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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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이구나. 처음으로 정식 담당자가 되어 기획안을 제출하는 날. 몇 주를 이날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중이니, 출근길 핸드폰 화면에 뜬 날짜만 봐도 긴장감이 확 곤두섰다. 내일 오후 2시까지 정부세종청사에 방문 제출이니까 웬만하면 오늘 대부분 준비를 끝내놓아야지. 아침 출근 버스에 오를 때부터 쌈박하게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니 그 알찬 계획도 아무 의미 없어지고 말았다.
박 대리님| 가현 씨, 지금 파일 보낸 거 다섯 개씩 나눠서 표지 바꾸고 링 제본 부탁해요. ;D
나| 네, 대리님. 알겠습니다.
박 대리는 흘깃 봐도 정신없어 보였다. 프린트를 뽑다가, 제본을 하다가, 다시 자리로 와서 사무를 보다가, 또 금세 자리를 옮기는 그 사이사이마다 메신저로 지시 사항을 끊임없이 보냈다. 그래, 박 대리가 담당한 프로젝트의 제출 기한이 오늘 6시까지였지. 사람이 급해지면 도와줘야지. 급한 일이니까 다 같이 도와서 먼저 해야지. 그럴 수 있지. 근데 이렇게까지 나를 붙잡아둘 일인가. 자기가 담당이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요청한 자료를 정리하려고 프린터 앞에서 출력되는 문서를 기다리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에 박 대리 자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런 원망 섞인 마음도 잠시, 평소답지 않게 입술을 앙 다물고 모니터로 빠져들듯 목을 빼고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에 무슨 말을 더 덧붙이냐 싶어서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는 내가 바라본 것도 인지하지 못한 듯 노트북을 들고 팀장이 있는 회의실로 바쁘게 향했다.
어쨌든 이렇게 도와주면 내일은 날 도와주겠지. 설마 그냥 모른 척하겠어? 내가 이번에 같이 작업한 게 몇 갠데. 유난히 소란스럽게 일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용히 일하는 내 마음속에서도 오만 잡생각이 튀어나와 시끄럽게 요동쳤다. 그 생각 고리를 끊어버린 건 박 대리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였다. 전화는 계속 울리는데, 받을 사람이 없었다. 서둘러 내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당겨 받았다.
“네, 리얼커뮤니케이션 박서연 대리님 전화 당겨 받았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스킨네이처 김진희입니다. 박 대리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 지금 대리님….”
하느님보다 위에 있는 광고주에게 뭐라고 해야 가장 그럴듯한 이유가 될까.
“지금 회의 중이신데,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신가요?”
“아, 저희 지금 결산 시즌이라서 계산서를 맞춰보고 있는데 지난 11월 초 마무리했던 대행 건 견적서가 금액이랑 안 맞아서요.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저희 회계팀에 내용 확인해서 회신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좀 급해서 오늘 중으로 답변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다들 이렇게 난리야. 마음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화를 꾹 눌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회의실로 가 조심스레 유리문을 두드렸더니,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팀장과 박 대리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빼꼼 고개를 들이밀고 말을 전했다.
“아, 저 대리님. 스킨네이처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오늘까지 11월 집행했던 캠페인 견적서랑 정산 서류 확인해서 답변 달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럼 그거, 가현 씨가 지민 씨랑 같이 확인하고 답변 보내주세요.”
“제가요?”
“네, 오늘까지 보내달라고 했다면서요?”
“네.”
“그럼, 지금 제가 할 순 없잖아요?”
그녀는 양손에 서류를 가득 집어 들고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눈치를 주었다. 분명 입 밖으로 한마디도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눈빛과 행동에서 생생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가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잘 해야 하지 않겠니?’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아래에서 위로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데도 어쩜 그토록 아랫사람 대하는 듯 느껴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도 내가 아랫사람이 맞으니 그저 묵묵히 지시를 받아들여야 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박 대리의 답변을 듣고 나니 머리가 핑 돌았다. 나도 업무가 있고 계획이라는 게 있는데, 도대체 왜 내가 담당하는 일은 다들 안중에도 없는 거냐고. 그것도 우리 회사 일인데 말이야! 이 망할 놈의 회사, 나 정말 잘하는 걸까. 계속 여기서 버티는 게 맞는 걸까. 새하얘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자리로 돌아가 서둘러 제본 작업을 마무리했다.
갑자기 끼어든 광고주의 요청에 내일 준비까지 미리 다 처리하고 가려면 시간이 없다. 더 서둘러야 해. 잡생각 다 집어치우고 일단 급한 것부터 쳐내자. 급하다는 생각을 할수록 오히려 손이 더 둔해지는 것 같았다. 자꾸만 오타가 나고, 물건을 떨어트리고 실수가 튀어나왔다. 평소답지 않다는 걸 알지만 지금 나에게 벌어진 상황 자체가 평소와 달랐다.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꼭꼭 눌러 삼키며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나에게 자신의 일을 미룬 박 대리는 마감에 맞춰 서류를 제출한다고 팀장과 일찍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타자를 치고 있으니 고요함에 타자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연말 들어서는 혼자 사무실에 남겨져 일을 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볼 사람도 없고, 혼자서 이걸 다 하는 게 맞는 건가 싶고. 한번 시작된 물음은 한참이 지나도 끝나지 않고 떠올라서 일 처리 속도만 더뎌질 뿐이었다. 결국 일을 웬만큼 처리하고 사무실을 나설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