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1층
지하 1층
“이상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5층 전체 미팅. 각자 파견 나간 팀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 업무들을 수행했는지 보고하는 자리였다. 특이한 건 우리 파트 회의는 5층 회의실도, 8층 회의실도 아닌 구내식당 한쪽에 있는 사내 카페에서 티타임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거였다. 이 아무 의미 없는 장소 선정조차 이제는 우리가 온 그라운드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도, 저기도 적을 두지 못하고 맘 편한 곳은 그저 회사가 베푸는 식사 공간. 이걸 과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어. 잘 들었고, 그 각 팀 이슈 사항 있거나 업무량 많아지면 메신저로라도 연락하고. 서포트 각자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잘해주세요.”
매달 다른 내용을 보고해도 5층 파트장의 피드백은 늘 같았다. 그저 일도 알아서 잘하고, 보고도 알아서 착실히 하란 소리였다. 모름지기 파트장이라는 직급을 달고 있으면 우리를 관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에겐 그런 모습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직책이 파트장이고, 파트장이면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해야 하니까 하는 느낌.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가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파트장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꾸물거리는 모양새가 오늘도 파트원 하나 붙잡아 수다 상대로 삼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 혜인이 나서서 먼저 파트장에게 물었다.
“파트장님, 안 올라가세요?”
“어, 뭐 너네 바쁜 일 있니?”
“네, 데이터팀 프로젝트가 지금 밀려 있어서요.”
“어, 그럼 바쁜 사람들 올라가.”
“저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저도 그럼….”
혜인을 시작으로 하나둘 카페를 나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리에는 파트장만 홀로 남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넌 안 가도 돼?”
잘했다거나, 못했다거나 그런 평가나 피드백 없이 몇몇 단어만 바뀐 듯 반복되는 정기 회의는 늘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었고, 파트장은 항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딱히 바쁘게 일을 많이 하는 것도, 팀원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사람들을 독려하고 모으는 리더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태초부터 이 건물에 존재했던 사람 같았다. 그에게선 온 피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치열함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편안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도태된 느낌. 애당초 앤 피플로 오래 자리하고 있어서 온 피플이 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저도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지금 가려고요.”
어차피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내 업무 평가가 나아지진 않는다. 내 평가는 전적으로 8층에서 담당했고, 파트장은 그 데이터를 정리해서 계약을 연장할지 말지 유니온 본사와 이야기하는 역할이었다. 중간관리자로서 평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열의를 보였을까 싶지만, 지금 하는 걸 보면 그조차도 딱히 기대되지 않았다. 몇 달 동안, 8층에 파견 온 직원들과 나눈 대화 끝에 우리가 결론 내린 그의 역할은 사내 시스템에 정성적인 정보를 정량적으로 입력하는 인간 타자기, 딱 그 정도였다. 인간 타자기에게 과한 친절과 시간을 베풀 이유가 없기에,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들 후다닥 올라갔는지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올라가는 버튼을 눌러놓고 어느 호수 엘리베이터가 먼저 도착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하기 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사내 메신저에 알람이 와 있었다.
마케팅 지원 파트 희영 님| 나정 님, 어디예요?
| 저희 7층 B 회의실인데 티타임 하실래요?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니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7층에 내려서 메시지에 적힌 B 회의실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에 달린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힐끔 보니 희영과 지아, 혜인, 새로 들어온 은지까지 옹기종기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아니, 뭐야. 왜 사무실로 복귀 안 하고 여기 다 모여 있어요.”
이제는 편해진 동료들. 각자 시차는 있지만 내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똑같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으니 문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를 보자 다들 빈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나정 님, 바쁜 일 있어요?”
“아니요. 오전에 로우 데이터 다 정리해서 보냈어요.”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며 자리에 앉으니 문 옆에 앉아 있던 혜인이 회의실 문을 닫아버렸다.
“이야, 얄짤없이 닫아버리네.”
“우리끼리 모여 있는 거, 보여봐야 좋을 게 없잖아요.”
혜인은 들고 온 노트북을 열더니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해 회의실을 예약했다.
“1시간 예약할까요?”
