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Day (5/25)

D–Day

D–Day

이상한 기운에 눈을 떴다. 지난 밤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는데, 눈을 번쩍하고 뜨니 평소보다 방이 너무 환했다. 손에 쥔 채로 잠들었던 핸드폰을 열어보니 이상한 기운은 기우가 아니었다. 지각이다, 지각!

간밤에 퇴근한 모습 그대로 잤으니, 일어나 옷매무새만 다듬고 책상에 놓인 물티슈 하나 집어 들고 그대로 뛰어 나가 택시를 잡았다. 앞뒤 사정도 없이 그냥 빨리 가달라는 말에 택시 기사는 도로를 내달렸다. 차 안에서 화장을 고치느라 어디쯤 온 건지도 못 알아챘는데, 시야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와 놀라서 정차를 외쳤다.

“아저씨, 저기 앞에 사거리에서 세워주세요!”

“예에!”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지갑을 찾아 카드를 꺼내니 기사는 이미 결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센스라니.

“아가씨, 그렇게 서두르다가 오늘 일 치르겠네.”

“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여, 여기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서둘러 택시에서 내려 사무실을 향해 달렸다. 좋은 하루가 되길. 기사에게 건넨 인사는 오늘 나에게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부디 무사히 지나가길. 사무실에 조심스레 들어가니 다들 한창 일하는 중이었다. 살며시 들어가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팀장과 눈이 딱 마주치고야 말았다.

“김가현.”

짧고 단호한 목소리. 혼쭐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너 입찰 제출 2시 아니야?”

“네. 맞습니다.”

“기차 몇 시야?”

“기차요. 11시 반입니다.”

“서둘러라. 늦는다.”

“넵, 알겠습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니 9시가 살짝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팀장은 내가 지각한 것보다 여태까지 우리가 쏟은 시간이 다 수포가 될까 봐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어제 좀 도와주지. 이제 와 이런 하소연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해.

“10시까지 제출 기획안 최종본 준비해서 회의실로 들어와.”

“넵.”

서둘러 자리로 가 컴퓨터를 켜고 가방에서 USB를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컴퓨터 부팅은 왜 이렇게 느리고 소리는 어찌나 요란한지. 초조한 마음으로 화면이 켜지기를 기다렸지만 나를 맞이한 건 새파란 화면이었다.

“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습관대로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전원을 내렸다가 다시 켜보기도 하고 선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보기도 했지만, 영락없이 이건 블루 스크린이었다. 신이시여. 대체 왜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블루 스크린입니까. 어제 박 대리 일 도와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습니까! 듣는 이 없는 원망이 터져 나왔다. 이럴 시간이 없다. 박 대리의 자리로 달려가 조심스레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불렀다.

“대리님….”

“네, 가현 씨.”

“저 컴퓨터가 블루 스크린이라, 혹시 컴퓨터 좀 잠깐 쓸 수 있을까요?”

“아…. 저 오전 중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좀 있어서 자리를 비워주기는 어려울 거 같은데….”

박 대리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찌푸린 미간 탓에 오늘따라 찢어진 눈매가 나를 날카롭게 훑는 것처럼 느껴졌다.

“USB에 기획안 담겨 있는 거죠?”

이내 그녀는 내 손에 들린 USB를 홀랑 집어 들더니 새삼 쿨한 척 대답했다.

“제가 출력할게요. 가현 씨는 출력물 나오면 받아서 제본해요. 어차피 수정 사항은 이미 다 확인했잖아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욱하는 마음에 ‘야. 네가 어제 일 시켜서 아무것도 못 했잖아. 인간아!’ 하고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말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겨우 참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좀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대리님 어제 가져가신 노트북은요?”

“아… 그거 오늘 쓸 일 없을 줄 알고 안 가져왔는데…. 회의실 옆방에 하나 더 있기는 한데 그거는 프린터 연결 안 되어 있어요. 그래도 문서 수정은 할 수 있으니까 기차 탈 때 챙겨 가요.”

“네. 알겠습니다.”

