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퍼런스
콘퍼런스
“안녕하세요.”
역시나 생기 넘치던 재희의 아침 인사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인턴 기간이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 수연도, 그전의 숱한 신입 사원들도 똑같았다. 각자 본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겠지만, 이 회사에 들어와서 생기를 잃지 않는 건 딱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나는 좀 더 두고 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회사 생활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더 버틸까 싶어 진득하게 바라보니 그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힘을 쏟으며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수연이 나가면서 재희는 진짜 막내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피곤에 치여 울상으로 출근해도 대표가 들어오는 9시 30분이 되면 환한 자본주의 미소를 가득 담아 인사했다. 위태로워 보이다가도 또 그냥 그렇게 잘 버티는 게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녀가 이곳에 어떻게든 남아서 내 굴레를 넘겨받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나는 벗어나서 좋고 본인은 지위를 얻어 좀 더 편해질 테니 서로 좋지 않겠어? 그러나 나날이 생기가 사라지는 게 눈에 보이니 한 사람의 인생을 내 멋대로 설계하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되기도 했다.
“재희 씨, 오늘 콘퍼런스 발표 자료 정리한 데까지 좀 봐요.”
일머리가 있는 건지, 아니면 상사어 통역 기능이 있는 건지 들고 온 자료를 보니 아침에 갑자기 떠안은 업무 치고 꽤 깔끔하게 자료를 정리해 왔다. 후배가 일을 잘하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이렇게 다른 팀이 무작정 넘겨준 일을 잘 해내면 오히려 화가 난다.
“잘했는데….”
“아, 정말요?”
“‘아, 정말요?’가 아니라 다음부터 이렇게 갑자기 업무 요청 들어오면 쳐내야지. 가뜩이나 주말 출근을 할 정도로 팀 업무가 많은데 오는 대로 그냥 다 받으면 우리 일은 언제 다 하지? 안 그래요? 다른 팀에서 일 시키면 무조건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나한테 보고를 먼저 하고 업무 지시 다시 받아서 하세요. 소속 정확히 보고 일해요.”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날까. 이 친구가 빨리 성장하면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춰야 할 판인데, 주변에서 날아오는 일까지 미련하리만큼 묵묵히 잘 해내는 게 우리 팀 막내라니 왠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걸 또 티 내기는 싫어 꽤나 사무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여기랑 마무리 부분 정리하고 자료 나한테 보내요. 어차피 출력해서 콘퍼런스에 들고 가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넘겨준 수정 자료를 마무리 짓고 출력해서 재희에게 전해주니 그대로 들고 마케팅팀으로 향했다. 우리 팀 직원이 남의 팀에 가서 보고하는 걸 보자니 영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고 팀장님, 자료 다 준비했습니다.”
“어, 나는 선발대로 본부장님이랑 먼저 갈 거니까 이따 대표님 모시고 오라고. 알았지?”
재희의 입에서 또 습관처럼 ‘네’라는 대답이 나올 게 뻔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 팀장을 먼저 불렀다. 그의 시선이 재희에서 내게로 향했고 나는 그 자리로 가 따져 묻기 시작했다.
“아니, 고 팀장님. TF팀 직원이 콘퍼런스에 왜 가나요? 하물며 팀장도 안 가는데, 사원이? 사업 본부라면 모를까.”
“아, 강 팀장은 얘기 못 들었구나. 대표님 지시 사항이잖아. 콕 집어 재희 씨가 오라는데 내가 뭐 어떡해?”
“아니, 하….”
고 팀장의 속마음이 그새 또 내 머릿속에 들려와 할 말을 잃었다.
‘대표님, 원래 그런 거 알면서 뭘 또 저래. 예민해, 하여간. 아주 거슬려. 맘에 안 들고.’
원래 그렇다는 걸 몰라서 토를 다는 게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뻔해서 반기를 들어봤지만 ‘대표님 지시 사항’이라는 회사 내 제1 원칙 앞에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 내버려 두고 일단 지켜만 볼지, 아니면 내가 나서서 막아주고 그나마 희망차게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할지 결정이 필요했다. 어떤 선택이 내가 이 회사를 탈출하는 데 더 나을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자리로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저 TF팀 강다영입니다. 오늘 콘퍼런스 선발대로 재희 씨도 같이 보내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제가 대표님과 후발대로 가겠습니다.”
