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달 후 (6/25)

한 달 후

한 달 후

익숙한 번호를 단 버스가 다가온다. 버스 배차 간격 때문에 이 시간에 오는 버스만 빈자리가 가득하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수월하게 버스에 올라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다시 새싹들이 돋아서 푸릇푸릇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또 이렇게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구나 싶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보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기려나. 뭐, 무슨 일이 생기든 오늘은 오늘대로 흘러가고 퇴근 시간이 또 오겠지. 미리 걱정하는 건 이제 의미가 없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로 입사한 지 딱 일주일이 된 소진은 목소리만큼이나 에너지 넘치는 미소를 띠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 앉으며 컴퓨터를 켜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1년 전 나는 어땠는지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이제는 익숙해져 터덜터덜 걸어오는 출근길을 그녀처럼 설렘 가득 담아 사뿐사뿐 걸어오던 때가 있었지.

“저, 선배님! 어제 말씀하신 거 정리해 봤는데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아, 메일 주세요. 검토하고 피드백 해드릴게요.”

비록 신입 사원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는 이제 내게서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자리를 영악한 노련함이 대신했다. 그 덕에 여기저기 치이느라 험난한 대행사에서의 직장 생활도 어느 정도 슬기로운 어른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소진 씨, 메일로 피드백 보내긴 했는데 시간 있으면 같이 보고 얘기해 주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급한 업무 먼저 좀 처리하고 점심 직전에 불러주시면 알려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진의 밝은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회사 대표 번호 회선이라 업무 파악 빨리 하라는 의미에서 대대로 막내에게 물려주는 회색 사무 전화기. 소진이 들어오면서 문제의 전화기가 놓인 자리를 채웠고, 나는 박 대리가 앉았던 옆자리로 옮겨 갔다. 이제 내 자리에 놓인 전화기만 받으면 되지만 아직은 예전 습관이 남아 소진의 전화기가 울릴 때마다 손이 움찔거렸다. 전화벨이 끊기지 않아서 차분하게 타이핑을 멈추고 소진을 불렀다.

“소진 씨, 전화 받아야죠.”

“아, 넵.”

벌써 벨 소리가 세 번 넘게 울렸으니 아마도 대표라면 한 소리 듣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치껏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 안녕하세요.”

수화기를 들고 소진이 내뱉은 당황스러운 인사말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며 속삭였다.

“회사요. 회사 이름!”

“아, 리얼커뮤니케이션입니다.”

동그란 눈으로 나를 마주 본 소진은 겨우 인사말을 끝냈다. 그러나 조용히 두 손으로 수화기를 감싸 쥐고 한동안 아무 말 못 하는 걸 보아, 대표가 전화를 건 게 분명했다. 쩔쩔매는 소진을 보니 오히려 위로가 되는 건 뭘까. 내가 못된 사람인 걸까? 그보다는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사람이 처음엔 다 그런 거구나’ 싶은 동질감에 마음이 놓였다.

“네, 팀장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들고 수신 전환을 하려 이리저리 살피던 소진은 버튼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수신 전환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뺏어 들어 조심히 내려놓았다. 이윽고 팀장의 전화 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함께 한숨을 몰아쉬었다.

“휴…. 감사합니다.”

“대표님이시죠?”

“네….”

“다음에 주의하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물론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신경이 안 쓰일 리 없다는 걸 나도 안다. 그래도 지금 소진에게는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그 당시 내가 듣고 싶었던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건넸다. 그 시절에 나는 이런 위로가 참 간절했으니까.

“수신 전환은 어떻게 하냐면요.”

아예 전환 방법을 설명해 주려 소진의 자리로 의자를 끌고 다가갔다. 전화기에 손을 뻗는 찰나, 점심 배달도 안 시켰는데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아직 회사에 익숙하지 않은 소진을 두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섰다.

“잠시만요.”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자 우체국 집배원이 서 있었다.

“여기 김가현 씨 있나요?”

“제가 김가현인데요?”

“아, 여기 수령 사인 좀 해주시겠어요?”

뭔지 모를 택배를 내 품에 안겨준 집배원은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봐도 수신자를 알 수 없는 작은 상자. 이리저리 흔들어보아도 크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택배에는 선명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가벼운데 설마 폭탄이 들진 않았겠지. 자리로 돌아와 커터 칼을 집어 들고 조심스레 테이프를 갈랐다.

작은 상자를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너무나 익숙한 내 지갑.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지갑을 집으려니, 택배 상자 구석에 놓인 종이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갑을 주워 안에 들어 있는 명함을 보고 보냅니다. 제가 사정이 급해 현금을 사용했습니다. 지갑을 찾는 데 사용했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쪽지의 내용. 지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분증과 카드, 내 명함과 언니가 준 마지막 명함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러니 누군지 모를 이 사람이 말한 대로 지갑을 찾는 데 들어 있던 현금을 썼다 치면 사실 아깝지 않은 일이다. 당황스러움과 황당함 그리고 어이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헛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 명함을 잃어버린 뒤 펼쳐졌던 대환장의 시간이 스르륵 머릿속을 지나갔다. 함께했던 박 대리가 떠나면서 인수인계를 받느라 허덕였고 새로운 대리와 후배가 들어오면서 중간 관리자로서 역할에 적응하고 업무를 새로 익히는 중이었다. 위아래로 끼인 샌드위치 역할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지만, 나대로 살아남는 법을 만들어갔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니 이제 완벽한 회사원이 되겠다는 로망은 완전히 접었다. 그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내 자리를 채우고 버티자는 생각이 대신 자리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태한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했겠지만, 이쯤 되어 보니 적당히 하자는 마음가짐을 선이나 악으로 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까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숱한 일들이 쌓이고 쌓였다. 어느 한순간, 신의 계시를 받은 듯 단번에 바뀐 것도 아니었다.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야 할 때는 더 나아가고 멈춰야 할 때는 멈췄다. 시간을 되돌릴 명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 명함이 없이도 사는 법을 배워야 했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러고 나니 명함이 다시 손안에 들어왔다. 이 상황과 지금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헛웃음이 계속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에요. 잃어버린 지갑을 찾았네요.”

내 허탈한 웃음소리와 달리 소진의 입에서는 순박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와! 어떻게요?”

“그러게요. 어떻게 신기하게도 돌아왔네요.”

“지갑이 선배님한테 꼭 가야 하는 운명이었나 봐요.”

소진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너무나도 진부한 그 문장이 마음에 닿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운명이라니. 그런 신비로운 일이 아직도 나에게 더 일어나려는 걸까. 나한테 이제 와 이 명함이 필요할까? 왜 나에게 지금 이 명함이 온 걸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니 전화 받는 법을 포스트잇에 적어 전화기에 붙이고 있는 소진이 보였다.

“소진 씨, 혹시 내가 말도 안 되는 선물 하나 주면, 내 말 한번 믿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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