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첫째 날
이제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두근두근 떨려온다. 투박하고 거대한 회색 사무용 전화기. 그 끄트머리가 빛으로 반짝거리며, 단음으로 이루어진 벨 소리가 사무실을 요란하게 채운다. 아무리 두려운 마음이 몰려온다 해도 저놈의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지만 난 이 사무실의 어엿한 일원이고, 이 전화는 내 자리에 놓여 있으니까.
전화벨 소리를 알아채자마자 작은 화면으로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익숙한 전화번호. 전화를 건 사람이 대표라는 걸 알고 나니 손까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잔소리를 두 배로 들을 필요는 없으니, 정신 차리고 잘하자, 잘! 숨을 한 번 후 내쉬고 수화기로 손을 뻗으며 인사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여보세요?’ 말고, ‘네’ 하고 관등 성명. ‘네’로 받고 관등 성명. 마침내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네, 리얼커뮤니케이션 김가현입니다.”
“박 대리 지금 자리에 없어?”
대표는 앞뒤 설명도 없이 또 박 대리를 찾았다. 연이은 직원들의 퇴사로 대표가 믿을 구석이라곤 입사 후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 대리뿐이었다. 힐끔 그녀의 자리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비어 있는 책상.
“네! 팀장님이랑 미팅에서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견적서 그거 지금 저쪽으로 보내.”
“네?”
분명 방금 전에 한바탕 혼쭐이 난 통화를 마치고 바로 보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그렇다고 그대로 물어봤다가는 또 사달이 날 것 같아 머리를 굴리다 대표에게 되물었다.
“대표님께서 조금 전에 메일로 보내라고 하셔서 대리님이 보냈는데 혹시 수신이 안 되었을까요?”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금 처음 전화했는데!”
분명 방금 보냈는데, 수화기를 들고 메일 보관함을 아무리 찾아봐도 그 메일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지만 티를 내면 한 소리 더 들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아…. 넵, 다시 한번 확인하고 메일 보내겠습니다.”
“보내고 톡 해라.”
“네. 알겠습니….”
대표의 전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앞뒤 인사 없이 자기가 필요한 말만 하고 대답도 듣기 전에 끊어버리는 식. 본인은 항상 이토록 무례하게 통화하면서도 수화기 너머 직원들의 사소한 한마디는 끝까지 따지고 들어 기어이 꼬투리를 잡았다. 전화 때문에 몇 번을 혼이 났는지, 이제 기종에 상관없이 사무실 전화기가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다. 그나저나 박 대리가 보낸 메일은 왜 사라진 걸까. 다시 메일함을 살펴보려고 마우스를 쥐다 그 옆에 찢어진 채로 널브러져 있는 명함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네. 대표한테 한 소리 듣고 욱한 마음에 내가 이걸 찢었구나.’
한숨을 몰아쉬며 힐끔 시계를 봤다. 3시 45분. 응? 45분이면 아까 박 대리가 보낸 메일 확인했을 때인데, 뭐지? 왜 아직도 3시 45분이지? 시간이 되돌아간 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곰곰이 조금 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전화가 울렸고 전화번호 뒷자리를 확인했다. 대표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요즘 대표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아 타박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남을 지적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니 그의 얼굴은 물론 차 번호판, 전화번호 뒷자리만 봐도 오들오들 치를 떠는 상황이었다. 얼마 전엔 벨이 세 번 넘게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혼쭐이 났었기에 그저 전화를 빨리 받을 생각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해 아직 입에 익지 않은 회사 인사말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였지.
“아, 여보세요?”
“아, 여보세에요? 야! 누가 그따위로 전화 받아? 너 누구야?”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 가현입니다.”
“너 전화 받는 법도 모르냐? 내가 월급 주고 기본 매너도 가르쳐야 되냐고! 아, 얘 골 때리는 애네. 전화 하나 똑바로 못 받아?”
“죄송합니다. 저는 대표님 번호를 보고 빨리 받아야 한다 싶어서….”
“대표건 뭐건 간에 회사에 전화가 오면 관등 성명을 똑바로 대야 할 거 아니야! 대표 번호로 오는 전화도 받는 애가 회사 얼굴에 똥칠해도 유분수지. 또 그러면 잘라버릴 줄 알아!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겁을 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에게 일개 직원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무적인 대답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고, 속이 상해도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수 없는 곳이 회사이니.
“박 대리 지금 자리에 없어?”
“어…. 네….”
“넌 뭐 대답을 그렇게 매가리 없이 하냐. 그 지난번에 견적서 그거 지금 저쪽으로 보내.”
“그…. 지난번 견적서…요?”