8층 팀에서 회의실 예약은 늘 혜인에게 지시를 했던 건지, 행동에 막힘이 없었다. 똑 부러지고 어딘가 까탈스러운 혜인의 성격에 시간을 딱딱 나누어 쓰는 모습이 잘 어울리기도 했다. 아마 이 무리에서 가장 온 피플 같은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오래 일한 지아보다 혜인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혜인이 온 피플이 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회의실 예약하면서 중얼거리는 그녀의 볼멘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파트장은 매번 똑같은 얘기할 거면서 그냥 업무 일지 보지, 뭐 하러 만날 보고는 받는 건지. 어차피 업무 평가도 다 8층에서 하는데.”
혜인과 파트장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이미 몇 주간 회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파트장님이 중간관리자니까, 중간에서 업무 조율하려고 확인하는 거 아닐까요?”
희영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지만, 혜인의 생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피드백을 주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희영 님은 UA팀에서 5층 파트장님 얘기하는 거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그니까, 결국 키를 쥔 건 8층인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8층에서 필요로 하지 않으면 나가야 할 테니까.”
씁쓸한 얘기를 내놓아 자꾸만 사람들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혜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파트장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인간 타자기라고 하지만, 그도 사람인데 빈정이 상해 타자 치는 것조차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
“혜인 님 말이 맞긴 한데, 그래도 파트장한테 너무 대놓고 툭툭거리지 마요. 계약 연장이나 본사 발령에 결정권이 없는 건 맞아도, 어쨌든 저 사람이 중간관리자로 저렇게 오래 있다는 건 그만큼 연줄이 있다는 건데 밉보여서 나쁠 게 없잖아요.”
“글쎄요. 전 지금 새로 오신 팀장님 비위 맞추는 것도 힘든데….”
혜인의 파견팀 팀장이 바뀐 지는 몇 달이 지났다. 이전 팀장은 파견 계약직이긴 하지만 여자 팀원이 오랜만이라며 유난히 혜인을 챙겨주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혜인은 누구보다 빨리 8층 사람들과 친해졌고, 금세 온 피플처럼 지낼 수 있었다. 딱 이전 팀장이 떠나기 전까지만.
“아직도 새 팀장에 적응 중이에요? 세 달도 더 지난 거 같은데? 이번 데이터팀 팀장님이랑은 뭐가 잘 안 맞아요?”
“어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문제점이라도 알려주시면 고쳐보거나, 바꿔볼 텐데 콕 짚어 말도 없으시고 그냥 대기만 하다 하루 다 가는 거 같아요. 사실 이전 팀장님이 배울 점도 많고 잘 챙겨주셔서 이 코딱지만 한 계약직 월급 받고서라도 좀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컸거든요. 본사 발령은 안 되어도, 계약 연장으로 근무할 생각까지 했는데 팀장님 바뀌고 나니까 마음이 좀… 뜨네요.”
“아, 그 팀장님….”
지아는 뭔가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편히 내려놓았던 팔을 꼬아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그 팀장님 차별 좀 심하죠?”
차분한 지아의 말에 혜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요. 오시고 나서 지금까지 일한 거 다 합쳐도 예전 일주일 치만큼도 일 안 한 거 같아요. 팀 일선에서 그냥 완전 배제. 잡다한 일만 시키고, 데이터 접근 신청해야 하는 일은 다 하지 말래요. 하지 말고 접근 가능한 사람한테 요청하라고. 덕분에 요새 아주 잘 놀고 있어요.”
“희영 님은 어때요?”
“저요? 저 그냥, 뭐 조용하죠. 회의 들어와라 하면 가고, 정리해라 하면 하고, 누구 도우라고 하면 돕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요. 가끔 혼나긴 해도 선임님이 잘 챙겨주셔서 UA 업무는 차근차근 배우는 거 같아요. 나정 님이 보기에도 그렇지 않아요? 저희 선임님 되게 착하시죠?”
희영이 나를 바라보며 물으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UA팀은 모든 팀원이 여자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인지 우르르 몰려다닐 때면 어딘가 여고 시절이 생각났다. 다 같이 모여 까르르거리다가, 또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머리를 맞대고 세상 진지해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 기복이 업무에서도 가끔 드러나지만, 종종 나에게 업무 요청을 할 때 마주하는 팀의 분위기는 분명 희영의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단적으로 체감되는 분위기가 글로벌팀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으니.
“그죠. UA 선임님 착한 건, 아마 글로벌팀 사람들도 다 알걸요.”
“저 잘되라고 혼내시는 거라서 혼날 때도 기분 안 나빠요. 뭔가 여기서 나가서 대행사에 가더라도 경력은 살릴 수 있겠다 싶어서.”
