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아지트
1층 아지트
재계약을 앞두고 5층 파트장보다 8층 팀장이 먼저 나를 그들의 아지트로 불러냈다. 네 번의 계절을 모두 겪고 나서야 글로벌팀의 아지트에 직접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이쯤 되어 보니 이 아지트는 글로벌팀만 들어올 수 있는 배제와 결속의 공간이기보다 온 그라운드에서 벗어나 이 팀 사람들이 겨우 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아 이야기는 들었다.”
팀장은 어느 순간부터 정우를 대할 때처럼 나에게도 말을 낮추었다. 아마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진 탓에 어느 정도 곁을 내준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지아와도 함께 일을 해본 적이 있었기에 앤 피플 사람들 중 나와 희영, 그리고 지아에게 유난히 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장은 예전부터 지아의 업무 능력을 좋게 평가했고 누구보다 그녀의 본사 발령을 응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 5층 모든 직원들의 기대와 달리 지아는 계약 종료와 함께 얼마 전 회사를 떠났다.
“많이들 아쉬워하제?”
“네…. 아무래도 정도 많이 들고….”
정들어서 아쉬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지아 정도면 안정적으로 온 피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한 풀 꺾였기 때문에 모두 한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우울함을 겪었다. 안정적인 시스템, 좋은 환경, 완벽한 워라밸, 정규직이 되면 달라질 월급까지 이 회사를 놓기에는 아쉬운 것들이 많았으니, 혜인을 비롯한 다른 앤 피플 사람들은 지아의 마지막에 유독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 결과에 아쉬워하지 않은 사람은 딱 하나, 나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앤 피플이든, 온 피플이든 누구 하나 이곳에서 성장과 안정을 동시에 취하며 일하고 있지 않다는 걸.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무척 아쉽네.”
“어쩔 수 없죠. 뭐, 회사는 회사니까요.”
“그래, 니 연장 생각은 있고?”
“저는….”
마음에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간 내가 인사팀에게 엿들었던 이야기 그대로 이사는 경쟁사의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와 동시에 소위 이사 라인을 타던 8층 마케팅 데이터 랩 전체는 큰 혼란을 맞게 되었다. 새로운 이사가 오면서 라인을 탔던 사람들은 인사이동이 있을까 몸을 사렸고, 그 와중에 바로 옆 UA 팀장이 승진을 하면서 비슷한 업무를 하는 글로벌 팀장이 묘한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요즘이었다.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할 때 가졌던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서 내 일만 하면서 편히 지내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오산이었다. 온 피플이라고 해서 누구 하나 마음 편히 일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모든 걸 깨닫고 나니 결론을 내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니요. 여기서 배운 것도 있고 하니까 어디든 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 뭐. 내가 도울 일 있으면 편하게 말하고, 대행사도 괜찮으면 추천해 줄 수 있는데…. 어때?”
“IT든, 게임 회사든, 좋은 환경은 맞는데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말씀은 감사한데 좀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니 생각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결론이 난 상황이니 우리 사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먼저 올라가. 나는 담배 한 대 태우고 갈게.”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서려는 나에게 팀장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나정아, 니 앞으로 뭐 하고 싶노?”
“네?
다시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 나를 바라보는 팀장.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이룬 것 같기도 하고.
“음…. 몸 편하고, 마음도 편하게 회사 생활하는 거요.”
“와, 최고네. 내도 글케 살고 싶다.”
내 대답을 들은 그가 너털웃음을 한바탕 쏟아내고는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면접 때와 니 뽑았는지 아나?”
“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그가 말하기 전까지 잊고 있던 기억이다. 이제는 저 멀리 가버린 오래된 기억. 그 기억 속에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긴장을 한 개도 안 하신 것 같아요.”
유난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길었던 면접. 그리고 상상치도 못하게 빨랐던 합격 통보. 잊고 있던 궁금증이 올라왔다.
“그날 니 말하는 거 보니까. 여서 잘 버틸 수 있을 거 같더라고. 여기 뭐…. 어쨌든….”
팀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 대한 평가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말을 끝맺지 못하는 그의 표정은 묘하게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심하는 듯도 했다. 말을 다 하지 않는 그 애매함에, 여태껏 곁을 내주지 않아 불편했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다 눈치 보고 사는 세상에 그럴 수도 있지. 내 기준에서 가장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팀장도, 결국 자리 보전하기 바쁜 한 가정의 젊은 가장일 뿐이니 그럴 만했지.