“아, 얘 말 두 번 하게 만드네. 그 왜 그거 있잖아! 박 대리는 다 잘 알아듣는데 너는 왜 그 모냥이냐!”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멍청이가 되어버리는 곳이 회사라지만 대표와 대화하면 나는 늘 모자란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기준을 채울 수나 있을까? 그냥 애당초 나를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혼내도 기죽지 않을 거 같아서 뽑은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쏟아지는 질문들을 무시하고 그가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스무고개를 하며 정답을 찾았다.
“아, 네. 메일 보내겠습니다.”
그가 원하는 답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는 이미 전화가 뚝 끊겨버린 뒤였다. 나 혼자 끊긴 수화기를 붙들고 잘못했다고, 주의하겠다고 인사를 하는 꼴이라니. 목숨이 오가는 일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까지 혼나야 하나. 억울하기도 하고 욱 하는 마음에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사무실이라는 걸 되새기며 꾹 참았다.
내 모든 센스를 동원해 짐작컨대 이 일은 분명 박 대리의 업무 같았다. 대표가 생각 없이 회사 대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아무 직원에게나 일을 쏟아냈구나 싶었다. 짧은 고민 끝에 수화기를 들어 박 대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곧이어 전화를 받은 그녀에게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상황을 전했다.
“아, 그거 제 컴퓨터에 파일 있는데, 모니터 아래에 패스워드 치고 들어가서….”
한참 설명하던 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해 버렸다.
“그냥 제가 모바일로 보낼게요. 가현 씨도 참조 걸어줄 테니까 수신만 더블 체크 해주세요.”
해결사처럼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메일은 대체 언제 들어오나 싶어 넋 놓고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분명 그때가 3시 45분이었다. 이후 박 대리가 보낸 메일을 보고, 말을 전한 내가 괜히 혼이 나진 않을지 초조한 마음에 앞에 보이는 아무 종이나 집어 말없이 박박 찢었으니까. 막연히 혼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조각조각 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찢어버린 게 하나 언니가 준 명함이었다.
하나 언니와는 광고 동아리에서 만났다. 대학 시절, 동아리 하나쯤 들어가야 꽤 멋있는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는 곳을 하나 골라 들어갔다. 그리고 그 별생각 없던 선택이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평범한 어문학 전공자가 광고 회사에 들어온 것만 봐도 그렇잖아. 하나 언니는 새내기 시절 처음으로 들어갔던 프로젝트의 팀장이었다. 한 학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팀장이라는 모습에 홀려서인지, 아니면 마음먹은 일은 꼭 다 해내고 마는 모습 때문인지, 그 뒤로 언니는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어쩜 저렇게 잘났을까?’ 싶을 정도로 졸업 후에도 일류 광고 회사에 척 하고 입사해서는 여전히 멋지게 사는 언니가 부러웠다. 어느 시절엔 질투를 하기도 했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나의 못난 마음을 풀어보니, 어느 곳이나 그런 뛰어난 인재 하나가 온 사람들 자존감을 깎아먹고 있더라. 어디 하나 구김살 없고 밝아서 주변 사람들을 부러움에 몸서리치게 만드는 그런 사람.
취업 준비를 하는 내내 회사 동기들과 환하게 웃는 사진이 두어 장씩 올라오는 언니의 SNS를 힐끔 염탐하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뭐든 잘하고, 빈틈없이 해내는 사람. 그러다 겨우 취업에 성공해 작은 광고 대행사에서 며칠 동안 고군분투해 보니 결론이 나왔다. 내가 하나 언니처럼 멋진 회사원이 되려면 한참은 걸리겠구나. 학교 다닐 때는 내가 어느 정도 역할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사에 들어와 보니 나는 멍청한 실수나 반복하는 겨우 그런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결론 지어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 오랜만에 만난 언니 앞에서 하소연을 술술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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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거 같아요. 그냥 다 망했어요.”
이미 직무 연차가 꽤 쌓인 언니는 내 회사 생활에 대한 하소연을 들어주며 마냥 귀여워했다. 나한테는 세상 둘도 없이 심각한 일들인데 언니는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거 같아 보였다.
“처음엔 원래 다 그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그랬어.”
“거짓말 하지 마요. 언니는 다 잘 하잖아요. 지난 달 사내 공모전에서도 금상 받았으면서…. 퍽이나 위로가 되네요.”
“그냥 버티면 돼. 까이고 다시 하고, 또 까이고 다시 하고.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올라가 있겠지.”
“성장은 바라지도 않아요. 맨날 실수해서 이렇게 까이는데 버틸 수나 있을지….”
대표에게 핀잔을 들었던 기가 막힌 실수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니 할 말이 사라져 말끝을 더 잇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앞에 놓인 커피 잔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시야에 낯선 물건이 보였다. 언니가 손에 쥔 세 장의 명함.