희영의 말에 혜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희영 님은 계약 연장 안 하시려고요?”
“아, 아직 기간 남아서 생각 안 해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생각은 뭐 늘 열어둬야 하니까.”
우물쭈물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희영의 말은 사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가진 고민일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 회사에서 안정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평가로 한순간에 온 그라운드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토록 불안정한 삶을 어떻게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지, 지아가 대단했다.
“지아 님 보면 그래도 일만 잘하면 오래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왠지 혜인의 말은 지아에 빗대어 자신의 희망 사항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을 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겐 성과를 낼 수 있을 만한 업무를 주지 않는데, ‘일 잘한다’는 걸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나도 그냥 인간 타자기 정도로만 시키는 일 따박따박 하면 일 잘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온 피플 사이에서 딱 앤 피플 정도의 역할만 하면서?
“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게 왕따인 건지, 아닌 건지도 잘 모르겠고.”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빙빙 돌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러나 동료들은 내 말에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이미 8층을 오가면서 숱하게 다른 팀의 분위기를 살폈을 거고, 각자의 입장에서 눈치껏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내가 느끼고 있는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딱히 뭐라고 꼽을 순 없는데, 제가 뭘 잘 한다고 해서 8층 팀원이 될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아요. 오히려 계속 더 눈치만 보게 된달까. 시키는 건 잘 하겠죠. 근데 이 팀에 제가 언제까지 필요할지 잘 모르겠어요.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일인 거 같기도 하고, 대체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여기서 이걸 하는 게 저한테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고. 안정적으로 계속 남을 수 있다고 보장되면 좋은데, 어떻게 보장을 하겠어요. 분기별로 팀이 사무실 층을 옮기게 될지 말지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파견 계약직이 뭐 그렇게 대수겠어요?”
이게 희영의 말보다 더 적나라한 우리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온 그라운드에서 5층과 8층에 각각 자리 하나씩 차지해 2인분의 공간을 갖고 있지만, 어느 층에서도 온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기에 실상은 빈 깡통이었다. 제 몫을 다할 수 있으니, 오래도록 있을 한 자리만 내어달라고 우리 중 누군가라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기회가 올까?
“전 지아 님이 본사 발령을 가면, 제가 다 기분이 좋을 거 같아요. 이번이 연장 계약 마지막이라면서요.”
기한의 정함이 없는 계약직이라고 하지만, 들어와서 보니 암묵적인 기한이 분명 존재했다. 그 어느 서류에도 나와 있지 않고, 누구도 입 밖으로 대놓고 거론하진 않지만 두 번의 연장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이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두 번 연장하는 동안 내리 같은 팀장과 일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에 지아의 경우는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다. 더욱이 지아가 일하는 게임 운영 1팀은 최근 사원 직급의 TO가 났을 뿐 아니라 몇 주 전 새로운 서비스를 론칭해서 일손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토록 상황이 시의적절하게 딱딱 맞아 들어가는 게 운명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에이, 지아 님 없으면 운영 1팀 CS 당장 막힐 텐데 발령 나겠죠. TO도 나서 팀장님이 이사님 보고도 했다던데.”
“혜인 님 어떻게 알았어요?”
“지아 님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있을 만큼 있다구요. 이 정도 정보력은 있어요.”
혜인이 웃으며 지아를 바라보았다. 혜인의 미소는 8층 사람들과 이따금 농담을 나눌 때 보이는 모습과 같았다. 어딘가 인위적이지만, 악의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듯 눈가부터 입가까지 반달 주름과 보조개가 푹 파이는 그런 표정. 혜인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지아가 본사로 발령을 가야, 우리들 중 그런 선례가 생겨야, 또 누구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희망을 갖고 싶어 보였다.
“걱정 마요. 이번 계약 종료 때, 분명 파트장이 불러서 얘기할 테니까.”
“그래도 알 수 없죠. 뭐, 몇 년 있어보니까 분명하고 명확해 보이던 것들도 막상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전 그냥 연장이 더 될 수만 있어도 좋을 거 같아요. 안 되면 이직해야죠. 오래 있었던 덕에 경력은 많이 쌓았으니까.”
아쉬운 것 없다는 듯 이야기하지만, 지아의 표정엔 분명 아쉬움이 가득했다. 누구도 자신의 바람 말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해줄 순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8층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열심히 일하고, 말 한번 붙여본 적 없는 저 윗분들 마음에 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게 안락한 온 그라운드에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누구든 오래 버티려면 좋든 싫든 생존법을 터득해 각자도생해야 했다. 우리가 더 노력할 수 있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게 참 어려웠다.
