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층
8층
“안녕하세요. 유니온 앤 피플 이나정입니다.”
“어, 왔으여? 우리 그 면접 때 봤지요?”
면접에서 봤던 남자는 여전히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글로벌 마케팅 팀장, 홍기영. 자리는 저어기 쓰면 되고, 옆 팀 업무 같이 도와주면 되고. 서비스 쪽 희영 님은 이미 알지요? 거, 둘이 비슷하게 일하니까 모르는 거는 희영 님한테 물어보면 될 거 같고.”
파티션 너머의 다른 팀을 가리키며 팀장이 말했다.
“옆 팀은 UA 마케팅팀. 들어봤지요? UA?”
그의 질문에 대답할 틈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실, 알 턱도 없었다. IT 기업 면접을 준비하면서도 내가 게임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어렴풋하게만 알았다. 무슨 일을 하는 팀인지 혼자서 파악하려면 분명 시간이 걸리겠지. 그러나 그걸 하나하나 붙잡고 물어보기엔 팀장이 자연스레 다음 주제로 넘어가서 다시 묻기도 애매해져 버렸다. 이 동네 사람들은 뭐 이렇게 다들 잘났어? 묘하게 생기는 벽을 티 낼 수 없어서 부족해 보이지 않으려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팀장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 그리고 이사님한테 먼저 인사 가야 하는데, 지금 회의 중이신 거 같으니까…. 일단 뭐, 팀원부터, 자!”
팀장이 손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부르자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고, 의자를 돌려 나와 팀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어제부로 계약 종료된 현주 님을 대신해서 업무 지원을 하게 된, 음. 이름 뭐였죠?”
“아, 이나정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맞다, 맞다. 나정. 이나정 님. 자 그리고 여기는 최민수 선임, 박성준 선임. 그리고 내일 아마 신입 하나 들어올 끼고.”
소개해 주시는 분들과 눈을 마주치고 살며시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다 팀장 뒤로 비어 있는 자리가 여럿 눈에 들어왔다.
“아, 신입 말고 출산휴가 끝난 전임도 있어요. 내일 또 인사하믄 되니까 그렇게 알면 되고….”
출산휴가를 쓰고 복귀하는 분이 있구나. 저렇게 어제 자리 비운 것처럼 그대로 두고 휴가를 가다니. 그것도 몇 개월씩 가야 하는 출산휴가를. 심지어 출산휴가를 끝내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올 수도 있다니. 모든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내가 꿈꾸는 회사의 모습과 정확히 딱 맞아서였다. 짧게 머물렀던 회사에서는 기혼 여성이 많지도 않았는데 결혼이나 출산을 할 거면 퇴사를 하는 분위기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런 곳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 더 실감나게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팀장은 팀 상황과 팀원들을 소개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보이는 방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그렇게 몇 번을 두리번거리다, 문제의 문에서 누군가가 나오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더니 이내 나를 다시 불렀다.
“아! 이사님 회의가 끝난 거 같으니까 인사드리러 갑시다.”
이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 나는 팀장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전의 작은 회사에도 대표를 제외한 이사가 서너 명 있었다.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일만 시키지, 딱히 높은 위치라고 큰 책임을 지지도 않았고, 유능하다는 느낌도 없어서 오히려 마음속엔 반감만 가득할 때가 많았다. 실무자는 늘 모자라서 일이 밀리는데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인간은 뭐 이리 많은지. 내 머릿속 이사는 딱 그런 정도의 사람이었는데, 이곳의 이사는 뭔가 좀 다른가? 팀장을 따라 이사실 방문 앞에 도착해 문 앞에 붙은 문패를 바라보았다.
Marketing Data Lab. Director. Jin Won, Lee
거창한 이름을 되뇌는 동안 옆에 있던 팀장은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고치고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자 팀장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이사님, 오늘 유니온 앤 피플에서 새로 온 이나정 님 인사 왔습니다.”
“아, 이 친구가 현주 님 후임인가?”
“예, 맞습니다.”
