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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정원 (11/25)

옥상정원

옥상정원

하늘이 너무나도 찬란한 가을의 주말. 어디든 가고 싶었지만 월급날이 가까워지며 지갑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워하던 찰나 혜인의 말이 떠올랐다.

“은지 님도 주말에 출근해요!”

회사에 가볼까 싶은 마음에 가벼운 출근 차림으로 우리 집 화장실로 향했다. 잘 자서 몸은 가뿐했는데, 요즘 같은 눈칫밥 스트레스라면 초능력도 발휘되지 않을까 싶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늘 그랬던 것처럼 지그시 눈을 감아 회사 5층 화장실에 이동해 있을 나를 상상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우리 집이었고, 능력을 쓸 때처럼 붕 뜨는 느낌이나 머리를 죄어오는 두통도 없었다. 이상한 마음에 눈을 감고 더 집중해 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집 화장실이었다. 그렇게 두어 번을 더 시도하다 결국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섰다. 남들 다 집에서 쉬는 토요일 아침. 주말이라 평소보다 훨씬 배차 간격이 길어져 잘 오지 않는 판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타고 판교역에 내린 뒤에도 회사까지는 꽤 먼 거리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주말이라 사옥 단지를 도는 셔틀버스나 마을버스도 없으니 타박타박 온 그라운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유니온 사옥. 판교의 상징으로 불리는 건물은 입사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처음 봤을 때처럼 남의 회사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걸어도 멀게만 보이던 사옥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렇게 출근만으로 두어 시간을 잡아먹는다니, 이미 계획했던 것이 꽤나 틀어져 버려 답답한 마음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옥상 버튼을 눌렀다.

“11층입니다.”

주말의 사옥은 무척 고요했다. 옥상정원으로 향하는 통유리 문을 통과한 햇빛이 복도 안쪽까지 깊이 들어와 찬란하게 바닥에 깔렸다. 그 빛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네가 와야 할 곳이 바로 이곳이야’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작은 계단이 옥상을 향해 나 있었다. 조심스레 발을 옮겨 옥상정원으로 향하는 짧은 계단을 올라 유리문을 여니 지금까지 이 회사에서 본 적 없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꽃들로 꾸며진 화단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고, 화단 바깥쪽으로는 탁 트인 판교 뷰를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철제 선 베드들이 놓여 있다. 남의 집 놀러 온 듯한 불편함이 가시지 않아 선 베드엔 차마 눕지 못하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스툴에 살포시 앉았다. 판교의 등대를 자처하는 숱한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회사에 입사하고 스트레스를 보상 받겠다며 몇몇 나라로 틈틈이 여행을 가서 숱한 스카이 뷰를 보았지만, 이토록 익숙하면서도 낯선 스카이라인은 처음이었다. 한 해가 거의 다 되도록 적을 두었지만 조금도 친해지지 못한 풍경이구나.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어느 팀인지 모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원으로 들어서더니 주변을 살피며 벤치로 향했다. 옥상에 누가 있는지 살피는 듯한 모습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몸을 피했다. 아까 불편해서 앉지도 못했던 선 베드로 자리를 옮겨 몸을 쭉 펴고 하늘을 향해 누워버렸다.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사람들은 벤치에 하나둘 앉더니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로벌팀처럼 자기들이나 알아듣는 말 나누다 가겠지 싶어 적당할 때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럼 8층 랩실 아예 다 날아가는 거 아니에요?”

“에이. 랩이 그렇다고 없어지기야 하겠어? 그냥 이사님 나가면 다른 임원이 그 자리에 오겠지.”

“아이고 이 이사님 라인은 싹 다 갈아치워지겠네.”

“어차피 8층에 데이터팀이 있어서 절대 안 죽어, 마케팅 쪽이라면 모를까.”

“정기총회 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렇게 싹 갈아치우는지…. 9층 신사업을 밀어주긴 엄청 밀어주나 봐요. 거기서 손실 난 걸 이렇게 사람 갈아서 메꾸나?”

“그 자리에 없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시키는 일이나 하면 돼. 야, 10층 인사팀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그냥 몸 사리는 데나 집중하세요.”

“그럼 입주사 게임 테스트도 앤 피플에서 안 하고 각 팀에서 한대요?”

“그 많은 테스트를 어떻게 각 팀에서 해. 테스트팀은 두고 앤 피플에 마케팅 지원 파트랑 서비스 지원 파트도 있잖아. 거기 인력 조정하겠지.”

“아휴, 한동안 바쁘겠구먼….”