선심 쓰듯이 해주는 말도 정말 너무했다. 본인 할 일 넘겼다고 공용 노트북도 안 가져왔으면서 챙겨주는 척이라니. 어제 애써서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고? 그래 놓고는 프린트를 대신 해주니 지금 엄청나게 도와준다고 생각하겠지? 이 엉망진창인 회사. 이 거지 같은 상사.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지긋지긋한 취업 준비를 끝낼 수 있게 해줘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매일 야근을 해도, 점심시간에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단 한 번도 먹지 못해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닐 수 있고, 따박따박 매달 월급이 입금되는 것만으로 다 괜찮았다. 어떻게든 하다 보면 하나 언니 발끝쯤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이토록 마음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니. 회사가 화장실도 아니고, 들어올 때 마음과 눌러앉았을 때 마음이 다르다고 누군가 나에게 알려준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지겨워질 줄이야. 사람도 싫고, 사무실에 있는 볼펜 한 자루까지도 이제 다 징글징글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 이런 시간을 버티며 하루를 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버틸 수 있을까. 모든 것들에 기대를 버려야 하는 걸까. 그렇게 기대하지 않으면 좀 나아지려나. 오늘도 또 하나, 회사에 미련을 두지 말자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나는 부지런히 프린터를 향해 걸어갔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터질 듯한 내 마음을 아는지 프린터도 꾸역꾸역 문서를 토해내고 있었다. 몇십 페이지짜리 문서를 열 부씩, 어제만큼 또 찍어내려니 이 녀석도 아마 일하기 싫은 마음이 한가득하겠지. 동질감이 느껴지니 말없는 회사 프린터마저도 친구 같았다. 그러나 이 마음도 오래가진 못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이랄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의 고충을 몰랐던 내 탓이지.

용지 부족.

바로 비품실로 달려갔지만 박스가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자리에 텅 빈 상자만 놓여 있고, 정작 A4 용지는 한 묶음은커녕 단 한 장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안고 서둘러 경영 지원팀에 달려갔다.

“지민 씨, 용지 다 썼어요?”

“아, 어제 대리님이 다 쓰셨는데…. 너무 늦게 말씀해 주셔서 주문을 오전에 했어요.”

“하…. 미치고 팔짝 뛰겠네.”

결국 참고 참았던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말을 못 참고 하게 될까. 여기가 다이내믹한 하루의 끝이었으면 좋겠다. 제발 부디.

“법인카드 좀 주세요. 사무용품점에 갔다 올게요!”

지민이 건네준 카드를 낚아채듯 들고 무작정 뛰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이미 9시 반이 넘어갔다. 팀장과 회의하기 전까지 다 준비할 수 있을까. 동동거리는 마음만큼 내달렸다. 초겨울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낑낑대며 A4 용지 상자를 들고 뛰어와서 마저 출력한 뒤 제본기 앞에서 기계처럼 제본 책자를 만들어냈다. 오탈자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링 바인딩을 하고 있는데 회의실에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가현!”

“네에! 갑니다!”

팀장의 부름에 제본하던 걸 내려놓고, 완성한 기획안 두 부만 챙겨 달려가며 허공에 SOS를 외쳤다. 어디서 그런 깡이 나왔는지.

“대리님! 저, 시간 때문에 제본 좀 마무리해 주세요!”

그녀가 나를 도울지 안 도울지 의심할 시간도 없었다. 그간의 눈칫밥으로 지금 상황을 파악했다면 도와주겠지. 막연한 기대를 걸고, 그녀의 대답도 듣지 못한 채 회의실로 들어갔다.

팀장에게 조심스레 기획안과 제출 서류를 내밀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를 하고 긴 시간 공을 들였다고 해도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편할 순 없었다. 부지런히 1년 가까이 일을 배웠고 이 정도면 모자람 없이 일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잘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자꾸만 손톱을 쥐어뜯게 되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길 없는 팀장은 펜을 들고 서류 곳곳에 가차 없이 체크 표시를 그렸다. 처음엔 표시가 몇 개나 될지 세고 있었는데 점차 셀 수 없을 만큼 속도가 빨라져서 셈을 포기했다. 저렇게나 고칠 데가 많다고?

잠시 후, 회의실에서 나올 때 내 영혼은 이미 사무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탈자부터, 순서 변경에 자료 도식화 비율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한 팀장 때문에, 아니 정확히는 팀장 덕분에 수정해야 할 곳이 산더미였다. 나보다 훨씬 꼼꼼한 상사가 미리 짚어주어서 감사할 따름이지만, 촉박한 시간이 문제였다. 이따 기차에 타자마자 뽑아놓은 서류에서 오타를 일일이 찾아 수정액으로 고치고, 노트북으로 문서도 수정해야 한다. 내 눈으로는 골백번을 봐도 놓쳤던 부분인데 어쩜 팀장 눈에만 쏙쏙 보였을까?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입찰 앞두고 탈탈 털렸으니 기가 팍 죽어야 하는지 나도 내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회의실을 나오니 책상 위에 반듯이 놓인 제본 열 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제본 더미를 보자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여태까지 박 대리에게 품었던 악한 마음들이 이렇게 사소한 걸로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건가. 난 참 단순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동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뒤통수로 팀장의 말이 내리꽂혔다.