몇 초 되지 않는 대화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팀장의 목소리가 완전히 뒤바뀐 걸 느꼈다. 사투리가 툭툭 섞여서 어딘가 무뚝뚝함을 넘어 살짝 퉁명스럽기까지 했던 그의 목소리가 이사 앞에서는 더없이 사근사근하게 바뀌어 있었다.
“뒤에 미팅이 또 있어서 차 마시기가 힘들 거 같네.”
인사에 대한 대답으로 건네는 말과 달리 손짓으로는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이사. 그의 손짓에 팀장은 후다닥 테이블 곁으로 가 앉았고, 뒤에 서 있던 나에게 옆으로 와 앉으라는 모션을 취했다. 재빠르게 옆자리로 가 자리에 앉으니 마주 앉은 이사의 얼굴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깔끔한 화이트 피케 티셔츠에 동그란 무테 안경을 쓴 남자. 아무리 많이 잡아도 50대까지 안 될 것 같은 꽤 젊은 느낌이라 내가 평소 ‘이사’라는 직함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다만, 한눈에도 가냘프고 여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시선은 냉철해서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래, 앞으로 유니온에서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같이 재밌게 일해봅시다.”
별다른 호구조사도 없었다. 내가 어떤 학교를 나왔고, 무엇을 전공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회사 상사는 여태껏 처음이었다. 이 회사에서 내 배경은 필요치 않다는 건가? 아니면 내 능력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딱히 나를 무시하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언이라고 건넨 희망찬 격려뿐이었는데 너무 거창해서 역설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 유니온에 들어와 5층에서 8층으로 올라오는 것조차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 달이나 대기했는데 하고 싶은 건 어떻게 꿈꿀 수 있으며, 마음껏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그저 그의 말 중 이루어졌으면 하는 건 ‘재미있게 일하자’뿐이었는데 그마저 이룰 수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그냥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어차피 8층 사람들 사이에서 경력으로 따지나, 근무 일수로 따지나, 어떤 기준으로 줄을 세워도 내가 제일 끄트머리에 있을 테니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사람들 시선을 너무 끌지 않을 정도로 밝으면서도 너무 낮지 않은 목소리로 무심하지 않은 듯 적당한 에너지를 담아 건네는 인사. 길게 늘어진 사무실 책상 사이를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며 걸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사무실. 걸어가면서 군데군데 보이는 파티션이 각 부서를 구분 지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누군가는 책상에 좋아하는 아이돌 사진을 주르륵 붙여두었고, 어떤 사람은 캐릭터 피규어를 올려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책상에 서류 더미와 웰컴 키트에 들어 있는 사내 다이어리가 놓여 있어 이 책상이나 저 책상이나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러니 멍 때리고 걷다가 책상 골목을 잘못 들어서면 남의 팀 구역에 발 들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인근 입주사 사람들이나 스타트업 직원들 입장에서는 부러워할 만큼 잘 갖춰진 공간이지만, 말이 좋아 크고 쾌적한 사무실이지 실상 따지고 보면 거대한 닭장과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에겐 정해진 근무시간 외에는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 정도? 닭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먹고사는 건 닭과 다를 게 없었다.
한마디로, 8층에 가면 좀 달라질 거란 기대와 달리 기계 부품이라고 생각될 만큼 매일 똑같은 일상이 이어졌다는 말이다. 뭔가 온 피플만큼 해내기 위해 어디 스터디라도 들어야 하나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내가 하는 일이라곤 열 손가락 중에 두 손가락만 있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쏟아져 나오는 날것의 데이터를 한눈에 보기 쉽도록 정리하는 일. 창의력도 필요 없고 별다른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얗고 반듯하게 그려진 엑셀 프로그램에 컨트롤을 누르고 C와 V만 사용하면 됐다. 그러니 업무가 금세 익숙해지고 회사가 지루해졌다.