“어디 가서 함부로 말 흘리지 말고, 블라인드 게시판 감시나 잘해. 뭐 묘한 글 올라오면 바로바로 연락해서 삭제를 하든, 비공개로 돌리든 하고. 어디서 말 한 번 잘못 나오면 분위기 골로 간다.”

인사팀의 은밀한 대화를 어쩌다 들은 순간, 그간 남몰래 여러 층을 오가면서 느꼈던 싸한 대화들이 착착 맞아 들어갔다. 8층 팀장이 늘 골머리를 싸매며 이사 눈치를 봤던 것도 다시금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이사님께서 이번에 또 회장님이랑 반대 의견 내신 거 같은데…. 아, 이거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팀장이 이사 라인이구나. 만약 저 소식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들의 자리가 한 번에 다 뒤집힐 수도 있다. 입 한번 잘못 열면 난리가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니 들었다는 것조차 알려지면 안 되겠다.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자.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나가자.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되어 손이 덜덜 떨리니, 몸을 움찔하는 순간 어딘가 띵해져 오는 게 불현듯 초능력이 발휘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살다 보면 이렇게 적재적소에 쓰이는 날도 있어야지.

사무실로 가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전히 내 눈앞엔 맑은 하늘이 보였다. 아니, 지금 나 심장이 너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죽을 것 같은데. 이 엄청난 공포와 긴장 속에서 어떻게 초능력이 들어먹지 않을 수 있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아봤지만 죽어도 이동이 되지 않는다. 아이 씨. 급한 마음에 온몸에 힘을 준다고 다리를 쭉 뻗었다가 의도치 않게 옆에 놓인 철제 벤치를 툭 하고 건드려버렸다. 옥상에 퍼지는 둔탁하고 낮은 소리.

팅!

“뭐야, 누가 있었나 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스멀스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일어나서 달려 나갈까? 아니,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내가 왜? 굳이? 아 그래도 민망한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은데. 어쩌지.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다 들었다고, 그렇지만 말 안 하겠다고 하면 되잖아. 어쩌지. 어떻게 하지.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양심선언을 하듯 두 손을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순간이동을 할 때마다 느껴졌던 찌릿한 두통이 머리를 감쌌다. 스르륵 어딘가로 내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 그리고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드세요?”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와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 병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병원 응급실입니다. 회사에서 쓰러졌다고 119 신고가 들어와서 구급차 타고 오셨어요. 괜찮으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세요?”

“제가요? 쓰러져요?”

어느 정도 설명을 듣고 나니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순간이동을 한다고 느꼈던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나를 본 사람들이 119에 신고를 해 병원에 왔다는 것. 정신을 잃은 채로 들어왔으니 의사는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검사를 이미 다 해놓은 상태였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한참 뒤에 의사가 다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나정 씨 되시죠?”

“네.”

“뭐 별다른 타박상은 없으시고, 링거 다 맞으면 퇴원하셔도 되는데….”

의사의 말끝이 흐려졌다. 나보다는 차트를 한참 바라보던 의사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혹시 뭐…. 최근에 몸 쓰는 일 같은 거 한 적 있으세요?”

“아… 아니요?”

“간 수치가 너무 비정상적으로 높아요. 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데 이렇게 간 수치만 높을 수는 없거든요. 아마 몸에 무리가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푹 쉬시고, 평소에 드시던 약 같은 거 있으면 비타민이든 영양제든 일단 잠시 끊으시고요. 몸에 무리되는 일은 절대로 하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외래 예약 잡아서 일주일 정도 후에 간 검사 다시 한번 해보세요. 뭐 다른 이상 소견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무리한 일. 내가 한 무리한 일이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매일 손가락 두 개만 사용해서 엑셀 데이터 정리하던 일이 힘들었을 리 만무하고. 최근 내가 무리한 게 있다면 이따금 초능력을 써 여행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종일 걸어 다닌거나, 눈치 싸움하느라 다 써버린 정신력 때문이 아닐까.

초능력이든 정신력이든. 뭘 써서 내 몸이 망가졌든지 간에, 이제 쓸데없이 과하게 에너지를 쏟는 일은 좀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능력으로 평소 같았으면 못 갔을 여행지를 쏘다니며 기분 전환을 해보아도 결국 돌아오면 온몸이 지쳐 있었다. 요즘 내 정신력을 고갈시키는 회사에서의 고민도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눈치 싸움을 해서 온 피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온 피플이 된다고 한들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게 자명했다. 그토록 원했던 안정은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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