“실수만 되돌리면 다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언니의 질문을 듣고 생각해 봤다. 사실 지금까지 저지른 실수들은 한 번만 겪고 나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만큼 별것 아닌 일들이었다. 이딴 ‘별것 아닌 실수들’을 지워내면 그래도 꽤 완벽한 신입 사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언니가 던진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명확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했고 언니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지 생각하고 명함을 조각내 찢어봐. 그럼 그때로 돌아가 있을 테니까. 믿든지 말든지 네 마음인데,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세 번뿐이니까 잘 판단해서 써. 알았지?”
언니가 명함을 건네면서 덧붙였던 아리송한 문장이 온전히 이해되진 않았다. 믿지 않았다는 게 더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이걸 준 사람이 ‘장하나’였기 때문에 주머니에 쑥 소중하게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
명함을 받을 때도 언니가 위로하고 싶어서 건넨 시답지 않은 말이라고 여겼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고? 명함을 찢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니. 이게 진짜라니. 무슨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진짜 말도 안 돼!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놀라 딴 생각에 빠져든 잠깐 사이, 고새를 못 참고 전화가 울렸다. 또 대표였다.
“네, 리얼커뮤니케이션 김가현입니다.”
“너 왜 메일 안 보내냐?”
“아, 지금 보내겠습니다.”
“지금 미팅 중이니까 바로 보내. 아, 대행비 2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줄여서 보내라.”
“넵. 알겠습니다.”
다시 뚝 끊겨버린 전화. 잠깐이지만 이럴 때 딴 생각에 빠진 걸 후회하며 마우스를 움켜잡았다. 견적서를 수정해서 보내라는 말이었는데, 견적서라. 나는 우리 회사 견적서를 직접 써본 적은커녕, 본 적도 없는데 수정까지 해서 보내라니. 설상가상으로 모두들 외근 중이어서 사무실에는 나밖에 없었다. 바로 물어볼 데도 없는데 내가 그냥 찾아 수정해서 보내도 되는 걸까. 오만 생각이 가득했지만 더 머리 굴릴 시간이 없었다. 급하다고 하시니 빨리 보내는 게 제일 중요하겠지…?
슬며시 박 대리의 컴퓨터로 다가가 모니터 아래에 적힌 암호를 키보드에 한 글자씩 눌렀다. 바탕화면에는 장황하게 늘어놓은 파일이 가득했다. 여기에서 어디로 들어가야 견적서가 있을지 고민을 하다 파일 검색 기능으로 겨우 원본 파일을 찾아 USB에 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엑셀 파일이니까 숫자만 고치면 되는 거겠지. 뭐 복잡한 수식도 아니니까. 잘 짜인 양식을 찬찬히 읽어보고 하나씩 눌러보며 엑셀에 걸려 있는 수식을 확인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게 아니니, 20퍼센트로 설정되어 있는 대행료 부분이 어딘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손은 왜 이렇게 덜덜 떨리는지, 겨우 키보드를 두드려 숫자를 15로 수정했다. 숫자 20을 15로 바꾸는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긴장해야 할 일인지 싶다가도, 회사에서 멍청한 신입으로 낙인찍히는 것보다는 바짝 긴장을 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더 바꿔야 할 데는 없는지, 숫자를 고쳐서 어그러진 부분은 없는지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확인에, 확인을 거치고 난 후 수정 파일을 저장해 메일에 첨부했다. 깜빡하고 파일을 첨부하지 않은 채 메일을 보냈던 적이 있어서 더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첨부 파일을 확인하고 보냈다. 이제 별일 없겠지. 또 틀린 건 없겠지. 혼날 일 없겠지. 메일을 보낸 뒤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습관처럼 두 손을 모으고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이런 사소한 일에도 이렇게 간절하냐고 묻겠지만, 하도 혼나다 보니 이런 일조차도 대단히 거창하게 느껴졌다. 학생 때는 뭐든 알아서 척척 해냈는데, 회사에서 나는 실수투성이 신입이었다. 더 센스 있게 해내고 싶은데 어쩜 이렇게 모자란 사람이 되었는지. 그렇게 한숨을 쉬는데 책상 한쪽에 놓인 찢어진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쪽에 놓인 똑같은 명함 두 장. 이제 두 번 남은 거구나. 아, 진작 알았으면 좀 값지게 쓰는 건데. 아쉽네.
하지만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해 다른 상상에 빠질 틈이 없었다. 전화벨이 내 가슴을 쿵쿵 때렸다. 전화 받기는 무섭고 그 무서움에 망설이면 더 혼나고. 돌고 도는 굴레를 몇 번 겪고 나니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결론에 도달해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용기를 내 수화기를 들었다.