단순한 업무 덕분에 내가 얻은 건 야근 없는 삶이었다. 정시 퇴근이 웬 말인가. 처음엔 6시가 넘어도 가만히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느꼈다. 정확히 6시 정각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옆자리 선임, 그리고 줄줄이 일어나는 다른 글로벌 팀원들. 옹기종기 모여 어디로 밥을 먹으러 갈지, 술은 뭘 마실지 고민하는 걸로 보아 회식을 하려는 듯싶은데 딱히 내게 같이 가자는 말이 없으니, 눈치껏 그저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렇게 하나둘 사무실을 나갔고, 핸드폰을 두고 간 옆자리 선임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가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정 님, 일 아직 남았어? 왜 안 갔어요?”
“아, 가려고요.”
“네, 그럼 내일 봐요!”
아무리 내 일이 업무 지원이지만 그래도 이 팀 소속으로 배정을 받은 건데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일인가. 이 팀에서 내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상 나에겐 일이 있을 수가 없다. 먼저 나서서 필요하신 일이 있냐고 물으면 일단 대기하라 하고, 가만히 있다가 겨우 일 하나를 받아 오면 서류 정리 업무여서 1시간이면 끝났다. 내 근무 시간 8시간 중에 정작 일을 하는 시간은 절반 정도였고, 일을 기다리는 시간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니 5분 대기조처럼 목 빼고 사내 메신저 창만 하루 종일 바라보는데, 일이 없으면 없다, 가도 되면 가라, 말이라도 한마디 좀 해주지. 내가 이 팀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 뽑은 게 맞는지 궁금해질 때 즈음, 오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정 님, 저….”
글로벌팀의 사실상 막내인 정우가 다가와 속삭이듯 불렀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습관적으로 모니터 우측 하단에 시계를 힐끗 살폈다. 10시 3분. 일주일에 서너 번 늘 반복되는 일이라 나는 정우가 문장을 다 끝맺기도 전에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벗어 내보이며 물었다.
“이거 찾으시는 거죠?”
이제 대답도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없이 손을 뻗어 내 사원증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8층 사무실을 나섰다. 사원증을 빌려가는 그 시간엔 늘 다른 팀원들도 자리를 비웠다. 텅 빈 글로벌 마케팅팀 구역을 지키는 건 글로벌팀인 듯, 글로벌팀 아닌 듯, 글로벌팀처럼 보이는 나뿐이었다.
정우는 20~30분 정도 후에 다시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항상 홀로 나가서 들어올 땐 팀장부터 선임, 전임까지 다른 팀원들을 주렁주렁 데려왔다. 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각자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업무를 보다 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즈음 다시 정우가 슬며시 다가와 내 책상 위에 사원증을 말없이 올려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는 꼭 메신저로 감사 인사를 보냈다.
글로벌 마케팅팀 정우 님| 나정 님 감사합니다!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는 루틴. 처음 한두 번은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횟수가 늘고, 빈도가 잦아지니 나도 홀로 고민이 쌓이기 시작했다. 다른 팀은 팀 구역 중앙 테이블에서 잘만 회의하던데, 우리 팀은 그게 불편해서 나가서 회의를 하는 건가. 그게 왜 불편할까. 내가 있어서 불편한가? 회의에 참여시키기도 애매하고, 배제하기도 애매해서? 그럴 거면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면 되지 굳이 밖에까지 나갈 일인가? 나한테 회의실 잡아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싫은 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싫어하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밉보인 적이 있었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고민들은 이상하게 늘 자기 성찰로 마무리되었다. 딱 꼬집어 눈치 봐야 할 상황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늘 우리 팀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공유가 되지 않아 나는 어깨 너머로 눈치껏 일을 해야 했다. 어쩌면, 애초에 ‘우리’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는 건 아닐까. 아무리 내가 이 글로벌 마케팅팀 파티션 안쪽에 자리를 둔들, 내 진짜 자리는 5층에 놓인 책상일 테니. 그들이 나를 팀에서 어떤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가 몹시도 궁금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다가 집에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의 뇌는 체중의 2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2퍼센트의 뇌가 몸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쓴다고 하니 에너지 잡아먹는 귀신이 따로 없다. 고로 내가 매일 야근을 했던 때보다 매일 이런 고민을 하는 요즘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5층에서 지낼 때보다 초능력이 발현되는 횟수가 급속도로 늘어났으니까.
