 먹고 끝나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이 망할 놈들 비위 맞춰서 평상 있는 계곡 식당 구하느라 진짜 개고생했다고. 평상 철거된 지가 언젠데, 뭐 그런 걸 찾아오래. 아오. 진짜 하여간 별 고까운 짓거리는 다 해요. 다.”
출발 전부터 한숨 짓는 차 팀장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옆에 앉은 인사 팀장에게서 돌아왔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한바탕 한풀이를 하더니 그새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 듯싶다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늘 투덜거리는 스타일인 걸 뻔히 알고 있으니, 지금 말을 걸어달라는 표시인 것 같아 선심 쓰는 척 말을 걸었다.
“전 팀장님,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침에. 아… 아니야. 됐어.”
말을 하려다 말아서 늘 수면 위로 남의 속마음을 끄집어내는 데 도가 튼 내가 결국 총대를 멨다. 어차피 지금 들어주지 않으면 전 팀장은 오늘 하루 종일 툴툴댈 위인이었다.
“아, 팀장님. 이미 말씀하시려고 맘먹은 거 같은데 그냥 시원하게 털고 가세요. 어차피 그런 얘기 하려고 편한 사람들끼리 가는 건데.”
앞자리 시트를 두들기며 부추기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고 팀장이 아침부터 대뜸 나한테 시비를 걸잖아. 하루 이틀 아니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월권까지 2연타 치고 나오니까. 하, 나도 표정 관리 안 되더라고.”
“고 팀장님이 왜요?”
사업 본부장과 같은 라인을 타고 있는 고 팀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빌런이었기에 가만히 운전만 하던 차 팀장까지 조심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침에 대표님이 개인 미팅 끝내고 바로 워크숍 장소로 시간 맞춰서 오신다는 거야.”
“잘됐네. 자기도 의전 안 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아니, 근데 그 말을 전하면서 끝에 ‘어떻게 인사 팀장이 대표님 일정도 모르세요?’라는 말은 왜 붙는 거야? 아니, 내가 비서도 아닐 뿐더러 이거 지금 왜 자기한테 말 안 했냐고 따지는 거잖아. 정작 제일 먼저 알고 얘기한 건 자기면서…. 아니지? 이거 지금 자기가 나보다 먼저 알았다고 티 낸 거잖아? 더 어이가 없네?”
전 팀장은 늘 말 안 할 것처럼 굴다가 결국 혼자서 술술 속내를 드러내는 편이었다. 늘 입꼬리가 축 내려가 있는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보면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했다. 뒷모습만 보여서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제 어떻게 해야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의 장단에 맞춰 리액션만 적절히 해주어도 에피소드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졌다.
“자기가 팀장님보다 대표님이랑 친하다 뭐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아니, 그리고 인사팀은 난데 왜 자기가 사람을 더 뽑니 마니 하고 있냐고. 대표님이 사람 뽑게 정부 지원 사업 알아보라고 했는데, 왜 보고 안 하냐고 묻더라? 내가 보고를 안 해서 홍보팀 사람을 못 뽑는 거래. 아니, 지가 인사팀도 아니고 마케팅 담당자면 자기 일이나 할 것이지. 내가 대리, 사원도 아니고 같은 팀장인데 일을 하네, 마네. 뭔 평가질이야. 한국대 나오면 다 그래? 아주 다 자기 발밑이야?”
“대표님도 똑같잖아요. 뭘. 대표님 학벌에 대기업 좋아하는 거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차 팀장 역시 자기 팀 이야기가 나오니 운전대를 잡고도 대화에 열심히 참여하며 말을 거들었다. 그녀 역시 고 팀장의 학벌 때문에 사내에서 크게 민망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 발끈했을 것이다.
“대표님은 직원들 이름은 모르고 출신만 기억하시니까. 그냥 저보고 ‘한국대’라고 부르시는 바람에 제가 한동안 이름이 없었잖아요.”
“차 팀장, 그래도 자기는 전에 ‘프레아’ 출신이라 가끔 대표님이 ‘프레아’라고 불렀잖아. 들어올 때부터 팀장이고. 나야 말로 학교도, 대기업 경력도 없어서 이름이 없었지. 난 ‘야’였어. 야.”
“그런 거 보면 강 팀장님은 진짜 대단하세요. 그 틈바구니에서 승진하고, 팀장까지.”
“강다영이 독하긴 하지. 고 팀장이랑 대놓고 싸우는 애도 쟤밖에 없을걸. 아무튼, 고 팀장은 진짜 맘에 안 들어. 진짜, 진짜 너무 짜증 나 죽겠어. 화딱지 나서 대학원을 가든지 해야지.”