“박 대리, 지금 준비해서 가현이랑 같이 갔다 와.”

“네?”

당황스러운 지시 사항에 숙였던 고개를 쓱 올리다가 팀장에게 되묻는 박 대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 역시 갑작스러운 일정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같았다. 그런데 넋이 나간 채로 회의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빛이 또렷하게 바뀌더니 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더 준비할 건 없을까요?”

“그 첨부 서류 중에 몇 개 잘못 뽑은 거 있더라고. 체크했으니까 연락해서 용역 이행 실적서 다시 뽑아서 챙기고, 같이 수정 사항 검토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두 사람의 대화가 신기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박 대리는 바로 수화기를 들고 해당 광고주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걸 멍하니 보다가 내 어깨를 턱 잡는 팀장의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박 대리 기차표 끊어주고. 늦지 않게 가라.”

“아, 넵.”

PM으로 이름도 올렸겠다. 입사한 지 1년을 다 채워가니 내가 뭐라도 좀 되는 일당백 사원인 줄 알았는데 막상 들춰 보니 ‘김가현’은 요란한 빈 수레였다.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프로의 세계는 여전히 까마득하구나. 이 마음을 곱씹을 새도 없이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숨을 돌릴 즈음에 기차를 타고, 긴장이 풀어질 즈음 세종시에 도착했다. 곧이어 최종 목적지인 정부세종청사로 가기 위해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안녕하세요. 세종청사 앞으로 가주세요. 저 기사님, 정말 죄송한데요. 되도록 좀 빨리 가주세요!”

“어이구 급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짐 챙기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입은 이미 ‘빨리, 빨리’를 외치고 있었다. 여유 있게 일찍 오고 싶었는데 수정할 게 많아 최종 피드백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신없던 어제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순간마다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안함에 손톱을 자꾸만 물어뜯었다. 딱 딱 딱. 일정한 소리가 택시 안에 퍼졌다.

“가현 씨.”

“네?”

“공공 입찰 처음 해보죠?”

“네….”

“한 번이 어렵지, 아마 다음부터는 좀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 네.”

박 대리의 짧은 위로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스러운 마음도 어딘가 피어났다. 어제 자기가 그렇게까지 이기적으로 굴지만 않았어도 내가 오늘 이렇게까지 정신없진 않았을 텐데. 그걸 알아서 미안한 마음에 챙겨주는 건가. 그럼 미안해할 일 없게 애초에 잘해주던지. 여태까지 미루다가 이제 와 잘해주면 다인가. 나쁜 마음이 꼬깃꼬깃 구겨져 한구석에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을 사람이 그녀뿐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에 쌓인 나쁜 마음 더미를 휙 하고 쓰러뜨렸다. 이런 복잡한 내 마음속 이야기가 그녀에게 들린 걸까?

“가현 씨, 올라가면 혹시 잠깐 면담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일단 마무리하고 맛있는 거 먹어요.”

“네!”

갑자기 무슨 면담? 이 와중에?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대환장만 생각하면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녀 머리채를 잡고 여러 번 흔들어댔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가지는 감정은 애증보다도 훨씬 다채로웠다. 어차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가 느끼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단 한 글자도 표현할 수 없다. 친구도 아니고, 여긴 회사니까. 나는 막내고 까라면 까야지. 내가 상사에게 그 어떤 감정을 품는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당황스러운 스케줄을 단번에 받아들이고 대범하게 대처하는 박 대리에 비해, 나는 오만가지 생각을 꼭꼭 숨기려다 손톱을 물어뜯고, 손목을 달달 떨어 티를 내고 마는 초짜였다.

