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건 여전하지 만.
“그러게. 꽤 늘었네.”
“후후. 물을 많이 마시니까 조금 낫더라고요. 노하우가 생겼다고 할 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 니 말했다.
“삶을 살아보다 보니 부족한 부분 에서 노하우가 늘더라고요. 인간적 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 까…… 세상을 보는 시선도 점점 달 라지고 있고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내게 시 선을 떼곤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눈치도 빨라졌어요. 특히 가까운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보면 이 사람 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보이기도 해 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의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내 밤하늘을 올려보던 그녀의 시 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무언가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거 죠?”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미묘하게 달랐던 내 행동과 태도를 보고 이상함을 눈치챈 모양 이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씁쓸 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속일 수 없네.”
최서윤의 두 눈이 불안감으로 떨렸 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삑삑삑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실내.
거실 바닥에 대자로 잠을 자던 그 레텔이 소리에 깬 듯 몸을 움직였 다.
“......응애?”
“미안. 깼어?”
“응애......
그레텔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다가 오더니 반기는 듯 내 다리를 껴안았 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그레텔의 딱딱 한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피곤하지? 자고 있어.”
“응애……
그레텔은 금세 꿈나라로 떠났다.
거실 내부가 다시 고요해지고, 무 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술기운과 함께 올라오는 피로감.
육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린 것 같았다.
몸올 던지듯 소파에 앉고는 아까 있었던 최서윤과의 일을 떠올렸다.
—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내 의지와는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 지고 있다.
겨우 이 세계에 정착할 마음이 생 겼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고, 고향의 친구 들 역시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와 고향. 두 세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간 두 세계를 연결할 방법을 찾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간도 이제는 한 달밖 에 남지 않았다.
“이게 내 운명이라는 건가……
진천우가 왜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런 짓들을 벌였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나는 다시 작게 숨을 내쉬곤 소파 에 등을 기댔다.
가만히 눈을 감자 아까 전, 최서윤 이 보였던 슬픈 눈빛이 다시 떠올랐 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 다.
그저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차분히 상황 을 설명했고, 탄식했지만 끝내 수긍 했다.
—선배님, 다른 분들에게도 이 상
황을 말씀드려요. 그분들에게도 준 비할 시간은 줘야죠.
“……준비할 시간이라.”
그녀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 이별을 회피하고 숨길 순 없는 거니까.
다음 날 점심.
최서윤의 도움으로 나는 협회 근처
의 커피숍에서 어제 함께 자리에 있 었던 모두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의문을 느낀 이 들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웬일이래? 갑자기 네가 우리를 다 부르고.”
신영준의 물음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너희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거 드 ”
“해줘야 할 말?”
자칫 진중한 내 분위기가 이상했는 지 모두의 표정에 불길함이 담겼다.
“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뭐?”
순간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 지 못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그들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하영은 잠시 괴로운 얼굴을 하다 가 입을 열었다.
“가족 때문인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어.”
“중요한 이유?”
모두의 물음에 나는 차분하게 이야 기를 시작했다.
“진천우가 죽고 남겼던 돌. 기억하 지? 그 안에는 진천우의 기억이 담 겨 있었어.”
“그게 진천우의 기억이었다고?”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보았 던 것들과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홀러, 모든 이야기 가 끝났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윤하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네가 존재하면 안 된다는 거 야?”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올바르게 수정되 는 과정에서 내가 없어야 한다는 거 지.”
“결국 그게 그거잖아.”
윤하영이 슬픔을 담아 말했다.
“맞아. 그게 그 말이긴 하지.”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에 모두가 괴
이서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지?”
“응. 아마도.”
“하아…… 그래서, 언제 고향으로 떠날 생각인데?”
“약 3주 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 거든.”
“3주라……
이서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3주. 애매한 시간이다. 길지도 짧 지도 않은.
한참 생각에 잠기던 이서준이 고개 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여행이나 가자. 마지막 추억은 쌓아야 할 거 아니야? 휴가 야 앞당기면 그만이고.”
“마지막 추억......
그 말이 슬프게 들렸는지 윤하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다음 주. 어디든 놀러 가자. 마지막 추억을 위해서.”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든다.
최서윤의 조언대로 하루라도 빨리 모두에게 설명한 것이 옳았던 것 같
나는 슬픔을 느끼는 모두를 위해 억지로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역효과였는지 그들의 얼굴 에 담긴 슬픔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맞은 편에 앉은 최서윤과 눈 이 마주쳤다.