열변을 토하는 두 팀장 뒤에서 대리와 사원을 끼고 앉아 있으니 이렇게 대놓고 관리자들이 회사 욕을 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어 옆자리에 앉은 재희와 최 대리를 바라보았다. 최 대리는 이미 창밖을 보며 마음을 집으로 보내둔 듯했고, 재희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입술을 뜯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재희의 눈을 바라보니 오늘 아침의 기억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나 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니 사람들이 없을 때 이야기해야겠다 싶어 목적지까지 모른 척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워크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선발대로 먼저 온 사업 본부에서 평상 위에 직원이 앉을 자리를 하나하나 다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제일 상석에 대표 자리를 두고 그 양옆으로는 핵심 부서를 가까이에 배치해 놓았다. 정확히는 먼저 도착한 사업 본부와 마케팅팀의 자리. 먼저 왔으니 그 정도는 이해한다지만 테이블마다 팀과 상관없이 여직원 자리를 마련해 놓은 건, 대체 무슨 근본 없는 센스인가. 모두 차에서 내려 영업팀 사원에게 테이블 자리 배치를 듣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고 팀장에게 가서 또 한바탕해야 하나 싶다가 옆에 있던 재희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재희 씨.”
“네, 팀장님.”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아, 네.”
“저, 옆에 가서 커피랑 음료수 좀 사 올게요!”
‘이제 이 정도의 분란은 니들이 알아서 해결해라’란 마음으로 직원들에게 호기롭게 말을 던지고, 재희에게 따라오란 손짓을 했다.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재희와 말없이 눈짓을 주고받은 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어디에 있을지 모를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재희는 여전히 생각이 많아 3초에 한 번씩 주제를 바꿔가며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가는 밥 먹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 큰일을 치를 것만 같았다.
“재희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별일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 아까 보니까 차에서부터 입술 엄청나게 뜯고 있던데?”
“아…. 습관이라서요.”
“잔소리 같겠지만, 그거 진짜 안 좋으니까 웬만하면 습관 고치려고 해봐요.”
“네….”
조용히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꼭 닫고 고민에 빠지려는 재희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까 좀 불편했죠?”
“네?”
“개인적으로 팀장 이하 직원들 앞에서는 회사 욕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하는데, 뭐 워크숍 가는 길이기도 하고 다들 최 대리나 재희 씨나 믿고 편해서 이런저런 얘기 다 했네요. 너무 신경 쓰거나 머리에 담아두지 마요. 아직 회사나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기에는 그간 회사 생활이 너무 짧으니.”
“저, 사실 아침에 고 팀장님이 면담 요청하셨거든요.”
재희의 머릿속이 고 팀장과의 대화로 가득 차 있는 건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담아두지 말라고 내가 말 꺼낸 거니까 이제 시원하게 말해주겠니? 평소답지 않게 속마음을 그냥 툭툭 내뱉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물었다.
“뭐 특별한 얘기하시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제가 회사에 좀 일찍 출근하잖아요. 팀장님이 일러주신 것도 있고, 대표님도 일찍 나오면 좋게 봐주시는 거 같고. 오늘도 8시쯤 출근해서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는데, 딱 제 자리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를 받았더니 대표님이었어요.”
“대표님이요? 재희 씨한테?”
대표가 들어온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신입 사원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쓴다고? 나야 우리 팀이니 나쁠 게 없다. 허나 늘 연줄에 연연하는 사업 본부나 마케팅팀 사람들에게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이야기의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전화 받아보니까 일찍 와 있을 거 같아서 제 번호로 걸어봤다면서 미팅 갔다가 워크숍 장소로 바로 갈 거니까 그렇게 전하라고….”
“고 팀장님한테?”
“아, 아니요. 딱히 누구를 콕 집어 이야기하신 건 아니라서 그냥 일찍 오시는 분께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고 팀장님이 출근하시더라고요. 무슨 전화냐고 물어보셔서 그냥 통화 내용을 얘기해 드린 것뿐인데…. 인사 팀장님께 그런 식으로 전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고 팀장은 우리 팀 신입한테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마치 자기가 들은 것처럼 말해서 인사 팀장 속을 긁어놨다는 거잖아?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아니, 근데 고 팀장님이랑 면담했다는 건 뭐예요?”