상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터기를 보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다가 품에 있던 쇼핑백을 쓰러트려 안에 들어 있던 서류가 우르르 쏟아졌다. 우당탕거리는 나를 보더니, 뒷자리에 있던 박 대리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계산할 테니까 서류 잘 챙겨요. 빼먹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박 대리는 자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기사에게 건넸고, 나는 쏟아진 서류를 쇼핑백에 다시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니 오히려 메고 있던 가방도 기울어져 또 우르르 소지품이 쏟아지려 했다. 아, 오늘 정말 왜 이러냐. 하나부터 열까지 되는 일 없는 하루에 울컥했지만 지금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곤 물건을 쓸어 담고 차에서 내리려니, 박 대리가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아가씨!”

“네?”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기사의 손이 옆자리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요한 일인 거 같은데 잘해요. 놓치지 말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기사가 알려준 서류 봉투를 집어 가방에 쑥 밀어 넣었다. 이제 정말 다 와 간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가 서류를 제출하고 나면, 이 모든 잡념들로부터 영원히 안녕이다. 이쯤 되니 입찰 성공 여부는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회사에게는 결과가 꽤나 중요하겠지. 물론 입찰에 성공한다면 내 커리어 측면에서도 쏠쏠한 키 카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되든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접수처를 앞에 두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한 번 더 뭐 체크해 볼 거 있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갈까요?”

“네.”

박 대리를 따라 뚜벅뚜벅 내딛는 걸음. 내 커리어의 시작이 될 큰 프로젝트. 그녀의 말처럼 이걸 시작으로 ‘이제 좀 더 프로다운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싶은 고민도 잠시,

“회사명이 어떻게 되시나요?”

“리얼커뮤케이션이고요, 저는 김가현입니다.”

“네, 접수증이랑 제출 서류 주시고요. 명함은 여기 올려두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서류를 꺼내 순서에 맞게 체크하고 책상에 올려두었다. 마지막으로 명함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다. 지갑이 왜 여기 없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재킷과 다른 옷 주머니를 다 뒤져봐도 지갑은 없었다. 가방까지 이리저리 살펴봐도 지갑이 보이질 않는다. 뒤에 줄지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박 대리가 물었다.

“왜요. 명함이 없어요?”

“아, 지갑이…. 지갑을….”

“괜찮아요. 팀에 저도 포함되어 있으니 제 명함 낼게요.”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고 제출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단정하게 적었다. 이건 아닌데. 내가 명함 때문에 대표한테 혼난 게 몇 번인데. 그래서 오만 가방마다 다 명함을 넣어두고, 다이어리에도 넣어두는데. 그리고 지갑은 대체…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생각을 더듬어보니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택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기차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핸드폰을 붙들고 어떻게든 그 택시를 찾아보겠다고 애를 썼지만 닿을 길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떨고 있으니 옆자리에 앉은 박 대리가 말을 걸어왔다.

“카드 정지부터 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네. 카드 정지.”

“결과는 보통 회사 번호로 연락 오고 메일로도 통보 오니까 너무 염려치 말아요. 그리고 아직까지 연락 안 온 거 보면 입찰 서류엔 문제없는 걸 테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네….”

대답은 했지만, 한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중요한 거 없었는지 생각해 봐요.”

그녀가 물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카드 정지 같은 건 생각도 못 할 만큼, 신분증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나에게 중요한 것. 마지막 남은 명함 한 장. 하나 언니가 준 마지막 명함이 지갑에 들어 있다. 그 명함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니 어디다 얘기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왔다.

“살다 보면 일이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는 날도 있고 그런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요. 다 전화위복으로 좋게 돌아올 거예요.”

“네….”

너무 좌절한 내 모습에 그녀는 성심성의껏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사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그냥 멍했다. 지금 이 모든 현실이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저 집에 가서 기절하듯 누워버리고 싶었다. 아니지, 그냥 시간이 여기서 멈춰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듯 기다리던 기차가 곧 도착했고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대리님, 이쪽이네요.”

“아, 고마워요.”

박 대리를 안쪽 자리로 먼저 안내하고 나도 털썩 자리에 앉았다. 세상 다 꺼질 듯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눈치가 보여 겨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용히 내뱉었다.

등받이에 힘없이 기대어 핸드폰을 넣으려 가방을 열었다. 서류 뭉텅이를 제출하고 나니 한순간에 텅 비어버린 가방 속에서 지갑에 정신이 팔려 여태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서류 봉투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택시 기사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시 한번 선명하게 떠올랐다.

“중요한 일인 거 같은데 잘해요. 놓치지 말고!”