그녀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씁 쓸해 보였다.
마법사관학교의 친구들과 헤어지고
이번에는 8()1의 동료들, 그리고 하 령과 선화를 만났다.
8()1의 사무실.
1년 만에 만났지만,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혼돈. 건강해 보이는구나!”
가장 먼저 구미호가 친근하게 인사 를 건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야기 들었어. 진천우 토벌 공로 로 협회에서 시민권을 얻었다며?”
“그렇다. 덕분에 자유를 얻었지만 평생 감시당하는 신세가 되었지. 뭐, 나는 만족한다. 인간 세계는 아주 즐겁거든. 흐흐.”
듣기로는 한세연에게 이것저것 지 원을 받아 꽤 호화롭게 살고 있다고 하는데 재앙급 마수가 저렇게 지내 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긴 하 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천우의 죽음 이후 8()1은 해체됐 지만 다들 각자 잘 지내는지 얼굴이 좋아 보였다.
한지원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 니 말했다.
“그런데 대장님. 무슨 일로 갑자기
호출하신 겁니까?”
한지원의 물음에 모두가 의문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그 사 이에 있는 한세연과 눈을 마주쳤다.
내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 지 한세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 다.
“모두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서.”
“……전할 말?”
엘린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건 모두
알고 있지?”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정착하기로 했다는 이야기 는 들었는데. 그건 갑자기 왜?”
엘린의 물음에 침착하게 말했다.
“사정이 생겨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어. 아마 3주 정도 뒤에.”
“……왕이시여?”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선화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당혹으로 물 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이전처럼, 나는 그들에게 내 상황 을 설명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두 눈이 떨렸다.
이들과는 오랜 시간 함께하진 않았 지만 그래도 생사 걸고 함께 싸워온 동료였다.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여기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 말 없는 한세연 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괴로운지 얼굴을 한껏 찡그
나는 깊은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이 세계에서 떨어지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가장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
그녀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밖 에 없었으니까.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던 나를, 의 심하지 않고 언제나 믿어주었으니 까.
유..으 «
.."X*
그때 한세연의 두 눈에 물기가 차 오르기 시작했다.
꾹꾹 누르고 있던 그녀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아주었다.
3일의 시간 동안 나는 이별을 위 한 준비를 했다.
소식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고, 그들에게도 내 사 정을 설명했다.
김진철과 최일현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역시 많이 아쉬운 반응을 보 였지만 남은 3주. 내가 떠나지 않고 파멸을 막아낼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선언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진천우의 기억을 흡수한 나는, ‘차 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 니까.
……그리고.
오늘 나는 포탈 게이트를 타고 노 르웨이 어딘가의 숲에 도착했다.
숲의 공기를 마시며 자연의 마나를
잠시 느끼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텐 데.”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을 밟으며 길을 걷던 중, 어떤 부자연스러운 기류를 발견했다.
외부자의 혜택을 발동하자 안에 담 긴 결계 술식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나는 곧바로 결계를 풀어냈다.
동시에 결계가 일그러지더니 숨겨 져 있던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이거네.”
결계 안에는 덩굴과 이끼가 낀 낡 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가 가득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 다.
그 순간.
파지지직!
갑작스러운 살기와 함께 마력이 나 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빠르게 순간 가속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공격을 피해낸 나는 공격 한 자의 팔을 잡아챘다.
“큭!”
이어서 뒤에서 방출되는 전기의 마 법.
나는 한 손을 펼쳐 장막을 펼쳤다.
콰앙!
“야야. 그만해. 집 무너지겠다.”
내 말에 내 앞에 선 ‘누군가’의 눈 이 크게 떨렸다.
“……김선우?”
“오랜만이네. 여기서 숨어 지내고
있었나 보네?”
내게 잡힌 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타샤였다.
그리고 내 뒤에 선 베르트는 경계 하는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김선우. 여길 어떻게?”
나는 나타샤를 풀어주고는 손가락 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진천우의 기억을 얻게 되었거든. 그걸 따라서 오게 됐지.”
“그분의 기억을?”
그러더니 그녀가 이해한 듯 입을 벌렸다.
“……소수 일족의 능력이군.”
“맞아. 역시 눈치가 빠르네.”
내게서 떨어진 나타샤는 경계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곳엔 왜 쳐들어온 거 지‘?”
“경계할 필요 없어. 너희를 노릴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이들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속한 이상 건들 생각도 없다.
진천우가 소멸되었으니 이상한 짓 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