사업 본부장이나 마케팅 팀장이나, 둘 다 우리 팀 막내 맡기기에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대표를 독대해야 하는 자리보단 낫겠지. 결국 내가 그 자리를 자처해 나섰다. 늘 새로운 여직원이 들어오면 한 번씩은 꼭 비서를 시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이건 대표의 악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서둘러 선발대 사람들이 발표장으로 향했고 30분 뒤 차가 준비되었다는 경비실 연락에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콘퍼런스 가실 시간입니다.”
“재희는?”
“아, 재희 씨는 업무를 익혀야 될 것 같아서 제가 본부장님하고 같이 먼저 보냈습니다. 제가 의전 하겠습니다.”
“아, 그래?”
가운뎃손가락으로 내려간 안경을 쓱 밀어 올리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나를 쓱 훑는 대표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아, 어린 여자애를 옆에 데리고 가야 젊어 보이는데…. 쩝, 이미 닳고 닳은 팀장은 영….’
예상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당황하지 않았다. 덕분에 최선을 다해 유지하고 있던 미소에도 변함이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 미리 준비된 차 문을 열자 대표가 올라탔다. 문을 닫고 조수석에 타려는 찰나 대표가 창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강 팀장, 어디 가? 옆에 타.”
“아, 넵.”
결국 반 바퀴를 돌아 반대편 차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그가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출발과 동시에 대표의 요구 사항이 하나씩 펼쳐졌다.
“어, 그 뭐지. 거, 그때 봤던 그, 그것 좀 줘보지.”
“네, 수출 자료요.”
짧지 않은 사회생활 동안 다양한 대표들을 만나봤지만 지금 대표는 유난히 지시대명사를 많이 썼다. 지시대명사로 시작해서 지시대명사로 끝나는 문장. 보통 센스가 있지 않고서는 그의 말을 해석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온 직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워 맞혀보려 해도 수수께끼 같은 지시 사항을 단번에 맞힐 수 없어서 다 같이 모여 토론을 펼쳤던 적도 있다. 그쯤 되면 다시 한번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가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듣기 위해서는 근본 없는 욕을 30분가량 바가지로 먹어야 했기에 웬만하면 사람들은 되묻지 않고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 가장 능통한 전문가가 나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한마디를 내뱉지만, 그전에 수만 가지 생각과 기억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 과정에서 문장을 정리하지 않고 생각난 대로 말하다 보니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나야 속마음을 들을 수 있어 언제나 그 고약한 성미를 척척 맞추었으니, 회사 사람들에게 귀신으로 불리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팀장님!”
콘퍼런스장에 도착하니 재희가 미리 나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대표 옆, 그러나 딱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내가 그녀를 발견하고 손 내리라고 조용히 손짓하니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코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손에 들린 물병을 보고 대표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대표님, 물 좀 드릴까요?”
“어, 그래.”
대표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생수병을 따서 그에게 전하는 재희. 그리고 뒤이어 건물 안에서 고 팀장이 나와 자리를 안내했다.
“아, 대표님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쯤 되면 알아서 하겠지 싶은 마음에 더 따라가지 않으니 두어 발걸음 이동하던 대표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와 재희를 바라보았다.
“너네는 왜 안 와.”
“아, 들어가겠습니다.”
대표의 재촉에 잠시 벗으려던 하이힐을 다시 푹 눌러 신고 발표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고 팀장과 재희가 멈춰 섰다. 곧이어 발표장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본부장이 뛰어와 대표 의전을 이어갔다. 앞에서 공손한 손으로 자리를 안내하는 본부장과 그 뒤에 대표. 그리고 그 두 사람 뒤를 따르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본부장은 대표를 자리로 안내한 뒤 그 앞줄에 앉았고, 나는 대표의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들어오다만 고 팀장과 재희가 신경 쓰여 핸드폰을 꺼내려다 대표의 요청에 다시 집어 넣었다.
“그…그, 아까 뭐 바꾸자고 그랬지?”
