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9화 (528/535)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건 여전하지 만.

“그러게. 꽤 늘었네.”

“후후. 물을 많이 마시니까 조금 낫더라고요. 노하우가 생겼다고 할 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 니 말했다.

“삶을 살아보다 보니 부족한 부분 에서 노하우가 늘더라고요. 인간적 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 까…… 세상을 보는 시선도 점점 달 라지고 있고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내게 시 선을 떼곤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눈치도 빨라졌어요. 특히 가까운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보면 이 사람 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보이기도 해 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의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내 밤하늘을 올려보던 그녀의 시 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무언가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거 죠?”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미묘하게 달랐던 내 행동과 태도를 보고 이상함을 눈치챈 모양 이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씁쓸 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속일 수 없네.”

최서윤의 두 눈이 불안감으로 떨렸 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삑삑삑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실내.

거실 바닥에 대자로 잠을 자던 그 레텔이 소리에 깬 듯 몸을 움직였 다.

“......응애?”

“미안. 깼어?”

“응애......

그레텔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다가 오더니 반기는 듯 내 다리를 껴안았 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그레텔의 딱딱 한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피곤하지? 자고 있어.”

“응애……

그레텔은 금세 꿈나라로 떠났다.

거실 내부가 다시 고요해지고, 무 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술기운과 함께 올라오는 피로감.

육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린 것 같았다.

몸올 던지듯 소파에 앉고는 아까 있었던 최서윤과의 일을 떠올렸다.

—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내 의지와는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 지고 있다.

겨우 이 세계에 정착할 마음이 생 겼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고, 고향의 친구 들 역시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와 고향. 두 세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간 두 세계를 연결할 방법을 찾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간도 이제는 한 달밖 에 남지 않았다.

“이게 내 운명이라는 건가……

진천우가 왜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런 짓들을 벌였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나는 다시 작게 숨을 내쉬곤 소파 에 등을 기댔다.

가만히 눈을 감자 아까 전, 최서윤 이 보였던 슬픈 눈빛이 다시 떠올랐 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 다.

그저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차분히 상황 을 설명했고, 탄식했지만 끝내 수긍 했다.

—선배님, 다른 분들에게도 이 상

황을 말씀드려요. 그분들에게도 준 비할 시간은 줘야죠.

“……준비할 시간이라.”

그녀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 이별을 회피하고 숨길 순 없는 거니까.

다음 날 점심.

최서윤의 도움으로 나는 협회 근처

의 커피숍에서 어제 함께 자리에 있 었던 모두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의문을 느낀 이 들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웬일이래? 갑자기 네가 우리를 다 부르고.”

신영준의 물음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너희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거 드 ”

“해줘야 할 말?”

자칫 진중한 내 분위기가 이상했는 지 모두의 표정에 불길함이 담겼다.

“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뭐?”

순간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 지 못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그들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하영은 잠시 괴로운 얼굴을 하다 가 입을 열었다.

“가족 때문인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어.”

“중요한 이유?”

모두의 물음에 나는 차분하게 이야 기를 시작했다.

“진천우가 죽고 남겼던 돌. 기억하 지? 그 안에는 진천우의 기억이 담 겨 있었어.”

“그게 진천우의 기억이었다고?”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보았 던 것들과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홀러, 모든 이야기 가 끝났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윤하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네가 존재하면 안 된다는 거 야?”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올바르게 수정되 는 과정에서 내가 없어야 한다는 거 지.”

“결국 그게 그거잖아.”

윤하영이 슬픔을 담아 말했다.

“맞아. 그게 그 말이긴 하지.”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에 모두가 괴

이서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지?”

“응. 아마도.”

“하아…… 그래서, 언제 고향으로 떠날 생각인데?”

“약 3주 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 거든.”

“3주라……

이서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3주. 애매한 시간이다. 길지도 짧 지도 않은.

한참 생각에 잠기던 이서준이 고개 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여행이나 가자. 마지막 추억은 쌓아야 할 거 아니야? 휴가 야 앞당기면 그만이고.”

“마지막 추억......

그 말이 슬프게 들렸는지 윤하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다음 주. 어디든 놀러 가자. 마지막 추억을 위해서.”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든다.

최서윤의 조언대로 하루라도 빨리 모두에게 설명한 것이 옳았던 것 같

나는 슬픔을 느끼는 모두를 위해 억지로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역효과였는지 그들의 얼굴 에 담긴 슬픔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맞은 편에 앉은 최서윤과 눈 이 마주쳤다.

