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둘째 날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번호의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앞서 타려고 스멀스멀 몰려드는 사람들을 제치며 남아 있는 졸음을 쫓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오늘은 운 좋게도 빈자리가 가득한 버스를 만나서 금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런 순간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에 ‘오늘 하루는 왠지 잘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보게 된달까. 창밖으로 가로수 사이마다 햇살이 서서히 차오르는 게 보였다. 어느덧 다가온 여름인가. 나의 봄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학교 다닐 때는 중간고사 준비한다고, 취업 준비를 할 때는 공부한다고 못 즐기고 막상 취업하고는 사무실에 처박혀 사느라 계절을 느낄 새도 없는 삶. 그래도 내 돈 주고 버스를 타고, 남들처럼 회사를 가는 건 다행인 일이지. 이렇게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을 와장창 깨버리는 문자만 없다면 말이야.
리얼컴 대표님| 어제 계약한 기획안 인쇄해서 박 대리랑 방으로 들어와.
출근 시간이 다 되지도 않았는데 재촉하는 문자가 왔다. 그 문자 하나로 애써 기분 좋게 출근하려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또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오늘은 또 얼마나 혼날까. 또 뭐로 혼날까. 아침이니 힘을 내보려 애쓰며 출근길에 나섰지만 사실 무엇 하나 괜찮은 게 없었다.
간밤엔 어제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설쳤다. 내가 어떻게 행동했어야 더 나았을지, 어떤 선택을 했어야 문제없이 상황이 해결되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답은 떠오르지 않고, 전혀 다른 욕심만 생겨났다.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으나, 차마 결심하지 못했던 일. 그 일을 실현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오늘 아침을 좀 더 특별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일평생을 조용히 바른 생활 청년처럼 살아온 내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할 미친년처럼 날뛰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건물에 도착해 평소에는 잘 가지 못했던 1층 카페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출근길에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막내인 내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게 영 건방져 보일까 싶어 늘 망설이다 결국엔 문을 못 여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니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평소에 먹지 않는 제일 비싼 커피를 시켰다.
“자바칩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요. 저지방 우유로 바꿔주시고 거기에 헤이즐넛 시럽 세 번 추가해 주시고 자바칩 추가해서 위에 올려주세요. 휘핑크림은 에스프레소 크림으로 바꿔주시고, 테이크아웃 할 거예요!”
요상한 주문을 곁들여 아침 출근용으로 절대 주문하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한 커피를 완성했다. 크림이 가득 올라가는 바람에 돔 커버까지 씌운 거대한 커피를 들고 사무실 자리로 가 털썩 앉았다. 남들보다 이른 출근이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여태 눈치를 보느라 한 번도 즐기지 못했던 모닝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달달함을 만끽했다. 이내 서랍을 열어 작은 쪽지를 꺼내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끄적거렸다. 그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직원들이 출근했다.
“가현 씨. 오늘 느낌이 되게 다르네? 좋은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어차피 지워질 거라서요!”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대답에 박 대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웃 고개를 기울여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저 미소로 답했다. 신비로운 명함의 능력을 나도 믿을 수 없는데, 앞뒤 사정을 모르는 그녀는 당연히 상상도 할 수 없을 테지. 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오늘 나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대표야, 어서 와라. 아침을 하얗게 불태우고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이 모든 기억을 바꿔놓을 거니까.
“안녕하세요.”
대표가 회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앉아 있던 팀장과 대리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인사말을 외쳤다. 나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내가 자리에 앉는 걸 본 박 대리는 맞은편에 놓인 내 모니터를 통통통 두드렸다. 발소리가 사무실 안쪽으로 더 가까워질수록 모니터 두드리는 소리도 점차 다급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평범한 회사원의 로망인 깽판을 기필코 오늘 저질러보겠다고 굳게 다짐했기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삐딱하게 앉아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너 뭐니?”
40, 50대쯤 되었을 대표는 다소 건방진 아침 인사에 당황스러운 듯 미간을 팍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팀장도 인사에 대해서는 두 번, 세 번 강조했었다. 사회생활의 기본이 인사라면서, 아무리 바빠도 인사는 꼭 챙기라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실상 팀장뿐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말이다. 아득히 먼 옛날, 골목을 뛰어다니던 어린이 시절에 엄마, 아빠는 어른을 보면 두 손 모아 공손하게 인사를 하라고 분명 나에게 일러줬다. 그걸 몰라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니, 대표의 반응은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아침부터 혼자 끄적인 쪽지를 들고 일어나 대표를 향해 외쳤다.
“어제 대표님이 하도 저를 달달 볶아서 정신 그냥 놔버렸어요! 왜요? 제가 인사를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좀 앉아 있었을 뿐인데 욕을 먹어야 하나요?”
“뭐라고?”