멀리 해외를 다녀온 후로 내가 어느 정도로 힘들어야 초능력이 나오는지 가늠이 되었다. 그리고 초능력이 컨트롤되는 수준에 이르니 나는 이 능력을 오랜 고민을 해결하는 데 사용해 보고 싶었다. 때를 기다렸다. 대체 이 사람들은 나만 사무실에 두고 아침마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매번 맡겨놓은 듯 사원증을 빌려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아야겠다.
“저기, 나정 님!”
드디어 때가 되었다. 정우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젠 뒤에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나는 미동도 없이 미리 벗어 책상 한편에 두었던 사원증을 집어 정우에게 내밀었다. 정우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고 나는 잠시 후 8층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쥐었다. 3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똑같은 화장실 문이 눈앞에 있었지만, 이곳이 1층 로비 옆에 있는 화장실이라는 걸 웅성대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1층 화장실은 사내 출입구 밖에 있어서 화장실만 나가면 밖으로 나가는 정우를 바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심스레 화장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출입구 쪽을 살폈다.
출입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글로벌팀 사람들. 이어지는 광경에 그간 나의 사원증이 왜 필요했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출입구 안쪽에 있는 정우는 자연스레 출입구 밖에 있는 팀장에게 사원증을 건네었고, 팀장은 내 사원증을 찍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뒤돌아 출입구 밖에 있는 선임에게 내 사원증을 넘겨주었다. 그러면 선임이 들어오고 그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손에서 손으로 사원증이 넘어갔다. 한마디로 출퇴근 시간 기록을 바꾸는 중이었다. 어쩐지 10시 전에는 한 번도 말을 건 적이 없었다. 그간 골머리 앓았던 게 이해될 만큼 좀 더 엄청난 비밀이 있길 바랐는데, 고작 온 피플 근퇴 조작에 쓰였다니. 허탈함에 헛웃음을 삼키며 그들의 동선을 피해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자리로 돌아오고도 한참 있다가 글로벌팀이 들어왔다. 커피와 함께 돌아온 그들을 보니 ‘아 진짜 회사 편하게 다니는구나!’ 싶은 생각과 한편으론 ‘그렇게 사원증 빌려가면서 어쩜 내 커피는 한 번을 안 사주냐’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그 비밀을 알게 된 후로 이따금 정우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사원증과 함께 커피를 내밀곤 했다. 뭐라고 한 적도 없고,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그들은 전혀 모를 텐데 갑자기 나에게 호의를 베푸니, 신기하기보다는 의심스러운 게 더 진심에 가까웠다. 잘해주는 것도, 그렇다고 대놓고 까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사이.
5층에서 지낼 때는 한 번도 밖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없었다. 혜인을 제외하고는 구내식당 메뉴에 크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고, 계약직 월급에 공짜로 제공되는 점심을 마다하고 밖에 나가서 콧바람을 쐬고 맛있는 밥을 탐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구내식당에 돌고 도는 메뉴를 지긋지긋해하는 8층 사람들은 이따금 밖으로 나가 밥을 먹었다. 사옥들이 늘어선 동네를 벗어나 입주 회사들이 즐비한 동네로 넘어가면 맛집으로 꽤 유명한 가게들이 몇 개 있는데, 아마 8층 사람들과 밥 먹는 날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판교 맛집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다 같이 점심을 먹고 밖에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하게 되면 늘 “나정 님이 무슨 돈이 있어요?”라며 팀원들이 한 명, 한 명 돌아가면서 내 커피를 사줬고, 밥을 사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 배려가 고마워야 하는데, 고맙기만 해야 하는데 괜스레 묘할 때도 분명 있었다. 너와 우리는 다르다는 걸 콕 짚어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글로벌팀 사람들은 같이 일할 때도 늘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부탁한 업무를 처리해 메신저로 보내면 늘 감사하다는 대답을 빼놓지 않고 보냈다. 혹여 내가 실수를 하거나 뭔가 빼먹더라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굉장히 정중하게 한 번 더 살펴볼 수 있는지, 수정을 해줄 수 있는지 요청하곤 했다. 파견 온 입장이니 내가 더 잘 보여야 하는데 도대체가 곁을 내주지 않아서 친해질 수가 없달까. 설명할 수 없는 소외감이 늘 남아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 들리는 귀가 있는데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있어야 하는 상황이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아, 또 이러네…. 아이 씨. 거참, 담배나 피우러 가자.”