그녀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씁 쓸해 보였다.

마법사관학교의 친구들과 헤어지고

이번에는 8()1의 동료들, 그리고 하 령과 선화를 만났다.

8()1의 사무실.

1년 만에 만났지만,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혼돈. 건강해 보이는구나!”

가장 먼저 구미호가 친근하게 인사 를 건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야기 들었어. 진천우 토벌 공로 로 협회에서 시민권을 얻었다며?”

“그렇다. 덕분에 자유를 얻었지만 평생 감시당하는 신세가 되었지. 뭐, 나는 만족한다. 인간 세계는 아주 즐겁거든. 흐흐.”

듣기로는 한세연에게 이것저것 지 원을 받아 꽤 호화롭게 살고 있다고 하는데 재앙급 마수가 저렇게 지내 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긴 하 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천우의 죽음 이후 8()1은 해체됐 지만 다들 각자 잘 지내는지 얼굴이 좋아 보였다.

한지원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 니 말했다.

“그런데 대장님. 무슨 일로 갑자기

호출하신 겁니까?”

한지원의 물음에 모두가 의문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그 사 이에 있는 한세연과 눈을 마주쳤다.

내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 지 한세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 다.

“모두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서.”

“……전할 말?”

엘린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건 모두

알고 있지?”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정착하기로 했다는 이야기 는 들었는데. 그건 갑자기 왜?”

엘린의 물음에 침착하게 말했다.

“사정이 생겨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어. 아마 3주 정도 뒤에.”

“……왕이시여?”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선화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당혹으로 물 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이전처럼, 나는 그들에게 내 상황 을 설명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두 눈이 떨렸다.

이들과는 오랜 시간 함께하진 않았 지만 그래도 생사 걸고 함께 싸워온 동료였다.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여기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 말 없는 한세연 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괴로운지 얼굴을 한껏 찡그

나는 깊은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이 세계에서 떨어지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가장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

그녀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밖 에 없었으니까.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던 나를, 의 심하지 않고 언제나 믿어주었으니 까.

유..으 «

.."X*

그때 한세연의 두 눈에 물기가 차 오르기 시작했다.

꾹꾹 누르고 있던 그녀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아주었다.

3일의 시간 동안 나는 이별을 위 한 준비를 했다.

소식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고, 그들에게도 내 사 정을 설명했다.

김진철과 최일현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역시 많이 아쉬운 반응을 보 였지만 남은 3주. 내가 떠나지 않고 파멸을 막아낼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선언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진천우의 기억을 흡수한 나는, ‘차 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 니까.

……그리고.

오늘 나는 포탈 게이트를 타고 노 르웨이 어딘가의 숲에 도착했다.

숲의 공기를 마시며 자연의 마나를

잠시 느끼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텐 데.”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을 밟으며 길을 걷던 중, 어떤 부자연스러운 기류를 발견했다.

외부자의 혜택을 발동하자 안에 담 긴 결계 술식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나는 곧바로 결계를 풀어냈다.

동시에 결계가 일그러지더니 숨겨 져 있던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이거네.”

결계 안에는 덩굴과 이끼가 낀 낡 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가 가득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 다.

그 순간.

파지지직!

갑작스러운 살기와 함께 마력이 나 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빠르게 순간 가속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공격을 피해낸 나는 공격 한 자의 팔을 잡아챘다.

“큭!”

이어서 뒤에서 방출되는 전기의 마 법.

나는 한 손을 펼쳐 장막을 펼쳤다.

콰앙!

“야야. 그만해. 집 무너지겠다.”

내 말에 내 앞에 선 ‘누군가’의 눈 이 크게 떨렸다.

“……김선우?”

“오랜만이네. 여기서 숨어 지내고

있었나 보네?”

내게 잡힌 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타샤였다.

그리고 내 뒤에 선 베르트는 경계 하는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김선우. 여길 어떻게?”

나는 나타샤를 풀어주고는 손가락 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진천우의 기억을 얻게 되었거든. 그걸 따라서 오게 됐지.”

“그분의 기억을?”

그러더니 그녀가 이해한 듯 입을 벌렸다.

“……소수 일족의 능력이군.”

“맞아. 역시 눈치가 빠르네.”

내게서 떨어진 나타샤는 경계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곳엔 왜 쳐들어온 거 지‘?”

“경계할 필요 없어. 너희를 노릴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이들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속한 이상 건들 생각도 없다.

진천우가 소멸되었으니 이상한 짓 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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