미쳤다, 김가현. 미쳤어. 미치겠다. 바꿔서 제출해야 할 서류가 내 가방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팀장 지시로 박 대리가 광고주에게 연락해 겨우 바꿔준 용역 이행 실적서를 수정 전 서류로 내버렸다. 오늘 내 정신은 분명 어딘가 다른 데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일 수 있을까? 하늘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어색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 봉투를 가방 안쪽 더 깊숙이 쑤셔 넣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보이지 않도록 블랙홀 같은 게 가방 안에 존재한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왜 지갑 같은 건 잘도 사라지면서 이 서류는 여기에 남아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왜 이 중차대한 사실을 이제야 알았을까. 그간 내가 들인 공과 우리 회사가 들인 시간과 노력, 이 모든 게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하나 때문에 한순간에 수포가 되었다. 그럼 지갑이라도 잘 챙길걸. 그 명함만 있었어도 이 말도 안 되는 하루를 온전하게 되살릴 수 있을 텐데. 오만 가지 ‘만약에’라는, 이제는 아무 쓸모 없어져 버린 가정법을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하고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가현 씨, 어디 안 좋아요?”

박 대리가 눈썹으로 한껏 팔자를 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지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가장 영리한 걸까.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까? 나만 입 다물면, 내가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무도 모를 텐데. 그래, 모른 척하는 게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일지도 몰라. 어차피 심사 단계에서 서류를 제대로 본다면 입찰은 물 건너간 거고, 떨어진 입찰 서류에 책임자를 찾지도 않을 테니 그냥 입을 다물자. 말하지 말고 조용히 없던 일 셈 치자. 그러면 돼. 그래도 돼.

그렇게 도착한 서울. 아직 많이 늦지 않은 시간. 박 대리가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사겠다며 초밥집에 데려가 주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여럿이서 밥과 술을 나눠 먹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그녀와 마주 앉아 독대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어색함에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무릎에 올려두고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기차에서의 굳은 다짐과 달리 자꾸만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눈앞의 메뉴판에 집중이 안 되고 자꾸만 딴생각이 들었다.

“A 세트 어때요?”

“네?”

“이 정도면 둘이서 먹어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네, 괜찮습니다.”

“초밥 안 좋아하는 거 아니죠?”

“아, 아니에요. 좋아합니다.”

“그래요. 그럼 이걸로 먹어요.”

오늘따라 박 대리의 이야기가 평소와 다르게 들렸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회사에서 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빌런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챙겨주고 도와주고. 이렇게 애매하게 잘해주면 내가 미워할 수도 없잖아. 자꾸만 죄책감이 더해져서 실수를 털어놓아야 할 것만 같다. 하….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넘쳐났다.

“가현 씨.”

“네?”

“솔직히 말해봐요. 무슨 일 있죠?”

“아, 아니에요.”

“근데 왜 평소답지 않게 오늘 이렇게 힘들어해요. 아침에도 허둥지둥하고, 지갑을 잃어버리질 않나.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말해도 돼요.”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긴장을….”

“무슨 사람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을 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저… 사실은요.”

안 되겠다. 혼이 나더라도 매를 맞고 마는 게 낫지. 이렇게 말 안 해서 화병이 나는 것보단 낫겠어. 기어이 난 가방에 손을 넣어 서류를 꺼내 박 대리 앞에 내보였다.

“이거…. 이게 가방에 그대로 있더라고요. 아까 기차 탈 때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그녀는 슬며시 손을 뻗어 내가 건넨 서류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뻔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시금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내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나는 긴장했던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나 혼날까. 머릿속은 하얘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뻥 뚫린 듯 가벼웠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 다물고 잔소리와 타박을 견뎌내는 거겠지. 대표 때문에라도 맷집이 생겨서 그 정도는 나도 버틸 수 있을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예상과 전혀 다른 행동을 취했다.

우리 사이에서 팔랑이던 종이가 시원한 소리와 함께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박 대리는 조각을 겹쳐서 또 찢고, 한 번 더 찢었다. 종이는 순식간에 여덟 조각이 났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조각난 종이를 한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류가 바로 코앞에서 구겨지더니 한낱 종잇조각 쓰레기가 되어 한 장이 아닌, 한 줌이 되어버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어….”

낮은 탄식을 들은 박 대리가 고개를 들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서류 낸 거예요. 그러니까 잊어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난 다시 한번 되물었다.

“네?”