“네, 리얼커뮤니케이션 김가현입니다.”
“야! 견적서를 누가 엑셀로 보내!”
익숙한 대표의 목소리. 또 탈탈 털리는구나 하고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회사가 견적서를 수정할 수 있는 파일로 보내느냐고. PDF는 폼이야? 문서 변환도 몰라? 4년제 대학은 뭐 하러 다녔고, 뭐 배우고 졸업했냐?”
대표의 피드백을 듣자마자 내 잘못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외부로 나가는 문서는 다른 사람이 수정할 수 없는 형식의 파일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몰랐던 게 문제였다. 나도 할 말은 있다. 누구도 내게 견적서를 보낼 때는 PDF 파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고, 견적서를 주고받는 메일에 참조를 걸어준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다 내 탓이지? 다 내 탓이야. 분명 잘못한 건 알지만, 마음이 오락가락하며 억울함이 밀려왔다.
본 적도 없는 문서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걸 찾아서 보냈는데 그 이상 어쩌라는 거냐. 회사에 누구 하나,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업무를 가르쳐준 적이 있었느냐는 말이다. 익숙해지기도 전에 줄줄이 퇴사하는 선배들의 일을 떠안아 막아내느라 얼마나 바빴는데. 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회사는 어쩜 이렇게 나한테 모진 걸까. 그렇다고 지금 하소연을 내뱉을 수는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대표 잔소리를 듣고 견디는 것뿐. 여긴 학교가 아니니까. 최선을 다한다는 건 의미가 없지. 잘해야 했는데 못했으니까. 그래, 그냥 다 버티는 수밖에.
“사무실에 아직도 아무도 없어?”
“네….”
“아니 다들 뭐 기어 오는 거야?”
“죄송합니다.”
“박 대리 오면 제대로 수정해서 다시 보내.”
이번에도 어김없이 뚝 끊겨버린 전화. 그리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울렸다.
“네, 대표님. 김가현입니다.”
“됐고, 지금 미팅 때 볼 거니까, 그냥 5분 내로 보내라.”
이 말을 시작으로 대표는 어리숙한 내 업무 능력을 못 믿겠는지 처음엔 10초, 20초에 한 번씩 전화해 내용을 한 줄씩 확인하고 수정을 지시했다. ‘이제는 괜찮겠지’란 생각이 들 때쯤에는 1분 간격으로 다시 전화를 해댔다. ‘언제 보낼 거냐’, ’아직도 안 끝났냐’부터 ‘넌 왜 일을 그렇게 하냐’ 등 잔소리마저도 한 번에 몰아서 하지 않았다. 전화했다가 다시 끊었다가 다시 전화했다. 연이어 전화해대는 통에 오히려 요청했던 수정 사항을 하나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망할 놈아, 네가 전화를 끊어야 시킨 대로 수정해서 빨리 보낼 거 아니야. 다그치지 말고 닥치란 말이야!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음속 롤러코스터를 대여섯 번쯤 타고 다시 탑승할 때쯤, 외근 갔던 팀장과 박 대리가 사무실에 돌아왔다. 회사에서 그나마 가장 마음을 터놓고 친해진 박 대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주르륵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고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쪼르륵 달려갔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자마자 ‘엄마!’라고 외치며 달려가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저, 대리님. 대표님이 견적서 수정 요청하셨는데 한번 검토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견적서요?”
의아한 듯 나를 보는 박 대리에게 몇 분 동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녀는 픽 하고 웃어넘기고 옆자리 스툴을 당겨 앉으라 말했다. 자리에 앉고 딱 5분이 걸렸다. 회사 공통 서식 폴더를 공유해 주고, 어떻게 쓰고, 수정하고, 저장하는지, 회사 주요 거래처에는 누가 있는지 하나하나 짚어주는 데 고작 5분. 어쩌면 더 짧게 끝낼 수 있는 설명인데 이 간단한 설명을 미리 해주지 않아서 이 사달이 생기다니. 아니지. 내가 애당초 묻지 않아 생겨버린 일인가?
회사 일이라는 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물어봐야 하는 걸까. 10년이 넘도록 학교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어디서도 회사에서 눈치껏 살아남는 법은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시작은 ‘어떻게 해야 잘 버틸 수 있을까?’였지만 오만가지 생각을 돌다가 결국엔, ‘내가 회사라는 조직에 맞는 사람이긴 할까?’라는 데 다다랐다. 이런 온갖 잡생각을 남은 명함 두 장과 함께 가방에 욱여넣고 겨우 퇴근길에 올랐다. 진이 쏙 빠진 하루. 정말 싹 다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 하루. 다시 되돌렸으면 좋겠다. 오늘 딱 하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