“추석에 휴가는 다들 안 가세요? 이번에 연휴도 긴데.”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는지 지아가 다른 가벼운 주제를 던져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싶었다.
“아, UA팀 분들은 지난번에 슬쩍 들어보니 다 해외여행 가는 거 같던데?”
“네, 선임님은 뉴욕으로, 전임님은 런던 가신데요.”
“와, 좋겠다.”
“우리도 가면 되죠. 시간도 많고, 연차 남은 것도 다들 안 썼잖아요.”
“전 그냥 연말에 돈으로 받으려고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일 연차를 덜 쓴 게임 운영 2팀 은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와 시선이 쏠렸다.
“대기업 경력 있으면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들어왔는데, 막상 월급 받고 보니 진짜 계약직 월급 작고 소중하더라고요.”
“아, 은지 님도 첫 회사라고 했죠?”
“네, 완전 신입은 면접 잡기도 힘들어서요. 뭐가 됐든 유니온이니 경력 쌓는다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예상보다 더 자취하기에 월급이 빠듯해서 그냥 열심히 일이나 하려고요.”
“그럼, 은지 님도 주말에 출근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혜인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어차피 파트장은 우리가 보고하는 거 말고는 무슨 일 하는지 아예 몰라요. 사실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8층 팀장님들이랑 말 섞는 거도 되게 불편해서 우리한테 보고 받는 거니까. 그니까 주말에 출근해서 그냥 공부하거나, 잔업 좀 하고 주말 수당 받아요. 저도 그렇게 해서 생활비 더 충당하고 있어요. 이 코딱지만 한 계약직 월급 받아서 어떻게 살아요. 못 살지.”
어쩐지. 매주 업무 보고 일지에 적혀 있던 혜인의 주말 출근에 대한 미스터리가 이렇게 풀렸다. 꼬박꼬박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8시간씩 채워서 근무하는 게 이런 이유였다니. 그렇게 해서 월급을 더 받고 있었다니. 복지는 좋아도 최저시급 겨우 넘는 계약직 월급이 충분할 순 없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말 수당 받으려고 판교까지 주말 출근을 해요? 대단하다….”
“대신 8층 사람들 마주칠까 싶어서 주말엔 5층에만 있어요. 어차피 파트장도 매주 나오던데요?”
“파트장님이 마주치면 뭐라고 안 하세요?”
아직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는 은지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혜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저한테 대놓고 말하던데요? 자기 주말 수당 받으러 나왔다고.”
“그걸 그렇게 말한다고요?”
“전 그래도 눈치는 보는데 파트장은 결재자가 본인이라 그런지 숨기지도 않더라고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중간관리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대놓고 회사 수당을 챙겨 간다고? 대단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 이상이었구나. 앤 피플로서 어떻게 살아야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정확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혜인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여기서는 어떻게든 8층에만 잘 보이면 돼요. 파트장한테 백날 잘 보여봐야 아무 쓸모 없고 8층에 잘 보여서 5층에 얘기가 내려갈 수 있게 애써봐요.”
“아….”
혜인의 말에 눈동자를 굴리며 분위기를 살피는 은지. 몇 달 먼저 회사를 겪은 입장에서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달리 해줄 말도 없었다. 은지는 또 어떤 팀장, 어떤 팀원과 일하게 될지 겪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니. 나름의 생존 방법을 찾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사실, 제일 나중에 들어온 사람보다 앞서 들어온 사람들이 더 걱정이지.
다들 멍하니 시선을 피하다 머쓱해졌는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거나, 어깨를 주무르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싶었다. 그러다 맞은편에 있는 지아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특유의 차분한 미소로 눈인사를 건네는 지아. 세상 인자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니 하릴없이 머릿속을 채운 말이 또 튀어나왔다.
“아무튼 지아 님 진짜 잘되면 좋겠네요. 이번에 서비스 론칭 땜에 엄청 애썼던 거 솔직히 우리 말고 운영 1팀 사람들도 다 잘 알 텐데….”
내 말에 다른 사람들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이 말이 이뤄지길 바랐다. 이제 번지르르한 사내 복지만으로 회사에 만족하기엔 다들 표현할 수 없는 피로감이 쌓여 어딘가 삐걱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