팀장의 말에 옆자리, 뒷자리 사람들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같이 나갈지 묻지 않는다. 비흡연자인 내게 같이 나가자고 권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전임은 꼬박꼬박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오지랖이라도 떨면서 나도 은근슬쩍 같이 따라 나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계속 모른 척해야 하는 걸까. 늘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텅 빈 글로벌팀 구역을 홀로 지키며 나는 어디에 소속된 사람인지 생각에 빠지곤 했다. 8층에 올라온다고 8층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누구 하나 나에게 못되게 굴지 않고 점심때마다 함께 밥은 먹지만, 회식과 티타임 그리고 담배 타임은 꼭 자기들끼리만 갔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하루에 서너 번씩 모든 팀원이 30분씩이나 나가 있는 건지, 궁금한 마음에 몰래 뒤를 밟아본 적도 있다. 솔직한 심정으론 호기심보다 마음 한구석에 피어나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누구도 눈치 주지 않지만, 혼자서 눈치를 챙겨야 하는 나날들이 이어지니 나도 모르게 의심이 생겼다. 모여서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닌지, 나에 대해서 평가를 나누고 몰래 5층에 말을 전하는 건 아닌지. 또 이전과 똑같이 초능력을 발휘해 조심조심 뒤를 밟으며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불편함이 만든 불안감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허접해질 수 있구나. 하지만 이 불안을 달고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확인하고 떨쳐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는 때맞춰 발휘되는 초능력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글로벌팀이 우르르 탔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는 걸 보고, 후다닥 순간이동을 사용해 1층 로비 구석으로 이동했다. 널찍한 건물 기둥들을 방패 삼아 살금살금 쫓아가다 보니 회사 밖으로 모두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목적지가 먼 곳은 아니었고 흡연 구역에서 몇 미터 떨어진, 온 그라운드 근처 작은 정원이었다. 팀장과 전임은 벤치에 앉고 나머지 사람들은 옹기종기 서 있는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하나둘씩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고, 깊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피워댔다.
“이사님께서 이번에 또 회장님이랑 반대 의견 내신 거 같은데…. 아이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 명씩 돌아가며 내뱉는 한숨과 하소연. 그날의 대화는 하나같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내겐 팀 업무 전반을 공유하지 않으니 오가는 내용만 들어서는 그림이 한 번에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업무 진행에 대한 논의보다는 이사님과 회장님의 의중을 추측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건 대충 알 수 있었다. 물론 내 의심이 초라해질 정도로 그 속에 내 이야기는 없었다. 애초에 나는 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일 이야기나, 자기들 사는 얘기 나누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같은 장소에 모여 이야기하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지만 분명 회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는 걸 보아 이곳이 글로벌팀만의 아지트인 것 같다. 사무실에서 멀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별로 오지 않는 자리. 흡연 구역에서 멀지 않아 담배를 피울 수 있으면서도 너무 가깝지는 않아 대화 소리가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는, 끼리끼리 어울리기에 안성맞춤인 공간. 그곳을 알아낸 후로 몇 번 더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오늘은 내 뒷얘기가 나올까, 내일은 나올까 싶어 따라갔지만 들었던 이야기 중에 내가 크게 신경 쓸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걸 알고 나니 안도감과 허탈함이 함께 밀려왔다. 그들은 각자 자기 살길 찾느라 바쁘고, 본인 일 하느라 바빠서 파견 온 직원 생각할 틈은 없어 보였다. 내가 없는 그들의 시간을 보고 나니 오히려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임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