“어차피 마감은 끝났고 우리가 지금 여기서 뭘 어떻게 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아요. 가현 씨도 그걸 모르진 않잖아요. 말 안 하면 아마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나한테 왜 말한 거예요?”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온갖 그럴듯한 말로 핑계를 대야 하는 걸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결국 내 선택은 솔직함이었다.

“양식에 맞지 않는 서류를 냈으니 우리는 아마 떨어질 거고, 이유를 아는데 숨길 수만은 없었어요. 모두 오랫동안 애쓴 프로젝트였는데 제가 다 망쳐버렸어요. 죄송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제출했어도 떨어질지 붙을지는 우리가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 가현 씨가 여기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그래도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으니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꼭 붙잡고 박 대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식사를 이어가려다 수저를 내려놓고 관자놀이와 눈썹을 두어 번 문지르더니 나를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준 건 고마운데. 아마 나였다면 말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묻었을 거예요. 근데… 나도 무슨 마음인지 알아요. 신입이면 그냥 미주알고주알 다 보고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으니까.”

그제야 숨을 깊게 푹 내쉰 그녀는 참다못해 튀어나왔다는 듯한 웃음을 내보였다. 잠깐 사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기에 저렇게 회한 서린 웃음을 터트렸을까.

“말 안 하면 왜 말 안 하냐고 혼나고, 뭘 물어보면 그것도 모르냐고 혼나고. 이러나저러나 다 혼날 일투성이죠. 그래도 말 안 하고 끙끙대는 것보다 말해서 혼나고 터는 게 낫겠다 싶어서 결국 말했단 거 알아요. 근데 가현 씨가 이렇게 보고를 하면 이제 책임은 내 몫이 되는 거예요. 팀장님이 가현 씨 혼자 보내지 않고 나를 함께 보냈다는 건 결국 책임자로 보낸 거고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내 책임이 되는 거예요. 가현 씨가 서류를 내지 않았고 난 그걸 보고를 받았고, 어차피 이제 와 달라지는 건 없으니 나는 서류를 찢은 거고. 바뀌는 게 없을 땐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정답일 수도 있어요.”

시답지 않은 일은 다 나에게 미뤄버리는 그녀와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어느 순간엔 참 허무할 때가 많았다. 그래봐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데 먼저 회사에 들어왔다고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꼴사나운 대장놀이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근데 그 모든 생각이 산산조각 났다. 학교 선배들에게서 느꼈던 감정과 전혀 다른, 정확히는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저런 말을 후배에게 해줄 정도로 회사 생활에 유연한 사람이었다니, 내가 여태 그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은 박 대리가 빤히 바라보기에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떡해요?”

“우리는 이제 밥을 먹으면 되겠죠?”

눈과 입에 허탈하지만 그보다 편할 수 없는 미소를 띠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굳이 책임을 지고 싶다면 바꿀 수 없는 지나간 일에 매달릴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수주를 따냈다면 얻었을 예상 매출 규모 정도의 다른 일을 찾아서 그걸 달성하면 되겠죠? 결국 회사라는 건 성과와 숫자로 나를 증명하는 곳이니까. 그 이상의 책임감이나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돼요. 그래야 회사에서 버티죠.”

그녀의 똑 부러지는 말을 듣고 나니 이기적인 듯한 그녀의 행동들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나에게 영리하다 못해 얄밉게 보였던 것들도 결국 한낱 평범한 직장인의 단면이었다니. 아니 어쩌면 가장 똑똑한 회사원인 걸까?

“왜요. 실망했어요? 이런 사수라서?”

“아니요. 그냥 좀, 생각했던 반응이랑 달라서요.”

“그래요? ‘어떡해요!’ 하고 같이 호들갑이라도 떨어줄걸 그랬나? 미안해요. 내가 그러기에는 좀 회사 생활에 무뎌진 편이라.”

“아니에요. 전 여태까지 회사 다니면서 한 번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서요.”

“나 회사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는 건데?”

“아! 그런 뜻이 아니라요….”

“괜찮아요. 무슨 뜻으로 얘기한 건지 알아요. 나도 책임져야 하는 관리자로선 후배가 ‘네가 해결해!’라고 폭탄 던지면 난감하긴 한데 그냥 사회생활 먼저 해본 선배로서는 왠지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현 씨는 너무 열심히만 해서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회사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도 있어요. 그럴 땐 혼자 싸안고 있지 말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에게든 토스해요. 한 번 말하는 게 어렵지, 그 한 번을 깨고 나면 수월해져요. 오늘 이렇게 용기 내 말한 것처럼요.”