“그래서 뽑았어. 그니까 내 말은, 니는 어디 가도 잘할 끼다. 그간 고생했다. 남은 기간도 잘하고.”
“네. 알겠습니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팀장을 뒤로하고 다시 사옥으로 들어왔다. 이곳에 남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로는 사내 정치 읽으려 신경 쓰지 않았고 내 컨디션은 온전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일찍 퇴근하면 집에 돌아가 다시 취업준비생 모드로 공부를 하거나, 틈틈이 운동을 하면서 지냈다. 초능력은 그렇게 또 사라졌지만 평범하고 스트레스 없는, 그냥 그저 그런 날들. 그런 나날들이 내게 있어 가장 완벽한 일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8층 사무실로 들어서려는 순간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야, 나정아. 너 바쁘니?”
“아 파트장님, 아니요. 지금 괜찮아요.”
“그럼 5층으로 내려와. 면담하자.”
“넵. 알겠습니다.”
8층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중앙 계단을 타고 내려가 5층에 다다르자 사무실에서 나오는 5층 파트장을 마주했다.
“어, 회의실로 가자. 회의실로.”
어쩐 일로 파트장이 먼저 나서서 회의실로 이끌기에 조심히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그가 서류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뭐예요?”
“연장 계약서.”
“네?”
“왜? 너 연장 안 할 거야? 8층 팀에서도 너 평가 나쁘지 않아서 당연히 연장할 줄 알고 계약서 아예 뽑아왔지.”
8층 팀장과 면담을 끝으로 모든 게 잘 마무리되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계약서를 들이미니 당황스러웠다. 눈이 나도 모르게 동그랗게 변해서는 파트장이 내민 계약서에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잠깐 생각을 정리한 후, 날 파견하는 대가로 회사가 굴러가는 5층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상황을 이해했다.
“파트장님, 저 질문 하나 있는데요.”
“어, 물어봐.”
“앤 피플 마케팅 지원 파트, 없어질 거라는데 아세요?”
“어…?”
“테스트 파트만 살리고 나머지 파트들은 없어질 거 같은데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누가 그래? 8층에서 그래?”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앤 피플은 여전히 소식이 느릴 수밖에 없고, 모든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해결할 수 없는 위치였다. 딱 사무실이 있는 5층이라는 위치만큼 입장이 애매한 곳.
“아니. 뭐 저도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은데, 이사님 바뀐 뒤로 8층 분위기도 안 좋아서 앤 피플에서 파견 지원 가는 것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계약 종료하고 싶어요.”
“아…. 그래? 흠…. 그래도 너라면 본사 발령 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쉽지 않겠어?”
파트장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지아가 떠올랐다. 지아의 연이은 재계약도 아마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게 아닐까. 내가 조금 더 이곳에 애착이 있었다면 충분히 혹할 만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5층이든, 8층이든, 그냥 이 건물 어디에든 내 자리가 있다 해도 썩 기쁘지 않을 것 같았다. 워라밸을 끔찍이도 잘 챙겨준 덕분에 온 세상을 구경하고 다녔지만 그래도 제일 행복한 건 돌아와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내 공간에서였다. 그러니 어느 층을 가도 불편한 이 회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뭐….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본사 발령은 될지 안 될지, 결정되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 저는 여기까지만 하고 싶어요.”
“그래…. 아… 아휴, 내가 다 아깝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나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남은 며칠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여태까지 지내온 시간처럼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특별한 송별회나 애틋한 인사도 없었다. 그저 후련함과 허무함이 반반씩 섞여 내 마음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 감사 메일을 쓰다가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 메일 아래에 자동으로 붙는 서명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니온 앤 피플 | 마케팅 지원 파트 | 주임 이나정
떠나는 날 손에 가득 쥐고 돌아갈 짐도 없었다. 펜 한 자루, 포스트잇 한 장조차 모두 지원해 주는 회사였으니 나갈 땐 몸만 나가면 될 일이었다. 소속감을 얻고 싶었던 곳에서 끝끝내 자리 잡지 못하고 떠나는 상황이면서도 아쉬움 하나 남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참 다행이었지만 딱 하나 묘한 기분을 남기는 것이 있었다. 손에 쥔 사원증. 꼭 쥔 그 사원증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출입 게이트를 나서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유니온 앤 피플 마케팅 지원 파트 이나정입니다. 퇴사 처리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