“대표님 워크숍 장소로 바로 오시는 거 내부에 공유하라고 했다고 말씀드리니까, 제 번호로 전화해서 말씀하신 거 맞느냐고 계속 확인하시더라고요. 약간 뭐라고 해야 하나…. ‘대표님이 너한테 전화를 했다고?’ 이런 느낌이요! 그러다가 본부장님이 곧 오셔서 두 분이 사업 본부 쪽에서 한참 이야기하시더니 옥상으로 따라 올라오라고 하셔서 거기서 면담했어요.”
재희는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내뱉은 단어에 꽂혔다.
‘면담? 면담이 맞으려나….’
무슨 대화를 했기에 저렇게 헤매는 걸까. 내가 이어 물었다.
“가서 혼났어요?”
“혼난 건 아닌데, 잘 모르겠어요. 홍보팀 수연 씨 나가서 TF팀 힘드냐고 물어보셔서 그냥 좀 바쁘다고 했는데…. 팀장님도 기억나시죠? 지난번에 콘퍼런스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대표님이 흘리듯이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TF팀 인력 충원 때문에 지원 사업 알아보고 있다고.”
기억이 안 날 수가 없다. 그날, 우여곡절 끝에 콘퍼런스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회를 틈타 내가 나서서 홍보팀 충원을 요청했으니까. 평소 같았으면 직원 충원을 먼저 요청하지 않는 내가 말을 꺼내서인지, 대표도 바로 그 자리에서 답을 줬다. 정부 지원 사업으로 뽑을 거니 기다리라는 말. 분명 그 대답을 고 팀장도 들었고, 재희도 들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기억나죠. 제가 물어봐서 대답해 주셨던 거니까.”
“그때 고 팀장님도 같이 계셨잖아요. 그걸 기억하시는 거 같은데, 왜 전 팀장님한테 얘기를 그렇게 전달하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당장 다급한 업무 지시도 아니고 며칠이나 지난 이야기였는데….”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한참 풀어놓던 재희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더니 말을 멈췄다. 그사이 그녀 머릿속에는 고 팀장의 말 한마디가 반복해 맴돌았다.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거는 앞으로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그것만 하면 돼.’
얼마나 강렬하게 남았던 건지, 재희 속마음에서 흘러나오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표정까지도 얼핏 보였다. 아주 헛소리를 했구나. 네가 결국 남의 팀 막내를 데려다 놓고 정치질을 했어.
“다른 얘긴 안 하셨어요…?”
“어….”
대답을 머뭇거리는 재희 머릿속에 방금 전과 또 다른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사에서 제일 나쁜 게 뭔지 알아? 줄 타고, 정치질 하는 거야. 그런 거 안 하려면 일만 하면 돼. 사원은 시키는 대로만 해도 절반은 가요. 왜? 회사에 하도 이상한 사람들이 많거든.’
재희의 눈을 통해 들리는 고 팀장의 말에 내가 다 기가 찼다. 그는 여태껏 변한 게 없다. 내가 대리였던 시절, 그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전 팀장이 나에게 이 놀라운 저주를 물려주어 혼란에 빠졌을 때, 내가 자신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전혀 모르고 그저 사수가 나가서 끈 떨어진 연 보듯 나에게 말했다.
“팀장도 없는데, 네가 혼자 뭘 할 수 있어? 너 이 회사 얼마나 다닐 수 있을 거 같아? 회사 생활? 다 일 잘해야 오래 다니는 거야. 정치 이런 거 하는 인간들? 오래 못 간다.”
밑도 끝도 없이 던지는 당찬 말과 달리 속마음은 꽤나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 이 기집애가 팀장 되면 복잡해지는데…. 그전에 내 밑으로 라인 확 잡아야 하는데. 아 대표님은 왜 골머리 쓰게 여자애를 팀장 시킨다고 하는 거야!’
겉과 속이 판이한 그를 보며 처음으로 내 저주가 초능력임을 깨달았다. 아마 이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 팀장을 이겨먹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발악한다고 눈 깜짝할 거 같지 않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가 내뱉는 말이 머릿속 생각과는 영 딴판이어서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잘나서 불안한 마음에 괜히 으름장을 놓는단 걸 알고 나니, 그간 회사에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겁을 그날 야무지게 던져버렸다.
그 덕분에 나는 더 영악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를 먼저 제시해 선점하고 성과를 내 디자인 팀장이 되었고, 그 후엔 TF팀도 맡았다. 묘하게 마케팅팀의 영역까지 한 발 걸쳐놓고 일하면서 실적을 쌓아왔다.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단 한 번도 먼저 펼치지 못한 그는 억울하게 무능한 팀장이 되어갔다. 그러니 그 잘난 학벌에 더 기대어 연줄에 연연하고, 같은 한국대 출신인 본부장 라인을 탈 수밖에. 내가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꼽다고 생각하려나? 아니. 그 못돼먹은 생각을 여전히 고치지 못한 걸 보면 아직도 멀었다. 유치한 질투 때문에 고작 20대 중반인 사원을 이렇게나 또 괴롭히고 있다니.