“그래도 돼요…?”

“회사 생활도 결국 삶의 일부인데 다 참고 일하다 나중에 가서 얘기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회사에서 일을 잘하든 못하든 가현 씨는 그냥 가현 씨예요. 그러니까 대표님이든 팀장님이든 누가 뭐라고 해도 일로 받아들여요.”

어쩐지 박 대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신선하면서도 알 수 없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평소에 종종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또 철석같이 알아들은 그녀가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근데 이제 이런 얘기 못 할 거 같아서요.”

“왜요…?”

“나 이직해요.”

“네?”

아니, 마케팅 대행사에 실무자가 겨우 팀장 하나, 대리 하나, 사원 하나인데 대리마저도 나간다고?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친 듯한 기분에 동공이 미친 듯 흔들렸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놀랐죠? 미안해요.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원래 이직이라는 게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거니까.”

“아니…. 그래도 귀띔은 해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가현 씨, 잊지 말고 기억해요. 이직 준비는 절대,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하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서운할지 몰라도 꼭 기억해요. 이거 진짜 회사 생활에서 중요한 건데 내가 많이 알려주는 거다.”

아니. 말도 안 되는 폭탄을 던져주고 선심 쓴다는 듯 말하는 이 여자는 진짜 뭐지. 고맙다가도 밉고, 밉다가도 떠나는 게 아쉬워지는 사람. 누군가에 대해 이토록 오만가지 감정을 갖게 되는 곳이 회사인 걸까. 박 대리의 말에 차마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오질 않았다.

“진짜 많이 놀랐나 보네. 그래도 대표님께 말해서 인수인계 할 사람도 구해놓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신입도 구했다고 했어요. 이제 가현 씨도 선배 되겠네요.”

내가? 고작 1년 차에 선배가 된다고? 오늘만 봐도 이렇게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데, 내가 좋은 선배가 될 수 있을까. 충격적인 얘기를 갑자기 너무 많이 들어서 머릿속이 정말 새하얗다 못해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세어버릴 것 같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길 길이 없어 들고 있던 수저를 테이블에 살며시 내려놓으니 박 대리가 조심스레 초밥 접시를 내 쪽으로 슬쩍 밀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가현 씨 같은 선배면 좋지. 1년 동안 다른 직원들 떠날 때 묵묵히 백업해 준 거 팀장님도 말 안 해서 그렇지 다 알고 있어요. 다만 회사라는 게 칭찬은 박하고, 질책은 후한 데니까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생각 말고 스스로 칭찬해 주면서 다녀요. 후배들한테는 칭찬 아니어도 이따금 오늘 내가 한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서류 박박 찢어주는 것만으로 힘이 될 테니. 해보다가 정 아니다 싶을 땐 과감하게 내려놓아요. 제발 다 잘하려고 하지 마요. 실수도, 실패도 결국 다 지나가야만 밑바탕이 되는 거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다 놓아버리겠다고, 포기했다고 수없이 외치면서도 사실 나는 여전히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그 욕심을 놓지 못했던 거였어. 어쩌면 그녀에게는 내 명함 같은 신묘한 능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내 안에 있는 욕심까지 읽어내다니. 근데 이게 뭐가 중요해. 그녀는 이제 떠나갈 테고 나는 선배가 된다는데.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나를 덮치려고 할 때, 박 대리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다 잘하려고 하지 마요. 실수도, 실패도 결국 다 지나가야만 밑바탕이 되는 거니까.”

내 손엔 이제 단 한 장의 명함도 남지 않았지만, 애초에 명함은 무한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명함을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 경험을 통해 배웠으니 명함이 없어도 괜찮을 거야. 앞으로 저지를 숱한 실수와 사고를 통해서 또 이렇게 하나씩 익혀가면 되니까.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은 말 그대로 마법이었다. 명함을 잃어버렸어도, 입찰을 시원하게 말아먹었어도, 내일이면 나는 당연한 듯 출근을 할 테니. 그렇게 살다 보면 나에게도 어느 순간 슬며시 담대함 같은 게 생겨날지 모르니까. 그래, 김가현. 잘하고 있다. 너는 잘하고 있어. 박 대리의 말대로 이렇게나 엉망진창인 오늘 하루를 간절한 칭찬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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