기막혀하는 대표를 보고 나는 일부러 90도로 몸을 접어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됐습니까?”
다소 저돌적인 태도에 대표는 한껏 얼굴을 구기곤 나를 향해 삿대질하더니 주변에 서 있는 팀장과 박 대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게 미쳤나 봐. 얘 왜 이러니?”
나는 그런 대표를 앞에 세워두고 쪽지에 써두었던 문장들을 하나씩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첫 출근 하자마자 거래처에서 감사 나오는 바람에 다들 정신없으셔서 교육도 못 받았어요. 안 대리님, 성 대리님, 민정 씨 퇴사 소식은 전날까지 안 알려주셨고, 인수인계 담당자도 결국 못 뽑아서 당일에 급하게 인수인계 받았고요. ‘알려준 대로만 하면 된다’라고 하셨는데 그 뒤에도 새 프로젝트 백업으로 다 투입시키셨잖아요. 그러셔 놓고 클라이언트들한테는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퇴사자 없는 것처럼 사기나 치고! 꼭 미리 말 안 하고 당장 필요할 때 연락하셔 가지고 ‘그거 해라’, ‘저거 내놔라’ 이렇게 얘기하면 어느 신입이 그걸 다 찾아 내놔요. 제가 신입이지, 신입니까? 전 대표도 아닌데 왜 맨날 대표처럼 생각하고 일하라고 하시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월급은 신입으로 주시잖아요. 저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자식이에요. 우리 엄마, 아빠가 대표님한테 욕먹으라고 낳은 자식 아니라고요. 이 손톱만 한 회사에 들어오면 키워주겠다고 해서 왔더니 맨날 사람 돌려 까기나 하고, 서러워서 아주 못 살겠다고요.”
나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대표의 손을 잡고 따로 준비해 두었던 사직서 봉투를 집어 들어 턱 하니 내놓았다. 대리와 팀장도 나의 돌발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가현 씨, 갑자기 왜 그래요.”
“한 번은 이렇게 해봐야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버틸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그래서 미친 척 좀 해보려고요! 그동안 많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를 멍하게 바라보는 팀장과 대리를 향해 인사를 꾸벅 하고 사무실을 나와버렸다. 짐을 챙길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명함 한 장을 쓰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 시간을 되돌릴지라도 퇴사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다. 힘들게 들어온 직장인데 때려치울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으며 살 수도 없으니 이렇게 마법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때 쿨하게 사표를 던지고 싶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것들을 대표 면전에 하나하나 곱씹어 늘어놓고도 싶었다.
그 사람이 기억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 그저 한번쯤은 꽁꽁 쌓아놓은 응어리를 풀어헤쳐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내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앞으론 이 기억으로 보다 더 담대하게 회사에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만둘 생각이었다면, 조용히 사표를 내놓고 나오면 된다. 허나 아무리 짧게 일했어도 이직할 때 이력서에 이 회사를 적는 이상, 이곳 사람들에게 조금도 밉보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아마 진짜 사표를 내는 순간엔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돌아가기 위해 사달을 낸 셈이다. 명함을 찢고 다시 오늘이 오면 아무 일 없이 회사로 돌아갈 거니까. 다만 나 혼자 간직할 이 기억이 ‘가슴에 하나씩 품고 사는 사직서’를 대신해 줄 테니 앞으로 좀 더 잘 버틸 수 있기를 막연히 바랐다.
아침부터 화려하게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왔지만 멀리 가진 못했다. 알 수 없는 심란함에 사로잡혀 사무실이 있는 가로수길을 종일 헤집고 다녔다. 이토록 핫한 동네에서 일하면서도 나는 여태 출퇴근을 하는 게 전부여서 남들처럼 테라스에서 우아하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새가 없었다. 그동안 창문마저 작은 사무실에 있던 게 억울해서 카페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남들은 어떻게 사나,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도 해보았다. 온종일 생각만 하며 보냈는데도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 고작 몇 주, 출퇴근을 했을 뿐인데 이미 내 몸은 ‘내일이 없던 학생’에서 ‘내일이 있는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 끊이질 않았던 취업 준비생 시절에 비하면, 매일 아침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없이 허무해지기도 했다. 어느덧 골목을 채우던 해가 어둑어둑 저물었다. 바쁘게 일하다 저녁 느지막이 되어서야 찾아온 고요함을 만끽하는 회사원인 양 홀로 여유롭게 앉아 맥주를 마셨다. 돈 낼 걱정 없이 마셔도 되는 술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더 마신 걸까. 정신이 희미해졌다. 마시고 있던 수제 맥주를 쭉 다 들이켜 버리고는 소중히 보관해 온 명함 한 장을 지갑에서 꺼내 들었다. 수화기를 들고 전쟁을 치렀던 어제 아침으로 돌아가길 빌며 눈을 질끈 감고 명함을 쭉 찢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