“고 팀장님이 정치질 하지 말라고 하던가요? 대표님 지시 사항은 자기한테 보고하라고?”
“어…?”
재희는 자신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훤히 알고 있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정확히 예상했던 속마음이 또 들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생각했죠? 방금.”
“네….”
‘와, 소오름…. 나도 다른 사람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 회사 생활이 좀 편해지려나….’
뭐라고?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재희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신기하다’, ‘무섭다’, ‘놀랍다’가 아니라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네?”
“사람 생각을 알 수 있으면 회사 생활이 쉬울 거 같아요?”
“오오오! 어떻게 아셨어요?”
그제야 신기함에 호들갑을 떠는 재희. 그녀에게 솔직하게 대답해 주는 게 나을지, 아니면 예전에 나처럼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능력이 생기는 게 나을지 생각하다 지금은 결정할 수 없겠다 싶어서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강다영이 여잔데 그래봐야 얼마나 오래 가겠냐.’, ‘TF팀이 천년만년 가냐.’, ‘강다영이 너 챙겨줄 것 같냐.’ 이런 소리도 했네?”
“우와… 대애박….”
재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비밀을 알려주었던 다른 인턴들도 늘 같은 반응이었으니까. 그래서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그래, 고 팀장님이 흔들어서 고민돼요?”
“네? 아, 아니에요!”
극구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말하는 재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렇게 피곤한 조직인데도 여전히 남고 싶어요?
재희가 답을 하기 전에 기대를 잔뜩 했다. 그래도 너라면. 여태껏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다 잘 버틴 너라면 지금까지의 인턴이나 사원 들과 달리, 내가 기대했던 다음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재희의 대답은 ‘예’, ‘아니요’가 아니라 조금 특이했다.
“피곤하다기보다는…. 제가 사람들 의중을 잘 못 읽는 것 같아요. 눈치가 없는지 아니면 센스가 부족한지…. 눈치든 센스든, 부족한 게 채워지면 저도 좀 나아질까요? 팀장님?”
질문이 되돌아올 거란 생각은 못 했다. 나아지겠냐고? 센스를 채우면 나아지겠냐고? 여태까지 회사 생활을 하면서 봐온 사람들 중에 이렇게까지 생각과 말이 똑같은 사람이 있었던가. 하물며 인턴들도 어떻게 하면 집에 빨리 갈까 생각뿐이던데. 이 신박한 캐릭터는 대체 뭐지…?
“사람들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 상황이 바뀔 거 같아요?”
“뭐… 다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상상의 나래를 잠시 펼쳐보던 재희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더니 그 희망찬 눈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팀장님도 계시니까 더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네?”
“팀장님, 멋있어요. 일도 잘하시고 능력도 있으시고. 저 우리 회사 서브 브랜드 만든 거 대표님이나 고 팀장님 프로젝트인 줄 알았는데, 팀장님 작품이라길래 회사 들어와서 한 번 더 놀랐거든요.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싶어요!”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인데?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그녀의 말. 그리고 그녀의 속마음. 겉과 속이 완전히 똑같은 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윗사람이 없어야 더 크지. 내가 사람들 생각 읽는 법을 알려주고 갈게요. 그럼 재희 씨가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인정도 받고, 나보다 더.”
“음…. 그래도 팀장님 밑에서 계속 일하면 안 될까요? 저 아직은 팀장님 밑에서 배우고 싶어요!”
양자택일이 아예 불가능한 친구잖아? 재희의 대답에 모든 것을 떠넘기고 떠나려 했던 내 계획이 뒤엉켜 버렸다. 그러니 분명 난 실망하고, 좌절해야 마땅하다. 그만큼 이곳을 떠나고 싶었고,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마주한 재희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가슴이 뭉클해져 오는 건 뭘까. 누군가가 내 일을, 우리가 함께하는 일을 이렇게 진심으로 바라고 기대한 적이 언제였지? 시기, 질투, 경쟁 이런 것들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동료가 얼마 만이지. 여태껏 이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고 눈치 보며 지내오느라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대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 느꼈던, 설레고 새롭다는, 이제는 너무 낯설어진 바로 그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