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그리고
셋째 날, 그리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고 대답했다.
“네, 리얼커뮤니케이션 김가현입니다.”
“어, 박 대리 지금 자리에 없어?”
모든 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날로 돌아왔다. 달라진 건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다는 것뿐. 나는 대표가 무엇을 지적할지,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에 아무 실수 없이 하루를 보냈다. 대표에게 여러 차례 연달아 전화가 오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잔소리도 듣지 않았다. 되레 ‘수고했다’라는 짧은 격려 인사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쉬운 마음에 가방을 열어 지갑을 찾았다. 지갑 속에 남은 명함은 이제 단 한 장뿐.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찢어버린 명함까지 되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간 수없이 했던 짜릿한 상상을 현실에서 이뤄 속이 시원했다. 내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했고, 어찌 되었든 사표를 집어던졌던 기억을 마음에 품고 다니는 게 나쁘지 않으니까.
그날 이후, 실수를 저지르거나 잘못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큰 실수를 저질러서 정말 만회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남은 명함 한 장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사표도 내봤고, 대표에게 소리도 쳐봤으니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그때의 짜릿함을 떠올리며 털어버리려 애를 썼다. 그렇게 착실히 버텼다. 버티니 시간이 흘렀고, 시간이 흐르니 어느덧 신입 사원 티는 조금 벗은 어엿한 팀원이 되었다.
문제는 그 탓에 새로운 직원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명 내가 회사에 들어온 후 고작 몇 주 만에 퇴사한 직원이 꽤 되었는데, 면접은 계속 보면서 아무도 뽑지 않는 걸 보면 대표는 직원 뽑을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연말이 다가왔다. 다음 한 해를 맡길 전담 대행사를 찾기 위해 온 관공서와 광고주들이 입찰 공고를 올리는, 한마디로 다음 한 해를 결정지을 중요한 시기였다.
고작 세 명의 실무진으로 온갖 입찰 공고에 참여하려니 1년 차 막내인 나도 프로젝트 담당자로 이름을 올려 기획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일개 사원인 내가 싫다고 해서 담당자가 안 될 수도 없으니 믿을 건 박 대리뿐이었다. 소심한 마음에 이렇게 해도 되는지 마음을 졸이는 나와 달리 이 회사에서 3년을 눌러앉아 일한 박 대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것’이란 타성에 젖은 대답만 해주었다.
한편으론 이상했다. 분명 박 대리와 함께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내 실력도 늘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빈틈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같이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묘하게 일은 내가 다 하고 공은 박 대리가 가져가는 느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발신처가 어디든지 간에 통화를 마치고 늘 나를 찾았다.
“가현 씨, 여기 수정 요청 왔으니까 레퍼런스 더블 체크하고 실행사 리스트업해서 4시까지 토스해 주세요.”
박 대리가 건네준 파일을 받아 들고 자리로 와 서류를 들척거려 보면, 지시 사항이 거창하게 쓰여 있지도 않았다. 대충 휘갈겨 쓴 포스트잇과 한눈에 봐도 성의 없이 체크 표시해 놓은 종이 더미. 책상 한편에 처박아둬도 어색하지 않을 상태의 서류를 전달하면서 꽤나 있어 보이는 말로 지시했다. 자연스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 같은 말만 자꾸 떠올랐다. 물론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는 것이니 딱 꼬집어 문제라고 할 순 없지만, 박 대리는 퇴근하고 나는 남아서 일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엔 내가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서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업무에 익숙해진 뒤에는 그녀보다 손이 느려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야근하다 넋 놓고 생각해 보니 내 일은 당연히 내가 하고, 박 대리의 일도 내가 하고 있었다. 분명 서류 속 담당자란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왜 모든 기획안을 내가 쓰고, 내가 편집하고, 내가 정리하고 있는 거지…. 어쩐지 점점 피곤함이 늘어가더라니. 이번 주에 야근을 며칠 했더라. 하, 다 제출하고 나면 제대로 말 한번 해봐야지. 이 모든 게 ‘일 배워보라’고 시킨 걸까? 그럼 뭘 좀 제대로 알려주든가.
공공 입찰이 처음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체크하며 해치우느라 바빠 미치겠는데…. 뭐 빼먹은 건 없는지, 꼼꼼히 본다고 보는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불안하고, 이젠 너무 봐서 더 들추어 보기도 싫을 지경. 긴장을 놓으면 사고가 터진다는데 이제 곧 제출이니까. 진짜, 진짜 조금만 참자.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