“이미지 혁신을 비주얼 혁신으로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래. 거, 담배는 어디서 피우나? 시간 되나?”
“아직 15분 정도 남았습니다. 출구에 고 팀장님 계셔서 아실 듯합니다.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아니야, 가면 되지 뭐.”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표에게 길을 내어주고 조금 뒤에서 걸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고 팀장이 대표와 함께 갈 듯해 배턴 터치하듯 나는 재희 옆에 멈추었다. 보통이었으면 담배 피우는 자리까지 나를 끌고 가서 미주알고주알 별 이야기를 떠들어댈 위인이지만 오늘따라 고 팀장의 태도가 의뭉스러웠다.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재희가 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기에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여기 그냥 있어도 돼요.”
“아, 네….”
피곤함과 피폐함은 둘째 치고 당장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여기는 어디지, 나는 누구지’만 되뇌는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재희 씨, 정신 차려. 아직 발표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끝날 때까지 힘들어요.”
“아… 네. 저….”
자꾸만 말끝을 흐리는 재희의 속마음을 읽는 것도 지겨워 대놓고 물어보았다.
“뭐 할 말 있죠? 고 팀장님이 뭐라고 했어요? 아니면 본부장님이?”
“그게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두 분 돌아오면 말도 못 하니까, 그냥 빨리 말해요.”
누가 들어도 짜증이 가득 섞인 내 목소리에 재희도 바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고 팀장님이 아까 팀장님 오시기 전에 대표님 옆에서 걷지 말고 한 발자국 뒤에서 걸으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조금 전에 팀장님이 대표님이랑 나란히 앉으니까 뒤에서 엄청 뭐라고 하시면서 ‘너는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저거 되게 예의 없는 거’라고. ‘여자가 대표님이랑 저렇게 나란히 앉으면 안 된다’고 계속 말씀하시니까. 이게 지금 저를 혼내시는 건지, 가르치시는 건지 아니면 저보고 팀장님한테 가서 말리라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서요.”
재희의 하소연이 섞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더 더할 말도 없고.
“아까 차 타고 오면서도 팀장님 밑에서 일하니까 저더러 ‘네가 팀장님인 줄 아냐’고 엄청 타박하셔 가지고….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재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목소리였다. 다행히도 눈에 눈물이 고이진 않았지만 극도의 긴장과 혼란이 온몸을 휘감고 있어서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시간은 없고 뭐라도 얘기는 해줘야겠고. 어떻게 말을 해줘야 가장 현명한 답일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재희 씨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지금 업무를 준 것도 아니고, 지시 사항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아, 뭐 됐고. 하….”
재희의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으려니 대표와 있을 때부터 꾹 참았던 울화가 치밀어 올라 한숨이 자꾸 튀어나왔다.
“일단 오늘은 대표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고 팀장님이 또 뭐라고 하면 나한테 와서 말해요. 그리고 아무 때나 ‘죄송하다’고 말하지 마요. 업무상에 큰 피해 입힌 거 아니면 ‘시정하겠습니다’ 아니면 ‘알겠습니다’라고 해요. 머리 숙여가면서 사과하면 나중에 재희 씨 잘못이 아니어도 재희 씨가 다 덤터기 쓸 수 있어요. 판단 잘 해서 말하고 행동해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해줄 수 있는 걸 다 했다. 혼자 지독하게 고생할 걸 따라와서 막아주었고, 쉽게 사과하는 버릇을 지적하면서 신입 사원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대답도 일러주었다. 진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조언이다. 이 진상들 소굴에서 자신의 줏대를 지키며 버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말조차 해주지 않으면 이 열정의 신입 사원은 정말 대표의 지시대로 주말마다 임원 회의에 가서 서기이자 비서 노릇을 자청할 것 같았다.
임원 회의에 참석하면 그들에게 점수를 따서 회사를 편히 다닐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 회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걸, 직접 겪어본 나는 알고 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소리를 늘어놓을지, 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시켜댈지 빤했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대놓고 가지 않는 방법도 알려주었는데…. 그런데 도 이 친구의 눈에서 새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속마음이 들려왔다.
‘나, 이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다녀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